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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로운 자 vs 의롭게 된 자 [번역오류] 799_justice [성경공부] [교리학습_의로움] [교리학습_정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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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06-19 ㅣ No.800

+ 찬미 예수
 
로마서 5,7에 대하여 다음과 같은 질문(굿뉴스 성경 묻고 답하기 게시판 제3145,3146번)들을 주셨기에, 이 글을 마련하였습니다. 주신 질문들에 대하여 도움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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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문:
안녕하세요 성경을 읽다가 많이 궁금해서 문의 함니다.
로마서 5,7절의  의로운 이를 위해 서라도 죽을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혹시 착한 사람을 위해서라면 누가 죽겠다고 나설지도 모릅니다.
 의로운이와 착한이가 어떻게 다른지요  답을 주시면 감사하겠읍니다.
 
질문:
안녕하세요
로마서 5,7절의  의로운 이를 위해 서라도 죽을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혹시 착한 사람을 위해서라면 누가 죽겠다고 나설지도 모릅니다. 대한 답변을 주신 ooo씨와 또한분 감사드림니다,
의로운 사람과 착한 사람의 뜻은 알겠는데요 왜 성경에서 의로운 이를 위해서는 죽을 사람이 없고 착한 사람을 위해서는 죽을 사람이 있는지가 궁금함니다
  함께 고민해주신분 축복 받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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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글:
 
다음은, 저의 졸저서인 "가톨릭 교회의 말씀 전례에 따른 성경공부 해설서 가해-II"의 연중 제11주일 제2독서(로마 5,6-11) 성경 본문 및 해설입니다. (굵게 표시한 문장들이 성경 본문들입니다).
 
공지: 이 책을 구입하신 분들께서는, 오류수정 및 내용보강을 위하여 추가로 제공되는
 
 
을 꼭 읽어 주실 것을 부탁드립니다.
 
참고: 이렇게 성경의 한 절만 똑 떼어내어 이해하려고 것은 가능한 한 삼가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자칫 엉뚱한 생각/추측을 하기 십상이기 때문입니다. 특히 로마서 5,7 이 한 절에 대한 납득할 만한 해석은, 개신교 측 영어 성경 주석들을 포함하여, 인터넷에서도 접하는 것이 쉽지 않았습니다. 이 절과 관련하여, 개신교 측 성경 주석들이 어려움을 가지는 것은, 아마도 가톨릭 교회의 전통적 가르침인 자연덕(natural virtues), 윤리덕, 대인덕, 혹은 인간에 대한 덕(human virtues)들로 불리는 덕들 중에서 주된(principal) 덕들인 사추덕(four cardinal virtues, )들의 중요성에 대하여 잊어버렸기에 침묵하기 때문인 것으로 짐작하고 있습니다. 개신교 측에서는, 힙포의 성 아우구스티노(354-430년) 한참 이후이기에, 성 토마스 아퀴나스(1225-1274년)로 대표되는 중세 스콜라 철학에서 중요하게 다루어졌으며 그 결과 가톨릭 교회 교리서에 흡수된 그리스도교의 전통적 윤리 신학(Moral Theology)을 인정하지 않으니까요. 
 
그리스도교의 전통적인 가르침에 포함되어 있는 향주덕들 및 사추덕들에 대하여 더 학습을 원하시는 분들께서는 (제 또한 학습하기 위하여 찾아 놓은) 다음의 학습자료들을 읽어 보시기 바랍니다:
 
학습자료목록 with brief comments
*http://www.cateforum.com/rg-moral/Rg-004.html(김웅태 신부 홈페이지 제공 사추덕에 관하여 - 우리말)
http://www.katapi.org.uk/MoralTH/Ch6.htm (윤리 신학에 대한 간략한 소개 저서)
http://www.leaderu.com/ftissues/ft9901/reviews/charles.html (책 서평)
http://rockywa.hubweb.net/form/a27.htm (자유게시판 제119142번에서 이미 소개해 드렸던, 신학대전 요약(Compendio della Somma Teologica di San Thommaso d'Aquino) - 우리말)
http://www.newadvent.org/summa/3.htm (성 토마스 아퀴나스의 신학대전 중에서 향주덕들과 사추덕들에 대한 부분)
http://www.op.org/summa/a4/summa.pdf (자유게시판 제119136번에서 이미 소개해 드렸던, 신학대전 전문 pdf 파일 다운로드 사이트)
http://maritain.nd.edu/jmc/etext/emt.htm (Title: Elements of Moral Theology based on Summa Theologiae of St. Thomas Aquinas)
 
