답십리성당 게시판

이 두려움이 곧 신앙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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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태하 [domini0727] 쪽지 캡슐

2005-11-17 ㅣ No.36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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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 10월 첫 주일 복음말씀은 포도원 주인을 비유한 주님의 말씀이었다.

내 어릴 때 우리 집은 논이 많은 부자였다. 머슴이 둘이나 있었던 게 기억난다.

하지만 아버지가 일찍 돌아가시고 홀로된 어머니와 과년한 고모들과 누나들이 많아서 그랬던지

할아버지께서 어느 해부터인가 집에 있는 머슴을 내치고 그 많은 논을 남한테 부치게 해서

가을에 도지세(도조)라 하여 타작을 한 벼를 소작료로 받아서 마당에 쌓는 것을 보았다.


남자들이 없는 우리 집에 힘든 일이 있을 때는 소작인들이 달려와서

항상 그 일을 대신해 주었고 소작인들은 우리집을 깍듯이 주인집으로 모셨다.

우리 할아버지께서 글을 잘하셔서 그들 집에 누가 돌아가시면 제문(祭文)도 지어주시고

동네혼사가 있을 때는 우리 어머니께서 그 명필로 ‘사돈지’라 하는 문안편지도 써주기도 하시니까

자기들도 아쉬운 일이 있을 때는 우리 집으로 단걸음에 달려오긴 했지만...

그런데도 가을에 볏가마니를 지게에 지고 자꾸만 우리 마당으로 가져오는 걸 보면

내 어린 마음이 왜 그리 아팠던지 모른다.

아마도 빼앗아 오는 것 같은 마음이 느껴졌던 모양이다.


문제는 할아버지께서 소작하는 이들을 너무 자주 바꾸신다는 점이었다.

우리 집 일이라 하면 아래 체에 초가지붕을 얹는 일을 비롯해서 산에 나무를 베어오는 일까지 열심히 해주는 두 세집 단골집을 제하고는 거의 1년에 한번 씩 소작인을 자주 바꾸셔서 심부름을 하는 나를 햇갈리게 하셨다.

“우리 할베가 빨리 오라카십니더” 하면

“너 할베가 나를 왜 오라카노?. 나는 이제 너 논 안 부친 데이”하는 분은 작년에는 부쳤던 분인데 금년에는 안 부친다는 사실을 내가 깜빡한 것인데 자주 바꾸시다 보니 할아버지 자신께서도 심부름을 시키시면서 몇 번 햇갈리신 적이 있으셨던 기억이 난다.


그때는 할아버지께서 왜 자꾸 삯도지 주는 이들을 바꾸실까 이해되지 않았었지만 나중에사 철이 나면서 아하! 그래서 그랬구나 하는 생각이 차츰 들었다.

도지세 즉 도조를 핑계를 대며 제대로 안 낸다거나, 논 주인집에서 시키는 일을 잘 안 한다거나.

논 주인한테 평소에 잘 안한다거나 하면 나 역시도 소작인을 바꿀 것이 분명하니까 말이다.


구약성서에 보면 야훼 하느님께서도 아브라함과 아브라함의 후손을 돌보아 주시는 대가를 요구하시는 대목이 나온다. 3년된 암송아지 3마리, 3년된 암염소 3마리, 집비둘기, 산비둘기....아주 세목을 정해서 숫자까지 적으셔서 바치라고 요구 하신다. 첫배에 난 것도 내놓으라 하시고.....

공짜로 돌보아 주시는 게 아니셨다.

포도원 주인의 비유도,  1독서 이사야서의 말씀도 어영부영 하다가는 포도밭에 들포도가 열리고 그 좋은 포도밭에는 엉겅퀴가 자라고 울타리가 부서져 뭇짐승들이 들어와서 난리를 치고......

내가 우리 논 소작인들처럼 핑계를 대며 논 주인에게 도조를 제대로 안 바친다거나 주인집을 위해 열심히 일하지 않는다면 결국은 내가 부치는 논을 주인한테 빼앗길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에 가슴이 섬뜩해 진다.

과연 제대로 바치고 있는 것인가? 저렇게 끊임없이 요구하고 있으신데.......생각할수록 겁이 난다.


신앙은 내게 항상 무엇인가를 요구하는 짐 같았다.

내 맘대로 하고 싶은 일도 하지 말라고 요구하고

안 가고 쉬고 싶어도 와야 한다고 요구하고

숨기고 싶어도 이미 다 안다 하며 와서 잘못했다고 빌라고 요구하고

핑계를 대서 도조를 좀 덜 낼라하면 더 내라고 요구하고....

또 ...........................................................................


나는 그 요구를 따르는 것이 내 신앙이라 여기며 살았다.

그런데도 왜 자꾸 겁이 날까?

하느님은 사랑이시라는데 그 사랑도 대가가 없이는 안 된다는 말씀인가?

내가 선택한 것이 아니라 그분이 나를 선택하셨기 때문에 그런 것일까?


그러나 나는 이 생명이 다하는 날까지 그 요구에 부응하면서 살 결심이다.

100% 만족은 못 시켜드리겠지만 내 논을 안 빼앗기도록 주인한테 잘 보이도록 노력할 것이다.

내가 가진 재산, 내가 가진 재능까지도 항상 열심히 불리고 갈고 닦아서

주인이 요구하면 하는대로 주인에게 갖다 바치면서 내 주인의 환심을 사려고 노력할 것이다.

그래야 이 겁 많은 죄인이 죽을 때 겁을 덜 먹을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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