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4동성당
[연중 제10주일] 하느님의 뜻을 실행하는 사람 (마르3,20-3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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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중 제10주일] 하느님의 뜻을 실행하는 사람 (마르3,20-35)
주 하느님께서는 뱀의 후손과 여자의 후손 사이에 적개심을 일으키리라고 하신다. (창세 3,9-15) 바오로 사도는, 이 지상 천막집이 허물어지면 하느님께서 마련하신 영원한 집을 하늘에서 얻는다고 한다. (2코린4,13─5,1)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의 뜻을 실행하는 사람이 당신의 형제요 누이요 어머니라고 하신다. (마르3,20-35)
연중 제10주일 제1독서 (창세 3,9-15)
사람이 나무 열매를 먹은 뒤, 주 하느님께서 그를 부르시며, "너 어디 있느냐?" 하고 물으셨다. (9)
여기서 '부르시며'에 해당하는 '와이크라'(waiqra; and called)에서 '부르다'('카라'; qara)는 큰 소리로 '외치다'(1사무26,14; 1열왕13,12)라는 의미와 '소환하다'(욥기13,22)라는 의미도 지닌다. 즉 하느님께서는 아담이 부인할 수 없도록 분명한 목소리로 그를 소환하셨음을 보여 주는 것이다. 이러한 하느님의 소환은 아담과 하와 뿐 아니라 인격적 존재로 지음받은 모든 인간에게도 이루어진다.
또한 '물으셨다'에 해당하는 '와요메르'(wayomer; and said)에서 '묻다'('이르다';'아마르'; amar; 창세46,33)는 일반적으로 대화하는 것을 가리키나 더 나아가 '권하다'(에스테르3,4)라는 의미도 있다.
따라서 앞의 '부르다'가 죄에 대해 엄정하신 하느님의 공의를 부각시키는 표현이라면, '묻다'는 연약하여 죄를 지은 인간을 불쌍히 여기시고 찾아와 회개할 것을 촉구하시는 하느님의 사랑을 부각시키는 표현이라고 할 수 있다. 이처럼 하느님께서는 죄는 미워하되 죄악 가운데 빠져 있는 그 인간 자체는 불쌍히 여기시고 몸소 찾아와 회개할 것을 촉구하시는 은혜가 풍성한 분이시다(이사1,18).
한편 '너 어디 있느냐?'에 해당하는 '아옉카'(ayekkah; where are you?)에서'어디'를 의미하는 의문 부사 '아예'(aye)에 '너'를 의미하는 접미사 '카'(ka)만을 붙인 극히 간략한 형태의 의문문이다. 그러나 길게 묻지 않고 간략하게 질문하므로 더욱 가슴 속을 깊이 파고 들며 강한 울림을 남긴다.
하느님께서는 다른 말씀은 모두 생략하신 채 단도직입적으로아담이 직면한 가장 심각한 문제만을 표면으로 끄집어 내셨던 것이다. 그리고 여기서 '아예'(aye)가 장소를 나타내는 의문부사이지만 본절은 하느님께서 현재 아담이 있는 장소를 모르셔서 묻는 질문이 아니다. 오히려 아담으로 하여금 어떤 형편에 처해 있으며 그것이 과연 바람직한 상태인지 반성을 촉구하는 질문이다. 따라서 아담은 이 질문을 받자마자 자신의 죄스런 상태를 돌아보고 겸허하게 하느님 대전에 나아와 회개했어야 했다. 그러나 아담은 하느님의 자비로우신 방문과 자신을 돌아보도록 촉구하시는 부르심에도 불구하고 회개의 기회를 놓쳐 버렸다.
연중 제10주일복음 (마르3,20-35)
"그런데 예수님의 친척들이 소문을 듣고 그분을 붙잡으러 나섰다. 그들은 예수님께서 미쳤다고 생각하였던 것이다." (21)
'예수님의 친척들'에 해당하는 '호이 파르 아우투'(hoi par autou; his family)는 '그에게 속한 자들' 또는 '그와 함께 한 자들'이라는 뜻이기 때문에, '예수님의 친구들'이라고 번역할 수 있지만, 마르코 복음 3장 31절 이하의 예수님의 가족들이 예수님을 데리러 오는 문맥과의 조화를 생각하면, 이들은 '예수님의 가족들'이라고 보는 것이 자연스럽다.
