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톨릭 신앙생활 Q&A 코너

2017년 3월 25일 밀라노를 방문한 교황님의 우리나라 초기 천주교회의 형성과정 관련 말씀의 영어본 문장 중의 번역 오류 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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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11-27 ㅣ No.1971

게시자 주: 본글의 인터넷 주소, http://ch.catholic.or.kr/pundang/4/soh/1971.htm 에 접속하면, 본글 중에서 제시되고 있는 출처 문헌들을 쉽게 확인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다음의 인터넷 주소, http://ch.catholic.or.kr/pundang/4/q&a.htm 에 접속하면, 본글의 제목이 포함된, "가톨릭 신앙생활 Q&A 코너" 제공의 모든 게시글들의 제목들의 목록을 가질 수 있습니다. 또한 (i) 2006년 12월 16일에 개시(開始)하여 제공 중인 미국 천주교 주교회의/중앙협의회 홈페이지 제공의 날마다 영어 매일미사 중의 독서들 듣고 보기, 그리고 (ii) 신뢰할 수 있는 가톨릭 라틴어/프랑스어/영어 문서들 등은, 다음의 주소들에 접속하면, 손쉽게 접근할 수 있습니다: http://ch.catholic.or.kr/pundang/4/  (PC용, 날마다 자동으로 듣고 봄) [주: 즐겨찾기에 추가하십시오]; http://ch.catholic.or.kr/pundang/4/m (스마트폰용) [주: 네이버 혹은 구글 검색창 위에 있는 인터넷 주소창에 이 주소 입력 후 꼭 북마크 하십시오]

 

질문 1: 다음은, 2017년 4월 2일자 평화신문에서 발췌한 바인데, 이 기사 중에서 특히 (i) 독자들의 편의를 위하여, 굵은 글씨로 파란 색칠을 한 교황님의 말씀의 정확한 출처와 (ii) 이어지는, 또한, 굵은 글씨로 파란 색칠을 한, 이 부분에 대한 해설이, 우리나라 천주교회의 역사에 있어, 정확한지에 대하여, 확인 부탁드립니다:

 

출처: http://ch.catholic.or.kr/pundang/4/cb/2017_3_25_밀라노_방문_교황_말씀_평화신문_2017_4_2일자_기사.htm

(발췌 시작)

프란치스코 교황이 사제 및 수도 성소가 급격히 줄어 위기의식을 느끼는 이탈리아 교회를 향해 “평신도에 의해 복음이 전파된 한국 교회”를 보라고 말했다.


이 발언은 3월 25일 밀라노 사목 방문 중 두오모(대성당)에서 가진 성직자ㆍ수도자와의 대화 시간에 나왔다. 한 수녀가 “동료 수녀들이 늙어가고, 회원 수도 줄고 있다”며 성소 위기에 대한 걱정을 털어놓자 교황은 한국 교회 선교 역사를 언급했다.


교황은 “무슬림 속에서 봉사하다 나이가 들어 떠나는 아프가니스탄의 마지막 두 수녀에 관한 기사를 읽던 중 한국인들이 떠올랐다”며 “한국에는 천주교 전래 초기에 중국인 선교사가 서너 명 있기는 했으나, 200년 가까이 평신도들에 의해 복음 메시지가 전파됐다”고 말했다. 이어 “주님은 이처럼 당신께서 원하시는 대로 길을 내신다. 역사를 이끄시는 분은 주님이시다. 이것은 진실”이라고 힘줘 말했다.  


‘중국인 선교사’란 1794년 말 의주를 통해 입국한 주문모(1752~1801) 신부를 가리킨다. 하지만 교황은 당시 북경에서부터 주 신부 입국로를 안내한 조선 신자 지황(사바)과 박 요한까지 중국인으로 이해하고 ‘서너 명’이라고 말한 것으로 짐작된다. 

