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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꼭필독] 믿음(faith, 신앙)이란 용어의 성경적 자구적 정의(literal definition) 912_faith [교리학습_믿음] [성경공부_믿음] 히브리 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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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8-08 ㅣ No.946

 
참고: 용어들의 의미와 관련하여 상당히 미묘한 부분을 다루고 있는 글이으므로 약간은 어려울 수 있습니다만, 일단 이해를 하시고 나면 성경 본문 중의 한 구절을 읽고 묵상함에 있어 직접적인 첫 연상(first association)의 단계에서 발생하는 사고의 오류를 줄이는 데에 도움이 되는 글이므로, 시간이 있을 때에 많은 분들께서 차분히 읽어 보실 것을 권합니다.
 
"성경"과 "신앙 고백문" 등의 교회의 핵심 문헌들에 사용되고 있는 용어들의 정의(definition)는, 그리스도교를 믿지 아니하는 사람들도 또한 동의하고 받아들일 정도의 보편적이고 추상적이어야 할 것입니다. 그러지 아니하면, 개념들 그 자체에 있어 보편성의 결여로 인하여, 그들로 하여금 그리스도교 신앙을 받아들이도록 이끄는 것 자체가 상당히 힘들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 찬미 예수님
 
전번에 "믿음(faith, 신앙)"과 "믿음(belief, 신념)"의 차이점에 대하여 말씀을 드렸는데, 이번 글에서는 좀 더 구체적으로, "교회가 가르치는 믿음(faith)"을 말할 따에, "믿음(faith)"이라는 용어(terminology)의 성경적 자구적 정의(biblical liteal definition)가 무엇인지에 대하여 살펴 보도록 하겠습니다.
 
그리고 기억하고 계실지 모르겠습니다만, 한참 전에
 
(i) "정의(justice)"의 자구적 정의(literal definition)에 대하여 말씀드린 적이 있었으며,
 
http://ch.catholic.or.kr/pundang/4/soh/799.htm  (클릭하십시오)
[정의(justice)의 정의(definition)에 대하여]
 
http://ch.catholic.or.kr/pundang/4/soh/805.htm  (클릭하십시오)
[서양의 justice는 동양의 義와 같은 개념일까?]
 
그리고
 
(ii) "사랑(charity, caritas, Christian love, agape)"의 자구적 정의(literal definition)에 대히여 말씀드린 적이 있었는데,
 
http://ch.catholic.or.kr/pundang/4/soh/835.htm  (클릭하십시오)
[사랑[(Christian) love]의 정의(definition) 외..]
 
이들에 이어지는 이번의 글에서는 "믿음(faith)"의 성경적 자구적 정의(biblical literal definition)[즉, 윤리적 자구적 정의]에 대하여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참고: (1) "교회가 사용하는 용어들인 믿음(faith), 그리고 더 나아가, 신앙(faith)이란 용어(terminology)들의 교의적 자구적 정의(dogmatic literal definition) 및 윤리적 자구적 정의(moral literal definition)"에 대하여 이미 알고 계시는 분들께서는 더 이상 읽지 않으셔도 좋을 것입니다.

[내용 추가 일자: 2023년 6월 21일]
(2) 다음의 주소에 접속하면, "교회가 사용하는 용어들인 믿음(faith), 그리고 더 나아가, 신앙(faith)이란 용어(terminology)들의 교의적 자구적 정의(dogmatic literal definition)"를 학습할 수 있습니다. 필독을 권고드립니다:
[이상, 2023년 6월 21일자 내용 추가 끝]

1. 먼저 다음의 "가톨릭 교회의 말씀 전례에 따른 성경공부 해설서" (출판사: 가톨릭출판사, 엮은이: 소순태) 다해-II 연중 제19일 제2독서(히브리 11,1-2,8-19)에 대한 입문 및 해설을 함께 읽고 묵상하도록 하겠습니다. 이 글을 작성하게 된 결정적 동기가 히브리서 11,1에 대한 성 요한 크리소스토모(347-407년)의 해설에 있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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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중 제19주일 [다 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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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전 생략)
제2독서 - 히브리 11,1-2,8-19
 
     오늘 우리는 히브리서에 대한 학습을 시작한다. 우리가 히브리서를 7번에 걸쳐 연속으로 약간의 깊이 있게(in any depth) 학습한 마지막 기간은 나해 연중 제27-33주일 동안이었다. 오늘 우리는 본질적으로 지난번에 우리가 그만두었던 곳에서 채택하며, 다해 연중 제19-22주일 동안 네 번에 걸쳐 연속으로 계속한다.2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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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1) 본 해설서 시리즈를 활용한 ‘히브리서’의 학습은 다음과 같이 진행하도록 하라:
(i) 가톨릭 교회의 전례력에 따라 주일 및 중요 대축일에 독서로 발췌되고 있는 모든 성경 본문들에 대한 색인을 제공하고 있는, 본 해설서인 다해-II 해설서의 색인(index)에서 ‘히브리서’ 항목을 찾아 해당 독서들의 입문 및 장(chapters)들과 절(verses)들을 순서대로 학습하도록 하라.
(ii) 그리고 본 해설서 시리즈의 인터넷 각주로 제공되고 있는 홀수 해 연중 제1-4주 주간 제1독서들에 대한 다음의 나바르 주석 성경의 해설들을 학습하도록 하라:
  
http://ch.catholic.or.kr/pundang/4/update/b_baptlord.htm
   http://ch.catholic.or.kr/pundang/4/update/b_ot_2.htm
   http://ch.catholic.or.kr/pundang/4/update/b_ot_3.htm
   http://ch.catholic.or.kr/pundang/4/update/b_ot_4.ht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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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간들은 성경에 있어 첫 번째 인간 저자에 의하여, 그러고 나서는 (두꺼운 단계에서 얇은 단계로) 내림차순의 길이(descending length)의 순서에 따라 배열되어 있다. 히브리서는 바오로의 서간들 이후에 그리고 야고보의 서간 이전에 나타난다. 이는 비록 초기의 전통이, 주로, 이 본문을 성 바오로의 작품으로 돌려졌으나(attributed), 서방 교회가 바오로의 저작권을 4세기에 이르러 비로소 받아들였기 때문이다. 이 서신이 정전(正典, canonicity)임은 의심할 여지가 없으며, 이 서간은, 성 바오로의 다른 저술들 사이에, 트리엔트 공의회(1546년 4월 8일)에 의하여 정경에 포함되었으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공의회는 이것이 바오로에 의하여 저술되었다는 것을 명확하게(categorically) 말하지 않는 것을 선택하였다. (미사 중의 독서에서 이 서간이 어떻게 선포되는지를 주목하라: ‘히브리인들에게 보낸 서간으로부터의 독서’). 하여튼, 누가 이 서간을 작성하였는지는 부차적인 질문(a secondary question)인데 이것은 믿음과 관련된 문제(matters of faith)들과 아무런 관련이 없다.
 