그리고 '붙잡으러'에 해당하는 '크라테사이'(kratesai; to take charge of; to lay hold on)의 원형 '크라테오'(krateo)는 '체포하다'라는 뜻이라서 (마르6,17; 12,12참조), 예수님께 대한 그의 가족들의 태도가 얼마나 무지하고 살벌했는가를 짐작할 수 있다.
이런 점을 감안할 때, 예수님께서 당신의 일을 이해하지 못한 그들에 대해 영적인 의미에서 가족이 될 수 없다고까지 말씀하신 반응이 더 잘 이해될 수 있다. 또한 예수님의 친척들이 보인 이런 부정적인 모습은 당시 사람들이 얼마나 큰 영적 무지와 어리석음에 빠져 예수님을 제대로 알아보지 못했는지에 대한 척도가 된다.
이제 예수님께 대한 평가의 하나인 '그가 미쳤다'에 대해서 알아볼 차례이다. '예수님께서 미쳤다'에 해당하는 '엑세스테'(ekseste; He is beside himself; He is out of his mind)의 원형 '엑시스테미'(eksistemi)는 '~의 밖으로' 라는 뜻의 전치사 '에크'(ek)와 '어떤 상황이나 관계 속에 있다'는 뜻의 동사 '히스테미'(histemi)의 합성어이다. 말하자면, 이 단어는 예수님께서 현재의 상황이나 현상들에 대하여 정상적인 이해가 불가능한 상태에 있다는 뜻이다.
예수님께 대한 이런 단정적인 소문은 예수님의 가족들로 하여금 그를 집으로 데려가야 한다는 생각을 불러일으키기에 충분하다. 특히 예수님 당시 이스라엘에서는 '미쳤다'는 말은 곧 '마귀가 들렸다'는 뜻이었다(마르1,23). 이 구절 이후에도 예루살렘에서 내려온 율법학자들이 예수님께 대해 베엘제불이 들렸고, 마귀 우두머리의 힘을 빌려 마귀들을 쫓아낸다고 말하는 내용이 나온다(마르3,22). 특히 마르코 복음 3장 30절에서 사람들은 예수님을 향해 '그는 더러운 영이 들렸다'고 직접적으로 언급하고 있다.
마르코 복음 6장 1절 이하를 보면 고향 사람들도 예수님의 일에 대해서 신뢰하지 않았고, 요한 복음 7장 5절에는 예수님의 형제들(사촌들을 말함) 역시 예수님을 믿지 않았다는 내용이 나온다. 또한 마르코 복음 3장 21절과 3장 31~35절의 예수님께서 미쳤다고 판단하고 그를 붙들러 온 가족에 대한 이야기는 마르코 복음 3장 22~30절에서 예수님을 향해 베엘제불이 들렸다고 하는 예루살렘에서 온 율법 학자들과 예수님의 논쟁을 앞뒤에서 둘러싸고 있다.
전체적으로 보면, 한편에서는 예수님께서 병을 고치고 마귀를 내쫓는 기적을 행하시는 능력의 소유자이시며 하느님의 아들이시라는 소문도 돌았지만, 또 다른 한편에서는 예수님께서 단순히 마귀들려 미쳤다는 소문이 돌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하지만 멀리 예루살렘에서 온 율법학자들 뿐만 아니라(마르3,22), 그의 일을 지켜본 갈릴래아의 사람들이나(마르3,21 후반절) 심지어 자신의 친척들과 가족들까지(마르3,21 전반절) 하느님의 아들이신 예수님을 마귀에 들려서 미친 사람 취급을 했다는 사실을 통해 볼 때, 예수님께 대한 비난에 가까운 배척과 오해, 영적 무지와 불신이 더 지배적이었음을 알 수 있다.
아담과 하와가 원죄를 지은 뒤 일어난 현상은 죄에 대한 부끄러움과 두려움, 변명입니다. 우리도 죄를 지으면 ‘하느님께 벌을 받지 않을까?’ 걱정하고 두려워합니다. 이러한 두려움은 하느님을 공경하고 사랑하여 생기는 두려움과는 다릅니다. ‘죄의 두려움’은 죄인의 영혼이 파멸되고 죽어 가고 있는 사실을 느끼며 하느님의 벌을 두려워하는 것입니다. (류한영 베드로 신부)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