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일강론

부활 제2주간 토요일 ’22/04/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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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흥보 [peters1] 쪽지 캡슐

2022-04-12 ㅣ No.5005

부활 제2주간 토요일 ’22/04/30

본당의 친교와 일치 기원미사

 

 

말씀 친교인 교회(요한 14,15-23)

15 15너희가 나를 사랑하면 내 계명을 지킬 것이다. 16그리고 내가 아버지께 청하면, 아버지께서는 다른 보호자를 너희에게 보내시어, 영원히 너희와 함께 있도록 하실 것이다. 17그분은 진리의 영이시다. 세상은 그분을 보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하기 때문에 그분을 받아들이지 못하지만, 너희는 그분을 알고 있다. 그분께서 너희와 함께 머무르시고 너희 안에 계시기 때문이다.

18나는 너희를 고아로 버려두지 않고 너희에게 다시 오겠다. 19이제 조금만 있으면, 세상은 나를 보지 못하겠지만 너희는 나를 보게 될 것이다. 내가 살아 있고 너희도 살아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20그날, 너희는 내가 아버지 안에 있고 또 너희가 내 안에 있으며 내가 너희 안에 있음을 깨닫게 될 것이다. 21내 계명을 받아 지키는 이야말로 나를 사랑하는 사람이다. 나를 사랑하는 사람은 내 아버지께 사랑을 받을 것이다. 그리고 나도 그를 사랑하고 그에게 나 자신을 드러내 보일 것이다.”

22이스카리옷이 아닌 다른 유다가 예수님께, “주님, 저희에게는 주님 자신을 드러내시고 세상에는 드러내지 않으시겠다니 무슨 까닭입니까?” 하자,

23예수님께서 그에게 대답하셨다. “누구든지 나를 사랑하면 내 말을 지킬 것이다. 그러면 내 아버지께서 그를 사랑하시고, 우리가 그에게 가서 그와 함께 살 것이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친교(koinonia)라는 단어는 신약성경에 19번 나옵니다. 사도 성 바오로가 그의 글에서 13번 썼습니다. 친교는 삼위일체이신 하느님과 신자 서로의 내적인 관계라는 것을 강조합니다.

 

2차 바티칸 공의회 교회헌장은 성령에 의한 친교인 교회를 선포합니다. “교회를 온전한 진리로 인도하시고 친교와 봉사로 일치시켜 주시며, 교계와 은사의 여러 가지 선물로 교회를 가르치시고 이끄시며 당신의 열매로 꾸며 주신다.”(‘교회 헌장’ 4) 믿음과 희망과 사랑의 영적 공동체인 교회는 성령 안에서 주님의 길이며 진리이며 생명의 친교로서 모든 사람의 구속을 위한 도구입니다.

 

이 친교는 성령 안에서 주님의 성체성사에서부터 성체성사를 통해 다가옵니다. 신앙고백과 성사 그리고 교회적 통치와 친교는 바오로 사도의 말씀인 성령의 궁전(1코린 3,16; 6,19)을 따라, 교회 친교의 보이지 않는 끈들입니다. 지역 교회들 사이에, 주교, 사제, 수도자, 신자들 사이에, 비가톨릭 그리스도인들과의 관계 안에, 지상의 순례하는 교회와 하늘의 교회 사이에, 성인들을 비롯한 죽은 이들과의 관계 안에서 이 친교는 일치와 사랑과 평화의 주요소입니다.

 

2차 세계 주교 대의원회에서는 친교인 교회를 설정했습니다. “교회는 성사입니다. , 하느님과 맺는 친교의 표징이고 도구이며, 또한 인간들이 다른 인간들과 맺는 친교와 화해의 표징이며 도구입니다.” 시노드는 친교 교회론이 제2차 바티칸 공의회 문서의 핵심적이며 근본적인 개념이라는 것을 강조하고 친교의 의미에 대해 적고 있습니다. “근본적으로 하느님과 맺는 친교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성령 안에서 이루어진다. 이 친교는 하느님의 말씀 안에서 그리고 성사들 안에서 이루어진다. 세례성사는 교회 안에서 친교의 문이며 기초다. 성체성사는 전체 그리스도인 삶의 자원이며 정점이다.”(‘교회 헌장’ 11 참조). 그리스도의 성체성사적 몸의 친교가 나타나고 생겨난다. 즉 교회인 그리스도의 몸 안에서 모든 신자들의 친밀한 친교가 세워진다(1코린 10,16 참조).

