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톨릭 신앙생활 Q&A 코너

민간의(popular) 경의/존중과 함께 당연한 의무들에 대한 충실(piety)의 성경 근거 외 1444_piety 1293_evangelize so_that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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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04-11 ㅣ No.1628

(십자성호를 그으며)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내용 추가 일자: 2015년 4월 29일]

게시자 주: 아래의 본글은 다음의 주소에 있는 글[제목: 새 번역 성경 신약 중의 번역 용어 신심(信心)에 대하여]에 이어지는 글이기도 합니다:

http://ch.catholic.or.kr/pundang/4/soh/1624.htm <----- 필독 권고

 

그리고 아무리 바쁘더라도, 아래의 제3-6-3항을 꼭 읽도록 하십시오. 최근의 석 달 반 동안에 많이 부족한 죄인인 필자가 들여다 본 동일한 주제에 대한 최종 결론을 읽을 수 있습니다.

 

많이 부족한 죄인인 필자의 생각에, 보통 수준의 가톨릭 교우님들이라고 하더라도, 예를 들어, 프란치스코 교황님의 첫 번째 교황 권고인 "복음의 기쁨" 등과 같은, 복음화/토착화에 대한 교황청 문헌들과 성 토마스 아퀴나스(St. Thomas Aquinas)신학 대전(Summa Theologica) 등을 읽으면서 그 내용을 더 깊이 이해하는 데에 이 최종 결론이 상당한 도움이 될 것이라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이상, 2015년 4월 29일자 내용 추가 끝]

 

질문 1: "민간의(popular) 경의(敬意, respect)/존중(尊重, esteem)과 함께 당연한 의무들에 충실(piety)"(*)의 성경 근거가 있는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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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게시자 주: 영어로 "popular piety" 로 번역되는 교회의 용어를 지금까지 국내 가톨릭계에서 "대중 신심(大衆信心)"으로 번역해 왔는데, 그러나 이 차용(借用) 번역 용어는, 중국 가톨릭계에서 사용하지 않는, 일본식 용어 번역이며, 더구나, 원 라틴어 용어의 의미를 제대로 전달하지 못하기 때문에, 대단히 부적절하게 번역된 일본식 차용(借用) 번역 용어라 아니할 수 없습니다. 이 지적에 대한 더 자세한 내용은 다음의 글의 제1항-제3항에 있으니 꼭 읽도록 하삽시오:

http://ch.catholic.or.kr/pundang/4/soh/1619.htm <----- 필독 권고

 

그리고 다음의 주소에 있는 글의 질문 1이 질문 1에 대한 답변을 꼭 읽도록 하십시오:

http://ch.catholic.or.kr/pundang/4/soh/1624.htm <----- 필독 권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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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문 2: 그런데 예수님 공생활 당시의 유다인들이 이 충실에 대하여 이미 잘 알고 있었던 이유는 어디에 있는지요?

 

칠문 3: "popular Jewish piety" 혹은 "Jewish piety" 와 "popular Christian piety" 혹은 "Christian popular piety"의 차이점은 무엇인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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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부의 말씀:

많이 부족한 죄인인 필자의 글들은 어떤 특정인의 감정을 자극하기 위하여 마련된 글들이 결코 아니기에, 다음의 당부의 말씀을 드립니다:

(1) 지금까지 필자의 글들을 읽고서 필자에 대한 "분노(anger)" 혹은 "질투(envy)"를 가지게 된 분들은, 혹시라도 그분들께 "걸림돌(stumbling block)"일 수도 있는, 많이 부족한 죄인의 글들을 더 이상 읽지 마시기 바랍니다. 꼭 부탁드립니다.

(2) 그리고 위의 제(1)항의 당부의 말씀을 읽고도 굳이 이 화면의 아래로 스스로 이동하여, 많이 부족한 죄인의 아래의 본글을 읽는 분들은, 필자에 대한 "분노(anger)"와 "질투(envy)" 둘 다를 가지지 않을 것임에 동의함을 필자와 다른 분들께 이미 밝힌 것으로 이해하겠습니다.

(3) 그리 길지 않은 인생 여정에 있어, 누구에게나, 결국에, "유유상종[類類相從, 같은 무리끼리 서로 사귐 (출처: 표준국어대사전)]"이 유의미할 것이라는 생각에 드리는 당부의 말씀입니다.

 

 

 

 

 

 

 

 

 

 

 

 

 

 

 

 

 

 

 

 

 

 

 

 

 

 

 

 

+ 찬미 예수님!

 

 

 

[내용 추가 일자: 2015년 4월 29일]

게시자 주: 아래의 본글은 다음의 주소에 있는 글[제목: 새 번역 성경 신약 중의 번역 용어 신심(信心)에 대하여]에 이어지는 글이기도 합니다:

http://ch.catholic.or.kr/pundang/4/soh/1624.htm <----- 필독 권고

 

그리고 아무리 바쁘더라도, 아래의 제3-6-3항을 꼭 읽도록 하십시오. 최근의 석 달 반 동안에 많이 부족한 죄인인 필자가 들여다 본 동일한 주제에 대한 최종 결론을 읽을 수 있습니다.

 

많이 부족한 죄인인 필자의 생각에, 보통 수준의 가톨릭 교우님들이라고 하더라도, 예를 들어, 프란치스코 교황님의 첫 번째 교황 권고인 "복음의 기쁨" 등과 같은, 복음화/토착화에 대한 교황청 문헌들과 성 토마스 아퀴나스(St. Thomas Aquinas)신학 대전(Summa Theologica) 등을 읽으면서 그 내용을 더 깊이 이해하는 데에 이 최종 결론이 상당한 도움이 될 것이라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이상, 2015년 4월 29일자 내용 추가 끝]

  

질문 1: "민간의, 경의(敬意, respect)/존중(尊重, esteem)과 함께 당연한 의무들에, 충실(popular piety)"(*)의 성경 근거가 있는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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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게시자 주: 영어로 "popular piety" 로 번역되는 교회의 용어를 지금까지 국내 가톨릭계에서 "대중 신심(大衆信心)"으로 번역해 왔는데, 그러나 이 차용(借用) 번역 용어는, 중국 가톨릭계에서 사용하지 않는, 일본식 용어 번역이며, 더구나, 원 라틴어 용어의 의미를 제대로 전달하지 못하기 때문에, 대단히 부적절하게 번역된 일본식 차용(借用) 번역 용어라 아니할 수 없습니다. 이 지적에 대한 더 자세한 내용은 다음의 글의 제1항-제3항에 있으니 꼭 읽도록 하삽시오:

http://ch.catholic.or.kr/pundang/4/soh/1619.htm <----- 필독 권고

 

그리고 다음의 주소에 있는 글의 질문 1이 질문 1에 대한 답변을 꼭 읽도록 하십시오:

http://ch.catholic.or.kr/pundang/4/soh/1624.htm <----- 필독 권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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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들어가면서

1-1. 질문 1에 대한 간략한 답변: 예, 있습니다. 신약 성경의 마태오 복음서 6,1-18칠십인 역 그리스어본 구약 성경의 토빗기 12,8입니다.

(이상, 질문 1에 대한 간략한 답변)

 

1-2. 그러나 많이 부족한 죄인인 필자가 생각할 때에, 언어 장벽/문화 장벽 등을 포함하여, 이런 저런 그 종류가 다른 이유들 때문에, 바로 위에 드린 간략한 답변만으로는 왜 이것이 답변일 수 있는지 국내의 교우님들께서 쉽게 이해할 수 없는 문제가 있다는 생각에, 이번 글에서는 신뢰할 수 있는 자료들을 인용하면서 (여기에는 지금까지 전달해 드렸던 신뢰할 수 있는 자료들 포함), 가능한 한 쉽게, 그러나 확실하게 그리스도 중심적으로, 말씀을 드리고자 합니다.

 

[내용 추가 일자: 2015년 4월 26일]

1-3. 그리고 최근의 석 달 이상의 기간 동안에 많이 부족한 죄인인 필자가 고찰하였던 바로부터 연역적 추론(deductive reasoning)에 의하여 도출한 결과인, 복음화(evangelization), 재-복음화(re-evangelization), 새로운 복음화(new evangelization), 그리고 토착화(inculturation) 각각의 4단계 실천적 원리(practical principles)은 아래의 제3-6-3항에 있습니다. 혹은 다음의 주소를 클릭하면 읽을 수 있습니다. 특히 복음화/선교에 관심이 많은 분들의 필독을 강력히 권고드립니다:

http://ch.catholic.or.kr/pundang/4/soh/1628_four_principles_of_Evangelization.htm <--- 필독 권고

[이상, 2015년 4월 26일자 내용 추가 끝]

 

2.

[질문 1에 대한 답변 시작

이번 항에서는, 유다인들의(Jewish) 경의(敬意, respect)/존중(尊重, esteem)과 함께 당연한 의무들에 충실(piety)라는 표현이 등장하는 신뢰할 수 있는 문헌들에 있어, 그 전후 문맥 안에서 이 표현의 의미에 대한 검토 및 이와 관련된 바에 대한 고찰를 주로 진행하도록 하겠습니다.

 

이번 항의 입문으로서, 가톨릭 교회의 전례력에 있어, 매년 재의 수요일 복음 말씀(마태오 6,1-6.16-18)에 대한 나바르 성경 주석서의 해설은 다음에 있으니, 아래의 글을 읽기 전에, 반드시 먼저 읽도록 하십시오:

http://ch.catholic.or.kr/pundang/4/navarre/ash_wed.htm <----- 필독 권고

  

2-1. 다음은 교항청 성경 위원회 문헌 [제목: The Bible and Moality, Biblical Roots of Christian Conduct(성경과 윤리, 그리스도인들의 처신의 성경적 뿌리들]제102항 제2조 전문입니다:

 

출처: http://www.vatican.va/roman_curia/congregations/cfaith/pcb_documents/
rc_con_cfaith_doc_20080511_bibbia-e-morale_en.html

(발췌 시작)

102.