(이상, 발췌 끝)

 

1. 들어가면서 

 

1-1. 우선적으로, 위의 질문 1 중에 발췌된 바 중의 첫 번째 파란 색칠을 한 부분과, 다음에 발췌된 2017년 4월 2일자 가톨릭신문 기사 내용과 정밀하게 비교/검토를 해 보면, 이들 두 가사들 중의 둘 중의 하나의 우리말 번역에 문제가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출처: http://ch.catholic.or.kr/pundang/4/cb/2017_3_25_밀라노_방문_교황_말씀_가톨릭신문_2017_4_2일자_기사.htm

(발췌 시작)

교황은 수녀들의 수가 줄어들고 고령화되는 상황에서 ‘체념’하고 있다는 수녀와 이야기를 하며, 초창기 한국교회 모습을 상기시켰다.

교황은 “초창기 한국교회에는 3~4명의 중국인 선교사가 있었지만, 이후 200년 동안 평신도들이 선교활동을 수행했다”면서 “이것이 하느님께서 바라고 이끄시는 신앙의 길”이라고 설명했다. 

(이상, 발췌 끝)

 

1-2. 예를 들어, 교황님의 말씀 중의 밑둘을 그은 부분에서, 그 앞부분의 말씀에 곧바로 이어서 "이후" 라는 표현이, (i) 가톨릭 신문의 기사에서처럼, 있는지, 혹은 (ii) 평화신문의 기사에서처럼 없는지의 여부는, 우리나라 조선에 천주교회가 탄생한 시점이 언제인지에 대한 프란치스코 교황님의 입장을 분명하게 알 수 있게 하므로, 대단히 중요하다고 지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1-3. 만에 하나, 혹시라도 기사 중에 밝힐 수 없는 어떤 사적인, 심지어 불의한, 다른 이유 때문에, 그 앞부분의 말씀에 곧바로 이어서 "이후" 라는 표현이 우리말로 번역하는 과정에 번역자에 의하여,  (i) 임의적/작의적으로 누락/삭제되었거나, 혹은 (ii) 임의적/작의적으로 추가되었다면, 어느 경우이든지 간에, 공적인 내용, 있는 그대로의 사실을 그대로 전달하여야 하는 신문의 근본 역할에 또한 어긋나는, 중대한 문제가 없다고 아니 할 수 없을 것입니다.

 

바로 이 이유 때문에, 부득불, 교황님의 말씀의 원문을 찾아보지 않을 수 없게 되었으며, 이 작업은 이어지는 제2항에서 진행하도록 하겠습니다.

 

2. 정확한 자료/출처 확보 및 분석  

 

2-1. 다음의 파란 색칠을 한 부분을 클릭하면, 구글 검색 결과를 확보할 수 있는데, 상당한 시간을 할애하여 찾아낸 교황정 홈페이지 제공의 자료 입니다:

 

"Pope Francis" "Milan" "2017" "missionaries" "Duomo" "Korean" site:vatican.va  <--- 필히 클릭하여 확인하라

 

2-2. 다음은, 바로 위의 제2-1항에 의하여 확보된, 2017냔 3월 25일 이탈리 밀라노 방문 시에 교황 프란치스코께서 말씀하신 바의 영어본에서 유관 부분을 발췌한 것입니다:

 

출처: https://press.vatican.va/content/salastampa/en/bollettino/pubblico/2017/03/25/170325c.html

(영어본에서 유관부분 발췌 시작)

And there came to mind the Korean people, who at the beginning had three or four Christian(오류)(*) missionaries, at the beginning, and then for two centuries the message was borne by laypeople only.

 

그리고 한국의 백성을 상기하게 되는데, 그들은 일찍이/처음에 3 - 4 명의 중국인 선교사들을 가졌고, 일찍이/처음에, 그리고 그러고 나서(and then) 2세기 동안, 복음 메시지는 오로지 평신도들에 의하여서만 [한국의 백성에게] 퍼뜨려졌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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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번역자 주: 아래의 주소에 접속하면 읽을 수 있는, 번역대본인 이탈리아어 원문과 정밀하게 비교/검토하면, 바로 위에 발췌된 바에서, ChristianChinese로 교체되어야 함을 바로 확인할 수 있다:

 

출처 1: https://press.vatican.va/content/salastampa/en/bollettino/pubblico/2017/03/25.html

출처 2: https://press.vatican.va/content/salastampa/it/bollettino/pubblico/2017/03/25/0184/00422.html 

(출처 2로부터 발췌 시작)

E mi è venuto in mente il popolo coreano, che ha avuto all’inizio tre-quattro missionari cinesi – all’inizio – e poi per due secoli il messaggio è stato portato avanti solo dai laici.