 

친교 교회론은 또한 교회 질서의 기초이며, 교회의 일치와 다양성 사이의 올바른 관계입니다. 그것은 친교라는 측면에서 동방교회에까지 확장됩니다. 주교 시노드는 제2차 바티칸 공의회를 따랐고 친교 교회론이 공동체들의 성사적인 기초를 제공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교회의 모든 구성원들은 참여와 공동 책임 의식을 가집니다. 왜냐하면 교회는 친교이기 때문입니다.

 

주교님들은 친교의 이름으로 기초 교회 공동체를 포용했습니다. “만일 새로운 기초 공동체들이 진실로 교회와 일치하고 있다면, 그들은 친교의 진실한 표현이며 보다 항구한 친교의 건설을 위한 수단이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들은 교회 삶의 커다란 희망의 원인이 될 것입니다.”

 

2차 바티칸 공의회 때와는 달리 굶주림과 억압, 부정과 전쟁, 고통, 테러리즘과 다른 형태의 폭력이 증가하여 증거하기에는 너무나도 열악한 상황이라고 보여진다고 하더라도, 친교인 교회는 세상을 구원하는 성사입니다. 아울러 주교님들은 친교인 교회 안에서 다양성과 일치 간의 토착화의 문제에 대한 신학적인 원칙들을 말했습니다. 주교님들은 신앙 때문에 박해받고 죽은 이들과 그리고 정의를 증진하려는 노력 때문에 박해를 받는 이들과의 친교를 잊지 않았습니다.

 

신앙교리성은 친교의 교회를 공포했습니다. “친교의 개념은 교회 신비의 핵심을 표현하는데 아주 적절합니다. 가톨릭 교회론의 쇄신을 위한 열쇠가 될 것입니다. 교회가 친교라는 사실은 실로 아주 특별하고 중요한 과제이며, 교회 신비의 신학적 반성을 위한 넓디넓은 폭을 제공한다는 면에서 아주 높이 살 만합니다. ‘교회의 본성은 이처럼 새롭고 보다 깊은 추구를 언제나 허용합니다.’”

 

신앙교리성은 하느님 백성과 그리스도의 몸이라는 개념에 친교의 신비인 교회를 연결시킵니다. 친교의 개념은 교회의 자기 이해의 중심에 놓여 있습니다. 그것은 인간 각자가 삼위일체 하느님과 그리고 인류의 남은 자들과 맺는 신비한 일치입니다. 이 친교는 지상의 교회로부터 시작하여 하늘의 종말론적인 완성에까지 이릅니다. 그것은 구원의 성사인 교회로 제정되었고, 세례성사로 인한 영성체에 그 뿌리와 중심을 두고 있습니다.

 

신앙교리성은 교회가 같은 성령 안에서 성인들과 친교를 누리고 있음을 발견했습니다. 지역 교회와 전체 교회 사이의 교회적 친교 안에서 일치와 다양성에 관해 설명합니다. “교회의 전체성(보편성)은 한 손으로는 가장 견고한 일치와 그리고 다른 한 손으로는 일치를 저해하지 않는 오히려 친교의 성격으로 관련된 다양성과 복합성에 연계되어 있습니다.” 신앙교리성은 복되신 동정 마리아가 그리스도를 향한 믿음과 사랑과 일치 안에서 교회적 친교의 모형이라고 밝힙니다.