     이 서간은 아마도 이탈리아에서 기원후 63년 이후에 그러나 기원후 70년 이전에 저술되었을 것이다[기원후 67년경 무렵이 좋은 짐작일 것이다]. 이것은 분명히 저자가 알기에 구약 성경에 깊이 빠졌던 사람들에게 보내진 서간이었을 것인데, 이 사람들은 십중팔구 유다주의로부터 개종자들이었으며, 그리고 이전에 사제(priests)들 혹은 레위 자손(Levites)들이었을 것이다. 그리스도인들이 되고 난 이후에, 당시의 어려운 여건들 때문에, 이들은 거룩한 도성인 예루살렘을 포기하여야 하였으며, 다른 장소에 피난처를 물색하여야만 하였을 것이며, 아마도 카이사리아(Caesarea) 혹은 (시리아의) 안티오키아(Antioch)였을 것이다. 이들은 자신들의 망명지에서, 그들의 개종 이전에 그들이 한 부분을 맡았던 제식(cult)의 훌륭함에 대하여, 향수와 함께 그리워하게 된다. 이들은 기만당하였다고(deceived) 느끼고 그리고 자신들의 새로운 믿음을 포기하라는 유혹을 받게 되어, 이들은 이 새로운 믿음 안에 아직 잘 자리 잡지 못한다. 이것에 더하여 자신들의 새로운 믿음 때문에 자신들이 겪게 된 박해로 인하여 그들은 불만을 품게 된다. 분명히, 이들은 도움을 필요로 하며, 그리고 특히, 자신들의 믿음을 기운 내게(bolster) 하는 그리고 불신앙(infidelity)으로의 유혹에 대하여 이들이 대처할 수 있도록 하는, 명확한 교리(doctrine)를 이들은 필요로 한다. 
 
     우리가 지난 해에 히브리인들에게 보낸 서간에 대한 우리의 학습에서 배웠듯이, 히브리서의 기본 가르침은 유다주의에 대한 그리스도교 신앙(Christian religion)의 우수함을 보이는 데에 중심을 두고 있다. 이 논증(argument)은 다음의 세 단계들로 발전된다:

     1) 예수 그리스도, 육화하신 하느님의 아드님, 우주의 왕께서는 ‘하느님
        의 
영광을 반향하시며 그리고 당신의 본성이라는 바로 그 특징이 있으
        시며 그
고 천사  들보다 위대하신(superior) 분이시다. 

     2) ‘집보다도 집의 건축가가 더 영광을 가지듯이’ 그리스도께서는 모세
        보다 
위대 하시다. 

     3) 하느님의 아드님이신 예수님께서는 하늘들을 이미 꿰뚫으셨던 위대한
        대사
제이시다. 당신의 사제직분(priesthood)은 멜키체덱(Melchizedek)
        의 품계
(order, 등급)으로부터인데, 이것은, 레위 사제직분이 유래하
        는, 아론
(Aaron)의 사제직분보다 상급(superior)이다.
 
     (향주 삼덕들 중의 하나인) ‘하느님을 향한 믿음(theological faith)’은 희망(hope)과 밀접하게 연결이 되어 있다.222)223) 오늘, 이 교훈을 마음에 두면서, 우리는 아브라함의 믿음(faith of Abraham)에 대하여 듣는다.2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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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2) (1) ‘theological faith’이라는 표현은, 예를 들면, 2000년 교황청 신앙 교리성 문헌인, ‘주님이신 하느님(Dominus Iesus)’ 제7항에서 사용이 되고 있는데, 이 표현은, ‘성화 은총’에 의하여, 예를 들어, 세례를 받는 자에게 주입되는, 그러나 인간적인 노력만으로는 결코 얻을 수 없는 덕들인, ‘믿음, 희망, 사랑’으로 이루어진 향주 삼덕(theological virtues, 대신덕, 對神德)들 중의 하나인 ‘하느님을 향한 믿음(faith)’을 말한다. 다음의 자료를 클릭하면, 향주 삼덕을 언급하면서 ‘theological faith’, ‘theological hope’, 그리고 ‘theological charity’라는 용어들을 사용하고 있는, 성화은총(sanctifying grace)에 대한 영어 가톨릭 대사전의 설명을 읽을 수 있다:
  
http://ch.catholic.or.kr/pundang/4/ce_sanctifying_grace.htm
   그리고 성 토마스 아퀴나스의 가르침에 따라, 향주 삼덕들에 대하여 설명하고 있는 다음의 책을 또한 참고하라:
  
http://ch.catholic.or.kr/pundang/4/fiatlux2000/Romanus_Cessario_The_Virtues.htm
   (2) 다음은 한국 천주교 주교회의/중앙협의회 제공의 우리말 ‘주님이신 하느님’ 전문 및 교황청 홈페이지 제공의 영어 ‘Dominus Iesus’ 전문이며, 우리말 번역에서 단 두 번 제7항에서 사용되고 있는 ‘theological faith’라는 용어를 애매모호하게 ‘그리스도교 신앙’으로 번역한 것은, 같은 본문 중에 여러 번 사용되고 있는 ‘christian faith’라는 표현을 ‘그리스도 신앙’ 혹은 ‘그리스도교 신앙’으로 또한 번역을 하고 있기에, 전후 문맥상 번역 과정에서 원문에서 구분하고 있는 이들 두 용어들 사이의 개념적 차이 혹은 변별력을 완전히 상실하게 되므로, 번역 오류라는 생각이다:
  
http://ch.catholic.or.kr/pundang/4/cbck/2000Dominus_Iesus_kr.htm (우리말)
  
http://ch.catholic.or.kr/pundang/4/vatican/rc_con_cfaith_doc_20000806_di_en.htm (영어)
   (3) 계시 진리에 근거한 그리스도교의 신자들은 특히, 하나밖에 있을 수 없는 이 유일한 (하느님 중심의) ‘하느님을 향한 믿음(faith, 신앙)’을, 자아를 인식하는 인격체라면 누구나 다 가지고 있을 그러나 개인별로 다를 수 있는 ‘(자기 중심의) 믿음(belief, 신념)’과 분명하게 잘 구분하여야 한다고 ‘주님이신 하느님’ 제7항에서 가르치고 있다는 생각이다.
   (4) ‘성화은총’에 대한 위의 (1)의 가톨릭 대사전 설명에서 ‘theological belief'라는 표현을 사용하지 않고 ’theological faith'라는 표현을 사용한 이유는 다음과 같이, 일반적으로, ‘개념을 나타내는 용어의 정의 방식’ 그 자체로부터 쉽게 이해될 수 있을 것이다. 즉 다음의 Merriam Webster's On Line Dictionary의 설명에 의하면, faith 단어를 설명할 때에 belief 단어를 사용하고 있는데, 일반적으로 faith는, belief와는 달리, 믿는 대상이 참(true)임을 전적으로 신뢰하는 belief이므로, faith는 ‘belief의 특별한 경우’, 즉 ‘belief의 개념에 추가로 요청되는 제한 조건을 만족하여야 하는 개념’임을 알 수 있다. 특히 belief 단어 설명 다음에 주어져 있는 동의어들에 대한 설명들을 참고하라:
  