(이상, 발췌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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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 발췌 및 우리말 번역 끝)

 

따라서, 우리는 다음의 결론을 도출할 수 있다는 생각입니다:

 

(이 글의 결론 1) 위의 질문 1에 발췌된 평화신문 기사 중의 교황님의 말씀의 우리말 번역문 중에 대단히 심각한 수준의 번역 오류가 있음을, 이 글의 한 개의 결론으로서 도출합니다.

 

게시자 주 2-2: 이어지는 글에서는, 평화신문에 또한 실린 다음과 같은 주장/추측이, 많이 부족한 죄인인 필자가 생각하더라도, 턱없는 짐작임을, 즉, 교황님의 원 말씀과 모순되는 그리고 우리나라 조선의 초기의 천주교회사와도 크게 모순되는 주장임을, 구체적으로 지적하도록 하겠습니다:

 

(발췌 시작)

‘중국인 선교사’란 1794년 말 의주를 통해 입국한 주문모(1752~1801) 신부를 가리킨다. 하지만 교황은 당시 북경에서부터 주 신부 입국로를 안내한 조선 신자 지황(사바)과 박 요한까지 중국인으로 이해하고 ‘서너 명’이라고 말한 것으로 짐작된다. 

(이상, 발췌 끝)

 

2-3. 그리고 바로 위의 제2-2항에 발췌된 바에서 말하는 3-4명의 중국인 선교사들은,

 

(경우 1) 1645년에 소현세자가 중국 청나라 북경으로부터 조선으로 귀국 할 때에 우리나라 조선에 함께 데리고 온, 천주교 신자(들)가 포함된, 중국인들인, 환관들 및 궁녀들 몇 명을 의미하거나, 혹은

 

(경우 2) 1795년에 우리나라 조선에 입국한, 그리고 1801년에 순교당한, 중국인 주문모 신부님과 그리고 이분을 모시고 들어온 우리나라 조선의 천주교 신자들을 의미하거나, 혹은

 

(경우 3) 1834년에 우리나라 조선에 입국한, 그리고 1836년에 서울을 떠나 중국으로 돌아간, 중국인 유방제 신부님과 그리고 이분을 모시고 들어온 우리나라 조선의 천주교 신자들을 의미할 수도 있다는

 

생각입니다. 

 

그리고, 많이 부족한 죄인인, 일천한, 필자가 아는 한, 우리나라 조선의 초기의 천주교회의 역사에 있어, 천주교 세례를 받은 중국인들의 우리나라 조선으로의 입국에 관한 기록은 이들뿐인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2-3-1. 그런데, 많이 부족한 죄인인 필자가 생각할 때에, 교황님께서 말씀하신 바가, (경우 2) 혹은 (경우 3) 보다는, (경우 1)일 가능성이 훨씬 더 높다는 생각인데, 그 이유는 다음과 같습니다:

 

(i) 소현세자가, 천주교 신자(들)가 포함된, 중국인들인, 환관들 및 궁녀들 몇 명을 데리고 우리나라 조선으로 귀국한 해가 1645년이고 그리고 파리 와방선교회 소속의 사제가 우리나라 조선에 처음 입국한 해가 1836년이기 때문에, 따라서, 1836 - 1645 = 약 200년, 즉, 약 2세기 이고, 그리고

 

