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농동성당 게시판

교황 요한 바오로2세의 가르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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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민 [gnre206] 쪽지 캡슐

1999-09-29 ㅣ No.599

’리더스다이제스트’ 10월를 읽다 교황님에 관한 좋은 글이 있어 올립니다.

 

 

"성경의 참뜻은 고통을 받는 가운데서도

사랑을 베푸는 것이 인간의 본분이라는 것입니다."

 

 

교황 요한 바오로2세의 가르침

 

야체크 모스크바

 

 

"나는 고통의 가치를 직접 체험한 증인으로서 여러분을 찾았습니다."

교황 요한 바오로2세가 1998년 1월 역사적인 쿠바 방문을 끝내기 하루 전날 해질녘에 아바나에서 멀지않은 엘 린콘 성당의 작은 흰색 건물을 방문했을 때 한 말이다. 많은 인파가 모이지는 않았다. 아마추어 연주자들로 구성된 악단이 성당앞에서 연주를 했다. 강론 순서를 기다리는 교황은 피로한 기색이 역력했다.

교황은 자기를 우러러보는 군중들과 만나기 위해 4일 동안 잠시도 쉬지 않고 여행했던 것이다. 폴란드 TV방송의 특파원으로 교황을 수행취재하고 있던 나는 교황이 우리 모두를 위해 강행군을 하고 있다는 생각을 다시 한번 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교황은 단조로운 억양으로 강론 원고를 읽어내려 갔다. 그는 착한 사마리아인의 일화를 언급했다. "이 이야기의 참뜻과 나아가서 성경 전체의 참뜻은 고통을 받는 가운데서도 사랑을 베푸는 것이 인간의 본분이란 가르침입니다." 강론을 마친 교황은 안수와 축복을 내리기위해 나환자들에게 다가갔다. 약을 복용해 얼굴이 부은데다 파킨슨병으로 거동이 불편한 교황은 나환자들이나 다름 없어 보였다. 교황이 머리를 쓰다듬어 줄때 한 시각장애 소녀의 얼굴이 눈물로 젖는 것을 나는 보았다. 잠시 후 어린이들은 물론 일부 특파원들까지도 눈물을 흘렸다.

나는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의 해외순례를 여러 차례 취재했다. 이번 여행은 나로서는 여덟번째 수행 취재였다. 교황은 해외순방때마다 인간의 고통 문제를 되풀이하여 거론했다. 교황은 고통이 인간의 정신을 강하게 만든다고 거듭 강조했다. 교황의 발언을 수없이 들은 바 있었던 나는 교황 자신도 고통에 시달리고 있다는 사실을 점점 확신하게 됐다. 그러나 교황이 가르치려는 참뜻을 내가 진정으로 이해하기 시작한 것은 바로 쿠바 방문 때였다. 교황의 가르침은 가톨릭교이든 아니든 종파를 초월해서 모든 인류가 귀담아 듣고 이해할 필요가 있는 것이었다.

 

"내가 병들었을 때에, 내가 옥에 갇혔을 때에..."

 

교황이 나환자들과 비공개적으로 만나는 쪽을 택한 것은 쿠바에서 남다른 반향을 불러일으키는 주체인, 사회에서 버림받은 또 다른 사람들 즉 정치범 문제를 거론하는 데 목적이 있었다. 교황은 이렇게 말했다. "인정받지 못한 평화적 신념때문에 격리나 박해를 당하고 유죄판결을 받아 정신적인 고통을 느끼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들은 적극적인 생활을 원하고 자신의 신념을 마음놓고 표현하며 자신의 사상이 존중되고 용인되는 사회를 원한다는 이유로 그들의 양심상 받아들일 수 없는 감금을 당하고 처벌을 받고 있습니다."

교황의 말을 듣고 있던 나는 15년 전의 일이 생각났다. 1983년 6월 나는 교황 요한바오로2세의 두번째 폴란드 방문을 준비하던 어느 가톨릭 성당의 위원회에서 일하고 있었다. 당시의 폴란드는  요즘의 쿠바와 비슷한 점이 많았다. 야루젤스키 장군이 이끄는 폴란드 군사정권이 자유노조의 평화적인 혁명 추진을 중단시킴에 따라 대부분의 정치활동이 지하로 숨은 것이 불과 18개월전의 일이었다. 한편 야루젤스키는 고황의 폴란드 방문을 온갖 정치적 목적에 이용하려고 애쓰고 있었다. 요한 바오로2세가 바르샤바에 도착하기 직전, 나의 상사였던 얀 파위가 신부와 나는 교통사고를 당해 병원에 입원했다. 나는 폐를 심하게 다쳤고 파위가신부는 머리에 중상을 입었다. 우리는 병상에 누운 채 교황이 도착하는 장면을 휴대용 TV로 보면서 교황의 연설이 시작되기를 애타게 기다렸다. 교황의 연설에 귀를 기울이고 있던 우리는 초조해졌다. 교황이 너무 온건해 보였기 때문이었다. 몇 분이 지났으나 교황은 폴란드의 정치상황에 관해 전혀 언급하지 않았다. 파위가신부와 나는 뜻밖의 상황에 실망했다. 교황이 자유를 위해 고통받는 사람들을 외면할 리 만무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그때 우리는 뜻밖에도 교황의 다음과 같은 말을 들었다. "나는 고통받는 모든 사람들에게 누구보다도 내게 가까이 올 것을 당부하는 바입니다. 나는 다음과 같이 말씀하신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당부합니다. ’너희는......내가 병들었을 때 돌아보았고 옥에 갇혔을 때 와서 보았느니라.’ 나는 병들고 옥에 갇힌 그 모든 사람들을 직접 찾아볼 수 없지만 그들의 영혼이 내게 더욱 가까이 올 것을 부탁드립니다."

