혜화동성당 게시판

국내외 성인성녀 축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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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승진 [JinDavid] 쪽지 캡슐

2000-10-07 ㅣ No.3045

  1 월의 성인

 1일 : 천주의 모친 마리아, 오딜론 원장, 풀젠시오 주교, 에우프로시나 수도자

 2일 : 바실리오 주교 학자, 그레고리오 주교 학자, 마카리오 은수자, 아달하르도 원장

 3일 : 제노베파 동정녀, 플로렌시오 주교 치명, 안델로 교황 치명

 4일 : 리고베르토 대주교, 티토 순교, 다프로사 순교, 그레고리오 주교

 5일 : 시메온 고행자, 텔레스포로 교황 순교, 에밀리아나 동정녀

 6일 : 주의 공현 축일, 멜라니오 주교, 마크라 동정녀

 7일 : 루치아노 사제 순교

 8일 : 세베리노 증거자, 아폴리나리스 주교, 에르할도 주교

 9일 : 고르디오 순교, 울리아노 순교, 성녀 바실리사 동정녀

10일: 월헬모 대주교, 니카놀 부제, 아가토 교황, 베드로 오르세올로 총독

11일: 테오드시오 원장, 히지노 교황 순교, 살비오 순교, 레우치오 주교 증거자, 성녀 호노라타 동정녀

12일: 마인라도 증거자, 알가디오 순교, 타시아나 순교, 프로보 주교

13일: 힐라리오 주교 학자, 베르니카 수녀

14일: 펠릭스 사제 순교, 말라키아 예언자, 마크리나 성부인

15일: 바울로 은수자, 마우로 원장, 하바쿡 예언자, 미케아 예언자, 세쿤디아 동정녀

16일: 마르첼로 교황, 프리실라 성부인, 호노라토 주교

17일: 안토니오 원장, 디오도로 사제

18일: 프리스카 동정 순교자, 볼루시아노 주교, 데이콜라 은수자, 리베라타 동정녀

19일: 가누토 왕 순교자, 마리오와 마르타 부부 및 그의 아들 아우디팍스와 아바쿰 순교자, 제르마니코 순교자, 부르스타노 주교

20일: 파비아노 교황 순교자, 세바스티아노 순교자, 네오피토 순교자

21일: 아녜스 동정 순교자, 프룩투오소 주교 순교자

22일: 빈첸시오 부제 순교자, 아나스타시오 순교자, 가우덴시오 주교

23일: 라이문도 증거자, 에메렌시아나 동정 순교자, 일데폰소 대주교, 파르메나 순교자

24일: 프란치스코 살레시오 주교 학자, 디모테오 주교 순교자, 펠리치아노 주교 순교자

25일: 사도 바울로의 개종, 아나니아 순교자

26일: 디모테오 주교, 디도 주교, 바디르다 황후, 테오제네스 주교 순교자

27일: 안젤라 동정녀, 율리아노 주교

28일: 베드로 놀라스코 증거자, 플라비아노 순교자, 발레리오 주교

29일: 아퀼리노 주교 순교자

30일: 마르티나 동정 순교자, 히야친타 동정, 바르시메오 주교 순교자, 알데군다 동정녀, 사비나

31일: 요한 보스코 사제, 마르셀라, 루도비카 수절, 메트라노 순교자

 

 

 

1월 1일: 천주의 모친 성 마리아(+1세기)

하느님의 은총을 힘입어 성자 다음으로 모든 천사와 사람들 위에 들어 높임을 받으신 마리아는 그리스도의 신비에 참여하는 지극히 거룩한 천주의 모친으로서 교회의 특별한 예식으로 공경받으시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마리아는 초세기부터 ’천주의 모친’이란 칭호로 공경받아왔으며 신자들은 온갖 위험과 아쉬움 중에 그의 보호 밑으로 들어가 도움을 청한다.

루가 1장 48절에 ’이제로부터 과연 만세가 나를 복되다 일컬으리니, 능하신 분이 내게 큰 일을 하셨음이로다’ 하신 마리아의 예언대로 에페소 공의회 이후 신자들의 마리아 공경은 존경과 사랑과 기도와 모방에 있어서 놀라울 정도로 발전하였다.

교리 안에서 시대와 장소의 조건이나 신자들의 기질과 품성에 따라 교회가 인준한 성모 신심의 여러 형태는 성모가 공경을 받으심으로써 성자가 옳게 이해되시고 사랑과 영광을 받으시며 성자의 계명이 준수되도록 하는 것이다.

마리아는 하느님 백성의 표상으로, 하느님의 신부로 선택된 애초부터 원죄에 물들지 않으셨던 유일한 인간이다. 여러 날에 성모공경 축일을 지내고 있으며 여러 모습으로 나타나신 것을 재현해 놓은 성모상도 많다

 

 

1월 1일: 성 오딜로 원장(962-1049)

클뤼니의 수도자인 그는 994년에 원장이 되었다. 매우 엄격한 규율을 자발적으로 잘 지켜 온 그는 1006년에 기근이 들자, 성당의 주요 재물들을 팔아서 가난한 이들 구제사업에 사용할 정도로 실천적인 인물이다. 원장으로 있을 때 클뤼니 수도원의 회원이 급격히 불어나, 다른 곳의 수도원들을 이곳에서 나오는 수도자로 부족한 인원을 보충할 정도였다.

프랑스에 ’하느님의 휴전’이라 불리는 전면 휴전 제도를 도입시킨 오딜로는 성당에 피신처를 구하는 사람에게는 체포할 수 없다는 규정을 만든 장본이기도 하다. 또한 죽은 교우들을 모두 기억하는 ’위령의 날’을 제정하였다.

 

 

1월 1일: 성 풀젠시오 주교(467-533)

카르타고의 귀족 가문에서 태어난 그는 어머니가 과부가 되면서부터 가문의 영지를 관리하였는데, 그의 탁월한 능력은 세인의 관심을 끌었다. 훌륭한 교육을 받았던 그는 카르타고의 재무관으로 임명되었으나, 2년 후에 사임하면서부터 정통파 주교인 파우스토가 지도하는 수도원에 입회하였다.

당시에는 아리안계의 반달족이 북 아프리카를 점령하고 있어서 정통파 주교들이 추방당하는 경우가 많았다. 그러나 풀젠시오는 반달족의 왕인 트라시문드의 주목을 받아 아리안계 성직자와의 토론회를 열어 영향력을 과시해 518년 사르디니아로추방당하였다.

그는 재임기간 대부분은 유배생활을 하였으나 신자들로부터 사랑과 존경을 받았다. 그의 이름만 들어도 아리안계 성직자들은 겁을 내었다. 그는 아리안 이단을 배격하는 위대한 신학자이자 사목자였던 것이다. 그후 시르시니아 섬에 있는 수도원으로 은거하다가 루스페로 돌아온 얼마 뒤에 운명하였다.

 

 

1월 1일: 성녀 에우프로시아 수도자(5세기경)

그녀는 부자이던 파프누시우스란 사람의 딸이었다. 부친은 그녀를 일찍 결혼시키기 위하여 어느 부자집 아들과 미리 약혼을 해 두었다. 그러나 봉헌생활을 갈망하고 있던 그녀는 거의 가난한 사람을 돕는 일을 하며 생활하였다.어느날 부친이 집에 없을 때 어느 늙은 수도자가 찾아와서 그녀에게 수도복을 입혔다. 그러나 부친의 불같은 성화를 이길 수 없어 남장을 하고 그녀의 부친이 자주 찾아가는 수도원에서 생활하기 시작하였다. 이때 그녀는 스마라그두스라 불렸는데, 그녀의 성덕과 영적 지혜는 그 시대에 상당히 유명해졌다.

그녀의 부친도 딸에게서 영적 지도를 자주 받았으나 스마라그두스 수사가 자기 딸인 줄 몰랐다. 이윽고 그녀가 운명할 즈음에 부친에게 자신의 신원을 밝혔다. 이에 감동한 그녀의 부친은 곧 수도자가 되어 딸이 살던 수도원 방에서 10년을 살다가 운명하였다.

 

 

1월 2일: 성 바실리오 주교 학자(330-379)

그는 부유하고 이름있는 크리스천 가정의 출신으로 가족 대부분 성인품에 오른 교회 역사상 가장 뛰어난 가문에서 태어났다. 그는 체시레아, 아테네 등의 학교에서 교육받았으며 성 그레고리오와 깊은 우정을 맺었다.

357년경에 그는 체사레아 교구를 위해 일했고, 270년에 그곳의 주교가 되었다. 또 아리우스파 황제인 발렌스가 정통 크리스천을 박해할 때 용감히 맞서 싸웠고, 그의 강직함 때문에 교황 성 다마소와 서방 교회 간의 관계에 어려움이 많았다. 그는 병자와 가난한 사람들 구제하는데 매우 적극적이었고, 요양원을 짓거나 혹은 대대적으로 진료사업을 펼쳤으며, 설교가로도 명성을 얻었다.

바실리오는 초대교회의 큰 거물이었다. 비잔틴 제국에서 아리우스파를 몰아낸 것이나 콘스탄티노블 공의회에서 아리우스파를 단죄한 배경에는 바실리오의 영향력이 대단히 컸다. 그가 폰투스에서 제정한 규칙과 조직이 동방 수도생활의 기초가 되었고, 현제까지도 그 전통이 이어져 온다.유식하고 정치력도 있었던 그는 가장 위대한 설교가로 손꼽히며 성덕도 뛰어났다. 그의 박학한 저서들과 400여 통의 편지들은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성령에 관한 저서와 에우소미우스를 반박하는 세 권의 저서 그리고 그레고리오 나지안젠과 함께 편집한 필로칼리아가 그중에서도 유명하다. 그는 교회의 박사이며 동방 수도자의 아버지로 큰 공경을 받고 있다.

 

 

1월 2일: 성 그레고리오 주교 학자

카파도치아의 나지안젠에서 태어난 그는 체사레아에서 공부하던 주에 성 바실리오를 만났고, 그후 팔레스티나의 체사레아 수사학교를 다녔으며, 아테네에서도 10여 년을 성 바실리오와 미래의 황제 율리안 배교자와 함께 공부하였다.

372년 사시마의 주교가 된 그는 아리안계 지역에서 전통 교회의 활성화를 위해 힘썼다. 그리고 아나스타시아 교회에서 설교를 시작하여 많은 개종자를 얻었다. 이때 그는 아리안계 막시몬과 격렬한 논쟁을 일으켰고, 388년경에 새로 입교한 데오도시우스 황제가 그의 가르침을 정통교리로 인정하고 아리 안계 지도자를 축출하는 칙서를 발표케 하였다. 그래서 그는 콘스탄티노블의 총주교가 되었다. 그의 임명은 굉장한 파문을 일으켜 381년 콘스탄티노블 공의회까지 열려 문제가 심상치 않게 발전하므로 그는 교회내의 평화를 위하여 주교직을 사임하였다. 그후 엄격한 은수생활을 하다가 고향에서 운명한 그는 전통교회 수호에 큰 공적을 남겼고, 또 니체아 공의회의 선언문에 큰 영향을 끼쳐 ’박사’로 불렸다.

 

 

1월 2일: 성 마카리오 은수자

알렉산드리아의 시민인 그는 과자장수였는데, 하느님께 봉헌을 결심하고 6년동안 사막에서 고행과 관상생활을 하였다. 그의 첫 은수처는 테베였고 373년에는 에집트 남부로 가서, 스케트와 니트리아 사막에 움막을 지었다. 그 당시 은수자들은 각각 자기의 움막에서 독수 생활을 하였다. 그는 사제로 서품되었고, 극도로 엄격한 규율을 지켰으며 기적도 수없이 일어났다.특히 그는 니트리아에 있는 수도원을 위하여 회헌을 집필하였는데, 이중의 여러 규칙이 성 예로니모가 인용하고 자신의 회칙에 삽입하여 그 맥이 지금도 이어온다.

 

 

1월 2일: 성 아달하르도 원장(753-827)

챨스 마르텔의 손자이자 페핀 왕의 동생인 베르나르도의 아들이며, 아델라드르도 알려져 있다. 그는 수도원 생활이 몸에 베어 있었으나, 그의 사촌인 챨스 대제에 의하여 자주 궁중으로 불려 갔으며, 끝내는 왕의 고문관 중의 한 사람이 되었다. 그는 루이 황제에 대한 반역을 도왔다는 죄목으로 아퀴텐느 연안의 함 섬으로 유배당하여 그곳에서 5년을 살았으나, 821년 다시 궁중으로 들어왔다. 그러나 얼마후 다시 추방되었는데, 이번에는 성덕과 엄격함 그리고 가난하고 병든 자들에 대한 관심이 나쁜 평판을 일으켰기 때문이다. 이때 그는 고르비에 유배되었는데 여기서 고르비 수도원을 세웠다. 이 수도원은 게르만과 프랑스 언어뿐만 아니라 라틴어까지 가르치는 배움의 전당이 되었다. 코르비의 원장으로 만년을 지내다 죽었다.

 

 

1월 3일: 성녀 제노베파 동정녀(420-500)

파리 교외 낭테르에서 태어난 그녀는 7세의 어린 나이에 오세르의 성 제르마노를 만난 뒤로 하느님께 자신을 봉헌하였다. 양친이 죽자 파리로 온 그녀는 15세의 나이로 수녀가 되었다. 그러나 그녀가 받은 환시와 예언 때문에 파리 시민들로부터 미움과 천대를 받았다.

프랑크인들이 파리를 봉쇄했을 때 그녀가 나서서 굶어 죽어가는 시민들에게 음식을 날라 주고, 점령자를 설득하여 포로 석방을 교섭하기도 하였다. 451년 그녀는 아틸라 2세와 훈족이 파리를 점령하리라고 예언하였고, 그녀가 시민들과 더불어 기도한 뒤에는 해를 입지 않았다. 또한 그녀는 성 디오니시오께 바치는 성당 건립을 도왔고, 클로비스 국왕을 설득하여 성 베드로, 바오로 성당을 세우게 하였다. 1129년에는 파리를 휩쓸었던 재앙과 전염병을 퇴치함으로써 이 도시의 수호자로 칭송받았다.

 

 

1월 4일: 성 리고베르토 대주교(+745년경)

그는 오르베의 초대 원장으로 있던 주에 라임즈의 주교로 임명되었다. 그는 자신의 측근인 라간프레드를 위하여 찰스 마르텔과 싸우다가 가스코니로 추방되었다. 그후 그는 재차 라임즈의 주교좌를 되돌려 받았다. 그는 그만큼 인내와 항구심이 있었고, 또 은둔 생활과 기도를 즐겨하였기 때문이라고 한다.

 

 

1월 4일: 성 그레고리오 주교(+539)

귀족 출신인 그는 거의 40여 년 동안 오텅 지방의 백작으로 있으면서 정의를 실천에 옮긴 분으로 명성을 얻었다. 그러나 그의 아내인 아르멘타리아가 운명하자 세속을 멀리하고 오로지 하느님 섬기는 데에만 전념하였다. 그리하여 랑그레의 주교가 된 그는 믿음과 열성으로 사목자의 의무를 다 하였다. 특히 음식과 술을 극도로 절재하였고, 밤새도록 기도하기가 일수였다. 이처럼 모든 면에서 성덕이 출중하였으므로 그는 부르군디의 사도인 성 베니뇨를 비롯한 수많은 성인들과 친교를 나누었다.

 

 

1월 5일: 성 시메온 고행자(390-459)

치리치아의 어느 목동의 아들로서 시리아 국경지대에서 태어난 성 시메온은 13세 때에 환시를 보왔는데, 후일 이 환시를 기둥 위에서의 생활에 대한 예언으로 자신이 해석하였다. 그는 인근의 수도원에서 2년을 지낸 뒤 헬리오도루스의 어느 엄격한 수도원에서 가장 엄격한 고행을 실행함으로써 그 수도원에서 쫓겨났다. 그는 안티오키아 교외의 텔레아니세산으로 가서 은수생활을 시작하였는데, 그의 성덕 이야기에 도취한 군중들이 몰려들어 산꼭대기로 올라갔다. 다시 423년 군중을 피하기 위해 10보 높이의 기둥을 만들고 그 위에서 지냈는데, 이것이 계기가 되어 일생동안 기둥 위에서 살았다. 꼭대기 위의 넓이는 6피트를 넘지 않았고, 그의 마지막 기둥은 60피트에 이르렀다. 그는 거의 매일 잠자지 않거나 조금씩 자는 고행을 비롯하여 야생동물 가죽옷을 입고 지냈고, 40년 동안 사순절을 하루도 빠짐없이 완전한 단식을 하였다.

그는 살아 생전에 이미 성인으로 공경받았으며, 그의 말 한마디는 굉장한 영향력이 있었다. 기둥 위에서의 설교로 수많은 사람들이 개종하거나 신심을 되찾았고, 고위 성직자와 황제까지도 그의 말을 경청하였다.

 

 

1월 5일: 성 텔레스포로 교황 순교자(+136)

로마에서 성 베드로를 계승한 15명의 주교 가운데 한 분이고 순교자로 기술되어 있지만 순교사실을 분명히 밝히지는 못하고 있다. 성 이레네오는 그는 영광스럽게 순교했다고만 만연하게 말한다. 그는 희랍인이었다는 설이 옳을 것같다.

 

 

1월 7일: 성 루치아노 사제 순교자(+312)

시리아의 사모사타 출신인 그느 수사학과 철학에서 당대의 최고 권위자였으며, 에데사에서는 마카리오란 사람의 지도로 성서를 연구하였다. 그는 말과 행동으로 모범이 되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고 판단하여 신구약 성서에서 오류를 제거하는데 힘을 기울였다. 이리하여 그는 70인역 성서의 다른 간행본을 서로 비교하고 또 히브리 원문을 참조하여 구약 성서 개정판을 만들었는데, 이것이 성 루치아노 사본이다. 그러던 중 디오클레시안의 크리스천 박해가 일어나, 그는 체포되어 지하 감옥에 갇혔다. 그의 무덤은 헬레노폴리스에 있다.

 

 

1월 8일: 성 세베리오 증거자(+482)

5세기 중엽 지금의 ’소스트리아’ 지방이 사방에서 야만족의 침입을 받고 대단히 위험한 상태에 있었을 때, 뜻밖에 천사와 같이 나타나 말과 행실로써 사람들에게 고행과 사람을 권하고 또한 끊임없는 노력으로써, 마침내 지금의 오스트리아-당시의 ’노리굼’을 야만족의 손에서 구해낸 이가 세베리노였다. 그러나 이 거룩한 사제가 어디서 탄생하였는지 또 그의 고향이 어딘지는 알 수 없다. 그는 엄격하고도 거룩한 생활로 모든 사람들의 존경을 받았다. 그는 엄동설한에도 항상 맨발이었다. 음식은 종일 조금도 취하지 않을 때도 가끔 있었다. 그의 복장은 누추하고 그 조그마한 오막살이는 갈대와 진흙으로 만든 것 뿐이었다. 그러나 그는 대부분 집에 있지 않고 사방으로 돌아다니면서 사람들에게 기도와 자선을 가르치며 권면하였다. 그리고 자신을 위해서는 무엇 하나 구하지 않았으나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서는 애긍 청하는 것을 게을리 하지 않았다.

그는 곳곳에 그리스도교의 축복을 받게 하고 육신상의 자선사업을 행하였다. 그는 다뉴브강을 따라 비엔나애서부터 파소에 이르기까지 주민들에게 복음을 전하면서, 파소와 파비안느에 최초로 수도원을 세웠다. 그의 유해는 이탈리아로 옮겨졌다가 나폴리에 모셔졌다.

 

 

1월 8일: 성 아폴리나리스 주교(+179)

베드로와 바울로 성인의 순교 당시만 하여도 수명 내지 수십명의 신자를 가진 도시가 로마 외에도 꽤 있었다. 그 중에도 비교적 빨리 교회를 이룩한 지방은 바로 북이탈리아의 ’라벤나’ 시였고 그 창설자는 바로 아폴리나리스 주교였다. 그는 베드로 성인의 명을 받고 그 지방에 간 것이다. 여러가지 기적을 보였고 적지 않게 신자 수가 늘었으며 초대 주교가 되었다. 그의 기도로써 행한 기적중에 중요한 것이 셋 있다. 그 하나는 벙어리며 귀머거리던 귀족 ’보니파시오’를 치유한 것이고 둘째는 그의 딸을 위기에서 구해준 것이고 셋째는 ’루피노’라는 사람의 딸을 죽음에서 부활시켰다는 사실이다. 그의 눈부신 전교의 모습은 곧 세인들에게 전파되고 이교도들에게 적대시되었다. 그때 로마에 교회 박해가 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이교인 제관들은 그를 체포하여 총독에게 압송하였다. 2세기의 가장 유명한 크리스천의 옹호자인 그는 ’호교론자’라는 칭호를 얻었고 에우세비오, 예로니모 및 테오도레 등의 석학들로부터 극찬을 받은 분이다.