(ii) 중국인 주문모 신무님께서 우리나라 조선에 1795년에 입국하여 1801년에 순교 당하셨음과 중국인 유방제 신부님께서 우리나라 조선에 1834년에 입국하여 1836년에 서울을 떠나 중국으로 귀국하였음을 모르고 계실 리가 없으신 프란치스코 교황님의 말씀 중에서, "일찍이/처음에 우리나라 조선에 3 - 4 명의 중국인 선교사들이 들어왔고 그리고 일찍이/처음에, 그리고 그러고 나서(and then) 2세기 동안, 복음 메시지가 오로지 평신도들에 의하여만 퍼뜨려졌다"고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iii) 그리고 또한 교황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신 이유는, 주문모 신부님과 유방제 신부님이, 예를 들어, (a) 필담으로 고해성사를 주었기에, 우리말을 유창하게 할 수 없었을 것이고, (b) 입국한 해부터 밀고자들 때문에 대부분의 시간을 숨어 지내지 않을 수 없으셨을 것이며, 그리고 또한 (c) 교황님께서 말씀하신 2세기라는 긴 세월 동안에, 주문모 신부님에 의한 약 6-7년간의 우리나라 조선에서의 사목 활동 기간이 매우 짧았음을 그리고 유방제 신부님에 의하여 우리나라 조선에서의 사목 활동 기간이 주문모 신부님의 경우보더 훨씬 더 매우 짧았음을, 교황님께서 잘 알고 계셨기 때문이라는 생각입니다.

 

2-3-2. 그러나, (경우 2)와 (경우 3)은 바로 위의 제2-3-1항에서와 같은, 우리나라 조선의 초기 천주교회의 역사 안에서, 교황님께서 구체적으로 말씀하신 2세기가 산출되는 계산 자체를 도저히 할 수 없음에 반드시 주목하십시오.

 

그러니까 무슨 말씀인고 하면, 프란치스코 교황님께서는, 바로 위의 제2-3-1항에서 또한 필자가 말씀드린 중국인들인 주문모 신부님과 유방제 신부님의 활동 내역을 감안하면서도, 총체적으로1645년에 소현 세자가 귀국할 때에, 우리나라 조선을 대상으로 하는 선교/전교(mission)/복음화(evangelization)를 여러 번 시도하였다고 알려진, 아담 샬 신부님(1592-1666년)에 의하여 우리나라 조선에 파견된 천주교 신자(들)가 포함된, 중국인들인, 환관들 및 궁녀들 몇 명이 우리나라에 도착한 시점인 1645년을 두고서, "일찍이/처음에(at the beginning)"라고 말씀하고 계심이 대단히 분명하다는 생각입니다. 그렇지 않은지요?

 

2-4. 그러니까, 프란치스코 교황님께서 말씀하신 바는, 우리나라 조선을 대상으로 하는, 소위 말하는, 마태오 리치 신부님적응주의 선교 방식에 따른 문서 선교아담 샬 신부님에 의하여 1644년에 추진되었으며, 그리고 바로 이러한 문서 선교의 한 결과로서 우리나라 조선에 전달된 한문본 천주교 문헌들을 학습하다가, 진리의 영의 도래, 즉, 성령강림을 받아 천주교 신앙을 받아들인 이벽 성조(1754-1785년)께서는, 1778년에 개최된 천진암 강학에서, 당신이 성령강림을 받은 확실한 증거(evidence)로서, 이 강학에 참석한 남인 계열의 유학자들을 대상으로 하는 선교/전교(mission)/복음화(evangelization) 포교 활동을 성공적으로 수행하셨고, 그리고 이벽 성조(1754-1785년)의 바로 이러한 독자적이고 전세계 그리스도교 교회의 역사에 있어 유일무이한 노력의 결과로서, 1836년에 파리 외방 선교회 소속의 선교사 신부님들이 우리나라 조선에 처음으로 입국하기 시작할 시점에 이르기까지, 따라서 1644년에 아담 샬 신부님에 의하여 추진된 우리나라 조선을 대상으로 하는 적응주의 문서 선교의 괄목할 만한 한 결과로서 중국에 청나라 황제가 처음으로 등장하는 1644년부터 거의 2세기 동안에 걸쳐, 우리나라 조선에 복음의 메시지가, (i) 이벽 성조(1754-1785년)의 가르침을 받은 자들(A, 즉, 우리나라 조선의 신앙의 선조 제1세대)(ii) 1785년 이벽 성조의 사후에, 이들 A의 가르침을 받은 자들로 구성된  평신도 신자들(즉, 우리나라 조선의 신앙의 선조 제1.5세대)에 의하여 수행되었음을, 매우 짧게 요약하여 "그렇게" 지적하는 말씀을 하셨다는 생각입니다.

 

작성 중입니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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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교수 소순태 마태오 (Ph.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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