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上宰相書(상재상서) 2/2 - 정하상(丁夏祥 정바오로丁保祿) 792_ [교리용어_사욕편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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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12-22 ㅣ No.1313



<< 부록 2 >>

출처: http://blog.naver.com/PostView.nhn?blogId=panem&logNo=70147977330


정하상 (丁夏祥) 上宰相書(상재상서)

上宰相書(상재상서)는  '재상에게 올리는 글'이라는 뜻으로 한국 최초의 천주교 신자 중 하나였던 정하상(丁夏祥)이 당시 박해받던 천주교를 변호하기 위하여 쓴 호교론서(護敎論書)로서 기해박해(己亥迫害) 때에 박해의 주동자인 우의정(右議政) 이지연(李止淵)에게 가톨릭교 교리의 정당성을 알리고자 작성한 글입니다. 정하상은 체포될 것을 예상하고 미리 이 글을 작성해두었다가 1839년(헌종 5) 6월 1일 체포된 다음날 종사관(從事官)을 통하여 재상인 이지연(李止淵)에게 전달하게 합니다.

한문으로 처음 쓰인 이 글은 별첨형식의 우사(又辭)까지 합쳐 모두 3,400여 자에 불과한 짤막한 글인데, 천주교 기본교리에 대한 설명, 호교론, 신교(信敎)의 자유를 호소한 세 부분으로 나누어져 천주학(天主學)의 진수를 밝히는 박력 있는 명문장입니다. 특히 마지막 부분에서는 가톨릭교가 조선의 주자학적(朱子學的) 전통에 크게 어긋나는 것이 아니며, 사회윤리를 바르게 하는 미덕(美德)이 가톨릭교의 정신 속에 포함되어 있음을 변증하면서, 신앙의 자유를 호소하는 애절한 내용을 담고 있는데 이는 일종의 신앙고백서라고도 볼 수 있는 것으로서, 당시 천주교도들의 신앙을 이해하는 데 중요한 자료가 되고 있습니다. 이 글은 19세기 중반의 천주교 교인들의 신앙에 대한 열정과 교리에 대한 이해도를 가늠하는 중요한 자료가 되는데, 1887년 홍콩에서 정하상의 약전을 첨가하여 출판되어 중국의 선교에 널리 이용되었습니다. 국내에서는 블랑(Blanc, M. J. G.)주교의 서명이 들어 있는 필사본과 한글역본 등도 전해집니다.
 

 
정하상의 이 글은 벽위편(闢衛編)에도 실려있습니다. 벽위편이란  18세기 말엽에서 19세기 중엽까지의 천주교 신앙운동을 탄핵하는 여러 문헌들을 모은 책인데 사도(邪道)를 물리치고 정도(正道)를 옹호한다는 ‘벽사위정(闢邪衛正)’의 준말을 표제로 한 것으로 정조·순조·헌종 3대에 걸쳐 천주교 박해에 관한 조야(朝野)의 문서(文書)를 당시의 유학자(儒學者) 이기경(李基慶)이 모은 책입니다.

원래 <조선본총사 朝鮮本叢史>중 제48~50책 부분에 <벽위휘편 闢衛彙編>이라 하여 수록되었으나 일본 도쿄 제국대학(東京帝國大學)에 보관 중 1923년에 지진으로 소실되어, 편자의 아들 이만채(李晩采)의 가장본(家藏本)을 다시 출판했습니다.
 
이 글은 원래 한문으로 쓰였으나, 한글 필사본이 전해 오는 것으로 보아 일찍부터 한글로 번역되어, 교우들에게 애독되었던 것 같습니다. 그러나 여기에 실은 한문원본과 해설은 1987년에 벽위편에 나온 내용을 한글로 번역하여 출판된  <闢衛編 김시준 역, 1987>을  싣습니다.

정하상은 1795년 경기도 양근 마재에서 태어났고, 1801년 아버지와 형이 순교한 후,7세의 어린 나이로 어머니와 누이와 함께 친척집에서 아주 어렵게 자랐습니다. 22세에 서울로 와서, 그와 뜻을 같이 하는 유진길, 조신철과 더불어 한국 교회에 성직자를 맞아들이는 일에 전념하였습니다. 그는 이를 위해 북경을 9번이나 다녀옵니다. 그들의 이와 같은 끈질긴 노력으로 마침내 조선교구가 설정되었고, 파리외방전교회 주교·신부들이 잇달아 조선에 나오게 됩니다. 정하상은 신부가 되기 위해 신품 공부를 하던 중이었지만, 뜻밖에 1839년 박해가 일어나자, 잡힐 것을 각오하고, 일종의 진정서를 준비해 놓는데 이것이 <상재상서>입니다. 그러나, 그의 진정은 묵살되었을 뿐더러, 국금을 무릅쓰고 작당하여, 종교를 믿었다는 이유로 1839년 8월 16일 서소문밖 네거리에서 참수되었습니다. 그때에 그의 나의 45세였습니다.
 

 
 
上宰相書(상재상서)
정하상(丁夏祥 정바오로丁保祿)
 
 
伏以孟氏之廓闢,楊墨者,恐其肆害,於儒門也.韓愈之攻,斥佛老者,恐其惑亂於黔首也.
 
엎드려 아뢰옵건데, 맹자가 양주와 묵적을 크게 배척하였던 것은 그 사상이 유교를 함부로 해칠까 두려워하였기 때문이며, 한유가 불교와 도교를 공격하여 배척한 것은, 그 사상이 일반 백성을 미혹하여 어지럽힐까 두려워하였기 때문이옵니다.
 
古之君子立法,設禁必考,基義理之如何.爲害之如何.然後當禁者禁之,不當禁者不禁之.若其果合於義理,則雖??之言,聖人必取此,不以人廢言之義也.
 
옛날의 군자가 법률을  제정하여  금지하는 조항을 둘 때에는 반드시 그 의리가 어떠한지 또 그 해로움이 어떠한지를 살폈습니다. 그렇게 한 뒤에라야 마땅히 금할 것은 금하였으며, 마땅히 금하지 말아야 할 것은 금하지 아니하였던 것입니다. 만약 그 말이 과연 의리에 합당한 것이라면 비록 나무꾼의 말이라도 성인은 반드시 취하였으니, 이것은 사람을 보고 그 말을 버리지 아니한 의리입니다.
 
若國之禁天主聖敎者,其意何居,初不問義理之如何,以至寃極,痛之說歸之邪道,置之大?之律,辛酉前後,人命大損,而無一人査考其源流.
 