 

 

1월 9일: 성 율리아노와 바실리사 순교자(304년경)

고대 순교록에 의하면 율리아노와 바실리사는 비록 결혼하여 부부생활을 하였으나 서로 동의하고 합의하여 평생동안 정결을 지켰다고 한다. 그들은 엄격한 생활로 스스로를 성화시켰으며 수입을 가난한 사람과 병자들을 위하여 사용하여 늘 가난한 삶을 살았다. 이런 목적으로 그들은 자신들의 집을 개조하여 일종의 병원을 만들었는데, 어떤 때에는 수천 명의 사람들이 이용하여 늘 성시를 이루었다. 이런 소문이 퍼지자 박해의 손길이 이들 부부에게 다가와 영광스러운 순교의 월계관을 받게 되었다.

 

 

1월 10일: 성 아가토 교황(+681)

시실리 사람으로 팔레르모에서 20여 년 동안 결혼생활을 하였고 사업적으로도 꽤 성공한 그는 팔레르모의 성 헤르네스 수도원에서 수도자가 되었다. 그는 678년 도누스 교황에 이어 교황이 되었다. 재임 기간 가장 중요한 사건은 680년 11월- 681년 9월까지 열린 콘스탄티노블 공의회였다. 그는 대표자를 파견하고 서한을 통하여 그리스도 단성론자를 단죄하였으며, 천주성과 인성을 가지신 그리스도께 대한 믿음을 공고히 하였다.

콘스탄티노블의 대부분의 주교들은 ’아가토를 통한 그리스도의 말씀’이라고 대환영하며 이를 쾌히 수락하였다. 그리스도 단성론 이단은 이렇게 단죄되므로써 콘스탄티노블 공의회는 교회를 올바른 길로 이끈 6대 공의회 중의 하나가 되었다.

 

 

1월 10일: 성 베드로 오르세올로 총독(928-987)

뛰어난 군인으로 명성을 떨쳤던 그는 베니스 공화국의 재건을 주창하는 정치인의 자질도 가지고 있었다. 978년 그는 아내와 자식들에게도 알리지 않고 베니스를 떠나 피레네 산맥에 있는 쿡사 수도원으로 갔다. 그는 여기서 은수자로 몇년을 살다가 다시 베니스의 총독이 되었다. 수도원 부흥을 위하여 일하던 중 이에 반대하는 사람들에 의하여 살해당하였다.

 

 

1월 11일: 성 테오도시오 원장(423-529)

그는 30세쯤 되었을 때 집을 떠나 팔레스티나에 정착하여 베들레헴에 가까운 곳에 작은 공동체를 세웠다. 이 공동체는 크게 성장하였는데, 이곳의 수도자들은 국적과 언어가 다양하였고 주로 병자와 노인 그리고 정신 이상자들을 돌보았다. 그의 친구이자 동향 사람인 성 사바를 팔레스티나의 모든 은수자와 회수자의 우두머리로 앉힌 후 자신은 그전처럼 이 작은 공동체에서 수도자들을 이끌어 나갔다. 그는 105세 경에 운명하였다.

 

 

1월 11일: 성 히지노 교황 순교자

희랍 출신으로 교황이었다는 사실 외에는 별로 알려진게 없다. 그는 아마도 교황 텔레스포로를 계승하여 138년에서 142년까지 재위한 듯 보인다. 그는 재위 기간에 영지주의자인 발렌티노와 체르도와 논쟁을 벌려 정통 신앙을 고수한 것으로 여겨진다.

 

 

1월 11일: 성 살비오 주교(+625)

온갖 기적으로 유명한 그는 아도를 이어 아미앙의 주교좌에 착좌하였고 테오도릭 2세 치하에서 크게 번영하였다. 성인의 유해는 처음에 피카르디의 몽트레이유에서 공경을 받다가 나중에는 그곳의 베네딕토 수도원에 안장하였으며 또다시 아미앙 대성당에 이장되었다. 성 살비오가 순교자로 기록되었지만 놀란드 신부는 이에 대한 역사적 근거는 희박하다고 한다.

 

 

1월 13일: 성 힐라리오 주교 학자(315-367)

오늘의 프랑스의 보아디에 시인 ’갈디아’의 이교도 집안에서 태어난 그는 좋은 학교에서 공부하였지만 헛된 세속의 쾌락을 물리치고 학문에만 힘썼다. 우연히 책 한권을 얻게 되어 그 후부터는 하느님의 은총으로 그리스도교를 연구하기 시작하였다. 그리하여 자기가 오랫동안 동경하여 구하고 있던 종교라는 것을 확신하여 마침내 영세를 받고 거룩한 열심에 붇받쳐 그리스도교적 완덕에만 진력하게 되었다. 그리고 프와티에시의 주교가 서거하자 그는 그의 후계자로서의 최상의 적임자로 모든 사람들에게 인정되어 주교가 되었다.

그는 강력하게 아리아 이단을 배격하였다. 이 때문에 그는 아리안계 황제인 콘스탄시우스 2세로부터 프리지아로 추방되었는데 그는 이 기회를 이용하여 희랍의 신학 사상에 심취하여 큰 학자로 성장하였다. 그의 저서 중에서 가장 돋보이는 것은 ’삼위일체’이다. 또 그는 신자들에게 교리를 가르칠 때 음률을 붙인 찬미가를 활용하였다. 또 마태오 복음서와 시편의 주해서를 만들었다. 1851년에 그는 교회의 박사로 선언되었다.

 

 

1월 13일: 성녀 베로니카 수녀(+1497)

1445년 이탈리아의 밀라노 부근에서 태어난 그녀는 가난한 집안에서 제대로 배우지 못하고 자랐다. 하지만 부모는 그리스도교 신자다운 생활을 하며 좋은 표양을 보여 그녀는 어려서부터 신앙생활을 열심히 하였다. 그는 기도를 무엇보다도 좋아하고 또한 기도 중에 가끔 자연적 연구로서는 결코 얻을 수 없는 초자연적 지혜를 하느님께 받았다. 그러나 그는 여가만 있으면 기도하러 가면서도 그로 말미암아 집에서의 책임이나 또 여자로서의 할 일에 대해서 조금도 게을리하는 일은 없었다. 끝내 베로니카는 세속을 떠나 밀라노에 있는 아우구스티노 수도회의 수녀원에 들어가기를 원하였다. 그러나 보고 쓰는 것이 부족해서 그 때는 입회의 허락을 얻지 못하였지만 그는 조금도 실망하지 않고 여가를 이용, 공부에 힘 쓴 결과 입회하는데 충분한 학력을 얻을 수 있었다.

수녀원 내에서 가장 천한 일을 하기를 좋아하고 자기는 자매들 둥에서 제일 비천한 종이라고 항상 생각하며, 순종과 겸손으로 사랑하고 근심하면서 전혀 사람의 눈에 띄지 않고 그날 그날을 보냈다. 또는 그는 마음이 결백하기가 한이 없었지만, 심한 고행을 하며 몸을 괴롭혔다. 그 연고는 덕이 높고 결점이 없는 영혼은 안락하고 연약한 육체에는 머물지 않는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모든 사람들을 사랑하며 모든 사람들에게 사람을 받으면서 이 하느님의 종이 상급을 받기 위하여 이 세상을 떠난 것은 1497년이었다.

 

 

1월 14일: 성 펠릭스 사제(+260년경)

시리아인으로서 로마 군인이던 헤르미아스의 아들인 그는 이탈리아의 나폴리 교외인 놀라에서 자랐다. 부친이 사망하자 그는 아버지의 유산을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고, 놀라의 성 막시모 주교로부터 사제로 서품되었다. 그후 그는 성 막시모의 보좌로 활약하다가 그의 스승인 데치우스의 박해를 피하여 사막으로 갔을 때, 스승 대신에 체포되어 감옥에 갇혔다. 그러나 천사의 도움으로 감옥을 나온 그는 박해가 끝날때까지 피신하여 다녔다.

막시모가 서거하자 신자들은 이구동성으로 그를 주교로 모셨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연로한 사제 퀸투스에게 기울어지고 그는 가난한 사람들과 함께 생활하다가 그곳에서 운명하였다. 그리고 그의 무덤은 많은 기적이 일어났으며 성 바울리노가 놀라의 주교가 되었을 때 그의 선임자인 성 펠릭스에 대한 자료들을 많이 보완하게 되었다.

 

 

1월 14일: 성녀 마크리나 성부인(270-340)

성 바실리오(대)와 나사의 성 그레고리오의 할머니로서 이들의 성장에 결정적인 영향을 끼친 인물이다. 마크리나 부부는 네오체사레아, 폰투스 등지에서 살았는데 갈레리오와 막시미노의 박해 때문에 수많은 고생을 하였다. 그들은 박해자들의 손길을 피해 숲속에서 7년이나 숨어 있었으며 수없이 고생을 하였다. 로마 순교록 마크리나가 성 그레고리오 타우마투르고의 제자였다고 한다.

 

 

1월 15성 바울라 은수자(229-342)

에집트의 테베 출신인 그는 15세 때에 고아가 되었다. 데치우스 황제의 크리스천 박해를 피해 다니다, 매제가 자기 땅을 가로채기 위해 바울라를 크리스천으로 고발하려는 음모를 알고 사막으로 피신하였다. 그는 사막에서 은수자로 살기로 결심하고 자신에게 알맞는 은수생활을 고안하였다. 성 예로니모가 만년의 그를 방문했을 때, 성인은 이런 사람이 되어야겠다는 생각을 했다고 하며 그가 운명했을 때 장사까지 지내주었던 것이다. 또한 예로니모는 바울로의 전기를 썼는데 여기에 기록되어 있는 내용으로 보아 바울라는 113세까지 살았던 모양이다. 그러므로 90년 이상을 은수자의 삶을 살은 것이다. 지금에 와서 그는 최초의 크리스천 은수자로 공경받고 있다.

 

 

1월 15일: 성 마우로 원장(+6세기경)

성 베네딕토가 수비아코의 원장으로 있을 때, 영적아들 가운데 신심과 학덕이 뛰어난 인물이 마우로였다. 그가 처음 수도원에 왔을 때에는 겨우 12세의 어린 나이였으나, 결국은 베네딕토 성인의 보조자가 될만큼 성장하였다. 한번은 플라치도가 호수에 빠졌는데, 베네딕토 성인이 당신 방에서 영적인 눈으로 이 사실을 감지하고는 마우로로 하여금 그를 구하게 한 적이 있었다. 성 마우로는 이 공로를 스승에게 돌리는 순종의 은혜도 받았다. 성 베네딕토가 몬테 카시노로 가자, 마우로는 수비아코의 원장이 되었다. 얼마후 원장직을 사임하고 은수생활을 선택하였고 2년 뒤에 병을 얻어 운명하였다. 그는 성 마르티노 성당의 제대 우편에 안장되었다.

 

 

 

 

 

2 월의 성인

 1일 : 시게베르트 왕, 브리지다 동정녀

 3일 : 주의 봉헌 축일

 3일 : 블라시오 주교 순교자, 안스가리오 주교

 4일 : 안드레아 고르시니 주교, 요셉 레오니사 증거자, 아벤디노 주교

 5일 : 아가다 동정 순교자, 아비토 주교, 일본의 26위 치명 순교자

 6일 : 바울로 미키와 그 동료 순교자, 도로테아 동정 순교자, 베다스토 주교, 아만도 주교, 실바노 순교자

 7일 : 로무알도 원장, 테오도로 순교자, 모세 주교, 리차드 왕

 8일 : 예로니모 에밀리아노 순교자, 요한 마타 증거자, 스테파노 원장

 9일 : 치릴로 주교 학자, 안스베르트 주교, 니체포로 주교

10일 : 스콜라스티카 동정녀, 소테리아 동정 순교자

11일 : 데시데리오 주교 순교자, 루치오 주교 순교자

12일 : 에울랄리아 동정 순교자, 멜레시오 주교, 가우덴시오 주교

13일 : 가타리나 리치 동정녀, 아가보 예언자, 푸스카 동정녀, 그레고리오 2세 교황

14일 : 발렌티노 사제 순교자, 프로쿨로, 에페보 순교자, 아폴로니오 순교자

15일 : 파우스티노 순교자, 요비타 순교자, 아가페 동정 순교자, 제오르지아 동정녀, 그라톤

16일 : 오네시모 순교자, 율리아나 동정 순교자

17일 : 성모의 종 수도회 창설자 7성인, 아폴로니오 동정 순교자, 핀타노 사제, 율리아노 순교자

18일 : 시메온 주교 순교자, 막시모 순교자, 클라우디오 순교자, 플라비아노 주교 순교자, 헬라디오 주교

19일 : 콘라도 비아첸자 은수자, 가비노 사제 순교자, 만수에토 주교 순교자

20일 : 엘레우테리오 주교, 사돗 주교

21일 : 베드로 다미아노 주교 순교자, 도로테아 동정 순교자

22일 : 베드로 사도의 주교좌 기념, 마르가리다 고르도나 통회자, 파스카시오 주교, 아리스시오 증거자

23일 : 폴리카르포 주교 순교자, 로마나 동정녀

24일 : 에딜베르토 왕, 모데스토 주교

25일 : 타라시오 주교, 체사리오 증거자

26일 : 메히틸다 동정녀, 네스토르 주교 순교자, 포르피리오 주교, 파우스티니아노 주교

27일 : 가브리엘 중거자, 율리아노 순교자, 발도메로 증거자

28일 : 레안데르 대주교, 로마노 원장

 

 

2월 1일: 성 시게베르트 왕(+656)

프랑스왕 다고베르트 1세는 한동안 숨은 생활을 한 끝에 주님의 은총으로 아들을 낳았는데, 그가 곧 시게베르트이다. 이런 연유로 하느님을 믿게 된 그는 성 아만도 주교를 불러 아들에게 세례를 주게 하였다. 638년 아버지의 왕위를 이어받은 시게베르트 3세는 가능하면 전쟁을 피하였고 선정을 베풀었다. 그는 매일 기도하고 가난한 이들을 위한 구제사업과 수도원 건설을 적극 지원하였는데 12개나 되는 수도원을 세웠다.

 

 

2월 1일: 성녀 브리지다 원장(450-525)

아일랜드 루트의 던달크 근교인 포가르트에서 태어난 그녀는 수도생활에 큰 흥미를 느꼈고, 성 마카일로부터 크로그한에게 수도복을 받았고, 아르마그의 성 멜에 의하여 서약을 발하였다. 그녀는 얼마동안 크로그한 언덕 밑에서 7명의 동정녀들과 정착한 바 있으나 468년에 미트라는 도시로 갔다가 470년경에 킬다스에 두 수도원을 세우고 원장이 되었다. 아일랜드의 첫 번째 수도원인 이곳은 학문과 영성의 중심지로 발전해 나갔고, 킬다르의 주요 도시로 발전케 하였다. 그녀는 킬다르에 예술학교을 세웠으며 유명한 글을 다수 남겼다. 그녀는 당시 가장 유명한 여성 지도자로 여겨졌으며 성 골롬바와 성 바트라시오와 함께 다운패트릭에 묻혔으며, 그분들과 함께 아일랜드의 수호성인이다.

 

 

2월 3일: 성 블라시오 주교 순교자(+316년경)

그는 부유한 신자 가정에서 태어났으며 젊은 나이에 주교로 선출되었다. 그러나 언제 주교가 되었으며 활동하였는 지를 밝히는 역사적 자료은 거의 없다. 아르메니아의 세바스테아 주교인 그가 병자들을 치유하고 또 야생동물들을 보살펴 주는 것을 목격한 어떤 사냥꾼에 의하여 카파도치아의 총독 아그리콜라우스의 명에 따라 순교하였다. 8세기부터 그에 대한 공경이 동방과 서방교회에 두루 퍼졌다. 블라시오 축일에 인후를 축성하는 예절이 전해 오는데, 이것은 그가 목에 고기뼈가 걸려 사경을 헤매는 한 소년을 기적적으로 치료한 사실에 근거하였다. 이 예식에서 초 두 자루를 사용하는 것은 그 소년의 모친이 목에 갇힌 그에게 초를 가져온 사실에서 유래한다고 전해온다.

 

 

2월 3일: 성 안스가리오 주교(801-865)

함부르크의 아미앙 근교 귀족 가문에서 태어난 그는 피카르디의 옛 코르비 수도원에서 수도자가 되었다. 여기서 코르비에게 교육을 받고 베네딕도회 수사신부가 되었다. 덴마크와 스웨덴에서 선교사로 활동한 그는 돌아와 함부르크의 주교가 되었다. 덴마크의 왕 에릭을 개종시키기도 했지만 그것은 그의 뛰어난 설교력과 엄격하고 지독한 생활 그리고 수많은 기적들의 힘이었다. 북방쪽으로 사도직 활동을 펼친 그는 지금에 와서 ’북부의 사도’로 불리고 있으며 스칸디나비아의 첫번째 사도로 칭송받으며 높은 공경을 받고 있다.

 

 

2월 4일: 성 안드레아 코르시니 주교(1301-1373)

이탈리아 플로랜스의 귀족 가문에서 태어난 그는 원래 성질이 고약하고 문제아였지만 갑작스럽게 마음을 거쳐 먹고 1316년 플로렌스의 가르멜회에 입회하였다. 사제서품 후 오로지 기도와 연구에 몰두하였지만 1360년 이탈리아 피에소레의 주교가 서거하자 다른 사제들과 신자들이 그의 후임이 되어주기를 간청하였다. 그러나 그는 남몰래 도망을 했지만 기도도중 백의를 입은 한 아이인 천사가 나타나 "두려워할 것 없다. 나도 너를 보호하겠고 특별히 성모 마리아는 너를 도우리라"고 하여 돌아왔다. 그 후에도 그는 엄격한 생활을 그대로 계속했으며 종종 단식과 자기 몸을 매질하기도 하였다. 분쟁을 조정하는 특별한 재능을 가졌던 그는 볼로냐 시의 불안을 화해시키는 교황 사절로 임명되어 맹활약을 보였다. 1373년에 주의 품으로 올라간 그는 55년동안 수도생활을 한 것이다. 1373년 코르시니 가문 출신인 교황 클레멘스 12세에 의하여 로마의 성 요한 라테란 성당에 그를 기념하는 성당이 세워졌다.

 

 

2월 5일: 성녀 아가다 동정 순교자(+251년경)

확실한 근거는 아니지만 그녀는 시실리의 카타리나 혹은 팔레르모에서 태어났다. 그의 집안은 부요하였으며 신심이 깊었고 하느님께 스스로 정결을 서원하였다고 전한다. 251년 데치우스 로마 황제의 박해 중에 시실리에서 순교하였는데 전설에 의하면 아녜스 성인과 마찬가지로 신문도 받고 창녀의 집에 보내졌지만 능욕을 당하지 않고 보호되었으며 나중에는 처형당하였다. 아가다는 팔레르모와 가타리나 두 지방의 수호 성인이다. 그녀가 죽은 이듬해에 에트나산의 화산이 멈춘 것은 성녀의 전구 덕분이라고 한다. 그 결과 사람들은 불에서 보호받기 위하여 성녀의 기도를 계속 간청하게 되었다. 그녀는 간호원의 수호성인이기도 하다.

 

 

2월 5일: 성 아비토 주교(+525년경)

오베르뉴 사람인 그는 490년 부친 이시치오에 이어 비엔나의 주교로 임명되었다. 파비아의 성 에피파니오에 의하면 성 아비토는 지식의 보고였고 부르군드군이 알프스를 넘어 많은 리구리아 사람들을 포로로 잡아갔을 때에도 대속금을 지불하여 구출하기도 했다. 거의 모든 그의 작품들이 유실되었지만 다섯편의 시와 수녀들의 동정에 관한 글 그리고 ’인류의 영성에 대하여’란 제목이 붙은 글은 남아 있다. 이외 78통의 서한과 2권의 강론집 기타 25종의 유품은 그의 능력과 성덕을 증명하고도 남음이 있다. 그는 신학자이기보다는 서간문의 대가였다.

 

 

2월 6일: 성 바울로 미키와 그 동료 순교자(+1597년)

일본 무사의 아들로 태어난 바울로 미키는 예수회 대학에서 교육받은 후 1580년에 예수회 회원이 되었다. 일본의 순교자들 중 가장 유명한 그는 설교에 능하였으며 도요토미 히데요시 치하의 박해 때 25명의 다른 신자들과 함께 나가사키 근처에서 십자가형을 받고 순교하였다. 그들 가운데에는 신부들과 수사들, 평신도, 프란치스코회 회원, 예수회 회원, 프란치스코회의 제3회원 등이 있었으며 교리교사와 학자, 단순한 기능공과 하인들도 있었고 노인과 무죄한 어린이들도 있었다. 그들 모두는 예수님과 그분의 교회에 대한 공통된 믿음과 사랑 속에 일치되어 있었다. 이들은 모두 1862년 일본 순교자들로 시성되었다.

 

 

2월6일: 성녀 도로테아 동정 순교자(+303)

그녀는 가바도치아의 체사레아에서 살았는데 초대 그리스도교 신자중 덕행이 뛰어났다. 이교도 가이자리아 총독한테 구혼을 받았을 때 상대자의 부도덕성을 싫어하고 자신의 신앙의 입장을 생각하고 거절하였다. 그러나 총독은 꾀를 내어 품행이 좋지 않은 소녀 둘을 보내어 그녀를 유혹하려고 했지만 도리어 그녀의 열렬한 신앙에 감동되어 회개하게 되었다. 이 사실에 분노한 사프리디오 총독은 모두를 그리스도 신자로 체포하였다. 도로테아는 횃불로 옆구리 지짐을 당하고 형언키 어려운 형별을 당하였지만 하느님께 의탁하여 끝까지 잘 인내하였다. 그녀의 태도에 놀라 감동한 테오필도 라는 이교도 변호사는 그녀의 뒤를 따라 순교했으며 그녀로 인하여 회개의 은혜를 얻은 두 소녀도 자신의 피를 흘리며 전죄를 보속하고 순교의 화관을 받았다.

