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농동성당 게시판

장애인 군번 1호 기록 박세호

인쇄

이상민 [gnre206] 쪽지 캡슐

2002-05-27 ㅣ No.2343

장애인 군번 1호 기록 박세호 우리나라 장애인 군인 1호로 기록돼유명해진 박세호(33)씨. 인터넷 홈페이지를 통해 국방부 장관과병무청장에게 “장애인이지만 단 하루라도 군번 줄을 목에 걸고 최전방 철책 근무를 하고 싶다”고 간절한 소원을 빌었던 바로 그사람이다. 부산시 해운대구 반송2동 주공아파트에 있는 박씨 집을 찾아간 24일은 5월의 푸르름을 그대로 보여주는 날씨였다. 하지만 온몸 중 오른팔만 겨우 사용할 수 있는 1급 뇌성마비 지체 장애인인 그를 만나러 가는 기자의 마음 한편은 왠지 무엇인가에 짓눌려 있었다. 기자의 그같은 마음은 그러나 기우(杞憂)에불과했다. 그는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웃음을 지으며 반갑게 맞아 분위기가 금세 환하게 밝아졌다. 말은 힘들게 더듬거렸지만 짙은 눈썹에 선량한 눈이 단번에 호감이 갔다. 인터뷰 동안 알아듣기 어려운 말은 부인 이상미(37)씨가 ‘통역아닌 통역’을 했다. 우리나라 장애인 군인 1호로 기록돼 유명해진 박세호(33)씨. 인터넷 홈페이지를 통해 국방부 장관과 병무청장에게 “장애인이지만 단 하루라도 군번 줄을 목에 걸고 최전방 철책 근무를 하고 싶다”고 간절한 소원을 빌었던 바로 그사람이다. 부산시 해운대구 반송2동 주공아파트에 있는 박씨 집을 찾아간 24일은 5월의 푸르름을 그대로 보여주는 날씨였다. 하지만 온몸 중 오른팔만 겨우 사용할 수 있는 1급 뇌성마비 지체 장애인인 그를 만나러 가는 기자의 마음 한편은 왠지 무엇인가에 짓눌려 있었다. 기자의 그같은 마음은 그러나 기우(杞憂)에 불과했다. 그는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웃음을 지으며 반갑게 맞아 분위기가 금세 환하게 밝아졌다. 말은 힘들게 더듬거렸지만 짙은 눈썹에 선량한 눈이 단번에 호감이 갔다. 인터뷰 동안 알아듣기 어려운 말은 부인 이상미(37)씨가 ‘통역아닌 통역’을 했다. “해외에서 스포츠로 국위 선양을 하고 있는 박세리와 박찬호를 합쳐 보세요.… 박세호가 되죠.” 그는 스스로 질문을 던지고 답하며 환하게 웃었다. 이들 3명은 공통점이 있다. 우리나라에서 체육인이 받을 수 있는 최고의 훈장인 맹호장을 그도 두 스포츠 스타처럼 받은 것이다. 그는 장애를 집념의 의지로 극복한 장애인 스포츠계에서는 독보적인 존재이며 꽤 유명한 사람이다. 88년 서울 국제 장애인 올림픽 때 투포환과 곤봉(club)던지기 종목에서 세계 신기록을 세우며 2관왕을 차지했다. 온몸중 유일하게 성한 오른팔로 할 수 있는 던지기에 인생의 목표를 정하고 이 팔마저 인대가 끊어지는 집요한 연습끝에 세계 정상에 우뚝 서는 인간승리를 이뤄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이 일궈낸 그 어떤 것보다 지난달 말 서부전선에서 1박2일동안 병영체험을 한 것을 계속 큰 소리로 말하며 감격에 겨워했다. “내 인생 최고의 경험이고 죽을 때 까지 잊지 못할 겁니다. 군대를 가는 것은 제가 노력한다고 되는 것이 아니 잖아요. 국방부 장관님 등 모든 분들이 너무 고맙습니다.” 그는 지난 4월30일 오전 6시30분 부산역에서 부인 이씨가 미는 휠체어에 의지해 다른 장애인 2명과 함께 입영열차를 타고 경기도 파주 서부전선 모부대 신병교육대에 입소했다. “어렸을 적에 만화를 볼 때부터 군인이 되고 싶었어요. 독수리 5형제처럼 지구를 지킨다는게 얼마나 멋있어요. 그러나 점차 성장하면서 군대를 갈 수 없다는 것을 깨닫았을 때의 절망감이란….” 그는 병역기피자들에 대해서 “나는 이렇게 군대를 가고 싶은데 그 사람들은 정반대여서 생각이 너무나 다른 것 같다”고 말했다. 