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곡동성당 게시판

언제나 이방인(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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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근수 [seopius] 쪽지 캡슐

1999-11-11 ㅣ No.378

그리스도 우리의 평화

 

아! 참! 제목에 대한 설명을 안했군.

이방인이라 하면 흔히 말하는 ’왕따’를 의미하는 것 같지만 사실 그런 뜻으로 쓴 것은 아니다.

 

어느 사람이건 자신이 원해서 태어난 사람은 없다.(물론 원하지 않았다고도 말할 수도 없지만) 또한 원해서 죽는 사람도 없다.(자살은 예외로 하고) 사람은 세상에 태어나는 순간부터 살아가야만 하는 존재로 머문다. 누군가는 ’세상 속으로 내쳐진다’라고 표현하기도 한다.

산다는 것 자체가 내가 의식하기도 전에 나에게 주어져 있다. ’이방인’의 저자인 까뮈는 이런 식으로 표현한다. ’존재로 부터 이미 주어진 삶에로 내쳐져 있는 인간은 모순의 극과극 속에서 부조리를 느끼며, 거부할 수도 수용할 수도 없는 삶의 줄다리기 속에 놓여져 있다. 할 수 있는 것은 그저 의식할 뿐이며, 느낄 수 있는 것은 부조리이며, 수용할 수 있는 것은 긴장일 뿐이다.’(내 주관적인 해석도 덧 붙여 놓았다. - 사실 까뮈가 이러한 표현을 했는지도 의심스럽게 들려 온다)

여하간 삶과 죽음의 긴장선 안에서 내쳐져 있는 인간은

그 원초부터(선험적으로) 세상 속에서 이방인으로 머무는 것이다.

 

이러한 의미와 함께 ’나그네인 교회안에서 사는 신앙인’으로서의 해석도 함께 생각해 볼 수 있겠다. 교회는 일직선 상의 역사관을 지니고 있다. 하느님의 창조에서 부터 하느님 나라가 도래하는 예수님의 재림까지. 그렇기에 신앙인은 하느님의 나라가 오기까지는 멈추어 설 수 없는 나그네로서의 행보를 계속해야만 하는 것이다.

이는 ’사회주의가 최선이다. 자본주의가 최선이다. 수정 자본주의가 최선이다’라는 이데올로기의 탈피를 요구한다. 또한 물량적인 발전 속에 안주와 매너리즘 또한 거부한다. 오직 하느님 나라를 향한 끊임없는 비판과 변혁 도상의 여정만을 인정할 뿐이다. 역사는 완성을 지향하는가? 자문해 본다. 또한 무엇이 완성인가?도 자문한다.

 

현실 속의 나는 살아가는 이로써만 세상에 머문다.(탄생도 죽음도 내 기억속에 없을 테니까) 하느님 나라의 씨앗은 자라는 곳에 있을 뿐이다. 음 갑자기 피곤이 밀려오는군. 무슨 얘기를 할려는 것인지 모르겠다. 여하튼 시간의 흐름 속에 살아가고 있는 나 자신에게 있어, 역사의 완성의 순간은 찰나적인 의미를 부여할 뿐이고, 나는 그것에 내 생의 것들을 투신해야만 하는데 그 자체를 수용한다는 것은 ’시간의 이방인’일 수밖에 없음을 인정해야만 한다는 것이다.

 

’언제나 이방인’이라는 의미는 많은 것을 함축하고 있다. 인간학적이고 존재론적인 의미와 함께 미래지향적인 삶의 자세가 부여되어 있고, 이것에 덧붙여 자연의 순리에 따라가야만 하는 인간의 도리 또한 포함한다. 어떻게 보면 가치중립적이며 도피적이며 염세적인 뉘앙스를 띠기도 하지만 그러한 의미 이기 보다는 실존의 현상이며, 수용되어져야만 하는 삶의 자세이며, 적극적으로 표현하자면 하느님의 나라를 향한, 또는 진리를 향한 길임을 나 자신은 믿고 있다.

 

월곡동에서의 나를 이야기 하자. ’한 손가락으로 진리를 가리키며 그것이 전적으로 옳으니 따라와라’이야기 해야 하나, 물론 그러면 안된다. 나는 월곡동에서 아니 지상위에서 머물다 언제가는 가야만 하는 사람이다.

진리는 가치등가적으로 한 계단 한 계단 밟아 나아갈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너는 백미터 왔으니 천미터 더 많이 온 나를 본 받아야만 한다고 이야기 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란 말이다)

진리는 각 자가 받아 들이는 그릇에 따라, 스타일과 성향에 따라 그 맛과 멋과 향과 모양과 그 크기를 달리 한다.

또한 시간의 흐름에 따라 각자의 내면의 완성의 척도에 따라 다를 수 있기 때문에 절대적인 무엇으로 자신의 진리를 이웃에게 전할 수 있다는 것은 자가당착이다. 그렇기 때문에 내가 대하는 모든 사람에게 있어 보일 수 있는 것은 섞일 수도 없고, 그렇다고 내것으로 끌어 들일 수도 없으며, 나 또한 끌려 갈 수도 없는 이방인의 모습인 것이다. 하지만 더불어 함께 하는 것, 그리고 대화는 이 간격을 좁힐 수 있고, 또한 그렇게 할 때 더 나은 그 무엇으로 나아갈 수 도 있다는 것도 명심해야 한다(나 자신에게 하는 말이다.) 여하간

하느님의 거대한 줄기는 내 자신의 어떠한 반역행위로도 어떠한 긍정적인 노력으로로 변할 수 없다. 경험의 흔적으로 살아가는 삶의 편린들만을 남겨가는 이방인으로서의 노력만이 필요할 뿐이다.

 

’회자정리 거자필반’이라고 했다. 왔으니 가야만 한다.(삶 전체에 통용될수 있는 말인 것 같다.) 나 자신에게서도, 세상 속에서도, 사람 속에서도, 시간의 흐름 속에서도, 역사의 도정에서도, 변화 그 자체에서도...

나는 ’언제나 이방인’이다.

 

- 추신 : 휭설수설 하고 있는 것 같다. 하고 싶은 말은 많고 문장력은 짧고 할 수 없지. 개떡같이 말하면 찰떡같이 알아든는 읽는 이들의 너그러운 마음에 호소할 뿐이다. 연합회장의 말 너무나 고맙고, 앞으로 이 제목으로 간간히 더 올릴테니 고맙게 읽어주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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