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일강론

대림 제3주일(나해) 요한 1,6-8.19-28; '20/12/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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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흥보 [peters1] 쪽지 캡슐

2020-12-01 ㅣ No.4472

대림 제3주일(나해) 요한 1,6-8.19-28; ’20/12/13

 

 

  

     

 

 

강론을 준비하면서 늘 마음 한 구석에 부담스럽게 다가오는 글귀가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예수님께서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파 사람들을 가리켜 하신 말씀입니다. “무거운 짐을 꾸려 남의 어깨에 메워주고 자기들은 손가락 하나 까딱하려 하지 않는다.”(마태 23,4) 그러기에 자기가 지키지도 못하는 말을 해야 하는가?’하는 지적이 늘 마음에 경고처럼 떠오릅니다. 그러면서도 내가 지키지 못한다고 말하지 않으면, 누가 예수님의 말씀을 전하겠는가?’ ‘내가 지키지 못한다고, 신자들이 지킬 기회도 박탈할 것인가?’ ‘내가 설사 다 지키지 못한다고 해도, 예수님 진리의 말씀은 세상 곳곳 모든 사람에게 전해져야 한다.’ 그리고 듣기 좋은 말만 하고, 듣고 싶어하는 말만 하고, 할 수 있는 말만 하면, 그것도 위선이 아닌가?’ 하는 마음으로 애써 그리고 송구스러우면서도 예수님의 말씀을 감히 전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루살렘의 사제들과 레위인들이 사람들을 보내어 요한에게 묻습니다. “당신은 누구요?”(요한 1,19) 그러자 요한은 서슴치 않고 고백합니다. “나는 그리스도가 아니다.”(20) 그들이 그러면 누구란 말이오? 엘리야요?하고 묻자, 요한은 아니다.” 하고 대답하였다. “그러면 그 예언자요?하고 물어도 다시 아니다.” 하고 대답하였다(21). 그러고서 요한은 나는 이사야 예언자가 말한 대로 너희는 주님의 길을 곧게 내어라.’ 하고 광야에서 외치는 이의 소리다.”(23절) 라고 답합니다.

 

이렇게 대답하는 요한의 심정이 이해가 갑니다. 요한처럼 우리도 가끔 다른 이들이 예수님이나 교회에 대해 물으면, 당당히 말하기는 해도 확실하게 대답하지 못합니다. 네가 예수님을 직접 보았니?’ 라고 물으면, ‘그렇다.’ 라고 명확히 대답하지 못합니다. 우리가 전혀 모르는 것은 아니자만, 안다고 말하기도 어려운 상태여서 그런가 봅니다. 그리고 알면서도 아는 만큼 행하지 못하니 더 부끄럽고 송구스러울 뿐입니다.

 

바리사이들이 보낸 사람들이 요한에게 재차 묻습니다. “당신이 그리스도도 아니고 엘리야도 아니고 그 예언자도 아니라면, 세례는 왜 주는 것이오?”(25) 그러자 요한이 대답합니다. “나는 물로 세례를 준다. 그런데 너희 가운데에는 너희가 모르는 분이 서 계신다. 내 뒤에 오시는 분이신데, 나는 그분의 신발 끈을 풀어 드리기에도 합당하지 않다.”(26-27) 우리 교회도 세례를 주지만, 이 물이 수돗물인지 정화수인지 생수인지, 진정 우리의 죄를 다 씻어줄 물인지 잘 모릅니다. 그러나 우리가 잘 알고 있다시피 물이 죄를 씻어주는 것이 아니라, 물로 씻는 예식을 통해 주 예수님께서 십자가상에서 자신의 생명을 우리에게 내주시면서 희생제물이 되심으로써 우리 죄를 씻어주시는 것입니다. 주 예수님은 오늘도 우리 교회의 세례성사를 통해 물과 성령으로”(요한 3,5) 우리 죄를 씻어주실 뿐만 아니라, 우리를 새로 나게 하심으로서 우리를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게 해주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지금은 순간적으로나마 희미하게나마 그분을 뵙고 느낍니다. 우리가 마지막 날 천상에서 온전히 누리게 될 기쁨과 행복을 여기서 미리 앞당겨, 잠시나마 부분적으로나마 누리게 됩니다. 실제로 이 지상에서 누리는 기쁨과 행복은 제한적이고 순간적입니다. 주님께서 주시는 행복을 받아 누리지만, 다시 또 슬퍼지기도 하고 괴로워지기도 합니다. 미사 성제 안에서 영성체를 하며 주님 사랑과 깊은 친교를 누리게 천상복락을 누리지만, 성전을 따나 다시 세상에 들어가면서 다시 또 고통과 슬픔과 갖가지 번뇌 속에 잠깁니다.