 
제2독서 - 로마 5,6-11
 
     42년에 성 베드로가 로마를 방문하였을 것이나, 성 바오로가 이 편지를 58년경에 코린토에서 썼을 무렵에는, 로마에 번창하는 그리스도인 공동체가 있었다. 성 바오로는 스페인 지역을 선교할 계획과(로마 15,24) 그리로 가는 중에 로마에 위치한 그리스도인 공동체를 방문할 계획을 세웠다. 대다수의 로마의 그리스도인들이 그를 몰랐기 때문에, 그는 그들에게 자신을 소개하기 위하여 이 편지를 썼다. 바오로의 배경은, 많은 성경 해석자들이 그에 대하여 설정하려고(place) 시도하는 로마 법정에서 요청되는 계약법(contract law) 교육 대신에, 하느님과의 가족 계약이라는 개념 안에서 교육을 받은 히브리인이다.
 
6 우리가 아직 나약하던 시절, 
 
이것이 의롭지 못한 자의 상태이다. 하늘은 닫혀있고 사람은 죄의 용서를 가져다 줄 어떠한 것도 행할 수 없다.
 
그리스도께서는 정해진 때에 불경한 자들을 위하여 돌아가셨습니다.
 
바오로는 사람이 자기 힘으로 어찌할 수 없음에 대한 신학적 문맥 및 이 사건의 결과에 대한 신학적 문맥 안에서 이 역사적 사건에 대하여 확언한다.
 
“만약에 하느님을 믿지 않는 자들 그리고 하느님의 적들인 자들을 위한 바로 그 시간에 예수님께서 자신을 죽음에 내어주셨다면 ... 만약에 우리가 예수님을 믿으면 당신께서는 얼마나 더 많이 우리를 당신의 도움으로써 보호해 주실런지!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위한 생명과 영광을 얻기 위하여, 우리를 위하여 돌아가셨다. 따라서 만약에 예수님께서 당신의 적들을 위하여 돌아가셨다면, 예수님께서 당신의 친구들을 위하여 무엇을 하실 것인지를 그냥 생각해 보도록 하라!” [(히브리서를 제외한) 사도 바오로의 전체 서간에 대한 (익명) 주석자(The Ambrosiaster, 366-384년), Commentaries on Thirteen Pauline Epistles].
 
7 의로운 이[번역 오류: NAB: a just person(정의로운 이)](*)를 위해서라도 죽을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혹시 착한 사람[NAB: a good person(선한 사람/좋은 사람)]을 위해서라면 누가 죽겠다고 나설지도 모릅니다. 

[내용 추가 일자: 2022년 5월 8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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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게시자 주: 다음의 주소에 접속하면, 바로 이 심각한 번역 오류에 대한 더 자세한 내용의 글들을 학습할 수 있다. 필독을 권고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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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 2022년 5월 8일자 내용 추가 끝]
 
바오로 시대의 세계에서 착한 사람은 특히 다른 이들에게 관대한(magnanimous) 사람을 뜻하였다(로마서 5,7에 대한 NAB 주석). 논리적인 점에서 볼 때에, 비록 정말로 선한 사람일 경우에는 그렇게 될 수도 있겠지만, 이런 자기희생(self-sacrifice)은 발생하지 않을 것이다.
 
“성경이 순교자들로 가득 차 있음에도 불구하고 바오로는 어떻게 이렇게 말할 수 있을까? 그들은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는 중일까? 사실, 순교자들은 다른 사람들이 아니라 하느님을 위하여 죽었던 것이며, 그리고 하느님을 위하여서라면 누구든지 기꺼이 죽음을 무릅쓰려고 할 것이다. 그러나 다른 모든 죽음은, 심지어 그것이 정의롭고(just) 또 인간의 본성의 이치(law of human nature, 性理)와 일치를 이룬다 하더라도, 견디어 내는 것이 매우 힘들다. [오리게네스(Origen) (약 244년경), Commentaries on the Epistle to Romans, 5,8].
 
