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레미야12,1-6절의 질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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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기원 [pious] 쪽지 캡슐

2000-03-02 ㅣ No.1175

어떤 분께서 예레미야서 12,1-6절에 대한 질문을 해오셨습니다. 예레미야 질문의 요지는 왜 세상에는 나쁜자들이 만사에 성공하고 사기밖에 칠 줄 모르는 자들이 잘되기만 합니까? 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예레미야의 질문에 대한 하느님의 답변은 다음과 같습니다.

예레12,5-6 "네가 사람과 달리기를 하다가 지쳐 버린다면, 어떻게 말과 달리기를 하겠느냐? 편안한 곳에서나 마음 놓고 살 수 있다면 요르단강 가 깊은 숲속에서는 어떻게 살겠느냐? 너의 집 식구, 너의 동기들이 너를 헐뜯으며 배신하지 않았느냐? 그러니 그들이 정답게 말을 걸어 오더라도 믿지 말라."

 

조금 이상하지요. 별로 제대로 된 답변이 되는 것 같지가 않습니다. 맞는 말입니다. 그러니 신자들이 혼동을 느끼는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닙니다. 비슷한 의문들이 성서 여기저기서 나타납니다. 특히 욥기를 보면 알수 없는 이유로 고통받는 의인 욥의 울부짖음은 우리 삶의 실존적인 문제를 다루고 있습니다. 왜 고통은 존재하는가? 그리고 왜 고통이 의인에게 더 많이 다가오는 것처럼 느껴지는가? 하는 것이겠지요.

 

하지만 하느님께서는 왜 그런 고통이 존재하는지, 또 그 고통이 왜 내게 또는 의인에게 다가오는지 설명해주지 않으십니다. 다만 "네가 사람과 달리기를 하다가 지쳐버린다면, 어떻게 말과 달리기를 하겠느냐?" 하고 하느님께서는 예레미야서에서 말씀하십니다. 성서 전반에 걸쳐 고통에 대한 설명은 명확하지 않습니다. 원인을 밝히고 있지 않은 것입니다. 하지만 성서는 고통을 당했을때 신앙인들이 어떻게 그 고통을 이겨내야 하는지만을 보여주고 있을 뿐입니다. 성서의 많은 신앙인들은 고통을 당했습니다. 어떤 사람은 고통때문에 아니면 자기 욕심때문에 하느님을 버리기도 했지만 또 다른 모범적인 신앙인들은 그 고통들에도 불구하고 하느님께 대한 신앙을 오히려 더 굳게 다지게 됩니다. 예레미야도 예레미야서 15장을 보면 극심한 고통을 토로하지만 오히려 그 고통의 시간을 통해 다시 하느님의 부르심을 받는 기회가 됩니다.

 

우리가 고통에 대해 갖는 의문에 대해 하느님은 사람과 달리기를 하다가 지치면 어떻게 말과 달리기를 하겠느냐고 하면서 우리의 인내를 요청하십니다. 사실 우리가 하느님이 아시는 모든 것을 알수는 없는일입니다. 그렇다고 궁금증을 갖는 것이 잘못된 것은 아닙니다. 다만 우리가 실제로 고통을 당할 때 하느님은 우리에게 신앙과 실존적인 고통에 대한 용기를 잃지 않을 것을 바라고 계시다는 것이지요.

 

하느님의 차원은 분명 인간적인 차원과는 차이가 있습니다. 우리가 우리 삶의 차원을 제대로 이행하지도 못하면서 하느님의 차원을 욕심내는 것은 분명 가당치 않은 일일 것입니다.

저역시 고통에 대한 합리적인 설명을 하지 못합니다. 그것은 어쩌면 지금의 우리에게는 완벽하게 답변될 수 없는 차원인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사람과 달리기를 하는 것도 힘들어 하면서 말과 달리기를 하는 욕심을 내기보다는 우리보다 훨씬 더 높은 차원에서 우리를 바라보시며, 용기와 인내를 가지고 신앙을 지켜나가고 발전시켜 나가기를 바라시는 하느님께 겸손되이 우리의 삶과 믿음을 통해 다가가야 할 것 같습니다.  

 

분명 성서의 성인들은 고통을 통해 하느님께 더 가까이 다가가는 체험을 하였고, 고통을 통해 더 성숙하게 되었으며, 더 단련되었다는 것을 기억해야 하겠습니다. 우리도 우리 삶안에서 그런 성인들처럼 고통을 통해 더 강하게 되었으면 합니다. 어린이들이 아무 어려움없이 먹고 자는 것만으로 행복을 느끼지만 어른인 우리는 다른 차원의 행복을 느끼고 갈구합니다. 그것은 우리가 성장하는 동안 많은 고통을 통해 더 성장했기때문이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 하느님은 우리를 더 성장시켜서 더 높은 차원의 행복을 주시려고 하는 것이라고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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