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화게시판

[상아탑]시 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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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종호 [jhp94] 쪽지 캡슐

1999-10-19 ㅣ No.1530

미스 개

 

고운기

 

 

신촌 기차역 앞에서 버스를 기다리자면

그야말로 옛날식 은파다방을 보며 떠오르는 기억

계수나무 계(桂)를 쓰는 대학 동기생 그 친구는

유난히 영어를 잘해 회화시간마다 꽃이었는데

미국인 교수 그를 부를 때마다 「미스 개」

하여 꽃이 개가 되었는데

내 중학생 때,

등교길이면 우리 동네 마당 넓은 집 앞에는

늘 까만 자가용이 꼬리에 흰 연기를 물고 대기중이고

더러 그 차를 타러 나오다 마주치는 단발머리가

나중 알고 보니 그 미스 개였다는 사실

어떻게든 말 한번 붙여 보려 노리던 시선 속에

내 초라한 눈도 기어 있었음을 알았을랑가 몰라

세월은 하 수상한 시절, 새로 들어선 전두환한텐가 그 친척한텐가

잘 나가던 회사를 빼앗겼다 하고

마당 넓은 집앞 까만 자가용도 사라지더니

그 친구 한 학년만 마치고 영국으로 떠났지

없는 사람 힘 없는 사람만 당하는 건 아니라고

시절은 우리에게 가르쳐 주었네

미스 개의 충실한 부하였던 몇몇은

세모의 눈발 속에 이별을 아쉬워했지만

끝내 그 친구는 선한 눈빛을 잃지 않고

우리를 데려간 곳이 일산 홀트 아동복지회 정박아 고아원

환송회 할 돈이면 하루 즐겁게 아이들과 놀 수 있다나

그래 저기 은파다방에 모여 기차 타고 갔지

마음의 준비조차 없던 우리가 유쾌히 하루를 보내기 어려웠지만

돌아와 다시 은파다방 오래된 의자에 앉으면서

꽃이 개가 되는 세월 속에서도

개가 다시 꽃이 되는 상쾌한 순간을 만났었어.

 

       *** 97. 현대시사상. 봄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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