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원동성당 게시판

3박4일의 이별연습 첫째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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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상익 [asiaman] 쪽지 캡슐

2000-07-27 ㅣ No.1340

 

3박4일, 그 길었던 이별연습

 

지금도 조금은 꿈을 꾸는 듯, 멍하기만 합니다. 지난 며칠간 겪어온 그 믿기지 않던 상황과 그로 인한 격렬한 감정변화의 소용돌이가 아직도 완전히 끝나지 않은 듯 합니다.

 

 

어쨌든 이 사건은 나의 인생에 원하든 원하지 않든 엄청난 충격을 주었고 삶과 죽음의 바로 경계에 서서 느꼈던 그 착잡함들을 생각한다면 앞으로의 저의 삶의 방식은 엄청나게 바꿔져야 할 것으로 생각합니다.

 

 

어떻게 ? 글쎄요 그 건 제가 지금부터 몹시 고민해야 할 문제인데요, 오늘 이 글을 쓰는 이유는 평소 제가 좋아하거나 관심을 가지고 있는 분들과 그 경험을 함께 나누고 싶고(사실 누구에게나 일어날 수 있는 일이어서) 평소의 나/우리를 떠나 한 번 주위를 둘러볼 수 있는 계기가 됐으면 해서...

 

 

시간여유 있으실 때 한 번 봐주시고 항상 건강 조심하세요.

 

 

첫째날 (7.11, 화)

 

 

운명의 날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아무런 경고도 없이 너무나 평범하게... 잠깐 부서 업무회의를 하고 나오니 삼성의료원 건강의학센터에서 또 연락이 왔다 한다.

 

 

오후 2시까지 바쁘지 않으면 나와 달라고. 크게 걱정할 건 아닌데 가슴CT촬영에서 뭔 가가 보이니 설명을 들어보는게 좋겠다고.. 찜찜하다. 하지만 뭐 큰 일이야 있겠나, 아직 젊은데... 시간 맞춰 가보기는 해야 겠지만 바쁜데 정말 귀찮네.

 

 

10시 반쯤 아내에게서 전화가 왔다. 오늘 학교 시험이라서 일찍 끝내고 지금 남대문 시장 나가니 오랜만에 같이 바깥에서 점심이나 먹자고.

 

삼성의료원 전화가 마음에 걸려서 인지 갑자기 아내에게 잘 해 주고 싶다. 그래 나와서 함께 점심 먹자, 이렇게 시내에서 만나는 것도 정말 오래간 만이다. 점심하면서도 CT촬영 얘기는 결국 하지 않았다. 너무 걱정할 것 같아서..

 

 

그냥 오후에 의료원 검진결과가 나온대서 거기 가봐야 할 것 같다고 가볍게 얘기했다. 그 순간 아내 얼굴위로 불안감이 스쳐 지나 간다. 결과면담하고 나면 곧 바로 전화하라고 신신당부를 한다.

 

 

오후 2시5분

건강의학센터 전문의를 면담했다. 다른 곳은 모두 깨끗한데 기관지가 양쪽 폐로 갈라지는 부위에서 임파선이 부어있단다. 크기는 가로 2cm 세로 1.8cm라고. 임파선이 왜 부었지? 그래서 어떡해야 되나요 물으니 별일은 아니겠지만 호흡기내과에 외래예약을 해 놓았으니 가 보랜다.

 

 

어째 문제가 생각보다 심각하게 돌아가네. 갑자기 등골이 서늘해 지며 불안감이 엄습했다. 밖에 나오니 간호원이 영양면담과 스포츠의학 면담도 하랜다. 거의 건성으로 듣는 둥 마는 둥하고 호흡기내과를 찾아갔다.

 

 

3시30분

호흡기 내과, 진료대상자가 밀린 관계로 20여분을 기다리다가 들어가 보니 담당전문의가 컴퓨터화면에 CT사진을 띄워 놓은 채 들여다 보고 있다. 화면을 이리 저리 바꾸다가 탄성을 내 지른다. 아! 이 것 때문에 이리 보낸 거군요. 약 2cm... 순간 어두운 표정이 지나가는 듯 하다.

 

 

담배를 얼마나 피우시죠? 글쎄요, 하루 한 갑 약간 못되게... 그말을 하고 있는 내가 순간적으로 너무나 혐오스럽다...고개를 끄덕이며 화면을 자세히 쳐다 본다. 잠시 침묵이 흐른다. 급한 맘에 용기를 내서 물어 본다. 저 그림의 의미가 뭐죠? 악성일 수 있다는 건가요?

 

 

수긍하는 표정으로.. 드문 경우인데.. 하면서 다시 생각에 잠긴다. 가능성은 얼마나? 글쎄요 3:7, 4:6 ? 무언가로 세게 한 대 맞은 듯 하다. 가까스로 심호흡하면서 다시 묻는다. 악성이라면 현 상태는?

 

 

이 쪽이(임파선) 아주 고약한 곳이어서 증상이 없더라도 상당히 진전된 것으로 봐야... 악성이면 사회생활은 포기하고 바로 투병생활로 들어가야 합니다. 우선 빨리 조직검사를 해야 겠으니 긴급히 입원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오늘이라도 당장 조치하겠으니 서두르십시오.

 

 

이후 뭐라고 얘기하고 여기저기 전화를 하는데 더 이상 귀에 말이 들리지 않는다. 웅웅거리는소리만 들릴 뿐...

