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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죄와 구속(속량), 의화와 통공(자비), 영원한 구원 [교리학습_구속교리] [교리학습_통공교의] 1032_heart 1122_ 1250_마지막 아담 merc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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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11-04 ㅣ No.1129

 
+ 찬미 예수님

이 글에서는 가톨릭 보편 교회의 교의인 "통공 교리"에 대하여, 특히 "구속/속량 교리"에 대하여 학습하도록 하겠습니다.

1. 우선 "새번역 성경"의 본문을 살펴 보았습니다.

"대속"이라는 표현은 "새번역 성경"의 구약 성경 본문에서만 사용되고 있으며, NAB 성경의 해당 용어는 "ransom" 혹은 "redemption" 입니다.


그런데 "새번역 성경"의 신약 성경 본문에서는 NAB 신약 성경 본문에서 "redemption"으로 번역된 표현에 해당하는 표현을, 요한 묵시록 14,4를 제외하고, 모두 "속량"으로 번역하고 있습니다.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그러나 한자어인 "대속부활" 이라는 표현은, 라틴어 혹은 영어 병기도 하지 않아, 무슨 뜻인지 모르겠습니다. 그리고, 제가 알기로는, 가톨릭 교회 측에서는 이 표현을 사용하지 않아 왔던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해당 영어 표현이 "redemptive resurrection" 이 아닐까... 하는 추측을 할 수 있는데, 이 표현 역시 가톨릭 교회 측에서 사용하지 않아 왔던 표현으로 알고 있으며, 무슨 뜻인지 모르겠습니다.


2. 
다른 한 편으로, 세례시의 의화(justification)의 과정과 관련하여, 16세기에 개신교측에서 "대속 교리(the doctrine of substitution)" 로 부르는 바를 주장하였는데, 당시의 개신교측의 이런 저런 주장들은 16세기 중반에 개최되었던 트리엔트 공의회(The Council of Trent)에서 단죄되었습니다.


(중간 결론1)
따라서 "대속부활" 이라고 불리는 주장은 결코 가톨릭 교회의 전통적 가르침이 아닙니다
 

 

3. 또 다른 한 편으로, 다음은 영어본 가톨릭 대사전의 The Communion of Saints 에 대한 설명 중에서 발췌한 것입니다:

 

출처: http://www.newadvent.org/cathen/04171a.htm  

(발췌 시작)

As early as 1519, Luther, the better to defend his condemned theses on the papacy, used the clause of the Creed to show that the communion of saints, and not the papacy, was the Church: "non ut aliqui somniant, credo ecclesiam esse praelatum . . . sed . . . communionem sanctorum". This was simply playing on the words of the Symbol. At that time Luther still held the traditional communion of saints, little dreaming that he would one day give it up. But he did give it up when he formulated his theory on justification. The substitution of the Protestant motto, "Christ for all and each one for himself". In place of the old axiom of Hugh of St. Victor, "Singula sint omnium et omina singulorum" (each for all and all for each--P.L., CLXXV. 416), is a logical outcome of their concept of justification; not an interior renovation of the soul, nor a veritable regeneration from a common Father, the second Adam, nor yet an incorporation with Christ, the head of the mystical body, but an essentially individualistic act of fiducial faith.  In such a theology there is obviously no room for that reciprocal action of the saints, that corporate circulation of spiritual blessings through the members of the same family, that domesticity and saintly citizenship which lies at the very core of the Catholic communion of saints. Justification and the communion of saints go hand in hand. The efforts which are being made towards reviving in Protestantism the old and still cherished dogma of the communion of saints must remain futile unless the true doctrine of justification be also restored.

 

1519년 정도로 일찍, 루터(Luther)는, 교황 제도(the papacy)에 대한 자신의 단죄받은 명제(theses)들을 더 잘 방어하기 위하고자, 교황 제도가 아니라, 성인들의 통공이 교회였다는 것을 보이기 위하여 이 신경의 원인을 다음과 같이 사용하였습니다: "non ut aliqui somniant, credo ecclesiam esse praelatum . . . sed . . . communionem sanctorum". 이것은 단순히 이 신경의 표현들에 대한 말장난을 하는 것이었습니다. 바로 그 시기에 루터는, 자신이 어느 날 이것을 포기할 것임을 전혀 꿈에도 생각하지 않으면서, 전통적인 성인들의 통공을 여전히 믿었습니다(held). 그러나 그가 의화(justification)에 대한 자신의 이론을 정식화하였을 때에 그는 이것을 정말로 포기하였습니다. 성 빅토르의 후그(Hugh of St. Victor, 1096-1141년)의 오래된 공리(axiom)인 "Singula sint omnium et omina singulorum" [모든 이를 위한 각자 그리고 각자를 위한 모든 이(each for all and all for each--P.L., CLXXV. 416]" 대신에, 프로테스탄트의 모토(motto)인 "모든 이를 위한 그리스도 그리고 자기 자신을 위한 각 한 명의 그리스도(Christ for all and each one for himself)" 의 대체(substitution)는, 영혼의 어떤 내면적 갱신이 아니라, 두 번째 아담인(the second Adam), 한 분의 공통의 아버지로부터 어떤, 실제로 이름이 붙여진 바로 그러한, 갱생(a veritable regeneration)이 아니라, 여전히, [교회라는] 신비체의 머리이신 그리스도와의 결합이 아니라, 신념에 찬 믿음(fiducial faith)의 어떤 본질적으로 개별적인 행위인, 의화에 대한 그들의 개념으로부터의 한 개의 논리적 결과물(a logical outcome)이었습니다. 그러한 신학에 있어, 가톨릭의 성인들의 통공의 바로 그 핵심에 위치하고 있는, 성인들의 바로 그러한 호혜적 행위를 위한, 동일한 가족의 구성원들을 통한 영적 축복들의 바로 그러한 공동의 순환을 위한, 바로 그러한 가정적임 및 성인다운 시민권을 위한, 여지는 분명하게 전혀 없습니다. 의화와 성인들의 통공은 손을 마주잡고 갑니다. 성인들의 통공이라는 오래된 그리고 여전히 마음에 소중히 간직되고 있는 교의(dogma)의 프로테스탄트주의 안에서의 소생을 위하여 행하여지고 있는 노력들은, 만약에 참된 의화 교리가 또한 회복되지 않는다면, 무익하게 남아 있는 것이 틀림없습니다. 

(이상, 발췌 및 우리말 번역 끝)

 

(중간 결론2) 
이상 살펴 본 바로부터, 우리는 다음을 알 수 있습니다. 즉,

 

16세기에 들어와 종교 분리를 획책하였던 마르틴 루터, 캘빈 등의 개신교측 인사들에 의하여 도입된 "대속 교리" 로 불리는 주장은, 이미 13세기성 토마스 아퀴나스(St. Thomas Aquinas)의 "사도신경 해설" 및 "신학 대전" 등에서 신학적 설명이 주어지고 있는 가톨릭 교회의 전통적 가르침인, 계시 진리인, "통공 교리(The Communion of Saints)[주: 여기에는 하느님의 자녀들의 성화를 위한 가톨릭 교회의 일곱 성사들이 포함됨]" 를 거부하고자 그리고 이 통공 교리를 다른 교리로 대체하고자 마련된 주장들이며, 그리하여 세례시의 의화(justification)와 관련하여, 예를 들어, 가톨릭 교회 교리서 제1266항을 전혀 설명 할 수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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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 자료 1: http://www.newadvent.org/cathen/02055a.htm (Doctrine of Atonement)

참고 자료 2: http://www.newadvent.org/cathen/07783a.htm (Indulgences, the principle of vicarious satisfaction)

참고 자료 3: http://www.newadvent.org/cathen/10212c.htm (Messiah, vicarious satisfaction)

참고 자료 4: http://www.newadvent.org/cathen/10118a.htm (Mediator, vicarious satisfac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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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부터는, 그리스도의 구속/속량 개념구약 성경의 대속 개념과 어떻게 다른지를 구체적으로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4.
4-1.
사실 가톨릭 보편 교회에는 전통적으로, 적어도 에페소 공의회(431년) 이후로, "구속 교리(the doctrine of redemption)" 로 불리는 교의(dogma)가 있습니다.

