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희동성당 게시판

관심있는분만 [소위 종교개혁이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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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형진 [forhyunny] 쪽지 캡슐

2000-06-19 ㅣ No.1649

+.찬미 예수님!

 

청년 바오로 큰일꾼 윤형진(시몬)입니다.

교회사에 관심있었던 제가 얼마전에

독실한 개신교신자 친구랑

토론을 하면서 열받아서(?)

정리한 내용이니 관심있는 분은

끝까지 봐주세요 ^^

 

 

 

종교 개혁 운동은 대사(大赦)문제로 말리암은 루터의 등장에서 발단되었

다. 루터는 1483년 11월 10일 독일 작센의 아이슬레벤에서 태어났다. 열

네 살 때 마그데부르크에 입학하여 2년후에는 다시 아이제나흐에 입학하

여 졸업하고, 열 여덟 살에는 에르푸르트 대학에 입학하여 철학과 법학

을 연구하고 스무 살에에 벌써 학위를 받았다. 1505년 7월 2일 에르푸르

트 교외에서 산보하면서 얼마 전에 결투 끝에 죽은 친구를 회상하면서 현

세의 무상함을 절감하고 있을 즈음, 폭우가 쏟아지면서 벼락이 치는 바람

에 옆에 있던 또 하나의 친구가 졸지에 저 세상으로 가버리고 말았다. 너

무나 황급한 루터는 성녀 안나를 부르며 이번에 목숨을 구해주면 수도원

에 들어가 수도생활을 하겠다고 맹세하였다.

 

그로부터 약 2주일 동안의 준비를 마친 루터는 같은 달 16일밤 여러 친구

들과 고별 연희를 마치고, 다음 날 성 아우구스티노 수도회에 들어가 2

년 동안의 수련을 쌓고 마침내 1507년에는 청빈, 정결(평생 독신), 순명

(정상의 명령에 복종)의 삼대 서원을 하느님 대전에서 바치고 수도신부

가 되었다. 이듬해에는 비텐베르크 대학의 철학 교수로 임명되었고, 1512

년에는 신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그후로는 시편, 로마서, 갈라디아서, 히

브리서, 디도서등을 강의하였다.

이때 벌써 그는 "사람은 예수를 믿음으로써 구원을 받는 것이지, 자신

의 선행으로 구원을 받는 것이 아니다"라는 주장을 마음속에 세우고 있었

다.

드디어 자신의 주의를 세상에 공포할 기회는 왔다. 독일 국내의 대사령

선포를 맡은 알브레히트 대주교는 도미니코회의 테첼을 자기 구역 동부

지방 대사령 반포 선전 위원으로 임명하였다. 루터는 당시 명성이 높던

설교가 테첼 신부가 임명된 것을 보고는  불 같은 시기와 불만을 품게 되

었다. 테첼이 비텐베르크 부근에 이르렀을 때, 루터는 이에 반항하여 95

개조로 된 논문을 비텐베르크 성당 문에 붙였다. 그날이 바로 1517년 10

월 31일 모든 성인들의 축일 전날이었다. 이 방법은 당시 신학자들이 자

기 의사를 표현할 때 쓰던 한 방법으로 관례가 되어 있었다.

이에 테첼은 106조의 반박 논문을 성당문에 붙이고 루터에게 대항하였

다. 그러나 이것을 비텐베르크 대학생들이 불살라 버렸다. 루터는 여전

히 자신의 소신을 굽히지 않고 선전하고 있었다. 이에 테첼 측의 신학자

들도 궐기하여 드디어 일대 논전이 벌어졌다. 1518년 4월 하이델베르크

수도원의 공개토론회에서 루터는 인간은 원죄로 말미암아 완전히 부패되

었으므로 자유의지란 없다고 주장하여, 옛 동지를 잃기도 하고 새 동지

를 얻기도 하였다. 루터가 처음부터 교황에게까지 반역하려 한 것은 아니

다. 그는 오히려 교황에게 충심으로 복종한다고 언명하였다.