 

 

그래, 이런 게 있었어. 인생에는. 언젠가는 부딪칠 줄 알지만 평소에는, 아니 마지막 순간까지도 의식적으로든 무의식적으로든 피하고 싶은 것, 외면하고 싶은 것, 그런 게 있지. 그런데 하필 오늘, 이런 방식으로 만날 줄이야...

 

 

차로 돌아 오니 핸드폰에 아내에게서 음성메세지가 와 있다. 왜 걱정하는 줄 알면서 이렇게 전화가 없느냐고.. 어떻게 이 얘기를 한다? 내일 중으로 입원을 하기는 해야 하는데..

 

 

4시 30분

사무실로 차를 모는데 갑자기 길 위의 풍경, 차, 지나가는 사람들이 모두가 낯설게 느껴진다. 다시 한 번 조금 전의 면담내용을 더듬어 본다. 다소 젊어 보이지만 나름대로 경험과 전문성면에서 자신감 있어 보이고 신중해 보이기도 하고 일단 신뢰가 가는 의사 같다.

 

 

그런데 문제는 생각하는 바를 잘 숨기지 못하는 타입인 듯. 나와 비슷해. 숨기려고 해도 어디든 표가 나거든.. 그리고 3:7, 4:6 어쩌구 할 때 표정이 뭔가 건성으로 대답하는 듯 했어. 저 사람은 상당히 나쁜 쪽의 가능성을 더 크게 보고 있는 것이 분명해.

 

 

그래 이렇게 끝나는 것인가? 여기 와서 이렇게 끝나면서 영원을 살 것처럼 그 많은 인연을 만들고 때로는 하루에도 대여섯 번씩 희로애락 사이를 맴돌며... 결국은 한치 앞도 못내다 보는 하루살이처럼 살아 온 게 아닌가?

 

중1, 초등5학년, 애들이 너무 어리지 않은가? 그 동안 엄하게만 굴려고 했지 한 번 제대로 안아주지도 못했는데.. 아버지없는 상처를 잘 극복해 낼까?

 

 

아내는? 모든 짐을 혼자 지고.. 남은 자의 슬픔이 훨씬 클 텐데.. 자존심 강해서 친구들이 남편얘기만 해도 상처받고 울텐데.. 부모님은.. 내가 제일 큰 의지대상인데.. 내가 없으면 얼마나 버티실까?

 

 

아직 이별할 준비가 전혀 되지 않았는데 이별의 순간이 온 것인가? 이것이 바로 한이란 것인가..

 

오후6시30분

윗분들께는 입원에 대해서만 간단히 말씀드리려고 했는데 감정억제가 잘 안되었나 보다. 걱정을 많이 하시면서 별 일 없을 거라고 위로를 하신다. 뭔가 약한 모습을 자꾸 보일 것 같아 사무실을 서둘러 빠져 나왔다. 자꾸 뒤돌아 보인다. 이 계단을 이 복도를 다시 밟을 수 있을까?

 

 

오후 8시

비가 계속 뿌린 관계로 길이 엄청나게 막혔다. 얼마남지 않은 이 귀중한 시간을 도로위에서 허비하고 있다니, 기가 막혔다. 그리고 수년전부터 아내가 가장으로서의 책임론을 들먹이며 그렇게 담배를 끊도록 요구했는데 그 걸 들어주지 않았다는 자책감에 거의 미칠 지경이 되었다.

 

 

이제 며칠후면 앞에 놓여진 두 갈래 길 중 어느 길로 가야 할지 판정을 받아야 한다. 진작 금연을 했더라면 어느 길을 가든 자신에 대한 혐오와 가족에 대한 미안함은 지금보다 훨씬 덜 할텐데...

 

 

오후 9시

집에 도착하니 아내가 애써 불안감을 감추면서 검진면담결과를 묻는다. 별 건 아닌 것 같은데 정밀진단을 받아야 하나 봐. 그래서 내일 입원하기로 했어. 뭐가 잘 못 됐는데? 글쎄 잘 모르겠지만 CT촬영에서 뭔가가 있나 봐? 심각해? 잘 몰라. 얼른 외면을 하고는 피곤하다면서 안방에 들어와 자는 척 한다.

 

 

누워 있는데 자꾸 눈물이 난다. 왜 그런가? 자기연민인가? 죽음이 두려워서? 글쎄 그것도 아직은 전혀 실감이 안난다. 아직 쌩쌩한데..

 

그래 바로 그거야.

남아 있는 자에 대한 미안함. 나로 인해 받을 그 모든 상처에 대한 연민. 평범한 가정이 하루아침에 풍비박산이 난다는 게 바로 이 경우구나. 정말 미안하다. 하필이면 나 같은 사람을 남편으로 아버지로 만나서 이런 일을 당하다니..

 

 

살아 온 과정도 정말 후회스럽다. 인생 그 자체가 하나의 이별과정이 아닌지. 좋아하는 것, 익숙한 것, 사랑하는 사람들과.. 마흔을 넘긴 나이라면 적어도 한 달에 몇 번 쯤은 이런 일에 대해 생각하고 나름대로 마음의 준비를 가다듬는 시간을 가졌어야 했는데. 도대체 뭘하고 살았나? 뭘하다 막판에 몰려서야 갈팡질팡, 그동안의 무신경, 무관심에 몸을 떨며 후회하고 있으니...

 

밤12시

잠시 거실로 나갔다. 잠든 둘째의 모습이 그렇게 안스러울 수가 없다. 미안하다... 다시 눈물이 왈칵 쏟아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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