 

 

2월 6일: 성 베다스토 주교(+539)

젊어서 고향을 떠나 서부 프랑스로 간 그는 툴 교구에서 세상을 멀리하고 살고 있던 중에 주교의 눈에 뛰어 사제가 되었다. 그때 프랑스왕 클로비스가 타임스로 가서 세례를 받고자 할 때, 그의 여행중에 자신을 준비시켜 준 수도자가 베다스토였다. 그들 일행이 아이들강을 지날 때 어떤 맹인이 그에게 눈을 낫게해 달라고 애원하였다. 베다스토는 하느님께 기도하고 그의 눈 위에 십자가를 그었는데 그 즉시 시력이 회복되는 기적이 일어났다. 이 기적은 왕의 신앙을 굳게 하였을 뿐만 아니라 수많은 프랑스 사람들의 개종이 자연스럽게 이루어지는 계기가 되었다. 그후 베다스토는 성 데미지오를 도우다가 그로부터 아라스의 주교가 되었다. 그는 40년동안 주교로 활동하다가 선종하였다.

 

 

2월 6일: 성 아만도 주교(584-679)

프랑스 포아투의 낭트에서 태어난 그는 왜 섬의 수도원에서 604년경에 수도자가 되었다. 투르에서 사제가 된 그는 15년간 부르쥬스에서 은수자로 살았다. 로마 순례길에서 돌아오는 중에 그는 선교지 주교로 임명받았으며 플란데르, 카란시아, 독일 등을 두루 다니며 선교 활동으로 일생을 보냈다. 그는 다고베르트 1세 왕을 비난한 죄목으로 추방되었다가 재차 소환되었으며 여러가지 어려움을 극복하였다. 겐트 지방의 복음화에 큰 성공을 거둔 그는 벨지움에 수많은 수도원을 세웠고 나중에 마에스트릭트의 주교가 되었지만 3년 후에 사임하고 계속 선교활동에 헌신하였다.

 

 

2월 7일: 성 로무알도 원장(970-1027)

이탈리아 라벤나의 귀족 가문에서 태어난 그는 클라세의 산 아폴리나레 수도원에서 수도자가 되었다. 그후 그는 더욱 엄격한 생활을 위해 베니스 교외에 살던 마리노라 불리는 은수자의 제자가 되었다. 978년경 베니스공화국 총독 베드로 오르세올로는 마리노와 로무알도를 국사로 데리고 와서 살게 함으로써 이들은 수도원 가까운 곳에 은둔소를 짓고 은수자로 살았다. 그후 부친이 수도자가 되었음을 알고 만나기 위해 이탈리아로 갔는데 이때 오토 3세 황제로부터 아폴리나레의 원장이 되었다. 그는 이것을 원치 않았으므로 2년 뒤에 사임하고는 페레움 교외에서 은수생활을 하였다. 그후 헝가리의 마지아르족에게 복음을 전하려다가 강제로 쫓겨나 고향으로 돌아왔으나 고령에 따른 질병으로 인하여 운명하고 말았다. 그가 세운 다섯 곳의 은둔소 가운데 카마돌리에 세운 곳은 뒤에 카마돌리회의 모태가 되었다.

 

 

2월 7일: 성 테오도로 순교자

폰투스의 테라클레아 시민인 그는 리치니우스 황제군의 장군이자 폰투스와 인근 지역의 지방 장관이었다. 그러나 그가 크리스천으로 드러남으로써 고문을 받고 참수치병되었다. 테오도로는 가끔 ’장군’이라고 불리우며, 희랍인들이 ’가장 위대한 순교자’라고 부르는 네 명의 순교자 가운데 한 분이다.

 

 

2월 7일: 성 모세 주교(+372년경)

아랍인인 그는 오랫동안 시리아와 에집트 사이의 리노클루라에서 은수자로 살았다. 이 지방은 주로 사라센 유목민들이 거주하는 땅으로써 별을 섬기는 자들이 주축을 이루고 있었다. 알렉산드리아의 주교 루치오는 그를 주교로 축성하여 선교사업을 주도하기를 희망하였으나 그가 아리아계 주교였음으로 모세는 이를 거절하였다. 이윽고 그는 정통파 주교가 되었으며 로마인과 사라센인 간의 평화를 유지시키는데 큰 역활을 하였다.

 

 

2월 7일: 성 리차드 왕(+720)

720년 봄, 일단의 순례단이 성지를 향하여 떠났는데, 이들은 웨섹스가의 사람들로서 부친의 이름은 모르고 그 아들 이름들은 월리발드와 위느발드였다. 그들은 세느강을 따라 루앙에 상륙하여 프랑스의 성지를 둘러보고 로마에 도착했는데 이때 그들의 아버지는 루가에서 운명하여 성 프리지디안 성당에 묻혔고 그의 아들 월리방드는 바바리아의 아이크슈팻트의 초대 주교가 되었다. 그런데 이 아들의 부친이 리차드 ’왕’이라고 증언한다. 그러나 실제로 영국의 왕인지는 분명치 않다. 하지만 로마 순교록에는 ’잉글랜드의 왕 성 리차드’라고 기록되어 있다.

 

 

2월 8일: 성 예로니모 에밀리아노(1481-1537)

이탈리아 베니스의 귀족 가문에서 태어난 그는 상류사회의 관습에 따라 어려서부터 공부에 힘썼으나 15세 때 학업을 중지하고 군대에 입대하였다. 조심성도 없고 신앙심도 없던 그는 베니스공화국의 군인으로서 도시의 전초지에서 벌어진 작은 전투에서 포로가 되어 지하감옥에 갇혔다. 여기에서 그는 반성할 기회를 얻고 성모님의 도움을 간구하며 기도하는 것을 배웠다. 그후 감옥에서 탈출하여 베니스로 돌아온 그는 조카들의 교육을 맡았고 자신도 사제가 되기 위한 공부를 시작하였다.

사제가 된 그는 점염병과 기근으로 어려워진 북부 이탈리아에 자신의 돈을 써가면서 병자들을 돌보고 굶주린 사람들을 먹여 살리기 시작하였다. 병든 사람과 가난한 사람들에 대한 그의 봉사는 곧 그로 하여금 오직 다른 사람들 특히 버림받은 어린이들에게 병원 그리고 회개한 창녀들을 위한 피난처를 하나 마련했다. 1532년경 예로니모는 두명의 다른 사제와 고아를 돌보고 청소년 교육을 담당하게 될 수도회를 설립했다. 1928년 교황 비오 11세는 그를 고아들과 버림받은 어린이들의 수호자로 임명했다.

 

 

2월 8일: 성 스테파노 원장(+1124)

오베르뉴 티에르 자작의 아들인 그는 부친을 따라 이탈리아로 갔다가 수도자의 꿈을 실현하였다. 그는 칼라브리아에 널리 알려진 몇몇 수도자들의 표양을 따르는 공동체를 프랑스에 세울 허가를 교황청으로부터 받았던 것이다. 1110년경 그는 리모쥬 교외에 뮈레에 수도원을 세웠다. 그는 회칙을 쓰지 않고 다만 이렇게 말했을 따름이다. "그리스도의 복음 외에는 다른 회칙은 없다"

그는 청빈과 무소유를 강조했고 모든 수도자가 은둔소 밖을 나다닐 수 없으며 평수사들이 수도원 관리를 전적으로 맡게하였다. 그랑몽회로 알려진 이 수도회는 잉글랜드의 헨리 2세 왕의 후원을 크게 받았다.

 

 

2월 9일: 성 안스베르트 주교(+695)

국왕 클로테르 3세의 수상이었던 안스베르토는 결혼의 의무와 정치인의 직분 그리고 수도자 잠심 전신을 통합시킨 인물이었다고 한다. 후일 그는 성 반드레지실리오의 지도아래 폰페넬레에서 리용의 주교로 선임되었다. 그는 국왕 테오도릭 3세의 고해 신부였고 684년에는 루앙의 주교가 되었다.

 

 

2월 9일: 성 니체포로 순교자

안티오키아의 니체포로는 평신도였는데 사프리치오라는 사제로 인해 순교하게 되었다. 이 두 사람은 자주 싸움질을 하던 사이였는데 사프리치오가 체포되어 사형선고를 받고 끌려가는 중에 화해를 요청하였다. 그러나 그는 등을 돌렸다. 이 사제가 참수당하는 순간에 어찌된 영문인지 배교하고 말았다. 그후 니체포로는 그 사제를 찾아가 또 화해를 요청하였으나 거절당하자 자신도 크리스천임을 밝혔다. 그는 이 사제의 고발로 발레리안의 박해 때에 순교하였다.

 

 

2월 10일: 성녀 스콜라스티카 동정녀(480-543)

그녀의 쌍동이 오빠 베네딕도는 스콜라스티카와 함께 어릴 때부터 하느님께 봉헌하는 삶을 살아왔는데 각자 수도 공동체를 세웠다. 그후 그녀는 몬테카시노 근처에 살았는데 혼자인지 아니면 공동생활을 했는지는 분명하지 않다. 이 당시에 그녀는 일년에 한 두 번 오빠를 만났다. 어떤 기록에 의하면 그녀는 오빠의 지도를 받아 수도원을 세우고 원장으로 지냈다고 하는데, 몬테카시노와 가까이 있는 플롬바리올라 수도원이라 한다. 성 그레고리오 교황의 ’대화집’에 보면 이 남매는 기도와 담화를 나누며 그들의 마지막 날을 보냈다고 한다. 그녀는 죽음의 순간이 다가오자 오빠에게 다음날까지 함께 머물러 달라고 간청했다.  하지만 베네딕도는 자신이 세운 수도원 규칙을 깨뜨릴 수 없어 거절했다. 그러나 그녀는 하느님께 기도하여 심한 폭풍우가 쏟아져 베네딕도와 그의 수사들은 수도원으로 돌아갈 수 없게 되었다. 그래서 그녀는 오빠의 손을 잡고 편안히 하느님께로 올라갔다.

 

 

2월 10일: 성녀 소테리아 순교자(+304)

그녀는 어느 집정관의 딸이었는데 그리스도를 위하여 자신의 신분과 재산 그리고 아름다운 모습까지 포기하고 오로지 하느님께 봉헌했다. 자신의 신분과 미모 때문에 수없이 많은 유혹과 위험을 당하였던 그녀는 모든 장신구를 떼어버리고 평민의 옷차림을 하고 다녔다. 디오클레시아노와 막시미안 황제의 크리스천 박해가 다가오자 단호히 순교할 결심을 하고 판관에게 끌려갔다. 판관은 귀족의 딸이어서 처음에는 조심스럽게 회유시키려 노력하다가 결국은 모진 고문 끝에 참수치명을 하였던 것이다. 이때 그녀의 나이는 불과 15세였다.

 

 

2월 11일: 성 루치오 주교 순교자(+350)

성 에우트로피아 사후에 마체도니아의 아드리아노플 주교좌를 세운 분이 루치오 주교이다. 여기서 그는 콘스탄티노블의 주교인 성 바울로와 만났다. 그는 또 그 후에도 온갖 박해를 받다가 결국은 순교하니, 그의 친구이던 성 아타나시오는 성 루치오의 용기와 항구심을 높이 기리는 글을 남기기도 했다.

 

 

2월 12일: 성 멜테시오 주교(+381)

남 아르메니아의 멜리테네 출신인 그는 358년 세바스테아 주교로 임명되었지만 원하지 않은 일이었기에 사막으로 피신했다. 361년 아리아파와 가톨릭이 안티오키아의 대주교로 그를 서로서로 추천하였으나 나중에 아리아파의 개입 이유를 들어 유배되었다. 한편 그를 옹호하는 사람들에 의하여 멜레시오 이교가 발생하니 이때부터 성 아타나시오와의 사이에 큰 논쟁이 벌어지게 되었다. 374년 교황 다마소가 바울리노를 총주교로 임명함으로써 사건은 더욱 복잡하게 되었으나 아리아파 황제인 발렌스가 사망함에 따라 알단락되었다. 그는 극심한 교회 혼란의 와중에서도 수도자와 같은 훌륭한 삶을 살았던 뛰어난 인물이다.

 

 

2월 13일: 성녀 가타리나 리치 동정녀(1522-1590)

1522년 태어난 그녀는 네살때 어머니를 여의고 대모의 손에서 자라났다. 성인이 되어 아버지의 두 숙모가 있는 도미니코회의 수도원에서 교육을 받은 그녀는 아버지를 설득하여 수녀가 되었다.그가 가장 즐거워하는 것의 주의 수난을 묵상하며 십자가 앞에서 무릎꿇고 기도하는 것이었다. 그녀의 좋은 감각과 정성을 다하여 맡아온 수련직과 장상직을 사임하였는데 그녀의 놀라운 신앙 체험들은 많은 여론을 불러 일으켰다. 예를 들어 매주일 같은 시간에 아주 오랫동안 탈혼하였는데, 이때 그녀는 되살아나신 그리스도의 수난에 흠뻑 취하곤 하였다. 이러한 현상은 12년 동안이나 정기적으로 일어났다. 또는 그녀의 편지에 나타난 바로는 교회개혁 운동에 노력을 다하였다. 가타리나는 필립보 네리와 가롤로 보로메오 그리고 성 비오 5세와 함께 현대 교회의 개혁자로서 높은 칭송을 받아온다.

 

 

2월 13일: 성 아가보 순교자(1세기)

예루살렘 출신인 예언자였던 그는 안티오키아에 가서 로마 제국의 기근을 예언하였으며 이 일은 클라우디오 황제의 재임 기간인 49년에 실제로 일어났다. 그는 성 바울로의 투옥을 예견했던 아가보와 동일 인물인듯 하다. 전승에 의하면 그는 안티오키아에서 순교하였다.

 

 

2월 14일: 성 치리로 수도자(+869)와 성 메토니오 주교(+884)

이들은 희랍의 데살로니카 태생인 형제들로서 원로원의 자녀였다. 치릴로는 콘스탄티노블의 왕립 학교에서 공부하고 사제가 되었고 메토니오는 은수자가 되었다. 이들은 카쟈르 언어를 배워 많은 개종자를 얻었으며 글라골로틱이라 부르는 알파벳을 창안하였는데 이것이 슬라브어의 시작으로 기록되고 있다. 스라브어의 사용의 여러 반발을 무릅쓰다 아드리안 교황으로부터 인정을 받았다. 치릴로는 오랫동안 수도자로 인정을 받지 못하다가 로마에서 수도복을 받은 지 50일 만에 죽었다. 치릴로가 죽은 뒤 메토니오는 16년 동안이나 선교사업을 더 계속했다. 그는 교황사절로서 모든 슬라브 민족에게 파견되었으며 주교를 서품하고 기근의 유고슬라비아 지역에 주교좌를 마련했다.

바바리아의 주교들은 그들이 소유하고 있던 종전 관할구역 대부분이 그들의 관할권으로부터 벗어나게 되자 메토니오에 대해서 맹렬한 비난과 고발로 맞섰다. 감정을 품고 있던 프랑스의 성직자들은 메토니오를 이단자로 고발했고 주교좌 성당에서 제자들에게 둘러싸여 성목요일에 죽었다.  그가 죽은 뒤에도 반대는 계속되어 모라비아에서 이룬 이 형제들의 업적은 수포로 돌아갔고 제자들은 뿔뿔히 흩어졌다. 그러나 이러한 추방은 이 형제들의 영적, 전례적 문화적 업적을 불가리아, 보히미아 그리고 남부 폴란드에까지 퍼뜨리는 좋은 결과를 가져왔다.

 

 

2월 14일: 성 발렌티노 순교자(+269년경)

로마의 사제이자 의사이던 그는 클라우디우스 교황의 크리스천 박해 때 참수치명되었다. 교회내에서 가장 인망이 높고 덕행으로도 출중하였으므로 당시 교회를 박해하고 있던 황제는 일찍부터 그를 주목하고 배교하기를 명하였다. 그러나 본래 열렬한 신앙을 가진 그가 배교할 리 만무하였다. 그는 어떠한 위협에도 성교회를 버리지 않으므로 황제는 적당한 조치를 위해 로마 시장에게 보내 법관 아스테리오에게 인도되었다. 그런데 아스테리오의 딸이 2년 전부터 소경이 되어 있었는데 발렌테노는 하느님을 증명하는 절호의 기회라고 생각하고 정성껏 기도하였다. 곧 딸의 눈이 떠지자 아스테리오는 하느님의 능력의 위대함에 놀라 개종할 것을 결심하고 일가족 40명이 모두 세례를 받았다. 이 사실을 안 황제는 분노하여 즉시 병졸들을 보내어 체포하게 하였다. 그래서 플라미니노의 회당에서 몽둥이에 맞아 죽어 플라미니안에 묻혔다.

 

 

2월 15일: 성 파우스티노와 요비타 순교자

이 두 분은 형제인데 브레쉬아에서 태어났다. 브레쉬아에 박해가 시작될 때 그들의 주교가 은신하였으므로 그들은 겁없이 크리스천 교리를 가르치고 설교하였다고 한다. 그들의 열심은 교회를 싫어하는 사람들을 자극하여 체포되기에 이르렀다. 수없이 고문 당하고 이리저리 끌려다니다 풀어줄 것을 종용하였지만 그들이 개종시킨 신자의 수효가 너무 많아 하드리안 황제가 참수하도록 직접 명을 내렸다.

 

 

2월 15일: 성녀 아가페 동정 순교자

그녀는 움브리아의 떼르니에서 특별한 공경을 받으며 이 도시의 수호 성인이다. 전설에 따르면 당시 떼르니에 살고 있던 그녀는 수녀처럼 생활하려는 여자들을 모아 공동체를 만들고 지도했다. 그녀는 성 발렌티노의 서거 후 얼마 지나지 않아서 순교의 월계관을 쓰게 되었다.

 

3 월의 성인

 1일 : 구잇베르토 주교, 알비노 주교, 다빗 주교, 에우도치아 순교자, 안토니나 순교자

 2일 : 프리돌리노 수사, 요비노 순교자, 심플리치오 교황

 3일 : 구네군다 황후 동정, 마리노 순교자, 아스데리오 순교자

 4일 : 가시미로 증거자, 루치오 1세 교황, 아드리아노 순교자

 5일 : 포카스 순교자, 디오니시오 순교자, 테오필로 주교

 6일 : 마르치아노 주교, 빌프리도 수도자

 7일 : 바울로 은수자, 고디오소 주교

 8일 : 요한 수도자, 아폴로니오 순교자, 필레몬 순교자, 베레문도 동정녀

 9일 : 파치아노 주교, 메토디오 주교, 헤레니아 순교자, 가타리나 동정녀, 프란치스카 로마나 수절

10일: 심플치오 교황, 아탈라스 원장, 마카리오 원장, 아나스타시아 동정녀

11일: 피르미노 원장, 콘스탄틴 순교자, 소프로니오 주교, 알베르타 동정녀, 아우레아 동정녀

12일: 테오파네스 원장, 베르나르도 주교, 세라피나 동정녀

13일: 솔로몬 순교자, 로데리코 순교자, 니체포로 주교, 마체도니아 순교자, 파트리치아 순교자, 크리스티나 동정녀, 모데스타 순교자

14일: 레오비노 주교, 아프로다시오 순교자, 마틸다 황후, 바울리나 동정녀

15일: 론지노 군인, 자카리아 교황, 클레멘스 증거자, 마트로나 동정녀, 루도비카 동정녀

16일: 아브라함 은수자, 헤리베르토 주교, 아가비토 주교, 데니스 순교자, 에우세비아 동정녀

17일: 파트리시오 주교, 아그리콜라 주교, 요셉 증거자, 젤투르다 동정녀

18일: 치릴로 주교·학자, 니르치소 순교자, 알렉산델 주교, 안셀모 주교, 살바도르 증거자, 프레디아노 주교

19일: 제모 증거자, 란드알도 증거자, 과르틸다 순교자

20일: 울프람 주교, 굿벨도 주교, 헤르베르토 은수자, 포티나 순교자, 갈디아 순교자

21일: 엔다 원장, 필레몬 순교자, 루비치노 원장

22일: 데오그라시아노 주교, 다레르카 수절, 레아 수절

23일: 빅토리아노 순교자, 프루멘시오 순교자, 도미시오 순교자, 투리비오 주교, 아퀼라 순교자, 펠라지아 순교자

24일: 로물로 순교자, 세군도 순교자, 라티노 주교, 힐데리다 동정녀, 가타리나 동정녀

25일: 하롤드 순교자, 디스마 우도, 루치아 동정녀

26일: 가스툴로 순교자, 룻제로 주교, 펠리치타스 동정녀, 테클라 순교자

27일: 요한 다마세노 학자, 요한 은수자, 아우구스타 동정녀, 리디아 순교자

28일: 요한 가피스트라노 증거자, 식스토 3세 교황, 군트람노 왕, 브리스코 순교자, 군데린다 동정녀

29일: 요나 순교자, 바라치시오 순교자, 루돌프 주교, 파스돌 주교, 글라디스 수절, 라사라 동정녀

30일: 요한 클리마코 원장, 조시모 주교, 파스돌 주교

31일: 알도 증거자, 벤야민 부제 순교자, 발비나 동정녀

 

 

 

 

 

3월 1일: 성 알비노 주교(+550)

브리타니의 반느 교구에서 태어난 그는 젊어서 틴실락 수도원에 입회하여 신앙심이 깊었다. 35세 때 수도원의 원장이 된 그는 지혜롭게 이끌어 최고의 전성기를 가져오게 했다. 529년에 앙제의 주교좌가 공석이 되었는데, 교구민들이 그에게 몰려와 주교가 되어 달라고 간청하였다. 수도자의 신분으로서의 삶을 원했던 그는 완강히 거부하다가, 랑느의 주교이던 성 멜라노오의 간청에 못이겨 주교가 되었다. 그는 매일 설교하기로 유명하였고 병자나 가난한 과부들 곁에서 돌보는 삶을 살았다. 또한 노예의 대속금을 지불하느라 자금을 마련하였고, 외교인의 개종에 노력했다.