2. The exhortation to practise a higher righteousness than that of the scribes and Pharisees (cf. Mt 5.20) implies that in the Christian order every moral norm is now situated within the dynamic context of a filial relationship. In the Sermon Jesus insists often on this relationship and at least sixteen times he speaks about God, calling him ‘Father’ of those around him, and only at the end does he call him, for the first time, “my Father in heaven” (Mt 7.21). He also takes up the three traditional expressions of Jewish piety, almsgiving, prayer and fasting (6.1–18). In each case the disciple’s efforts should issue in an intimate union with God, putting aside any calculation, any quest for profit or human praise. The rest of the Sermon focuses attention on the bond of love and trust between God and the disciple. From this derives the responsibility on the disciple to live the gospel. Otherwise an obstacle is created to the fundamental quality of life willed by God, with the risk of disastrous consequences. The texts concerning judgement are themselves warnings about the destructive effects of evil conduct. More particularly the reader is presented, by means of a series of metaphors, with a choice between two alternatives: the wide or the narrow gate, the broad or narrow path, true or false prophets, good or bad tree, wise or foolish house-builders (7,13 – 27).

 

102.

2.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의 의로움보다 더 높은 어떤 의로움을 실천하라는 권고(마태오 복음서 5,20 참조)는 그리스도교 질서(Christian order)에 있어 모든 윤리적 표준(moral norm)이 이제 한 명의 자식으로서의 관계(a filial relationship)라는 역동적인 문맥 안쪽에 놓이게 됩니다. 산상 설교에서 예수님께서는 바로 이 관계에 대하여 자주 역설하시고(insists) 그리고 적어도 16번에 걸쳐 하느님에 관하여, 당신 주위에 있는 자들의 '아버지(Father)'라고 그분을 부르시면서, 말씀하시고, 그리고 오직 그 끝(the end)에 당신께서는 그분을, 처음으로, "하늘에 계신 나의 아버지"(마태오 복음서 7,21)라고 부르십니다. 당신께서는, 유다인들의, 경의(敬意, respect)/존중(尊重, esteem)과 함께 당연한 의무들에, 충실(Jewish piety)인,선 제공(almsgiving), 기도(prayer) 그리고 단식(fasting)이라는 세 개의 전통적 표현/예절들을 당신의 고유한 것으로서 받아들이십니다(takes up)(마태오 복음서 6,1-18).(*) 각 경우에 있어 제자들의 노력들은, 어떠한 계산도, 이득 혹은 인간적 칭찬에 대한 어떠한 추구도, 옆으로 제쳐놓음으로써, 하느님과 한 개의 친밀한 결합으로 마땅히 끝나야 합니다(should issue in). 산상 설교의 나머지 부분은 하느님과 제자 사이의 사랑 및 신뢰로 이루어진 유대(bond)에 주의를 집중합니다. 바로 이것으로부터 제자 측에 있어 이 복음(the gospel)을 실천하여야 하는 책임이 유래합니다. 그렇지 아니하면 어떤 장애물(an obstacle)이, 불길한(disastrous) 결과들이라는 위험과 함께, 하느님에 의하여 의도된 삶의 근본적인 질 쪽으로 야기됩니다(is created). 심판에 관련한 본문들 자체들은 악한 처신의 파괴적인 결과들에 관한 경고들입니다. 더 구체적으로, 다음과 같은 일련의 비유(metaphors)들에 의하여, 두 개의 양자택일들 사이에서 한 개의 선택이 독자에게 제시됩니다: 넓은 혹은 좁은 길, 참 혹은 거짓 예언자들, 선한 혹은 악한 나무, 지혜로운 혹은 어리석은 주택 건축업자들(마태오 목음서 7,13-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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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번역자 주:

(1) 유다인들의, 경의(敬意, respect)/존중(尊重, esteem)과 함께 당연한 의무들에, 충실(Jewish piety)특징적인 한 개의 태도 루카 복음서 1,38[즉, 마리아의 피앗(순명, fiat)]에 서술되어 있다는 성 요한 바오로 2세 교황님의 가르침은 아래의 제2-6항에 있다.

 

(2) 그리고 예수님의 공생활 당시에 이미 구체적으로 형성되어 있었던 유다인들의, 경의(敬意, respect)/존중(尊重, esteem)과 함께 당연한 의무들에, 충실(Jewish piety)에 대하여서는 이어지는 제2-7항을 읽도록 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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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 발췌 및 우리말 번역 끝)

 

2-2. (중간 결론 1) 예수님께서 마태오 복음서 6,1-18에서 유다인 군중에게 가르치신 바가 경의(敬意, respect)/존중(尊重, esteem)과 함께 당연한 의무들에 대한 충실(piety)인,선 제공(almsgiving), 기도(prayer) 그리고 단식(fasting)이라는 세 개의 전통적 표현들이었기 때문에, 마태오 복음서 6,1-18에서 예수님께서 가르치신 바는, 사실은, 유다인들로 구성된 민간의, 경의(敬意, respect)/존중(尊重, esteem)과 함께 당연한 의무들에, 충실(popular Jewish piety)인,선 제공(almsgiving), 기도(prayer) 그리고 단식(fasting)에 있어, 이들이 하느님에 의하여 의로운 일(righteous deeds)들로 인정을 받고자 한다면, 피조물인 "너(you)" 쪽으로가 아니라, 초월자이신 하느님 쪽으로 향하도록 "숨어 계시는 네 아버지" 라는 표현을 세 번씩(마태오 복음서 6,4; 6,6; 6,18) 구체적으로 언급하심으로써, 잘못된 부분을 예수님께서 직접 바로잡아 주고 계심에 반드시 주목하십시오.

 

왜냐하면, 이 가르침에 있어서의 기본 설정 자체가, 한 말단(a termination)이 한 분이신 하느님으로 설정된, 3자들 사이의 관계(a trinary/ternary/trinitarian relation)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지금 지적한 바는, 아래의 제3항에 더 자세하게 다루어지고 있습니다.

 

이 때에 또한, 특히 그리스도인들의 윤리의 대 헌장인 예수님의 산상 설교가 기록된 마태오 복음서 제5장-제7장의 중앙 부분인, 그리고 또한 주님의 기도가 그 한 가운데에 포함된마태오 복음서 6,1-18에서 바로 이 바로잡는 가르침이 기록되어 있음과 그리고 예수님께서 마태오 복음서 5,17에서 말씀하신 바를 또한 상기하도록 하십시오.

 

게시자 주 2-2: (중간 결론 2) 그런데, 다른 민족들과는 달리, 유다인들은, 예수님의 공생활 시기보다 약 1,300년 전인 상당히 오래 전에 모세가 시나이 산에서 한 분이신 하느님과 체결하였던 옛 계약(the Old Covenant)에 의하여, 하느님의 백성이 이미 되었기 때문에 [그리하여, 예를 들어, 그리스인들 혹은 로마인들처럼 잡신(gods)들을 섬기지 않았기 때문에], 따라서, 여기서 말하는 "piety""하느님께, 경의(敬意, respect)/존중(尊重, esteem)과 함께 당연한 의무들에, 충실"을 말하고, 그리고 더 나아가, 단순히 "Jewish piety"  라고 부르는 것이 또한 "popular Jewish piety" 을 나타낸다는 생각입니다.

 

그리고 지금 말씀드린 바는, 다음의 파란색들을 클릭해 보면 직접 확인할 수 있듯이, 교황청 홈페이지 제공의 문헌들에서, 굳이 "popular Jewish piety" 라고 부르지 않고, 단순히 "Jewish piety" 라고 부르고 있는 이유라는 생각입니다:

"Jewish piety" site:vatican.va

"popular Jewish piety" site:vatican.va

(이상, 게시자 주 2-2 끝)

 

질문 2: 그런데 예수님 공생활 당시의 유다인들이 이 충실에 대하여 이미 잘 알고 있었던 이유는 어디에 있는지요?

 

질문 2에 대한 답변: 바로 이 동일한 세 개의 탁월한 선행들이, 당시에 지중해 지역에서 널리 통용되었던 유다인들의 성경이었던 칠십인 역 그리스어본 구약 성경의 토빗기 12,8에 구체적으로 거명되면서 나열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즉, "새 번역 성경" 토빗기 12,8이 아니라, 예수님의 탄생 훨씬 전인 기원전 3-2세기 경에 유다교 학자들에 의하여 그리스어로 번역이 된, 칠십인 역 그리스어본 구약 성경의 토빗기 12,8에 구체적으로 나열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지금 말씀드린 바에 대한 더 자세한 내용은 다음의 주소에 있는 글에 있으니, 또한 읽도록 하십시오:

http://ch.catholic.or.kr/pundang/4/soh/1444.htm [토빗기 12,8] <----- 필독 권고

[이상, 질문 2에 대한 답변 끝]

 

2-3. 다음은 NAB(New American Bible) 토빗기 입문의 첫 번째 단락에서 발췌한 것입니다.

 

출처 1: http://www.vatican.va/archive/ENG0839/__PCA.HTM

출처 2: http://new.usccb.org/bible/scripture.cfm?bk=Tobit&ch=

(출처 1로부터 발췌 시작)

The Book of Tobit, named after its principal hero, combines specifically Jewish piety and morality with oriental folklore in a fascinating story that has enjoyed wide popularity in both Jewish and Christian circles. Prayers, psalms, and words of wisdom, as well as the skillfully constructed story itself, provide valuable insights into the faith and the religious milieu of its unknown author. The book was probably written early in the second century B.C.; it is not known where.

 

그 주된 등장 인물의 이름에 따라 명명된 토빗기는 특별히, 유다인들의 집단(circles)과 그리스도인들의 집단 둘 다에 있어 폭넓은 인기(popularity)를 이미 향유하였던 한 개의 매혹적인 이야기 안에서, 유다인들의(Jewish) 경의(敬意, respect)/존중(尊重, esteem)과 함께 당연한 의무들에 대한 충실(piety)윤리(morality)를 동방의 민간 전승(oriental folklore)과 결합시킵니다(combines).(*) 솜씨 있게 구성된 이야기 자체뿐만이 아니라, 기도들, 시편들, 그리고 지혜의 표현들은 이 책의 알지 못하는 저자의 믿음(faith)과 경신(敬神) 환경(religious milieu) 안쪽으로 가치로운 통찰들을 제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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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번역자 주: (중간 결론 3) 여기서 말하고 있는 유다인들의, 경의(敬意, respect)/존중(尊重, esteem)과 함께 당연한 의무들에, 충실(Jewish piety)이, 사실은, 유다인들로 구성된 민간의, 경의(敬意, respect)/존중(尊重, esteem)과 함께 당연한 의무들에, 충실(popular Jewish piety)이었음을 말하고 있고, 그리고 토빗기 자체가 이러한 충실이라는 기초 위에서 저술되었다는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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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 발췌 및 우리말 번역 끝)

[이상, 질문 1에 대한 답변 끝]

 

게시자 주: 질문 1과 관련된 추가 읽을꺼리들이, 이어지는 항들에 제시되어 있습니다.