 

참고 1: "구속 교리" 라는 우리말 번역 용어는 현재의 가톨릭 교회 교리서에서 사용하고 있는 번역 용어입니다만, 위의 제1항에서 직접 살펴보았듯이, "새번역 성경"에서 사용하고 있는 번역 용어와의 일치를 생각한다면, "속량 교리" 라는 번역 용어를 사용하는 것이 더 유익하다는 생각입니다.

 

4-2. 그리고 가톨릭 교회 교리서는, 소위 말하는, "원죄 교리(the doctrine of original sin)"가 이 "구속 교리"의 뒷면(reverse side)에 해당한다고 언급하고 있습니다(가톨릭 교회 교리서 제389항 및 제407항 참조).

 

다음은 가톨릭 교회 교리서 제389항 및 제407항 전문입니다:

 

(영어본)
389 The doctrine of original sin is, so to speak, the "reverse side" of the Good News that Jesus is the Savior of all men, that all need salvation and that salvation is offered to all through Christ. The Church, which has the mind of Christ, knows very well that we cannot tamper with the revelation of original sin without undermining the mystery of Christ.

 

(프랑스어본)
389 La doctrine du péché originel est pour ainsi dire " le revers " de la Bonne Nouvelle que Jésus est le Sauveur de tous les hommes, que tous ont besoin du salut et que le salut est offert à tous grâce au Christ. L’Église qui a le sens du Christ (cf. 1 Co 2, 16) sait bien qu’on ne peut pas toucher à la révélation du péché originel sans porter atteinte au mystère du Christ.

 

(졸번역)
389 원죄 교리는, 말하자면, 예수님께서는 모든 사람들의 구세주이시고, 모든 이가 구원을 필요로 하며 그리고 구원은 그리스도를 통하여 모든 이에게 제시된다는 복음의 "이면(reverse side)" 입니다. 그리스도의 마음(the mind)을 가지고 있는 교회는 우리가, 그리스도의 신비 아래로 통과함 없이, 원죄 계시를 다룰 수 없음을 매우 잘 알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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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역자 주: 다음의 Merriam Webster's Unabridged Dictionary에 주어진 설명에 따라, 영어로 "undermine"으로 번역된 표현을 "아래로 통과하다"로 번역하였다:
http://ch.catholic.or.kr/pundang/4/mw/u_d.ht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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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시자 주: (번역 오류) 다음은 한국 천주교 주교회의/중앙협의회 홈페이지 제공의 기존의 번역인데, 이 기존의 번역이 위의 졸번역과 어떤 차이가 있는 비교/검토해 보도록 하십시오. "undermine"으로 번역되는 단어를 "손상되다"로 번역한 것은 번역 오류라는 생각입니다:

 

(기존의 우리말본)
출처: 여기를 클릭하십시오.

389 원죄 교리는, 예수님께서 모든 사람의 구원자이시며, 모든 사람에게 구원이 필요하고, 그 구원은 그리스도의 은총으로 모든 사람에게 주어진다는 복음의‘이면’(裏面) 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리스도의 생각을 가진 교회는 263) 그리스도의 신비가 손상되면 원죄의 계시 역시 올바로 접근할 수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407 The doctrine of original sin, closely connected with that of redemption by Christ, provides lucid discernment of man's situation and activity in the world. By our first parents' sin, the devil has acquired a certain domination over man, even though man remains free. Original sin entails "captivity under the power of him who thenceforth had the power of death, that is, the devil". Ignorance of the fact that man has a wounded nature inclined to evil gives rise to serious errors in the areas of education, politics, social action and morals.

 

(졸번역)
407 구속 교리와 밀접하게 연결이 되어 있는 원죄 교리는 이 세상에 있어 사람의 처지와 활동에 대한 명료한 인식을 제공합니다. 우리의 첫 번째 부모들의 죄에 의하여, 악마는, 비록 사람이 자유롭게 남아있기는 하나, 사람에 대한 어떤 특정한 지배력을 이미 획득하였습니다. 원죄는 "그 때부터 죽음의 힘을 가졌던 자인 그의, 즉, 악마의 힘 아래로의 예속"을 수반합니다. 사람이 악으로 기울어지는 어떤 상처를 입은 본성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에 대한 무지는 교육, 정치, 사회적 행위 그리고 윤리들의 영역들에 있어 심각한 오류들을 불러 일으킵니다.

(이상, 우리말 번역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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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 2: "the doctrine of redemption" 으로 불리는 교의(dogma)가 가톨릭 보편 교회의 가르침에 있음을 찾아내게 된 과정은 다음과 같습니다: 

 

(i) 우선적으로, "the doctrine of substitution" 이라는 용어는 교황청 홈페이지 제공의 자료들에서 전혀 사용하지 않음을 확인하였습니다.

 

(ii) 그런데, NAB 본문 중에서 "redemption" 이라고 번역되는 단어가, "새번역 성경"의 구약 본문에서는 "대속"으로 용어 번역이 되고 있으나, 신약 본문에서는 이와는 달리 "속량"으로 용어 번역이 되고 있기에, [즉, 구약 시대의 "대속 개념"과 신약 시대와 그 뒤를 이어지는 시기인 교회의 시대(즉, 성령의 시대)의 "예수 그리스도에 의한 속량 개념"이 신학적으로 동일한 개념이 아니라는 이야기임] 구글 검색 엔진을 사용하여 "the doctrine of redemption" 이라는 표현을 교황청 홈페이지에 올려진 자료들 중에서 다음과 같이 검색을 하여 확인하였습니다: 

 

여기를 클릭하십시오


(iii) 그리고 영어본 가톨릭 대사전의 본문 중에서도 "the doctrine of redemption" 이라는 표현을 사용 중인 것을 또한 다음과 같이 확인하였습니다: 

 

여기를 클릭하십시오

 

영어본 가톨릭 대사전에 주어진 "Redemption" 에 대한 설명 중에서, 특히 성 토마스 아퀴나스의 신학 대전으로부터 적어도 세 번에 걸쳐 발췌 인용하고 있음에 주목하십시오.

 

(iv) 그런 다음에, 영어본 및 우리말본 가톨릭 교회 교리서의 본문을 정밀하게 비교/검토하면서 들여다 보았더니, 위의  제4-2항에서 언급하고 있는 항들이 있음을 알게 되었던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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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5-1.
다음은 미국 천주교 주교회의/중앙협의회 홈페이지 제공의 Redemption 이라는 용어에 대한 설명입니다:

 

출처: http://ch.catholic.or.kr/pundang/4/ccc_glossary_kr.htm 

(발췌 시작)

REDEEMER/REDEMPTION: Jesus Christ, redeemer of mankind. Christ paid the price of his own sacrificial death on the cross to ransom us, to set us free from the slavery of sin, thus achieving our redemption. (571, 601; cf. 517, 1372).

 

구속자/구속(속량)(REDEEMER/REDEMPTION): 인류의 구제자(redeemer)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말한다.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를 되찾기 위하여, 죄의 노예 상태로부터 우리를 자유롭게 하기 위하여, 그리하여 우리의 구속/속량을 성취하기 위하여, 십자가 위에서 당신 고유의 희생의 죽음이라는 대가를 지불하셨다. (571, 601; cf. 517, 1372).

