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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 Re:이 모습은 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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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과영혼 [61.106.105.*]

2006-11-23 ㅣ No.4616

 

   † 찬미예수

 

   안젤라 자매님께서 신부님과의 회식 때 본의 아니게 마음속 비밀법정을 작동받아야 하셨나보군요. 신부님도 신성+인성으로 하나되어 오신 예수님의 그것처럼 무언가를 말씀하신 걸로 들으실 필요가 있겠습니다.

 

우리 인간의 가장 큰 약점은 아무래도 인성 과다 해석 즉 확대해석과 이로 인한 알게 모르게 짖는 죄를 묵상할 필요가 있다고 봅니다. 안젤라 자매님이 착하셔서 신부님의 그것에 불만을 갖았을 수도 있을것입니다.

 

그리고 지금은 안젤라 자매님께서 모르고 짖는 오류(소죄)로서 이곳에서 신부님을 심판하고 있다고 봅니다. 그리고 님 역시 나중에 현재의 싫은 신부님처럼 큰 일을 하게 될 경우 역시 본의 아니게 알고 짖는 오류(대죄)와 그것의 발표 과정에서 번민을 해야 할 경우도 필연으로 흘러 올 것입니다.

 

일단 신부님을 심판하려 들지 마십시오. 그 것을 잠시 떠나서 '신부'란 글자 그대로 하느님 아버지란 뜻이 될 수 있으며, 영어의 어머니 라틴어로서는 '도미누스+데우스' 즉, '주님 또는 주인'을 뜻하는 도미누스에 신중의 신, 왕중의 왕인 제우스신에서 유래된, 데우스가 붙습니다.

 

신부님 역시 이러한 '신부'의 어원을 모르실 리가 없습니다.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왜 그분이 그렇게 말씀하실까? 하고 묵상하는 자세가 필요합니다.

 

역시 행사를 치루게 되면 세가지 부류의 사람들이 지나가기 마련이고, 십자가에 못박히신 예수님의 좌도와 우도의 그것을 우리가 자연 분석하고 대처하자는 취지로 받아들여야 할 것입니다.

 

한 강도는 이 순간 예수님께, 너부터 살려보라지? 하고는 선의를 거부합니다. 그러나 한 강도는 예수님께 최후의 고해성사를 나누며 하늘로 승천합니다. 이렇게 말하니 어느 無교라는 친구가 성경의 마지막 권인 '요한 묵시록'을 들먹이면서 천주교를 비방터군요. 안타깝게도 이 친구는 인간의 기회주의적인 감성과 상업성의 소산인 다빈치코드 저작자와 같은 주관을 가지고 있다는 느낌이었습니다.

 

이럴경우 저같은 경우는 요한 묵시록도 좋치만, 그 다음 다시 창세기가 이어진다는 것도 신비요, 신비(미스테리움)는 거룩함(사크라멘뚬)으로 승천하기를 바라는 저의를 갖고 맞장구를 쳐야 하였습니다.

 

그는 이렇게 말하더군요. '사랑한다'의 반대말이 '사랑했었다'라며 역시 이사람처럼 똑똑하기를 즐기는 사람이었습니다. 하지만 믿지 않는 사람이 믿는 사람들을 심판한다는 느낌을 거부할 수 없었습니다.

 

안젤라 자매님, 이야기가 딴 방향으로 흐르고 있지는 않는가요?

 

신부님을 사랑해 드리십시오.

 

님의 그릇이 어떤 몫인지는 모르오나 살다보면 별의 별종들을 만나게 될 것입니다.

 

예수님의 크리스마스(그리스도미사)때부터의 신약시대인 2006년간 초대 예수 동호회장이신 즉 초대 교황이신 성 베드로와 지난 264대, 선종하신 故 요한 바오로 2세 성하와 현재의 265대, 베네딕도 16세 성하의 천주교 전례사 동안 500년전에 시작된 '항의하다(프로테스)'의 프로테스탄트교(당시 교부들과 종교 개혁자 마르틴 루터가 합의한 개신교의 명칭) 형제들은 500년간 태어날 때부터 인간적 오류로서 함부로 연옥 교리가 담긴 마카베오서 9권을 누락한 스스로 사제의 신분에서 목사로 상승인지 하강인지를 한 루터의 소명(?)으로 인하여 아담과 하와의 '선과 악을 구분하는 과일'을 따먹음으로 인한 원죄속에 연옥 교리의 무지마저 안고 살아오고 있습니다.

 

그러니 안젤라 자매님도 자살자 가수 김광석의 '너무 아픈 사랑은 사랑이 아니야'라는 궤변에 현혹되지 마시고 아픈 사랑도 즐기는 그런 신앙인으로 거듭나시어 어려운 사랑도 즐기십시오.

 

사랑은 아픈 것도 정상입니다. 섭리인 것이지요. 안젤라 자매님이 순진한 마음으로 이곳에 하소연을 한 것도 지극히 정상적인 결과입니다. 잘했다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이 허락하셨다 믿어두십시오.

 

싸움의 법칙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그 신부님이 맘에 안드시면 반드시 일대일로 먼저 따지십시오. 만약 그 신부님에게 일대 일로 먼저 따지거나 선교시키려는 의지가 결여된 채, 이곳을 찾아 글을 올리셨다면 하느님께서 과연 지상에서의 성스러운 부모님의 그것처럼 그 자녀인 님에게 어떠한 결과를 주실지 걱정이 듭니다.