그의 책상앞 벽에는 ‘육군 이병 박세호’라고 적힌 명찰, 민정경찰및 육군 사단 마크등 당시 그의 군복에 있던 부착물들이 단정하게 붙어있다. 그는 현역 군인처럼 목에 걸고 있는 철판 조각으로 된 군번줄(인식표)를 풀어 자랑스럽게 보여줬다. ‘육군 02―명예 00001,박세호,A’라는 철판에 눌러쓴 글자가 선명하다. 장애인으로서는 군번 1번이고 A는 혈액형을 뜻한다는 설명까지 했다. 신병교육대에서 총검술과 화생방훈련까지 받은 그는 내무반에서 총을 오른손에 끼고 불침번도 섰다. “하나 하나의 동작과 눈에 들어오는 병영 풍경들 모두가 신선한 충격으로 다가와 눈으로 사진을 찍는 것처럼 기억에 남기려고 노력했어요.” 경기도 파주군에 위치한 서부전선 도라 전망대에 올랐을 때는 만감이 교차했다고 한다. “철책 근무를 서는데 멀리 개성 시내가 한눈에 보였어요. 날씨가 맑아 개성이 보이는 것은 1년에 몇번밖에 안된다는 얘기를 듣고 역시 하나님의 축복이 있구나 생각했죠”. 박씨를 그림자처럼 따라 다녀 분신이나 다름없는 부인 이씨 이야기가 궁금했다. 이씨는 25세, 박씨는 21세였던 90년, 부산시 남구 문현동 백향교회 장애인 선교회에서 둘은 처음 만났다. 이씨는 당시 여고를 졸업하고 대기업 부산지점 경리사원으로 근무하고 있었다. 독실한 기독교 신자인 이씨는 주일이면 장애인을 돌봐주는 자원봉사를 했다. 집방향이 비슷해 귀가때 함께 차를 타고 가면서 만남이 시작됐다. 일반인들의 상식적인 생각과 달리 오히려 애를 태우다 첫 프러포즈를 한 것은 이씨였고 박씨는 덤덤했다고 한다. 박씨는 나이가 4살이나 어려 아직 결혼을 생각하지 않고 있었다. “당시 남편은 장애인 청년회 회장을 맡아 책임감과 지도력을 겸비한 멋있는 남자였어요. 너무 믿음직해 장애인이란 생각을 안했어요. 눈에 콩깍지가 씌었다는 얘기를 주변에서 숱하게 들었지만 남편은 장애인으로 전혀 보이지 않고 사랑하는 사람으로만 보였어요.” 결혼을 결심했으나 부모의 완강한 반대에 부딪혔다. 그러나 마음을 이미 굳힌 이씨는 결혼도 하기전 박씨 어머니가 간암으로 시한부 생명 선고를 받자 8개월동안 극진한 간호까지 했다. 아들대신 며느리 될 사람이 와서 병수발을 든 것이다. 목사인 이씨의 아버지는 결국 외동딸에 대한 자신의 고뇌를 40일의 금식기도로 극복하고 마침내 결혼을 허락했다. 이씨는 94년 결혼 이후 2년간 부산시 사하구 다대포 시집에서 살다 분가했고 특별한 수입이 없어 경제적 어려움에 시달리자 인근 직장에 컴퓨터 그래픽 파트타임 사원으로 근무하기도 했다. 아들 성민(8)까지 태어나 이씨가 직장 생활을 할 동안 장애인인 박씨가 애를 돌보았다. 오른팔밖에 사용하지 못하는 박씨는 기저귀 가는 것을 배우는데만 1주일이 걸리고 하나의 기저귀를 가는데 30분이상이 걸리기도 했다고 한다. 그는 ‘한팔로 건져 올린 세상’(기독교문사)에서 당시의 상황을 이렇게 적고 있다. “기저귀를 갈때 너무 힘들어 땀이 애 얼굴에 뚝뚝 떨어졌다. 그런데 애가 방긋 웃더니 기저귀를 갈수 있게 한쪽 다리를 들어주는 것이 아닌가. 너무나 신기했다.” 박씨는 5년전 이미 자신의 홈페이지(www.paralympic.co.kr)를 제작할 정도로 컴퓨터를 잘하고 중학교 때부터 시를 쓴 시인이다. 최근 100여편의 시를 모아 ‘날 지으신 이가 날 사랑하지 않는다면’(대한기독교서회 발간)이란 제목의 시집을 냈다. 장애를 극복하고 올림픽 2관왕의 신화를 이룬 그에게 신앙 간증 요청이 쇄도해 교회일 등으로 바쁘게 지낸다. 박씨 부부는 성경에 나오는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다”는 말을 좌우명으로 항상 도전하며 살고 있다. 문화일보 발췌

52 0

추천 반대(0)

 

페이스북 트위터 핀터레스트 구글플러스

Comments
Total0
※ 500자 이내로 작성 가능합니다. (0/500)

  • ※ 로그인 후 등록 가능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