 

2-4. 다음은 가톨릭 교회 교리서 제2767항 전문입니다:

 

출처: http://www.vatican.va/archive/ccc_css/archive/catechism/p4s2a1.htm#2767

(발췌 시작)

2767 This indivisible gift of the Lord's words and of the Holy Spirit who gives life to them in the hearts of believers has been received and lived by the Church from the beginning. The first communities prayed the Lord's Prayer three times a day,18 in place of the "Eighteen Benedictions" customary in Jewish piety.

 

2762 주님의 말씀들의 그리고, 그들에게 생명을 믿는 이들의 심장(heart)들 안에 제공하시는, 성령의, 바로 이 비가시적 선물은 처음부터 교회에 의하여 받아들여져 왔고 그리고 실행되어져 왔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의] 첫 공동체들은, 유다인들의(Jewish) 경의(敬意, respect)/존중(尊重, esteem)과 함께 당연한 의무들에 대한 충실(piety) 에 있어 관습이었던 "열여덟 개의 축복(Eighteen Benedictions)들"(*) [로 불리는 기도] 대신에, 하루에 주님의 기도를 세 번씩 기도하였습니다. 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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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 「디다케」 , 8, 3: SC 248, 174(Funk, Patres apostolici 1, 20).

 

(*) 번역자 주:

(1) 유다인들의 회당(Synagogue) 전례를 구성하는 다섯 개의 부분들 중의 한 부분으로서 이 축복들이 있는데, 그 기원은 바빌론으로 유배 이후에 유배지에서 유다교 공동체들 내에서 형성된 메시아의 오심을 간절히 바라는 마음이 담겨 마련된 기도문이며, 바로 이러한 이유 때문에, 이 기도문은, 18개의 축복들로 이루어진, 바빌론 교정본(Babylonian recension)이라고 불린다고 알고 있다. 이에 대하여서는, 예를 들어, 다음의 영어 가톨릭 대사전에 주어진 설명을 읽도록 하라:

http://www.newadvent.org/cathen/14379b.htm [Liturgy 란의 제(2)항] <----- 필독 권고

 

그런데 문제는, 이 기도문의 제12번째 항에, 그리스도인들을 저주하는 기도문 한 개가 추가된 팔레스티나 교정본(Palestine recension)이, 기원후 70년의 예루살렘 대성전의 파괴 이후에 개최되었던, 거의 대부분 팔레스티나 지역의 라삐들만의 모임이었던, 얌니아 회의(기원후 85년경) 직후에 등장하였고, 그리고 그때부터 유다교측 회당들에서, 팔레스티나 교정본(Palestine recension)으로 불리는, 이 기도문을 외우기 시작한 데에 있다. 그리하여 그 결과로서 발생한 일에 대하여서는 한 다음의 글들을 꼭 읽도록 하라:

http://ch.catholic.or.kr/pundang/4/soh/770.htm <----- 필독 권고

 

(2) 여기서 언급되고 있는 유다인들의, 경의(敬意, respect)/존중(尊重, esteem)과 함께 당연한 의무들에, 충실(Jewish piety)이, 사실은, 유다인들로 구성된 민간의, 경의(敬意, respect)/존중(尊重, esteem)과 함께 당연한 의무들에, 충실(popular Jewish piety)이었음을 말하고 있다는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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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 발췌 및 우리말 번역끝)

 

2-5. 다음은 베네딕토 16세 교황님께서 교황으로 선출되시기 전인 교황청 신앙 교리성 장관 시절에 저술하였던, 많이 부족한 죄인인 필자가 소장 중인, "The Spirit of the Liturgy(전례의 정신)" 책의 영어본 제75쪽에서 발췌한 것인데, 또한 다음의 출처에서도 읽을 수 있습니다:

 

출처: http://www.ignatiusinsight.com/features2006/ratzinger_altareast_jan06.asp

(발췌 시작)

Part Two

 

The Altar and the Direction of the Liturgical Prayer

제대와 전례 기도문의 방향

 

The re-shaping so far described, of the Jewish synagogue for the purpose of Christian worship, clearly shows – as we have already said – how, even in architecture, there is both continuity and newness in the relationship of the Old Testament to the New. As a consequence, expression in space had to be given to the properly Christian act of worship, the celebration of the Eucharist, together with the ministry of the Word, which is ordered towards that celebration. Plainly, further developments became not only possible but necessary. A place set aside for Baptism had to be found. The Sacrament of Penance went through a long process of development, which resulted in changes to the form of the church building. Popular piety in its many different forms inevitably found expression in the place dedicated to divine worship.

 

지금까시 서술하였던, 그리스도인들의 예배의 목적을 위하여 유다인들의 회당(Jewish synagogue)의 재-형성(re-shaping)는, 우리가 이미 말하였듯이, 어떻게, 심지어 건축 양식에 있어서도, 구약 성경과 신약 성경의 관계 안에서 연속성과 새로움이 있는지를 분명하게 보여줍니다. 한 결과로서, 공간 안에 있는(in space) 표현(expression)이, 예배의, 고유하게 그리스도인들의, 행위인 성찬 경축(the celebration of the Eucharist)에, 바로 이 경축을 향하도록 명하여져 있는(is ordered) 말씀 사역(the ministry of the Word)과 함께, 제시되어져야 하였습니다. 명백하게, 그 이상으로 발전들이 가능하게 되었을뿐만이 아니라 필요하게 되었습니다. 세례를 위하여 별도로 마련된 한 장소가 찾아져야만 하였습니다. 화해의 성사(즉, 고해 성사)는 발전에 있어서의 어떤 긴 과정을 겪었는데, 이것은 교회 건물의 형태에 변화들로 귀착하였습니다(resulted in). 많은 서로 다른 형태들로 있는 민간의, 경의(敬意)와 함께 당연한 의무들에, 충실(popular piety)신성한 예배(divine worship) 쪽으로 봉납된(dedicated) 장소에서 불가피하게(inevitably) 표현을 발견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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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번역자 주: (중간 결론 4) 
(1) 우선적으로, 여기서 말하는 많은 서로 다른 형태들로 있는 민간의, 경의(敬意, respect)/존중(尊重, esteem)과 함께 당연한 의무들에, 충실(popular piety) 각각은 결국에 다음의 세 개의 범주들 중의 하나로 구분될 것이다: (i) 자선 제공(almsgiving), (ii) 기도(prayer), 그리고 (iii) 단식(fasting).

 

(2) 한편으로, 예를 들어, 바로 위의 제2-4항에서 이미 고찰하였듯이, 초기의 그리스도인들이 유다교 회당들에서 쫓겨나 별도의 예배를 드리기 시작하였을 1세기말 무렵에 있어, 여기서 말하는 민간의, 경의(敬意, respect)/존중(尊重, esteem)과 함께 당연한 의무들에, 충실(popular piety)은, 유다인들로 구성된 민간의, 경의(敬意, respect)/존중(尊重, esteem)과 함께 당연한 의무들에, 충실(popular Jewish piety)을 말하는 것이 분명하다는 생각이다.

 

(3) 마찬가지로, 유다교측과 함께 예배를 드리지 못하게 된 1세기 말 이후의 어느 시점에서부터, 그리스도인들로 구성된 민간의, 경의(敬意, respect)/존중(尊重, esteem)과 함께 당연한 의무들에, 충실(popular Christian piety)들 중의 일부가 그리스도교 전례에 받아들여진 경우들도 있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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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 발췌 및 우리말 번역 끝) 

 

2-6. 다음은, 성 요한 바오로 2세 교황님1996년 9월 4일자 교리 교육용 일반 알현(General Audience) 강론 말씀의 제1항 전문입니다:

 

출처 1: http://www.miraclerosarymission.org/960911.htm

출처 2: https://www.ewtn.com/library/papaldoc/jp2bvm32.htm

출처 3: http://www.ewtn.com/library/PAPALDOC/JP960904.HTM

(발췌 시작)

MARY OFFERS SUBLIME MODEL OF SERVICE

마리아는 봉사의 고귀한 모범을 제공합니다


Pope John Paul II 

 

1. Mary's words at the Annunciation "I am the handmaid of the Lord; let it be to me according to your word" (Lk 1:38), indicate an attitude characteristic of Jewish piety. At the beginning of the Old Covenant, Moses, in response to the Lord's call, proclaims himself his servant (cf. Ex 4:10; 14:31). With the coming of the New Covenant, Mary also responds to God with an act of free submission and conscious abandonment to his will, showing her complete availability to be the "handmaid of the Lord".

 

1. 수태 고지(Annunciation)에서 마리아다음과 같은 표현은 유다인들의, 경의(敬意, respect)/존중(尊重, esteem)과 함께 당연한 의무들에, 충실(Jewish piety)의 특징적인 한 개의 태도를 가리킵니다: "저는 주님의 종입니다. 말씀하신 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 (루카 복음서 1,38).

 

In the Old Testament, the qualification "servant" of God links all those who are called to exercise a mission for the sake of the Chosen People: Abraham (Gn 26:24), Isaac (Gn 24:14) Jacob (Ex 32:13; Ez 37:25), Joshua (Jos 24:29), David (2 Sam 7, 8, etc.). Prophets and priests, who have been entrusted with the task of forming the people in the faithful service of the Lord, are also servants. The Book of the Prophet Isaiah exalts, in the docility of the "suffering Servant", a model of fidelity to God in the hope of redemption for the sins of the many (cf. Is 42:53). Some women also offer examples of fidelity, such as Queen Esther who, before interceding for the salvation of the Jews, addresses a prayer to God, calling herself many times "your servant" (Est 4:17).