 정의(正義, justice)는 윤리덕, 대인덕, 혹은 자연덕(natural virtue)(각주1 참고) 이라고 불리는 인간에 대한 덕(human virtues)들 중의 주된 덕들인 사추덕(four cardinal virtues)들 중의 하나인데, 위의 제7절에서 의로운 이(번역 오류: a just person, 즉, 정의로운 이)는, "우리가 아직 나약한 시절"이라는 제6절의 첫 부분 언급에 비추어 볼 때에 아직 세례를 받지 않아 의롭게 되지 않은 사람으로서, 사람에 대한 하느님의 정의로움을, 즉, 신성(神性)적 사랑의 행위(divine love)에 있어서의 [판단 및 절차에 있어] 수용(受容)된 올바름(the rectitude of divine love)을 [즉, 영원한 법에 순응/부합하는, 마지막 끝 쪽으로 최적의 방향성 및 기울어짐과 함께 움직이도록 (어떤 방식, 시간, 혹은 정도에 있어) 합당하게 명령을 받고 있음(being duly ordered to the last end)의 수용(受容)이라는 올바름(the rectitude of divine love)을](*), 실천하는 사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당시의 바리사이들 처럼 율법에 충실힌 자 혹은 단순히 다른 사람에 대하여 정의로운/의로운 사람, 즉 상호 정의(commutative justice)를 실천하는 사람을, 뜻할 것이다. 이런 종류의 의로운 사람들을 대신하여 자신의 목숨을 바치겠다는 사람은, 친 자식이라면 모를까, 거의 있지 않을 것이나, 이에 비하여 착한 사람(good person, 善者)은, 즉 다른 이들에게 관대한 사람은, 비록 "아직 나약한 시절"에 살고 있어 아직 세례를 받지 않아 의롭게 된 사람이 아니기는 하나, 신성(神性)적 사랑에 있어서의 [판단 및 절차에 있어] 수용(受容)된 올바름(rectitude of divine love)(*)을 몸소 다른 사람들에게 실천하는 사람이므로, 혹시 이 착한 사람(善者)을 대신하여 죽겠다고 나서는 사람은, 드물겠지만 그래도 있을 수 있다는 의미로 이해할 수 있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로마서 제5,9에서의 "우리"는 "세례를 받아 의로워진 우리"를 의미하므로, 로마서 5,7은 (심지어 죄의 상태에 있는 사람들을 포함한 인류 모두를 위하여 예수 그리스도께서 행하신 하느님 사랑의 완미한(perfect) 실천을 언급하고 있는) 그 다음 절인 로마서 5,8과 (그리고 5,8의 반복인 5,10과) 크게 대비를 이루고 있는 절이다. 정의(justice)의 정의(definition)를 제대로 알기 위하여 아래의 주석에 있는 "정의(justice)의 정의(definition)와 그 적용 예들"을 필히 참고하라. 그리고 사추덕들에 대한 가톨릭 교회 교리서 요약집(CCCC) 및 가톨릭 교회 교리서(CCC)의 설명은 본 해설서의 가해 연중 제15-17주일 '3분 복음/교리 묵상'들에 있다.
 
[내용 추가 일자: 2016년 5월 11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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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게시자 주: 기존의 "하느님의 사랑의 공정성"이라는 심각한 수준의 번역 오류가 없다고 아니할 수 없는 표현을 오늘 날짜로 "신성(神性)적 사랑(divine love)에 있어서의 [판단 및 절차에 있어] 수용(受容)된 올바름"으로 교체하였다.  가톨릭 교회 교리서 제1991항에서 사용되고 있는 바로 이 "the rectitude of divine love" 라는 용어의 정의(definition)는 다음의 글에 있으니, 꼭 읽도록 하라:
http://ch.catholic.or.kr/pundang/4/soh/1689.htm <----- 필독 권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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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 내용 추가 끝]
 
8 그런데 우리가 아직 죄인이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돌아가심으로써, 하느님께서는 우리에 대한 당신의 사랑을 증명해 주셨습니다.
 
