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들의 모습
베론성지 술례(09.5/1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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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베론성지 >
황사영은 처삼촌 정약종이 들려준 천주학에 매료되어 1790년에 이승훈에게서 천주교 서적을 얻어 보았고 천주교 신앙에 대해서 진지하게 토론한 후 알렉시오(Alexius) 라는 세례명으로 영세 입교한다.
▶ 최양업 신부 땀의 순교자 최양업(崔良業) 토마스(1821-1861년) 신부는 두 번째 한국인 사제로서, 세례명은 토마스. 양업(良業)은 아명(兒名)이고 관명(冠名)은 정구(鼎九), 본관은 경주, 충청도 다락골[일명 대래골, 현 靑陽郡 化成面 禮岩里]에서 출생하였다.
1. 생애 최양업은 독실한 천주교 신자 최경환(崔京煥)과 이성례(李聖禮)의 장남으로 태어나 부모로부터 철저한 신앙교육과 신앙생활의 영향을 받으며 자랐다. 그의 가족은 이미 증조부 때 이존창(李存昌)의 권고로 천주교에 입교했었다. 본시 서울에서 살았는데 조부 때 박해를 피해 낙향, 당시 홍주(洪州) 땅인 다락골에 정착하게 되었다고 한다. 여기서 최양업의 부친 최경환이 출생하였다. 최경환은 이성례와 결혼함으로써 김대건 신부 일가와 친척관계를 맺게 되었다. (최양업과 김대건은 진외 6촌간). 다락골에서 점차 생활이 넉넉해지고 또 외교인 친척들과의 접촉으로 인해 신앙생활이 해이해지자 최경환은 보다 자유로운 신앙생활을 영위하고자 형제들을 설득하고 그들과 같이 서울로 이주하였다. 그러나 3년 만에 천주교 집안인 것이 탄로되어 서울을 떠나야 했는데 이 때 최경환은 과천(果川)의 수리산 뒤뜸이로 피신하였다. 여기서 그는 산지를 개간하며 연명해 나아갔다. 최양업은 16살이 되는 해에 이 곳 수리산에서 신학생으로 선발되었다. 1836년초 입국에 성공한 모방(Maubant, 羅伯多祿) 신부는 즉시 조선인 성직자 양성을 위해 신학생 선발에 착수했는데, 맨 먼저 최양업이 발탁되었고, 이어 최방제(崔方濟)와 김대건이 발탁되었다. 최양업 등 세 소년은 서울의 모방 신부 곁에서 라틴어를 배우며 출발을 기다렸다. 왜냐하면 모방 신부는 그들을 국외로 내보내어 성직자로 양성할 계획이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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