 

이러한 싸움의 법칙을 망각하는 사람들은 반드시 인터넷 체팅 사이트에서도 이미 오프라인에 한 글자라도 발을 들였을 때의 공과 사의 직분을 망각한 채 영육의 코메디언으로 머물기가 쉽상인 것입니다. 써움 자체도 싫어하는 것은 가능하지만 미워하는 것은 내가 부족하기 때문이다 여겨두십시오.

 

개선 방법은 간단합니다. 마음의 비밀법정을 전능하신 주님께 계속 의탁하여 나가십시오. 그러면 하느님께서 자매님으로 하여금 더욱 하느님의 눈으로, 예수님의 입으로, 성령의 의지를 허락하실 것입니다.

 

아니면 저 치명자들처럼, 심지어 이름조차 우리가 기억할 수 없는 무명 순교자들의 그것처럼 온 머리를 다하여, 온 가슴을 다하여, 온 어깨의 힘을 다하여 당신의 사랑을 놓치지 않겠노라고 다짐에 다짐을 더하며 아스라히 죽어간 이분들의 얼(영혼)조차 기리게 될 지 모를 일인것입니다.

 

일단 신부님들은 태교 10개월의 그것이 70여년의 인생을 좌우하듯, 영원한 생명의 그것을 위하여 70여년의 찰나일 수밖에 없는 고통의 세월을 투자한 분들이라 생각해두시고, 봐드리십시오. 그리고 더 나아가 미사도 앞으로는 보려 하지 마시고 계속 그 아름다운 봉사에 임하셨던 것처럼 참례해야 할 것입니다.

 

모든 봉사속에 그같은 기도와 공부와 성사와 공동체 생활이 함께 공존함을 발견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기도생활 + 공부생활 + 봉사생활 + 성사생활 + 공동체 생활은 신앙인으로서 마땅히 조화가 이루어져야 하기 때문입니다.

 

지금 촛불이 없다면 주님께 마음의 촛불을 간구해보세요. 그리고 이제부터 다시 시작하심 그만인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이러한 단순한 기도부터 다시, 반드시 들어주실 것입니다.

 

세상엔 별종들도 참 많습니다.

 

어떤 여인의 해병대 1기라는 아버지께서 지난 10월 30일 자살을 했다 하더군요. 함께 기도할 수 있었습니다.

 

소녀였던 그 여인이 더욱 소녀화 되었습니다.

 

헌데 다른날은 남편이란 자와 함께 무언가를 확대해석하더니 온갖 입에 담지 못할 패설과 욕설에 젖은 그것을 피력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이 여인은 사람이 많은 자리에서 캠을 통하여 브라자 끈을 푼다느니 하면서 도무지 부끄러움을 모른채 창녀성의 그것을 발산하고 있었습니다.

 

저역시 이럴 경우 화가 나서 속에서 검은 연기가 펄펄 나기 시작하였지만 나름대로 지혜도 주셨기에 절대 대꾸를 하지 않습니다. 왜냐면 좋은 것이나 나쁜 것이나 말꼬리부터 잡으면 그것이 더욱 비화 되거나 진전되기 때문입니다.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악에 물든 그녀는 온갖 루머와 더욱 입에 담을 수 없는 욕설을 배설하고 다닌다더군요.

 

방금전 그녀와 그녀의 남편이 둘이서 자리하고 있기에 기습 방문을 할 수 있었습니다.

 

'너희 쓰레기들을 구속시킬까, 아니면 불쌍한 너의 아버지의 취지를 고려하여 봐줄까 삼일째 고심중이다'라구요. 꼬리를 내리더군요. 이 경우도 사실 더 이상 말꼬리가 필요없을 때가 많을 것입니다.

 

아무튼 사랑은 어려운 것입니다. 그리고 세상은 여전히 각양 각색, 십인 십색의 사람들을 만나야 할 것입니다. 피할 수 없는 일이며, 이러한 미래를 대비하기 위해서라도 우리는 구약속의 그것에 끌려다니지 말고 이미 신약을 믿는 백성으로서 세상 모든 것을 점점 더 이 순간 주님을 믿고 닮고 따르겠다고 위의 두가지 경우(하느님의 눈으로..)처럼의 성호경을 바쳐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순간도 주님께선 말씀하십니다.

 

'안심하라, 내가 이미 세상을 이겼노라'라구요.

 

잔가지 생각에 물들면 물도 고일 때 썪기에 남들 선행할 때 다빈치코드 신봉자처럼 병적으로 세상의 선행을 인간의 의지로 판단하고 비화 시키거나, 상업성에 물들어 그것의 촬영을 허락한 루르도 박물관의 무언가의 물듦처럼 자신의 그것을 분별없이 열게 됩니다.

 

그저 다만, 마음의 촛불도 함께 켜고 성호경을 바치며 세상 이웃을 만나고 사랑하면 그만인 것입니다.

 

아무튼 요즘은 쾌락의 사랑도 워낙 기승을 부르니 이러한 사랑론도 위험타는 노파심마저 듭니다만, 성 토마스 데 아퀴노의 전구 말씀처럼 '사랑은 첫번째 선물입니다. 나머지 모든 것들은 그저 우리에게 주어지는데 오직 사랑 덕분입니다'하고 계속 되새겨보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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