당시 교황 레오 10세는 카예타누스 추기경을 보내어 사실을 조사하고 루

터의 그릇된 의견을 바로잡도록 하라고 명령하였다. 그 다음에는 또 독일

인 밀티츠를 보내어 루터의 반성을 요구하였으나, 그는 끝까지 자기 소신

을 굽히지 않았다. 시간이 지남에 따라 사태는 악화 일로를 걷게 되었

다. 1520년 6월 15일, 교황 레오 10세는 드디어 ’엑수르제’라는 교서를

내려, 카톨릭 교회의 교리를 밝혀 설명한 뒤 60일  안으로 반성하기를 루

터에게 요구하였다. 그러나 루터는 같은 해 12월 10일, 교황의 교서를 사

람들 앞에서 불살라 버림으로써, 이듬해 1월 3일에 드디어 파문을 당하였

다. 이때부터 루터는 공공연히 교황을 배척하고 성세 성사와 성체 성사

외의 다른  성사는 파기하고, 자기의 ’삼대 원리’를 역설하여 나갔다. 루

터의 삼대 원리는 다음과 같다. 첫째, 인간은 원죄로 말미암아 완전히 부

패되었으므로 자유가 없다. 둘째, 구원은 예수를 믿음으로써만 받는 것이

고, 인간의 선행이나 고행등으로 되는 것은 아니다. 셋째, 신앙의 규범

은 성서뿐이다.

1525년 6월 13일에는 하느님께 한 공식 서원을 깨뜨리고 당돌하게도 수

도자의 몸으로 스물 여섯의 젊은 수녀 카테리나와의 결혼 생활을 시작하

였다. 루터의 동지였던 에라스무스는 이것을 보고 "비극 같은 개혁운동

은 희극(결혼)으로 끝났다."라고 조롱하였다. 루터주의는 불길처럼 퍼져

이제 분열은 아주 그 결정단계에 이르렀다. 루터는 그 후 20년 동안 동지

와 제자들의 끊임없는 분쟁을 지켜 보면서 1546년 6월 28일, 어둠에 싸

인 가슴을 안고 별세하였다.

 

 

이제 루터주의가 이처럼 북유럽 일대를 휩쓴 원인을 살펴보자.

 

중세의 그리스도교 세계관은 인문주의의 영향으로 세속화하여 버렸다.

그 여파가 교황청의 문턱을 넘어들자 교황의 위신이 땅에 떨어진 바 없지

도 않았고, 특히 북유럽 일대의 주교좌에는 악폐가 거듭 쌍이기에 이르렀

다. 주교 선정에 있어서도 직접 간접의 속권 간섭으로 부적임자도 많이

섞이게 되었다. 그들 중에는 성직의 엄숙성을 망각하고 속인으로 자처하

는 자도 있고 보니, 그 사목 성직에 충실할 리가 없었고, 따라서 다른 신

부들에게 미치는 악영향이 크지 않을 수 없었다. 십일조 헌금과 성예식

사례비로 겨우 살아 나감으로써 성직자로서의 체면 유지도 못하는 이가

있는 가 하면, 천박한 자들도 있어서 결국에는 민중의 경멸의 대상이 되

어 버렸다. 이에 따라 트리덴티노 공의회에서는 슬기로운 대책을 세웠으

나 때는 이미 늦었었다. 여러 수도원에는 신자들의 헌금과 국왕이나 부호

들의 보조가 모여져 부유하게 되자, 수도 정신이 이완된 곳도 여기저기

있게 되었다.

한편, 신성 로마 제국의 쇠약과 로마법의 채용으로 지방 제후들의 세력

이 강대하여짐에 따라, 그들은 교회까지 자기들의 세력권내에 넣으려는

음흉한 야심을 품기에 이르렀다. 또 대부분의 제후들은 막대한 부채에 시

달리던 차였으므로 자연히 교회 및 수도회의 재산에 침을 흘리게 되었

고, 국민은 무거운 세금에 눌려 허덕이던 세상이었다.

