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일강론

주님 수난 성지 주일(다해) 루카 22,14-23,56; '22/04/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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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흥보 [peters1] 쪽지 캡슐

2022-03-20 ㅣ No.4986

주님 수난 성지 주일(다해) 루카 22,14-23,56; '22/04/10

 

 

 

 

 

 

 

'그리스도의 수난'(the passion of the Christ)이라는 영화가 있었습니다. 영화를 보면서 영화 상영의 전체적인 흐름으로 등장하는 폭력 때문에 답답하고, 우려스러운 마음이 들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그야말로 처참하리만큼 커다란 고통을 겪으시며 돌아가시는 모습을 보면서, 주님의 수난이 우리의 마음속으로만 그리는 단순한 고통과 수난이 아니라 실제로 당하신 수난임을 처절하게 느낄 수 있었습니다.

 

이 영화에 나오는 예수님의 수난사를 살펴보면서, 한 가지, 그리스도의 수난이 우리의 구원과 어떻게 연결되는가 하는 문제가 떠오릅니다.

다시 말해서 그리스도의 죽음이 우리와 어떤 관계를 갖는가 하는 문제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죽음을 유다인들의 문화 즉 유다교 신앙 속에서 바라볼 수 있습니다.

유다인들이 하느님을 처음 알게 된 사건은 이집트 탈출 사건입니다. 지금은 '탈출기'라는 성경에 기록된 내용입니다. 유다인들은 자신들의 힘으로는 이집트의 노예살이에서 해방될 수는 없었지만, 하느님의 도우심으로 자신들이 해방되었다는 것을 알게 되면서 하느님을 믿기 시작했습니다. 즉 하느님께서 자신들의 어려운 노예살이를 굽어보셔서 자신들을 구원해주셨다는 것을 믿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그 사건의 과정중에, 이스라엘 사람들을 노예로 부려먹던 이집트인들이 이스라엘인 노예들을 내보내려고 하지 않자, 하느님께서는 이집트 사람들이 이스라엘을 풀어줄 때까지 한 가지씩 재앙을 내리기 시작하셨습니다. 그 재앙이 아홉 번째에 이르러도 이스라엘을 내놓지 않자, 하느님께서 열 번째 재앙으로 이집트의 맏배인 동물의 첫 번째 새끼와 사람의 맏아들을 치려고 하셨습니다. 그 열 번째 재앙에서 이집트 사람들과 이스라엘의 집안을 구분하기 위해서 양을 잡아 그 피를 문설주에 발라두도록 했습니다. 죽음의 천사가 왔을 때 양의 피가 발라져 있는 집안은 이스라엘의 식구라는 것을 알고, 이스라엘은 죽이지 않고 그냥 지나쳐감으로써 이집트의 맏자식들만을 치셨습니다. 이렇게 죽음의 천사가 지나쳐가는 것을 '과월절'이라고 했고, 영어로는 '파스카'(pascha) 또는 '패스 오버'(pass over)라는 말을 써서 죽음에서 생명으로 건너가는 것을 의미했습니다(탈출 12).

 

그리고 이스라엘에는 다른 민족들과는 다른 특수한 형태의 제사가 있었는데, 그것이 바로 속죄제사입니다. 하느님께서 모세를 통해 이스라엘에 내리신 속죄제사의 규정을 따르자면, 누군가가 죄를 지었을 때 그 죄를 씻으려면, 그 죄를 지은 사람이 동물을 잡아, 자기 죄를 씌워서 그 동물의 피를 속죄판에 뿌리면, 그 사람의 죄가 씻어진다고 합니다. 그것이 레위기 4장과 16장에 나오는 속죄의 제사였고, 이스라엘의 죄를 씻는 방법이었습니다.

 

이러한 이스라엘의 두 가지 신앙 문화 안에서, 예수님께서 십자가상에서 피를 흘리며 돌아가신 것이, 예수님 자신의 죄 때문에 빚어진 것이 아니라, 결국은 사람들의 죄를 대신 짊어지고, 그 죗값을 속죄하기 위해 돌아가셨다는 의미가 아주 쉽게 이해됩니다.

 

예수님께서도 생전에 이미 이에 대한 언급을 하셨습니다. '누가 제일 높으냐?' 하는 문제에 대해서 제자들에게 가르치시면서, “사실은 사람의 아들도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라 섬기러 왔고 많은 사람을 위하여 목숨을 바쳐 몸값을 치르러 온 것이다.”(마태 20,28; 마르 10,45)라고 하십니다. 그리고 최후의 만찬 석상에서 제자들에게, “잔을 들어 감사의 기도를 올리시고 그들에게 돌리시며 너희는 모두 이 잔을 받아 마셔라. 이것은 나의 피다. 죄를 용서해 주려고 많은 사람을 위하여 내가 흘리는 계약의 피다.’”(마태 26,27-28; 마르 14,24; 루카 22,20)라고 미리 당신 죽음의 의미에 대해 말씀해 주십니다.