나라에서 천주성교(聖敎)를 금하는 것은 그 뜻이 어디에 있는 것이옵니까? 먼저 의리가 어떠한지를 묻지도 아니하고, 지극히 원통한 말로써 사도로 몰아 대벽률로 처치하여, 신유년을 전후하여 인명을 크게 손상시키면서도, 그 교리의 연원과 유전(流傳)에 대하여 조사하고 살피는 사람이 한 사람도 없었습니다.
 
噫,爲學者,將爲儒門之害歟.將爲黔首之亂歟.是道也,自天子達于庶人,日用常行之道,則不可謂,爲害爲亂也.

오호라! 이 도리를 배우는 자가 장차 유교에 해를 끼친다는 것입니까? 또는 장차 백성들을 어지럽게 한다는 것입니까? 이 도리는 천자로부터 서인에 이르기까지 날마다 쓰고 언제나 행하여야 할 도리인 것이니, 해가 된다거나 어지럽게 한다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玆敢?言,其道理之不非.夫天地之上,自有主宰,厥有三證焉.一曰萬物,二曰良知,三曰聖經.
 
이제 감히 이 도리가 그릇되지 아니함을 간단히 말씀드리겠습니다. 무릇 천지의 위에 주재하시는 분이 계시니, 그것은 세 가지 증거가 있습니다. 첫째는 만물이요, 둘째는 양지요, 셋째는 성경입니다.
 
 
何謂萬物,請以房屋喩之彼房屋也.有柱石有樑椽有門戶有墻壁,間架不失尺寸,方圓各有制度.若曰,柱石樑椽門戶墻壁,渾然相合,兀然自立,必曰,狂人之言也.
 
만물이란 무엇을 말하는 것이겠습니까?  청컨대 집과 방으로 비유해 보겠습니다. 건물에는 기둥과 주춧돌이 있고, 대들보와 서까래가 있으며, 문과 창이 있고, 담과 벽이 있습니다. 그 사이에 세워져 있는 것들은 한 자 한 치의 어긋남도 없으며, 모나고 둥근 것이 각각 제도(制度)가 있는 것입니다. 만약 기둥과 주춧돌과 대들보와 서까래와 문과 창과 담과 벽이 뒤섞여서 서로 합쳐져 가지고 저절로 오뚝 일어섰다고 말하면, 반드시 미친 사람의 말이라고 할 것입니다.
 
夫天地大房屋也.飛者,走者,動者,植者,奇奇妙妙之像狀,豈有自然生成乎.
 
무릇 천지는 큰 건물입니다. 나는 것, 뛰는 것, 동물, 식물과 기기묘묘한 형상들이 어찌 저절로 생겨난 것이겠습니까?
 
若果自然則,日月星辰,何以不違其?次.春夏秋冬,何以不違,其代序乎.與廢榮枯宰制者誰,福善禍淫,主張者誰.上天地載無聲無臭,擧世之人,暗行摘塡,歸之自然,是何異於遺子,不見其父,不信其有父也哉.
 
만약 저절로 이루어졌다면 해와 달과 별이 어떻게 그 별자리의 궤적을 그르치지 아니하며, 봄, 여름, 가을, 겨울이 어떻게 그 바뀌는 순서를 어기지 아니하겠습니까? 흥하고 망하며 번영하고 시드는 것을 지배하는 이가 누구이며, 착한 자에게 복을 주고, 음란한 자에게 화를 주는 것을 맡으신 이는 누구이겠습니까? 우러러보는 하늘은 아무 소리도 없고, 냄새도 없으니, 온 세상 사람들이 어둠 속을 더듬거리고 다니다가, 자연에 돌아가니, 이것이 어찌 유복자가 그 아비를 보지 못했다 하여 그 아비 있음을 믿지 아니함과 무엇이 다르겠습니까?
 
世人見一篇奇文,一幅名畵欽慕讚歎,必問何人才能,斷不凡忽?過.宇宙萬物藝藝職職林林??者亦一奇文名畵,而自古及今寥寥沁沁獨不聞作者何哉.世間事物俱不出於質貌作爲四字.質者材料也.貌者形狀也.作者工匠也. 爲者需用也.近取諸身,遠取諸物,莫不皆然.以若介大天地豈無作者.此以萬物而知有主宰也.
 
세상 사람들이 한 편의 걸작이나 한 폭의 명화를 보면 흠모하고 찬탄하며 반드시 어떤 사람의 재능으로 된 것인가를 물어보며, 결코 범상하고 소홀하게 보아 넘기지 아니합니다. 우주의 만물이 가지각색으로 한없이 많은 것도 역시 일종의 걸작이요 명화인데 예로부터 이제까지 쓸쓸하게도, 이에 대해서만은 그 지은 자를 묻지 아니함은 무슨 탓인지 모르겠습니다. 이 세상은 모두 질(質), 모(貌), 작(作), 위(爲)의 넉 자를 벗어나지 아니합니다. 질이라는 것은 재료이고, 모라는 것은 형상이며, 작이라는 것은 만드는 이고, 위라는 것은 쓰는 것입니다. 이 이치를 가까이는 자기 몸에서 취하고, 멀리는 사물에서 취하더라도 모두 그렇지 아니한 것이 없습니다. 이처럼 위대한 천지에 어찌 그 지은이가 없겠습니까? 이것이 만물을 통하여 주재하는 이가 계심을 아는 것입니다.
 
何謂良知,若夫白晝晦暝雷電相薄,雖孩提便知奮畏?目,累足置身無知此,可知賞罰善惡之大主宰印在心頭矣.閭巷間愚夫愚婦若遇蒼黃窘急之勢,悲痛怨恨之時,必呼天主而告之,此其本然之心,秉彛之性有不得掩者.故不敎而知,不學而能.但不知何以事之而畏之則均然.此以良知而知有上主也.
 
양지란 무엇을 말하는 것입니까? 만약 밝은 낮이 캄캄해지고, 우레와 번개가 연이어 치면, 어린아이라도 곧 떨며 두려워하고 눈을 휘둥그렇게 뜨며, 발이 감겨서 몸 둘 곳이 없음을 알게 됩니다. 이로써 선을 상주시고, 악을 벌하시는 큰 주재자가 마음 속에 박혀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항간의 어리석은 일반 남자나 여자들이 만약 당황하고 막다른 지경이나 슬프고 원망스러운 대를 만나면 반드시 천주를 불러서 호소합니다. 이것은 본래의 마음과 떳떳한 성품을 가릴 수가 없기 때문에 가르치지 않아도 알고, 배우지 않아도 할 수 있습니다. 다만 어떻게 섬길지를 몰라서 두려워하는 것은 모두 같습니다. 이것이 양지로써 하늘에 주재하는 분이 계심을 아는 것입니다.
 