(이상, 발췌 및 우리말 번역 끝)

 

게시자 주: 위의 설명은, 구속(속량, redemption)의 개념을 정의하는(defining) 문장에, 우리의 구속(속량)을 위하여 그리스도께서 수행하신 바, 즉, 십자가 위에서 당신 고유의 희생의 죽음, 즉, 그리스도의 수난(the Passion of Christ)이라는 대가를 지불하셨음이 반드시 포함되어야 함을, 구체적으로 지적하고 있다는 생각입니다.

 

5-2. 다음은 Modern Catholic Dictionary에 주어진 Redemption 이라는 용어에 대한 설명입니다:

 

출처: http://www.catholicreference.net/index.cfm?id=35995 

(발췌 시작)

REDEMPTION

The salvation of humanity by Jesus Christ. Literally, to redeem means to free or buy back. Humanity was held captive in that it was enslaved by sin. Since the devil overcame human beings by inducing them to sin, they were said to be in bondage to the devil. Moreover, the human race was held captive as to debt of punishment, to the payment of which it was bound by divine justice.

 

On all these counts, the Passion of Christ was sufficient and superabundant satisfaction for human guilt and the consequent debt of punishment. His Passion was a kind of price or ransom that paid the cost of freeing humanity from both obligations. Christ rendered satisfaction, not by giving money, but by spending what was of the highest value. He gave himself, and therefore his Passion is called humanity's Redemption. (Etym. Latin redemtio, a buying back, ransoming, redemption.)

 

구속/속량(REDEMPTION)


예수 그리스도에 의한 인류의 구원(salvation)을 말합니다.[주: 이 문장은, 그리스도교 전통적 교의 신학적으로, 한 개의 오류의 명제임](*1) 글자 그대로, 구속한다/속량한다는 것은 자유롭게 하거나 혹은 되사는 것(buy back)을 뜻합니다. 인류는, 자신이 죄에 의하여 노예로 만들어졌다는 점에서, 포로로 붙잡혀 있었습니다. 악마가 인간들을, 그들을 죄로 넌지시 유도함으로써,  정복하였기 때문에, 그들은 죄의 노예가 되었다고 말해져 왔습니다. 더구나, 벌이라는 빚(the debt of punishment)에 관하여, 인류는, 하느님의 정의(the divine justice)에 의하여 이 빚의 지불이 의무지워져 있다는 점에 있어, 포로로 붙잡혀 있었습니다. 

 

모든 이러한 고려(counts)들에 대하여, 그리스도의 수난(Passion)은 인간의  죄 있음(human guilt)그 이후의 벌이라는 빚(the debt of punishment)에 대한 충분한 그리고 매우 풍부한 죄갚음(보속, satisfaction)이었습니다. 그분의 수난은, 이들 둘 다의 채무(obligations)들로부터 인류를 자유롭게 하는 대가(cost)를 지불하였던, 일종의 값(price) 혹은 몸값(ransom)이었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금전을 지불함으로써가 아니라, 가장 가치로운 바를 씀(spending)으로써, 죄값음을 제공하셨습니다. 그분께서는 당신 자신을 제공하셨으며, 그리하여 그 결과 그분의 수난은 인류의 구속/속량(humanity's Redemption)이라고 불립니다. [어원. Latin redemtio, a buying back, ransoming, redemp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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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용 추가 일자: 2020년 10월 8일]
(*1) 번역자 주: 이 첫 번째 문장은 "구속"/"속량"(redemption)이라는 용어가 나타내는 개념이 "구원"(salvation)이라는 용어가 나타내는 개념과 논리적으로 등가(logically equivalent)이라고 말하고 있는데, 그러나, 바로 이 주장(assertion)은, 왜냐하면, 예를 들어, 위의 제1-1항제1-2항에 발췌된 가톨릭 보편 교회의 교황 교도권의 가르침과 모순(contradiction)인 것이 분명하기 때문에, "한 개의 오류"(an error)/"한 개의 거짓인 명제(a false statement)"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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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 2020년 10월 8일자 내용 추가 끝]

(발췌 및 우리말 번역 끝)


게시자 주: 위의 Modern Catholic Dictionary에 주어진 예수님의 구속/속량(Redemption)에 대한 설명도, 비록 구약 시대의 "대속"과는 동일한 개념이 아님을 분명하게 구분할 수 있도록 설명하고 있기는 하지만, 그러나 여전히 부족한 면이 있는데, 이 부족한 설명은 이어지는 제6항에서 다루도록 하겠습니다.

 

[내용 추가 일자: 2020년 10월 8일]

게시자 주: 위의 Modern Catholic Dictionary에 주어진 예수님의 구속/속량(Redemption)에 대한 설명은, 구약 시대의 "대속"과는 동일한 개념이 아님을 우리가 분명하게 구분할 수 있도록 설명하고 있습니다.  다음의 주소에 접속하면, 예수님의 구속/속량에 대한 더 자세한 내용의 졸글[제목: 원죄와 구속(속량), 의화와 통공(자비), 영원한 구원; 게시일자: 2011-11-04]을 읽을 수 있습니다:(*2)

http://ch.catholic.or.kr/pundang/4/soh/1129.htm <----- 필독 권고

 

(*2) 게시자 주: (1) 이 글을 작성할 당시에 필자는, 바로 위의 게시자 주에 안내된 주소에 접속하면 읽을 수 있는 글에 의하여, 위의 (*1) 번역자 주에서 지적한, Hardon 신부님의 Modern Catholic Dictionary에 제시된 "redemption"이라는 표제어에 대한 기술의 첫 번째 명제가 참이 아님을 알아차렸던 것이다.

 

(2) 바로 위의 게시자 주에 안내된 졸글의 제6항에서, 예수님의 고유한 위업들 중의 하나인 "구속"/"속량"(redemption)이라는 용어의 정의(definition)를, 왜냐하면 이 용어가 한 개의 초자연적 개념(a supernatural concept)을 나타내기 때문에, 소위 말하는, 어떤 닫힌 형식(a closed form)이 아닌, 하나의 개방된 형식(an open form)인, 하나의 서술 방식의 정의(a descriptive definition)로서, 제시하고 있음에 주목하라. 

 

그리고 바로 이 서술 방식의 정의 그 자체에 의하여, "구속"/"속량"(redemption)이라는 용어가 나타내는 개념이 "구원"(salvation)이라는 용어가 나타내는 개념과, 어떠한 경우에도, 결코 논리적으로 등가일(logically equivalent) 수가 없음을 독자들에게 전달하고 있음에 또한 반드시 주목하라.

 

(3) 더 나아가, 다음의 주소에 접속하면, "구속"/"속량"(redemption)이라는 용어가 나타내는 개념이 "구원"(salvation)이라는 용어가 나타내는 개념과, 어떠한 경우에도, 결코 논리적으로 등가일(logically equivalent) 수가 없음을 더욱 더 명쾌하게 입증하는 필자의 또다른 졸글/논문[제목: 예수님의 구속/속량(Redemption) 위업은 오로지 죄들의 용서만을 의미하지 않고 또한 총귀/총괄복귀(recapitulatio)를 계시한다; 게시일자: 2020-09-19]을 읽을 수 있다:

http://ch.catholic.or.kr/pundang/4/soh/2105.htm <----- 필독 권고

 

(4) 그러므로, 이제 남은 과제는, 이 오류가 과연 Hardon 신부님의 고유한 오류인지 혹은 아닌지에 대하여, 들여다보는 것일 것이다.