(이상, 발췌 및 일부 문장들에 대한 우리말 번역 끝)

 

2-7. 다음은, 영어 가톨릭 대사전에 주어진 "Scribes(율법 학자들)" 에 대한 설명 전문입니다. 예수님의 공생활 당시에 이미 형성되어 있었던 유다인들의, 경의(敬意, respect)/존중(尊重, esteem)과 함께 당연한 의무들에, 충실(Jewish piety)에 대한 배경을 일정 수준 이상 상세하게 서술하고 있기에, 그리고 또한, 소위 말하는, 사두가이파, 바리사이파, 에세네파, 그리고 열혈당의 형성 과정을 더 깊이있게 이해하는 데에도 도움을 줄 것이기에, 전문을 읽는 것이 상당히 유익할 것이라 생각합니다:

 

출처: http://www.newadvent.org/cathen/13634a.htm

(발췌 시작)

Scribes

율법 학자들

 

(Greek grammateis, nomodidaschaloi, teachers of the law).

(그리스어 grammateis, nomodidaschaloi, 법을 가르치는 자들) 

 

In the New-Testament period the scribes were the professional interpreters of the Law in the Jewish synagogues. The origin of the profession dates from the return of the Captivity, and its subsequent growth and importance resulted naturally from the formal and legalistic trend of Jewish piety during the post-Exilic period. The Law was revered as the precise expression of God's will, and by its multifarious prescriptions the daily life of every pious Jew was regulated in all its minute details. Love of the Law was the essence of piety, and the just or righteous were they who walked "in all the commandments and justifications of the Lord without blame" (Luke, I, 6). But as these commandments and justifications were exceedingly numerous, complicated, and often obscure, the needs of popular guidance called into existence a class of men whose special occupation was to study and expound the Law. The earliest mention of the title occurs in I Esdras, vii, 6, where Esdras is described as a "ready scribe in the law of Moses". What this meant is set forth in verse 10: "For Esdras had prepared his heart to teach in Israel the commandments and judgment". This description doubtless applies to the subsequent scribes of that period. They were pious men who through love of the Divine law occupied themselves in collecting, editing, and studying the sacred literature of the Hebrews and in explaining it to the people. The earlier scribes, like Esdras himself, belonged to the class of priests and Levites (Ezra 7:12; Nehemiah 8:7, 13; 2 Chronicles 34:13) who were originally the official interpreters of the Law, but unlike other priestly duties, the study and exposition of Holy Writ could be engaged in by pious laymen, and thus little by little the scribal profession became differentiated from the priesthood, while the latter remained chiefly occupied with the ever-growing sacrificial and ritualistic functions.

 

신약 성경 기간(period)에 있어 율법 학자(the scribes)들은 유다인들의 회당들에서 율법(the Law)에 대한 전문적인 해석자들이었습니다. 이 전문직의 기원은 [바빌론] 유배로부터 귀환으로부터 시작되며(dates from), 그리고 이 직의 수반(隨伴)하는(subsequent) 성장과 중요성은 유배 이후 시기 동안 유다인들의, 경의(敬意, respect)/존중(尊重, esteem)과 함께 당연한 의무들에, 충실(Jewish piety)에 대한 형식적(formal) 및 법리적(legalistic) 경향으로부터 자연적으로(naturally) 유래하였습니다(resulted). 율법은 하느님의 의지(God's will)의 정확한 표현으로서 존경받게 되었으며(was revered), 그리하여 그것의 가지각색의 규정(prescriptions)들에 의하여 모든, 경의(敬意, respect)/존중(尊重, esteem)과 당연한 의무들에 충실한, 유다인(pious Jew)의 일상의 삶은 그 세부 사항들 모두에 있어 규제를 받게 되습니다(was regulated). 율법에 대한 사랑(love)이 [유다인들의] 경의(敬意, respect)/존중(尊重, esteem)과 함께 당연한 의무들에 충실([Jewish] piety)의 본질(essence)이었으며, 그리하여 정의로운 혹은 의로운 자(the just or righteous)들은 "주님의 모든 계명(commandments)들과 정당화의 사유(justifications)들에 따라 흠 없이 살아가는 사람들이었습니다" (루카 복음서 1,6). 그러나 이들 계명들과 정당화의 사유들이 대단히 다수였고, 복잡하였으며, 그리고 자주 불명료하였기 때문에, 민간에 대한 안내(popular guidance)의 필요(needs)들은, 그들의 특별한 종사(從事)(occupation)가 율법을 연구하고 그리고 상세하게 설명하는 것이었던, 사람들로 이루어진 한 개의 계층(a class)을 생기게 하였습니다(call into existence). 이 칭호(title)에 대한 가장 초기의 언급은 1에즈라 7,6 [즉, 에즈라서 7,6]에 나타나는데, 거기서 에즈라(Esdras)는 "모세의 율법에 능통한(ready in) 학자" 한 명으로서 기술되어 있습니다(is described as). 바로 이 말이 의미하였던 바는 [이어지는] 제10절에서 다음과 같이 설명되고 있습니다: "에즈라는, 주님의 법의 연구 및 실천에 그리고 이스라엘에서 규정들과 법들을을 가르치는 행위에 자신의 심장(heart)을 이미 배치하였습니다(had set his heart on)" (에즈라 7,10). 이러한 기술(description)은 바로 이 시기의 수반(隨伴)하는 율법 학자들에게 의심할 여지 없이 적용됩니다. 그들은, 하느님의 법에 대한 사랑(love)을 통하여 히브리인들의 성스러운 문헌을 수집하고, 편집하며, 그리고 연구하는 데에, 그리고 그것을 이 백성에게 설명하는 데에 종사하였던, 경의(敬意, respect)/존중(尊重, esteem)과 함께 당연한 의무들에 충실한(pious) 사람(men)들이었습니다. 더 초기의 율법 학자들은, 에즈라 그자처럼, 애초에 율법에 대한 공인된 해석자(official interpreters)들이었던, 사제(priests)들과 레인의 후손(Levites)들의 계층에 속하였으나(에즈라 7,12; 느헤미야 8,7; 13,2; 2역대 34,13), 그러나 다른, 사제의, 임무들과 달리, 성경 본문에 대한 연구과 주해(exposition)는 경의(敬意, respect)/존중(尊重, esteem)과 함께 당연한 의무들에 충실한(pious) 평신도(laymen)에 의하여 착수(着手)하게 될(engaged in) 수 있었으며(could), 그리하여 그 결과 융법 학자 전문직은 사제직(the priesthood)으로부터 조금씩 구별짓게 되었고, 동시에(while) 후자는 성장하기만 하는(ever-growing) 희생 제사의(sacrificial) 및 제식(祭式)의(ritualistic) 기능들에 주로 전념하게 되는 상태로 남았습니다. 

 

When under Antiochus Epiphanes Hellenism threatened to overthrow the Jewish religion, the scribes joined the party of the zealous Assideans (1 Maccabees 7:12, 13), who were ready to die for their faith (see account of the martyrdom of the scribe Eleazar, 2 Maccabees 6:18-31), while not a few aristocratic members of the priesthood favoured the Hellenistic tendencies. This resulted in a certain opposition between the two classes; the scribes, through their devotion to the Law, acquired great influence with the people while the priesthood lost much of its prestige. As a natural consequence, the scribes as a class became narrow, haughty and exclusive. Under the Asmonean rule they became the leaders of the new party of the Pharisees, and it is with the latter that we find them associated in the New-Testament records. They never wielded any political power, but they were admitted to the Sanhedrin on a par with the chief priests and elders and thus enjoyed official recognition. With the increasing formalism, which their influence doubtless helped to develop, the character of the scribes and their activities underwent a marked change. They neglected the deeper and more spiritual aspects of the Law, and from being men of sacred letters they became mainly jurists who devoted most of their attention to mere quibbles and subtle casuistry. Together with the Pharisees they are represented in the Gospels as being very ambitious of honour (Matthew 23:2-7, Mark 12:38-40; Luke 11:43, 45, 46; 20:46), and as making void the weightier precepts of the Law by their perverse interpretations by means of which they had gradually laid a most heavy burden upon the people. They are also rebuked by Christ because of the undue importance ascribed by them to the "traditions of the elders".

 

안티오코스 에피파네스(Antiochus Epiphanes) 아래에서(1마카베오 1,10) 헬레니즘/그리스 문화(Hellenism)가 유다인들의 경신/종교(Jewish religion)을 전복하고자 위협하였을 때에, 율법 학자들은, 자신들의 믿음(faith)을 위하여 죽을 준비가 되어 있었던 (사제 엘아자르(Eleazar)의 순교에 대한 이야기인 2마카베오 6,18-31를 보라), 열정적인(zealous) 하시드인(Assideans)들의 당(party)에 가입하였나, 이와는 달리(while) 사제 집단(the priesthood)의 적지 않은 귀족적 구성원들은 그리스 문화를 따르는(Hellenistic) 경향들을 선호하였습니다. 이것은 이 두 개의 계층들 사이에 어떤 확실한 반대로 귀착하였으며, 그리하여, 율법 학자들은, 율법에 대한 그들의 헌신(devotion)을 통하여, 이 백성과 함께 있는 커다란 영향력을 획득하였으나, 이와는 달리(while) 사제 집단은 그 신망(prestige)의 많은 부분을 잃었습니다. 한 개의 자연적인 결과로서, 율법 학자들은 한 개의 계층으로서 편협하게(narrow) 되었고, 오만하게(haughty) 되었으며 그리고 배타적이(exclusive) 되었습니다. 하스몬 왕조의 통치(Asmonean rule) 아래에서 그들은 바리사이들로 이루어진 새로운 당(party)의 지도자들이 되었고, 그리하여 우리가 신약 성경 기록들에 관련된 그들을 발견하는 것은 바로 이 바리사이들과 함께 입니다. 그들은 어떤 정치적 힘을 전혀 행사하지 못하였으나, 그러나 그들은 수석 사제들 및 원로들과 동등하게 최고 의회(the Sanhedrin)에 허락되었으며 그리하여 그 결과 공인된 인정(official recognition)을 향유하였습니다. 율법 학자들과 그들의 활동들의 특성은, 그들의 영향력이 발전하도록 의심할 여지 없이 도왔을 증가하는 형식주의(formalism)와 함께, 어떤 현격한 변화를 겪었습니다. 그들은 율법의 더 깊은 그리고 더 영적인 양상들을 무시하였으며, 그리하여 성스러운 글자(sacred letters)들에 대한 사람들인 것으로부터 그들은 주로, 단지 애배한 말투들과 이해하기 어려운 결의론(決疑論)에 불과한 것들 쪽으로 자신들의 주의의 대부분을 전념하였던, 법학자(jurists)들이 되었습니다. 바리사이들과 함께 그들은, 명예(honour)에 대한 포부를 가진 자들로서(마태오 복음서 23,2-7; 마르코 복음서 12,38-40; 루카 복음서 11,43.45.46; 20,46), 그리고, 그것에 의하여 그들이 이 백성 위에 어떤 가장 무거운 짐을 이미 점차적으로 내려 놓았던, 그들의 뒤틀어진(perverse) 해석들로써 율법의 더 무거운 규범(precepts)들을 무효(void)로 만드는 자들로서, 복음서들에서 묘사됩니다. 그들은 또한, "조상들의 전통들" 쪽으로 그들에 의하여 돌려졌던 부당한(undue) 중요성 때문에, 그리스도에 의하여 비난받게 됩니다.