http://ch.catholic.or.kr/pundang/4/mw/belief.htm
   http://ch.catholic.or.kr/pundang/4/mw/faith.htm
   (5) 믿음(faith, 신앙)과 믿음(belief, 신념)의 차이에 대한 다음의 엮은이의 졸글을 참고하라:
  
http://ch.catholic.or.kr/pundang/4/soh/912.htm

223) 향주 삼덕들 중의 하나인 ‘믿음(faith)’에 대한 가톨릭 교회 교리서 요약집(CCCC)의 가르침은 본 해설서 시리즈의 가해-II 연중 제10주일 3분 복음/교리 묵상에 있으니 참고하라.
 
224) ‘아브라함의 믿음에 대한 순종’과 관련한 가톨릭 교회의 가르침은, 본 해설서 시리즈의 원죄 없이 잉태되신 복되신 동정 마리아 대축일(12월 8일) 3분 복음/교리 묵상 그리고 다음의 가톨릭 교회 교리서(CCC) 제144항에 있으니 참고하라:
   http://ch.catholic.or.kr/pundang/4/c144.ht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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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믿음은 우리가 바라는 것들 보증이며 보이지 않는 실체들 확증입니다. 2 사실 옛사람들은 믿음으로 인정을 받았습니다.
 
“‘믿음(faith)은 우리가 바라는 사물들 본체/실체(realization)이며 보이지 않는 실체들 밖으로의 표시(evidence)입니다. 사실 옛사람들은 믿음으로 인정을 받았습니다.’ 놀랍다(wowee)! 그가 사용하는 표현은! 그는 ‘보이지 않는 본체/실체들의 밖으로의 표시!’이라고 말한다. 매우 명백하게 보이는 것들과의 관련 안에서 밖으로의 표시(evidence, 증거)에 대하여 말하는 것이 통상적이다. 믿음이, 보이지 않는 것들과 함께 가지게 되는(is had with), 충만한 보증(full assurance)이라고 그는 말한다. 보이는 것들을 거부하는 것(disbelieve)도 불가능하지만, 또한, 만약에, 우리가 마치 가장 분명하게 보이는 것들에게 충만하게 설득을 당하듯이, 보이지 않는 것들에게 설득을 당하지 않는다고 한다면, 믿음이 존재할 것이라는 것은 불가능하다. 희망(hope)의 대상(objects)들은 비본체적(unsubstantial)이기에, 믿음(faith)은 이 대상들에게 본체(subtance, hypostasis, 실체)를 허락하는데(favors), 더 정확히 말하면, 믿음은 이 대상들에게 그리 친절하지는 않지만, 그러나 본체(the substance, hypostasis)이다. 예를 들어, 부활은 아직 이루어지지 않고 있으며, 그리고 본체적으로(substantially) 존재하지(exist) 않지만, 그러나 희망(hope)이 이것을 우리의 영혼 안에 존속하게(subsist) 한다. 이것이야말로 그가 ‘우리가 희망하는 바의 본체/실체(realization, substance, hypostasis)’이라고 말할 때에 바로 그가 의미하는 바이다. [성 요한 크리소스토모(Saint John Chrysostom, 403년경), Homilies on the Epistle to the Hebrews 21,2(4)].
 
11,8 믿음으로써, 아브라함은 장차 상속 재산으로 받을 곳을 향하여 떠나라는 부르심을 받고 그대로 순종하였습니다. 그는 어디로 가는지도 모르고 떠난 것입니다. 9 믿음으로써, 그는 같은 약속의 공동 상속자인 이사악과 야곱과 함께 천막을 치고 머무르면서,
 
이사악과 야고보의 믿음이 말하는 김에 언급되고 있다.
 
약속받은 땅인데도 남의 땅인 것처럼 이방인으로 살았습니다. 
 
아브라함의 믿음이 가나안으로 이동하라는 하느님의 명령에 순종함으로써 [아브라함이 의롭다고 선언된 것은 믿음만으로(by faith alone)가 아니라 또한 그 믿음을 실천함으로써 임(by living out)에 주목하라] 그리고, 비록 그가 그 땅에서 오로지 방랑자(wanderer)일 뿐이었으나, 자신의 자손들이 그 땅을 소유할 것이라는 그의 확신에 의하여 예증되고 있다.
 
10 하느님께서 설계자이시며 건축가로서 튼튼한 기초를 갖추어 주신 도성을 기다리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가나안 땅에 아브라함의 체류(stay)는 그의 영구적인 거주가 지상의 어디에서도 아니고, 오직 천상의 도성(천상의 예루살렘)에서일 것이라는 그의 깨달음(realization)에 대한 암시이다.

11 믿음으로써, 사라는 아이를 가지지 못하는 여인인 데다 나이까지 지났는데도 임신할 능력을 얻었습니다. 약속해 주신 분을 성실하신 분으로 여겼기 때문입니다. 12 그리하여 한 사람에게서, 그것도 죽은 것이나 다름없는 사람에게서
 
이사악(Isaac)의 출생 시점에 있어 아브라함의 늙은 나이(100살)에 대한 과장된 묘사.
 
하늘의 별처럼 수가 많고 바닷가의 모래처럼 셀 수 없는 후손이 태어났습니다. 13 이들은 모두 믿음 속에 죽어 갔습니다. 약속된 것을 받지는 못하였지만 멀리서 그것을 보고 반겼습니다. 그리고 자기들은 이 세상에서 이방인이며 나그네일 따름이라고 고백하였습니다. 14 그들은 이렇게 말함으로써 자기들이 본향을 찾고 있음을 분명히 드러냈습니다.
 