이 구절은 예수님의 희생이 참으로 무상의 성격임을 분명히 하고 있다(brings out). 예수님께서는, 정말로 좋지 않은 무신론자들을 포함하여, 모두를 위하여 돌아가셨다. 
 
9 그러므로 이제 그분의 피로 의롭게 된(각주2 참고) 우리가
 
예수님의 피로 의롭게 됨은 다음의 당대의 랍비적 공리(rabbinical axiom)가 상기될 때에 가장 잘 이해될 수 있다: “피를 쏟지 않고서는 죄의 용서가 이루어지지 않습니다.”(히브리 9,22). 이 공리 자체는 구약 성경의 정화 예식들에 근거하고 있다(레위기 8,15; 9,15-21; 16,19 등). 이 생각(idea)은 희생제물 예식에서 그렇게 뿌려진 피가 야훼 하느님을 달랜다는(appease) 것도 아니었고, 또 피를 뿌리고 또 결과로서 따르는 죽음이 지불하여야 하는 일종의 보상 혹은 대가임을 강조하는 것도 아니었다. 오히려, 야훼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대로 봉헌된 속죄 제물들을 의식적으로 정화하고 깨끗하게 하기 위하거나(레위기 16,15-19) 혹은 그렇지 않으면 야훼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봉헌을 위한 속죄 제물들과 사람들을 축성하기 위하여서이었다. 속죄일(Day of Atonement)에 대사제는 계약의 궤 위에 피를 뿌렸는데 “그것은 이스라엘 자손들의 부정과 허물, 그리고 그들의 모든 잘못 때문이다.”(레위기 16,16). 그들의 죄들은 토지와 성전, 그리고 죄를 포함하는 모든 것들을 더럽혀 왔다고 생각되어졌다. 죄들에 대한 속죄로서, 피를 뿌리는 것은 이들을 정화하였고 또 새롭게 축성하였다. 이에 대한 숨은 이유는 레위기 17:11에서 발견된다: “생물의 생명이 그 피에 있기 때문이다. 나는 너희 자신을 위하여 속죄 예식을 거행할 때에 그것을 제단 위에서 쓰라고 너희에게 주었다. 피가 그 생명으로 속죄하기 때문이다.” 피는 생명과 동일시되었는데 이것은 nepeš(breath of life, 생명의 숨)가 피 안에 있다고 생각되었기 때문이다. 사람으로부터 피가 새면, nepeš가 그 사람을 떠났다. 그래서 희생 제물에 뿌려진 피는, 그 희생 제물을 바치는 사람 대신에 동물에게 할당된, 대신하여 받는 형벌(vicarious punishment)이 아니다. 이와는 달리, 그 동물의 ‘생명’이 야훼 하느님께 봉헌된 것인데(레위기 16,8-9), 이것은 야훼 하느님께 동물을 희생 제물로 바친 사람의 생명의 상징적 봉헌이었으며, 이렇게 하는 것은 그로부터 그의 잘못들을 야훼 하느님의 면전에서 씻어 내었으며 다시금 그를 야훼 하느님과 화해하게 하였다(reconciled). 사람의 죄들을 속죄하기 위하여 흘려진 그리스도의 피는, 사람과 하느님과의 화해를 불러일으키기 위한 당신 목숨의 자발적인 봉헌이었다(에페소 2,13). 그리스도의 강생구속(降生救贖)으로 하늘이 열려졌기에 우리는 하느님께 개별적으로 다가가 우리의 죄들을 용서받을 수 있게 되었다. 세례를 통하여 우리는 하느님의 자녀들이 될 수 있기에, 결코 우리는 유산을 물려받을 수 없는 하느님의 노예들로 무작정 간주되지 않는다.
 
그분을 통하여 하느님의 진노에서 구원을 받게 되리라는 것은 더욱 분명합니다.
 
과거 시제가 아니라, 미래 시제이다. 구원은 이 여행의 종착점이다. 우리는 천상에서 하느님과 함께 있을 것이다. 여기서는 언급되지 않았으나 이 과정에 내재된 것은 그리스도인의 삶 안에서 하느님의 부르심에 대한 우리의 자유로운 응답이다. 
 