 

 

3월 2일: 성 심플리치오 교황(+483)

이탈리아의 티볼리에서 태어난 그는 468년 3월 3일에 교황 성 힐라로를 이어 교황이 되었다. 그는 그리스도 단성론 이단을 단죄했던 칼체톤 공의회의 활동을 옹호하였고, 야민족의 침략으로 도탄에 빠진 이탈리아 백성들의 구제 사업에 헌신하였으며, 로마 제국의 멸망을 지켜보았던 격동기 교황이었다.

 

 

3월 3일: 성녀 구네군다 동정녀(+1033)

아주 어릴 적부터 신심교육을 받은 그녀는 바바리아의 공작인 성 헨리코와 결혼했지만 결혼식날 동정서원을 맹세했다. 남편 헨리코는 로만스의 왕으로 추대되었고 그들은 1013년 로마로 가서 교황 베네딕도 8세로부터 황제관을 받았다. 이러한 가운데에도 구네군다는 중상자들의 희생물이 되었고 남편으로부터 의심받기도 하였다. 그녀는 황제에게 부탁하여 밤베르크 대성당을 비롯한 수많은 성당과 수도원을 짓게 하였고, 교황 성화가 직접 오시어 축성하도록 주선하였다. 그러던 중에 큰 병을 앓게 되었으며 카우푼겐 수도원을 완공할 때쯤 남편은 운명하였다.

그후 그녀는 주교로부터 수녀복을 받고, 하느님께 자신을 봉헌하는 수도자의 삶을 살았다. 그녀는 지난날의 황녀로서의 부귀영화를 잊고 비천한 환경과 초라한 수도원에서 기꺼이 살았으며 하느님 앞에 흠 없는 삶을 살았기에 주위 사람들로부터 높이 칭송받고 있다.

 

 

3월 4일: 성 가시미로 증거자(1458-1484)

폴란드의 국왕 가시미로 4세와 독일의 엠페롤 2세의 딸인 오스트리아의 엘리사벳 사이에서 태어난 13명의 자녀 가운데 셋째인 그는 크라카우 궁성에서 태어난 요한 들루고즈 신부로부터 교육받았다. 그는 어릴때부터 성스럽고 엄격한 생활, 그러나 사랑이 충만한 생활을 원하였다. 또한 부친이 자신을 결혼시키려는 노력을 일축하고 학문과 기도 생활에만 전념했다. 부친이 폴란드를 떠났던 1479년-83년까지 부왕 노릇을 하였으며 리투아니아를 방문하던 길에 그로드노 궁성에서 운명하였다. 빌나에 있는 그의 무덤에는 수 없는 기적이 일어났다고 하여 아드리아노 6세에 의하여 1522년에 시성되었다. 그는 폴란드와 리투아니아의 수호성인이다.

 

 

3월 5일: 성 포카스 순교자

그에 대해선 로마순교록에 기록된 내용뿐이다. 그 내용을 보면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구세주의 성명 때문에 많은 고난을 받았으나 늙은 뱀을 쳐이겨 마침내 그는 승리하였다. 간교한 뱀의 유혹에도 불구하고 강한 믿음을 끝까지 지켰다. 그의 유해는 안티오키아의 성 미카엘 성당에 안장되어 공경을 받고 있다.

 

 

3월 7일: 성 바울로 은수자(+339)

평생 막노동을 했던 그는 60세 만년에 이르러 아내를 떠나 성 안토니오를 찾아나섰다. 이때 안토니오 성인은 에집트의 티베에 있었으며 그가 너무 나이가 많아 제자로 삼길 꺼렸었다. 그러나 바울로의 항구심에 탄복한 안토니오는 제자로 받아들였다고 한다. 그후 바울로는 겸손과 열성 그리고 순종에서 뛰어난 덕행을 보이므로 은수생활을 할 수 있는 움막을 받을 수 있었다. 그는 치유의 은사를 받았고, 다른 사람의 마음을 꿰뚫어 보는 능력도 있었으며 수도자의 이상을 안토니오에게 심어줄 정도로 위대한 삶을 살았다. 그는 순진무구한 마음 때문에 ’단순한 사람’이라는 별명을 얻었다.

 

 

3월 8일: 성 필레몬과 아폴로니오 순교자(+305년경)

아폴로니오는 테바이의 안티노에의 부제이고, 필레몬은 대중음악가이자 연예인이었다. 그들은 디오클레시아노의 크리스천 박해 때에 아리안이라는 판관 앞에 끌려갔다. 그후 이들은 알렉산드리아로 이송되어 바다로 던져지는 형을 받고 순교하였다.

 

 

3월 9일: 성 프란치스카 로마나 수절 수녀(1384-1440)

그녀는 부유한 로마 귀족가문에서 태어나 13세때 로렌조 폰치아니와 결혼하여 40여 년 동안 이상적인 결혼의 모델처럼 살았다. 그녀는 어릴 적부터 금욕적인 기질이 강하였고, 다른 사람들의 고통에 대하여 깊은 애정을 표현하곤 하였다. 흑사병과 내란으로 사회가 혼란할 때에도 그녀는 자선활동을 통하여 하느님의 사랑을 증거하기 시작하였다. 조직적인 봉사활동과 간호활동으로 유명한 그녀는 마리아의 봉헌회를 조직하였다. 건강이 좋지 않던 남편이 1436년에 죽자 그녀는 본격적으로 이 회에 뛰어들엇고 총장으로 선출되었다. 그녀는 로마에서 최후를 마칠 때까지 엄격한 생활과 더불어 자선활동에 전념하였다. 또한 수차례의 환시를 경험한 그녀는 탈혼과 치유의 기적을 행하였고 예언의 은혜도 받았다. 1608년에 시성되었는데 자동차 사용자의 수호 성인으로 서품되었다.

 

 

3월 10일: 성녀 아나스타시아 은수자

에집트 출신으로 콘스탄티노블 궁중의 시녀였던 그녀는 미모가 뛰어나 황제 유스니안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그래서 황후 테오도라의 질투가 극에 달했다. 온순하고 마음이 착한 그녀는 늘 하느님을 두렵게 여기며 살았으므로, 황제의 총애와 황후의 질투를 피해 수녀원으로 숨어 버렸다. 황제는 밤낮으로 그녀를 잊지 못하다가, 테오도라가 죽은 뒤로 그녀를 찾으려고 노력하였다. 이 소식을 들은 그녀는 사막으로 은신하여 지내다가 다니엘 원장이 지도하는 공동체에 들어갔는데, 다니엘은 그녀를 어느 동굴에서 지내도록 배려하였다. 그리하여 그녀는 기도와 고행을 통해 높은 경지에 도달했던 것이다. 그후 그녀의 유해는 콘스탄티노블로 이송되어 성대하게 안장되었다.

 

 

3월 11일: 성 콘스탄틴 순교자(6세기경)

전설에 의하면 콘윌의 왕이 브리타니 왕의 딸에게 그를 결혼시켰다고 한다. 그리고 그의 아내가 왕위를 계승하였으나 곧 사망하였으므로 그는 자기 아들에게 왕위를 양보하고, 아일랜드 타핸의 모쿠다 수도원에서 은수자가 되었다고 한다. 수도원에서 매우 하찮은 일을 맡아하던 그는 신학을 공부하여 사제가 되었다. 그 후 성 골룸바를 따라 스코틀랜드로 선교 여행을 떠났는데, 갈로웨이에서 오랜동안 설교하여 많은 업적을 쌓았다. 그원의 수도원장이 된 그는 킨티르로 돌아오는 길에 해적들의 습격을 받았다. 부자비한 해적들이 그의 오른팔을 잘라, 얼마 후 운명하게 되었다. 그는 스코틀랜드의 첫 순교자로 추앙받고 있다.

 

 

3월 12일: 성녀 세라피나 동정녀(+1253)

투스카니의 산 제미니아노의 몰락한 어느 가정에서 태어난 그녀는 마음이 착해서 자신의 어려운 처지에서도 적은 음식도 나누어 주는 성격이었다. 그는 집에서 은수자처럼 살았는데, 낮에는 수예 등으로 가사를 돕고 밤에는 기도에만 전념하였다. 아버지의 죽음 이후 중병에 걸린 그녀는 16년 동안이나 누워서 고통을 감수해야 했다. 하지만 불평 한마디없이 ’나의 상처보다 그리스도의 상처’가 더 마음 아프다고 말할 뿐이었다. 그후 그녀는 늘 공경하던 성 대 그레고리오의 발현을 보았고 1253년 운명한 후 무덤에서는 매일같이 기적이 일어나서 그녀의 높은 성덕을 증명하였다고 한다. 이 사건을 계기로 산 제미니아노 농부들은 흰 오랑캐꽃을 산타피나의 꽃으로 정하고 서로 나누어 갖는 전통이 생겼다.

 

 

3월 13일: 성 보니차시오 주교(1260)

브루셀에서 태어난 그는 17세에 파리로 유학을 떠났다가 파리대학의 유명한 교수가 되었다. 그러나 학생들과 보니파시오 사이에 야기된 분쟁으로 학생들은 그의 강의를 듣지 않기로 결정하였다. 어쩔 수 없이 쾰른으로 간 그는 2년을 지내다가 로산느의 주교가 되었다. 그는 성심을 다하여 교구 발전에 헌신하였으나, 거의 8년 동안이나 큰 불신을 받고 지냈다. 파리 대학교의 사건이 와전되었던 것이 원인이었다. 마침내 그는 프레데릭 황제군에 의해 부상을 당하고 주교직을 사임하였다. 교황은 그를 브루셀의 시토 수녀원으로 보냈는데 사실 시토회원으로 서원은 하지 않았지만 수도원 겅내에서 엄격한 보속생활을 하며 여생을 보냈다.

 

 

3월 14일: 성녀 마틸다 황후

웨스트팔리 백작의 딸로 태어난 그는 삭소니아의 공작인 오토와 결혼했는데 그녀의 남편은 얼마 후 독일의 헨리1세 국왕이 되었다. 또한 그녀의 아들 오토는 오토1세 왕이 되었고, 다른 한 아들 브루노는 쾰른의 대주교가 되었다. 그녀는 32세 때에 남편을 잃고 아들인 오토1세로부터 심한 푸대접을 받았다. 하지만 그녀는 신심이 깊어 자선사업에 힘을 기울이며 살았다. 또한 둘째인 헨리가 형인 오토1세에게 반기를 드는 상황이라 그녀의 고통은 극심하였다. 이런 상황에서도 그녀는 수도원을 세곳이나 세웠고 만년에는 주로 수도원에서 지냈다. 그녀는 쾌돌린부르그 수도원에 안장되었다. 그녀는 가난한 사람과 교회의 후원자로서 큰 공경을 받고 있다.

 

 

3월 15일: 성 론지노 순교자(1세기경)

론지노는 빌라도의 지시를 받고 주님의 십자가 곁에 서 있다가 창으로 주님의 옆구리를 찌른 백부장이었다. 그리고 예수의 무덤에서 일어나는 갖가지 기적을 보고 ’이 사람이 참으로 하느님의 아들이었구나’하며 몹시 두려워하였다. 그후 그가 병으로 누을 때 창에 묻은 주님의 피를 눈에 갖다대자마자 병이 나았음을 보고, 군인 생활을 그만두고 사도들의 제자가 되었다. 카파도치아의 체사레아에서 수모를 당하면서도 이방인의 신상을 때려 부수면서 선교하였다. 그러자 집정관은 즉심에서 참수를 명하여 운명하였다. 그의 유해는 만투아에 있다.

 

 

3월 16일: 성 아브라함 은수자(+6세기경)

메소포타미아의 에데사 교외에서 태어난 그는 독신생활을 바라고 있었지만 부모들의 강요로 결혼식을 올리는 도중 사막으로 숨어 버렸다. 그를 찾는 수색작업이 시작되었는데 모두가 허사로 끝났다. 마침내 그의 친구들이 은둔소를 발견하여 억지로 고향으로 데려왔으나 이내 부모들은 세상을 떠난 뒤였다. 그는 전 재산을 가난한 이들에게 기부하라는 위임장을 친구들에게 남기고 시계와 염소털옷 그리고 몇 개의 식기만을 가졌다. 그는 하루하루의 삶을 자신의 마지막 날로 여기고 최선을 다하였다. 그의 성덕이 차츰 알려졌는데 에데사의 주교는 은둔소를 떠나 백성앞에서 설교해 줄 것을 간곡히 부탁하였다. 이 요청을 받아들인 아브라함은 사제가 되어 이교도들이 득실거리는 키두나에 성당을 짓고 본거지로 삼았다. 그는 잔잔한 미소와 인내심 그리고 끊임없은 기도를 통하여 우상숭배에 빠진 주민들을 감동시켜 큰 성공을 거두웠다. 그는 선교활동 중에 혹시라도 이 세상 일에 마음이 갈까봐 늘 조심하다가 결국은 자신의 은둔소로 돌아와 여생을 지냈다.

 

 

3월 17일: 성녀 젤투르다 동정녀(626-659)

페핀과 이타의 딸로 란덴이란 곳에서 태어난 그녀는 어릴적부터 부모님의 경건한 생활을 본받아 스스로 수도생활에 헌신하려 노력했다. 639년 페핀이 죽자 이따는 나벨레에 수도원을 세우고 모녀가 함께 입회하였는데, 딸인 젤투르다가 원장이 되었다. 656년에 원장직을 그만 둔 그녀는 성서 연구와 고행에만 몰두하였다. 또한 환시의 은혜도 받았다. 그녀는 여행자와 정원사의 수호성인이다.

 

 

3월 18일: 성 치릴로 주교(315-386)

예루살렘에서 교육받고 성 막시우스에 의하여 사제가 된 그는 오랫동안 예비자 교육에 전념하다가 349년경에 예루살렘의 주교 막시우스를 이어 주교가 되었다. 그러나 그가 아리우스파에 반대하고 교회의 재산을 매각하여 기근의 희생자들에게 주는 행위 때문에 체사레아의 아카치우스 주교에 의해 주교좌에서 쫓겨났다. 여러번 복직과 유배를 거듭하다가 367년 발렌스 황제가 율리안의 통치 기간에 있었던 모든 종교인들을 사면함으로써 다시 주교좌를 되찾았다. 또 다음 해엔 안티오키아 공의회가 니사의 성 그레고리오를 팔레스티나로 파견하여 그가 역설하던 ’호모우시우스’로 인한 잡음을 조사하게 했는데 이 용어는 니체아 신경의 기본 용어이다. 그레고리오는 예루살렘 주교좌는 파벌과 아리아니즘으로 뒤엉켜 있고 윤리적으로 타락해 있다는 보고서를 제출하였다. 성서학자이자 뛰어난 설교가인 그는 예비신자에게 명쾌한 교리를 설명하는 ’교리서’를 내기도 했다.

역사가인 소크라테스와 소로멘은 치릴로는 철저한 아리아니즘 반대자였고, 그의 정통성을 의심할 여지가 없다고 기술하였다. 그는 1882년 레오 13세에 의하여 교회 박사로 선언되었다.

 

 

3월 19일: 성 란도알도 증거자(+668년경)

교황 성 마르티노 1세가 홀란드와 벨지움 선교사로 파견한 사람들 가운데 란도알도가 가장 뛰어난 사람이었다. 그는 로마의 사제로 롬바르드 가문에서 태어났으며 선교열이 가득하여 괄목할만한 공로를 세웠다. 그는 주로 뫼즈와 쉘트의 중간 지역에서 선교활동을 하였으며 빈터스호벤에 본부를 두고 수많은 교회를 세웠다. 활동 중 그는 도둑들에 의해 살해되었다.

 

 

3월 20일: 성 헤르베르토 은수자(+687)

그는 성 쿠르베르토의 제자이며 절친한 친구였다. 매년 린다스파른에 있던 그의 스승을 찾아가 사도적 정열을 새롭게 하였다. 그러던 중에 스승이 운명하기 1년 전부터는 아에 스승과 함께 지내며 그분 곁을 떠나려하지 않았다. 이 두 분은 기도와 고행으로 깊이 일치하였고 두 성인이 거의 함께 하느님의 품에 안겼다. 성 헤르베르토는 스승에 대한 사랑과 친구의 우정으로 인하여 높은 공경을 받는다.

 

 

3월 21일: 성 엔다(+530년경)

아일랜드 사람인 그는 용맹을 떨치던 군인이었다. 사회적 활동과 결혼을 포기하도록 종용한 동생인 성녀 판체아를 굳게 믿었다. 그는 자신의 약혼녀가 죽었음을 알게 되자, 수도자가 되기로 결정하고 먼저 로마 순레를 떠났으며, 이곳에서 사제가 되었다. 그는 아일랜드로 돌아와서 드로게다에 성당을 세웠고, 또 처남인 국왕 오엔구스의 도움으로 킬러니 섬에 수도원을 세워 이곳을 중심으로 많은 수도원이 세워졌다. 클로나드의 성 핀니안과 더불어 엔다는 아일랜드 수도회의 창시자로 높은 공경을 받고 있다.

 

 

3월 22일: 성 데오그라시아스 주교(+457)

카르타고가 439년에 반달족에 점령당했을 때 아리아인들은 대부분의 성직자들을 폐선에 태워 떠나보내, 14년동안 목자없이 지내왔다. 이후 발렌티니안의 요청으로 다른 주교의 임명이 허용되었는데 이때 주교가 데오그라시아스였다. 그는 자신의 신앙과 가르침을 통해 백성들의 신앙을 일깨웠고 이방인은 물론 아리안계 사람들조차 그를 존경할 정도로 그의 선교활동은 성공하였다. 주교의 활동 중 반달족인 젠세릭이 로마를 습격하였고 또 많은 포로들을 아프리카로 돌려보냈다. 이 불행한 포로들은 반달족과 무어인족 사이에서 또 가족관계가 끊어진 암담한 상태에 빼졌다. 그래서 데오그라시아스는 성당의 모든 귀금속을 팔았고 그것도 모자라 가장 큰 성당 두 개나 적들에게 넘겨 주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이 사업이 끝나기 전에 운명하고 말았다. 카르타고인들은 그의 장례를 성대히 치뤘고 그들의 구원자로서 항상 공경해 오고 있다.

 

 

3월 23일: 성 빅토리아노 순교자(+484)

반달족의 아리아파 국왕 후네릭은 부친 젠세릭의 따라 가톨릭을 철저히 박해하였다. 다소 완화하던 박해가 480년경에 다시 강화되기 시작하였다. 빅토리아노는 하드루멘툼 사람으로 카르타고 최고 간부 중의 한 사람이었다. 그래서 후네릭으로부터 지방장관직에 임명되기까지 했다. 그러나 곧 황제의 박해 칙령이 내리고 그 실시를 요구해 오자, 빅토리아노가 그리스도께 대한 신앙을 포기하지 않았던 관계로 처형되고 말았다. 이때 처형되어 순교한 크리스천들은 수천을 헤아렸다고 한다.

 

 

3월 24일: 성녀 가타리나 동정녀(1331-1381)

스웨덴의 울파사에서 태어난 그녀는 성녀 브리지다의 넷째딸이었다. 그녀는 14세때 에가르토 폰쿠르넨과 결혼하였지만 남편에게 정결서원을 하겠다는 확신을 이해받았다. 1350년 로마에 계신 어머니를 뵈엇는데, 그때 어머니의 예언대로 가타리나는 남편을 잃고 동정녀가 되었다. 그후 가타리나는 25년 동안 어머니의 동반자로 활동하였다. 브리지다가 운명하자 그녀는 스웨덴으로 돌아와 어머니가 세운 브리지다회 운영에 전념하였다. 그녀는 돌아온 후 줄곧 건강이 나빠 고생하다가 1484년 3월 24일 하느님의 품에 안겼다. 인노체시오 8세 교황은 그녀를 성인으로 공경하도록 허락하였다.