[이상, 2020년 10월 8일자 내용 추가 끝] 

[내용 추가 일자: 2012년 2월 17일]
5-3.
다른 한편으로, 다음은, St. Joseph 판 NAB(New American Bible)의 부록인 Bible Dictionary에 주어진 "redemption" 용어에 대한 설명 전문입니다:


(발췌 시작)
REDEMPTION. This word comes from the Latin redimere which signifies to by back or redeem. The corresponding Hebrew term was used in the Bible for the first time with reference to the exodus from Egypt (Ex 15, 13). God has redeemed his people from the bondage of Egypt, gratuitously, just as a master sets free his slave (Lv 19, 20). In the New Testament, it signifies that God, through Jesus Christ (gratuitously), redeems his people in order to establish his kingdom (Rom 3, 24).

구속(속량, REDEMPTION). 이 단어는 되사다(buy back) 혹은 도로 찾다(redeem)를 나타내는 라틴어 redimere 에서 유래합니다. 대응하는 히브리어 단어는 이집트로부터의 탈출에 대하여 언급할 때에 처음으로 성경에서 사용되었습니다 (탈출 15,13). 하느님께서는, 주인이 자신의 노예를 자유의 몸이 되게 하는 것(레위 19,20)과 꼭 마찬가지로, 무상으로, 이집트의 노예 상태로부터 당신의 백성을 이미 구속(속량) 하셨습니다. 신약 성경에 있어, 이 단어는 하느님께서 당신의 나라를 제정하기(establish) 위하여, (무상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당신의 백성을 도로 찾으심[구속(속량)하심](로마 3,24)을 나타냅니다.
(발췌 및 우리말 번역 끝)


게시자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무상의 속량이 하느님의 나라의 제정을 위한 것이라는 바로 이 설명은 특히, 다음에 발췌한, 가톨릭 교회 교리서 제669항의 가르침과 직접적으로 연결되어 있기에, 상당히 유의미하다는 생각입니다:
 
CCC 669 주님이신 그리스도께서는 당신의 몸인 교회의 머리이시다. 607) 하늘로 올려지고 영광스럽게 되어 당신의 사명을 완수하신 그리스도께서는 지상 교회 안에 머무르신다. 속량은 그리스도께서 성령의 힘으로 교회에 행사하시는 권위의 원천이다. 608)신비 안에서 이미 현존하는 그리스도의 나라609)교회 안에 자리 잡고 있다. 그러므로 교회는“지상에서 하느님 나라의 싹과 시작이 된 것이다.” 6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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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07. 에페 1,22 참조.
608. 에페 4,11-13 참조.
609. 교회 헌장, 3항.
610. 교회 헌장, 5항.

[내용 추가 일자: 2012년 12월 3일]

5-4.
다음은 Modern Catholic Dictionary에 주어진 "expiation" 이라는 신학적 용어에 대한 설명 전문입니다:

출처: http://www.catholicreference.net/index.cfm?id=33481

(발췌 시작)
EXPIATION

Atonement for some wrong-doing. It implies an attempt to undo the wrong that one has done, by suffering a penalty, by performing some penance, or by making reparation or redress. (Etym. Latin ex-, fully + piare, to propitiate: expiare, to atone for fully.)

 

벌충(expiation)

어떤 잘못한 행위에 대한 보상(, atonement)을 말합니다. 이것은, 어떤 형벌(a penalty)을 겪음으로써, 어떤 고행(some penance)을 수행함으로써, 혹은 보수(, reparation) 혹은 시정(是正, redress)을 함으로써, 자신이 이미 행하였던 잘못을 원상태로 돌리고자(undo) 하는 노력을 뜻합니다. [어원. Latin ex-, fully + piare, to propitiate: expiare, to atone for fully.]
(이상, 발췌 끝).

5-5. 다음은 Modern Catholic Dictionary에 주어진 "atonement" 이라는 신학적 용어에 대한 설명 전문입니다:

출처: http://www.catholicreference.net/index.cfm?id=32009
(발췌 시작)
ATONEMENT

보상(, atonement)

The satisfaction of a legitimate demand. In a more restricted sense it is the reparation of an offense. This occurs through a voluntary performance that outweighs the injustice done. If the performance fully counterbalances the gravity of the guilt, the atonement is adequate. And if the atonement is done by someone other than the actual offender, but in his stead, it is vicarious.

어떤 적법한 요구의 이행(satisfaction)을 말합니다. 더 제한된 의미로 이것은 어떤 위반(offense)에 대한 보수()/회복(回復)(reparation)을 말합니다. 이것은 행하여졌던 불의(injustice)를 능가하는 어떤 자발적 선행(performance)을 통하여 일어납니다. 만약에 이 선행(performance)이 죄가 있음(the guilty)을 상쇄한다면(counterbalance), 보상(補傷, atonement)은 적절합니다. 그리고 만약에 보상이 실제 위반자(offender)가 아닌, 그러나 그자 대신에, 다른 어떤 이에 의하여 행하여졌다면, 그것은 대행(vicarious)입니다. 

 

Applied to Christ the Redeemer, through his suffering and death he rendered vicarious atonement to God for the sins of the whole human race. His atonement is fully adequate because it was performed by a divine person. In fact, it is superabundant because the positive value of Christ's expiation is actually greater than the negative value of human sin. (Etym. Middle English at one, to set at one, to reconcile; of one mind, in accord.)

구속주(the Redeemer)이신 그리스도께 적용되어, 당신의 고통 받음과 죽음을 통하여 당신께서는 인류 전체의 죄들에 대하여 하느님께 대행의 보상(補)(vicarious atonement)을 해주셨습니다(rendered). 당신의 보상(補)은 충분하게 적절한데 왜냐하면 이 보상(補)이 한 신격(a divine person)에 의하여 수행되었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이 보상은 과다인데(superabundant) 왜냐하면 그리스도에 의한 벌충(expiation)의 긍정적 가치(positive value)가 인간의 죄의 부정적 가치(negative value)보다 현실태적으로(actually) 더 크기 때문입니다. [어원. Middle English at one, to set at one, to reconcile; of one mind, in accord.]
(이상, 발췌 및 우리말 번역끝).

[이상, 내용 추가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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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6-1. 사실, "substitution" 이라는 단어는 영어본 가톨릭 교회 교리서 본문 전체에 걸쳐 제615항에서


"the substitution of the suffering Servant"


라는 표현 중에서 단 한 번 사용되고 있습니다. 우리말본 가톨릭 교회 교리서 제615항에서 해당 단어는, "고통 받는 종의 대역" 에서, "대역"으로 번역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이 표현이 등장하는 문장에 이어지는 문장, 즉


"Jesus atoned for our faults and made satisfaction for our sins to the Father."


"Jésus a réparé pour nos fautes et satisfait au Père pour nos péchés."


(졸번역)
"예수님께서는 우리의 [선(good)의] 결핍(faults)들을 벌충하셨으며(atoned for) 그리고 성부께 우리의 죄(sins)들에 대하여 속죄/보속(made satisfaction) 하셨습니다."

의 각주는 다음과 같습니다: Cf. Council of Trent (1547): DS1529.

게시자 주: 가톨릭 교회의 전통적 가르침인 의화(justification)에 대하여 정의하고 있는(define), 아래의 참고 1, 참고 2, 참고 3에 있는 트리엔트 공의회(Council of Trent)의 결과를 모두들 필독하시기 바랍니다.