何謂聖經,古之堯舜禹湯文武周孔之傳,亦有經史而來也.若非經史,則誰知有堯舜禹湯文武周孔之傳,何心法設,何典章乎心法也.典章也,載之竹帛布在方冊.故視爲可則信如金石.惟我聖敎之傳,亦有經典而來也.自開國以來史不絶,書古經新經,班班可考.至今家誦而戶絃,汗牛而充棟,曾少無舛錯我國之人.
 
성경은 무엇을 말하는 것입니까? 옛적의 요(堯), 순(舜), 우(禹), 탕(湯), 문(文), 무(武), 주(周), 공(孔)도 경전과 사서가 있어서 전래하였습니다. 만약 경전과 사서가 없었다면 요, 순, 우, 탕, 문, 무, 주, 공이 어떠한 심법으로 전하였고, 어떠한 전장(典章)을 베풀었는지 누가 알겠습니까? 심법과 전장이 죽백에 실려 있고, 방책에 펼쳐 있으므로 보아서 옳다 하고, 금석처럼 믿었던 것입니다. 생각건대 우리 성교도 경전이 있어서 고경과 신경에 어느 모로나 증명되어 오늘에 이르기까지 집집마다 암송하고 거문고로 노래하여 왔습니다. 이런 서적은 소가 땀을 흘릴만큼 많이 실어다가 온 집안에 가득 채우더라도 우리나라 사람들을 조금이라도 그르치지 않습니다.
 
以此等文字,不少槪見於中國經史疑焉.中國經史亦不云乎.易曰以享上天,詩曰昭事上帝,書曰?于上帝,夫子曰獲罪于天無所禱也.有所謂敬天畏天順天奉天之說.雜出於諸子百家之書,是何患乎西史之不來.設或西史之來,雖在上古而堯之洪水,秦之?火湮滅,無傳必矣.?至孫吳,赤烏年間,得鐵十字,唐之貞觀九年,景敎大治.上自朝箸,下至草野,一濟崇事?祭祀,立景敎碑.大賢如魏徵,房玄齡,篤信而無疑.大明萬曆年間,西士來遊,多著述至今流傳於中國.上主?祐東方,東邦之幸同福爲奇,今焉五十有餘年矣.此以聖經,而知有主宰也.
 
이러한 글귀가 중국의 경전과 사서에 널리 나타난 것이 적지 않음을 의심하시겠습니까? 중국의 경전과 사서 가운데 역경에는 ‘상천(上天)에 바치나이다’라 말하였고, 시경에는 ‘상제(上帝)께 아뢰나이다’라 말하였으며, 서경에는 ‘상제께 제사드리나이다’고 하였고 공자께서는 ‘하늘에 죄를 지으면 빌 곳이 없다’라고 말하지 아니하였습니까? 하늘을 공경한다. 하늘을 두려워한다. 하늘을 따른다, 하늘을 받든다는 말이 제자백가의 서적 속에 여기 저기 나타나고 있으니, 서양의 사서가 오지 않았더라도 무엇이 걱정되겠습니까? 설령 서양의 사서가 왔다 하더라도 요 임금 때의 큰 홍수와 진시황 때의 큰 불에 사라져서 전해오지 못한 것이 확실합니다. 손권의 동오시대에 이르러 적오년간에 쇠 십자가가 발견되었고, 당나라의 정관 9년에는 경교가 크게 번창하여 위로는 조정의 저명한 이들로부터 아래로는 평민들에 이르기까지 한결같이 존승하고, 섬겨서 큰 성당을 지었고, 경교비를 세웠습니다. 위징과 방현령과 같이 크게 어진이들도 독실히 믿어 아무런 의심도 하지 않았습니다. 명나라의 만력연간에 들어와 저술한 서적이 많이 있어 지금까지 중국에 전해 내려옴은 천주께서 묵묵히 동양을 도우심이고, 우리나라에 다행한 일입니다. 그 행복을 함께 함은 신기한 일로서 이제 벌써 50여 년이 되었습니다. 이것은 성경을 통하여 주재하시는 이가 계심을 알리는 것입니다.
 
擧此三證,旣然明知有主宰則當知,上主聖造天地萬物,將欲通其福顯其德.造天而覆我,造地而載我,造日月星辰光照我,草木,禽獸,金銀銅鐵,享用我,自出母胎,至於長成,種種洪恩,如是罔涯,人之本分,當如何哉.若戴天履地,而穿吃而已,則孤負生民之洪恩,莫此爲甚也.譬如爲人父者,造房屋辦産業,給其子享用,其子處其房屋,用其産業肆然,自大不知事親之道,報本之意則孝乎不孝乎.
 
이 세 가지 증거를 들어서 주재자가 계심을 이미 명확히 알았으니, 하늘의 주성께서 천지만물을 창조하셨고, 장차 복을 보내주시고 그 덕을 나타내려 하심을 마땅히 알아야 하겠습니다. 주재자께서 하늘을 만드셔서 우리를 덮으시고, 땅을 만드셔서 우리를 실으시며, 해와 달과 별을 만드셔서 우리를 비추시고, 초목과 금수와 금, 은, 동, 철물 들을 우리가 누려 사용하게 하셨습니다. 사람이 모태에서 나와서 장성할 때까지, 여러 가지 큰 은혜를 이와같이 한없이 내려 주시니, 사람의 본분은 마땅히 어떠해야 하겠습니까? 만약 하늘을 머리에 이고, 땅을 밟고 살면서, 입고 먹기만 한다면 인류를 내신 큰 은혜를 저버림이 이보다 더 심할 수 없는 것입니다. 견주어 보건데 사람의 아비된 자가 집을 짓고 살림을 마련하여 그 아들에게 주어서 누려 쓰게 하였더니, 그 아들이 그 집에 살고 그 살림을 쓰면서 함부로 하여 제가 잘난 체하고, 어버이를 섬기는 도리와 근본에 보답하는 뜻을 모른다면, 이것이 효도하는 것이겠습니까? 불효하는 것이겠습니까?
 