“우리 모두는 우리가 기도할 때에 동쪽(the East)을 향하여 바라보나, 그러나 그 이유가 하느님께서 동쪽에 에덴(Eden)에 건설하셨던 우리 고유의 이전의 땅인 낙원(Paradise)(창세기 2,8)을 기다리고 있기 때문인 것을 알고 있는 사람은 드물다. 한 주일의 첫 날에(즉, 주님의 날인 주일에), 우리가 기도할 때에 우리는 일어서나, 그러나 우리 모두가 그 이유를 아는 것은 아니다. 그 이유는 부활의 날에, 기도 중에 일어섬으로써, 우리는 우리가 이미 받았던 은총에 대하여 자기 자신들에게 생각나게 하고자 하기 때문이다.” [성 바실리오(Saint Basil the Great, 375년), The Holy Spirit 27,66].
 
15 만일 그들이 떠나온 곳을 생각하고 있었다면, 돌아갈 기회가 있었을 것입니다. 16 그러나 실상 그들은 더 나은 곳, 바로 하늘 본향을 갈망하고 있었습니다.
 
이스라엘 민족의 선조들 모두는 자신들의 본향(homeland)이 하늘에 있다고 인정하였다.
 
그래서 하느님께서는 그들의 하느님이라고 불리시는 것을 부끄러워하지 않으시고, 그들에게 도성을 마련해 주셨습니다. 17 믿음으로써, 아브라함은 시험을 받을 때에 이사악을 바쳤습니다. 약속을 받은 아브라함이
 
아브라함의 믿음은 하나의 모범적인 사례(a classic case)이다. 하느님의 약속의 구현에 대한 그의 희망들이 이 소년과 밀접한 관계가 있었으나 그러나 아브라함은, 믿음을 통하여, 하느님께서 그에게 하느님의 계획을 실천할 것을 지시하고 계신 중임을 알았다.

외아들을 바치려고 하였습니다. 18 그 외아들을 두고 하느님께서는 일찍이, “이사악을 통하여 후손들이 너의 이름을 물려받을 것이다.”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19 아브라함은 하느님께서 죽은 사람까지 일으키실 수 있다고 생각하였습니다. 그리하여 이사악을 하나의 상징으로 돌려받은 것입니다.
 
저자는 죽음으로부터 이사악의 구출을 그리스도의 부활에 대한 하나의 상징(symbol)으로 이해한다.
 
 ...
 
(이후 생략)
 
2. 위의 다해-II 연중 제19일 제2독서(히브리 11,1-2,8-19)의 제1절은 다음과 같습니다:
 
"믿음은 우리가 바라는 것들 보증이며 보이지 않는 실체들 확증입니다."
 
     그런데 이 절에 대한 성 요한 크리소스토모의 해설이 상당히 유의미 하기에, 즉 "믿음(faith)"의 성경적 자구적 어의(biblical literal sense)"에 대하여 언급을 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어, 우선 우리말로 위와 같이 번역된 표현을,
[내용 추가 일자: 2022년 8월 6일]
대중 라틴말 성경(Clementine Vulgate), Douay-Rheims Bible, 1611년 초판의 King James Version, RSV 및 NAB 성경들, 그리고 새 대중 라틴말 성경(Nova Vulgata)에서, 어떻게 번역이 되었는지를 살펴 보기로 하였습니다:

(대중 라틴말 성경(Clementine Vulgate)
est autem fides sperandorum substantia rerum argumentum non parentum.

(Douay-Rheims Bible)
Now, faith is the substance of things to be hoped for, the evidence of things that appear not.

(1611 King James Version)
Now faith is the substance of things hoped for, the evidence of things not seen.
 
(Revised Standard Version)
Now faith is the assurance of things hoped for, the conviction of things not seen.
 
(New American Bible)
Faith is the realization of what is hoped for and evidence of things not seen.

(새 대중 라틴말 성경(Nova Vulgata))
Est autem fides sperando rum substantia, rerum argumentum non apparentium.
[이상, 2022년 8월 6일자 내용 추가 끝]
 
     이들의 비교/검토로부터 우리는, 먼저 "공동번역성서"와 "성경"의 우리말 번역은 RSV에 번역된 영어 표현과 거의 대동소이함을 즉시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 절에 대한 NAB의 주석이 또한 상당히 중요하다는 생각입니다. 이 구절에 대한 다음의 NAB 주석을 함께 읽어 보도록 합시다:
 
[1] Faith is the realization . . . evidence: the author is not attempting a precise definition. There is dispute about the meaning of the Greek words hypostasis and elenchos, here translated realization and evidence, respectively. Hypostasis usually means "substance," "being" (as translated in Hebrews 1:3), or "reality" (as translated in Hebrews 3:14); here it connotes something more subjective, and so realization has been chosen rather than "assurance" (RSV). Elenchos, usually "proof," is used here in an objective sense and so translated evidence rather than the transferred sense of "(inner) conviction" (RSV).
 
(졸번역)
[1] Faith is the realization . . . evidence: 인간 저자는 정확한 정의를 시도하고 있지 않다.  여기서 각각 본체/실체(realization)밖으로의 표시(evidence)로 번역이 된 그리스어 단어들 hypostasis elenchos 의 의미에 대하여 논란이 있다. Hypostasis"본체/실체(substance)," (히브리 1,3에서 번역되었듯이) "있음(being, 유)", 혹은 (히브리 3,14에서 번역되었듯이) "실재(reality)"를 통상적으로 의미하나, 그러나 여기서는 더 주관적인(subjective) 어떤 것을 암시하기에, 그리하여 그 결과 오히려 "보증(assurance)"(RSV)보다는 본체/실체(realization)가 선택되어졌다. 통상적으로 "증거(proof)"를 의미하는, Elenchos객관적인(objective) 의미로 여기서 사용되고 있기에 그리하여 그 결과 오히려 "(내적) 확신[(inner) conviction]"이라는 전이된 의미(transferred sense)보다는 밖으로의 표시(evidence)로 번역되어졌다. (이상 번역 끝).

참고: 이 주석의 흥미로운 사실은, "믿음(faith)"이란 용어에 대한 성경 본문 중의 사용을 설명함에 있어서도, 전번에 "정의(justice)"에 대하여 말씀드릴 때에도 제가 이해를 돕기 위하여 도입하였던 바와 같이, "주관적 존재로서의 나(I)"와 "(객관적 존재로서의) 너(you)" 양쪽의 입장을 동시에 반영하여 설명하고 있음에 있을 것입니다.
 