 

 

3월 25일: 성 디스마 착한 도둑(1세기)

디스마는 갈바리아 언덕에서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달렸던 착한 도둑이었다는 사실이 그에 대한 유일한 자료이다. 또 다른 도둑은 제스타스였다고 알려져 있다. 또한 아라비아 복음서에 나오는 예수의 유아기 기사 속에는 성가족을 에집트까지 모셔드린 사람들이 바로 이 두 도둑이었다는 전설이 있다. 이때 아기 예수는 그들이 자신과 함께 예루살렘에서 십자가에 못박히리라는 예언을 했다는 것이다. 어쨌든 그는 예수로부터 ’오늘 당신은 나와 함께 낙원에 들어가게 될 것이오’라는 말씀을 들은 행복한 사람이었다.

 

 

3월 26일: 성 가스툴로 순교자(+286)

디오클레시안의 재임때 교황 카시오는 로마에 사는 신자들의 안전에 큰 관심을 갖고 있었다. 황제의 의전관이자 열렬한 크리스천이던 카스툴로가 황제의 궁전 안에서 종교의식을 거행할 수 있도록 자리를 제공하였다. 그 이유는 궁중 안을 수색하는 법이 없기 때문이었다. 더욱이 그는 자기 집에 신자들의 은신처를 마련하고 집회도 했다. 이것으로도 부족하다고 느낀 그는 개종자를 찾아 다니면서 교황께 볼래 데려와 세례받게 하였다. 그런 와중 배교자인 토르콰투스에 의해 고발당하여 로마 총독인 파비안에게 끌려가 모든 고문을 받은 후 생매장 당하였다.

 

 

3월 27일: 성 요한 다마스커스 학자(675-749)

다마스커스의 어느 부유한 크리스천 가정에서 태어난 그는 당시 저명한 고스마 수도자의 문하에서 교육을 받았다. 그후 그는 칼리프 압둘 말레크의 궁중 고관이던 부친의 직책을 이어 몇 년을 지냈다. 726년에 레오 3세 황제가 성상 공경을 금지하는 칙서를 발표하자, 즉시 이에 반대하면서 가톨릭 입장을 옹호하는 지도자로 변신하여 비쟌틴 황제의 분노를 샀다. 그래서 직책을 사임하고 예루살렘 근교로 가서 수도자가 되었다. 그후에도 드는 모슬렘을 공격하는 글을 써서 큰 반향을 불러 일으켰다. 그가 평생 살았던 수도원은 ’마르사바’였으며 ’지식의 근원’, ’정통신앙’ 등 유명한 저서를 남겼다. 또한 그는 많은 시와 찬미가를 지어 희랍 전례에서 사용하게 되었다. 희랍의 마지막 교부라고 불리는 그는 1890년 레오 13세에 의해 교회 박사로 선언되었다.

 

 

3월 28일: 성 투틸로 예술가(+915년경)

생-갈의 베네딕도 수도자로부터 교육을 받은 그는 성 노트케르 발불로와 라르페르토와 학우였다. 이 세 사람은 거의 항상 같이 지내면서 서로를 도왔다. 그는 웅변과 지혜가 뛰어나서 학장을 지냈을뿐 아니라 시인이요 화가이며 조각가이자 금속 공예가였다. 음식 또한 특기 중의 하나로 수도원 학교에서 음악을 가르치기도 하였다. 그의 회화와 조각품들은 큰 찬사를 받았으며 915년경에 선종하여 성녀 가타리나 성당에 그의 유해가 안치되어 공경을 받고 있다.

 

 

3월 29일: 성 루돌프 주교(+1250)

그는 프레몽스트레 회원으로 1236년에 라체부르그의 주교가 되었다. 주교로 있으면서도 항상 수도자의 생활을 그대로 실천했으며 교구의 사제들에게도 성 노르베르토의 회칙을 실천케 하였다. 그는 교회의 자유 때문에 그 지방의 공작인 알베르트와 갈등이 많았으므로, 여러 번 투옥되거나 고문까지 받다가 결국은 그 휴유증으로 운명하였다. 이런 이유 때문에 그는 순교자로 공경받는다.

 

 

3월 30일: 성 조시모 주교(+660년경)

시실리에서 태어난 조시모는 일곱 살때 니근에 있는 성녀 루치아 수도원에 살면서 그 성인의 유해를 지키는 님무를 수행하였다. 그러나 맑은 공기를 마시며 뛰놀고 싶은 마음에 원장의 허가를 받고 집으로 돌아온 그는 그날밤 성모님의 발현을 통해 30년 동안 수도자로 잊혀진 인물로 살았다. 그곳의 산타루치아 수도원의 원장이 서거했을 때 조시모 수사가 그의 후인으로 뽑혔다. 그는 매우 뛰어난 지혜로 수도원을 다스렸고 선대의 원장들은 모두 능가한다는 평을 들었다. 그는 주교인지 수도자인지 모르게 겸손하게 살면서도 정통교리를 수호하며 성실히 일생을 보내다 90세의 나이로 선종했다.

 

 

3월 31일: 성 벤야민 순교자(+421년경)

부제인 그는 페르샤의 예즈니제르드와 그의 아들 바라네스의 박해 때 그리스도교회의 복음을 선포하다가 투옥되었다. 그러나 벤야민은 그가 설교를 중지하도록 약속했던 콘스탄티노블 황제의 중재로 석방되었다. 그러나 그가 석방되자마자 설교를 재개하자, 다시 체포되어 모진 고문 끝에 운명하였다.

 

 

4 월의 성인

 1일 : 왈레리코 원장, 후고 주교·증거자, 마카리오 원장, 테오도라 동정녀

 2일 : 프란치스코 은수자, 아피아노 순교자, 마리아 은수자, 테오도시아 동정녀

 3일 : 리카르도 주교, 방그라시오 순교자, 아가페 동정녀, 치오니아 동정녀, 이레네 동정녀

 4일 : 이시도로 주교·학자, 힐데베르토 증거자, 플라톤 원장, 베네딕도 무어 증거자, 아가토 페데스 순교자, 테오둘로 순교자

 5일 : 빈첸시오 사제·증거자, 제논 순교자, 크레센시아 동정녀

 6일 : 첼레스티노 1세 교황, 마르첼리노 순교자, 엘스타노 주교

 7일 : 요한 사제 증거자, 헤제시포 증거자, 젤투르다 동정녀, 울술리나 동정녀

 8일 : 페르페투오 주교, 막시마 순교자, 율리아 동정녀

 9일 : 프로코로 주교 순교자, 가우체리오 원장, 헤다 순교자, 왈트루다 수절

10일 : 파테르노 은수자, 마카리오 주교 증거자, 풀벨도 주교, 테렌시오 순교자

11일 : 스타니슬라오 주교 순교자, 안티파스 주교 순교자, 젬마 동정녀, 고데베르타 동정녀

12일 : 율리오 1세 교황, 제노 주교 순교자, 사바 순교자, 비시아 동정녀

13일 : 마르티노 1세 교황 순교자, 헤르메네질도 왕 순교자, 울소 주교, 아가토니카 순교자

14일 : 티블시오 순교자, 발레리아노 순교자, 막시모 순교자, 람베르토 주교, 리드비나 동정녀, 돔니나 동정녀

15일 : 루아단 원장, 마로 순교자, 바실리사 순교자, 훈나 수절

16일 : 투리비오 주교, 파테르노 주교, 베네딕토 요셉 증거자, 벨라뎃다 동정녀, 엔크라시아 동정 순교자

17일 : 아니체토 교황 순교자, 스테파노 하르딩 원장, 로벨토 원장

18일 : 아폴로니오 순교자, 갈디노 추기경, 엘레우테리오 주교 순교자, 안티아 순교자, 아지아 수절

19일 : 레오 9세 교황, 엑스페디토 순교자, 우르스마로 주교, 소크라테스 순교자, 티몬 부제 순교자

20일 : 콘라도 증거자, 술피치오 순교자, 도미노 증거자, 아녜스 동정녀

21일 : 안셀모 주교 학자, 시메온 주교 학자

22일 : 소텔 교황 순교자, 아가피토 교황, 가요 교황 순교자, 오포르투나 동정녀, 세노리나 동정녀

23일 : 제오르지오 순교자, 제랄도 주교, 아달베르토 주교 순교자, 아킬레오 부제 순교자, 펠릭스 사제 순교자

24일 : 피델리스 사제 순교자, 엑벨토 사제 증거자, 멜리토 주교, 보나 동정녀

25일 : 마르코 복음사가, 아니아스 주교, 멜라 수절

26일 : 클레토 순교자, 마르첼리노 교황 순교자, 프랑카 동정녀, 엑수베란시아 동정녀

27일 : 베드로 카니시오 학자, 안티모 주교 순교자, 지타 동정녀

28일 : 베드로 샤넬 사제 순교자, 바울로 증거자, 크로난 원장, 비탈리스 순교자, 발레리아 순교자, 테오도라 동정 순교자

29일 : 로베르트 원장, 후고 원장, 디키고 증거자, 가타리나 동정 학자, 아바 동정녀

30일 : 비오 5세 교황, 요셉 코톨렌고 증거자, 아듀톨 은수자, 마리아노 순교자, 힐데갈드 부인, 소피아 동정 순교자

 

 

 

 

 

4월 1일: 성 후고 주교(1052-1132)

프랑스의 샤토외프에서 태어난 그는 평신도로 방랑스의 주교좌에서 주교의 협조자로 일했다. 그는 성직매매를 반대하여 큰 성과를 얻었고, 1082년에 열린 아비뇽 시노드에 참석하여 그레노블의 주교로 선출되었다. 그는 주도면밀한 교구 개혁안을 수립하였는데, 성직매매와 고리대금업을 철저히 배격하였고, 성직자의 규율과 사제 독신제를 확립하는 한편, 텅빈 교구 재정을 튼튼히 하였다. 그후 그는 세즈-디의 수도원에서 베네딕도 회원이 되었으나, 교황 그레고리오 7세의 권고로 자기 교구로 돌아갔다. 성 브루노의 제자였던 그는 브루노의 카르투시오회가 크게 번창하는데 기여 하였다.

 

 

4월 2일: 성 프란치스코 은수자(1416-1507)

이탈리아 파올라에서 태어난 그는 프란치스코 회원으로부터 교육을 받았고, 15세 때 은수자가 되었다. 그후 많은 동료들이 모여, 미남스회라는 공동체 생활을 시작하였다. 그는 회개, 애덕, 겸손을 강조하는 회칙을 확정하였고 3회원과 수녀회를 위한 회칙도 만들었다. 또한 그의 엄격한 생활은 널리 펴져 프랑스까지 번졌으며 많은 기적이 일어났다. 이로 인해 그의 수도회는 교황 식스토 9세로부터 인정받았으며 수도회의 이름은 아시시의 성 프란치스코의 은수자회였다.

익히 명성을 들어오던 프랑스 국왕 루이 11세는 프란치스코만이 자신을 치료할 수 있다고 그를 보기 원했다. 교황의 명에 따라 프랑스로 간 그는 비록 국왕을 치유하진 못했지만 큰 위로를 주었다. 이 때문에 루이의 아들인 찰스 8세가 프란치스코의 친구가 되었고, 프랑스 내에 미남스회 수도원이 여럿 생겨났다. 그는 프랑스의 플레시스 수도원에서 여생을 지내다가 죽었다.

 

 

4월 3일: 성 방그라시오 주교,학자(+90년경)

시실리를 중심으로 높은 공경을 받아오는 그는 안티오키아 출신의 개종자였다. 그는 부모와 함께 사도 성 베드로에게서 세례를 받았고, 시실리의 선교 임무를 맡았다. 주교가 된 그는 시실리 전 지역을 다니며 복음을 선포하였고, 우상을 파괴했다. 그의 뛰어난 설교로 시실리 총독 보니파시오를 개종시킴으로써 많은 개종자를 얻는데 성공하였다. 그러던 중에 그는 산적들에 의해 돌에 맞아 순교하였다.

 

 

4월 4일: 성 이시도로 주교,학자(+636)

세빌레의 존경받는 석학으로 유명했던 그는 수도자가 아니었으나 늘 수도회를 동경하였다. 그는 37년 동안이나 주교로 재직하면서 비시고트인들을 아리아파에서 가톨릭으로 개종시키는 작업을 비롯하여 놀라운 업적을 남겼다. 그는 세빌레의 제2차 공의회, 톨레도의 제4차 공의회를 주재하고, 공의회의 많은 문서들이 그의 손을 거쳤다고 한다. 또한 그는 히브리어와 희랍어를 비롯하여 의학, 법률, 등을 제자들에게 가르쳤고 ’어원학’을 비롯한 여러 책을 냈다. 이러한 생활 중에서도 그는 가난하고 병든 이들을 꼭 찾아보았고 사랑을 실천하였다. 그는 1722년에 교회박사로 선언되었다.

 

 

4월 5일: 성 빈첸시오 증거자(1350-1419)

스페인의 발렌시아에서 태어난 그는 바르셀로나에서 교육받고 20세의 나이로 레리다에서 철학을 가르쳤다. 특히 그의 설교력은 뛰어났는데, 유대인과 모슬렘인들 사이에서도 좋은 평판을 들었다. 1399년 그는 10여 년 동안 프랑스, 스페인 등 여러나라를 순회하였다. 그의 설교를 들은 사람들은 큰 감명을 받았으므로 개종자가 많이 나왔다. 그의 의해 개종한 이 가운데에는 시에나의 베르나디네와 사보이의 마르가리다가 매우 유명하다. 그는 그 나라 말을 모르는 곳에서도 설교로 큰 성공을 거둠으로써 ’말씀의 은혜’를 받았다고 많은 사람들이 믿었다. 또 이에 따르는 기적들 때문에 ’기적을 행하는 사람’이란 별명도 얻었다. 1416년에는 ’베네딕도 13세’에 대한 지지를 철회함으로써 교황 이교의 종지부를 찍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다. 그후 3년 동안 프랑스 지방을 순회하던 중 브리타니의 반느에서 운명하였다.

 

 

4월 6일: 성 마르첼리노 순교자(+413)

그는 로마 황제 호보리우스의 국무장관이었다. 409년 황제는 교회의 한 이단종파이던 도나티스트들에게 공적인 예배를 허용하는 자유를 준 적이 있다. 이로 인해 북아프리카의 도나투스파들은 이 허가를 악용하여 황제에게 반대하던 정통교회를 압박하기 사작하였다.이때 그는 카르타고에 파견되어 가톨릭과 도나투스 주교들의 회의를 주재하였다. 3일 간의 조사 후 그는 도나투스파에게 유죄를 내렸는데, 이 사건으로 인해 희생되었다. 후일 황제는 ’가장 훌륭한 기억을 안겨준’ 위인이었다고 슬퍼하였다고 한다.

 

 

4월 7일: 성 헤제시포 순교자(+180년경)

유대인으로 태어나 예루살렘 교회에서 활동한 그는 로마로 여행하면서부터 그곳에서 약 20년 간을 살았다. 그는 도처에 다니며 크리스천 신앙의 일치를 호소했고, 그리스도의 수난부터 당대에 이르는 교회사를 기술하여 교회사가 에우세비오로부터 극찬을 받았다. 성 예로니모는 이렇게 말한다 "그는 사도들의 정신이 충만한 분이시고, 겸손은 사랑하신 성인이다. 그분만큼 단순함을 보일 수는 없을 것이다."

 

 

4월 8일: 성녀 율리아 동정녀(1751-1816)

프랑스 피카르디의 부유한 농가에서 태어난 그녀는 어려서부터 신앙생활에 특별한 관심을 보여왔으며 병자와 가난한 이들을 돕는데 정열을 쏫았다. 그녀는 몇몇 친구들과 더불어 바랭 신부의 지도아래 노트르담 수녀회를 창설하녔다. 이 회는 가난한 어린이들의 종교 교육과 신앙 교사들의 훈련 및 여성들의 크리스천 교육에 헌신하고 있다. 1804년에는 기적적으로 22년만에 걸음을 걷게 되었다. 바랭신부가 떠나고 후임으로 온 신부는 수녀회에 대해 반목하는 이였다. 아미앙 주교는 1809년 율리아로 하여금 아미앙을 떠나도록 명하였다. 그녀는 모원을 그대로 두고 남은 여생을 수녀회 확장을 위해 분신하였다. 15개의 수녀원이 세워지던 해 나무르에서 운명하였다.

 

 

4월 9일: 성 가우체리오 원장(+1140)

그는 묄랑-쉬르-세느에서 태어나 그곳에서 훌륭한 신앙교육을 받았다. 은수생활을 좋아한 그는 리무진에 보내져 생활하게 되었다. 그곳에서 은둔소를 짓고 세상에서 잊혀진 이로 살았다. 얼마 후 그의 성덕이 차츰 알려지자 제자들이 모여 공동체를 이루었다. 제자로서는 성 람베르토와 성 파우체로가 유명하다. 그는 80노구를 이끌고 공동체들을 방문하고 돌아오던 중 말에 떨어져서 운명하였다.

 

 

4월 10일: 성 마카리오 주교 증거자(+335)

성 아나타시오에 의하면 그는 성실하고 의로운 청년으로서 사도적 정신이 충일한 이였다. 314년에 예루살렘의 헤르만 주교를 게승한 그는 이 당시 아리아 이단의 기세를 누구려 뜨리는데 큰 공헌을 하였다. 또한 예수님의 십자가를 발견하는데 큰 공이 있는 인물로 공경받는다. 일설에 의하면 그는 이 십자가로 다 죽어가는 어느 부인을 기적적으로 치유하여, 이 십자가가 진품임을 입증하였고, 황녀 헬레나의 간절한 소망을 성취하였다고 전해온다. 그래서 콘스탄틴 대제는 성 십자가 성당을 짓고 축성하였는데, 그는 이 행사 뒤에 곧 선종하였다.

 

 

4월 11일: 성녀 젬마 갈가나 동정녀(1878-1903)

젬마 성녀는 인내하는 생활을 통하여 죄악을 극복할 수 있음을 실천으로 가르치며 살아간 분이다. l878년 3월 2l일 이탈리아 가밀리아노에서 2남 3녀의 넷째로 태어난 그녀는 인근 루카시에서 일생을 보내었다. 늘 평화스럽고 명상한 얼굴을 한 그녀는 책망하는 이가 있어도 항상 밝은 표정을 잃지 않았다. 평생 얼굴을 다듬거나 몸을 가꾸는 일이 없었고 옷도 지극히 검소한 검은 무명 옷밖에 입지 않았다. 하지만 그 천사같은 용모와 우아한 행동은 보는 사람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세살때 학교에 다닐 정도로 총명했던 그녀는 여덟살때 견진성사를 받고 당시 8-9세의 아이들에게는 허락되지 않았던 영성체를 모실 수 있게 되었다. 그녀는 본당 신부의 허락을 받기 위해 열흘동안의 피정기간을 갖고 영성체를 준비하였다. 당시 영적 지도신부에게 보낸 편지를 보면 이렇게 고백하고 있다. "처음으로 성체를 영한 그날, `누구든지 나를 먹는 자는 내 생명으로 살리라’ 하신 주의 말씀을 더욱 잘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후 그녀는 죽는 날까지 부득이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매일 영성체를 했다.

한편 그녀의 가정 형편은 갈수록 어려워졌고, 가족들도 하나 둘씩 하느님 곁으로 떠나갔다. 여덟살때 어머니의 죽음과 열여섯살때는 폐병으로 시달리던 오빠의 죽음을 감당해야 했다. 열아홉살때 어린 동생들과 함께 생활할 양식이 부족하여 가족이 떨어져 살게 되었는데, 젬마는 고모집에서 생활하게 되었다. 온전히 주님께 자신을 맡기기로 한 그녀는 어느날 고모가 데려온 점잖은 청년의 청혼을 받았으나 거절하고 다시는 그와 같은 일을 당하지 않기 위해 고모집을 떠나 집으로 돌아왔다. 부족한 양식으로 인해 거의 굶다시피 생활하던 젬마는 어느날 등줄기가 굽어오는 뇌척수막염이라는 병에 걸려서 점점 척수가 굽어지고 귀는 어두워졌으며, 머리는 군데 군데 부어올라 곪기 시작하였다. 중증의 척수염이란 진단과 함께 죽음을 준비해야만 했던 그녀는 l899년 2월 2일 병자성사를 받았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젬마를 불러가지 않으시고 당신의 큰 영광으로 그 영혼을 구해내시고자 가브리엘 천사를 보내셨다. 그녀는 그때의 일을 이렇게 고백하고 있다. "어느날 가브리엘 천사가 찾아와 `네가 낫기를 원하느냐? 그렇다면 매일 예수성심께 기도하여라. 9일 기도가 끝날때까지 나도 매일 와서 너와 함께 기도하겠다’고 말했습니다. 9일 기도가 끝날 무렵에는 주님께서 나타나셔서 `젬마야, 진정 네가 낫기를 원하느냐?’ 고 물으셨지만 저는 무서워서 아무말도 하지 못하고 속으로 `주여, 당신 뜻대로 이루어지소서’ 하였습니다. 그런 후 곧 병이 낳았습니다."

