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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때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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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학남 [obbji] 쪽지 캡슐

2004-10-27 ㅣ No.3707

  


하느님의 뜻과 인간의 생각은 다르다. 열심히 착하게 사는데도 애매하게 맞을 때가 있다. 하느님께서 특별히 사랑하시기 때문에, 특별히 기대하시기 때문에 때리신다. “하느님께선 사랑하는 자를 견책하시고 아들로 여기시는 자에게 매를 드신다.”(히브 12,6) 하느님의 견책을 받지 못한다면 서자이지 참 아들이 아닙니다. 우리는 능력 있고 믿을 수 있는 자녀에게 일을 시킵니다. 따라서 자기가 어떤 일을 부여 받고 있다는 것은 그 만큼 인정 받고 있다는 것이고 능력이 있다는 것입니다. 왜 시킵니까? 시킬 만 하니까 시키고 애정이 있으니까 시킵니다. 하느님께서는 당신이 믿고 사랑하는 자녀로 하여금 십자가를 함께 짊어지기를 원하십니다. 사실 사랑하는 사람은 아픔을 나누고 싶어하며 일을 서로 나누고 싶어합니다. 하느님께서도 아무에게나 일을 시키지 않습니다. 흔한 말로 괜찮은 사람, 예쁜 사람에게 시킵니다. 능력이 큰 사람에겐 큰 십자가를 주시고 능력이 작은 사람에겐 작은 십자가를 맡깁니다. 고통이 주어지고 십자가를 주는 것은 하느님께서 사랑하시고 믿고 능력을 기대하시기 때문입니다.

사랑 받는다는 것은 고달픈 것입니다. 왜 고통, 눈물이 주어지는가? 하느님께서 사랑하시기 때문이며 믿으시기 때문입니다. 사랑을 떠나선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구약 “욥”기에 보면 욥만큼 착한 사람도 없었습니다. 사탄이 시기해서 훼방을 놓아 10명의 자녀를 잃고 모든 재산을 잃고 자신도 나병이 결려 비참한신세가 됩니다. 그는 아무 잘못도 없고 올바르게 산 죄 밖에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받는 고통도 사탄의 시기 때문에 오는 것이 많습니다. 애매하게 얻어 맞는 것은 다 하느님의 사랑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사탄이 시기할 만큼 하느님께서 특별히 사랑하시기 때문입니다. “십자가의 길 5처”에 시몬이 십자가를 짊어진 것은 재수가 없어, 일진이 사나워 수 많은 사람 중에서 걸린 것입니다. 자기도 모르게 짊어진 십자가 때문에 많은 칭송을 받게 되었고 은혜를 받았습니다. 우리도 이유도 모르면서 짊어지는 십자가, 고난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그러나 우리가 억지로라도 짊어지면 무한히 큰 은혜가 되고 상상할 수 없는 축복이 됩니다. 십자가는 원래 저주였습니다. 망신이며 불행입니다. 전생의 죄가 많아, 팔자가 사나와 맞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 스스로 십자가를 짊어짐으로서 우리가 받을 저주를 몽땅 가지고 가고, 혼자 뒤집어 쓰셨기 때문에 십자가는 더 이상 저주가 아닙니다.

어떤 왕이 있었는데, 이 때 너무나 질서가 없고 기강이 문란해 엄한 법을 선포해 “간음하는 자는 두 눈을 뽑아버리겠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하나 밖에 없는 왕자가 법을 어겨 여러 날 고민하다가 결단을 내렸습니다. 왕자에게서 눈 하나를 뽑고 하나는 자신의 것을 뽑았습니다. 그렇게 해서 밖으로는 나라의 법을 지켰고 안으로는 아버지와 아들의 정을 이었습니다. 이 소식을 들은 백성들은 큰 감명을 받아 애꾸눈이 된 왕이 너무도 자랑스럽고 존경스러웠습니다. 내력을 모르는 사람에게는 웃음거리였습니다. 그러나 백성들에게는 백성들에 대한 사랑이요 아버지의 극진한 사랑이었지요. 하지만 다른 이에게는 눈 하나가 없는 병신이었기 때문입니다. 십자가는 바로 그런 의미입니다. 십자가는 하느님께서 친히 저주의 고통을 짊어지신 하느님 사랑의 최고의 표현입니다. 십자가를 모르는 사람에겐 십자가가 한낱 웃음거리에 지나지 않지만 신앙인들에게는 빛나는 은혜요 축복인 것입니다. 예수께서는 자신이 반드시 예루살렘에 올라가 원로들과 대사제들과 율법학자들에게 많은 고난을 받고 그들의 손에 죽었다가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날 것임을 알려 주셨습니다. 베드로가 ‘주님, 안됩니다. 결코 그런 일이 있어서는 안됩니다.’ 하고 말하자 예수는 ‘사탄아, 물러가라. 너는 나에게 장애물이다. 너는 하느님의 일은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만을 생각하는구나!’ 하고 꾸짖으셨습니다. 이러한 베드로의 사고가 우리의 걸림돌입니다.