3. 다른 한 편으로, 사정이 이러하다면, 가톨릭 교회 교리서 요약집(CCCC)와 가톨릭 교회 교리서(CCCC)에서 이 히브리서 11,1에 대하여 어떻게 언급하고 있는지를 살펴 보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어, 가톨릭 교회 교리서(CCC)의 내용들에 대한 평소의 기억도 되살리면서, 검색을 하여 찾아 보기로 하였습니다. 가톨릭 교회 교리서 요약편(CCCC)의 본문 중에는 믿음의 정의에 대한 언급은 없었던 것으로 기억하며, 다음은 가톨릭 교회 교리서(CCC) 본문에 대한 검색 결과입니다:
 
CCC 146 Abraham thus fulfills the definition of faith in Hebrews 11:1: "Faith is the assurance of things hoped for, the conviction of things not seen": "Abraham believed God, and it was reckoned to him as righteousness." Because he was "strong in his faith", Abraham became the "father of all who believe".
 
(졸번역)
CCC 146 따라서 아브라함은 다음과 같은 히브리서 11,1에 있는 믿음(faith, 신앙)의 정의(definition)을 구현한다: "믿음이란 우리가 바라는 사물들의 본체/실체(realization)를 말하며, 보이지 않는 사물들의 밖으로의 표시(evidence)를 말합니다"(*): "아브라함이 하느님을 믿으니, 하느님께서 믿음을 의로움으로 인정해 주셨다"(로마 4,3).  그는 "자신의 믿음에 있어 굳세었기에", 아브라함은 "믿는 이들 모두의 아버지"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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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번역자 주: 이 번역은, 히브리 11,1에 대한 NAB 주석, 성 요한 크리소스토모의 해설, 그리고 Merriam-Webster's Unabridged Dictionary에 실린 evidence 단어의 사전적 설명에 따른, NAB 히브리서 11,1의 우리말 번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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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 성 바오로가 로마서에서 가르치는 의화(justification)는, "자신이 들은 하느님의 말씀에 기꺼이 순종하는, 그리하여 행동으로 실천하는, 바로 이 아브라함의 믿음"을 말하는 것이지, 예를 들어 성 바오로가 또한 로마서에서 구체적으로 지적하였던 바인, 구약 시대의 바리사이들 및 율법학자들이 제시하였던 모세 율법의 613 계명들에 따른 실천들이 자신들을 의롭게 한다는 등의, 이 아브라함의 믿음 (그리고 성모 마리아의 믿음)과는 다른, 어떤 다른 믿음(a different faith)을 말하는 것이 아님을, 또한 반드시 유념하십시오. 이에 대한 더 자세한 내용은 다음에 있는 글을 필히 읽도록 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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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결론) 이상, 지금까지 살펴본 자료들로부터 그리 어렵지 않게 알 수 있는 바들은 다음과 같습니다:
 
[내용 보강 일자: 2022년 8월 6일]
4-1. 위의 제2항에서 많이 부족한 죄인이 추가적으로 확인한 바에 의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1611년에 그 초간된 영어본 성경인 KJV (King James Version) 히브리서 11,1은 대중 라틴말 성경(Clementine Vulgate)와 정확하게 동일하나, 그러나 예상밖으로, 1950년대에 출판된 영어본 성경인 RSV (Revised Standard Version)의 히브리서 11,1의 영어 표현이 대단히 심각한 번역 오류임은, 1970년에 NAB (New American Bible)이 출판되면서 바로잡아졌음으로부터 확인된다는 생각이며, 그리고 또한 1992년에 프랑스어본 초판이 발행되었고 1997년에 발행된 라틴어 정본 "가톨릭 교회 교리서 제146항"에서 발췌 되고 있는 라틴어본 히브리서 11,1은, 다음의 주소들에 접속하면 확인할 수 있듯이, 기존의 대중 라틴말 성경(Clementine Vulgate)1979년에 그 초간이 발행된 새 대중 라틴말 성경(Nova Vulgata) 둘 다의 본문과 정확하게 동일합니다:
http://www.latinvulgate.com/verse.aspx?t=1&b=19&c=11 

게시자 주 4-1: 이제 다음의 주소에 접속하여, 성 토마스 아퀴나스(1225-1274년)"신학 대전"(Summa Theologiae) 중의 유관 부분들을 그리 어렵지 않게 학습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상, 2022년 8월 6일자 내용 보강 끝]
 
4-2. 1970년에 이미 마련되어 NAB의 초판 발행에 또한 함께 제공되고 있는 NAB 주석이, 히브리서 11,1에 대한 NAB의 주석에서, 비록 인간 저자가 faith의 정확한 정의를 시도하고 있지 않다고 하고 있으나, 그러나
 
4-3. 1992년에 초판 발행된, 그리고 1997년에 라틴어 정본이 발행된, 가톨릭 교회 교리서(CCC) 제146항에서는, 어떤 지역 언어로의 번역 이전에, faith의 성경적 정의가 히브리서 11,1에 주어져 있다고 명기하고 있습니다.
 
4-4. 따라서 가톨릭 교회 교리서에서 말하는 이 단어에 대한 정의(definition)란, 이 단어의 성경적 자구적 의미(biblical literal sense)를 말하는 것이지, 이 자구적 의미에 근거하고 있는 (내재된) 영적 의미(spitirual sense)를 말하고 있지 않습니다.

4-5. (최종 결론) 따라서 "믿음(faith, 신덕)"이란 용어에 대한 이러한 성경적 자구적 의미(biblical literal sense) 위에 영적 의미(spiritual sense), 즉, 영적 욕구(spiritual appetite), 즉, 하느님 쪽으로 향하는 의지(the will)의 동의가 추가되면, 그 때부터는 단순한 성경적 자구적 의미의 믿음이 아니라, "신앙(faith, 신덕)"이라는 의미를 또한 가지게 될 것이라는 생각입니다.
 
즉, 바로 이 성경적 자구적 의미(biblical literal sense)의 믿음(faith)의 정의(definition)에 있어,

(i) 그 권위(the authority)가, 진리 그 자체인, 하느님이며,

(i) 그 대상으로서, 부활, 하늘(천당), 영원한 구원, 영원한 생명/삶 등이 우리가 희망하는/바라는 바들이고, 그리고  
 
(ii) 본체화/실체화된 보이지 않는 이러한 개념들이 의지(will)의 동의(assent)와 함께 하느님 쪽으로 바깥으로 표출 될/실천될 때에,
 
"그러한 믿음"은 비로소 "신앙(faith)"으로 불리게 될 것입니다.
 
따라서, 예를 들어, 이번 글에서 함께 살펴 본 바에 의하면, 영어로 "the deposit of faith"로 번역되는 표현을, "믿음의 유산"으로 번역하지 않고 대신에, "신앙의 유산"으로 번역해 온 이유를 또한 알게 되었다는 생각입니다. 그리고 영어로 "the profession of faith"로 번역되는 표현을, "믿음 고백"으로 번역하지 않고 대신에, "신엉 고백"으로 번역해 온 이유를 알게 되었다는 생각입니다.
 