그녀는 항상 십자가에 못박히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가시관과 십자가로만 자신의 몸을 꾸미심을 생각하고 검소한 생활을 지켜나갔다. 가진 것이라고는 홑이불과 수건 몇 장, 십자고상, 묵주기도서를 넣어둔 조그만 상자 밖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그녀는 이미 태어날 날부터 주님의 은혜를 예고한 사람이었다. 이와 같은 확신은 탈혼 중에 오상을 체험하면서 서서히 나타나기 시작했다. 탈혼이란 사람의 영혼이 하늘의 힘에 끌려서 온전히 영혼의 일상적 기능과 육신의 움직임이 멈추는 상태를 말한다. 그녀는 탈혼 상태에 이르기 몇 분전부터 느낌이 왔으며, 그의 마음과 영혼의 모든 기능이 온전히 하느님께 닿아, 육체의 모든 움직임을 잃어버리곤 했다. 그녀와 함께 살았던 지아니니 부인은 그것을 일일이 기록하였는데 모두 151회의 탈혼상태 기록이 아직까지 남아 있다.

그녀는 탈혼 중에 주님과 더불어 가장 많이 나눈 대화는 주의 고난에 대한 것이었다. 고통 받으셨던 비수의 아픔을 함께 하고자 여러날을 기도한 끝에 `거룩한 오상’을 받게 되었다. l899년 5월8일 젬마는 이렇게 설명한다. "갑자기 온몸에 피가 흐르다가 멈추더니 불꽃이 활활 타올랐습니다. 그 불꽃이 별안간 제 손과 발과 심장을 뚫고 들어 왔습니다. 너무 아파서 살펴보니, 손과 발과 심장에서 피가 흘러내리고 있었습니다" 그후 그녀의 상처는 차츰 아물기 시작하더니 매주 목요일 오전 8시쯤에 다시 나타나서 다음날 오후 3시까지 계속되었다고 한다.

이같은 성스러운 생활과 체험이 부근에 퍼져 나갔다. 예수 고난회의 젤마노 신부가 루가시에 내려와 이 사실을 눈으로 확인하였다. 젤마노 신부는 그녀의 고해신부가 되어 탈혼상태에서 주님과 대화했던 내용을 함께 의논하였다. 자신을 온전히 바치기 위해 예수 고난회에 입회하기로 마음먹은 그녀는 입회 허락이 떨어지기 전 장옹병이라는 불치의 병에 걸리게 되었다. 아랫배가 붓고 열과 오한이 나며, 피고름이 나는 장옹병은 그녀의 몸을 일순간에 죽음으로 몰고 갔다. 1903년 4월 ll일 25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난 젬마 성녀의 시복을 위한 절차는 임종 4년 후인 l907년 부터 시작되었고 l933년 5월 l4일 교황 비오 11세에 의해 시복되었다. 그후 l940년 5월 2일 예수승천대축일에 로마 성 베드로 성당에서 시성식이 거행되었는데, l300여 명의 루가시 신자 순례단을 비롯한 수만명의 신자들이 참석하여 감격의 눈물을 흘렸다. 이름없고 가난한 한 처녀 젬마를 우리 교회에서는 성녀로 받들어 모시게 되었고, 시복식이 거행된 5월 l4일을 축일로 지내고 있다.

젬마 갈가니 성녀의 일생은 한마디로 예수 그리스도의 삶을 느끼며 그 삶을 사랑의 힘으로 극복한 삶이었다. 젬마란 보석이란 뜻이다, 젬마 성녀가 짧은 삶 속에서도 찬란히 빛날 수 있었던 것은 보석을 어둠 속에 두지 않으신 하느님의 뜻이었다.

 

 

4월 12일: 성 사바 고트인 순교자(+372)

젊은 시절 그리스도교회로 개종한 그는 루마니아의 타르고비스트 교회의 지도자였다. 이방 신에게 바친 고기를 먹는 사실을 변명하던 신자를 비난하던 그는 이 일로 쫓겨났다. 또한 박해 때 용감히 크리스천인을 공헌햇으나 ’아무런 해를 끼치지 않은 사람’으로 분류되어 무사하였다. 세 번째 박해 때에는 아타리루스 휘하의 고트인 군인들이 그를 강물에 수장시켜 버렸다. 이 당시 50여 명의 다른 신자들도 그와 같은 방법으로 처형되어 순교하였다.

 

 

4월 13일: 성 헤르메네진드 순교자(+585)

스페인의 비시고트 왕의 아들인 그는 아리안 이단에 젖어 있던 부친의 영향을 받고 자랐으나 열렬한 정통파 신앙인인 오스트라시아의 국왕 딸과 결혼함으로써 올바른 신앙을 되찾았다. 이 사실을 안 왕은 아들에게 중 소유와 지위를 박탈하려 했지만 그는 아리안 이단과의 투쟁을 선언하고 전투에 들어갔다. 그러나 차츰 아들의 입장을 이해한 부친이 화해하고 그 전의 지위를 회복시켰으나, 계모로 들어온 고스빈다는 자신이 낳은 아들을 후계자로 삼으려는 계략으로 그를 투옥시키고 살해하였다. 그는 이리안 이단을 척결하고 정통 신앙을 지킨 순교자로 높은 공경을 받고 있다.

 

 

4월 14일: 성녀 리드비나 동정녀(1380-1433)

영국의 쉬에단에서 태어난 그녀는 15세까지 평범한 생활을 하다가 혼자서 동정서원을 하였다. 1395년부터 거의 1년 동안 오른쪽 늑골을 다쳐 고생하였다. 그러나 이것이 악화되어 이제는 거의 포기하는 상태까지 되었다. 점점 몰골이 사나워지고 눈 한쪽이 전혀 보이지 않고, 감각조차 없는 상태로 변하였다. 이 특이한 병은 단시일 사회에 널리 알려졌고 그녀는 19년동안 아무런 음식도 먹지 못하고 오직 성체와 물만 먹었다. 1407년 그녀는 탈혼에 빠지기 시작했다. 몸이 공중에 뜨는가 하면 주님과 성인 성녀들과 대화하기도 하였다. 그녀는 연옥의 고통에 대하여 증언하고, 천상의 기쁨을 설명하기 시작하였다. 그녀는 고통받는 이들과 인내심이 필요한 사람들의 수호성인이다.

 

 

4월 15일: 성녀 훈나 평신도(+679)

알사스 공작의 딸로서 후바라고도 알려진 그녀는 후보라는 사람과 결혼하였다. 그녀는 특히 스트라스부르크의 가난한 사람들을 위하여 헌신적으로 활동하였는데, 가난한 이들을 자주 씻겨 주었기 때문에 ’씻어 주는 거룩한 부인’이란 칭호를 받았다. 그녀의 사후, 지방에서부터 그녀를 공경하기 시작하다가, 1520년에 교황 레오 10세에 의하여 시성되었다.

 

 

 

 

  5 월의 성인

 1일 : 노동자 요셉, 시지스문도 왕, 아삽 주교, 알데브란도 주교, 오렌시오 순교자, 그라타 수절, 베르타 동정녀, 케보카 동정녀, 파나세아 동정녀

 2일 : 아타나시오 주교 학자, 에수페리오 순교자, 조에 순교자, 울타노 원장, 마팔다 여왕

 3일 : 필립보 사도, 야고보 사도, 알렉산델1세 교황, 에벤시오 사제 순교자, 테오둘로 사제 순교자, 유베날 주교, 마우라 순교자

 4일 : 치리아고 주교, 플로리아노 순교자, 고데하르도 주교, 안토니아 동정 순교자, 펠라지아 동정 순교자

 5일 : 안젤로 사제 순교자, 사체르도스 주교, 에카 은수자, 유타 수절, 그레센시아 순교자

 6일 : 에보디오 주교 순교자, 도미니코 사비오 증거자, 베네딕다 동정녀

 7일 : 스타니슬라오 주교 순교자, 플라비오 순교자, 플라치도 원장, 도미틸라 동정 순교자

 8일 : 빅톨 군인 순교자, 베네딕도 2세 교황, 보니파시오 4세 교황, 아가치오 백부장 순교자, 이다 동정녀

 9일 : 그레고리오 주교 학자, 파코미오 원장, 제론시오 주교 순교자, 베아토 증거자

10일 : 안토니오 주교, 골르디아노 순교자, 에피마코 순교자, 가탈도 주교, 블란다 순교자, 솔란지아 동정 순교자

11일 : 프란치스코 수사, 마메르토 주교, 곰갈 원장, 마욜로 원장, 간굴포 순교자, 프리치피아 동정녀

12일 : 네레오 순교자, 아킬레오 순교자, 방그라시오 순교자, 디오니시오 순교자, 에피파니오 주교 순교자, 릭트루다 수절, 도미틸라 순교자

13일 : 세르바시오 주교, 베드로 레갈로 사제, 메레웬나 동정녀, 율리아나 동정녀, 글리체리아 동정 순교자

14일 : 마티아 사도, 카르타고 주교, 보니파시오 순교자, 파코미오 원장

15일 : 요한 순교자, 이시도르 순교자, 힐라리오 순교자, 딤프나 동정녀, 디오니시아 순교자

16일 : 우발도 주교, 요한 네포묵 사제 순교자, 호로라토 주교, 시몬스톡크 증거자

17일 : 파스칼 수사 증거자, 실라오 주교, 바실라 순교자

18일 : 요한 1세 교황 순교자, 베나시오 소년 순교자, 에릭 왕 순교자, 펠릭스 증거자, 데쿠사 순교자, 파이나 순교자, 엘지바 수절, 율리엣다 순교자

19일 : 첼레스티노 5세 교황, 이보 사제 증거자, 던스탄 주교, 프덴시아나 동정녀, 치리아카 동정 순교자

20일 : 벨라르디노 수사 증거자, 바우델리오 순교자, 바실라 동정 순교자

21일 : 고드릭 은수자, 테오필로 증거자, 이스베리가 동정녀

22일 : 카스토 순교자, 에밀리오 순교자, 로마노 원장, 리타 수절, 율리아 동정 순교자, 귀데리아 동정 순교자, 후밀리타스 동정녀

23일 : 이보 주교, 요한 증거자, 데시데리오 주교 순교자, 에우프로시나 동정 순교자

24일 : 빈첸시오 사제, 도나시아노 순교자, 로가시아노 순교자, 요안나 수절, 수산나 순교자, 소피아 동정녀

25일 : 울바노 1세 교황 순교자, 베다 사제 학자, 그레고리오 7세 교황, 알델모 주교, 마리아 막달레나 동정녀

26일 : 필립보 네리 사제 증거자, 과드라토 주교, 엘레우테리오 교황 순교자, 마리아나 동정녀

27일 : 아우구스티노 주교, 라눌포 순교자, 리스티투타 동정 순교자

28일 : 젤마노 주교, 베르나르도 , 포디오 주교, 보토 은수자, 말가리다 부인 수교자

29일 : 막시미노 주교, 레스티투토 순교자, 테오도시아 동정 순교자

30일 : 펠릭스 1세 교황 순교자, 페르디난도 3세 왕, 요안나 동정녀

31일 : 칸시노 순교자, 칸시아노 순교자, 베드로닐라 동정 순교자

 

 

 

5월 1일: [5/1]성 시지스문도 왕(+524)

프랑스 남동부와 스위스의 남서부는 부르군디왕의 휘하에 있었고, 이때의 통치자는 아리아파인 군데발드였다. 그는 죽기 전에 아들인 시지스문도에게 직위를 물려주었다. 시지스문도는 비엔나의 주교 성 아비토에 의해 가톨릭으로 개종하였다. 그는 전쟁에 패한 뒤, 성 마우리스와 안정된 곳에서 은수자 생활을 했으나 적군들에 의해 체포되어 오를레앙으로 끌려갔다. 성 아비토가 중재에 나섰으나 국왕 클로도미로는 그를 처형하고 우물 속으로 던져버렸다. 그의 유해는 나중에 발국되어 보헤미아의 프라그에 안장되었는데, 그 이후 순교자로 공경받아 왔다.

 

 

5월 2일: 성 아타나시오 주교 학자(296-373)

알렉산드리아의 크리스천 가정 출신인 그는 잘 교육받은 사람으로서, 특히 성서와 신학에 뛰어났다. 그는 아리우스 이단을 단죄했던 니이체 공의회에 참석한 이후 알렉산드리아의 주교가 되었다. 그러나 그는 아리우스파를 지원하던 여러 무리로부터 심한 반발에 직면하였다. 335년 트리엘로 첫 번째 추방되었다가 337년에 귀향이 허락되었는데, 2년후 재차 추방되었다. 이때 그는 로마로 가서 7년동안 평화로운 시기를 맞았는데, 이 시기에 여러 주요 저서들이 만들어졌다. 황제에 의해 여러번 도망을 다닌 그는 366년 이후 부터는 평화롭게 자신의 교회르 다스리고 사목할 수 있었다.

그는 지난날 모든 갈등과 폭력으로 피폐화된 교회를 재건하고 저술과 강론을 통하여 사도직을 수행하였다. 신체적으로 작은 사람이었으나 아주 강인하고 뛰어났던 그가 아리우스 이단에 대항하여 한 저술과 연설들은 영원히 기억될 것이다. 또한 그는 역사적인 가치를 지닌 저서들을 많이 남겼는데, ’성 안토니오의 생애’를 비롯하여 성서 주석, 시편의 주 등을 남겼다. 성 아타나시오는 대 바실리오, 요한 크리스도폴 그리고 나지안제의 그레고리오와 함께 교회의 희랍박사이다.

 

 

5월 3일: 성 필립보 사도(+1세기경)

갈릴레아의 벳사이다 출신인 필립보는 아마도 세례자 요한의 제자인 듯하며, 사도들 명단에도 들어 있다. 요한 복음서에 보면 그는 예수로부터 직접 제자로 간택되었고, 나타나엘을 그리스도께 인도하기도 했다. 오천명을 먹이신 기적 중에서 있었으며 예수를 찾아온 이방인들을 예수께 소개도 하였다. 예수 수난 직전에 그는 ’아버지를 뵙게 해 주십시오’하고 간청도 하였다. 전설에 따르면 그는 그리스를 무대로 설교하였고, 도미시안 황제의 크리스천 박해 때에 히에라폴리스에서 십자가형으로 순교하였다.

 

 

5월 4일: 성 플로리아노 순교자(+304)

오스트리아 노리쿰에 주둔하고 있던 로마군의 장교이던 그는 디오클레시안의 크리스천 박해 때, 스스로 크리스천임을 선언하고 집정관인 아퀼리노에서 자수하였다. 그는 온갖 고문을 당한 후 몸에 큰 돌을 메고 엔스강에 던져지는 형을 받고 순교하였다. 그는 플랜드와 오스트리아의 수호성인으로 공경을 받고 있다.

 

 

5월 5일: 성 안젤로 사제 순교자(+1220)

그의 부모는 성모의 환시를 보고 유대교에서 신자가 된 예루살렘의 유대인이었다. 성모님은 환시를 통해 백성들을 구원할 두 자녀를 주겠다고 약속하였다. 과연 그 약속대로 부모는 쌍둥이를 얻었는데, 둘 다 머리가 비상하고 또 영적인 선물도 받았다. 18세 때 그들은 가르멜회에 들어갔는데, 둘다 희랍어, 라틴어 그리고 히브리말을 유창하게 했다. 안젤로는 기르멜 산의 은둔소에서 5년동안 생활하다 시실리로 가라는 계시를 받고 그곳에 가서 많은 이들을 개종시켰다. 또한 팔레르리에서는 200명 이상의 유대인을 개종시켰다. 그가 군중에게 설교하고 있을 때 베렌가리오에 의해 참수당한 일단의 반도들에 의해 칼에 찔렸다. 치명상을 입은 그는 백성들을 위하여 기도하고, 살인자를 용서한다는 말을 남기고 숨졌다.

 

 

5월 6일: 성 도미니코 사비오 증거자(1842-1857)

성인이 되는 길은 특별히 남달라야 하는 줄로 아는 이가 많다. 하지만 도미니코 사비오 성인의 삶에서 우리는 먼나라 이야기가 아님을 알게 된다. 또한 성인이 되려면 날마다 평범한 일들을 즐거운 마음으로 정성을 다하고, 자신과 남의 죄악을 멀리하려는 노력에 그 비결이 있음을 느끼게 된다. 1842년 이탈리아 피에드몬드의 리바에서 가난한 대장장이의 아들로 태어난 도미니코 사비오는 두 살 때 `모리알도’라는 작은 마을에서 생활하였다. 그는 착한 성품을 타고 났으며, 신심에 있어서도 그러했다. 겨우 네 살 밖에 되지 않은 그에게 아침기도와 저녁기도, 식사 전후 기도문이나 삼종기도를 바치라고 일러줄 필요가 없을 정도였다. 그는 항상 부모에게 순종했을뿐 아니라 집안에 있는 다른 가족들이 식사 전 기도를 깜빡 잊어버릴 때에도 "아직 식사 전 기도를 안했는데요" 하고는 먼저 성호를 긋고 기도를 외울 정도였다.

모리알도 본당생활 중 첫영성체 때의 일이다. 첫영성체를 하기 위해 도미니코는 아무것도 부족한 것이 없었다. 그는 교리문답을 전부 외고 있었으며, 이 성사의 참뜻을 똑똑히 알고 열렬히 성체 모시기를 원하고 있었다. 그러나 당시 아이들은 첫영성체를 11세나 12세는 되어야 할 수 있었기 때문에 본당신부는 겨우 일곱 살 밖에 되지 않은 도미니코의 첫영성체에 대해 주저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리하여 다른 본당신부들과 의논 끝에 그의 첫영성체를 허락하게 되었다. 그는 이 기쁜 소식을 마음에 간직하기가 벅차, 하느님께 대한 네 가지 규칙을 약속하였다.

    l. 자주 고해하고 고해신부의 허락이 있으면 영성체 하겠다.

    2. 축일을 거룩하게 지내겠다.

    3. 내 친구는 예수 그리스도와 성모 마리아.

    4. 차라리 죽을지언정 죄를 짓지 않겠다.

하느님의 섭리는 도미니코를 한 곳에 머물게 하지 않고, 여러 곳을 옮김으로써 그 뛰어난 모범적 덕행을 많은 사람들이 보고 본받도록 한 것 같다. 1852년이 지날 무럽 도미니코는 모리알도 마을에서 몬도니오 카스텔노바 학교로 옮기어 생활하였다. 바로 이 학교에 다니기 시작할 때부터 동료들과 함께 나누는 그의 생활이 나타났다. 어느날 동료들이 짖굿은 장난을 해놓고, 혼이 날까봐 도미니코가 한 짓이라고 거짓말을 하였다. 하지만 도미니코는 변명도 하지 않은 채 꼭 그 잘못을 저지른 아이처럼 선생님의 꾸지람을 달게 받았다. 이튿날 그 모든 사실이 밝혀지자 선생님은 미안하여 도미니코를 불러 놓고 "왜 네가 하지 않았다고 말하지 않았니?" 라고 하니 그는 "그것은 그 아이가 여러번 잘못한 적이 있어서 이번 일로 학교에서 쫓겨나지 않을까 싶어서 였습니다. 만일 제가 한 것으로 되면, 처음이니까 용서받을 수 있을 것 같았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거짓으로 누명을 쓰시고 고생하시다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님을 기억하였기 때문입니다"라고 얘기했다. 몇 달 생활을 하지 못하고 다시 성 프란치스코 살레시오 학교로 옮기게 되었다. 이 살레시오 학교는 요한 보스코 성인이 세워 세계적인 교회 학문의 기초가 된 곳이다. 요한 보스코는 도미니코와 지낸 3년간의 생활을 생전에 책으로 펴낼 정도로 사제로서 제자를 존중했다. 도미니코는 이 학교에 온 지 약 6개월 가량된 어느날 `성인이 되기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다’라는 강연을 듣게 되었다. 이 강의에서 그는 `하느님은 모든 사람이 다 성인이 되기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며, 되고자 하는 생각과 어느 정도의 노력만 기울이면 누구나 성인이 될 수 있습니다’라는 말씀을 듣고, 성인이 될 결심을 하게 되었다. 그때부터 성인들의 일대기를 골라서 읽었으며, 그들을 위해 기도하고 일주일에 한 번은 그들을 위해 영성체를 했다.

도미니코는 실로 성모께 몸과 마음을 바치는 일생을 살았다. 그는 어느 때나 성모를 공경할 기회를 놓쳐 버리거나, 헛되이 지나쳐 버리는 법이 없었다. 드디어 1856년 도미니코는 몇몇 친구들을 불러 모아서 성모를 공경할 모임을 만들게 되었다. 그 모임을 `무염시태의 성모회’라고 이름지었다. 이 회의 목적은 살아 있는 동안과 죽을 때에 성모의 도움을 받자는데 있었다. 그 방법으로는 하느님의 어머니께 대한 공경을 널리 전하며 자주 영성체 하는 것이었다. 그해 l2월 8일 그 꼬마들은 서로 합의하여 규칙도 만들었다. 도미니코가 죽기 4개월 전의 일이다. 회의 규칙은 세 가지 내용을 중심으로 스물한 가지의 실천 내용을 싣고 있다. 그 세 가지 골격은 `학교의 모든 규칙을 충실히 지킨다. 친구들을 서로 도와주되 특히 좋은 생각 속에서 도와준다. 시간을 잘 활용한다’는 내용이었다. 그러나 요한 보스코 신부는 너무 엄격한 규칙 때문에 몸을 해치게 될까봐 걱정하였다. 도미니코는 무염시태의 성모회 규칙을 스스로 엄격하게 지켰으며, 지나칠 정도로 세심하여 여러번 몸에 해로운 것은 삼가도록 얘기들을 정도였다. 어느 추운 겨울밤 도미니코는 얇은 담요 한 장을 덮고 떨고 있는 것을 요한 보스코 신부가 보고 "폐렴에 걸릴려구, 왜 이런 짓을 하느냐!" 하니 그는 "주님께서는 베들레헴의 구유에 누워 계셔도 폐렴에 걸리지 않았습니다"고 대답하여 요한 보스코를 놀라게 하였다.