  

Their teaching on this point was that Moses himself had delivered to Israel an oral as well as a written Law. This oral Law, according to their theory, had come down in an authentic form through the Prophets to Esdras, the first and greatest of the scribes, and rested practically on the same Divine authority as the written Word. Through this conception of an oral law to which all their traditional customs and interpretations, however recent, were referred, the scribes were led into many departures from the spirit of the written Law (Mark 7:13), and even with regard to the latter their teaching was characterized by a slavish literalism. The ever-accumulating mass of legal traditions and legal decisions was designated by the name Halaka (the way). Together with the written precepts it constituted the perfect rule of conduct which every Jew should follow. But while the scribes devoted their chief attention to the Law, both written and oral, they also elaborated in fantastic and arbitrary fashion, teachings of an edifying character from the historical and didactic contents of the Old Testament. These homiletic teachings were called Hagada, and embraced doctrinal and practical admonitions mingled with illustrative parables and legends.

 

이 점에 대한 그들의 가르침은 모세(Moses) 몸소 한 개의 쓰여진 율법(a written Law) 뿐만이 아니라 한 개의 구전(an oral)을 이스라엘에게 이미 전달하였다는 것이었습니다. 바로 이 구전 율법은, 그들의 학설(theory)에 따르면, 율법 학자들 중의 첫 번째이고 그리고 가장 위대한 에즈라(Esdras)에게 예언자들을 통하여 한 개의 인증(認證)된(authentic) 형식으로 이미 내려 왔고, 그리고 쓰여진 말씀처럼 동일한 신성한 권위(Divine authority)에 실제적으로 의지하였습니다. 그쪽으로, 아무리 최근의 것이라고 하더라도, 그들의 전통적 관습들 및 해석들 모두가 돌려졌던, 한 개의 구전의 법(an oral law)에 대한 바로 이러한 착상(conception)을 통하여, 율법 학자들은 쓰여진 율법의 정신(spirit)으로부터 많은 이탈들 안쪽으로 인도되었고(마르코 복음서 7,13), 그리고 심지어 쓰여진 율법에 관하여서도 그들의 가르침은 어떤 맹목적으로 모방하는 직해(直解)(a slavish literalism)에 의하여 특징지어졌습니다. 법률적(legal) 전통들과 법률적 결정들의 축적되기만 하는(ever-accumulating) 큰 덩어리는 하라카[Halaka, 길(the way)]라는 이름에 의하여 나타내어졌습니다. 쓰여진 규범(precepts)들과 함께 이것은 모든 유다인들이 마땅히(should) 따라야 하는 처신에 대한 완미한 규칙(perfect rule)을 구성하였습니다. 그러나 쓰여진 및 구전 둘 다의, 율법 쪽으로 율법 학자들이 자신들의 주된 주의를 전념함과 동시에(while), 그들은 또한, 구약 성경의 역사적인 그리고 가르치고자 의도하는 내용들로부터 어떤 교훈적인 특징의 가르침들을, 환상적이고 그리고 임의적인 방식으로 애써 만들었습니다. 이들 설교적인(homiletic) 가르침들은 하가다(Hagada) 라고 불렸으며, 그리고 예증적인 비유(parables)들과 전설(legends)들과 섞여진 교리적 및 실천적 훈계(admonitions)들을 포옹하였습니다.

(이상, 발췌 및 우리말 번역 끝)

 

3.

칠문 3: "popular Jewish piety" 혹은 "Jewish piety" 와 "popular Christian piety" 혹은 "Christian popular piety"의 차이점은 무엇인지요?

 

(질문 3에 대한 답변 시작) 

3-1. 다음은, 질문 3에 대한 답변을 마련하는 과정에서 알게된 바입니다만, "그리스인들의 piety" 와 "로마인들의 piety" 에 대하여 언급하고 있는, 미국 텍사스 대학교 인문학 석좌 교수이신, 승계호(K.H. Seung, 1930- ) 교수님의 "Plato Rediscovered: Human Value and Social Order" 라는 제목의 저서의 각주 24) 전문입니다. 이 각주를 읽으신 분들 중에는, 질문 3 혹은 등가의 질문이 유의미할 수도 있음을 알아차릴 수 있을 것입니다: 

 

출처: 여기를 클릭하십시오 [각주 24), 제33쪽]

(발췌 시작)
24) The broad scope of Roman piety was much more clearly stated than that of Greek piety. The Roman concept of piety begins with a proper attitude of reverence toward the gods and ends with respect for divine law concerning actions toward the state and other human beings. For a fuller account of Roman pietas, see Timothy Moore, Artistry and Ideology: Livy's Vocabulary of Virtue (Frankurt and Main: Athenaum, 1989), 56-61. 

 

24) 로마인들의, 경의(敬意, respect)/존중(尊重, esteem)과 함께 당연한 의무들에, 충실(Roman piety)의 폭넓은 범위는 그리스인들의, 경의(敬意, respect)/존중(尊重, esteem)과 함께 당연한 의무들에, 충실(Greek piety)의 범위보다 더 분명하게 서술되었습니다. piety에 대한 로마인들의 개념은 잡신(gods)을 향하는 경의(敬意, reverence)의 어떤 고유한 태도와 함께 시작하고 그리고 국가(state) 및 다른 인간들을 향하는 행동(action)들에 관한 신성한 법(divine law)에 대한 존중(respect)과 함께 끝납니다.(*) 로마인들의 pietas 에 대한 더 풍부한 설명을 위하여, Timothy Moore의 저술인 Artistry and Ideology: Livy's Vocabulary of Virtue (Frankurt and Main: Athenaum, 1989), 56-61 을 보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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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번역자 주: (중간 결론 5)

(1) 고대 로마인들이 살았던 시기를 우리가 살고 있지 않기에, 여기서 말하는 "잡신(gods)" 들이 사실은 존재하지 않음을 이제 우리 모두가 잘 알고 있는 점을 나름대로 반영하여, "piety" 에 대한 바로 이 로마인들의 개념을, 많이 부족한 죄인인 필자가 "경의(敬意, respect)/존중(尊重, esteem)과 함께 당연한 의무들에 대한 충실" 이라고, 회복/복원하였던 것입니다.

 

필자의 생각에, 여기서 설명되고 있듯이, "piety" 라는 단어가 나타내는 개념 자체가, 오로지 "나(I)" 와 "너(you)" 사이의 어떤, 2자 간의, 관계(a binary relation)만이 아니라, 2자 간의 관계를 당연히 포함하므로 근본적으로 더 추상적이고 포괄적인, "나(I)" 와 "너(you)" 그리고 "또다른 너(another you)" 사이의 어떤, 3자 간의, 관계(a trinary/ternary relation 혹은 a trinitarian relation)를 나타내기 때문에, 그리고 많이 부족한 죄인인 필자가 중국 문화권에서는 이 3자 간의 관계를 구체적으로 나타내는 적절한 한자 단어를 찾을 수 없었던 이유 때문에, 부득불, "piety" 라는 단어가 나타내는 원 개념을 "경의(敬意, respect)/존중(尊重, esteem)과 함께 당연한 의무들에 대한 충실" 이라고, 말하자면, "한 개의 서술적 번역(a descriptive translation)"을 하였던 것입니다. 

 

예를 들어, 유학(儒學)에서 말하는 "예(禮, 사람이 마땅히 지겨야 할 도리[표준국어대사전])" 는, 오로지 피조물들인 인간들 사이의 2자 간의 관계(binary relations)들과 3자 간의 관계(ternary/trinitarian relations)들 모두를 포함하는, 그러나 대단히 추상적이고 포괄적인, 다자 간의 관계(multi-nary relations)들에 대한 통칭(統稱)의 한자 단어이므로, 한 명의 초월자가 그것의 한 개의 말단(a termination)일 수도 있는, 어떤, 3자 간의, 관계(a trinary relation 혹은 a ternary relation)를 나타내는, 따라서 "한 개의 삼각형(a triangle)"을 연상하게 되는"piety" 에 논리적으로 등가로 대응하는 차용(借用) 번역 용어로 선택하여 사용하는 것이 상당히 부족하다는 생각입니다.
 

(2) 그리하여, 한 말단(a termination)이 초월자이신 하느님으로 설정될 수도 있는, 3자들 사이의 관계(a trinary/ternary/trinitarian relation)를 서술함에 있어, 바로 이 문장은, 예를 들어, "유다인들/그리스도인들의, 경의(敬意, respect)/존중(尊重, esteem)과 함께 당연한 의무들에 대한 충실(Jewish/Christian piety)"이라는 한 개의 개념/윤리덕을, 다음과 같이, 어느 정도 이상의 변별력을 지닌 문장으로, 서술할 수 있게 해 줌에 주목하십시오:

 

"유다인들/그리스도인들의, 경의(敬意, respect)/존중(尊重, esteem)과 함께 당연한 의무들에, 충실(Jewish/Christian piety)"은, 하느님(God) 향하는 경의(敬意, reverence)의 어떤 고유한 태도와 함께 시작하고 그리고 국가(state) 및 다른 인간들을 향하는 행동(action)들에 관한 신성한 법(divine law)에 대한 존중(respect)과 함께 끝나는 한 개의 개념/윤리덕이다.(#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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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번역자 주: 따라서, 예를 들어, 미사 중에 바치는 전구(求, intercession)의 기도"보편 지향 기도"바로 이 윤리덕 "piety" 의 한 표출(an expression)임을 알 수 있다. 지금 말씀드린 바와 관련하여, 전구(求, intercession)간구(懇求, invocation)의 차이점에 대한 글은 다음에 있으니 참고하라:

http://ch.catholic.or.kr/pundang/4/soh/1620.htm

 

[내용 추가 일자: 2018년 12월 26일]

게시자 주 3-3: 1583년과 그 이후에 중국 본토에 선교사로 퍄견된 예수회 소속의 신부님들이 "intercession"에 대응하는 번역 용어로서 사용한 용어는 "求"이지, "求"아니었음이 본글에서 실증적으로(positively) 입증/고증되어, 오늘 날짜로, 다음의 주소에 접속하면 읽을 수 있는 글의 제목과 본문 중에서 괄호 안에 병기하면서 잘못 표기된 "傳求"를 모두 "轉求"로 교체합니다:

http://ch.catholic.or.kr/pundang/4/soh/1970.htm <----- 필독 권고

[제목: 기도(祈禱), 기구(祈求), 전기(轉祈), 전구(轉求), 간구(懇求), 간기(懇祈) 등의 번역 용어들의 출처와 기원에 대하여; 게시일자: 2018년 11월 24일]

[이상, 2018년 12월 26일자 내용 추가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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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 발췌 및 우리말 번역 끝).