 

우리도 어쩌면 마지막 날 주 예수님을 직접 뵈올 때까지는, ‘예수님을 뵈었다.’고 온전히 말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우리가 지금 이렇게 미사에 참례하고, 예수님에 대해 말하는 것은 우리의 신앙 선조들이 우리에게 전해주고 체험시켜 주었던 그 신앙의 신비를 조금이나마 깨닫고 체험해 왔기 때문입니다.

 

사도 성 바오로는 그 유명한 사랑의 송가 마지막 부분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는 부분적으로 알고 부분적으로 예언합니다. 그러나 온전한 것이 오면 부분적인 것은 없어집니다. 우리가 지금은 거울에 비친 모습처럼 어렴풋이 보지만 그때에는 얼굴과 얼굴을 마주 볼 것입니다. 내가 지금은 부분적으로 알지만 그때에는 하느님께서 나를 온전히 아시듯 나도 온전히 알게 될 것입니다.”(1코린 13,9-10.12) 그렇습니다. 우리는 지금 비록 부분적으로만 알고, 부분적으로만 깨닫고, 부분적으로만 느끼지만 그날 가서는 오전히 알고, 온전히 깨닫고, 온전히 느끼게 될 것입니다. 그뿐 아니라 그분 품안에서 영원한 행복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이것을 믿고 희망하기에 주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일러주신 선교와 복음화의 사명을 이루어나갑니다.

 

그런가 하면, 우리가 아무리 미사성제와 기도 중에 주 예수님과 함께 누리는 기쁨과 행복을 누린다고 해도, 기도를 마치고 현실로 접어들며 평소에 보기 싫고 피하고 싶은 사람을 만나자마자 재빨리 악마가 내 마음속에 미움과 부정적인 감정을 심어놓고 불러일으키는 것과 마찬가지 이치입니다. 그래서 주 하느님은 애초에 우리를 세상에 내실 때, 우리가 주 하느님께서 함께 살라고 허락해 주신 이웃 형제자매들과 사이가 안 좋아지면 주 하느님과 누리는 기쁨과 행복도 사라지도록 만들어 놓으셨기 때문인가 합니다.

 

사도 성 바오로는 사랑의 송가를 이 말로 끝맺습니다. “그러므로 이제 믿음과 희망과 사랑 이 세 가지는 계속됩니다. 그 가운데에서 으뜸은 사랑입니다.”(13) 사도 성 바오로가 말하는 그리스도교 믿음은 사랑의 행위로 구체화되고 드러난다고 합니다. 그러기에 교회는 오늘을 자선주일로 정하고, 어려운 이웃에게 사랑을 나누자고 하십니다. 마치 우리가 평소에 지은 죄와 이웃 형제 자매들과의 불편한 일상을 살아감으로써 손상된 기쁨과 행복을 다시 얻기 위한 속죄와 보속처럼 사랑의 나눔을 명하십니다.

 

오늘의 일상에서 잠시나마 부분적으로나마 주 예수님께서 내려주신 부활의 새생명을 만끽하며, 형제자매들과 사랑을 나눔으로써 우리의 기쁨과 행복이 배가되고, 주님 사랑의 하느님 나라가 하루 빨리 우리 가운데 이루어질 수 있도록 오늘을 살아갑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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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림 제3주일 꽃꽂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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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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