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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고백 (정희성 토마스 아퀴나스) 시인의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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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충희 [rch1104] 쪽지 캡슐

2005-02-07 ㅣ No.3231

첫 고백


정 희 성(토마스 아퀴나스)


오십 평생 살아오는 동안

삼십년이 넘게 군사독재 속에 지내오면서

너무나 많은 사람들을 증오하다보니

사람 꼴도 말이 아니고

이제는 나 자신도 미워져서

무엇보다 그것이 괴로워서 견딜 수 없다고

신부님 앞에 가서 고백했더니

신부님이 집에 가서 주기도문 열 번을 외우라고 했다


그래서 나는 어린애 같은 마음이 되어

그냥 그대로 했다

 

 

 

위에 인용된 시「첫 고백」이 수록되어 있는 정희성 시인의 시집『시를 찾아서』(2001)에는「민지의 꽃」이라는 아주 아름다운 시가 수록되어 있으며, 이 시에 대해서는 언젠가 말씀드린 적이 있습니다. “……다섯살 배기 딸 민지/ 민지가 아침 일찍 눈 비비고 일어나/ 저보다 큰 물뿌리개를 나한테 들리고/ 질경이 나싱재 토끼풀 억새……/ 이런 풀들에게 물을 주며/ 잘잤니, 인사를 하는 것이었다/ 그게 뭔데 거기다 물을 주니?/ 꽃이야, 하고 민지가 대답했다/ 그건 잡초야, 라고 말하려던 내 입이 다물어졌다/ 내 말은 때가 묻어/ 천지와 귀신을 감동시키지 못하는데/ 꽃이야, 하는 그 애의 말 한마디가/ 풀잎의 풋풋한 잠을 흔들어 깨우는 것이었다”라는 시였지요. 어린이의 눈과 마음으로 보면 세상은 모두 아름답고 순수하고 착하고 소중한 것뿐이겠지요. 그래서 주님께서도 “나는 분명히 말한다. 너희가 생각을 바꾸어 어린이와 같이 되지 않으면 결코 하늘나라에 들어가지 못할 것이다.”(마태복음 18장 3절)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위에 인용된 시「첫 고백」의 마지막 부분에도 “그래서 나는 어린애 같은 마음이 되어/ 그냥 그대로 했다”라고 되어 있습니다. 사실 우리들이 하는 ‘고해성사’의 내용은 본인 자신과 신부님만이 알고 계시지만, 뜻밖에도 이 시에서는 “오십 평생 살아오는 동안/ 삼십년이 넘게 군사독재 속에 지내오면서/ 너무나 많은 사람들을 증오하다보니/ 사람 꼴도 말이 아니고/ 이제는 나 자신도 미워져서/ 무엇보다 그것이 괴로워서 견딜 수 없다”라고 말하는 까닭은, “나 자신이 미워져서/ 무엇보다도 그것이 괴로워서 견딜 수 없”기 때문이겠지요. 그래서 이 시에서는 남에 대한 증오와 원망과 미움은 그 탓이 ‘남’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바로 ‘나 자신’에게 있다는 점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중요한 점은 “주기도문 열 번을 외우라”라는 신부님의 보속을 시인 자신이 “어린애 같은 마음이 되어/ 그냥 그대로 했다”는 점에 있습니다. 우리들이 습관처럼 외우고는 하는 ‘주님의 기도’는 “저희에게도 기도를 가르쳐 주십시오”(루가복음 11장 1절)라는 제자들에게 주님께서 직접 가르쳐 주신 기도이지요.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아버지의 이름이 거룩히 빛나시며 아버지의 나라가 오시며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게서와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소서. 오늘 저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고 저희에게 잘못한 이를 저희가 용서하오니 저희 죄를 용서하시고 저희를 유혹에 빠지지 않게 하시고 악에서 구하소서.”(루가복음 11장 2-4절) 위에 인용된 시에서 강조하고 있는 ‘어린애 같은 마음’으로 ‘주님의 기도’를 다시 한 번 암송해본다면 그 의미를 더욱 새롭게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윤호병 빈첸시오, 문학평론가, 추계예술대학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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