 

3-2. 그리고 본글의 제1항제2항에서 유다인들의, 경의(敬意, respect)/존중(尊重, esteem)과 함께 당연한 의무들에 대한 충실(Jewish piety) 혹은  민간의, 유다인들의, 경의(敬意, respect)/존중(尊重, esteem)과 함께 당연한 의무들에 대한 충실(popular Jewish piety)대하여 함께 고찰하였는데, 그 일부는, 예를 들어, 마태오 복음서 6,1-16루카 복음서 1,38 등의 신약 성경의 본문에서도 언급되고 있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다른 한편으로,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산상 설교에서, 쓰여진 및 구전 둘 다의, 율법에 대한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의 그릇된 해석들을 지적하신 후에, 또한 올바른 해석들을 당신의 제자들에게 가르치셨음을 우리는 잘 알고 있는데, 예수님의 바로 이러한 가르침들 모두는, 하느님에 대한 사랑(love)이 그 본질이 아니고 율법에 대한 사랑(love)이 그 본질(essence)이었던, 유다인들의, 경의(敬意, respect)/존중(尊重, esteem)과 함께 당연한 의무들에 대한 충실(Jewish piety) 혹은  민간의, 유다인들의, 경의(敬意, respect)/존중(尊重, esteem)과 함께 당연한 의무들에 대한 충실(popular Jewish piety)사전 전제로 하고 있었음에 주목하십시오.

 

3-3. (중간 결론 6) 다른 한편으로, 한 개의 3자간의 관계(a trinary/ternary/trinitarian relation)를 말하는 바로 이 유다인들의, 경의(敬意, respect)/존중(尊重, esteem)과 함께 당연한 의무들에 대한 충실(Jewish piety)에서,

 

(3-3-i) 바로 이 3자 관계의 한 말단(a termination)인 초월자이신 한 분이신 하느님께서는, 이 동일한 3자 관계의 다른 두 말단들인 피조물인 "나(I)" 와 "너(you)" 둘 다로부터, 여전히 대단히 멀리 떨어진 그리고 대단히 높은 데에 계시는 초월자이신, 거룩한 분(Holy One)이심에,

 

그리고 

 

(3-3-ii) 하느님께서 베푸시는 그리하여 초자연적 선물(supernatural gift)인, 신약 성경 본문에서 대단히 많이 언급되고 있는, "[하느님의] 은총(grace)" 이라는 단어가 구약 성경 본문에서 거의 사용되지 않았음(*1), 그리고

 

(3-3-iii)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강생하신 하느님의 아드님(즉, 성부 하느님의 친자)이시기에, 성부 하느님과 예수 그리스도의 사이에는 한처음부터 서로 화답해 온, 소위 말하는, (i)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성부 하느님의 "아버지로서의 당연한 의무들에 대한 충실, 즉, 친애(親愛)(fatherly piety)" 가 이미 존재하고 있고 그리고 (ii) 성부 하느님에 대한 성자 하느님의 "filial piety[자식으로서의 경의(敬意, respect)/존중(尊重, esteem)과 함께 당연한 의무들에 대한 충실, 즉, 효경(孝敬)]"이라는 관계(*2)가 이미 존재하고 있음에, 

 

주목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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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게시자 주: 이것은 다음의 주소에 있는 NAB(New American Bible) 용어 색인으로부터 직접 확인할 수 있다:
http://www.vatican.va/archive/ENG0839/IK.HTM

 

(*2) 게시자 주: 여기서 언급되고 있는 "filial piety[자식으로서의 경의(敬意, respect)/존중(尊重, esteem)과 함께 당연한 의무들에 대한 충실, 즉, 효경(孝敬)]" 은, 성부 하느님의 친자이신 강생하신, 다윗의 자손인 예수 그리스도에게 그 충만한 상태로(in their fullness) 속하는(belong to) 성령칠은들(가톨릭 교회 교리서 제1831항; 칠십인역 그리스어본 이사야 11,2) 중의 하나성령의 한 개의 초자연적 선물(a supernatural gift of the Holy Spirit) 바로 그것을 말함에 반드시 주목하라.

 

바로 이 점에 우리가 주목하여야 하는 이유는, 그리스도교 세례를 받는 자들은, 오로지 예수 그리스도의 인성과 하나 됨(communion, 통공)을 통하여, 처음으로, 바로 이 "filial piety[자식으로서의 경의(敬意, respect)/존중(尊重, esteem)과 함께 당연한 의무들에 대한 충실, 즉, 효경(孝敬)]"을, 다윗의 자손인 예수 그리스도에게 그 충만한 상태로(in their fullness) 속하는(belong to) "성령칠은"의 나머지 은총들과 함께,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직접 받게 되어, 그리하여 그 결과, 성부 하느님의 입얃된(adopted) 자녀들로 다시 태어나게 됨으로써, 성부 하느님을, 성부 하느님의 친자이신 예수 그리스도처럼, 아빠(아버지)! 라고 부르게 되는, 대단히 친밀한 2자 사이의 관계(binary relation)가, 한 말단(a termination)이 한 분이신 하느님으로 설정된, 3자들 사이의 관계(a trinary/ternary/trinitarian relation)의 일부로서, 한 분이신 하느님과 그리스도교 세례를 받는 당사자 사이에비로소 처음으로 형성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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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4.

3-4-1. 위의 (3-3-i)은 하느님의 아드님, 즉, 성자(the Son of God)의 강생(降生)/육화(肉化)(Incarnation)에 의하여, 걍싱하신 성자 하느님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들 사이로 오심으로써, 우리가 또한 거룩하게 될 수 있도록, 하느니의 주도로 인류의 역사 안에서 탁월하게 발생하였고, 그리고 위의 (3-3-ii)(3-3-iii)은 바로 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수난과 죽음 그리고 부활을 통한 구속(救贖)/속량(贖良)(Redemption)에 의하여, 그리하여 우리가 또한 거룩하게 될 수 있도록, 하느님의 주도로 인류의 역사 안에서 탁월하게 발생하였음에 반드시 주목하십시오.

 

3-5.

3-5-1. (중간 결론 7) 바로 위의 제3-3항제3-4항에서 잠깐 고찰한 바는, 

 

(i) 다음의 주소에 있는 글에서 고찰한

http://ch.catholic.or.kr/pundang/4/soh/1624_eusebeia_JP_II.htm

 

세대 교체 때문에 사실상 지금도 여전히 반복되거나 혹은 지속되고 있는 유사(有史) 초기와 그 이전의 인류의 다양한 다신교 문화들 안에서 자연법(the natural law)으로서 표출되는 한 개의 자연적 윤리덕(a natual and moral virtue)인 경의(敬意, respect)/존중(尊重, esteem)과 함께 당연한 의무들에 대한 충실(piety)(A) 안에서 형성되었던, 

 

(ii) 이 글의 제1항 처음부터 제3-3항까지 고찰한, [민간의] 유다인들의, 경의(敬意, respect)/존중(尊重, esteem)과 함께 당연한 의무들에 대한 충실([popular] Jewish piety)(B)에,

 

(iii) 과연 어떠한 내용들이 추가적으로 요청 되어 그리스도인들의, 경의(敬意, respect)/존중(尊重, esteem)과 함께 당연한 의무들에 대한 충실(Christian piety) [여기에는, 그리스도인들의 경신()(Christian Religion)(E)이 포함됨](C)최초로 형성되게 되었고,

 

(iv) 그리하여 그 결과, 민간의, 그리스도인들의, 경의(敬意, respect)/존중(尊重, esteem)과 함께 당연한 의무들에 대한 충실(popular Christian piety)(D)이 형성될 수 있게 되었는지에 대한,

 

(A), (B), (C)[여기에는 (E)가 포함됨], 그런 다음에 (D)의 형성이라는 발생 연대 순서에 따른, 고찰이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주목할 점은, 그 안에 그리스도교 경신(Christian Religion)(E)가 포함되는, 그리스도인들의, 경의(敬意, respect)/존중(尊重, esteem)과 함께 당연한 의무들에 대한 충실(Christian piety)(C)이, 인류의 구원이라는 최종 끝(the final end)를 위하여, 초월자 하느님이신, 강생(降生)/욱화(肉化)(Incarnation)하신 성자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救贖)/속량(贖良)(Redemption)에 의하여, 이 세상에 직접 그리고 최초로 주도되고, 개시되고, 그리고 또한 직접 마무리 지어졌다는 점입니다.

[이상, 질문 3에 대한 답변 끝]

 

3-5-2. (중간 결론 8) 그리고 지금 말씀드린 바를 피조물인 인간들의 논리 상의 상호 관계 안에서 고찰하면 다음과 같을 것입니다:

 

자연법(the natural law)으로서 표출되는 한 개의 자연적 윤리덕(a natual and moral virtue)인 경의(敬意, respect)/존중(尊重, esteem)과 함께 당연한 의무들에 대한 충실(piety)(A) 안에서만 오로지 [민간의], 유다인들의, 경의(敬意, respect)/존중(尊重, esteem)과 함께 당연한 의무들에 대한 충실([popular] Jewish piety)(B)이 가능할 수 있고, 그리고 

 

[민간의] 유다인들의, 경의(敬意, respect)/존중(尊重, esteem)과 함께 당연한 의무들에 대한 충실([popular] Jewish piety)(B) 안에서만 오로지 민간의, 그리스도인들의, 경의(敬意, respect)/존중(尊重, esteem)과 함께 당연한 의무들에 대한 충실(popular Christian piety)(D)이 가능할 수 있고, 그리고 

 

민간의, 그리스도인들의, 경의(敬意, respect)/존중(尊重, esteem)과 함께 당연한 의무들에 대한 충실(popular Christian piety)(D) 안에서만 오로지 그리스도인들의, 경의(敬意, respect)/존중(尊重, esteem)과 함께 당연한 의무들에 대한 충실(Christian piety)(C)이 가능할 수 있고, 그리고

 

그리스도인들의, 경의(敬意, respect)/존중(尊重, esteem)과 함께 당연한 의무들에 대한 충실(Christian piety)(C) 안에서만 오로지 그리스도인들의 경신()(Christian Religion)(E)이 가능할 수 있다.