人之處世,秋毫皆帝力也.生養助顧之,保護引導之,身後受賞存,而勿論現受之,恩已極無比.吾人之?身,奉事當如何,而可答萬一也.奉事之道,非高遠難行之事,非索隱行怪之類也.但改過自新,遵帝誠命而已.
 
인간이 사는데 쓰이는 이 세상의 털끝만한 것도 모두가 천주의 힘입니다. 낳으시고 기르시며, 돕고 돌보시며, 보호하고 인도하십니다. 죽은 후에 받을 상은 두고 말하지 않더라도, 현재 받고 있는 은혜가 이미 지극한 것이니 비할 바가 없습니다. 우리가 온 몸을 다하여 받들어 섬기기를 마땅히 어떻게 해야만 그 만분의 일이라도 보답할 수 있겠습니까? 받들어 섬기는 도리는 높고 멀며 행하기 어려운 일이 아니며, 은밀한 일을 찾아서 기괴한 일을 하는 따위도 아니고, 다만 잘못을 고침으로 스스로 새로워져서 천주의 계명을 지키는 것일 따름입니다. 
 
誡命者何,上主?喩之十誡也.
一,欽一天主萬有之上.
二,無呼天主聖名以發虛誓.
三,守瞻禮之日.
四,孝敬父母.
五,毋殺人.
六,毋行邪淫.
七,無?盜.
八,妄證.
九,毋願他人妻.
十,毋貪他人財物.
 
계명이란 무엇인고 하니, 천주께서 묵유로써 가르치신 열가지 계율입니다.
첫째, 하나이신 천주를 만유 위에 흠숭하라.
둘째, 천주의 거룩한 이름을 부러 거짓 맹세를 하지 말라.
셋째, 첨례날을 지켜라.
넷째, 효도하여 부모를 공경하라.
다섯째, 사람을 죽이지 말라.
여섯째, 사음을 행하지 말라.
일곱째, 도적질을 하지 말라.
여덟째, 거짓 증언을 하지 말라.
아홉째, 남의 아내를 탐내지 말라.
열째, 남의 재물을 탐내지 말라.
 
右十誡摠歸二者,愛天主萬有之上,及愛人如己.上三誡,昭事之節目也.下七誡,修省之工夫也.顔氏之四勿,載記之九思,不足比方,忠恕孝悌仁義禮智,包括這裡有,何一毫不足處乎.以是道而行乎一家,則家可齊矣.行乎一國,則國可治矣.行乎天下,則天下可平矣.
 
이상의 열 가지 계율을 종합하면 두 가지로 귀결됩니다. 즉 천주를 만유 위에 사랑하고, 남을 자기와 같이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앞의 세 가지 계율은 천주를 밝혀 섬기는 절차이며, 다음의 일곱 가지 계율은 자기를 닦아 성찰하는 공부입니다. 안시의 네 가지 하지 말라는 것과 대기의 아홉 가지 생각도 여기다 견주기에 부족하며 충, 서, 효, 제, 인, 의, 예. 지가 이 속에 모두 포괄되어 있으니, 어찌 터럭 하나만큼이라도 모자라는 곳이 있겠습니까? 이 도리를 한 집안에 행하면 그 집안이 가즈런해질 것이고, 한 나라에 행하면 그 나라가 잘 다스려질 수 있으며, 천하에 행하면 천하가 평화로워질 것입니다.
 
十誡之中,不可犯一,而非徒身犯,尤禁心犯.大凡人之過失,作於其心.害於其事,治世之法,可治其事,不治其心,天主之誡,非徒治其事,亦治其心,然而人心惟危,道心惟微頃刻犯罪,私慾偏情百方引誘,誘以驕傲,誘以憤怒,誘以貪?,誘以邪淫,誘以嫉妬,誘以?吝,誘以懈怠.?人於必死之地.苟不時時警斥刻刻攻退則不免於羅穿.終身相戰戰無移時戰勝則成功,不勝則抵罪,功罪之判卽身死之日也.天主至公無善不報天主至義無惡不罰.若身死之後,魂亦隨滅,則賞也罰也,施於何所乎.又當知,靈魂之不滅也.
 
열 가지 계율 가운데에서 한 가지라도 범할 수 없으며, 다만 몸으로 범해서는 안 될 뿐 아니라, 더욱 마음으로도 범하는 것을 금하고 있습니다. 무릇 사람의 과실은 그 마음 속에서 일어나서 그 행동을 그르칩니다. 세상을 다스리는 법률은 그 행동을 다스릴 수 있으나, 그 마음을 다스리지는 못합니다. 천주의 계명은 다만 그 행동을 다스릴 뿐 아니라 도한 그 마음을 다스리는 것입니다. 그러나 사람의 마음은 위태롭기만 하고, 도리를 따르는 마음은 미약하기만 하여, 자칫하면 죄를 범하게 됩니다. 사욕과 치우친 감정이 백방에서 유인하니, 곧 오만으로 꾀이고, 분노로 꾀이고, 탐욕으로 꾀이고, 사음으로 꾀이고, 질투로 빠뜨립니다. 참으로 언제나 경계하여 배척하고 또 그때 그때에 공격하여 물리치지 아니하면 함정에 빠짐을 면하지 못합니다. 죽는 날까지 서로 싸우고, 싸우되 긴장을 푸는 예가 없어야 하며, 싸워서 이기면 공을 이루게 되고 이기지 못하면 죄에 저촉됩니다. 공로와 죄과의 판단은 곧 육신이 죽는 날에 있습니다. 천주께서는 지극히 공번되시니, 선은 갚지 않으심이 없고, 또 천주께서는 지극히 의로우시니, 악은 벌하지 아니하심이 없습니다. 만약 육신이 죽은 뒤에 영혼까지 따라서 없어진다면 상이나 벌을 어디에 베푸시겠습니까? 또한 영혼이 멸하지 아니함을 마땅히 알아야 할 것입니다.
 
盖魂有三焉,一生魂, 二覺魂,三靈魂也.生魂者草木之魂也,能長生而無知覺.覺魂者禽獸之魂也,能知覺而不知義理也是非也. 靈魂者人之魂也. 能生能長能知能覺能分辨是非能推論道理.於萬物之中,惟人最貴所貴乎人者以其魂之靈也.卽所謂天命之謂性,而賦界于胎中者也.烏可與草木禽獸,同歸於?腐乎.
 