마태복음 25장 36절을 인용한 교황의 이 말씀을 들은 파위가신부는 감격하여 얼굴을 돌렸다. 나는 교도소에 수감된 친구들이 TV나 라디오로 교황의 연설을 듣고 있는지 궁금했다. 그들이 방송을 들었다면 교황이 폴란드의 통치자인 보이치에흐 야루젤스키 장군을 인정해 주기 위해 폴란드를 방문한 것이 아니란 사실을 깨달았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교황은 고통받고 내쫓긴 폴란드 국민들을 만나기 위해 찾아온 것이었다.

 

"고통받는 사람들에게 의지하라."

 

교황이 카롤 보이티야란 속명으로 대학에 다니던 시절 학우였던 중세철학 교수 스테판 스베자프스키는 교황과 그에게 가까운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고통이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고 이야기한다. 교황의 인생에는 고통이 끊임없이 따라다니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어머니가 돌아가셨을 때 카롤은 겨우 여덟 살이었다. 얼마 후 사랑하는 형 에데크도 병으로 죽었다. 12살짜리 소년은 조숙한 태도로 현실을 받아들였다. 교황과 가까웠던 대다수 사람들은 보이티야의 주변에는 항상 고통의 징후가 맴돌았다고 지금도 단언한다. 신체가 부분적으로 마비된 안드레제이 마리아 데스쿠르 추기경은 휠체어 생활을 하고 있다. 안경을 쓴 이 노성직자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왕성한 활동을 벌이고 있다. 보이티야와 같은 신학교를 다닌 데스쿠르는 1학년 때 전쟁이 일어난 직후 로마로 떠나야 했지만 주교를 거쳐 추기경이 되기까지 로마에 머무는 동안 카롤 보이티야의 가장 충실한 지지자가 됐다. 두 사람의 돈독한 우정은 가톨릭 교회 내부의 정치적 이해관계나 같은 나라 출신이란 공통점을 초월하는 것이었다.

1978년 카롤 보이티야를 교황으로 선출한 교황선거회의 가 열리기 3일 전 데스쿠르는 뇌출혈로 쓰러져 혼수상태에 빠졌다. 요한 바오로2세는 교황으로 선출된 다음날 로마의 게멜리병원에 혼수상태로 누워있는 친구를 문병했다. 친구를 찾아본 다음 교황은 다른 환자들에게 이런 말을 했다. "나는 교황의 직무를 시작함에 있어 고통을 기도로 극복하는 사람들에게 의지하고자 합니다."

 

"고통의 선물"

 

이탈리아의 작가 비토리오 메소리는 이렇게 말한다. "교황은 사람들에게 가까이 다가가기 위해서라면 무슨 일이든 했습니다." 교황은 건강할 때는 물론이고 병에 걸린 후에도 사람들에게 다가가기 위해 열심히 노력했다. 성베드로광장에서 암살범의 흉탄을 맞은 후 중상을 입은 교황은 게멜리병원에서 여러 주일 동안 치료를 받았다. 교황은 그 총격사건의 충격을 이겨내고 여렵사리 건강회복에 성공함으로써 남다른 체력을 과시했다. 그후 1992년 7월에는 대장의 많은 부분을 잘라내는 양성 종양 절제수술을 받았다. 1981년 교황의 수술을 맡았던 외과의 프란체스코 크루치티 교수가 집도의였다. 측근 인사들은 종양으로 인한 통증을 교황이 그토록 오래 참은 것을 신기하게 생각하고 있다.

수백만의 사람들이 1995년 교황의 크리스마스 메시지 발표를 TV로 지켜보았다. 교황은 프랑스어로 축복을 내린 다음 힘이 드는 듯 한숨을 내쉬었다. 교황은 영어로 축복을 하려 했으나 계속하지 못하고 이탈리아어로 이렇게 말했다. "용서하십시오. 여기서 끝내야 되겠습니다. 여러분께 하느님의 축복을 기원합니다."