참고 0: 
(i) 위에서 영어로 "atoned for our faults" 로 번역된 표현을 "우리의 [선(good)의] 결핍들을 벌충하셨습니다" 로 번역하였는데, 이는 원죄(original sin)를 범하기 이전인 "원 은총(original grace)" 의 상태에서 유지하고 있었던 선(good)에 있어서 완미(完美, perfection)의 상태를 아담과 하와가 원죄를 범한 이후부터 상실하게 되어 그리하여 선의 결핍의 상태에 머물러 있어 왔는데,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있어서의 이 선의 결핍을 당신의 수난으로 드디어 원래대로 회복하게 해주심으로써(atoned for our faults), 우리가, 그리스도교 세례를 받음을 통하여, 원 은총의 상태에서 가지고 있었던 선에 있어서 완미(完美)의 상태를 비로소 회복할 수 있도록 해 주셨음을 간략하게 표현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 지적은 다음의 라틴어본 가톨릭 교회 교리서 제615항 중의 해당 문장을 살펴보면 더욱 더 분명하게 드러납니다:


"Iesus nostras reparavit culpas et Patri pro nostris satisfecit peccatis."


참고할 라틴어 사전은 여기에 있습니다. 


(ii) 완미한 선(perfect good)으로의 회복 가능성이 그리스도의 수난과 부활 이후로 우리에게 허락되고 있음에 대하여서는,


여기를 클릭하여,


다해 연중 제16주일 제2독서(콜로새 1,24-28)의 제24장에 대한 나바르 성경 주석서객관적 구속 및 주관적 구속에 대한 설명을 참고하도록 하십시오.

(iii) 다음의 가톨릭 교회 교리서 제622항 전문을 참고하십시오:

 

622 The redemption won by Christ consists in this, that he came "to give his life as a ransom for many" (Mt 20:28), that is, he "loved [his own] to the end" (Jn 13:1), so that they might be "ransomed from the futile ways inherited from [their] fathers" (I Pt 1:18).

 

(졸번역)
622
그리스도에 의하여 획득된 구속은 다음에 있습니다: 그분께서는 "많은 이들의 몸값으로 자기 목숨을 바치러" (마태오 복음서 20,28) 오셨습니다, 즉, 그분께서는, 그들이 "조상들에게서 불려받은 헛된 생활 방식에서 해방될" (1베드로 1,18) 수 있도록 하고자, "당신의 사람들을 끝까지 사랑하셨습니다" (요한 복음서 13,1), 

 

(iv) 또한 다음의 가톨릭 교회 교리서 제1708항을 읽도록 하십시오:


(영어본)
1708
By his Passion, Christ delivered us from Satan and from sin. He merited for us the new life in the Holy Spirit. His grace restores what sin had damaged in us.


(졸번역)
1708.
당신의 수난에 의하여,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를 사탄으로부터 그리고 죄로부터 구출하셨습니다. 당신께서는 우리를 위하여 성령 안에 있는 새 생명을 상으로 받을 만하셨습니다(merited). 당신의 은총은 죄가 우리에게 과거에 이미 훼손하였던 바를 회복시킵니다(restores).


(v) 그리고 신학적으로 중요한 의미를 가지고 있는 "완미(perfection)" 라는 용어에 대한 설명은 다음의 글에 있으니 필히 참고하십시오:

http://ch.catholic.or.kr/pundang/4/soh/1094.htm <----- 필독 권유


참고 1: 트리엔트 공의회 문헌 및 제2차 바티칸 공의회 문헌들의 영문본 본문 중에는 "substitution"이라는 단어를 전혀 사용하지 않았습니다.


참고 2: 트리엔트 공의회, 제6회기, 의화에 대한 교령, 제7장: DS 1529 참조 > DS 1529(799) 전문: http://www.clerus.org/bibliaclerusonline/en/dfu.htm#bef  


참고 3: 트리엔트 공의회, 제6회기, 의화에 대한 교령, 제7장: http://history.hanover.edu/texts/trent/ct06.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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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 4: 다음은 가톨릭 교회 교리서 제615항 전문입니다:

(라틴어본)
Iesus Suam oboedientiam pro nostra substituit inoboedientia

615 « Sicut [...] per inoboedientiam unius hominis peccatores constituti sunt multi, ita et per unius oboedientiam iusti constituentur multi » (Rom 5,19). Iesus, per Suam oboedientiam usque ad Mortem, substitutionem adimplevit Servi patientis qui ponit in piaculum animam Suam, peccatum multorum ferens, quos iustificat iniquitates eorum portans. 497 Iesus nostras reparavit culpas et Patri pro nostris satisfecit peccatis. 498

(영어본)
Jesus substitutes his obedience for our disobedience

615 "For as by one man's disobedience many were made sinners, so by one man's obedience many will be made righteous."443 By his obedience unto death, Jesus accomplished the substitution of the suffering Servant, who "makes himself an offering for sin", when "he bore the sin of many", and who "shall make many to be accounted righteous", for "he shall bear their iniquities".444 Jesus atoned for our faults and made satisfaction for our sins to the Father.445


(프랑스어본)
Jésus substitue son obéissance à notre désobéissance


615 " Comme par la désobéissance d’un seul la multitude a été constituée pécheresse, ainsi par l’obéissance d’un seul la multitude sera constituée juste " (Rm 5, 19). Par son obéissance jusqu’à la mort, Jésus a accompli la substitution du Serviteur souffrant qui " offre sa vie en sacrifice expiatoire ", " alors qu’il portait le péché des multitudes " " qu’il justifie en s’accablant lui-même de leurs fautes " (Is 53, 10-12). Jésus a réparé pour nos fautes et satisfait au Père pour nos péchés (cf. Cc. Trente : DS 1529).


(졸번역)
예수님께서는 우리의 불순종을 당신의 순종으로 대체하십니다


615 "한 사람의 불순종으로 많은 이가 죄인이 되었듯이, 한 사람의 순종으로 많은 이가 의로운 사람이 될 것입니다" (로마 5,19). 죽음에 이르기까지 당신의 순종으로, 예수님께서는, "당신께서 많은 이의 죄를 짊어지셨을" 때에, "자기 자신을 속죄 제물로 내놓는 자인", 그리하여 "많은 이를 의롭다고 헤아려지게 할 자인", 고통받는 종의 대역(substitution)을 완수하셨는데, 이는 "당신께서 그들의 죄악들을 짊어질" (이사야 53,10-12) 것이기 때문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의 [선(good)의] 결여들을 벌충하셨으며 그리고 성부께 우리의 죄들을 보속/속죄 하셨습니다 [트리엔트 공의회(1547); DS 1529 를 참조하라].


(기존의 번역)
예수님께서는 우리의 불순종을 당신의 순종으로 바꾸신다

615 “한 사람의 불순종으로 많은 이가 죄인이 되었듯이, 한 사람의 순종으로 많은 이가 의로운 사람이 될 것입니다”(로마 5,19). 예수님께서는 죽기까지 순종하심으로써 자기의 생명을 속죄의 제물로 내놓은 고난 받는 종의 대역,  곧 많은 이들의 죄를 메고 감으로써 그들을 의롭게 하고 그들의 죄악을 짊어지는 일을 맡아 완수하셨다. 495) 예수님께서는 우리의 과오를 보상하셨고, 아버지께 우리의 죄를 배상해 드리셨다. 496)


게시자 주: (번역 오류) 
위의 기존의 우리말 번역인 "우리의 과오를 보상하셨다" 라는 표현에서 "보상"이 무엇에 대한 보상인지 알 수 없으며, 그리고 또 누구에게 그러한 "보상"을 하였는지가 분명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이어지는 문장에서 사용중인 "배상(satisfaction)"과 여기서 말하는 "보상"의 차이점이 어디에 있는지도 알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기존의 이러한 우리말로의 번역은, 위의 참고 0에서 비교적 상세하게 말씀드린, 신학적으로 대단히 중요한 선(good)에 있어서의 완미(完美, perfection) 개념원죄 개념이 직접적으로 관련된 바를 제대로 전달하지 못하기에, 개념 전달 오류에 기인하는 번역 오류라는 생각입니다.