무릇 혼은 세 가지가 있습니다. 첫째는 생혼이고, 둘째는 각혼이며, 셋째는 영혼입니다. 생혼이라는 것은 초목의 혼으로서 살고 자랄 수 있으나 인식과 감각이 없습니다. 각혼이라는 것은 금수의 혼으로서 지각을 할 수는 있으나 의리를 모르고 옳고 그른 것을 알지 못합니다. 영혼이라는 것은 사람의 혼으로서, 살 수도 있고, 자랄 수도 있고, 지각할 수도 있고, 감각할 수도 있으며, 옳고 그른 것을 판단할 수 있고 도리를 추론할 수 있으니, 만물 가운데 사람이 가장 고귀합니다. 사람이 고귀하다는 것은 그 혼이 영특한 까닭이니, 이른바 하늘이 명하신 것을 성이라 하며, 하늘이 사람의 태중에 부여하신 것입니다. 이 영혼이 어찌 초목과 금수처럼 썩어서 없어지겠습니까?
 
先儒亦知,魂之有三,而靈之不滅.故曰,三魂屢散.
又魂升,魄降,其魂有三焉.
 
而靈魂之不死明矣.旣爲不死不滅,則究竟何?. 善者靈魂升天,而受賞惡者靈魂入地,而受罰賞者天堂之永福,罰者地獄之永苦也.若以不見天堂,不見地獄,不信其有堂獄,則是何以異於?者之不見天,而不信天有日也哉.事之合理者不見,而可信不合於理者,雖見不可信也.故事之可信與不可信,不係於見不見,而惟在於合理與不合理而已.苟能合理,則千歲之日至可坐而致之也.奚必於吾身親見之哉.
 
선유(先儒)들 또한 혼이 세 가지가 있고 영이 멸하지 않는 것임을 알았습니다. 그러므로
“삼혼은 여러 번 흩어진다.
또는
“혼은 올라가고 백은 내려간다.”
“혼은 세 가지가 있다.”
고 말하였으니,

영혼이 죽지 아니함은 맹백합니다. 이미 죽지도 않고 살아 있지도 않다면 필경에는 어디로 가겠습니까? 착한 사람의 영혼은 하늘로 올라가 상을 받고, 악한 사람의 영혼은 땅으로 들어가 벌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상이라는 것은 천당의영원한 행복이요, 벌이란 것은 지옥의 영원한 고통입니다. 만약 천당을 보지 않고 지옥을 보지 아니하였다고, 천당 지옥이 있음을 믿지 아니하면 눈먼 자가 하늘을 보지 아니하였다 하여 하늘에 해가 있음을 믿지 아니함과 무엇이 다르겠습니까? 일이 이치에 합당하면 보지 않고도 믿을 수 있고, 이치에 합당하지 아니하면 비록 보일지라도 믿을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일을 믿을 수 있고, 믿을 수 없음은 보고 못 보는 데에 매이지 않고, 다만 이치에 합당함과 이치에 합당하지 않음에 있을 따름입니다. 실로 이치에 합당하면 천 년 뒷날이 올 것을 가만히 앉아서도 알아낼 수 있는 것인데 하필 내 몸소 친히 보아야 할 필요가 있겠습니까?
 
夫一國之中,必有賞罰,有功者陞之?以爵祿,給以金帛.有罪者黜之囚之,??施以力鉅,一國之君尙有賞罰之權. ?天地大君乎,其賞非世間爵祿之可比,而永遠無窮之福也. 其罰非世間狂?力鉅之可比而,永遠無盡之苦也.升降一定更無移見.
 
무릇 한 나라 안에도 상과 벌이 반드시 있습니다. 공로가 있는 자는 조정에 불러 올려 벼슬과 녹으로써 머물게 하고 황금과 비단을 주며, 죄가 있는 자는 쫓아내고 옥에 가두거나 또는 사형에 처합니다. 한 나라의 임금에게도 상벌의 권한이 있거늘, 하물며 천지의 큰 임금은 어떠하겠습니까? 그 상은 이 세상의 벼슬과 녹에 비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영원 무궁한 행복입니다. 그 벌도 이 세상의 징역과 사형에 비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영원히 끝나지 않는 고통입니다. 천당에 오르고 지옥에 내려가는 것이 한 번 결정되면 다시는 변경할 도리가 없습니다.
 
嗚呼,世人明知靈魂之不死,而不知居於何所,豈不哀哉.然有永賞永罰,則世事虛幼以可知矣.
 
오호라! 세상 사람이 영혼이 죽지 않음을 환하게 알면서도 영혼이 어느 곳에 있는 것인 줄을 모르니 어찌 슬프지 않겠습니까? 이와같이 이미 영원한 상과 영원한 벌이 있은즉 세상의 일이 헛된 환상임을 알 수 있습니다.
 
人壽多,不過百年,而汨於利,慾傷中未得之,患得之,旣得之患失之,不知老之,將至此身一死,當貴功名竟歸虛地.?富貴功名一生求之不得者乎,何其塵夢之難醒也.
 
사람의 수명이 길어도 백 년을 넘지 못하는데도 이익만을 추구하는 것이 현실이니, 사리사욕에 빠져서 아직 얻지 못한 것을 얻으려고 걱정하고, 이미 얻은 것은 잃을까 걱정하다가 늙음이 닥쳐오는 것도 모르고 있습니다. 이 몸이 한 번 죽으면 재상과 지위와 공로와 명예가 필경에는 헛된 것이 되고 맙니다. 하물며 재산, 지위, 공로, 명예를 일평생 구하여도 얻지 못하는 사람조차도 그 티끌같은 꿈을 깨기가 어찌 그리 어렵습니까?
 
嗚呼,世福缺,而不全天福全,而不缺世福暫,而不永天福永,而不暫與其求缺,且暫之世福曷若求全,且永之天福乎.
 
오호라! 이 세상의 행복은 어그러져 온전하지 못하며, 하늘의 행복은 온전하여 어그러짐이 없습니다. 이 세상의 행복은 잠시 뿐이고 영원하지 못하며, 하늘의 행복은 영원하여 잠시 뿐인 것이 아닙니다. 어그러지고 잠시뿐인 이 세상의 행복을 구하기보다는 온전하고 영원한 하늘의 행복을 구하기가 쉬울 것같습니다. 
 
雖未得天堂之永福,若無地獄之後患,則暫世暫榮容或可圖,而奈此地獄之永罰何哉.在世之時,朦然不覺,身死之後,悔之何及,是以斧?在前鼎?在後,而毅然不屈者代不乏人.此足爲眞敎之一證.
 
