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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재의 수요일(Ash Wednesday) 1444_piety good_works 788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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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02-06 ㅣ No.788

 

재의 수요일


♣참고:이 글 중에 밑줄이 그어진 성경 구절이 나오면, 학습자들이 그 구절을 찾아 읽을 것을 권장한다.


입문

          예언자 요엘(Joel)이 하느님의 백성에게 단식(fasting)과 참회(penitence)의 시간을 선포하여 그들이 하느님께로 돌아갈 것을 요구하는 것으로 이야기를 전개해 간다. 이것은 우리들이 사순시기(Lent)를 잘 지키기 위한 초점을 제시한다. 우리가 하느님과 맺은 그 계약을 상기함으로써, 또 그러한 관계 안에서 우리들이 살아갈 것임을 다시 헌정함(rededicate)으로써 ‘하느님께로 돌아가기 위한’ 특별한 기간이 되어야 한다.

 

          오늘 재(ashes)에 우리를 노출시키는 것(imposition)을 수용하는(accepting) 행위 안에서 우리는 겸손해진다(are humbled). 우리는 삶이 거저 주어진 것이라거나 혹은 이 세상이 단지 우리들만을 위하여 창조되었다는 가정은 더 이상 결코 할 수 없다. 우리는 ‘회개하고(repent) 복음적 삶(Gospel life)을 살 것’을 요청 받는다.

 

          재의 수요일(Ash Wednesday)은 겸손(humility)의 상태에서 우리를 ‘광야’(the wilderness)로 내보낸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불모지에서 40여 년 동안 방황하면서 겸손해졌다. 예수님께서는 광야에서 40일 동안 당신의 약한 부분들과 유혹들을 대적하셨다. 이스라엘 사람들이 하느님(Yahweh)께서 매일 마련해 주신 만나에 의존하였던 광야에서의 경험을 잊음으로써 주님의 길을 벗어나고 또 주님과의 계약으로부터 벗어나 표류하게 되었음을 예언자들은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자주 상기시켰다. 마찬가지로, 우리의 40일간의 사순시기는 정말로 진지하다. 우리는 삶의 걱정들과 불확실함들에 대처하여야만 한다. 우리가 능력 있고(powerful) 또 삶에 대한 모든 해답들을 가지고 있다고 우리 스스로를 확신시킴으로써 우리 자신을 신격화(gods)하는 것을 시도하는 것 자체가 바로 걱정과 불확실함으로부터 스스로를 감추는 행위이다. 우리는 이것을 놓아버리고 하느님께서 주관하시도록 하여야 한다.


제1독서 - 요엘 2,12-18

          요엘이라는 이름은 히브리어로 “야훼는 하느님이시다”를 뜻한다. 요엘은 유다 지역에서, 예루살렘에서 예언을 하였으며, 대다수 학자들은 그가 기원전 500년경 바빌론 유배에서 돌아온 후에 활동하였다고 생각한다.

 

          비정상적으로 심각한 가뭄의 시기에 이어서, 메뚜기 떼의 습격이 유다 지역과 예루살렘 지역에 찾아왔다. 예언자 요엘은 이 피해 막심한 저주(disastrous plague)의 목격자였다. 요엘은 지금의 재앙들로부터 훨씬 더한 공포의 재난, 즉 하느님의 날[Day of Yahweh, 주님의 날(Day of the Lord)]의 규모 혹은 징조를 보았기에, 백성들로 하여금 금식하고, 간청하며, 또 매우 슬퍼할 것을 간곡히 권하였다. 그는 예언자들 중에서 죄를 정산(reckoning)하는 마지막 날에 앞서 일어날 ‘징조(sign)’와 ‘재앙(woe)’을 서술한 첫 번째 예언자이다. 최후의 심판.

 

          재의 수요일의 첫 번째 독서로서 오늘 우리가 듣는 것은 회개하라는 요엘의 요청이다.

 

12  주님의 말씀이다. 그러나 이제라도 너희는 단식하고 울고 슬퍼하면서 마음을 다하여 나에게 돌아오너라.  13  옷이 아니라 너희 마음을 찢어라. 주 너희 하느님에게 돌아오너라.

 

참회하라(do penance). 그러나 당신의 참회가 겉으로 보이기 위한 것이 아님을 확실히 하라.