 

사도 성 요한도 하느님의 사랑에 대해 말씀하시면서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아들을 보내셔서 우리의 죄를 용서해 주시려고 제물로 삼으시기까지 하셨습니다."(1요한 4,10)라고 예수님의 죽음이 인류의 죄를 씻고, 인류를 죄악에서 구하시기 위한 죽음이었다는 것을 분명히 말합니다. 요한 사도는 세례자 요한의 입을 빌려, 예수님께 "이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하느님의 어린양이 저기 오신다."(요한 1,29) 밝히도록 했습니다. 또한 1931절에서 예수님 죽음의 시간을 과월절 양을 잡는 준비일이라고 기록함으로써, 하느님께서 양의 피를 통해 이스라엘을 죽음에서 생명으로 구원하신 이집트 탈출 사건과 연관하여, 예수님을 단순히 죽음으로 그치고 말 인류의 운명에서 영원한 생명으로 이끄시는 하느님의 어린양으로 전합니다.

 

그럼 이제 예수님께서는 과거 2000년 전에 죄를 지은 사람들의 죄를 씻어주시고 마셨을 뿐, 지금 우리와는 아무런 관계가 없는 것인가? 그렇지 않습니다. 마태오와 마르코와 루카 복음사가와 마찬가지로 바오로 사도도 코린토 전서 11장에서 '주님의 성찬'에 대해 이야기하면서, “주 예수께서 잡히시던 날 밤에 빵을 손에 드시고 감사의 기도를 드리신 다음 빵을 떼시고 '이것은 너희들을 위하여 주는 내 몸이니 나를 기억하여 이 예를 행하여라.'하고 말씀하셨습니다. 또 식후에 잔을 드시고 감사의 기도를 드리신 다음 '이것은 내 피로 맺는 새로운 계약의 잔이니 마실 때마다 나를 기억하여 이 예를 행하여라'하고 말씀하셨습니다.”(1코린 11,23-25)라고 주님의 말씀을 전합니다. 그럼으로써, 주님의 십자가상의 죽음으로 인한 속죄의 제사는 그 한 번의 죽음으로 완성된 것이지만, 그때의 그 죽음으로 그치지 않고, 계속 주님의 몸과 피를 모시는 이들을 통해 계속된다고 전합니다. 그러기에 바오로는 이어서 여러분은 이 빵을 먹고 이 잔을 마실 때마다 주님의 죽으심을 선포하고, 이것을 주님께서 다시 오실 때까지 하십시오.”(1코린 11,26)라고 명합니다.

 

또한, 히브리인들에게 보낸 편지에서, “그분이 몸을 여러 번 바쳐야 한다면 그분은 천지 창조 이후 여러 번 고난을 받으셔야 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지금 그분은 이 역사의 절정에 나타나셔서 단 한 번 당신 자신을 희생제물로 드리심으로써 죄를 없이하셨습니다.”(히브 9,16) 그리고 그리스도께서도 단 한 번 당신 자신을 제물로 바치셨습니다. 그러나 많은 사람의 죄를 없애 주셨고 다시 나타나실 때에는 인간의 죄 때문에 다시 희생제물이 되시는 일이 없이 당신을 갈망하고 있는 사람들에게 구원을 가져다주실 것입니다.”(28) 라고 말함으로써, 그리스도 예수의 죽음을 유일무이하고 항구한 희생제사로 선포합니다.

 

결국, 교회는 주님께서 인류를 구하시기 위해 돌아가신 희생을, 오늘도 우리는 성체성사를 통해 재현하며, 그 속죄의 신비를 우리는 교회의 고해성사와 성체성사를 통해 우리 죄의 사함을 받습니다.

 

우리는 수난을 겪으시는 주님을 바라보며, '주님께서 왜 돌아가셔야만 했는지?' 그 의미를 확실히 이해하며, 주님께서 오늘 우리 죄로 인해 수난당하시고, 돌아가시게 되었다는 사실을 피부로 느낍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우리는 우리 죄의 부당함과 심각성을 깨닫게 될 것이며, 우리 죄를 반성하고, 우리 죄로 인한 사회악의 확산과 연대를 끊기 위해, 우리 사랑의 행위로 보속을 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사명감을 가지게 됩니다.

 

그러므로 그런 우리 사랑의 보속은, 주님 십자가의 효과를 이 세상에 확산시키는 데에 공이 될 것이며, 주님 수난의 신비를 열매 맺게 하는 데에 우리를 참여케 할 것입니다.

 

우리를 구하신 주님께 감사드리며, 우리 사랑의 보속으로 구원을 위한 주님의 희생제사를 계속하기로 합시다.

 

아버지, 저들을 용서해 주십시오. 저들은 자기들이 무슨 일을 하는지 모릅니다.”(루카 23,34)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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