비록 천당의 영원한 행복을 얻지 못할지라도, 만약 지옥의 뒷걱정이 없다면 덧없는 세상의 영화를 잠시 도모하여도 좋겠지만, 이 지옥의 영원한 벌을 어찌하겠습니까? 이 세상에 있을 때에 정신이 흐려서 깨닫지 못하다가 육신이 죽은 뒤에 뉘우친들 이미 때는 늦습니다. 이 때문에 목을 끊는 큰 도끼가 앞에 있고, 몸을 삶을 큰 솥이 뒤에 있더라도 꿋꿋하게 굽히지 아니하는 자가 대대로 적지 않으니, 이것으로도 넉넉히 참된 가르침의 한 가지 증거가 될 것입니다.
 
一言弊曰,至聖,至公,至正,至眞,至全,至獨,唯一無二之敎也.
 
한 마디로 덮어 말하면 지극히 거룩하고, 지극히 공번되고, 지극히 바르고, 지극히 참되고, 지극히 온전하며, 지극히 절대적인 오직 하나이고 둘도 없는 가르침인 것입니다.
 

何謂至聖之敎會,天主親立之敎也.自古列聖,繼繼相承闡其義理,定其規矩,而至致命以證之可謂至聖矣.
 
어찌하여 지극히 거룩한 교회라 이르는가 하면, 천주께서 친히 세우신 가르침인 까닭입니다. 예로부터 여러 성인들이 대대로 뒤를 이어 그 의리를 천명하였고, 그 규칙을 정하여 생명을 바쳐서 증명하기까지에 이르렀으므로 지극히 거룩하다 이를 수 있습니다.
 
何謂至公,無論貴賤賢愚男女老少,東西南北之人.皆可當行之道也,可謂至公矣.
 
어찌하여 지극히 공번되다고 이르는가 하면, 신분이 귀하거나 천하거나, 현명하거나, 어리석거나, 남자이거나, 여자이거나, 늙었거나, 젊었거나를 막론하고 온 세상 사람들이 모두 마땅히 실행하여야 할 도리이므로 지극히 공번되다고 이를 수 있습니다.
 
何謂至正,廣大明白,蕩蕩平平,無一毫偏依之行,回正之事,可謂至正矣.

어찌하여 지극히 바르다고 이르는가 하면, 광대하고, 명백하며, 넓고 평탄하여 터럭만큼도 치우친 행위나 올바름을 굽히는 일이 없으므로 지극히 바르다고 이를 수 있습니다.
 
何謂至眞,天下未有無敎之國,而敎不眞者多矣.老莊失之於虛無,仙佛失之於幻妄,外此百家方術,不足掛齒,而聖敎道理則眞實無僞永不舛錯可謂至眞矣.
 
어찌하여 지극히 참되다고 이르는가 하면, 천하에 가르침이 없는 나라가 있은 적이 없으나 그 가르침이 참되지 못한 것이 많았습니다. 노자와 장자는 허무에서 참됨을 잃었고, 선도(仙道)와 불교는 환상과 망상에서 참됨을 잃었으며, 이밖에 군소 사상가들의 방술은 입에 담을 가치도 없으나, 성교(聖敎)의 도리는 진실하여 거짓됨이 없어 영원히 그르치지 아니하므로, 지극히 참되다 이를 수 있습니다.
 
何謂至全,譬於草木,異敎則或有幹而無枝,或有葉而無花,或有花而無實,首尾不能相連,終始不能接續,而惟聖敎則有幹有枝有葉有花有實.天地鬼神人事之始末,已往現在未來之前後,渾然畢具可謂至全矣.
 
어찌하여 지극히 온전하다고 이르는가 하면, 초목으로 비유하면 이단의 가르침에는 어떤 것은 줄기가 있는데 가지가 없고, 어떤 것은 잎이 있는데 꽃이 없고, 어떤 것은 꽃은 있는데 열매가 없으므로, 머리와 꼬리가 서로 연락될 수 없으므로 시작과 끝도 서로 이어질 수 없습니다. 그러나 오직 성교(聖敎)만은 줄기가 있고, 가지가 있고, 잎이 있고, 꽃이 있고, 열매가 있어서 천지와 귀신과 인간의 일이며, 과거 현재 미래의 순서가 가지가지로 다 갖추어져 있으므로, 지극히 온전하다 이를 수 있습니다.
 
噫,指金玉,而强謂之瓦礫,用??,而强謂之糟糠,亦將奈何.又曰,無父無君,不知聖敎之義也.十誡之第四,孝敬父母夫,忠孝二字,萬代不易之道也.養志,養體,人子之當然,而奉敎之心,尤功謹愼.故事盡其禮,養盡其力,忠移於君許身,殞命赴湯蹈火有不敢避.不如是則,有違敎誡,此果無父無君之學耶.
 
슬프다! 금과 옥을 가리켜 억지로 기와라 자갈이라 이르고, 먹어서 이로운 것을 억지로 못 먹는 찌꺼기라 이르니, 이 일을 장차 어찌하여야 합니까? 또 말하기를 아비를 업신여기고 임금도 업신여긴다 하니 성교(聖敎)의 뜻을 모르는 것입니다. 열 가지 계명의 넷째가 효도로 부모를 공경하라는 것입니다. 무릇 충과 효의 두 글자는 만대에 변할 수 없는 도리입니다. 부모의 뜻을 받들고 그 육신을 봉양함은 사람의 자식으로서 당연한 일이로되, 가르침을 받드는 사람은 더욱 절실히 삼가고 조심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부모를 섬김에는 그 예를 다하고, 부모를 봉양함에는 그 힘을 다합니다. 충성을 임금에게 바칠 때에는 자기의 몸을 허락하여 생명을 버리고, 끓는 물 속에 들어가며, 타는 불을 밟더라도 감히 피하지 않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지 않으면 가르치는 계명을 어기는 것이 됩니다. 이리하여도 과연 아비를 업신여기고, 임금을 업신여기는 배움이 됩니까?
 
但國君禁之,而民有行之者,家父禁之,而子有行之者,其以是說而然歟.是亦有說焉.位有尊卑事有輕重,一家之中,家父最重,而尊於家父者國君也.一國之中,國君最重,而尊於國君者,天地大君也.
 