경제적으로 몹시 어려운 상태에서 서민층에는 경박한 인문주의의 선전

책자들이 유포되어 민심은 나날이 해이해지고 악화하여 드디어는 교회를

등지기에 이르렀다. 세태가 이러하니 혁신의 기운은 이미 익었으나 교리

를 의심하거나 가톨릭 교회와의 절연이란 꿈도 꾸지 못했었다. 그러면서

도 한편으로는 십자가의 길 기도, 묵주의 기도 같은 근행도 널리 보급되

어 신앙 생활의 엄숙 경건한 일면도 있었다. 그뿐 아니라, 이 16세기는

프란치스코 사베리오, 이냐시오, 요한 데 데오, 베드로 카니시오, 파스

칼, 필립보 네리, 예로니모 에밀리아노, 테레사, 베드로 알칸다라, 가롤

로 보로메오, 십자가의 요한, 프란치스코 보그지아, 알로이시오 곤자가

등, 세계적으로 존경받은 위대한 성인 성녀들이 많이 나온 세기이기도 하

다.

어쨌든 형세가 급박한 이때, 대사 선전원 중에는 탈선적인 언동으로 대

중의 반감을 산 자가 적지 않았다. 바로 이것을 기회로 루터는 드디어 횃

불을 들고 일어났다. 그 추종자들은 각계각층이 망라되었다. 수도원을 뛰

쳐 나가는 수도자가 있는가 하면, 루터를 따라 결혼하는 성직자들도 많았

다. 물론 그들은 성직의 엄숙성에 대한 이해가 결여된 자들이다. 루터는

독일내에서 가장 많은 독자를 가진 저술가인 동시에, 웅변으로 그 명성

이 높았던만큼 식자층에서도 그를 따르는 사람이 많았다. 독일 연방 제후

들 중에는 종교적 동기라기보다는 정치적이고 경제적인 동기에서 그를 지

지하고 비호하는 자들이 많았다. 이쯤 되면 대중은 으레 그를 추종하게

되는 법이다.

어떠 이유로든 교회에 불평이 있는 사람들, 어려운 선행은 필요없고 믿

기만 하면 구원된다는 달콤한 선전에 비상한 매력을 느낀 무리들, 교의

야 어찌 되었든 독일인은 독일인의 그리스도교를 창설해야 한다는 국수주

의적 충동에 날뛰던 자들, 오랫동안 간절바라던 교회의 혁신이 이제 곧

이루어진다는 속단으로 경거 망동하던 자들이 그들의 뒤를 따랐다. 이처

럼 여러해 동안의 혼란상태를 겪은 뒤 커다란 분열은 결정적으로 형성되

고 말았다. 그러나 그 원인은 종교적이라기보다 정치적 경제적인 것이었

다.

브리태니커 백과 사전은 종교개혁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증언한다. "종

교개혁의 종교적 요소가 현대적 견지에서 과대 평가되어 왔다는 것은 거

의 의심할 여지 없는 사실이다." "독일 제후들이 루터주의를 강행시키는

데 있어서 그들의 이해관계를 발견하지 못하였더라면 루터는 분명 신비주

의의 한 지도자에 불과하였을 것이다."(Britanica Encycl V 23 p4-11)

 

프로테스탄트 사학자 찰스리어도 "루터의 반역동기는 원인이든 근인이든

모두 심령적인 것이라기보다는 아주 속세적인 것이었다. 그러므로 우리

는 종교 개혁에 부수되는 종교적 변화라는 것은 간과하여도 무방하다. 실

상 종교 개혁의 목적은 종교적 개혁에 있지는 않았기 때문이다."라고 증

언하고 있다. (Cambrige Modern History, V.I p653). 이것은 하느님을 섬

기고 구원을 목적으로 삼는 프로테스탄트 형제들이 거듭 숙고해야 할 말

들이다.

로마교황에 대한 루터의 반역을 통쾌하게 여기는 사람도 많을지 몰라도

신앙을 정신 수양의 방편으로 삼는 견지에서가 아니고 순수한 신앙적 견

지에서, 오로지 하느님 공경과 구원을 목표로 삼는 그리스도교적 견지에

서 이 사실을 공정 무사하게 저울질하여, 개혁자의 자격과 개혁의 대상

과 개혁의 결과에 대하여 말하려 한다. -중략.

 

 

’교부들의 신앙’ (카톨릭출판사) 제임스 C. 기본드 저 P 502 ~ 5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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