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4동성당
[연중 제13주일] 탈리타 쿰 (마르 5,21-4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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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중 제13주일] 탈리타 쿰 (마르 5,21-43)
지혜서의 저자는, 하느님께서는 죽음을 만들지 않으셨으나 악마의 시기로 세상에 죽음이 들어왔다고 한다. (지혜 1,13-15; 2,23-24) 바오로 사도는, 여러분이 누리는 풍요가 가난한 이들의 궁핍을 채워 준다고 한다. (2코린 8,7.9.13-15) 예수님께서는 당신 옷에 손을 댄 하혈하는 여자의 병을 고쳐 주시고, 회당장 야이로가 간곡히 청하자 그의 죽은 딸을 살려 내신다. (마르 5,21-43) 회당장의 집에서 사람들이 와서는, “ 따님이 죽었습니다. 그러니 이제 스승님을 수고롭게 할 필요가 어디 있겠습니까?” 하고 말하였다. 36 예수님께서는 그들이 말하는 것을 곁에서 들으시고 회당장에게 말씀하셨다. “두려워하지 말고 믿기만 하여라.”
연중 제13주일(교황주일)제1독서(지혜1,13~15; 2,23~24)
"하느님께서는 죽음을 만들지 않으셨고, 산 이들의 멸망을 기뻐하지 않으신다. 하느님께서는 만물을 존재하라고 창조하셨으니, 세상의 피조물이 다 이롭고, 그 안에 파멸의 독이 없으며, 저승의 지배가 지상에는 미치지 못한다. 정의는 죽지 않는다.(1,13~15) 정녕 하느님께서는 인간을 불멸의 존재로 창조하시고, 당신 본성의 모습에 따라 인간을 만드셨다. 그러나 악마의 시기로 세상에 죽음이 들어와, 죽음에 속한 자들은 그것을 맛보게 된다." (2,23~24)
지혜서의 첫째 부분은 지혜서 1~5장으로 종말에 대한 숙고를 다룬다. 하느님께서는 모르시는 것이 없어 사람의 속 마음까지 꿰둟어 보신다(1,6~7). 그것을 모르는 악인들은 나쁜 생각을 하고 제멋대로 산다(2,5~9). 악인들은 하느님을 의식하지 않고 방탕한 생활에 깊이 빠져 있다. 그들은 가난한 이들을 돌보지 않고, 노인을 존경하지 않으며, 약한 이들을 짓밟는다(2,10~11). 또한 그들은 정도를 걷는 의인을 부담스러워하고 괴롭힌다(2,12). 이런 악인들은 자신들의 그릇된 생각과 행동으로,벌을 받게 될 것이므로, 그들의 말로는 비참하다(3,10~12).
이와는 반대로 그들에게 박해받던 의인들은 죽지 않고(1,15), 그들의 영혼은 하느님의 시험을 거친 뒤에 그분과 함께 사랑 속에서 영원히 살 것이다(3,1~9). 따라서 이 세상에서 의인들이 고통을 당하고, 악인들이 행복을 누리는 모순이 있다 하더라도, 억울해 하거나 애석하게 생각할 필요가 없다(3,13~4,20). 지혜서의 저자는 전통적 인과응보와 상선벌악의 원리를 확신하고 적극적으로 옹호한다.
지혜서의 저자는 코헬렛(전도서)처럼, 상선벌악의 원리가 현실에서 꼭 들어 맞지 않는다는 사실을 인정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현세에서의 사정이고, 내세를 고려하면 이야기가 달라진다는 것이다. 의인들을 비웃고 박해하는 죄인들은 이 세상에서 득세하고 복을 누리겠지만, 죽음을 맞이할 때 모든 것을 잃게 된다는 것이다.
이와는 달리 의롭게 살고도 현세에서 보상을 받지 못한 의인들은 비록 장수를 누리지 못하고 죽더라도, 하느님 마음에 들어 죽은 다음에 하느님 곁에서 평화를 누리며 영원히 살게 된다는 것이다. 불사불멸은 악인들에게는 해당하지 않고, 의인들에게만 주어지는 선물이다. 지혜서의 저자가 희망하는 것은 죽은 의인의 부활이 아니라 의로운 영혼의 불멸이다. 지혜서의 저자는 악인이나 의인이나 구별없는 모든 영혼의 불멸을 주장하지 않는다. 사람은 본디 하느님의 모상에 따라 창조되었으므로 불멸하게 되어 있었으나 악마의 시기로 죽음이 세상에 들어 오게 되었다(2,23~24). 따라서 악마의 유혹에 넘어가 악을 저지르는 자들은 스스로 죽음을 불러들이게 되고, 의롭게 사는 이들의 영혼은 그 의로움 때문에 하느님의 특별한 보호를 받아 죽지 않게 될 것이다(3,1).