다만 나라의 임금께서 금하는데도 백성 가운데 실행하는 자가 있고, 집안의 아비가 금하는 데도 자식이 실행하는 자가 있으니, 이러한 말을 가지고 그렇게 생각하는 것입니까? 이것도 또한 말은 됩니다마는 지위에는 높고 낮음이 있고, 일에는 가볍고 무거운 것이 있으니, 한 집안 안에서는 집안의 아비가 가장 중하나, 한 나라 안에서는 집안의 아비보다 높은 것이 나라의 임금이요, 한 나라 안에서는 나라의 임금이 가장 중하나, 나라의 임금보다 높은 것은 천지의 큰 임금이십니다.
 
聽家父之命,而不聽國君之命,則其罪重矣.聽國君之命,而不聽天地大君之命,則其罪尤極無比.然則,奉事天主,非欲故違君命,出於不得已者.擧此一者,遂謂之無父無君可乎.
 
집안 아비의 명령을 듣지만 나라 임금의 명령을 듣지 않으면, 그 죄가 무겁습니다. 나라 임금의 명령을 들으면서 천지의 큰 임금의 명령을 듣지 않으면, 그 죄는 더욱 심하여 비할 데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천주를 받들어 섬김은 임금의 명령을 일부러 어기려는 것이 아니며, 어쩔 수 없는 사정에서 나온 것인데, 이 한 가지를 들어서 아비를 업신여기고 임금을 업신여긴다고 말하는 것이 옳은 것이겠습니까?
 
又曰,通貨色夫,通貨者,自古有國有家者,不可一日,無之之事也.有無相通,然後生民相資而生也.若無通貨之法,則一國之中生者幾何,此其不美之法也.反爲可禁之事耶.
 
또 말하기를 재물과 여자로 서로 융통한다고 합니다. 무릇 재물을 융통하는 것은 예로부터 나라를 다스리고 가정을 다스리는 사람에게는 하루라도 없어서는 안 될 일입니다. 있는 것과 없는 것을 서로 융통해야만 백성들이 서로 의지하고 생활합니다. 만약 재물을 융통하는 법이 없으면 온 나라 안에서 생활할 사람이 몇이나 되겠습니까? 그러한데 이것을 좋지 못한 법이라 하여 도리어 금해야 될 일입니까?
 
所謂通色者,禽獸尙有不然者,?歸之於聖敎哉. 十誡之第六曰無行邪淫, 第九曰無願他人妻,第六誡以身犯之也.第九誡以心犯之也.聖敎之嚴禁邪淫,如是重復,而反以通色之說加之,豈有如此逆倫亂常之敎乎.
 
이른바 여자를 서로 융통한다고 하는 것은 새나 짐승들도 오히려 그렇게 아니하거늘, 하물며 그것을 성교에다 돌릴 수 있겠습니까? 열 가지 계명의 여섯째에 사음(邪淫)을 행하지 말라 하였고, 아홉째에 남의 아내를 원하지 말라고 하였습니다. 여섯째 계율은 몸으로 범하는 것이요, 아홉째 계율은 마음으로 범하는 것입니다. 성교(聖敎)가 사음을 엄격하게 금함이 이와같이 거듭 겹쳐 있는데도 도리어 여자를 융통한다는 말을 덧붙이고 있으나, 어찌 이와같이 윤리를 거스리고, 떳떳한 질서를 어지럽히는 가르침이 있겠습니까?
 
道之眞假,事之曲直,置之一邊,以不近不當之說,排之?之,豈非以外國之道而然歟.金不擇地,惟精是寶,道不拘方,惟聖是眞以其道之傳,豈有此疆彼界之畦畛也.中國則各國之人物,往來相通,沙門之學任之所爲,外國之人多有來居,而曾不知禁也.
 
도리의 참되고 거짓됨과 사리의 바르고 그릇됨을 한쪽으로 치워놓고, 얼토당토아니한 말을 가지고 배척하며 제거하니, 어찌 다른 나라의 도리라 하여 그러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금은 파는 곳을 가리지 않으며 오직 순금만이 보배로운 것이며, 도리는 방위에 구속되지 않고 오직 거룩함이 참된 것이니, 그 도리가 전래함에 있어서 어찌 이 나라 저 나라의 경계가 있겠습니까? 중국은 각 나라의 사람들이 오고 가며 서로 교제를 합니다. 불교의 학문도 하는대로 내버려 둡니다. 다른 나라 사람들이 와서 사는 이가 많으나 일찍이 금지할 줄을 몰랐습니다.
 
至於我國,佛道之爲害久矣.八路梵宮釋殿最極奢侈,金佛銅像浪費財力.彼佛氏者西域中異端也.剽竊聖敎之文字,依樣聖敎之規矩,義理舛錯倫紀絶倒,此所謂亂朱之紫,亂苗之?也.虛張禍福,恐喝愚民,今成怪弊.
 
우리나라에 있어서는 불교가 해를 끼침이 오래 되었습니다. 전국에 있는 사찰의 건축은 사치를 극도로 다하였으며, 금과 구리의 불상은 재산을 낭비하였습니다. 저 불교라는 것은 서역의 이단입니다. 성교(聖敎)의 글을 표절하였고, 성교(聖敎)의 규칙을 본땄으나, 의리는 그르쳐 어지럽고, 윤리는 끊어져 기강을 뒤집었습니다. 이것은 이른바 붉은 빛깔을 망치는 자줏빛이며, 못자리를 망치는 가라지풀입니다. 헛된 화복의 말을 떠벌여 어리석은 하층 백성을 공갈하니 이제는 괴상한 폐풍(弊風)이 되었습니다.
 
至於巫覡,風水,?命,?相等人誕惑婦孺侵漁錢財視若平常,而聖敎則獨不蒙包容之恩何哉.爲害於家乎,爲害於國乎,觀其事而察其行,則可知其人之如何,其道之如何,此?曾爲不?乎,曾爲?乎,曾爲奸淫乎,曾爲殺越乎.
 
무당, 풍수, 점쟁이, 관상쟁이 같은 사람들도 부녀자와 아이들을 속이고 미혹하게 하여, 금전과 재물을 살살 낚아가는 것을 예사스럽게 보면서, 홀로 성교(聖敎)만이 포용하는 은혜를 입지 못하는 것은 어찌 된 일입니까? 가정에 해를 끼쳤습니까? 나라에 해를 끼쳤습니까? 그 하는 일을 보고 그 행실을 살피면 그 사람됨이 어떠한가를 알 수 있으며, 그 가르침이 어떠한가를 알 수 있습니다. 저희 무리들이 일찍이 역적질을 하였습니까? 일찍이 도적질을 하였습니까? 일찍이 간음을 하였습니까? 일찍이 살인을 하였습니까?
 