 

정교회와 개신교회들은 이 친교 모형을 받아들였습니다. 개신교 세계 교회 협의회는 친교라는 표현은 교회의 본성과 그 보이는 일치의 공통 이해를 소생시켜 주는 근본이 되었습니다 그 말은 교회의 본성과 목적을 이해하는 열쇠로서 오늘날 교회 일치 운동을 다시금 불러일으키고 있습니다.”라고 밝힙니다.

 

포스트 모더니즘 사회에서 사람들은 실현하기도 어려운 이상과 규정을 핑계로 차디차고 돌 같은 교회를 더 이상 바라지 않습니다. 사람들은 커다란 교회를 좋아합니다. 그러면서도 각자가 개별적으로 인정받고, 사랑받고 있다는 것을 직접 느끼기를 바랍니다. 친교 교회론은 교회의 규모와 관계없이 주님과 교회 구성원들 그리고 구성원들 간의 친교를 강조합니다. 신자들은 사제나 그리스도교 공동체가 자신들을 사랑하고 있다고 더 잘 느끼고 싶어하고, 친교인 교회 공동체를 통하여 하늘의 무한한 사랑을 느끼기를 바라며, 교회 공동체 안에서 서로가 그리고 하느님의 사랑을 갈구하는 사람들과 그들이 받은 사랑을 나눌 수 있기를 바라는 마음들이 이 친교 교회 안에서 주교, 사제, 신자 서로가 노력하며 스스로 노력한 만큼 이루어지기를 기대합니다.

 

그런데 한가지, 친교 교회론이 주님과 또 인간들 상호 간에 맺는 친교 관계를 추구하는 반면, 기존의 신자 구성원들이 그들이 접하는 현실에서 현세적인 하느님 나라를 찾는 것에 주력하고, 교회의 이상이나 사명을 그들의 현실과 상황에 맞춰 끌어내리고, 종교적인 신심 생활을 열심히 하면서, 현실에서 신자들 사이에 친교를 누리는 것에 만족하고 마는 유혹에 빠질 수 있습니다.

 

친교 교회론은 제도인 교회와 신자들이 능동적이고 적극적으로 하느님 아버지의 나라인 교회에 참여하고, 성령의 힘으로 가난한 이들과 연대하여 그들이 처한 삶의 조건 속에서 예수님의 말씀을 실현하여 공동체들의 친교(community of communities)를 이루도록 안내합니다.

 

교회의 사명을 깨우치고 실천하도록 인도해야 합니다. 신자들이 인생을 살아가면서 겪는 것이 무엇이고, 또 그 과정 중에 신자들이 갈등하는 것이 무엇이고, 바라는 것이 무엇이며, 교회에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헤아려 보살피는 것도 아주 중요한 일입니다.

 

교회가 신자들을 대신해서 무슨 일을 해결해 줄 수도 없고, 현실적인 일에 직접 개입할 수도 없습니다. 그러나 교회가 사람들의 아픔과 어려움을 함께해 주고 염려하고 위로해 주며 배려하는 친교를 맺을 때, 주님과 교회가 맺고 있는 친교가 아픔과 어려움을 겪고 있는 사람들에게 전달되고 확산되어 커다란 힘이 됩니다. 그리고 소공동체의 기초 단위에서 감당하기 어려울 때, 반의 상위 단위인 구역과 지역에 협조를 청하여 함께합니다. 그리고 구역반과 단체들이 아울어지는 소공동체들의 집합인 본당에 협조를 청하여 교회 공동체가 세상의 기쁨과 희망, 그리고 슬픔과 번뇌를 겪는 이들과 함께하고, 그들을 통해 세상과 친교를 맺게 되고, 우리 교회의 하느님 나라 행렬이 확산됩니다.

 

교회는 건물도 아니고, 교계제도도 아니며, 다름 아닌 우리 신자 자신입니다. 우리는 스스로, 주님의 이름으로 모이고, 주님의 말씀을 이룸으로써, 그 이루는 만큼 교회가 됩니다. 교회로서 우리는 주님과 우리 신자들 사이에 친교를 이루며, 교회를 이루어, 이 교회와 우리가 사는 이 동네를 하느님 나라로 변회시키기로 합시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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