[내용 추가 일자: 2011년 11월 11일]

위에서 지적하고 있는 번역 오류는 다음의 교황청 홈페이지 제공의 중국어본 가톨릭 교회 교리서 제615항의 마지막 문장을 살펴보더라도 또한 알 수 있다는 생각입니다:


출처: http://www.vatican.va/chinese/ccc/ccc_zh-t-0571.pdf

615 ... 耶?賠補了我們的過錯??我們的罪向父作了賠償

여기서,

賠補了 = reparavit = a réparé = atoned

作了賠償 = satisfecit = satisfait = made satisfaction 

입니다.

[내용 추가 일자: 2011년 11월 24일]
다음은 Merriam-Webster's Unabridged Dictionary에 주어진, 순수한 영어 어원으로 알려진 단어인"atonement" 단어에 대한 설명입니다. 우리말 번역은 필자가 한 것입니다:

출처: http://ch.catholic.or.kr/pundang/4/mw/u_d.htm  

Main Entry: atone·ment    
Pronunciation: -mnt
Function: noun
Inflected Form(s): -s


1 obsolete : restoration of friendly relations : RECONCILIATION
2 sometimes capitalized : a theological doctrine concerning the reconciliation of God and man especially as effected by the saving and redeeming work of Jesus Christ


3 : reparation especially for an offense or injury
[특히 위반 혹은 상해에 대한 벌충/회복/보수/보(補)]
4
Christian Science :
the exemplifying of man's oneness with God
[하느님과 사람의 하나 됨(oneness, 즉 친교, 통공)의 예시]


[내용 추가 일자: 2011년 12월 2일]

다음은 "가톨릭 교회의 말씀 전례에 따른 성경공부 해설서 나해-II" (출판사: 가톨릭출판사, 엮은이: 소순태)의 연중 제9주일 3분 복음/교리 묵상입니다.

이 글의 결론에서 언급되고 있는, 가톨릭 보편 교회가 정의하는 "자비를 받아들임""죄"의 개념에 대한 정의(definition)들을 상기하고자 발췌하였습니다.


CCCC 391. 하느님의 자비를 받아들이는 것은 우리에게 무엇을 뜻합니까?
CCC 1846-1848, 1870


하느님의 자비(mercy)를 받아들이는 것은 우리가 우리의 잘못들을 시인하고 우리의 죄들에 대하여 회개하는 것을 뜻합니다(implique). 하느님 스스로 당신의 거룩하신 말씀과 당신의 성령으로써 우리의 죄들에 대하여 털어놓게 하시며(lays bare) 우리에게 양심에 기인하는 진리(truth of conscience)와 용서에서 비롯되는 희망(hope of forgiveness)을 주십니다(엮은이 번역).

주: 교황청 홈페이지가 제공하는 영어 등의 외국어로 된 위의 CCCC 문항들 및 한국 천주교 중앙협의회 제공 우리말 ‘가톨릭 교회 교리서(CCC)’의 해당 항목들은 다음의 인터넷 주소에 있다:


가톨릭 교회 교리서: http://ch.catholic.or.kr/pundang/4/b_ot_c1846.htm


CCCC 392. 무엇이 죄입니까?
CCC 1849-1851, 1871-1872


“영원한 하느님의 법(Law)에 반하는 말, 행위, 혹은 욕구”가 죄입니다(성 아우구스티노). 죄(sin)는 하느님의 사랑에 대한 불순종의 상태에서 하느님께 반하는 무례(offense)입니다. 죄는 인간의 본성을 해치며 인간의 사회적 연대(human solidarity)를 손상시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당신의 수난(passion)에서 죄의 심각성을 완전히 드러내셨으며 당신의 자비로써 죄를 이기셨습니다(overcame)(엮은이 번역).


주: 교황청 홈페이지가 제공하는 영어 등의 외국어로 된 위의 CCCC 문항들 및 한국 천주교 중앙협의회 제공 우리말 ‘가톨릭 교회 교리서(CCC)’의 해당 항목들은 다음의 인터넷 주소에 있다:
가톨릭 교회 교리서: http://ch.catholic.or.kr/pundang/4/b_ot_c1849.htm

[이상, 내용 추가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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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결론


하느님이시면서 또한 (피조물이 아닌) 사람이신, 하느님과 죄인인 사람들 사이의 유일한 중재자(the only mediator)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하느님과 죄인인 사람들 사이의 통공(communion, 하나 됨, 친교)을 위한 단 한 번의 참 중재, 유일한 중재를 하시고자 


당신의 몸(body)을 십자가 위에서 희생 제물로 바친 사건의 두 뱡항의 양면성을 가진 바, 즉 

(i) 죄인인 사람들을 향하여, 그리고 

(ii) 하느님을 향하여, 

십자가 위에서 수행하셨던 바가,

바로 예수 그리스도에 의한 십자가 위에서의 단 한 번의 수난 공로의 주된 내용을 이룬다는 생각입니다.


즉 더 자세히 말씀드려,


하느님이시면서 또한 (피조물이 아닌) 사람이신, 하느님과 죄인인 사람들 사이의 유일한 중재자(the only mediator)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하느님과 죄인인 사람들 사이의 통공(communion, 하나 됨, 친교)을 위한 단 한번의 참 중재, 유일한 중재를 하시고자,


(i) 죄인인 사람들을 향하여서는, 이 사람들의 원죄 이후의 상태인 불순종(disobedience)이라는 선(good)의 결여를 당신의 완미한 순종(obedience)에 기인하는 당신의 은총(grace)으로 벌충하여(atone for), 그리하여 이 사람들이 원죄 이후의 상태인 선(good)의 결여로부터 완미한 선(perfect good)으로 회복할(repair or reparation, restore) 수 있게 하심으로써[, repair or reparation, restore(벌충, 회복), atonement] (가톨릭 교회 교리서 제615항), 즉 "원 거룩함(원 성성, original holiness)과 의로움(justice)의 상태"로 회복할 수 있게 하심으로써,


[예를 들어,
(ii-1) 헛된 생활 방식으로부터 해방될(ransomed) 수 있게 하심으로써 (가톨릭 교회 교리서 제622항), 그리고 
(ii-2) 과거의 죄에 의하여 훼손된 바로부터 회복할(restore) 수 있게 하심으로써 (가톨릭 교회 교리서 제1708항)]


그리고 및 동시에,


(ii) 하느님을 향하여서는, 하느님의 의로움(divine justice)을 침범한 죄인인 사람들이 하느님과의 화해(reconciliation)를 이루게 하시고자 (가톨릭 교회 교리서 제615항)성부 하느님의 자비(mercy) 안에서 죄인인 사람들에 대한 용서를 구하기 위하여 당신의 몸(body)을 성부 하느님께 속죄/화해의 제물로 바치심으로써[, satisfaction(보속)],


그리하여 그 결과,

죄인인 사람들이 (i) 당신의 교회의 세례(Baptism)로 원죄와 세례시점까지의 본죄의 사함을 받음과 함께 의롭게 되고, (ii) 나머지 성사 생활, 기도 생활 및 실천 생활을 통하여 자비로우신 예수 그리스도의 인성과의 통공(하나 됨, 친교, communion)을 이룸으로써, 장차 하늘(heaven, 천당)에서 하느님을 뵙는(the beatific vision of God, 지복직관) 영원한 구원(eternal salvation)가능하게 하였던 역사적 사건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에 의한 십자가 위에서의 단 한 번의 수난 공로의 주된 내용을 이룬다는 생각입니다. 
 
[내용 추가 일자: 2011년 11월 13일]

8. 그리고 바로 이 단 한 번의 예수 그리스도의 수난공로[受難功勞]로 현실태적으로(actually) 성취된 


"구속[救贖, redemption, 속량]"과 그 결과들을,

즉 "보속[(벌충, 회복)(보속)]"과 그 결과들을, 

보[, repair or reparation, restore(벌충, 회복), atonement]속[, satisfaction(보속)]과 그 결과들을,


예를 들어, 가톨릭 교회 교리서는 다음과 같이 가르친다는 생각입니다.
 