又多法外施行,使之背返天主.夫天主,乃萬物之大父母,大主宰也.古昔聖賢,昭事對越,今之人,何故?罵凌辱當此.饑饉?臻家國困悴之際,惟我嗣王?衣?食,發政施仁好生之德,洽于民心.
 
또한 법에도 없는 일을 베풀어서 천주를 배반케 하는 일이 많습니다. 무릇 천주께서는 만물의 큰 어버이요, 큰 주재자이십니다. 옛날의 성현들께서는 천주께 일을 아뢰고 마주 대하였는데, 오늘날의 사람은 어찌한 까닭으로 욕설을 하며 모독을 하여 거듭 기근을 당하고 있습니까? 가정과 나라가 곤궁에 지친 바로 이 때에 바라옵건데 우리 임금님께서는 밤에도 옷을 벗지 않으시고, 제 때에 진지를 못 드실만큼 부지런히 정사를 돌보시고 어지심을 베푸시어, 백성이 잘 살 수 있게 하는 덕으로 백성들의 마음을 흡족하게 하시옵소서.
 
噫,彼聖敎之人獨非吾王之赤子耶.哀此,人斯何至此極而不少恤哉.獄中之斃,門戶之斬,連續不絶,泣血成渠哭聲漲天,父呼其子,兄呼其弟,如窮人之無所歸,淸明之世,此何光景.夫損生致命,證主眞敎,顯主光榮,吾?分內事矣.身亦將死之類也.遇此敢言之時不一次仰首長呼啼而愍?就死則山積之懷將無以自暴於百世之下.
 
오호라! 저 성교(聖敎)를 믿는 사람들만이 우리 임금님의 자식이 아니란 말입니까? 슬프다! 이 사람들을 어찌하여 이렇듯 극도에 이르도록 전혀 구하여 주시지 않는 겁니까? 옥 안에서는 지쳐서 죽고 문밖에서는 목을 베어 죽임이 연달아 끊이지 아니하니 눈물과 피가 도랑을 이루고, 통곡하는 소리가 하늘까지 뻗어 오르며, 아비는 자식을 부르고, 형은 아우를 부르는 것이 마치 막다른 데로 쫓긴 사람이 몸을 돌이킬 데가 없는 것과 같습니다. 맑고 밝은 이 세상에 이게 무슨 꼴입니까? 무릇 목숨을 덜고 생명을 바쳐서 천주의 참된 가르침을 증명하니, 천주의 영광을 나타냄은 우리들의 분수로 하는 일입니다. 이 몸도 역시 장차는 죽어야 할 몸입니다. 이렇게 감히 말해야 할 때를 만나서, 한 번 머리를 쳐들고 길게 외치지 아니하고, 슬프게 입을 다물고 죽음에 나아간다면, 산더미와 같이 쌓인 감회를 장차 백대(百代)를 두고 폭로하여도 다할 수 없겠습니다.
 
伏乞,時燭俯?詳辨道理之眞僞邪正然後,上造朝廷,下布民庶,一變至道弛禁撤捕放釋獄囚,與一國之民,安土樂業,共享太平,千萬企望,千萬企望.
 
엎드려 비옵건데 바로 이때에 밝게 비추어 굽어 살피시와, 도리가 참된 것인지, 거짓인지, 그릇된 것인지, 올바른 것인지를 자세히 판단하신 다음에, 위로는 조정으로부터 아래로는 뭇백성에 이르기까지 일변하여 도리에 돌아와서 금령을 늦추고, 체포하는 법을 철회하고, 옥에 갇힌 사람들을 석방하여, 온 나라의 백성들과 더불어, 제 고향에 안정하여 제 생업을 즐기면서 모두 함께 태평세월을 누리도록 하시기를 천 번 만 번 바라고 바라나이다.
 
 
又辭
다시 올리는 글
 
死人?前,薦?酒食,天主敎之所禁也.生前靈魂不能芻享於盃飯,?死後靈魂乎.飮食肉口之供道德靈魂之粮,雖至孝之子,以甘旨之味,不能供父母寢寐之前者,寢寐非飮食之時也.寢寐亦然,?大寐乎.稻梁黍稷芬苾之果非虛則假爲人子者以虛假之禮豈事已亡之親乎.
 
죽은 사람 앞에 술과 음식을 차려 놓는 것은 천주교에서 금하는 바입니다. 살아 있을 동안에도 영혼은 술과 밥을 받아 먹을 수 없거늘 하물며 죽은 뒤에 영혼이 어떻게 하겠습니까? 먹고 마시는 것은 육신의 입에 공급하는 것이요, 도리와 덕행은 영혼의 양식입니다. 비록 지극한 효자라 할지라도 맛좋은 것이라 하여 부모가 잠들어 있는 앞에 차려 드릴 수 없는 것은, 잠들었을 동안은 먹고 마시는 때가 아닌 까닭입니다. 잠시 잠들었을 때도 그러하거늘 하물며 영원히 잠들었을 때는 어떻겠습니까? 벼와 수수와 기장과 피(稷)와 향기로운 과실의 제수를 진설하는 것은 헛된 일이 아니면 거짓된 일입니다. 사람의 자식이 되어서 허위와 가식의 예로써 어찌 이미 돌아간 부모를 섬기겠습니까?
 
所謂,士大夫木主,亦天主敎之所禁也.旣無氣?骨血之相連,又無生養?勞之上關矣.父母之?,何等重大,以工匠之所制造,粉墨之所粧點,因爲之眞父眞母乎,正理無據,良心不允,寧得罪,於士大夫,不願得罪,於天主敎.
 
이른바 양반집의 신주라는 것도 천주교에서 금하는 바입니다. 이미 기맥과 골혈이 서로 관련될 수 없으며, 또한 낳아서 길러준 노고와도 상관이 없는 것입니다. 아비라 어미라 부르는 것은 얼마나 중대한 일입니까? 목공이 만든 것이요, 분을 칠하고 먹을 찍은 것을 가지고 참아비라 참어미라 이를 수 있습니까? 바른 이치의 근거가 없고 양심이 허락하지 아니합니다. 차라리 양반에게 죄를 얻을지언정 천주교에서 죄를 얻고 싶지는 않습니다.
 
<闢衛編 김시준 역, 19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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