한편 상선벌악의 원리는 욥기에서 도전을 받고 코헬렛에서 거부당했지만, 내세를 전제하는 지혜서에 와서 확고하게 정립되었다. 상선벌악의 원리와 의인의 불사불멸은 동전의 양면과 같고, 동전 자체는 내세에 대한 믿음이라 할 수 있다.
오늘 말씀을 묵상하면서 이런 결심을 해본다. 착하게 살자. 진실되게 살자. 거룩하고 흠없이 살자. 사람이 아무도 알아주지도 보아주지 않아도, 보이지않는 하느님 앞에 인정받는 삶을 살도록 하자. 반드시 내세에는 종말론적인 자리 전도가 일어날 것이다.
성부 하느님 대전에 거짓말의 화신인 사탄이 우리를 고발함에도 불구하고 걱정할 것 없다. 우리의 죄를 피로 씻어주신 제1변호자이신 예수님과 진리의 영이신 위로자이시며 제2변호자이신 성령님이 계시기 때문이다 (로마8,26~27; 묵시12,10~11). '주님을 신뢰하는 이들은 진리를 깨닫고, 그분을 믿는 이들은 그분과 함께 사랑속에 살 것이다. 은총과 자비가 주님의 거룩한 이들에게 주어지고, 그분께서는 선택하신 이들을 돌보시기 때문이다.' (3,9)
만나를 모으는 이스라엘 백성 (로베르티 작, 1479년)
연중 제13주일 제2독서 (2코린8,7.9.13-15)
"많이 거둔 이도 남지 않고, 적게 거둔 이도 모자라지 않았다." (15)
바오로는 앞서 13절과 14절에서 헌금의 목적이 헌금을 하는 사람과 그 헌금을 받는 사람의 형편을 균형적으로 만드는 것임을 일반적이고도 매우 상식적인 원리하에서 제시하였다. 여기서 인용된 구약 성경은 탈출기 16장 18절인데, 이것은 이스라엑 백성들이 광야에서 방황할 때, 하느님께로부터 만나를 양식으로 받았던 경험에 대한 기록이다.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집트에서 탈출한 뒤 제 이월 십오일에 엘림에서 떠나 엘림과 시나이 산 사이 씬 광야에 이르러, 이집트에서의 생활을 회고하며 양식없는 것 때문에 모세와 아론에게 불평했었다. 그 때 하느님께서는 하늘에서 양식을 비같이 내리실 것에 대해 말씀하셨고, 실제로 이러한 놀라운 일들이 광야에서 벌어졌다.
그들은 해질 때에는 메추라기로, 아침에는 만나로 배불렀는데, 이 모든 기적들은 이스라엘 백성들로 하여금 바로 당신이 그들을 이집트에서 이끌어낸 그들의 하느님임을 명확하게 보여주시려는 하느님의 의도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만나를 향해 '이것이 무엇이냐' 라는 질의를 연발하면서, 그 양식을 각 사람 수대로 한 사람당 한 오멜씩 취하였다. 이렇게 그들이 만나를 거두었을 때, 그 거둔 것이 응당 많기도 하고 적기도 하였겠지만, 오멜로 되어보니 많은 거둔 자도 남음이 없었고, 적게 거둔 자도 부족함이 없었다. 그런데 그 만나는 다음날까지 쌓아두면 아침에 어김없이 썩어 버렸다.
바오로는 이와같은 이스라엘 백성들의 만나의 경험이 예루살렘 교회를 도우려고 하는 코린토 교인들의 헌금 정신 곧 호혜성의 원리(2코린8,14)와 상통한다는 점을 지적하고 있는 것이다. "그들은 모두 동일한 영적인 천막에 거하는 동거인들이요, 이 세상이라는 광야를 경유하여 동일한 천상의 가나안을 향해 함께 가는 여행자들이다. 세상에서의 재산이라는 형태로 그의 풍성함 가운데 만나를 내려주시는 분은 하느님이시다. 그들의 모든 것은 하느님의 것이다. 그리고 그들은 자기들만을 위하여 모으지 말아야 한다" 고 Christopher ordsworth 는 언급했다.