 

그는 너그럽고 자비로운 이 분노에 더디고 자애가 큰 이 재앙을 내리다가도 후회하는 이다.  14  그가 다시 후회하여 그 뒤에 복을 남겨 줄지

 

참회의 결과로서 하느님께서 응답하시어 벌을 멈추고 대신에 축복을 내려 주실 것을 희망하고 있다. 예언자 요엘은 하느님의 탁월한 자주성(sovereign freedom)을 강조하고 있다(아모스 5,15; 요나 3,9; 스바니야 2,3 들을 보라). ‘돌아오다(turn)’ 혹은 ‘회개하다(repent)’를 뜻하는 히브리 단어 sub에 대한 말장난(play)이 있다. 두 번에 걸쳐 백성들은 ‘회개’할 것을 요청받고 있는데(제12절은 나에게 돌아오고, 제13절은 주님에게 돌아간다), 그러면 하느님께서 ‘돌아오시어’ 자비를 베푸실 것이다. 비록 하느님께서는 자유로우신 분이기에 백성들에 의하여 조종될 수 없지만, 하느님의 응답은 그들의 행동과 분리되어(disconnected) 있는 것이 아니다. 백성들은 축복을 희망한다. 신명기 7,13-14는 하느님의 축복을 고대 이스라엘에 있어 매우 중요한 농업의 번창, 목축업의 번창, 그리고 개인적 자손의 번창 등의 단어들로 설명한다.

 

주 너희 하느님에게 바칠 곡식 제물과 제주를 남겨 줄지 누가 아느냐?

 

기근과 메뚜기 떼에 의한 역병은 알곡식과 과일 농사를 망치게 하였기에, 성전에 바칠 것이 아무 것도 없다. 회복된 번식력으로써 봉헌물(sacrifices)들은 다시 바쳐질 것이다.
 
15  너희는 시온에서 뿔 나팔을 불어 단식을 선포하고 거룩한 집회를 소집하여라.

 

각적(角笛, shofar)을 불어라. 각적 혹은 거세하지 않은 숫양의 뿔은 군대를 전투에 불러 모으고 또 공격자들의 접근을 경계하기 위하여 사용되었다. 각적은 경배하기 위하여 불러 모을 때에도 또한 사용되었다(레위기 25,9; 시편 81,4; 150,3). 각적의 강한 소리는 이제 하느님의 위안(relief)을 가져올 의식(observance)의 시작을 고지한다. 히브리 전설은 첫 번째 각적은 아브라함으로부터라고 하는데, 그 내용은 이러하다. 모리야 산에서 이사악 대신 제물로 쓰인 거세하지 않은 숫양은 뿔이 덤불에 걸려 붙잡혔는데, 제물로 쓸 목적으로 이 짐승을 덤불로부터 자유롭게 하기 위하여 뿔을 잘랐다(창세기 22,13).
 
16  백성을 모으고 회중을 거룩하게 하여라. 원로들을 불러 모으고 아이들과 젖먹이들까지 모아라. 신랑은 신방에서 나오고 신부도 그 방에서 나오게 하여라.

 

모든 사람이 참회 예식에 참여할 것을 요청받고 있다: 연장자들, 어린이들 및 유아들, 첫 날밤을 맞이한 신랑과 신부까지도.
 
17  주님을 섬기는 사제들은 성전 현관과 제단 사이에서 울며 아뢰어라. “주님, 당신 백성에게 동정을 베풀어 주십시오. 당신의 소유를 우셋거리로, 민족들에게 이야깃거리로 넘기지 마십시오. 민족들이 서로 ‘저들의 하느님이 어디 있느냐?’ 하고 말해서야 어찌 되겠습니까?”

 

흔히 탄식들 중에, 고통 받는 자는 그의 적(adversaries)들이 어디에 그의 하느님이 계시는지를 그에게 묻는다는 불평을 한다(시편 42,4; 79,10; 말라키 2,17).
 
18  주님께서는 당신 땅에 열정을 품으시고 당신 백성을 불쌍히 여기셨다.

 

야훼 하느님께서 당신의 백성들의 기도들에 응답하신다. 메뚜기들이 망쳐 놓은 알곡식, 새로운 포도주, 그리고 올리브기름이 봉헌물들로서 다시 바쳐지게 될 것이다.


제2독서 - 2코린토 5,20-6,2

 

          이 두 번째 독서는 사순시기를 하느님과 그리스도와 우리들 사이에서 화해를 위한 시기로 삼을 것을 우리들에게 말하고 있다. 이번 사순시기는 우리가 ‘수용할 수 있는 시기’, 우리 ‘구원의 날’이다.

 

20  그러므로 우리는 그리스도의 사절입니다. 하느님께서 우리를 통하여 권고하십니다.