다음의 가르침들은, 고해성사, 특히 고해 후에 고해 사제로부터 받게 되는 보속(satisfaction)의 의미가, 궁극적으로,  하느님의 자비(God's mercy) 때문에 죄의 용서를 받은 고해자가 원 은총의 상태인 완미한 선(perfect good)으로 회복(atonement)할 것을 의도하시는 하느님의 의지(God's will), 즉 하느님의 사랑(God's love)의 넉넉한 자비(mercy)의 결과에 또한 있음을 잘 알 수 있습니다(히브리 10,19-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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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rist's death is the unique and definitive sacrifice

그리스도의 죽음은 유일하고 결정적인 희생 제물입니다(히브리 10,1-18)

613 Christ's death is both the Paschal sacrifice that accomplishes the definitive redemption of men, through "the Lamb of God, who takes away the sin of the world",439 and the sacrifice of the New Covenant, which restores man to communion with God by reconciling him to God through the "blood of the covenant, which was poured out for many for the forgiveness of sins".440
 
(졸번역)
613 그리스도의 죽음은,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하느님의 어린 양"(요한 복음서 1,29; 8,34-36 참조; 1코린토 5,7; 1베드로 1,19)을 통하여, 사람들에 대한 결정적인 구속을 성취하는 파스카 희생 제물, 그리고, "죄를 용서해 주려고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 계약의 피" 를 통하여 그를 하느님께 화해시키심으로써 사람을 하느님과의 통공으로 회복시키는, 새 계약의 희생 제물 둘 다 입니다(마태오 복음서 26,28; 탈출 24,8 참조; 레위 16,15-16; 1코린토 11,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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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14 This sacrifice of Christ is unique; it completes and surpasses all other sacrifices.441 First, it is a gift from God the Father himself, for the Father handed his Son over to sinners in order to reconcile us with himself. At the same time it is the offering of the Son of God made man, who in freedom and love offered his life to his Father through the Holy Spirit in reparation for our disobedience.442
 
(졸번역)
614 그리스도의 이러한 희생 제물은 유일하며, 그리고 그것은 모든 다른 희생 제물들을 완성하고 그리고 능가합니다(히브리 10,10 참조). 첫 번째, 그것은 성부이신 하느님으로부터의 한 개의 선물인데, 이는 성부께서 우리를 당신 자신과 화해하게 하시고자 당신의 성자를 죄인들에게 넘기셨기 때문입니다. 동시에 그것은 자유롭게 그리고 사랑으로 우리의 불순종에 대한 벌충으로 성령을 통하여 당신의 성부께 당신의 목숨을 바치셨던, 사람이 되신 하느님의 아드님의 봉헌물입니다(요한 복음서 10,17-18, 15,13 참조; 히브리 9,14; 1요한 4,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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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34 Because we are dead or at least wounded through sin, the first effect of the gift of love is the forgiveness of our sins. The communion of the Holy Spirit126 in the Church restores to the baptized the divine likeness lost through sin.
 
(졸번역)
734 우리가 죄를 통하여 죽거나 혹은 적어도 상처를 입었기에, 이 사랑의 선물의 첫 번째 결과는 우리의 죄들에 대한 용서입니다. 교회 안에서 성령의 친교(communion)(2코린토 13,13)는 죄를 통하여 상실되었던 하느님의 비슷함을 세례를 받은 이들에게 회복시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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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32 The human heart is heavy and hardened. God must give man a new heart.25 Conversion is first of all a work of the grace of God who makes our hearts return to him: "Restore us to thyself, O LORD, that we may be restored!"26 God gives us the strength to begin anew. It is in discovering the greatness of God's love that our heart is shaken by the horror and weight of sin and begins to fear offending God by sin and being separated from him. The human heart is converted by looking upon him whom our sins have pierced:27

Let us fix our eyes on Christ's blood and understand how precious it is to his Father, for, poured out for our salvation it has brought to the whole world the grace of repentance.

(졸번역)
1432 인간의 심장(the human heart)(#3)은 무디고 굳어져 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사람에게 한 개의 새로운 심장(a new heart)을 주셔야만 합니다(에제키엘 36,26-27 참조).(#2) 회심(conversion)은 무엇보다도 먼저 다음과 같이 우리의 심장(hearts)들을 당신께로 되돌아가게 만드는 하느님의 은총의 한 개의 일(a work of the grace of God)(#1)입니다: "주님, 저희를 당신께 되돌리소서, 저희가 돌아가오리다." (애가 5,21). 하느님께서는 우리에게 새로(anew) 시작할 굳셈(strength)을 제공하십니다. 우리의 심장(heart)이 죄(sin)의 공포와 무게에 의하여 부들부들 떨리게 되고 그리고 죄에 의하여 하느님을 침범함(offending) 그리하여 당신으로부터 분리됨을 두려워하기 시작하는 것은 바로 하느님의 사랑의 위대함을 발견함에서 입니다. 인간의 심장(the human heart)은 우리의 죄들이 찔렀던 당신을 바라봄으로써 회심을 하게 됩니다(is converted)(요한 복음서 19,37; 에제키엘 12,10을 참조하라).

우리의 시선을 그리스도의 피에 고정하여 그리하여 그것이 당신의 성부께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를 이해하도록 합시다, 이는, 우리의 구원을 위하여 흘러나왔기에 그것은 전체 세상에 회개의 은총을 이미 가져다 주었기 때문입니다.
 
[내용 추가 일자: 2015년 2월 3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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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번역자 주: 대단히 중요한 그리스도교 용어인 "은총(grace)" 에 대한 정의(definition)는 다음에 있으니, 우선적으로, 꼭 읽도록 하라:
 
(#2) 번역자 주: 다음에 있는 가톨릭 교회 교리서 제580항 및 전후의 유관 내용을 반드시 읽도록 하라:
 
(#3) 번역자 주: 대단히 중요한 그리스도교 용어인 "심장(the heart)" 에 대한 글들의 모음은 다음에 있으니, 별도의 시간을 내어서라도, 꼭 읽도록 하라:

 

들 중에서 특히 다음의 글들을 반드시 읽도록 하라:
http://ch.catholic.or.kr/pundang/4/soh/1129_heart_CCC1432.htm [바로 위의 CCC 제1432항]
http://ch.catholic.or.kr/pundang/4/soh/1555_heart_CCC153.htm <----- 필독 권고
http://ch.catholic.or.kr/pundang/4/soh/1584_heart_CCC2563.htm <----- 필독 권고
http://ch.catholic.or.kr/pundang/4/soh/1595.htm <----- 필독 권고
http://ch.catholic.or.kr/pundang/4/soh/1601_heart_CCC580.htm <----- 필독 권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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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 2015년 2월 3일자 내용 추가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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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59
Many sins wrong our neighbor. One must do what is possible in order to repair the harm (e.g., return stolen goods, restore the reputation of someone slandered, pay compensation for injuries). Simple justice requires as much. But sin also injures and weakens the sinner himself, as well as his relationships with God and neighbor. Absolution takes away sin, but it does not remedy all the disorders sin has caused.62 Raised up from sin, the sinner must still recover his full spiritual health by doing something more to make amends for the sin: he must "make satisfaction for" or "expiate" his sins. This satisfaction is also called "penance."
 