그러므로 이번 글은 사실은, 개념적으로 더 엄밀하게 말한다면, 믿음(faith)신앙(faith)의 차이점에 대한 글이기도 합니다.
 

[내용 추가 일자: 2014년 7월 11일]

4-6. 그리스도교 "신앙(faith, 신덕)"정의(definition)가 또한 주어져 있는, "믿음(faith)" 과 "신앙(faith, 신덕)",  즉, "믿다(believe)" 와 "쪽으로 믿다(believe in)"의 차이점에 대한 성 아우구스티노(St. Augustine)의 가르침은 다음에 있으니 필독하라:
http://ch.catholic.or.kr/pundang/4/soh/1548.htm <----- 필독 권고
[이상, 2014년 7월 11일자 내용 추가 끝]

 
참고: 저의 개인적 경험에 비추어 볼 때에, 가톨릭 교회 교리서 분문 전체에 걸쳐, 가톹릭 교회 교리서 제146항에서처럼 어떤 특정 단어의 성경적 자구적 정의(definition)에 대하여 이렇게 분명하게 언급하고 있는 경우는 아마도 이번의 경우뿐인 것으로 생각됩니다.
  
그리고 "정의(justice)"의 경우와는 달리, 다행스럽게도 이번의 경우에 있어서는,
 
(i) 위의 제1항에서 학습하게 된 성 요한 크리소스토모의 히브리서 11,1에 대한 해설,
 
(ii) 히브리서 11,1에 대한 NAB의 주석, 그리고 
 
(iii) 가톨릭 교회 교리서(CCC) 제146항에서 "믿음(faith)"이라는 용어의 성경적 자구적 정의(definition)가 바로 히브리서 11,1에 주어져 있음에 대한 구체적 명기가,
 
쉽게 결론에 도달하게 하였다는 생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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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용 추가일: 2010년 8월 17일]
다음은위에서 말씀드린, 보편적/일반적 용어로서의 믿음(faith, 신뢰)에 대한 성경적 자구적 정의(biblical literal definition) 위에다가톨릭 교회의 전통적 신학에 의하여, 추가적으로 영성적 의미(spiritual sense)로서 정의되는(is defined), 그것의 내면적 작용에 의하여 우리가 신앙(faith, 신덕)을 가지게 되는, 초자연적 덕이고 주부덕인, 그리스도교 신앙(faith, 신덕), 즉, 향주삼덕들을 중의 한 덕인, 신학적 믿음(theological faith, 신덕, 신앙)에 대한, 나바르 성경 주석서의 히브리서 11,1에 대한 해설로서, "가톨릭 교회의 말씀 전례에 따른 성경공부 해설서" 다해-II (출판사: 가톨릭출판사, 엮은이: 소순태)의 인터넷 각주인,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클릭하십시오).

대단히 좋은 내용이니, 시간을 내어서라고 여러 번 꼭 읽어 보실 것을 권합니다. 독자들의 이해를 도와드리고자 우리말 번역은 제가 한 것입니다:

(발췌 시작) 
1. Although the text does not aim to provide a precise definition of faith, it does in fact very clearly describe the essence of that virtue, linking it to hope in future things and to certainty concerning supernatural truths. By means of faith, the believer acquires certainty concerning God's promises to man, and a firm conviction that he will obtain access to heaven. The Latin translates as "substantia" the word the RSV translates as "assurance"; "substantia", which literally means "that which underlies", here refers to the solid basis provided by hope.
 

1. 비록 이 본문이 믿음(faith, 신앙, 신덕)에 대한 정확한 정의(definition)를 제공하고자  하는 것은  아니나,(*) 이 본문은 사실은 바로 이 덕의 핵심을, 미래의 것들에 대한 희망으로  그리고 초자연적 진리(supernatural truths)들에 관한 확실성(certainty)으로 연결시킴으로써, 매우 분명하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신앙(faith, 신덕)에 의하여, 믿는  이(the believer)는 사람을 향한 하느님의 약속들에 관한 확실성을 습득(acquires)하며,  그리고 그가 하늘(heaven, 천당)(**)로의 접근을 획득할 것이라는 강한 확실성을 습득합니다. 라틴어 불가타 성경RSV 성경이 "assurance(보증)"으로 번역한 단어를 "substantia"로  번역하고 있는데, 글자 그대로 "that which underlies (기초가 되는 것)"을 의미하는,  "substantia"는, 여기서 희망(hope, 망덕)에 의하여 제공되는 견고한 기초를 말합니다.

 

[내용 추가 일자: 2014년 7월 11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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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번역자 주: 그리스도교 "신앙(faith, 신덕)"정의(definition)가 또한 주어져 있는 "믿음(faith)" 과 "신앙(faith, 신덕)", 즉, "믿다(believe)" 와 "쪽으로 믿다(believe in)"의 차이점에 대한 성 아우구스티노(St. Augustine, 354-430년)의 가르침과 성 토마스 아퀴나스(St. Thomas Aquinas, 1225-1274년)의 저술인 신학 대전(Summa Theologica)에서의 가르침은 다음에 있으니 필독하라:
http://ch.catholic.or.kr/pundang/4/soh/1548.htm <----- 필독 권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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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 2014년 7월 11일자 내용 추가 끝]


[내용 추가 일자: 2016년 5월 15일]
(**) 번역자 주: "천국(하늘나라)"이 영어로 "kingdom of heaven(하늘 나라)"으로   번역되는 용어의 차용 한자 번역 용어임에 대한 중대한 지적의 글은 다음에 있으니   꼭 읽도록 하라:
http://ch.catholic.or.kr/pundang/4/soh/1661.htm <----- 필독 권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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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 내용 추가 끝]

 

This verse indicates that faith, which is a type of knowledge, is different from other types of human knowledge. Thus, man can know things by direct evidence, by reasoned proof or by someone else's testimony. As regards knowledge based on information provided by someone else, that is, knowledge based on faith, we can distinguish two types--human faith, when it is another human being whose word one relies on (as in the case of pupil/teacher, child/parent), and supernatural faith (when the testimony comes from God himself, who is Supreme Truth). In this latter case the knowledge provided is most certain.

 

이 절은, 지식(knowledge)의 한 종류인 신앙(faith, 신덕)이 인간의 지식의 다른 종류들과  다름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따라서, 사람은 직접적인 증거들에 의하여, 추론된 증명 (reasoned proof)에 의하여 혹은 다른 어떤 이의 증언에 의하여, 사물(things)들을 알 수  있습니다. 다른 어떤 이에 의하여 제공된 정보에 기초를 둔 지식, 즉, 믿음(faith)에  기초를 둔 지식에 관하여 말하면, 우리는 다음의 두 종류를 구분할 수 있습니다 --  (학생/선생, 아이/부모의 경우에 있어서 처럼) 그것이, 그의 말에 우리가 의지하는, 다른  인간일 때인, 인간적한 믿음(human faith), 그리고 (증언이, 최상의 진리이신, 하느님  당신 자신으로부터 올 때인) 초자연적 믿음[supernatural faith, 즉, 신성적 믿음(divine faith)]. 바로 이 후자의 경우에 제공되는 지식이 가장 확실합니다.

