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2년 일반 게시판

힘겨운 할머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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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강연 [enos1956] 쪽지 캡슐

2002-06-08 ㅣ No.334

 

      어제 이른 저녁무렵에 모임이 있어 일찌감치 퇴근해서 지하철을 타려고 성내역 쪽으

    로 걸어가는 중에 안스러운 모습을 봤습니다.

 

      횡단보도 입구의 인도에서, 까맣게 그을은 할머니가 조그만 좌판을 벌여놓고 앉아있

    는데 그 모습이 너무나 힘겨워 보였습니다. 찌그러진 양재기에 담겨있는 얼갈이 한 단

    이 한 여름같은 더위 속에 시들어 늘어져 있었습니다. 뜨겁게 올라오는 보도블럭 지열

    에 할머니의 얼굴도 지쳐보였고, 얼갈이 한 단도 지쳐보였습니다.

 

      할머니는 초췌한 옷소매 밖으로 까맣고 야윈 손을 내밀어 늘어진 얼갈이를 만져보고

    는 지나가는 사람들의 허리춤을 쳐다보기는 하는데, 말할 힘도 없는지 이내 고개를 떨

    구고 맙니다.

 

      잠간동안 지나치며 본 모습이었지만, 지하철에서 내릴때까지 그 모습이 지워지지 않

    고 뇌리속에 남아 있었습니다. "그 할머니는 무슨 사연이 있을까? 얼마나 오랜 세월을

    힘들게 살아 왔을까? 언제까지, 끝없이 그렇게 살아야 할까?" 마음이 아펐습니다.

 

      지하철에서 내려서 모임에 어울리면서는 까맣게 잊고, 이른 저녁부터 달콤한 술잔을

    기울이며 이런 저런 대화를 하다보니 오히려 기분만 좋아졌습니다.

 

      아침에 출근하며 차속에서 어제일을 회상하던중에 그 할머니가 떠올랐습니다. "나라

    는 인간은 무엇인가? 어제는 성당에 회합도 있었는데 달콤한 술자리에 눈이 멀어 모임

    에 나가는 인간. 그토록 안스러운 모습도 이내 지워버리고 흥겨운 시간을 보낸 인간이

    아닌가?" 저의 모습은 신앙인으로 살아가려고 노력하는 모습이 아니었습니다.

 

      진정, 예수님은 우리 가까이에 계시는데 이를 외면하며 살아 가고 있습니다. 어제의

    그 할머니가 저에게는 예수님이셨는데, 저는 아무것도 한 것이 없습니다. 최소한 시들

    은 얼갈이 한 단을 팔아주어, 그 할머니가 자리를 털고 댁으로 들어 가시게 했어야 했

    습니다.

 

      언제나 마음만 있고 행동은 없는 저의 모습이 신앙인이라기 보다는 위선자에 불과하

    다는 생각에 죄스러울 뿐입니다. 예수님을 따르기가, 예수님을 맞이 하기가, 저에게는

    언제까지나 어려운 과제인 것만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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