10 우리가 하느님의 원수였을 때에
 
이 구절은 더 긍정적인 방식으로 위의 제8절의 반복인데, 왜냐하면 죄인은 단순히 ‘나약하거나’ 혹은 ‘무신론적’인 것이 아니라, 실제로 하느님의 원수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죽음은 원수와 하느님과의 화해를 불러일으킨다. 여기서 화해라 함은 사이가 멀어지고(estranged) 또 죄 많은 사람이 하느님과의 일치와 교제(union and companionship, 즉 친교)의 회복(restoration)을 말한다. 
 
그분 아드님의 죽음으로 그분과 화해하게 되었다면, 화해가 이루어진 지금 그 아드님의 생명으로 구원을 받게 되리라는 것은 더욱 분명합니다.
 
의롭게 됨(justification)의 효과는 그리스도의 부활하신 삶에 함께 함에 있는데, 이것이 구원(salvation)을 가져다준다. 비록 의롭게 됨이 지금 발생한다 할지라도, 사도 바오로가 그러하였듯이, 구원은 우리가 살아 있는 동안에 여전히 추구되어야(realized) 한다. 왜냐하면 구원은, 우리가 그동안의 죄들로부터 구해졌다는(saved) 것뿐만이 아니라, 훨씬 더 나아가, 앞으로 우리가 죽은 후에 최종적으로 하느님을 뵙게 됨(vision of God)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11 그뿐 아니라 우리는 또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느님을 자랑합니다. 이 그리스도를 통하여 이제 화해가 이루어진 것입니다. 
 
의롭게 됨의 효과는, 하느님의 분노라는 두려움 앞에 그가 서기도 전에, 그리스도인으로 하여금 심지어 하느님 당신을 자랑하게 한다. 그리스도의 죽음 안에서 하느님의 사랑을 경험하였기에, 그는 이제 하느님의 그러한 배려(thought)에 대하여 크게 기뻐할 수 있다.
 
각주1: 현명(prudence, 지덕), 정의(justice, 의덕), 용기(fortitude, 용덕), 그리고 절제(temperance, 절덕)로 이루어진 사추덕들은, (i) 자연적인 인간의 이성(natural human reason)에 의하여 알게 되고, (ii) 이들의 근원(origin)이 인성(human nature)에 있으며, (iii) 이들의 목표(goal)가 인간의 인격(character)과 삶(life)의 완성(perfection)이므로, 자연덕(natural virtues)들이라고 또한 불린다. 이들은 또한, (1) 하느님의 계시에 의하여 더 완벽하게 알게 되고, (2) 하느님의 은총에 의하여 도움을 받고 또 증가하게 되며, (3) 그리고 하느님과의 결합(union)이라는 더 높은 목표에 협조하게 된다(incorporated into). 
 
다른 한편으로, 믿음, 희망, 그리고 사랑으로 구성된 향주덕(theological virtues)들은, (i) 하느님에 의하여 계시되어 신앙(faith)에 의하여 알게 되고, (ii) 열심 신자들의 영혼들에 하느님에 의하여 주입되며(infused), (iii) 그리고 이들의 목적이 우리들이 신성(divine nature)에 참여함에 있으므로, 초자연덕(supernatural virtues)들이라고 또한 불린다. 이들이 "하느님을 향한(theological)"이라고 불리는 이유는 이들이 하느님을 대상(object)으로 하기 때문이다. "믿음, 희망, 그리고 사랑"은 하느님 쪽으로 믿음, 하느님 쪽으로 희망, 그리고 하느님 쪽으로 사랑 및 하느님을 위한 이웃 쪽으로 사랑을 의미한다.
출처:
http://www.kofc.org/un/eb/en/resources/cis/cis124.pdf
 
각주2: 의화(justification, 의롭게 됨)의 정의(definition)를 제대로 이해하기 위하여서는 정의(justice)의 정의(definition)을 우선적으로 이해하여야 하는데, 이를 위하여 다음의 글을 필히 읽도록 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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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교수 소순태 마태오 (Ph.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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