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정동성당 게시판

스님과 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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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용학 [yhim] 쪽지 캡슐

2000-07-14 ㅣ No.4780

† 찬미 예수님

 

가끔 우리 게시판에 강이와 인연이 있는 김산 스님께서 나들이를 하시는 군요 강이가 그 속에 있었던 얘기를 해 주었길래 참 좋은 만남을 보면서 수도자의 삶과, 한편 마음이 가난한 사람들을 생각해 보게 되었습니다.

 

그것도 인연인지 마침 생각난 글이 있어 여기 소개해 올릴까 합니다. 조광호 엘레지오 신부님의 "당신이야 말로 마음이 가난한 사람이다" 라는 글인데 길지만 함께 묵상해 보시죠  

 

구정이 지난 초이틀 저녁, 서울의 밤은 적막하리만큼 고요하다. 참으로 오랫만에 찾아온 이 고요와 여유는, 따스한 정담이 초저녁 창가에 등불처럼 녹아 흐르던 내 소년기의 어느 저녁으로 나를 끌고 간다.

 

나의 기억 속에서만 남아 있는 시간, 실제로 존재하지 않는 시간, 그 흐름이 멈춰 버린 시간 앞에서 나는 다시 현재만이 존재한다는 엄연한 사실을 다시 확인해 본다. 하지만 밀물처럼 몰려오는 아름다운 추억이 내 기억의 수문을 밀고 들어오는 이 한가한 시간을 즐기며 일전에 선물로 받은 Y시인의 시집을 펼쳐드는데 전화벨이 울렸다.

 

태백산맥 두타산 기슭 어느 강원(講院)에서 홀로 수행하고 있는 D스님이였다. 지금 그가 묵고 있는 산사에는 한길 넘도록 눈이 쌓여 있고 오늘 이 밤에도 계속 눈이 내리고 있다고 했다. 하늘과 땅이 희디흰 눈 속에 묻혀 있는 설국에 홀로 묻혀 있기가 아까워 눈소식과 함께 새해 인사를 드리노라고 했다.

 

화선지에 향기로운 수묵이 번지듯 평화로운 그의 음성과 넉넉한 그의 웃음소리가 눈부신 은령(銀嶺)을 넘어오는 종소리처럼 나의 내면을 훤히 밝혀온다. 20여년이 가까워오는 그와의 만남.

 

해묵은 책갈피에서 감동어린 낙서가 남은 메모지를 발견할 때처럼 참으로 오랫동안 예고도 없이 우리는 서로 몇마디의 말과 몇줄의 문안편지로써 이 시대의 벼랑길을 함께 가는 동행자임을 확인한다. 그리고 퇴색된 자기 가문의 녹슨 문의 빗장을 열고, 그렇게 서로 넘나들고 있다.

금년 휴가때에는 그가 묵고 있는 산사에서 며칠 함께 지내기로 했다. 사실은 그의 부탁으로, 나는 그의 강원(講院) 맞은편 벽에 현대식 탱화(?) 한 폭을 그려 주기로 약속을 해놓고 있다.

얼마전 그는, 자신이 머물고 있는 그 강원에서 미사를 드려도 좋으니 미사도구를 준비해 오라고 나에게 귀띔했다.

 

진실한 나눔과 기쁨으로 맺어진 우정은, 종교적 도그마(교의)로 가려진 벽을 넘나들 수 있는 신령한 빛과 바람이 흐르고 있는 것이 아닐까? 그리고 그 만남의 신비로운 기쁨 속에는 언제나 창조적 생명이 움터나고, 그 생명에 빛나는 곳에는 부처님도 예수님도 함께 계시리라는 것이 그와 내가 무언으로 약속한 믿음이다. 그와의 만남으로 인하여 내가 또 하나의 열린 세계를 엿볼 수 있었던 것은 참으로 은혜로운 체험이 아닐 수 없다.

 

그것은 몇몇 불자(佛者)들과의 만남이다. 오래전부터 서로 알고 있던 친척 누님같은 불자들을 통해서 나는, ‘마음이 가난한 사람들은 행복하다. 하느님 나라가 그들의 것이다’(마태 5,3)라는 예수님의 말씀이, 이 세상 모든 사람들을 두고 하신 말씀이라는 것을 깨닫는다. 인간의 구원이 하느님의 보편적 구원의지에 달렸듯이 마음이 깨끗한 사람들, 그들 모두가 하느님의 나라를 차지하게 되리라는 것이 나의 신념이다. 자기 자신과 자기 집단만이 구원으로 불림받았다는 일련의 편협된 그리스도교계의 오도된 가르침 앞에, 오늘을 사는 한 그리스도인으로서 부끄러움을 느낌은 비단 나만의 일은 아닐 것이다.