 

사도들은 하느님의 도구들이다. 그들은 그리스도의 사명(mission, 임무)을 독특한 방법으로 연장하고(prolong) 또 수행한다(2코린토 4,10-11을 보라).

 

우리는 그리스도를 대신하여 여러분에게 빕니다. 하느님과 화해하십시오.  21  하느님께서는 죄를 모르시는 그리스도를 우리를 위하여 죄로 만드시어,

 

그리스도께서는 죄가 없다고 받아들여지셨다(히브리 4,15; 1베드로 2,22; 요한 복음서 8,46; 1요한 3,5). 그러나 하느님의 선택을 통하여(로마 8,3) 그리스도께서는 통상적으로 죄의 결과로 있게 되는 그러한 관계로 하느님 앞에 서게 되셨다 - 그리스도께서는 속죄의 희생제물(the sin sacrifice)이 되셨다.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하느님의 의로움이 되게 하셨습니다.(*)

 

우리는 이제 하느님의 아들들이고 또 그리스도와 함께 하늘의 공동 상속자들이다! 우리는 하느님의 거룩함에 함께할 것이다(로마 8,17)! 우리는 아무런 유산을 가질 수 없는 노예들이 아니라 맏배 아들이신 그리스도와 함께 유산을 함께 나누는 아들들이다.

 

[내용 추가 일자: 2020년 2월 26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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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게시자 주: 다음의 주소에 접속하면, 제21절의 우리말 번역에 오류가 있음을 지적하는 글[제목: 2코린토 5,21에서,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하느님의 의로움이 되게 하셨습니다???; 게시일자: 2019-03-30]을 읽을 수 있다:

http://ch.catholic.or.kr/pundang/4/soh/1983.htm <----- 필독 권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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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 2020년 2월 26일자 내용 추가 끝]
 
6:1  우리는 하느님과 함께 일하는 사람으로서 권고합니다. 하느님의 은총을 헛되이 받는 일이 없게 하십시오.
 

 

 

만약에 복음 말씀의 권능이 효과적으로 작용하려면 인간의 협조가 필수적이다(essential)(로마 1,16; 1코린토 15,10).
 
2  하느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은혜로운 때에 내가 너의 말을 듣고 구원의 날에 내가 너를 도와주었다.”

 

(그리스어 칠십인 역에 있는) 이사야 49,8을 그대로 인용한다.

 

지금이 바로 매우 은혜로운 때입니다. 지금이 바로 구원의 날입니다.


복음 - 마태오 6,1-6.16-18

 

          이 복음 말씀은 사순 프로그램을 위한 기본적인 중요한 말씀이다. 이 복음 말씀은 우리들에게 신앙적이 되고, 또 내적 영적인 이유들을 위한 선행들을 실천하며, 그리고 다른 이들에게 드러내 보이지 말 것을 가르치고 있다. 이 교훈은 다른 사람들을 도와주고, 기도하고 단식하는 사순시기의 세 가지 기본 열매들[경의(敬意, respect)/존중(尊重, esteem)과 함께 당연한 의무들에 대한 충실의 열매들(works of piety)]을(*) 위하여 마련된다.

 

[내용 추가 일자: 2014년 3월 13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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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번역자 주: 칠십인역(LXX) 그리스어본 구약 성경의 토빗기 12,8
마태오 복음서 6,1-18에서 세 개의 열매들이 또한 구체적으로 나열되고 있는, 대단히 중요한 유다교 및 그리스도교의 윤리덕(moral virtue)인, "경의(敬意, respect)/존중(尊重, esteem)과 함께 당연한 의무들에 대한 충실(piety, pietas)"에 대한 글들은 다음에 있으니 필독하라:
http://ch.catholic.or.kr/pundang/4/soh/intro2piety.htm <----- 필독 권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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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 내용 추가 끝].