진주가 만들어지는 과정은 이렇습니다. 바닷가에 사는 조개 안에 어떤 이물질이 들어갑니다. 조개는 처음에 그것을 밖으로 내보내려 애쓰지만 그 이물질을 밖으로 내 보내지 못할 때 그 이물질을 내면의 액으로 조개는 감싸줍니다. 움직일 때마다 거추장스럽고 성가시지만 그럴 때마다 사랑의 액으로 그 이물질을 감싸주고 감싸줍니다. 그러다 보면 조개가 자라면서 그 혹도 커지게 됩니다. 이것은 사람으로 치면 일종의 암입니다. 어쩌면 담석이나 결석과도 같은 것입니다. 굉장한 고통을 주고 평생을 괴롭힙니다. 그러나 힘들 때마다 사랑으로 감싸고 인내로서 참고 견딜 때 조개는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아름다운 진주를 만들고 간직하여 사람에게 선사하게 됩니다. 안타까운 것은 조개가 그 찬란한 진주를 만드는 줄을 평생 모른다는 것입니다. 그저 팔자 사납다는 생각으로 주어진 운명을 묵묵히 걸어 갈 뿐입니다. 그러나 바로 그러한 인고의 길에서 자기보다 수백, 수천 배의 가치가 있는 진주를 간직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조개 자체는 별 의미가 없습니다. 진주 때문에 조개는 엄청난 의미를 가지게 된 것입니다.

우리도 마찬가지 입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고통을 참고 견디면서 신앙과 애정으로 이길 때마다 우리도 모른 사이에 아름다운 진주를 만들어서 하느님께 봉헌하는 것입니다. 아니 진주보다 더 아름다운 보물을 하느님 대전에 바치게 됩니다. 억울하게 흘렸던 눈물은 보석이요, 참았던 아픈 가슴은 장미나 백합이 됩니다. 그걸 모른다면 신앙의 기쁨은 존재할 수 없습니다. 그 때 원로들 가운데 하나가 “흰 두루마기를 입은 이 사람들은 도대체 누구이며 또 어디에서 왔습니까?” 하고 나에게 물었습니다. “저 사람들은 큰 환란을 겪어낸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어린 양이 흘리신 피에 자기들의 두루마기를 빨아 희게 만들었습니다.”(묵시 7,13-14)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지고 허덕이는 사람은 다 나에게로 오너라. 내가 편히 쉬게 하리라.”(마태 11,28) “너희가 사람의 아들을 높이 들어올린 뒤에야 내가 누구라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또 내가 아무 것도 내 마음대로 하지 않고 아버지께서 가르쳐 주신 것만 말하고 있다는 것도 알게 될 것이다.”(요한 8,28)

이처럼 예수님의 진정한 가치가 십자가에 있었듯이 우리 가치도 바로 우리에게 주어진 십자가 위에서 발견하게 됩니다. 마치 조개의 놀라운 가치가 그 진주에 있듯이 사람의 참된 가치도 십자가에 있는 것입니다. 괴롭다고 해서 불행한 것이 아니며 힘들다 해서 실망해서도 안됩니다. 모든 고통에는 다 소중한 뜻이 있습니다. 공연히 하느님이 찌르고 때리시는 것이 아닙니다. 묘한 것은 십자가가 아무리 무거워도 일단 짊어지면 가볍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전봇대처럼 커 보여도 용기를 갖고 짊어지면 나무 젓가락같이 가볍게 됩니다. 뿐만 아니라 우리가 십자가를 짊어지면 이상하게 인생이 가벼워 집니다. 왜냐하면 그 십자가가 나를 짊어져주기 때문입니다. 거짓말 같지만 사실입니다. 내가 십자가를 짊어지면 오히려 십자가가 나를 짊어져 줍니다.

하느님께서는 당신이 사랑하는 자에게 매를 드시고 또 당신이 사랑하는 자를 시험하십니다. 뿐만 아니라 하느님은 당신이 믿으시고 사랑하는 자에게 당신의 십자가를 함께 짊어지고 가시기를 원하십니다. 십자가는 절대로 수치가 아니며 또 벌이나 저주도 아닙니다. 우리가 꼭 짊어져야 할 은혜의 도구입니다. 여러분에게 주어진 십자가는 무엇입니까? 무엇이 여러분의 인생을 병들게 합니까? 십자가를 은혜로 받아들이고 짊어 지십시오. 무거운 짐을 벗을 것입니다. 그리고 부활의 놀라운 은총이 바로 거기에서 나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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