언제나 웃는 얼굴로 생활하던 도미니코는 규칙적인 고해성사와 영성체, 예수의 고통을 느끼기 위해 자갈과 나뭇가지를 넣은 침대 속에 잤으며 머리털로 짠 따가운 옷을 입고 다녔다. 그의 건강이 날로 악화되었지만 어린 도미니코의 얼굴에는 아무 표시가 나지 않았다. 급기야 자리에 눕게 되자 학교에서는 그를 부모가 있는 몬도니오로 보내게 되었다. l857년 3월 9일에 병자성사를 받고 난 후 행복한 얼굴로 떠나갔다. 그는 죽기 직전 "주여, 나의 자유 의지를 가지소서. 나는 이것을 당신께 드립니다. 내 몸과 모든 능력은 다 당신의 것이옵니다. 내가 가지고 있는 모든 것도 다 당신이 주신 것이옵니다. 이제 당신 뜻에 굽히나이다" 하고 되뇌였다.

그의 죽음은 부모와 요한 보스코 신부의 아픔만은 아니었다. 그가 몸담았었던 학교 선생님들과 그의 생활을 보와 왔던 지역주민들뿐 아니라 그의 동료들도 그의 죽음을 슬퍼했다. 살레시오 학교에서는 그의 뜻을 기려 동상을 세웠으며, 후세에까지 알려나갔다. 1950년에 시복되어 54년에 시성된 도미니코 사비오 성인을 소년 합창단의 주보성인으로 모시고 있다. 16년간의 삶에서 단 한번의 실수와 죄를 용납하지 않은 그는 어쩌면 아이답지 않은 아이였지만 어느 성인들보다 더 두터운 삶을 살아간 것이다.

 

 

5월 7일: 성 세레니코와 세레노 은수자(+669)

세레니코와 세레노는 형제인데, 가족과 모든 소유물을 포기한 채 로마를 여행하였다. 사도들의 무덤 앞에서 기도할 때, 그들은 이상한 사람의 인도를 받고 로마에서 공동체 생활을 시작한 것이다. 그리고 그 이상한 사람은 그들은 프랑스의 알프스 넘어 새로운 곳으로 인도하였다. 이곳이 오늘의 샤토 곤시에르 숲 속의 은둔소이다. 그는 천사였다고 한다. 그들은 세상과 절연한 상태에서 염격한 자기 훈련을 했고, 마침내 그들의 성덕 소문이 퍼짐에 따라 방문객들이 늘어났다. 형 세레니코는 더욱 고요한 곳을 찾았으나 곧 공동체를 이룰만큼 제자들이 모여들었다. 그는 시편을 매일 암송하는 법을 가르텼고, 로마의 성무일과에다 베네딕도회의 성무일과를 덧붙여 사용하였다. 그는 669년에 운명하였다. 한편 동생은 솔제스 은둔소에서 환시, 탈혼 그리고 기적 등의 초자연적 은혜를 받고 지내다가, 연로한 나이 때문에 선종하였다.

 

 

5월 8일: 성 보니파시오 4세 교황(+615)

요한이라 부르던 의사의 아들인 그는 이탈리아 발레리아에서 태어나 대 그레고리오의 지도를 받은 사람이었다. 그는 후일 로마의 베네딕도회 수도자가 되었으나 곧 교황청에 근무하게 되자, 사면관이 되었다. 그는 608년에 교황이 되었으며 이방인들이 모셔진 로마 신전이나 판테온을 그리스도 교회화시키려는 노력을 꾸준히 하였다.

 

 

5월 9일: 성 베아토 은수자(+112)

영국의 사도 바르나바로부터 세례를 받은 그는 성 베드로에 의하여 스위스의 복음화를 위하여 파견되었으며 로마에서 사제가 되었다. 그 후의 생애는 알려진 바 없고 112년경에 한적한 산꼭대기의 한 동굴에서 죽었다고 전해온다. 용을 물리쳤다는 전설까지 있는 그의 동굴은 유명한 순례지가 되었으며, 폐쇄될때까지 순례객이 끊이지 않았다. 또한 성 베드로 가니시오가 그의 생애를 이야기하였고, 그의 놀라운 신심을 전파하였다.

 

 

5월 10일: 성녀 솔란지아 동정녀(+880)

프랑스 부르류스와 인접한 빌러몽에서 태어난 그녀는 포도원을 운영하던 가난한 부모 밑에서 자랐다. 지극히 열심하던 그녀는 하느님께 자신을 봉헌하기로 결심하여 혼자서 정결서원을 발하였다. 늘 하는 일이라곤 푸른 초원에서 양떼를 돌보는 것이었으므로, 자연과 이야기하며 기도하는 시간이 많았던 것이다. 그녀에게는 동물을 다스리는 능력 외에도 피유의 은사까지 얻었다. 이때 그녀의 미모와 성덕이 뛰어나다는 소문이 포와티에르 백작의 아들 귀에 들어갔다. 그는 말을 타고 산으로 가보니 마침 그녀는 양떼들과 함께 평화롭게 놀고 있었다. 그는 쏜살같이 말을 달려 그녀를 말위에 앉히고는 달아나던 중, 그녀의 반항이 거세어서 땅에 떨어져 중상을 입었다. 이때 그는 사냥용 칼을 들고 그녀를 위협하다가 끝까지 항거하자 그만 살해하고 말았던 것이다.

 

 

5월 11일: 성 프란치스코 수사(1642-1726)

나폴리의 교구 사제로 서품된 그는 28세 때 스스로 예수회에 입회하였다. 그는 정식으로 서원을 발하고, 죽을 때까지 농촌 선교사로서 나폴리 지방을 위해 일하였다. 그의 뛰어난 설교는 단순하고도 힘이 있었다. 그는 회개자를 얻기 위하여 감옥과 매음굴을 서슴없이 찾았고, 작은 촌락과 뒷골목 그리고 길 모퉁이에서도 그의 선교활동은 계속되었다. 또한 그는 무어인들도 개종시켰을 뿐만 아니라 터키 죄수들까지 신자로 만들었다. 더군다나 그의 가장 뛰어난 회개자는 자신의 부친을 살해한 어느 프랑스 여인이었다. 그 여인을 남장하게 하여 스페인군에 복무하게 하였다. 또한 그는 위험한 환경에 있는 수많은 어린이들을 구원하였다. 그의 장례식 떼에는 나폴리의 거의 모든 걸인들이 관 주위에 모여 이를 애도하였다.

 

 

5월 12일: 성 방그라시오 순교자(+304년)

시리아 태생인듯한 그는 일찍이 양친을 여의고 고아가 되어 로마에 살던 삼촌에게 맡겨졌다. 그는 여기서 삼촌과 함께 그리스도교로 개종했는데, 이때 그는 불과 14세의 나의였다. 그는 디오클레시아노 황제의 크리스천 박해 때 로마에서 참수치명하였고, 칼레포디우스 묘지에 안장되었다.

 

 

5월 13일: 성녀 율리아나 동정녀(1342-1423)

그녀는 영국 노르위치의 성 율리안 성당벽 외곽에서 은수생활을 할 때부터 알려지기 시작하였다. 1373년 16차례의 계시를 경험한 그녀는 탈혼 중에서 그리스도의 수난과 성삼위에 대한 계시를 받았으며, 그후 20년 동안이나 계속하여 위의 두 신비를 묵상하였다. 그 결과는 ’하느님의 사랑, 강생, 구속, 죄, 보속 그리고 하느님의 위로’ 등에 관한 계시록이다. 이것은 영문학에서도 매우 중요시하는 글들이다.

 

 

5월 14일: 성 보니파시오 순교자(+306년)

4세기초 아글라에라는 아름답고 매력적인 여인의 집 사장인 보니파시오는 다소 방종하고 무절제한 사람이었지만 자유롭고 인정이 많았으며 또 가난한 사람들을 꾸준히 돌보는 성실한 면도 있었다. 어느날 그녀로부터 동방으로 가서 순교자들의 유해를 수집해오라는 명을 받은 그는 긴 여행동안 술과 고기를 먹지않고 기도와 단식으로 임무를 수행하였다. 당시 서방교회는 평화를 누렸지만, 동방교회는 갈레리우스 막시미안과 막시미누스 다이아의 치하에서 박해를 받고 있었다. 그는 타르소에 당도하여 총독 관저로 가보니, 20여 명의 크리스천이 고문을 당하고 있었다. 그는 총독 앞에서 크리스천임을 강조하여 하느님을 찬양하였다. 총독은 즉시 그의 목을 처단하여 이탈리아로 보냈다. 한편 아글라에는 그 소식을 듣고 비아 라티나에서 그의 유해를 받았는데, 그 자리에 성당을 짓고 거룩한 순교자의 유해를 모셨고, 자신은 15년 동안 보속생활을 하다가 순교자 옆에 안장되었다.

 

 

5월 15일: 성 힐라리오 은수자(476-558)

이탈리아 투스카니에서 태어난 그는 12세 때부터 수도생활에 매력을 느껴 집을 떠나 은둔소를 세웠다. 뒤에 그는 갈라테아 수도원을 세웠는데, 자기 수도원을 파괴하려던 고트족의 왕 테오도릭을 설득시키는데 성공하였을 정도로 그의 성덕은 높았다.

 

 

5월 16일: 성 우발도 주교(+1160)

이탈리아 움브리아의 굽비오에서 태어난 그는 굽비오의 주교좌 성당에서 사제생활을 하던 중, 은수생활을 희망하고 계획을 실행에 옮기려 할 즈음에 주교가 되었다. 그는 놀라운 인내심과 자비심을 갖춘 덕있는 주교로 손꼽힌다.

 

 

5월 17일: 성 파스칼 증거자(1540-1592)

아라곤의 토레헤르모사에서 태어난 그는 목동이었는데, 독학으로 읽기와 쓰기를 배웠다. 프란치스코회의 입회를 신청하엿으나 거절당한 그는 재차 신청하여 평수사가 되었다. 그는 일생동안 수사로 보내면서, 스페인의 여러 수도원을 돌며 허드레 일을 하였으나 그의 극기와 애덕 그리고 병자와 가난한 사람들에 대한 남다른 사랑으로 많은 칭송을 받았다.  성체께 대한 특별한 사랑을 가졌던 그는 프랑스의 칼빈교파 지도자를 상대로 논쟁을 일으켜 큰 성공을 거두었고, 영적 자질을 높이 평가받았다. 빌라레알 수도원에서 운명한 그는 1690년에 시성되었으며, 성체대회 및 그 준비위원회의 수호 성인으로 공경받고 있다.

 

 

5월 18일: 성 펠릭스 증거자(+1587)

아풀리아의 치타 우칼레 교외인 칸탈리체에서 태어난 그는 어릴때부터 소몰이를 하는 등, 농사 일을 거들었으나, 항상 일하는 열심한 소년이었다. 성장한 뒤에도 그는 일하면서 기도하는 등 매우 높은 차원의 관상기도를 하였는데, 상당히 오랜 시간을 하느님과 대화하면서 지낼 정도였다. 치타 두칼레의 카프킨 수도원에 들어간 그는 수련기부터 이미 가난과 겸손의 극치를 보여주었다. 그리고 동료 수도자뿐만 아니라 칸탈리체의 어린이들도 그를 ’성인’이라고 부를 정도였다. 30세에 성대서원을 발하였고, 4년 후부터 죽을 때까지 로마에 살면서, 음식을 구걸하는 일을 비롯하여 수도원의 허드레 일을 하면서 생활하였다. 72세의 일기로 운명한 그는 죽는 날 성모님의 환시를 보았다고 한다.

 

 

5월 19일: 성 이보 법률가(1253-1303)

브리타니의 케르마르틴 영주의 아들인 그는 장성한 후에 파리에서 신학과 교회법 그리고 철학을 공부하고, 오를레앙에서 민법을 공부했다. 브리타니로 돌아오던 길에 그는 렌느와 트레귀에르의 판사가 되었는데, 주로 가난하고 힘없는 사람들과 또 가난을 이기지 못하여 이주해 온 난민들을 도왔다. 여기에서 그는 ’가난한 사람들의 번호사’란 별명을 얻었다. 1284년 사제가 된 그는 전공 분야에서 많은 활동을 하였으며 구호소를 세워 병든 이들을 돌보고, 가난한 이들을 사목하였을 뿐 아니라 설교 또한 비범하에 큰 성공을 거두었다. 그는 일생동안 엄격하고 청빈한 삶을 살았다. 그는 법률가의 수호성인이다.

 

 

5월 20일: 성녀 바실라 동정 순교자(+304)

왕족 출신인 그녀는 폼페이우스라는 사람과 어릴 때 약혼을 하였다. 그러나 크리스천이 된 그녀는 이 약혼의 파기를 주장하였는데, 그 이유는 세례를 받을 때 주님께 동정서원을 발하였기 때문이었다. 이에 화가 치면 폼페이우스는 그녀를 갈리에누스 황제에게 고발하니, 황제는 그와 결혼하든지 아니면 크리스천이란 제목으로 칼을 받든지 양자택일을 요구하였다. 그녀는 주저없이 후자를 택하여 비아 살라리아노에서 죽었다. 1654년 성 치리아코 카다콤바에서 ’바실라’라는 비명이 새겨진 무덤을 발견하였는데, 여기에는 종려가지와 비들기 한 마리가 그려져 있었던 것이다. 이것들이 곧 순교자와 동정녀의 상징이다.

 

 

5월 21일: 성 테오필로 원장(+1740)

코르시카의 작은 마을인 코르테에서 태어난 그는 학문을 좋아하는 부모 밑에서 자라면서 깊은 신심을 길렀는데, 주일이면 성당에서 들은 강론을 집에서 되풀이하곤 했던 것이다. 이리하여 그는 15세의 나이로 카프친회에 입회 신청을 하엿지만 허락받지 못하다가 2년 뒤에 프란치스칸이 되었다. 로마 나폴리에서 1700년에 사제가 된 그는 1705년 선교 사제로 활동하면서 놀라운 성공을 거두웠다. 그는 설교의 은혜를 받은 사람으로 푸체치오에서 선종하였다.

 

 

5월 22일: 성녀 리타 수절

이탈리아에서 살다간 많은 성인 중에서 기적의 열매를 항상 지니셨던 분이 바로 리타 성녀이다. 아펜니노 산맥의 골짜기를 들어가면 자그마한 산골이 나오는데 이곳이 성녀의 출생지인 카시아이다. 이곳은 성 프란치스코가 태어났던 아시시와 가까운 곳에 위치해 있으며 오랫동안 지역 주민들끼리의 반목때문에 사소한 분쟁과 혼란이 끊이지 않던 곳이다. 그녀가 생존해 있던 l370년대 부터 15 세기 초엽까지 교회는 혼란의 거친 풍랑을 맞는 시기였으며, 교황 그레고리오 11세는 유럽 혼란을 피해 로마를 떠나 아비뇽으로 교황청을 옮겨 갔던 때였다. 리타 성녀는 출생 전부터 기적의 화관을 쓰고 있었는데 그녀의 부모인 안토니오와 아마타는 늦게까지 아이가 없어, 비어 있는 요람으로 하루하루를 지냈다. 하루는 아마타가 열심히 기도하다. 환시를 통해 "곧 너의 기도의 선물로 여자 아이를 낳을 터인데 그 아이는 후에 큰 일을 하게 될 것이다"는 천사의 말을 들었으며 그 아이의 이름을 ’리타’라고 지을 것을 당부하였다 한다. 그리하여 1381년에 태어난 리타는 그해 5월 22일 유아세례를 받았다. 세례를 받은지 며칠 안되어 기적같은 일이 또 벌어졌다. 아기가 잘 쉴 수 있도록 부모는 요람을 들판 그늘에 놓고 일을 하는데 온갖 새들이 아기 주위에 찾아와 평화롭게 맴돌았으며, 각종 짐승들이 아기와 대화하듯이 뛰놀았다 한다.

그녀는 어린시절부터 부모에게 절대 순종하는 효심과 깊은 신앙심이 있었다. 또한 자신을 온전히 하느님께 바치기로 결심했었다. 그러나 리타에 대한 부모의 바람은 달랐다. 그녀가 자식을 키우며 살아가는 평범한 여자가 되길 원했다. 부모의 뜻에 따라 l2세의 어린 나이에 `파올로 디 페르디난도’란 남편을 맞게 되었는데, 그녀의 남편은 마을 사람에게 환영받지 못하는 사람이었으며 비신자였다. 리타는 결혼시기동안 남편으로 부터 온갖 고통과 굴욕을 오직 사랑으로써 극복하여 끝내는 남편을 회두시켜 결혼 18년째 되는 해 교리반에 등록시켜 착한 그리스도의 자녀가 될 준비를 하기에 이르렀다. 하지만 어느날 둑을 걸어가던 리타와 페르디난도는 평소에 원한을 품고 있던 `단테지’란 사람을 만나게 되었다. 싸움 끝에 남편은 칼에 맞아 죽고 말았다. 그녀는 눈 앞에서 죽어 가는 남편을 지켜 보아야만 했다.그녀의 마음 한구석에서 일어나는 인간적인 심판과 복수심을 신앙의 힘으로 극복해 나갔다. 이어 남편을 살해한 단테지란 사람을 용서하고 그를 자신의 아들 견진대부로 세우게 되었다. 남편이 죽은지 일년도 안되어 두 자식도 병마에 시달리다가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그녀의 30여 년 동안의 세속에서의 생활은 언제나 좌절과 고통의 연속이었다. 하지만 매 시기마다 주님께 의지하며 극복해 내었던 것이다. 홀로 된 리타는 아픔을 극복하고 그분께 결혼 전 약속했던 자신을 봉헌하기로 마음을 굳히고 카시아의 아우구스티누스 수녀회를 찾았다. 하지만 동정녀의 모습이 아닌 그녀를 수녀원은 받아들일 수 없었다. 원장 수녀는 그녀의 깊은 신앙심을 보고 훌륭한 수도자가 될 것임을 알았으나 규칙상 과부는 입회한 전례가 없어 허락하지 못하고 있었다. 고향으로 돌아온 리타는 기도와 고행, 선한 일 등 수도자와 같은 삶을 살아가며 어떤 모습으로든지 자신이 받아들여지기만을 기다리며 간구했다.

그러던 어느날 밤 기도하는 리타에게 그녀의 전구를 들어주던 수호성인들이 찾아와 아무도 들어갈 수 없는 굳게 닫힌 아우구스티누스 수녀원 안뜰의 지하 기도방으로 인도하는 기적이 나타났다. 그날 아침 공동기도를 위해 기도방에 내려온 수녀들은 입회가 허락되지 못했던 그부인이 기도하고 있는 것을 보고 깜짝 놀랐으며, 이 사건에 대해 원장 수녀는 주님 은총의 징표임을 확신하고 수녀원 생활을 허락하게 되었다. 영신적으로 단련되어 있는 그녀에게 있어 수련기는 더욱 굳센 바탕이 되었다. 항상 고요한 곳을 찾아 묵상을 즐겼다. 그리고 인간이므로 가질 수 있는 욕망이 사라질 때까지 돼지털로 짠 거친 수도복 속에 많은 가시를 넣어 자기 몸을 찌르면서 생활하였다. 수녀원 생활이 시작된 이후에도 리타 성녀에게 베풀어지는 하느님의 보살핌은 계속되었다. 그녀는 정원 한구석에 이미 말라 죽은 포도나무에 물을 주기 시작했다. 매일 아침 저녁으로 정성을 다해 계속 물을 주고 기도하는 것을 여러 동료 수녀들은 어리석다고 비웃기까지 했으나, 어느 화창한 날 죽어 있었던 포도나무 가지의 잎사귀가 움트고 포도가 듬뿍 열린 기적이 나타났다. 종신 서원을 받을 때에도 하늘의 징표가 내렸는데, 자신을 받아주신 하느님의 은총에 감사드리며 묵상 중에 갑자기 계단이 하늘에서 내려와 길게 놓여지더니 그 꼭대기에 예수님께서 성좌에 앉아 계셨다.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광채를 띤 예수님은 인자하신 모습으로 그녀를 향해 올라오라고 말씀하셨다 한다. 그후 원장 수녀가 된 리타 성녀는 수녀원의 구석 구석을 살아있는 수도원이 되게 가꾸었으며 따라서 지원자들도 많아졌다.