 

1  “너희는 사람들에게 보이려고 그들 앞에서 의로운 일을 하지 않도록 조심하여라. 그러지 않으면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에게서 상을 받지 못한다.  2  그러므로 네가 자선을 베풀 때에는, 위선자들이 사람들에게 칭찬을 받으려고 회당과 거리에서 하듯이, 스스로 나팔을 불지 마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그들은 자기들이 받을 상을 이미 받았다.  3  네가 자선을 베풀 때에는 오른손이 하는 일을 왼손이 모르게 하여라.  4  그렇게 하여 네 자선을 숨겨 두어라. 그러면 숨은 일도 보시는 네 아버지께서 너에게 갚아 주실 것이다.”  5  “너희는 기도할 때에 위선자들처럼 해서는 안 된다. 그들은 사람들에게 드러내 보이려고 회당과 한길 모퉁이에 서서 기도하기를 좋아한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그들은 자기들이 받을 상을 이미 받았다.  6  너는 기도할 때 골방에 들어가 문을 닫은 다음, 숨어 계신 네 아버지께 기도하여라. 그러면 숨은 일도 보시는 네 아버지께서 너에게 갚아 주실 것이다.  16  “너희는 단식할 때에 위선자들처럼 침통한 표정을 짓지 마라. 그들은 단식한다는 것을 사람들에게 드러내 보이려고 얼굴을 찌푸린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그들은 자기들이 받을 상을 이미 받았다.  17  너는 단식할 때 머리에 기름을 바르고 얼굴을 씻어라.  18  그리하여 네가 단식한다는 것을 사람들에게 드러내 보이지 말고, 숨어 계신 네 아버지께 보여라. 그러면 숨은 일도 보시는 네 아버지께서 너에게 갚아 주실 것이다.” 

 

각 경우에 있어, 그리스도인들이 어떻게 할 것인지 기대되는 것과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파 사람들이 어떻게 하는지 사이에 다음과 같은 대조가 이루어진다.

 

          조용히 다른 사람들을 도우라  - 우리는 그리스도의 몸(the body of Christ)의 선(good)을 위하여 일을 할 것을 요청받으므로, 다른 이들의 관심을 하느님으로부터 우리들로 돌리지 말라. 하느님께서는 그대가 무엇을 하였는지를 이미 알고 계신다.

 

          그대가 기도할 때에, 하느님께 말씀드리고, 또 다른 사람들이 생각하고 있는 관심사들에 의하여 주의가 산만해지지 말라. 하느님께서는 그대의 깊은 마음속에 무엇이 있는지 알고 계신다.

 

          그대가 단식을 할(fast) 때에, 그대는 하느님을 위하여 어떤 것(something)을 포기하는 것이다 - 그것이 금요일의 고기이든, 초콜릿이든, 담배들이든, 스낵들이든, 혹은 그 무엇이든지 간에 그대가 좋아하는 어떤 것. 이 포기는 하느님께 자유롭게 드리는 선물인 것이지 어떤 공적 참회(a public penance)가 아니다.

 

모든 경우에 있어, 무엇이든지 행한 것은 개인적 영광이나 명예를 위한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영광을 위하여 행한 것이기에, 그대의 깊은 마음속에 감추어진 것도 포함하여 모든 것을 지켜보고 계시는 하느님께서는 그대에게 은총들로 보상해 주실 것이다. 하느님의 자녀인 그대 몫의 유산을 하느님께서는 회복해 주실 것이다.


?? 3분 복음/교리 묵상

CCCC 300. 내적 참회(interior penance)가 무엇입니까?
CCC 1430-1433, 1490

 

300. 그것은 자비로우신 하느님의 사랑에 응답하기 위하여 거룩한 은총에 의하여 끌어 당겨진(drawn) ‘죄를 깊이 뉘우치는 마음’(시편 51,19)의 움직임(movement)입니다. 회개는 저지른 죄들에 대한 후회(sorrow)와 혐오(abhorrence), 앞으로는 죄를 짓지 않겠다는 확실한 결심(purpose), 그리고 하느님께서 도와주심에 대한 신뢰를 필연적인 결과로서 수반합니다(entail). 내적 참회(interior penance)는 하느님의 자비(divine mercy) 안에서 망덕(hope, 희망)에 의하여 자라게 됩니다(nourished).

 

CCCC 301. 참회는 그리스도인의 삶에 있어 어떤 형태들을 취하게 됩니까?
CCC 1434-1439

 

참회는 여러 가지 다양한 방식으로 표현될 수 있습니다만, 무엇보다도 단식하고, 기도하고, 또 자선을 베푸는 과정에서 표현될 수 있습니다. 이들과 다른 여러 형태들의 참회는 그리스도인의 일상적 삶 안에서 실천에 옮겨질 수 있는데, 특히(교회법 제1250조에 의하여 정해진) 사순시기 중 및 매 주 금요일인 참회의 날(penitential day)에 실천에 옮겨질 수 있습니다.(*)

 

(*) 참고자료: http://www.ewtn.com/expert/answers/fast_and_abstinence.ht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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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시자 : 교수 소순태 마태오 (Ph.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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