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위동성당 게시판

신유박해200주년6...이승훈

인쇄

이범석 [simon] 쪽지 캡슐

2000-11-17 ㅣ No.1323

신유박해가 일어날 당시에 천주교 교우중에는 김여삼이라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조선의 유다라고 불리우는 이사람은 무절제한 타락의 생활을 좋아해서 교우가 된 후

다른 교우들에게 몇번 돈을 뜯어내곤 했었습니다.

이안정(李安正)이라는 교우에게 돈을 뜯어내던 김여삼은 그가 이안정이 더이상 돈을 주지

않자 그것이 당시에 주문모신부가 내린 권고라고 생각한 나머지 신부님을 관가에

고발합니다.

 

당시에 조정은 정조재위때 조선으로 들어온 주문모(야고보)신부님을 잡기위해서 혈안이

었습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신부가 어디에 있는지 고발하는 김여삼은 좋은 미끼였지요

"일이 잘되면 녹을 받을 수있는 자리를 마련해주겠다"라는 말로 김여삼을 더욱 흥미있

도록 만든 조정은 김여삼과 주문모신부를 잡을 계획을 꾀합니다.

 

당시에 주신부님은 몇번의 이러한 밀고로 신자들을 대면하지 않고 강완숙(골롬바)라는

신자의 집에서 몇몇 교우들만을 만나며 책을 쓰시거나 하시던 상황이었습니다.

김여삼은 포졸과 함께 계략을 꾸미던중 그만 중병이 들어 그 기회를 틈타 주문모신부님은

도망을 치실 수가 있었습니다.

 

김여삼은 당시 총회장이었던 최회장이라는 사람을 또 고발했는데 그 집에서 발견한 가방

에 주문모신부님의 편지와 성물이 발견되어 버렸습니다. 이를 조정에 항소한 사건을

바로 ’책롱사건’이라고 불립니다. 이 사건으로 말미암아 그 동안은 서민이나 하위신분

만을 책문하던 박해가 양반에게도 돌아가기 시작합니다.

 

 

그리고는 곧  이가환, 권철신, 정약전, 정약종, 이승훈, 홍낙민, 홍교만   등등 저명한 남인 천주교도들을 모두 붙잡아 의금부에 가두었습니다. 남인 학자들을 잡아들인 가장 큰 이유중에 하나가 바로 권력에 대한 복수라고도 볼 수 있으니 당시 조선의 상황을 짐작할

있습니다. 이들에 대한 국문은 오래되고 결국 이승훈, 정약종, 홍낙민, 홍교만, 최필공, 최창현에게 사형이 선교됩니다. 이중 정약종과 이승훈은 강학회에 참석한 인물이었고

특히나 이승훈은 우리나라의 최초 영세자였습니다.

 

정약종, 정약용형제는 이 국문에서 배교를 하여 유배를 가는데 그중 정약용은 강진으로

유배를 가게됩니다.

 

최초의 영세자였던 이승훈 그동안 몇번의 자잘한 박해에도 배교의 의사를 밝혔던 사람이

엇습니다. 당시에 교우들도 그에대한 믿음이 사라졌을 정도였습니다. 이승훈은 배교

이후 다시 관직에 복귀되었지만 또 다른 사건으로 연류되고 그는 또 배교합니다. 하지만

이 또 다른 배교에도 그는 천주교도였다는 것이 화가 되어 관직을 파직당합니다.

이승훈은 여러 박해동안 단한번도 꾿꾿한 신앙을 고백한 적이 없었습니다.

 

하지만 서소문 처형지로 끌려가는 중에 그의 동생이 다시 배교를 해서 집안과 목숨을

부지 할 것을 요청하지만 만천 이승훈은 다음과 같은 말을 합니다.

’월락재천 수상지진(月落在天 水上池盡)’ 이말은 달이 진다고 해도 여전히 하늘에 있으며

물이 아무리 치솟는 다고 해도 그 물이 말라버리면 아무런 소용이 없다는 말입니다.

즉 이승훈은 이 말을 통해서 자기가 비록 배교의 부끄러움을 하긴햇어도 난 단한번도

천주교를 떠나서 살아간 적이 없다는 신앙을 고백하는 것이었습니다.

 

달레의 ’천주교회사’에는 이승훈이 끝까지 배교를 하다가 죽은 것으로 저술되어 있지만

이승훈은 최후에는 자신의 신앙을 버릴 수가 없었습니다.

 

 

 

 

 

 



27 0

추천 반대(0)

 

페이스북 트위터 핀터레스트 구글플러스

Comments
Total0
※ 500자 이내로 작성 가능합니다. (0/500)

  • ※ 로그인 후 등록 가능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