 

However, the object of supernatural faith, that is, what one believes in (God and the unchanging decrees of his will), is not something that is self-evident to man, nor is it something that can be attained by the use of unaided reason. That is why it is necessary for God himself to bear witness to what he reveals. Faith, then, is certain knowledge, but it is knowledge of things which are not self-evident, things which one does not see but which one can hope for.

 

그러나 초자연적  믿음(즉, 신앙)의 대상은, 즉 (하느님과 자신의 의지의 변하지 않는 정도들에  대하여) 우리가 믿는 바는, 사람에게 자명한(self-evident) 어떤 것이 아니며, 그리고  도움을 받지 않은 이성(reason)의 사용에 의하여 얻을 수 있는 어떤 것이 아닙니다.  이것이 하느님 당신 자신께서 당신께서 드러내시는 바에 대하여 증거하실 필요가 있는  바로 그 이유입니다. 따라서(then), 신앙(faith, 신덕)은 어떤 지식(knowledge)이나, 그러나  이것은 자명하지 아니한 것들에 대한, 우리가 보지 못하는 그러나 우리가 희망할(hope) 수 있는 것들에 대한, 지식을 말합니다.

 

The verse also says that faith is "conviction" concerning things not seen. It is therefore different from opinion, suspicion or doubt (none of which implies certainty). By saying that it has to do with things unseen, it is distinguishing faith from knowledge and intuitive cognition (cf. "Summa Theologiae", II-II, q. 4,a. 1).

 

이 절은 또한 신앙(faith, 신덕)이 보이지 않는 것들에 관한 "확증(conviction, 확실한 증거)" 이라고 말합니다. 따라서 이것은 견해(opinion) 혹은 의심(doubt)과는 다릅니다 [이들 중의 어떤 것도 확실성(certainty)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이것이 보이지 않는 것들과 관련이 되어있음을 말함으로써, 이 절은 지식(knowledge)과 직관적인 인식(intuitive cognition)으로부터 신앙(faith, 신덕)을 구분하고 있습니다. [성 토마스 아퀴나스(St. Thomas Aquinas), "신학 대전(Summa Theologiae)", II-II, q.4, a.1 을 참조하라].

 

Summing up, we can say that "when God makes a revelation, we are obliged to render by faith a full submission of intellect and will. The faith, however, which is the beginning of human salvation, the Catholic Church asserts to be a supernatural virtue whereby, with the inspiration and help of God's grace, we believe that what he has revealed is true--not because its intrinsic truth is seen by the natural light of reason, but because of the authority of God who reveals it, of God who can neither deceive nor be deceived" (Vatican I, "Dei Filius", chap. 3).

 

요약하면, 우리는 다음과 같이 말할 수 있습니다: "하느님께서 드러내실 때에, 우리는 신앙(faith, 신덕)에 의하여(by faith) 지성(intellect)과 의지(will)의 완전한 복종을 다할 의무가 있습니다 [가톨릭 교회 교리서 143항; 특히, 가톨릭 교회 교리서 제142항의 마지막 문장에 주어진 믿음(faith)의 교의적 자구적 정의(dogmatic literal definition)를 필히 참조하라](*).  그러나, 인류 구원의 시작인, 가톨릭 교회가 초자연적 덕(supernatural virtue) 이라고  단언하는 그리하여, 하느님의 은총에 의한 영감과 도움으로, 이성(reason)이라는 자연의  빛에 의하여 그 본질적인 진리가 이해되기 때문이 아니라, 그것을 드러내시는 하느님의  권위(authority) 때문에, 우리를 속이실 리도 없으시며 그리고 속임을 당하실 리도  없으실 하느님의 권위 때문에, 당신께서 드러내신 바가 진리임을 믿는, 신앙(faith, 신덕)."  [제1차 바티칸 공의회 (Vatican I), "Dei Filius", chap. 3].


[내용 추가 일자: 2023년 6월 21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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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번역자 주: 다음의 주소들에 접속하면, 이에 대하여 학습할 수 있다. 둘 다 필독을 권고드린다:

http://ch.catholic.or.kr/pundang/4/soh/3202.htm <----- 꼭 필독 권고


그리고

 

http://ch.catholic.or.kr/pundang/4/soh/literal_sense_of_faith_vs_moral_sense_of_faith_1555.htm <----- 꼭 필독 권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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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 2023년 6월 21일자 내용 추가 끝]

It is, therefore, a feature of faith that it makes as certain about things which are not self-evident. That is why in order to believe one must want to believe, why the act of believing is always free and meritorious. However, faith can, with God's help, reach a certainty greater than any proof can provide. 'This faith", St John of Avila comments, "is not based on reasons [...]; for when a person believes on the basis of reasons, he is not believing in such a way that he is totally convinced, without any doubt or scruple whatever. But the faith which God infuses is grounded on divine Truth, and it causes one to believe more firmly than if one saw it with one's own eyes, and touched it with one's hands--and to believe more certainly than he who believes that four is greater than three, the sort of thing that is so obvious that the mind never hesitates a moment, nor can it even if it wants to" ("Audi, Filia", chap. 43).

 

그러므로 자명하지 아니한 것들에 관하여 확실하게 만드는 것이 바로 신앙(faith, 신덕)의 특징입니다. 이것이  믿기(believe) 위하여 우리는 믿는(believe) 것을 원하여야 하는 바로 그 이유이며, 믿는 행위(believing)가 항상 자유로우며 그리고 칭찬할 만한  일인 바로 그 이유입니다. 그러나 신앙(faith, 신덕)은, 하느님의 도우심과 함께, 어떠한 증명이 제공할 수 있는 것 보다 더 커다란 어떤 확실성(a certainty)에 도달할 수 있습니다.  아빌라의 성 요한(St. John of Avila)은 다음과 같이 주석하였습니다: "이 믿음(faith,  신덕)은  추론(reasons)들에 근거한 것이 아닌데 [...]; 이는 어떤 자가 추론들에 근거하여 믿을 (believe) 때에, 그는 자신이, 아무런 의심 혹은 조금의 주저함 없이, 전적으로 확신하게 되는 그러한 방식으로 믿고 있는(is believing)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 주입하시는(infuses) 믿음(faith)(즉, 신앙, 신덕)은 하느님의 거룩한 진리에 기반을 두고 있으며,  그리고 이것은 우리로 하여금 우리가 우리 고유의 눈들로 보았을 때보다, 그리고 자신의  손들로 만졌을 때보다 더 확고하게 믿게(believe) 하며 -- 그리고, 너무도 명백하여 한  순간도 마음이 전혀 머뭇거리지도 않으며, 그리고 심지어 마음이 원하더라도 전혀  그럴 수 없는 그러한 종류의 것인, 숫자 4는 숫자 3보다 더 큼을 믿는(believes) 자보다 더 확실하게 믿게 (believe) 합니다." ["Audi, Filia", chap. 43].