(졸번역)
1459 많은 죄들은 우리의 이웃에게 나쁜 짓을 합니다. 우리는 이 손상을 회복시키기 위하여 (훔친 재화들을 돌려주고, 중상하였던 어떤 이의 평판을 복귀시키고, 상해들에 대하여 보상하는 등) 할 수 있는 바를 행하여야만 합니다. 단순한 정의는 꼭 그만큼을 요구합니다. 그러나 죄는, 하느님 및 이웃과 죄를 지은 자의 관계뿐만이 아니라, 또한 죄를 지은 자 자신을 해치고 그리고 나약하게 합니다. 사죄(赦罪, absolution)는 죄를 없애나, 그러나 그것은 죄가 이미 야기한 모든 무질서들을 고치지 못합니다. [트리엔트 공의회(1551): DS 1678; 1705을 참조하라]. 죄로부터 들어올려진, 죄를 지은 자는 죄에 대한 벌충을 하기 위한 어떤 것을 더 행함으로써 자신의 충만한 영적 건강을 여전히 다음과 같이 회복하여야만 합니다: 그는 자신의 죄들에 대하여 "보속을 하여야"만 혹은 "죄갚음"을 하여야만 합니다. 바로 이 보속은 또한 "참회(penance)" 라고 불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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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69 This sacrament reconciles us with the Church. Sin damages or even breaks fraternal communion. The sacrament of Penance repairs or restores it. In this sense it does not simply heal the one restored to ecclesial communion, but has also a revitalizing effect on the life of the Church which suffered from the sin of one of her members.76 Re-established or strengthened in the communion of saints, the sinner is made stronger by the exchange of spiritual goods among all the living members of the Body of Christ, whether still on pilgrimage or already in the heavenly homeland:77

It must be recalled that . . . this reconciliation with God leads, as it were, to other reconciliations, which repair the other breaches caused by sin. The forgiven penitent is reconciled with himself in his inmost being, where he regains his innermost truth. He is reconciled with his brethren whom he has in some way offended and wounded. He is reconciled with the Church. He is reconciled with all creation.78

 

(졸번역)
1469 이 성사는 우리를 교회와 화해시킵니다. 죄는 형제적 친교(communion, 하나 됨, 통공)을 손상시키거나 혹은 심지어 깨뜨립니다. 고해성사는 이것을 바로잡거나 혹은 회복시킵니다. 이러한 의미로 이 성사는 교회의 친교로 회복하게 되는 자를 단순히 치유하는 것이 아니라, 그 구성원들 중의 한 명의 죄로부터 고통을 겪었던 교회의 생명에 대하여 활성화하는 효과를 가지고 있습니다(1코린토 12,26을 참조하라). 성인들의 통공에 있어 회복된 혹은 활기차게 된, 죄를 지은 자는, 여전히 순례 중이거나 혹은 천상의 본향에 이미 있던지간에, 그리스도의 몸의 모든 살아있는 구성원들 사이에서 영적 재화들의 교환에 의하여 더 굳세게 만들어집니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인류의 빛(LG) 48-50].

... 하느님과의 이러한 화해는, 말하자면, 죄에 의하여 야기되는 다른 파손들을 회복시키는 다른 화해에 이르게 함을 상기하여냐야만 할 것입니다. 용서를 받은 참회자는, 거기서 자신의 가장 깊숙한 진리를 다시 획득하는, 자신의 가장 안쪽의 있음(有, being) 안에서 자기 자신과 화해하게 됩니다. 그는 자신이 어떤 방식으로 이미 해를 끼쳤으며 그리하여 상처를 주었던 자신의 형제들과 화해하게 됩니다. 그는 교회와 화해하게 됩니다. 그는 모든 피조물과 화해하게 됩니다(루카 복음서 15,32를 참조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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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36 Jesus came to restore creation to the purity of its origins. ...

(졸번역)
2336 예수님께서는 창조물을 그 원천들의 순수로 회복시키기 위하여 오셨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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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72 ... Prayer restores man to God's likeness and enables him to share in the power of God's love that saves the multitude.16

(졸번역)
2572 ... 기도는 사람을 하느님의 비슷함으로 회복시키며 그리하여 수많은 자들을 구하는 하느님의 사랑의 힘에 그가 함께하는 것을 허락합니다(로마 8,16-21을 참조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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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 특히 위의 제7-8항은, 16세기에, 교황청으로부터 파문당한 이후부터 비로소 하느님의 계시 진리에 근거한 가톨릭 보편 교회의 교리들에 하자가 있다는 주장과 함께, 교회의 분리를 획책하기 시작하였던 마르틴 루터(Martin Luther)가 왜 히브리서를 신약 성경의 경전들의 목록에서 제거하고자 시도하였는지에 대한 구체적인 이유를 우리들로하여금 분명하게 이해할 수 있게 한다는 생각입니다. 바로 가톨릭 보편 교회의 핵심 가르침인, 믿을 교리(dogma)인 성인들의 통공 교리의 성경적 근거히브리서 10,1-29의 내용 때문이었다는 생각입니다.

 

다음은 히브리서 10,1-39의 일부를 인용하고 있는 가톨릭 교회 교리서(CCC) 항들의 번호의 나열입니다:

 

CCC 64: 히브리서 10,16
CCC 128: 히브리서 10,1
CCC 488: 히브리서 10,5
CCC 462, 히브리서 10,5-7 
CCC 516: 히브리서 10,5-7
CCC 606: 히브리서 10,5-10
CCC 614: 히브리서 10,10
CCC 679: 히브리서 10,26-31
CCC 1137: 히브리서 10,19-21
CCC 1216: 히브리서 10,32
CCC 1540: 히브리서 10,1-4
CCC 1544: 히브리서 10,14
CCC 1817: 히브리서 10,23
CCC 2178: 히브리서 10,25
CCC 2568: 히브리서 10,5-7
CCC 2778: 히브리서 10,19
CCC 2824: 히브리서 10,7; 10,10
CCC 2826: 히브리서 10,36

출처:
여기를 클릭하십시오 (우리말본 가톨릭 교회 교리서 출처 찾아보기) 

 

참고 2:
(i) "가톨릭 교회의 말씀 전례에 따른 성경공부 해설서 나해-II" (출판사: 가톨릭출판사, 엮은이: 소순태) 연중 제33주일 제2독서히브리서 10,11-14.18인데, 이를 포함하여 히브리서 제10장 전문에 대한 해설이 주어져 있으니 참고하십시오.

(ii)
"가톨릭 교회의 말씀 전례에 따른 성경공부 해설서 다해-I" (출판사: 가톨릭출판사, 엮은이: 소순태) 대림 제4주일 제2독서(히브리서 10,5-10)의 해설도 참고하십시오.

(iii) 그리고 다음의 인터넷 주소들에 접속하면, 히브리서 제10장(단, 제26-31절은 제외)에 대한 나바르 성경 주석서의 해설을 읽을 수 있습니다:

홀수해 연중 제3주간 화요일 제1독서(히브리서 10,1-10)에 대한 해설
홀수해 연중 제3주간 수요일 제1독서(히브리서 10,11-18)에 대한 해설
홀수해 연중 제3주간 목요일 제1독서(히브리서 10,19-25)에 대한 해설
홀수해 연중 제3주간 금요일 제1독서(히브리서 10,32-39)에 대한 해설

(iv) 다음의 홀수해 연중 제2주간 금요일 제1독서(히브리 8,6-13) 중의 제7-12절에 대한 나바르 성경 주석서의 해설에서, 또한 성 토마스 아퀴나스(St. Thomas Aquinas)의 설명을 참고하십시오:

홀수해 연중 제2주간 금요일 제1독서(히브리서 8,6-13)에 대한 해설

[이상, 2011년 11월 13일자 내용 추가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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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교수 소순태 마태오 (Ph.D.)
작업에 소요된 시간: (자료 찾기 및 비교/검토를 포함하여) 약40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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