 

즉, 피조물들인 인간들의 경우에(E) => (C) => (D) => (B) => (A) 의 논리 관계입니다.

 

즉, 피조물들인 인간들의 경우에(A) 안에 있는 (B) 안에 있는 (D) 안에 있는 (C) 안에, (E) 가 존재하는, 논리적 포함 관계입니다.

 

3-6.

3-6-1. (중간 결론 9) 그리고 바로 위의 제3-5항에서 말씀드린 바를 더 요약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자연법(the natural law)으로서 표출되는 한 개의 자연적 윤리덕(a natual and moral virtue)인 경의(敬意, respect)/존중(尊重, esteem)과 함께 당연한 의무들에 대한 충실(piety)(A) 안에서만 오로지 민간의, 그리스도들의, 경의(敬意, respect)/존중(尊重, esteem)과 함께 당연한 의무들에 대한 충실(popular Christian piety)(D)이 가능할 수 있고, 그리고 

 

민간의, 그리스도인들의, 경의(敬意, respect)/존중(尊重, esteem)과 함께 당연한 의무들에 대한 충실(popular Christian piety)(D) 안에서만 오로지 그리스도인들의, 경의(敬意, respect)/존중(尊重, esteem)과 함께 당연한 의무들에 대한 충실(Christian piety)(C)이 가능할 수 있고, 그리고

 

그리스도인들의, 경의(敬意, respect)/존중(尊重, esteem)과 함께 당연한 의무들에 대한 충실(Christian piety)(C) 안에서만 오로지 그리스도인들의 경신()(Christian Religion)(E)이 가능할 수 있다.

 

즉, 피조물들인 인간들의 경우에(E) => (C) => (D) => (A) 의 논리 관계입니다.

 

3-6-2. (중간 결론 10) 즉, 피조물들인 인간들의 경우에, 다음과 같은 논리적 포함 관계가 성립합니다:

 

(A) 자연법(the natural law)으로서 표출되는 한 개의 자연적 윤리덕(a natual and moral virtue)인 경의(敬意, respect)/존중(尊重, esteem)과 함께 당연한 의무들에 대한 충실(piety) 안에 있는,

 

(D) 민간의, [그리스도들의,] 경의(敬意, respect)/존중(尊重, esteem)과 함께 당연한 의무들에 대한 충실(popular [Christian] piety) 안에 있는,

 

(C) 그리스도인들의, 경의(敬意, respect)/존중(尊重, esteem)과 함께 당연한 의무들에 대한 충실(Christian piety) 안에, 

 

(E) 그 안에서 하느님이신 예수 그리스도와 참례자 각자의 직접 접촉이 이루어지는 그리스도교 전례(Christian Liturgy)(여기에는 성찬례가 필수적으로 포함됨)가 탁월하게 표출되는, 그리스도인들의 경신()(Christian Religion)이 존재하고 있다.

 

게시자 주 3-6-2:

(1) 바로 위의 제3-6-2항에 주어진 구분들은, 아무런 설명없이 제시되고 있는 다음의 주소에 있는 글의 제4항에 발췌된 2001년 12월 17일자 교황청 경신 성사성 문헌 [제목: Directory on Popular Piety and the Liturgy] 제6항-제10항에서의 구분들에 대한 많이 부족한 죄인인 필자의 설명이기도 합니다:

http://ch.catholic.or.kr/pundang/4/soh/1619.htm

 

(2) 그리고, 바로 위의 교황청 문헌을 전후 문맥을 고려하면서 가만히 읽어보면, 위의 제(D)항에서의 "민간의, 그리스도들의, 경의(敬意, respect)/존중(尊重, esteem)과 함께 당연한 의무들에 대한 충실(popular Christian piety)"라는 표현 대신에, 이 표현에서, "그리스도인들의(Christian)이라는 표현을 생략한, "민간의, 경의(敬意, respect)/존중(尊重, esteem)과 함께 당연한 의무들에 대한 충실(popular piety)"이라는 표현을  바로 위의 교황청 문헌에서 사용하고 있음을 알 수 있는데, 그 이유는 아마도 이 문헌의 독자들이 그리스도인들임을 사전 전제로 하고 있기 때문인듯 합니다. 지금 말씀드린 지적과 관련하여서는, 다음의 파란 색칠을 한 글자들을 클릭하면 읽을 수 있는, 교황천 문헌들에서의 용례들을 또한 참고하도록 하십시오:

"popular Christian piety" site:vatican.va

"Christian popular piety" site:vatican.va

 

참고 자료: "Jewish piety" site:vatican.va

 

(이삳, 게시자 주 3-6-2 끝)

 

3-6-3. [이번 글의 최종 결론 1: 복음화(evangelization), 재-복음화(re-evangelization), 새로운 복음화(new evangelization), 그리고 토착화(inculturation) 각각의 4단계 실천적 원리(practical principles)] 에페소 1,10에 드러내어진 예수 그리스도 쪽으로 수렴(convergence)은, 윤리덕들에 있어, 당신의 부활 직후부터 다음의 원리(principles)들(*1), 더 구체적으로, 끝(ends)들이라고 불리는 실천적 원리(practical principles)들 쪽으로 수렴(convergence)을 통하여 성취/달성될 질 것입니다.

 

특히 바로 아래에 내열된 4단계의 실천적 원리들에서 첫 번째 원리 (A)에 대한 올바른 이해가 필수적임에 반드시 주목하십시오:(*2)

 

(A) 자연법(the natural law)으로서 표출되는 한 개의 자연적 윤리덕(a natual and moral virtue)인, 그것의 한 말단(a termination)이 초월자이신 하느님이신, 3자들 사이의 어떤 관계(a trinary/ternary/trinitarian relation)를 서술하는 표현인, 따라서 "한 개의 삼각형(a triangle)"을 연상하게 되는,(*3) 경의(敬意, respect)/존중(尊重, esteem)과 함께 당연한 의무들에 대한 충실(piety) [remote principle](사도행전 10,35; 가톨릭 교회 교리서 제761항 및 제781항 참조)[복음화(evangelization), 재-복음화(re-evangelization), 새로운 복음화(new evangelization), 그리고 토착화(inculturation) 각각의 첫 번째 단계 실천적 원리(practical principle)] 

 

(D) 민간의, [그리스도들의,] 경의(敬意, respect)/존중(尊重, esteem)과 함께 당연한 의무들에 대한 충실(popular [Christian] piety) [pseudo-proximate principle] [복음화(evangelization), 재-복음화(re-evangelization), 새로운 복음화(new evangelization), 그리고 토착화(inculturation) 각각의 두 번째 단계 실천적 원리(practical principle)]

 

(C) 그리스도인들의, 경의(敬意, respect)/존중(尊重, esteem)과 당연한 의무들에 대한 충실(Christian piety) [proximate principle] [복음화(evangelization), 재-복음화(re-evangelization), 그리고 새로운 복음화(new evangelization), 그리고 토착화(inculturation) 각각의 세 번째 단계 실천적 원리(practical principle)]

 

(E) 그 안에서 하느님이신 예수 그리스도와 참례자 각자의 직접 접촉이 이루어지는 그리스도교 전례(Christian Liturgy)(여기에는 성찬례가 필수적으로 포함됨) 탁월하게 표출되는, 그리스도인들의 경신()(Christian Religion) [first principle of all things(신학 대전 IIa IIae, q81, a1, ad4)(*3)] [복음화(evangelization), 재-복음화(re-evangelization), 새로운 복음화(new evangelization), 그리고 토착화(inculturation) 각각의 네 번째 단계 실천적 원리(practical princip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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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게시자 주: 가톨릭 보편 교회가 전통적으로 사용하고 있는 "원리(principle)"끝(ends)들이라고 불리는 "실천적 원리(practical principle)" 등의 용어들의 정의(definitions)들은 다음에 있으니 꼭 읽도록 하라:
http://ch.catholic.or.kr/pundang/4/soh/1585_principle.htm <----- 필독 권고 

http://ch.catholic.or.kr/pundang/4/soh/1585_practical_principle.htm <----- 필독 권고 

 

[내용 추가 일자: 2015년 4월 29일]

(*3) 게시자 주: 많이 부족한 죄인인 필자에 의한 3자 사이의 한 관계(a trinary/ternary/trinitarian relation)에 대한 바로 이러한 서술(description), 예를 들어, 다음의 글[제목: 복음화의 방향은 새 아담인 예수 그리스도 쪽으로 되돌아가게 하는 것 -에페소 1,10]제2항에서, 특히 그 유용성 및 효용성을 감안하야 자세하게 설명되고 있으니, 또한 꼭 읽도록 하라:

http://ch.catholic.or.kr/pundang/4/soh/1613.htm <----- 필독 권고

 

(*4) 게시자 주: "그리스도인들의 경신()(Christian Religion)은 모든 사물들의 첫 번째 원리(the first principle of all things)"라는 성 토마스 아퀴나스(St. Thomas Aquinas)의 신학 대전(Summa Theologica), IIa IIae, q81, a1, ad4에서의 가르침은 다음에 있다:

http://ch.catholic.or.kr/pundang/4/soh/1337.htm  <----- 필독 권고 

[이상, 내용 추가 끝]

 

(*2) 게시자 주: 바로 이 지적은, 예를 들어, 다음의 성 요한 바오로 2세 교황님의 1998년 3월 31일(성 목요일) 교서 [제목: Letter to the Holy Father, To Priests]에서 인용되고 있는, 성 그레고리오 1세 대 교황님(St. Gregorio I, the Great)의 가르침이 또한 뒷받침한다는 생각이다:

 

출처: http://w2.vatican.va/content/john-paul-ii/en/letters/1998/documents/
hf_jp-ii_let_31031998_priests.html

(발췌 시작)

3. The Gifts of the Holy Spirit

3. 성령의 선물들

 

Tu septiformis munere
Digitus paternae dexterae
Tu rite promissum Patris,
Sermone ditans guttura.