아침이 되자 쌓아두었던 만나가 부패하고 말았던 과거 이스라엘의 경험을 통해, 그리스도교 공동체에서 축적해 놓은 재산은 결국 축적해 놓은 만나처럼 부패하고 말 것이란 점을 유비적으로 보여준다. 또한 "바오로가 탈출기 16장 18-20절을 통해 가르치고자 하는 교훈은 신도들에게 있어서, 한 사람의 여분(풍요)은 다른 사람들의 필요(궁핍)를 채우는 데 사용되어야 한다는 것이며, 이러한 원리를 배척하려는 그 어떠한 시도도 결국 부끄러운 손해를 당할 것이다" 라고 Hodge는 적절하게 말했다.
한편, 교회의 부의 축적은 결국 그리스도교 공동체의 '균형'(평등)을 위협하며, 결국 상호간의 불평등을 초래하여 위화감을 조성하는 데에 이르게 된다. 그렇다고 하더라고, 바오로가 이스라엘 선조들의 만나의 경험을 재산 균등 분배론이나 재산 균형 공동체, 나아가 그리스도교 공산주의의 초석으로 이해했다고는 볼 수 없다. 확실히 그리스도교 공동체에는 평등과 균형의 요소가 존재하기는 하지만,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하나'(갈라 3,28)라는 사실이 사회, 경제, 문화적 제반 요소들의 획일화를 의미하지는 않는다.
바오로가 여기서 언급한 '균형'(평등)은 모든 대중에게 각각 존재하는 다양성을 모조리 철폐하는 것이 아니다. 또한 '균형'(평등)을 통한 일치가 곧바로 획일성을 의도하지는 않는다. 따라서, 사회적 혁명을 통해 평등 세상을 실현하기를 꿈꾸는 이들의 주장처럼, 바오로가 여기서 재산 공유화를 주장하는 것이 결코 아니다. 다만 그리스도의 은총 가운데 호혜성의 가능성을 열어둔 상부상조로서, 주는 사람이나 받는 사람이나 모두 균형을 이루게 하자는 헌금의 정신을 염두에 둔 것이다. 이처럼 복음을 통한 '회복'과 사회적 혁명을 통한 '균형'(평등)은 거리가 멀다.
연중 제13주일 (교황주일) 복음(마르5,21~43)
"두려워하지 말고 믿기만 하여라." (36ㄴ)
여기서 '두려워'에 해당하는 '포부'(phobou; afraid)의 원형은 '포베오'(phobeo)로서 마르코 복음 5장 33절에서 하혈병에 걸렸던 여자가 예수님께 나아가면서 가졌던 마음인 '두려워 떨며'에 해당하는 '포베테시아'(phobetheisa; in fear; fearing)의 원형과 같다. 한글 새 성경은 모두 '두려워하다'로 번역했지만, 대부분의 영역본들은 서로 다른 단어로 번역했다.
하혈병을 치유받은 여자가 예수님께 가졌던 마음은 '두려움'(fearing)이었고, 예수님께서 꿰뚫어 본 회당장과 그와 관련된 무리들이 갖고 있는 마음은 '염려'(afraid)였다. 그러니까 전자는 예수님께서 하느님이시라는 사실을 알기 때문에 갖는 '신적(神的) 경외심'을 표현했고, 후자는 예수님께서 하느님이시라는 사실을 모르기 때문에 딸을 살릴 수 없다는 '인간적인 염려'를 나타낸 것이다. 그런데 병행 구절을 보면, '두려워하지 말고 믿기만 하여라'는 내용을 마태오 복음사가는 기록하지 않고 있다(마태9,18~26; 루카8,40~56).
예수님께서 회당장 야이로의 집으로 가시는 일이 하혈병 여자의 치유 사건으로 인해 지체되고, 결국 예수님께서 그 집에 계시지 않음으로써 회당장의 딸이 죽어갔다. 마르코 복음사가는 예수님이 계시지 않음과 결코 되돌릴 수 없는 시간의 흐름, 그리고 인간의 죽음은 인간의 힘으로 해결 불가능한 문제들이며, 그것들을 해결하기 위한 확고한 가능성으로 '믿음'의 신학을 전개한다. 마르코 복음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향한 '믿음'은 마르코 복음사가의 신학적 귀결점이며 동시에 모든 인생 문제 해결의 출발점이 된다.