그날 저녁 교황청의 호아킨 나바로 발스 대변인은 다음과 같은 성명을 발표했다. "성하의 질환은 위장장애와 구토를 동반한 단순한 독감입니다." 그후 여러 달동안 교황의 건강을 재다짐하는 성명이 여러 차례 발표됐음에도 불구하고 교황의 얼굴에는  고통스런 표정이 더욱 짙어졌다. 교황은 가을에 급성맹장염으로 게멜리별원에 다시 입원했다. 수술을 받던 날 교황은 그 병원에 입원해 있던 한 어린 소년으로부터 "고통받는 친구에게"란 시를 선물받았다. 어느정도 건강이 회복되자 교황은 소아 암병동에 입원해 있던 그 소년을 만나러 갔다. 교황은 환자들을 일일이 살펴보며 위로와 격려의 말을 해주었다. "보시다시피 나는 아팠으나 이제 집으로 돌아갑니다. 여러분도 오래지 않아 집으로 갈 것입니다." 교황이 환자들에게 되풀이했던 말이다.

암병동에 입원했던 소년들 가운데 안토니오 라몬이란 페루 소년은 척추의 발육기형 증상인 척추피열로 다섯 차례의 수술을 받았다. 바로 이 소년이 교황에게 시를 써 보낸 주인공이었다. 안토니오는 교황이 가르친 참뜻을 이해한 것이 분명했다. 역할이 바뀐 것이었다. 그 소년은 고통받는 어른을 도와주려 했다.

 

고통의 이해

 

그 당시 나는 저명인사들의 건강에 관한 언론의 요란한 보도가 항상 못마땅했다. 요한 바오로 2세도 어느 정도 사생활 보호가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따라서 나는 교황이 자신의 질환을 모두 공개하기로 결정한 이유를 이해할 수 없었다.

교황의 측근 가운데 한 사람인 스타니사프 그리기엘 교수에게 그 까닭을 물었더니 교수는 자기 수필의 한 부분을 인용했다. "고통과 죽음은 인간을 미래로 인도하기 위해 존재한다. 이것이 죽음과 고통을 이해하는 유일한 길이다. 그러므로 우리 가운데서 고통받는 수많은 사람들을 걱정해 줄 것이 아니라 고통에 어떻게 대처할지 몰라 방황하는 사람들을 걱정해 주어야 한다."

교황은 1984년 "인간의 고통에 대한 기독교적 의미"란 제목의 교황 교서에 관해 논의할 때 폴란드 영화감독 크시슈토프 지누시에게 "고통은 멀리 떨어져 있을 때 분석하기가 더욱 쉽습니다."라고 실토했다. 교황은 이렇게 썼다. "고통은 세상의 구원이라고 하는 성스러운 신비 속에 뿌리를 두고 있기 때문에 초자연적인 현상입니다. 뿐만아니라 인간은 고통속에서 자아와 자신의 인간성 및 인간적 긍지, 자신의 소명을 발견할 수 있기 때문에 고통은 지극히 인간적이기도 합니다. 사람은 누구나 고통을 느끼지만 우리는 고통을 느끼는 가운데 더욱 깊이 깨닫고 나아갈 길을 알게 됩니다. 고통의 인식은 사랑입니다. 그리스도는 스스로 고통을 감수함으로써 인간에게 선을 행하고 고통받는 사람들에게 선행을 베풀라고 가르쳤습니다."

우리는 요한 바오로 2세가 뜨거운 태양이 내리쬐는 로마의 성베드로성당 광장을 비롯해 전세계 각지에서 장시간의 미사를 집전하고 축하행사를 주관하며 군중들을 접견하는 것을 지켜보면서 이런 의문을 느끼지 않을 수 없다. 이같이 힘든 생활을 교황이 감내할 필요가 있는가? 강론하는 말소리가 어눌하고 거동이 불편함에도 불구하고 교황은 타인을 위해 무제한의 봉사를 하고 있다. 손을 뻗는 수만 명의 신도들과 악수를 하여 부어오르고 긁힌 교황의 손을 볼 수 있는 사람들은 군중 가운데서 교황에게 다가간 소수의 사람들뿐이다.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이 재임한 지 만 20년이 지난 지금 나는 교황이 말뿐 아니라 모범적인 행동을 통해 교훈을 전달한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의사소통 방법은 수없이 많습니다. 그중 한 가지가 교황이 강론때 사용하는 언어입니다. 그러나 언어 이외의 의사전달 방법도 사용합니다. 교황이 몸소 행동을 통해 뜻을 전달하는 방법이 그에 해당됩니다. 교황은 연만해질수록 이 비언어적인 의사전달 방법을 강화하고 있습니다." 오스트리아의 크리스토프 쇤보른 추기경의 말이다.

 

죽음은 삶의 일부이다.

 

요한 바오로 2세가 이 교훈을 말로 가르친 적은 없다. 그는 자신의 존재 자체로 가르친다. 교황을 오랜 기간 취재하며 한 인간으로서 그리고 정신적 지도자로서의 교황에 대해 더욱 깊이 이해하게 되었다. 심오하고 난해한 주제이기는 하지만 요한 바오로 2세가 인식하고 있는 고통은 연민과 사랑에 이르는 문이다. 바로 그 점을 우리가 깨닫도록 해준 것이 요한 바오로 2세의 가장 큰 유산이다. 그는 참으로 위대한 유산을 우리에게 남겨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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