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일강론

연중 제12주일 성 요한 세례자 대축일 18. 06. 23

인쇄

심흥보 [peters1] 쪽지 캡슐

2018-06-23 ㅣ No.3571

연중 제12주일 성 요한 세례자 대축일 18. 06. 23

수색 예수성심 성당 박재성 부제 강론 (하느님의 자비를 드러내는 변화)

1독서: 이사 49,1-6 / 2독서: 사도 13,22-26

복음: 루카 1,57-66.80

 

찬미예수님, 이번 한 주간 주님의 사랑 속에 행복한 한주 되시기 바랍니다. 오늘은 세례자 요한 탄생 대축일입니다. 보통 성인의 축일을 지낼 때는 대부분 그 성인께서 돌아가신 날을 축일로 지냅니다. 하지만 세례자 요한은 탄생을 또 다른 축일로 지내고 있습니다. 탄생일 축일로 보내는 경우는 예수님 성모님, 그리고 세례자 요한 세 분뿐입니다. 모르긴 몰라도 세례자 요한이 무언가 특별하구나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는 세례자 요한의 특별함을 탄생일화로 전해 줍니다.

 

오늘 복음의 처음의 말씀은 이것입니다. “엘리사벳은 해산달이 차서 아들을 낳았다”(루카 1,57) 사실 엘리사벳이 아기를 낳는 것부터가 사실 특별합니다. 많은 사람이 아기를 낳지 않나, 애를 낳는 것이 뭐가 특별한가 생각할 수도 있지만, 엘리사벳에게는 그렇지가 않았습니다. 성경은 엘리사벨을 아기를 낳지 못하는 몸이었다고 전합니다. 뿐만 아니라 엘리사벳과 그녀의 남편인 즈카르야 둘 다 나이가 많은 늙은 몸이었습니다. 늙은 나이에 아기를 평생 한 번도 낳지 못하던 부부에게서 아기가 태어났다는 것은 오늘날에도 특별합니다. 지난 주 가톨릭 신문에 40세가 넘은 나이에 장애를 가진 아이를 낳아 기르지만, 감사함을 전하는 기사가 올라 왔는데 그 부인에게 그 늦둥이가 얼마나 소중한지 알 수 있었습니다. 오늘날에도 그렇듯, 과거에는 정말 특별한 일이었습니다.

 

그 아이의 이름이 요한이다라는 점 또한 특별한 점입니다. 유다인들은 이름을 지을 때 조상의 이름, 그것도 가문의 이름들 중에 하나를 선택했던 것이 관행이었습니다. 그래서 엘리사벳이 아기의 이름을 요한이어야 한다고 말하자 이웃과 친척들은 당신의 친척 가운데에는 그런 이름을 가진 이가 없습니다.”라며 반문합니다. 요한이라는 이름은 하느님께서 엘리사벳에게 가르쳐 주신 이름이었습니다. 그래서 엘리사벳은 그리 말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하지만 이웃과 친척들은 이상한 눈으로 엘리사벳을 보았을 것입니다. 그리곤 남편인 즈카르야를 쳐다봅니다. 그러나 즈카르야 또한 아기의 이름을 요한이라고 주장합니다. 그 또한 하느님께 그 이름을 들었기 때문입니다. 이 요한이라는 이름은 야훼는 자비로우시다라는 의미입니다. 이 이름으로 당시의 관례를 깨는 변화가 이웃과 친척들에게 당혹감을 주었을지는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그 새로운 변화는 요한이라는 이름이 야훼는 자비라우시다라는 것을 의미함으로써 새로운 변화에서는 하느님의 자비가 드러날 것을 기대할 수 있게 됩니다. 결국 요한이라는 이름을 가진 아이의 태어남을 축일로 기리는 것은 하느님의 또 다른 특성인 하느님의 자비로움을 드러낼 변화였습니다.

 

세례자 요한은 출생에서부터 새로운 변화를 가져왔습니다. 노부부의 출산이 그랬고, 그가 가진 이름이 그랬습니다. 이러한 변화는 하느님의 자비를 드러내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그가 보여준 행적, 회개의 세례에서도 그것이 드러납니다.

 

2독서는 요한에 대해 전합니다. 먼저, 요한은 예수님 전에 회개를 선포했습니다. 회개, 즉 죄를 뉘우쳐 하느님께 몸을 돌림을 의미합니다. 당시에는 죄를 뉘우침은 물론이고, 죄를 용서받았다는 표시가 중요했습니다. 그 표시가 있어야 하느님하고 가까워짐을 인정받기 때문입니다. 근데 그 표시를 받는 것이 보통 어려운 것이 아니었습니다. 죄를 용서받는 것은 성전에서 사제에 의해 1년 한번 이루어 졌습니다. 대속죄의 날에 속죄물을 사제에게 가져가 바치고, 공동체 앞에서 자신의 잘못을 밝히고, 용서를 구하는 것이 관례였습니다. 부자가 아닌 사람들, 스스로 죄인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에게는 이 날이 너무 힘겨운 날이었습니다. 이 날 대속제사를 집전하는 사람이 바로 사제였습니다. 사제인 즈카르야의 아들이던 요한도 관례대로 한다면, 사제가 되어 이 제사를 집전했어야 합니다. 하지만 요한은 사제직분을 포기하고, 광야에 나가 예언자로 살아갑니다. 광야에서 요한이 한 것은 죄를 뉘우치라고 말하고, 그 뉘우침을 고백하는 이에게 세례를 주었다는 것입니다. 더 이상 외적으로 용서 받았음을 표시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실제로 자신의 죄를 뉘우치는 것, 그 과정에서 하느님의 용서를 체험하는 것이 중요해진 것입니다. 요한은 요한의 이름이 가진 그 의미처럼 회개와 죄의 용서를 통해 하느님께서 자비로우심을 전했습니다. 요한은 그의 활동을 통해서 그가 가진 이름의 의미를 우리에게 가져왔습니다.

 

세례자 요한의 탄생 대축일이 우리에게 주는 의미는 새로운 변화로서 하느님의 자비를 다시금 떠올리게 합니다. 늘 변화는 우리에게 두려운 것으로 남아있습니다. 왜냐하면 변화 다음의 것을 우리가 그려보기 어렵기 때문입니다. 모르는 것에 우리는 두려움을 갖습니다. 깨끗한 물속에는 손을 담그기가 어렵지 않지만, 흙탕물 속에는 손을 담그기가 참으로 두렵습니다. 안에 뭐가 있을지 알고요. 이렇듯 그 다음을 알 수 없다는 것 우리가 계획하는 대로 일이 진행되지 않는 것에서 우리는 반감이 일어나게 됩니다. 하지만 하느님의 자비를 드러내는 변화는 계속되어야 합니다. 우리는 이를 쇄신이라고 부릅니다. 성 요한 세례자 탄생 대축일을 지내며 이번 한 주간에 일어나는 내 삶의 변화 속에서 하느님의 자비가 드러나게 되기를 빕니다. 이것이 예수님의 재림을 바라는 우리의 태도입니다.

 

나의 구원이 땅 끝까지 다다르도록 나는 너를 민족들의 빛으로 세운다.”(이사 49,6)

 

----------------------------------------------------------------

 

연중 제12주일 꽃꽂이

http://bbs.catholic.or.kr/home/bbs_view.asp?num=1&id=170431&menu=frpeterspds2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175 0

추천 반대(0)

 

페이스북 트위터 핀터레스트 구글플러스

Comments
Total0
※ 500자 이내로 작성 가능합니다. (0/500)

  • ※ 로그인 후 등록 가능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