예수님 당시에는 유다인 뿐 아니라 고대 근동 지방에 살던 사람들은 아무리 가난해도 장례식 때에는 죽은 자를 위해 우는 두 명의 여인과 한 사람의 피리 부는 자를 고용하는 것이 상례였다(2역대35,25참조). 특히 직업적으로 우는 여인들은 머리를 풀어헤치고, 손바닥을 마주 치거나 가슴이나 땅바닥을 치면서 큰 소리로 울어댔다. 마르코 복음 5장 38절의 '탄식하는 것을 보시고'의 '탄식'에 해당하는 '알랄라존타스'(alalazontas; wailing)는 '꽹가리를 울려대듯 시끄럽게'라는 뜻이다.
회당장의 집안은 딸의 죽음을 애도하는 울음 소리가 끊이지 않았고, 한쪽에서는 죽은 자를 위로하는 피리 소리가 그치지 않았으며, 무엇보다도 가족의 통곡 소리와 사회적으로 유지에 해당하는 회당장 야이로를 위로하기 위해 찾아온 이웃과 친척 등 조객들의 웅성거림으로 말미암아 시장터를 방불케 했던 것이다. 바로 이런 곳으로 예수님께서 들어가셔서 '어찌하여 소란을 피우며 울고 있느냐? 저 아이는 죽은 것이 아니라 자고 있다'고 말씀하신다. 예수님께서 그들을 책망하시는 이유는 그들이 죽은 자도 살리시는 당신께서 오셨음에도 불구하고, 그 사실을 깨닫지 못했기 때문이다.
마르코 복음 5장 39절에 나타난 예수님의 표현에 대해서 죽음을 잠으로 표현한 구약의 완곡어법(창세47,30; 신명31,6)으로 이해하면 안된다. 구약의 완곡어법은 인간이 인간의 죽음을 완곡하게 표현한 것이다. '죽은 것이 아니라 자고 있다'에 해당하는 '우크 아페타넨 알라 카튜데이'(ouk apethanen alla katheudei; is not dead but asleep)는 신성(神性)을 지니신 하느님의 아들로서 바라보시는 인간의 죽음에 대한 정확한 표현이다. 죽음이란 인간만의 용어일 뿐이며, 하느님께는 죽음이란 없는 것이다(마르12,27). 따라서 실제로 그 소녀가 죽은 것이 분명함에도 불구하고 '자고 있다'고 표현한 것은 예수님께서 살아계신 하느님의 아들이심을 보여 주기 위한 것이다.
회당장 야이로는 열두 살밖에 되지 않은 어린 딸이 죽게 된 사실이 억울하기만 합니다. 예수님께 딸의 치유를 청하는 아버지의 마음은 간절하지만, 이미 죽은 딸아이를 뒤늦게 찾아오신 예수님이 원망스럽기도 합니다. 비웃는 사람들을 뒤로하시고 예수님께서는 야이로의 딸을 일으키십니다. “탈리타 쿰!”, “소녀야, 내가 너에게 말한다. 일어나라!” 아버지와 딸, 억울하고 한 많은 두 인생의 역전이 이루어집니다.
밀쳐 대는 군중의 단순한 호기심의 손길과는 달리 치유를 간절하게 원한 손길을 알아차리신 예수님께서는, 그 여인의 간절함 속에서 하느님을 갈망하는 한 인간의 진심을 보신 것입니다. 그리고 “딸아,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평안히 가거라. 그리고 병에서 벗어나 건강해져라.”고 말씀하십니다.
궁핍은 언제나 제 몫보다 더 많이 소유하려는 인간의 욕심에서 나옵니다. 한정된 재화를 누군가 더 소유하면 내 주변에 그 누군가가 궁핍해지는 것이 세상의 이치입니다.
우리가 몸의 균형, 사회적 균형, 경제적 균형을 이루지 못하면, 병과 슬픔, 차별과 편견, 위선과 교만의 병이 더 커지기 마련입니다. 내게 부족한 부분이 무엇인지 알면 하느님께 무엇을 청해야 할지 알 것입니다. (송용민 사도 요한 신부)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