The faith which God gives a person--supernatural faith--is necessarily the point of departure for hope and charity: it is what is usually called "living faith". When one lives with this kind of faith it is easy to see that the three "theological" virtues (faith, hope and charity) are bound up with one another. Faith and hope lead a person to unite himself to God as the source from which all good things flow; charity unites us to God directly, by loving affection, because God is the supreme Good. Faith is as it were the first step: it means accepting what God says as true. We then unite ourselves to him through hope, insofar as we rely on God's help to attain beatitude. The goal of this process is charity, the fullness of which is eternal possession of God, the Supreme Good.

하느님께서 한 인격체(a person)에게 주시는 이 신앙(the faith, 신덕), 즉, 초자연적 믿음 (supernatural faith) 은 필연적으로 희망(hope, 망덕)사랑(charity, 애덕) 쪽으로 향하는 출발점이며, 그리고 이것이 보통 "살아있는 믿음(living faith)"으로 불리는 바 바로 그것입니다. 우리가 바로 이러한 종류의 믿음(faith)과 함께 살아갈 때에 세 개의 "신학적/대신/향주3(theological) 덕[믿음(신덕, 신앙), 희망(망덕) 그리고 사랑(애덕)]들이 서로에게 밀접하게 결속되어 있음을 쉽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신앙(faith, 신덕)희망(hope, 망덕)은, 자기 자신을, 모든 좋은 것들이 흘러나오는 원천으로서의 하느님께로 결합하도록, 한 인격을 인도하며, 그리고 사랑(charity, 애덕)은 직접적으로 우리를, 사랑하는 정의(情意)(loving affection)으로써, 하느님께 결합시키는데, 이는 하느님께서는 지고의 선(Good)이기 때문입니다. 신앙(faith, 신덕)은, 말하자면, 그 첫 단계이며, 그리고 이것은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진리로서 말씀하시는 바를 받아들임을 의미합니다. 따라서, 우리가 참 행복(beatitude)을 얻고자 하느님의 도우심에 의존하는 한, 우리는 희망(hope, 망덕)을 통하여 우리 자신을 당신께 결합시킵니다. 이러한 과정의 목표(the goal), 그 충만함이 지고의 선(Supreme Good)이신 하느님을 영원히 소유함을 말하는, 사랑(charity, 애덕)[즉, 하느님이 사랑받게 되는 사랑]에 있습니다.

"Let us grow in hope, thereby strengthening our faith which is truly 'the assurance of things hoped for, the conviction of things not seen' (Heb 11:1). Let us grow in this virtue, let us beg our Lord to increase his charity in us; after all, one can only really trust what one loves with all one's might. And it is certainly worthwhile to love our Lord" (St. J. Escriva, "Friends of God", 220). 

"망덕(희망) 안에서 자라도록 하여, 그렇게 함으로써 진실로 '우리가 바라는 것들의 보증이며 보이지 않는 실체들의 확증'(히브리 11,1)인 우리의 신앙(faith, 신덕)을 강화하도록 합시다. 이 덕 안에서 자라도록 하고, 우리 안에 당신의 애덕(charity, 사랑)을 증대해 주실 것을 우리의 주님께  청원하여, 결국에, 전력을 다하여 우리가 사랑하는 바를 우리가 오로지 실제로 신뢰할 수  있도록 합시다. 그리고 우리의 주님을 사랑하는 것은 확실하게 애쓸 가치가 있습니다" [St. J. Escriva, "Friends of God", 220].


If hope in general is the conviction of being able to obtain something worthwhile in the future, something difficult to obtain, theological hope is the conviction of being able, with the help of God, to attain heaven. And faith is precisely what provides certain knowledge of those two truths--that heaven is our goal and that God wants to help us to get there (cf. "Summa Theologiae", II-II, q. l7, a 5 and 7). Therefore, nothing should dishearten us on this road to our ultimate goal because we put our trust in "three truths: God is all-powerful, God has a boundless love for me, God is faithful to his promises. And it is he, the God of mercies, who enkindles this trust within me, so that I never feel lonely or useless or abandoned but, rather, involved in a plan of salvation which will one day reach its goal in Paradise" (John Paul I, "Address", 20 September 1978).

 

일반적으로 희망(hope)이 미래에 가치가 있는 어떤 것을, 획득하기 어려운 어떤 것을, 얻을 수 있음에 대한 확신(conviction)이라면, 신학적 희망(theological hope, 망덕)은, 하느님의 도움과 함께, 하늘(heaven, 천당)을 획득할(attain) 수 있음에 대한 확신(conviction)을 말합니다. 그리고 신앙(faith, 신덕)은, 하늘(heaven, 천당)이 우리의 목표이며  그리고 거기에 도달하도록 우리를 도와주는 것을 하느님께서 원하신다는, 이들 두  진리들에 대한 어떤 지식(certain knowledge)을 제공하는 바 바로 그것을 말합니다.  ["신학대전(Summa Theologiae)", II-II, q. l7, a 5 and 7을 참고하라].  그러므로, 우리의  궁극적인 목표를 향한 이러한 길에 있어 어떠한 것도 우리를 낙심시키지 못할 것인데  이는 우리가 다음과 같은 "세 개의 진리들"에 우리의 신뢰를 두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전능하시며(all-powerful), 하느님께서는 나를 위한 무한한 사랑(love)을  가지고 계시며,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약속들에 충실하십니다. 그리고 나의 안쪽에  이러한 신뢰에 불을 붙이시는, 그리하여 제가 전혀 외롭다거나 혹은 소용없다거나 혹은 버려졌다고 결코 느끼는 것이 아니라, 이보다는 오히려, 언젠가는 낙원에 대한 그 목표에 도달할 구원 계획에 개입되어 있음을 느끼게 하고자 하시는 분이, 자비의 하느님이신, 바로 당신이십니다" [John Paul I, "Address", 20 September 1978].

(아상, 발췌 끝)
[이상, 내용 추가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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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교수 소순태 마태오 (Ph.D.)
작업에 소요된 시간: 약 16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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