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원동성당 게시판

인쇄

김영배 [kimpaul25] 쪽지 캡슐

2005-01-26 ㅣ No.3221

 


 탓이란 산 짐승이 있는데, 이놈은 어찌나 날랜 지 웬만한 포수의 눈길도 범접지 못하는 그야말로 전광석화(電光石火)이다. 고전의 백사(白蛇) 보다도 귀하여 그 값이 부르는 게 값이다. 그의 가죽을 벗겨 북을 만들어  소리를 들으면 속이 후련하여 치유가 그만이다. 특히 울화병에 특효이다. 이놈의 처방은 간단하다. 울화의 원인을 모두 바깥 탓으로 돌리도록 그럴듯하게 꾸민다. 이놈의 유혹에 한 번 끌려서 가슴을 열고 나가면 양심을 얽고 있던 밧줄이 훨훨 풀려 속이 후련하다. 모두 남의 탓으로 돌리는데 거리낌이 없다. 내가 할 일은 이놈을 졸졸 따라다니기만 하면 만사가 편하다.

 이놈을 제일 미워하는 이는 종교인데, 오히려 가만히 드려다 보면 이놈의 가죽을 이용하여 만든 북으로 그 예식을 행하기 일쑤이다. 문화병이란 게 원래 울화병인데 북소리가 봄바람처럼 달콤하게 풀어주니 말이다. 가만히 살펴보면, 이놈은 고도의 문화를 벌써 터득하고 있다. 사랑이나 자비심이나 인(仁)을 잘 가공하여 아름다운 종이로 포장까지 하여 품속에 지참한다.

 ‘저 나쁜 세상을….’ ‘저 그릇된 정치인들을….’ ‘그릇된 우리 자식들을….’ ‘ 시어머니를 너그럽게….’ ‘며느리를 착하게….’ ‘북한 겨레의 배고픔을 ….’ 내 탓이 모호한 기도소리 잠잠할 때일수록 이놈이 은근히 힘을 내는 때이다.

 내 탓이 없는 나는, 애련한 마음으로 기원까지 했다. 북소리 우람하고, 디디는 발걸음은 아무 거리낌이 없다.

 그 죽은 가죽 소리로도 그 효험이 이럴진대, 궂은비 우중충한 한밤중이던지, 소슬한 가을바람에 낙엽 떨어지는 소리가 함석지붕에 사무는 아픈 밤에 이르러,  이놈이 산채로 제 목청을 돋우어 울면, 다음날 조간신문에 고약한 기사가 대서특필로 가득하다.

 ‘내 탓이오.’라는 구호가 별 힘을 발휘하지 못하고 사그라지는 것도 다 이러한 까닭이다. 모두 내 탓이 아닌 게 어디 있더냐? 스스로 책임지기를 싫어하는 나는 지금도 손가락 끝에 세상을 올려놓고 누구의 탓을 하며 십자가를 바라본다. 그리고 기도를 한다. ‘인간의 말재주’로! 

 참으로 뻔뻔스러운 낯으로 두드리는 내 가슴에는 항상 ‘네 탓’만이 있다.



103 0

추천 반대(0)

 

페이스북 트위터 핀터레스트 구글플러스

Comments
Total0
※ 500자 이내로 작성 가능합니다. (0/500)

  • ※ 로그인 후 등록 가능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