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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위일체 대축일(5월 22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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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학남 [obbji] 쪽지 캡슐

2005-05-21 ㅣ No.4052


    삼위일체 대축일

    ‘삼위일체 대축일’은 오랜 역사 과정을 거쳐 800년경에 이미 시작되었으나 1334년 교황 요한 22세 때에 로마 전례력에 들어오게 되었지요. 이 때부터 로마 교회는 성령 강림 대축일 다음 주일을 삼위일체 대축일로 정하여 지내고 있답니다. 삼위일체 대축일은 하느님은 한 분이시나 성부, 성자, 성령의 세 위격으로 되어있다는 삼위일체를 기념하는 날이에요. 세 위격들이 본질은 동일하면서도 상대적으로 구분되어 있다는 이러한 관계는 우리의 이성으로써는 쉽게 파악되어 지지않는 신앙의 대상입니다. 세 위격은 온전히 다르면서 동시에 똑같은 하느님이시라는 것이 삼위 일체 교리의 핵심입니다. 삼위의 관계는 누가 먼저 계심도 후에 계심도 없고, 높고 낮음도 없고, 온전히 같은 한 분의 하느님이시라는 뜻이죠. 그러므로 성부도 하느님, 성자도 하느님, 성령도 하느님이십니다. 학자들은 이런 비유를 들어 삼위일체를 말하기도 한답니다. (1) ‘태양은 한 개지만 그 덩어리가 있고, 빛이 있고, 열이 있다. 태양 덩어리가 존재하면서 동시에 빛이 있고, 열이 있듯이 하느님의 성삼의 관계도 영원으로부터 세 위격을 갖추신 한 분의 하느님이시다. (2) 삼각형이 되기 위해서는 각이 세 개 있고, 변이 세 개 있어야 한다. 세 변과 세 각이 하나의 삼각형을 이루듯 세 위격이 한 분의 하느님을 이룬다는 것이다.’ (3) ‘한 인간 안에는 지능과 의지와 정서가 있다. 인간은 지능이 있기 때문에 무엇을 생각하고 판단하게 되고, 또 의지가 있기 때문에 자기가 지능으로 생각한 것을 의지에 의해서 행동한 다음 그 결과를 보고 좋다든지 나쁘다든지 그것을 느끼는 정서가 따라온다. 이렇게 한 인간이지만 그 안에는 지(知), 정(情), 의(意)가 있어서 원만한 하나의 인격을 이루듯이 하느님도 성부, 성자, 성령의 세 위격이 한 하느님을 형성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신학자들은 다시 성부 성자 성령을 구별하여 인간에게 역사하시는 모습을 이렇게 설명 한답니다. 성부는 영원한 이상이며 완전하신 분인 성부님이 계시고, 이 성부님의 이념이 하나의 성자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성자를 다른 말로 ‘말씀’이라고도 합니다. 왜냐하면, 인간이 머리로 생각한 것이 말로써 표현되듯이, 성부의 이념이 표현된 것이 성자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성부와 성자는 서로 무한히 사랑하셔서 그 사랑이 또 하나의 위격으로 태어나게 되었는데 이것이 곧 성령입니다. 신학적으로 엄밀히 따져서 한 위격이 하시는 일이란 곧 세 위가 서로 공동으로 하시는 것 입니다만 우리가 알아듣기 쉽게 말씀드리면, 성부는 창조 사업을 하셨고, 성자는 죄에 떨어진 인간을 구하는 구원 사업을 하셨고, 마지막 성령은 성부께서 창조하시고 성자께서 구원하신 인간을 끝까지 천국 영원한 나라로 인도하는 성화(聖化) 사업을 하신다고 할 수 있습니다. 삼위일체 교리는 우리 신앙고백의 절정이죠. 그래서 우리가 성호를 그을 때마다 성부 성자 성령의 이름으로 기도하는 것은, 삼위일체 신앙을 고백한다는 뜻이 됩니다. - 서울 가톨릭 청소년 사목부‘하늘마음" / 박도식 신부 ‘무엇하는 사람들인가?’ 에서 -


    三位一體란 말은 우리 가톨릭 교리 상에서 가장 설명하기 힘든 교리이다. 즉 하나이면서 동시에 셋이신 하느님의 존재를 설명한다는 것은 인간의 수학적인 계산이나 합리성을 추구하는 이성적인 고찰로써는 해석이 불가능한 내용이다. 4세기의 대성학자인 St. Augustine은 이 삼위일체의 신비를 캐내기 위해서 꽤 많은 세월을 연구에 몰두했지만 끝내 인간의 두뇌로 납득할 만한 설명을 얻어내지 못하였다고 한다. 아오스딩 성인의 삼위일체 탐구 과정에는 이런 일화가 있다고 한다. 어느 날 바닷가에서 삼위일체의 신비를 묵상하며 거닐고 있는데 난데없이 한 소년이 나타나서 조가비로 바닷물을 열심히 퍼다가 손으로 판 작은 구멍에 붓고 있는 것을 발견하였다. 성인은 하도 이상해서 "얘야, 너 거기서 뭘 하고 있니?" 하고 물었다. 그랬더니 소년이 성인을 쳐다보면서 하는 말이 "네 저는요, 이 구멍에다 저 바닷물을 다 퍼부으려고 합니다." 라고 대답을 하더라는 것이다. 성인은 하도 기가 막혀서 "예끼 이 녀석아 그 작은 구멍에 어찌 저 넓고 무한한 바닷물을 다 퍼 담을 수 있겠느냐?" 하고 핀잔을 주었다. 그랬더니 그 소년이 발딱 일어서서 하는 말이 "학자님, 저는 언젠가 저 바닷물을 이 작은 구멍에 다 담을 수는 있어도 학자님께서 연구하시는 삼위일체도리는 영원히 인간의 작은 머리 속에 담지 못할 것입니다" 하고 사라지더라는 것이다. 성인은 마치 뒤통수를 한데 얻어맞은 기분이었지만 그제서야 무릎을 탁 치면서 자기의 교만과 쓸데없는 야심을 버리고 하느님의 삼위일체적 신비 탐구를 멈추기로 했다는 일화이다. 이와 같이 인간은 하느님의 속성을 파헤쳐 보고 그의 본질이 무엇인가를 추구하고자 하지만 그러나 인간은 성서에서 등장되는 몇 가지 안되는 말씀들을 통하여 어렴풋이 짐작이나 하고 추측이나 할 뿐입니다. 사실, 우리가 모두 알 수 있다면 그분은 더 이상 하느님이 아닙니다. 하느님 나라에서 그분을 직접 뵙기 전에는 우리는 사실 확실한 말을 할 수 없습니다. 다만 성서 말씀이기 때문에 믿는 것입니다. - 김충수 신부 강론 중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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