 

Finger of God's right hand,
the Saviour's promise,
send forth your seven gifts,
stir in us the word.

 

How could we not reflect in a special way upon the gifts of the Holy Spirit, which the tradition of the Church, following the Biblical and Patristic sources, describes as the sevenfold gift ("sacrum Septenarium")? Scholastic theology gave thorough attention to this doctrine, amply illustrating its meaning and its characteristics.

 

"God has sent the Spirit of his Son into our hearts, crying, 'Abba! Father!'" (Gal 4:6). "All who are led by the Spirit are children of God... It is that very Spirit bearing witness to our spirit that we are children of God" (Rm 8:14, 16). The words of the Apostle Paul remind us that the fundamental gift of the Spirit is sanctifying grace (gratia gratum faciens), with which we receive the theological virtues—faith, hope and charity—and all the infused virtues (virtutes infusae), which enable us to act under the influence of the Holy Spirit. Unlike the charisms, which are bestowed for the service of others, these gifts are offered to all, because they are intended to lead the person to sanctity and perfection.

 

The names of the gifts are familiar. The Prophet Isaiah mentions them in sketching the figure of the future Messiah: "The spirit of the Lord shall rest on him, the spirit of wisdom and understanding, the spirit of counsel and might, the spirit of knowledge and fear of the Lord. His delight shall be in the fear of the Lord" (11:2-3). The number will become seven in the translation of the Septuagint and the Vulgate, which add piety and eliminate from Isaiah's text the repetition of fear of the Lord.

 

이 선물들의 이름들은 친숙합니다. 예언자 이사야는 미래의 메시아에 대한 표상을 스케치함에 있어 다음과 같이 그들을 언급합니다: "그분 위에 주님의 영이 머무르리니, 지혜(wisdom)와 이해/통달(understanding)의 영, 권고(counsel)와 용맹/굳셈(might)의 영, 지식(knowledge)의 영과 주님에 대한 경외(fear of the Lord)이다. 그분의 환희는 주님에 대한 경외(fear of the Lord)에 마땅히 있을 것이리라"(게시자 번역) (이사야 11,2-3). 그 숫자는, 주님에 대한 경외(fear of the Lord) 라는 반복을 이사야의 본문으로부터 제거하고 경의(敬意, respect)/존중(尊重, esteem)과 함께 당연한 의무들에 충실(piety)을 추가하는, 칠십인역 그리스어 구약 성경(the Septuagint)과 대중 라틴말 성경(the Vulgate)이라는 번역본에서 장차 일곱이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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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번역자 주: 다음은 NAB(New American Bible) 지혜서 10,12에 대한 각주 전문인데, 히브리어 이사야서 11,2에서의 "주님에 대한 경외(fear of the Lord)"칠십인역 그리스어본 구약 성경대중 라틴말 성경(Vulgate) 둘 다에서 "경의(敬意, respect)/존중(尊重, esteem)과 함께 당연한 의무들에 충실(piety)"로 번역된 이유를 구체적으로 밝히고 있다:

 

출처: http://www.vatican.va/archive/ENG0839/_PLR.HTM

(발췌 시작)

[12] Devotion to God: in the Greek this signifies "piety" or "religion," and is the equivalent of the Hebrew "fear of the LORD"; cf. Proverb 1:7.

 

[12] 하느님 쪽으로 건성(虔誠, 경건한 정성)(Devotion to God): (#)그리스어에 있어 이 표현은 "경의(敬意, respect)/존중(尊重, esteem)과 함께 당연한 의무들에 충실(piety)" 혹은 경신(religion, ) 을 나타내며, 그리고 히브리어 표현 "주님에 대한 경외(fear of the Lord)등가/상당 어구(equivalent)이다. 잠언서 1,7을 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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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번역자 주: "devotion" 이 "piety의 대상 쪽으로 열정(ardour)"임에 대한 내용은 다음의 글의 게시자 주 3-4에 있다:

http://ch.catholic.or.kr/pundang/4/soh/1619.ht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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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 발췌 및 우리말 번역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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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aint Irenaeus also makes mention of the sevenfold gift and adds: "God gave this same Spirit to the Church [...] sending the Consoler upon the earth" (Adversus Haereses, III, 17, 3). Saint Gregory the Great in turn illustrates the supernatural dynamic which the Spirit imparts to the soul, listing the gifts in inverse order: "Through the fear of the Lord we rise to piety, from piety then to knowledge, from knowledge we derive strength, from strength counsel, with counsel we move towards understanding and with intelligence towards wisdom and thus, by the sevenfold grace of the Spirit, there opens to us at the end of the ascent the entrance to the life of heaven" (Hom. In Hezech., II, 7, 7).

 

리옹의 성 이레네오(St. Ireaneus, 130-202년)도 또한 이 일곱 겹의 선물(the sevenfold gift)에 대하여 말하며 그리고 다음을 부언합니다: "하느님께서는, 이 위로자(the Consoler)를 이 땅 위로 파견하심으로써, 교회에 바로 이 동일한 거룩한 영을 제공하셨습니다 [이단 논박(Adversus Haereses, III, 17, 3]. 성 그레고리오 1세 대 교황님(St. Gregory the Great, 540년경 - 604년; 재위기간: 590-604년)께서는 이번에는, 이 선물들을 다음과 같이 역순(inverse order)으로 나열함으로써, 이 거룩한 영께서 영혼에게 나누어 주시는, 초자연적 동력(supernatural dynamic)을 예증하십니다(illustrates): "주님에 대한 경외(fear of the Lord)를 통하여 우리는 경의(敬意, respect)/존중(尊重, esteem)과 함께 당연한 의무들에 충실(piety) 쪽으로 일어나고, 그러고 나서 경의(敬意, respect)/존중(尊重, esteem)과 함께 당연한 의무들에 충실(piety)로부터 지식(knowldege) 쪽으로 [일어나며], 지식으로부터 우리는 굳셈(strength)을 도출하며, 굳셈으로부터 권고(counsel)를 [도출하고], 권고와 함께 우리는 이해(understanding)를 향하여 움직이고 그리고 지성(intelligence)과 함께 지혜(wisdom)를 향하여 [움직이며], 그리하여 바로 이러한 방식으로(and thus), 이 거룩한 영의 일곱 겹의 은총(grace)에 의하여, 이 오름의 끝/목적지(the end of the ascent) 바로 거기에서 하늘의 생명(the life of heaven) 쪽으로 입구가 우리에게 열립니다" [Hom. In Hezech., II, 7, 7].

 

The Catechism of the Catholic Church regards the gifts of the Holy Spirit as a special awakening of the human soul and its faculties to the action of the Paraclete, and as such "they complete and perfect the virtues of those who receive them. They make the faithful docile in readily obeying divine inspirations" (No. 1831). This means that the moral life of Christians is sustained by these "permanent dispositions which make man docile in following the promptings of the Holy Spirit" (ibid. No. 1830). These bring to maturity the supernatural life which grace works in every human being. Indeed, the gifts are wonderfully well adapted to our spiritual dispositions, perfecting them and opening them in a special way to the action of God.

(이상, 발췌 및 일부 문장들에 대한 우리말 번역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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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시자 주 3-6-3: (이번 글의 최종 결론 2) 그러므로, 바로 위의 서술은, 예수 그리스도의 세 개의 신비들 중의 하나인, 즉, 가톨릭 교회 교리서 제516항, 제517항, 그리고 제518항에서(#1) 한 개씩 나열되고 있는, 그리스도의 신비(mysteries of Christ)들에 공통인 세 개의 특성들 중의 하나인, 총괄복귀(總括復歸)/총귀(總歸) 신비(the mystery of recapitulation)(#2)가 그리스도교 신앙 생활 안에서 어떠한 과정을 거치면서 현실태화(actualization) 되고 있는 지에 대한 서술이며, 따라서 바로 위의 서술은, 복음화(evangelization), 재-복음화(re-evangelization), 그리고 새로운 복음화(new evangelization) 각각의 단계들에 대한 논리적인 그리하여 체계적인 서술이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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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게시자 주: 영문본 가톨릭 교회 교리서 제516-518항들은 다음에 있다:
http://www.vatican.va/archive/ccc_css/archive/catechism/p122a3p3.htm#516

 

(#2) 게시자 주: 삼위일체 교의가 확립되기 이전의 시기에 그리스도교 핵심 교의들 중의 하나였던, 리옹의 주교였던 성 이레네오(St. Irenaeus)총괄복귀(總括復歸)/총귀(總歸) 신비(the mystery of recapitulation)에 대한 글들은 다음에 있다:

http://ch.catholic.or.kr/pundang/4/soh/intro2recapitulation_of_St_Irenaeus.htm

-----

 

4.

이번 글의 마지막 항으로서, 다음은, "piety(pietas)" 라는 단어의 원 의미에 대한 좋은 글들 두 편입니다. 영어가 가능한 분들께서는, 많이 부족한 죄인인 필자가 회복/복원하였다는 이 단어의 원 의미인, 그것의 한 말단(a termination)이 초월자이신 하느님으로 설정될 수도 있는, 3자들 사이의 어떤 관계(a trinary/ternary/trinitarian relation)를 서술하는 표현인, 따라서 "한 개의 삼각형(a triangle)"을 연상하게 되는, "경의(敬意, respect)/존중(尊重, esteem)과 함께 당연한 의무들에 대한 충실(piety)"과 어떠한 차이가 있는지 비교/검토하면서 읽도록 하십시오.

 

4-1. http://www.catholiceducation.org/en/culture/catholic-contributions/piety.html  [Donald Demarco 교수의 글]

 

4-2. 다음은, 바로 위의 제4-1항의 글에 근거하여, Charles Pope 몬시뇰님에 의하여 마련된, 또 한 편의 좋은 내용의 글입니다:

http://blog.adw.org/2012/03/what-is-piety-and-how-does-a-lack-of-piety-spell-doom-for-u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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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교수 소순태 마태오 (Ph.D.)

작업에 소요된 시간: 현재까지 약32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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