 

마음이 가난한 사람들, 그들은 누구인가? 그들은 선민의식에 사로잡혀 자신이 믿는 하느님을 걸고 연약한 이웃을 절망의 벼랑 앞에 몰아세워 믿음을 강요하는 사람들이 아니고, 종교적 권위의 허상을 앞세워 약한 이웃을 판단하는 몰인정한 종교 지도자도 아니다. 또한 가난하고 병든자를 돌보면서 그들에게 베푼 봉사가 자신의 위로나 위안이 되지 못할 때, 하느님과 이웃을 원망하는 옹졸한 사회사업가도 아니다. 그리고 엄격한 계율로 자신을 다스려 그 어느 곳에도 치우침이 없이 몸과 마음이 단련된 수행자로서 자신을 끝없이 비하하면서도, 타인의 허물과 약점을 그냥 넘겨버릴 수 없는 냉기가 감도는 수행자도 아니다.

 

그는 불의 앞에 분노하고, 정의를 앞세워 구조적 모순의 쇠사슬을 끊고자 자신의 생명을 걸고 정의를 부르짖으면서 마침내 그 악의 세력 앞에 자신과 하느님과 세상을 원망하고 절망하는, 자신의 힘만을 믿는 혁명가도 아닐 것이다. 그는 ‘존재의 집’인 언어를 찾아 헤매는 시인은 아니나 밭에 씨앗을 뿌리는 농부처럼 한마디 말씀을 삶으로써 시를 쓰는 시인이다.

 

그는 존재의 내면에 흐르는 우주적 하모니를 실어나를 음률을 찾아나서는 음악가는 아니나 못자리에 물을 갈아대는 농부처럼 평범한 일상 속에서 생명과 기쁨을 기적처럼 창조해 내는 음악가이다.

 

마음이 가난한 사람, 그는 세상사람들 앞에 너무나 잘 알려진 어느 명사(名士)일 수도 있고, 봉쇄수도원 골방에 숨어사는 수도승일 수도 있다. 또 그는 부랑자 수용소에 갇힌 오명의 과거를 지닌 사람일 수도 있고, 복잡한 시중의 저자거리를 누비며 목청을 높이는 평범한 장사꾼이나 아낙네일 수도 있을 것이다.

 

예수님이 말씀하신 마음이 가난한 사람, 그의 과거가 어떻든, 직책과 신분이 어떻든 간에 무엇보다 먼저 그는 하느님과 사람 앞에 자신의 실존이 누구인지를 아는 사람, 자신의 약함과 허약함을 인정함으로써 자신이 그 누군가의 손에 의하여 구원받아야 할 죄인임을 인정하는 겸손한 사람일 것이다.

그리고 자신을 구원해 줄 신령한 힘의 도우심이 언제나 함께하고, 비록 이 지상에서 모든 것이 실패로 보이고 절망처럼 보이는 곳에서도 희망을 걸 수 있는 믿음을 지닌 사람일 것이다. 그러므로 그의 두 눈은 보이는 것보다 보이지 않는 진실을 더 눈여겨 보고,

 

그의 두 귀는 이 세상 모든 것에 열려 있으되 자신의 이기심에 쏠려 치우치지 않고, 그의 두 손은 끊임없는 창조의 세계로 향하는 조각가처럼 부지런하되 자신의 창조와 생산이 이웃과의 나눔으로써만이 자신의 기쁨이 될 수 있다는 것을 믿는 사람일 것이다.

 

그는 끊임없이 이웃을 위해 봉사하되 이웃을 돕는다고 생각하지 않고, 다만 자신은 이웃과 작은 것을 나눌 수 있는 사람인 것을 인정하고 궁극적으로 하느님만이 인간을 도울 수 있는 분임을 믿는 사람일 것이다. 그의 지혜는 세상이 그를 향해 불러주는 자신의 허명(虛名)에 급급하지 않게 하고, 그에게 주어진 모든 은혜와 은총이 자신의 행복만을 위해서 주어진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아 그의 모습에서는 뽐냄도 비굴함도, 성급함도 나태함도 없는 지극히 평범한 평상심(平常心)으로 자신에게 주어진 소명을 성실히 따르는 사람일 것이다.

 

마음으로 가난한 사람! 그가 만약 그리스도인이라면 그는, 가난 속에 태어나 모멸과 수치의 죽임을 당한 하느님의 아들, 나자렛 예수의 십자가 의미를 깨달은 사람일 것이다. 그가 만약 불자(佛者)라면, 생명있는 모든 것에 불성(佛性)이 깃들어 있다는 석가여래의 자비심이 어떤 것인지를 깨달은 사람일 것이다. 마음이 가난한 사람, 그렇다. 그는 순진무구한 어린이의 마음으로 거듭 태어나려는 끊임없는 자기성찰 속에서 자기를 닦음으로써 이웃을 편안하게 하는 수기안인(修己安人)의 길을 걷는 사람이고, ‘수행해 가려는 노력이 곧 깨달음이다.’라는 수증일등(修證一等)의 성실함을 몸과 마음으로 익혀가는 사람일 것이다.

 

그리하여 그는 서두름도 게으름도 없이 함께 사는 기쁨이 어떤 것인지를 아는 사람으로, 한 손으로는 하느님의 손을 잡고, 또 한 손으로는 이웃의 손목을 잡고, 그분이 예비하신 하느님의 나라를 향하여 가는 하느님의 사람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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