심신의 고통과 단식, 계속되는 보속의 생활로 인해 결국 리타 성녀는 건강을 잃게 되었고, 몸져 누워있는 동안 전혀 음식물을 섭취하지 못하였다. 하지만 그녀에게 성체를 영할 수 있는 배려가 내려져 그 성체를 영하는 힘으로 간신히 생명을 지탱해 갔다. 오랜 투병생활 동안에도 그의 영혼은 견고하고 깨끗했으며 병자의 얼굴이 아닌 항상 밝은 모습을 지녔다. 그의 친척들이 마지막 작별인사를 하기 전 리타 성녀에게 무엇이든 부탁이 있으면 들어주겠다고 하자, 그 추운 겨울 고향에 있는 자기 집 텃밭에서 장미꽃 한송이를 갖다 달라고 했다. 친척들은 이 겨울에 어디서 장미꽃을 구할 수 있을까 고민하다 텃밭에 가보니 과연 엄동설한에서도 한송이 장미꽃이 의연히 피어 있었다. 마지막 순간까지도 하느님께서 주신 선물을 세상에 보여주시고 가셨다.

l595년 시복되고 l900년에 시성된 리타 성녀의 유해는 현재까지도 수녀원 내부에 안치되어 있다. 전체적으로 하얀 피부를 유지하고 부패되지 않았으며 l828년 그녀 시복 축하 축제 때 혼잡한 축제분위기를 경고하는 듯 몸이 움직이고 눈이 떠져 현재까지 두눈이 떠 있는 상태이다. 리타성녀(l38l-l457) 의 축일은 5월 22일 지내고 있다. 그녀 스스로 과거의 절망과 아픔을 극복하였듯이, 세상 저 아래서 구원받지 못하는 가련한 이들과 매순간 한탄과 절망 속에서 헤매이는 모든 이들에게 리타 성녀는 하느님 안에서의 희망과 꿈을 가르쳐 주었다. 또한 정녕 결백하고 완전한 사랑은 아무런 보상을 기대하지 않으며 더욱더 하느님의 종임을 채찍질 해야함을 가르치고 있다.

 

 

5월 23일: 성 데시데리오 주교 순교자(+607)

비엔나의 주교인 그는 성 아우구스티노가 로마에서 영국으로 갈 때 성 그레고리오가 그를 만나도록 추천했던 주교들 가운데 한 사람이다. 그러나 유스타라 라는 부인이 지나친 흠모로 인하여 중대한 제소에 제기되었는데, 이 사건으로 그는 몇 년 동안 자기 교구에서 쫓겨났다고 한다. 그러나 몇 년 후에 다시 돌아오자 이번에는 티에리 국왕이 다시 그를 죽을 때까지 그곳을 떠나다가 수행원들에 의하여 살해되었다. 그는 죽을 때가지 주교직 수행에 노력했으며 또 그에 대한 누명은 사실이 아니라는 이유들 때문에 순교자로 공경받게 되었다.

 

 

5월 24일: 성녀 요안아 거룩한 부인(1세기경)

헤로데 안티파스의 신하 쿠자의 아내인 그녀는 자신의 재산을 바쳐 예수의 일행을 돕던 사람이다.(루가 8, 3) 또한 그녀는 부활절 아침에 예수의 빈 무덤을 찾았던 세 부인 중의 한 사람이다.(루가 24, 10)

 

 

5월 25일: 성녀 마리아 막달레나 동정녀(1566-1607)

플로렌스의 명문가에서 태어난 그녀는 어릴때부터 선행과 신심생활에 관심을 보였는데 14세 때에 플로렌스에 있는 성 요한 수도원의 기숙생이 되면서부터 열렬한 신앙인이 되었다. 가르멜 수녀원에 간 그는 곧 위중한 병에 걸려 고생하였다. 서약 후에 자주 탈혼에 빠머으며, 한 번은 거의 40일 동안이나 천상의 위로를 받았다. 그녀는 항상 방과 물까지 절재하여 단식했으며, 천상 정배와 동정 성모님의 도움을 늘 간구하였다. 1607년 내세의 일기로 하느님 품에 안기게 된 그녀는 1869년에 시성되었다.

 

 

5월 26일: 성 필립보 네리 증거자(1515-1595)

이탈리아 프로렌스에서 태어난 그는 로마로 가, 거기서 어느 부유한 고향사람의 두 아들을 가르치며 은거생활을 하다가, 사피엔차와 산타 아고스티노에서 철학과 신학을 공부하였다. 이때무터 길거리나 시장 바닥에서 로마인들에게 설교한 그는 신앙생활이 미지근한 아들에게 큰 감명을 주었다. 1548년 그는 자신의 고해신부인 페르시아노 로사 신부와 함께 ’성삼 형제회’를 설립했는데, 이 수도회는 어려운 순례객들을 사목하기 위하여 평신도들로 구성되어 ’40시간’신심을 전파하였다.

또한 자신을 도와 줄 사제들을 확보하는 일에도 큰 성공을 거두었는데 이들은 신자들을 그들의 오라토리오(방)에 모아놓고 영적 권고와 고해성사를 주곤 하였으므로 ’오라토리언’이란 이름으로 알려있지만, 실제로 ’오라토리오회’가 창설된 연대는 1564년이다. 그는 탈혼과 환시를 수차 경험하였고, 기적까지 행하였으며, 예언의 은혜로 받았던 것이다. 1593년에 그는 건강을 이유로 장상직을 사임하였으며 1662년에 교황 그레고리오 15세로부터 시성되었다.

 

 

5월 28일: 성 베르나르도 사제(996-1081)

이탈리아에서 태어난 그는 아오스타의 총대리가 되엇고, 40여 년 동안 알프스에서 선교사업에 종사한 위대한 설교사였다. 그가 자신의 교구 내에 학교와 성당들을 세웠지만 가장 높이 칭송받은 일은 알프스 산을 넘는 여행자들이 길을 잃고 헤맬 때, 그들을 돕기 위하여 세운 알프스 산의 주 숙박소이다. 이 곳은 그가 죽은 뒤에 ’큰 베르나르도’, ’작은 베르나르도’라고 이름지어 오늘에 이른다. 비오 11세에 의하여 산악인의 수호성인으로 선포되었다.

 

 

5월 29일: 성녀 테오도시아 동정녀(+745)

어려서 부모를 잃은 그녀는 콘스탄티노블에 있는 아나스타시아 수녀회 수도원에 입회하여 수도생활을 하였다. 때는 성상의 공적 공경을 배격하던 레오 황제 시대였던 관계로 상당히 어려운 시기였다. 황제의 명에 따라 일단의 무리들이 주님의 성화를 파괴하려고 사다리를 타고 높이 올라갔을 때, 그녀는 그 사다리를 흔들어 그들을 떨어뜨려 죽게 하였다. 이때 데오도시아는 투옥되어 죽을 때까지 고문을 받았다.

 

 

5월 30일: 성 페르디난도 3세 왕(1199-1252)

레옹의 살라망카 교외에서 태어난 그는 18세 때에 카스틸레의 왕이 되었다. 1219년 스와비아의 베아트리체와 결혼하엿고, 그의 부친이 돌아가셨을 때에는 많은 반대를 부릅쓰고 레옹의 국왕이 되었다. 그는 재임 20년 동안 무어인들과 늘 생활했으며 지혜롭고 뛰어난 왕으로 칭송받았다. 시메네스 대주교를 재상으로 모셨던 그는 1243년 살라망카에 대학교를 세웠으며 부르고스 대성당을 재건하고, 세빌레의 회교 사원을 성당으로 개조하는 등 수많은 업적을 남겼다. 그의 장례식 때에는 작은 형제회(프란치스코회)의 수도복이 입혀졌고, 세빌레 대성당에 안장되어 국민들의 공경을 받아온다.

 

 

 

  6 월의 성인

 1일 : 유스티노 순교자, 팜필로 사제 순교자, 유벤시오 순교자, 에네코 원장

 2일: 마르첼리노 순교자, 에라스모 주교 순교자, 에우제니오 1세 주교 순교자, 포티노 주교, 블란디나 동정 순교자

 3일: 가롤로 순교자, 체칠리오 사제, 리파르도 원장, 클로틸다 황후, 바울라 동정 순교자, 올리바 동정녀

 4일: 프란치스코 증거자, 퀴리노 주교 순교자, 월터 원장, 사투르니나 동정 순교자, 부리아나 동정녀

 5일: 보니파시오 사제 순교자, 도로테오 사제 순교자, 산치오 청년 순교자, 치리아 순교자, 발레리아 순교자

 6일: 노르베르토 주교, 필립보 부제, 바울리나 순교자, 코카 동정녀

 7일: 바울로 주교 순교자, 로벨토 원장, 안토니오 주교, 포타미외나 동정 순교자

 8일: 막시미노 주교, 메다르도 주교, 월리암 주교, 멜라니아 수절, 시라 동정녀

 9일: 에프렘 부제 학자, 프리모 순교자, 골룸바 원장, 펠라지아 동정 순교자

10일: 마우리노 원장 순교자, 바르도 주교, 보구밀로 주교, 레스티투토 순교자, 올리바 동정 순교자

11일: 바르나바 사도, 펠릭스 순교자, 포르투나토 순교자, 파리시오 수도자, 도쿰라 동정녀

12일: 요한 증거자, 바실리데스 순교자, 레오 3세 교황, 크리스티아노 주교, 안토니아 동정 순교자, 쿠네라 동정녀

13일: 안토니오 사제 학자, 펠리쿨라 동정 순교자, 아퀼리나 동정 순교자

14일: 바실리오 주교 학자, 발레리오 순교자, 루피노 순교자, 메토디오 주교, 디냐 동정 순교자

15일: 비토 소년 순교자, 란델리노 원장, 모데스토 동정녀, 젤마나 동정녀, 크레센시아 순교자

16일: 베논 주교, 아우렐리아노 주교, 치리코 동정녀, 룻가르다 동정녀, 유스티나 순교자, 율리타 주교 순교자

17일: 그레고리오 주교 증거자, 아비토 원장, 히메리오 주교, 데레사 여왕, 산치아 순교자, 에밀리 동정녀

18일: 포르투나토 증거자, 아만도 주교, 엘리사벳 동정녀

19일: 제르바시오 순교자, 프로다시오 순교자, 로무알도 원장, 율리아나 동정녀

20일: 실베리오 교황 순교자, 고반 순교자, 플로렌티나 동정녀, 헬리아 동정녀

21일: 알로이시오 수도자, 레우프리도 원장, 에우세비오 주교, 테메트리아 동정 순교자

22일: 토마스 모어 주교 순교자, 요한 피셔 주교, 파울리노 주교, 알비노 순교자, 콘솔티아 동정녀, 로트루다 동정녀

23일: 리베르토 주교, 히둘포 증거자, 아그리피나 동정 순교자, 에델드레다 동정녀

24일: 요한 세자 탄생, 심플리치오 주교, 알레나 동정녀

25일: 아달베르토 증거자, 프로스펠 주교, 갈리카노 주교, 막시모 주교, 고하르도 주교 순교자, 몰로나코 주교, 페브로니아 동정 순교자, 에우로시아 동정녀

26일: 펠라지오 소년 순교자, 바질리오 주교 순교자, 살비오 순교자, 안텔모 주교

27일: 치릴로 주교 학자, 라디슬라오 왕, 삼손 증거자

28일: 이레네오 주교 순교자, 플루타크 순교자, 제르마노 원장, 알모 원장, 마르셀라 순교자

29일: 베드로 사도, 바울로 사도, 가시오 주교, 엠마 수절, 살로메 동정녀

30일: 테오발도 은수자, 말시알 주교, 레문도 순교자, 에밀리아나 동정 순교자, 루치아 동정녀

 

 

6월 1일: 성 유스티노 순교자(100-165)

플라비아 네아폴리스에서 태어난 그는 철학, 수사학, 역사 그리고 시를 공부하였다. 그후 에페소에서 잠시 교사직에 봉직하다가 크리스천 성서 공부를 시작한 그는 30세쯤 크리스천이 되어 자신의 새로운 신앙을 이웃에게 전하였다. 그는 이방인 철학자들과의 논쟁을 거듭하다가, 마침내 로마로 와서, 철학 학교를 세웠다. 그는 당대 최고의 호교론자로서 크레센스라는 견유학파와의 논쟁을 벌이다 로마 집정관에게 끌려갔다. 동료들과 함께 체포된 그는 이방 신전에 희생물을 바치라는 요구를 거절, 수많은 고문을 당한 후 참수치명하였다. 그는 크리스천의 첫 번째 호교론자이며, 그리스도교에 대하여 장문의 글을 남긴 최초의 평신도이다. 주요 저서는 안토니우스 황제에게 보낸 ’호교론’이 유명한데, 이것은 그리스도교의 반대자에게 보낸 첫 번째 문서이다. 그 다음으로 ’트리모와의 대화’인데, 이 책은 트리모와의 대화를 통하여 그리스도교와 유대교 사이의 문제를 다루고 있다.

 

 

6월 2일: 성 마르첼리노와 베드로 순교자(+304)

마르첼리노는 디오클레시아노 박해 때에 로마의 뛰어난 사제였고, 베드로는 구마자였다. 이들은 새로운 개종자와 더불어 신앙을 돈독히 하는데 힘을 쏟았다. 그러나 개종자중 어느 간수의 아내와 딸 때문에 체포되어 고문받고 니그라라는 숲에서 참수치명하였다. 그들의 유해는 귀부인인 루실라와 피르미나에 의해 몰래 옮겨져, 라 라비카나의 성 티부르시오 카다콤바에 안장되었다. 교황 다마소는 그들의 묘비명을 세웠고, 콘스탄틴 황제는 그 무덤에 성당을 지었다.

 

 

6월 3일: 성 가롤로 르왕가, 요셉 브카사와 동료 순교자(+1886)

성 가롤로 르왕가 일생은 우간다의 순교자로 불리고 있다. 중앙 아프리카 내륙지방의 미개한 부족에 1879년 가톨릭 선교사들이 처음 파견되었다. 그리고 우간다에서는 극히 우호작이었던 므카사 추장의 도움으로 선교에 진전을 볼 수 있었다. 그러나 그의 후계자 무왕가는 크리스천을 뿌리뽑기 위하여 1885년 열심한 부하 요셉 므카사를 본보기로 참수하였다. 하지만 므카사의 지위를 이은 가롤로 르왕가는 추장 몰래 4명의 예비자를 세례주는 등 활동을 계속하였다. 추장은 1886년 또 다시 신자들을 잡아들여 옷을 벗긴 채 꽁꽁 묶어 밤이 새도록 노래부르게 하는 등 괴롭하며 살해하였다. 그 외의 많은 순교자들은 1920년 성대하게 시복되었다. 그들의 순교 이후 바간다족들 가운데 500명 이상이 영세하고 3000명 이상의 예비자를 낳아, 오늘의 우간다 교회가 꽃피우는 밑거름이 되었다. 이들은 모두 1964년에 시성되었다.

 

 

6월 4일: 성 프란치스코 카라치올라 증거자(1563-1608)

귀족 집안 출신인 프란치스코는 이탈리아 아브루치의 셀라 산타 마리아에서 태어나 아세니오란 이름으로 영세하였다. 22세 때 나병으로 여겨지는 중병에 걸렸는데, 그는 이 병에서 일어나기만 하면 하느님께 자신의 생을 바치겠다고 스스로 서원을 하였다. 기적같이 완쾌된 그는 나폴리에서 공부하고 사제로 서품되었다. 1588년에는 12명의 동료들과 함께 병원의 환자들과 죄수들을 위하여 일했고, 사목하는 작은 율수 성직회를 창설하고, 식스토 5세 교황의 승인을 받고, 첫 번째 장상으로는 아도르노 신부가 선임되었다. 이때 아세니오는 프란치스코로 개명하고 나폴리에 수도원을 짓고 그 다음에는 스페인으로 발을 뻗쳤다. 아도르노 사망 후 그는 장상을 이어 7년 동안 마드리드, 발라돌리드, 알칼라에 수도원을 세워 큰 업적을 남겼다. 자신이 세운 아뇨네에서 운명한 그는 환시와 예언의 은혜가 충만한 성인이었다.

 

 

6월 5일: 성 보니파시오 주교 순교자(675-754)

영국 더본셔의 크레디톤에서 태어난 그는 윈체스터의 베네딕도 수도원에서 공부하고 후일 이 학교의 교장이 되었다. 715년에 사제가 된 그는 교수로서 설교자로서 명성을 떨치다, 프리스랜드의 선교사가 되기로 결심하였다. 그러나 선교 사업이 실패로 돌아가자 교황 그레고리오 2세는 게르마니아족의 이방인들을 개종시키라는 명을 받았다. 독일 지역의 주교가 된 그는 챤스 마르텔로부터 보호를 보장받고 헤츠에서 계속 설교하였다. 그는 아무런 해도 입지 않고 이방 신앙의 대상이던 호르의 오크를 파괴하므로써 거대한 이방인들을 가이스말에 모으는데 성공하였다. 그런후 그는 투린지아에서 오르르루프에 수도원을 세웠고, 영국 수도자들을 게르마니아의 선교사로 파견하는 일을 성공적으로 수행하였다. 그 후 여러 수도원을 세웠는데, 그중 풀다 수도원은 몇 년 지나지 않아 북 유럽에서 가장 큰 수도원이 되었다. 754년 스스로 주교직을 사임한 그는 이방 관습에 다시 떨어진 프리스랜드를 재건하는데 여생을 바쳤다. 그는 프르스랜드의 독쿰에서 개종자들에게 견진을 주려고 준비하는 중에 이방인들의 급습을 받고 살해당하였다. ’게르마니아의 사도’로 불리는 그의 축일은 비오 9세에 의해 1874년부터 전 교회에 퍼져 공경하고 있다.

 

 

6월 6일: 성 노르베르토 주교 (1080-1134)

프러시아의 클레베스 공국 삭텐에서 태어난 그는 헨리 5세 황제의 궁중에서 하사품 관리자로 일하고 있었다. 사제직 받기를 꺼렸던 그는 성령의 이름으로 생활을 일신하고 1115년 사제 서품은 물론 수도자의 옷까지 입었다. 그러나 그는 지나치게 극단적인 개혁을 시도하였으므로 여론이 좋지 않게 되었다. 바로 주임사제직을 그만 두고 소유물을 팔아서 가난한 이들에게 나누어 준 뒤, 보속의 길을 떠났다. 1120년 13명의 동료와 함께 프레몽트레에서 성 마르티노의 율수 수도회를 개혁하여 새 수도원을 창설하였다. 그는 8개의 대수도원을 그곳의 세웠고, 교황 호노리노 2세로부터 1125년에 공식인가를 받았다. 그 후 그는 막데부르그 대주교로 임명되었고, 프랑스, 벨지움 그리고 독일 지방을 순회하며 설교하였는데, 특히 안트워프에서 트란첼모 이단을 격퇴한 것이 유명하다.

 

 

6월 7일: 성 안토니오 주교(1789-1846)

제노아 교외 체레토에서 태어난 그는 그곳에서 공부하고 사제가 되었다. 사목활동과 교육사업에 투신하다가 선교활동에도 헌신하였는데, 그의 설교는 뛰어났고, 고해신부로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그는 성 알퐁소 리구리모의 선교회를 세웠고, 오글토 마리아 수녀회를 세워, 가난한 어린이들을 교육하고 병자를 돌보게 하였는데, 미국과 아시아에서 크게 성장하였다. 1838년 봄비오의 주교로 임명되었고 1951년에 시성되었다.

 

 

6월 8일: 성 막시미노 주교(연대미상)

전승에 따르면, 그는 예수님의 12제자 중의 한 사람인데, 세 분의 마리아 곧 마리아 막달레나, 마리아 클레아파스, 마리아 살로메, 마르타 그리고 라자로와 더불어 프로방스 지방으로 가서 복음을 전하였다고 한다. 그는 본부를 엑스에다 두었고, 이 지방의 초대 주교였다. 또한 그는 요한 복음 9장 1절-38절에 나오는 태중 소경으로 주님으로부터 치유받은 사람과 동일 인물이라고 본다.

 

 

6월 9일: 성 골룸바 원장(521-597)

영국 도느갈 가탠의 왕가집안에서 태어난 그는 모벌에서 교육받고 부제가 되었다. 그 후 라인스터에서 공부한 그는 클로나드에서 사제가 되었다. 영국의 거의 모든 지역에 산재해 있는 성당에서 설교하고 수도원을 세우면서 약 15년을 지냈다. 그 후 563년에 12명의 친척들과 함께 스코틀랜드 연안에 있는 디오나로 갔으며, 여기서 수도원을 세웠는데, 영국의 교회에서 가장 큰 수도원으로 발전하였다. 또한 스코틀랜드의 픽트족에게 복음을 전하는데 힘써, 브루느 국왕을 개종시켰고, 마침내 픽트랜드 전역을 복음화하는데 성공하였다. 그의 성덕이 널리 알려지고, 기적에 대한 명성으로 인하여 수도원의 방문자가 줄을 이었다. 그의 회칙은 성 베네딕도의 회칙이 정착되기 전까지 전 유럽에서 통용되다시피 했다.

 

 

6월 10일: 성 보구밀로 주교(+1182)

폴란드 귀족 출신인 그는 베르테의 도브로브에서 태어나 파리에서 공부한 후, 고향에 와 도브로브 성당을 세웠다. 그 후 그니에즈노 교구장으로 선출되어 1167년에 착좌하였다. 가족의 영지를 희사하고 코르노바에서 시토 수도원을 세운 그는 지혜롭고도 열성적인 자세로 교구를 크게 성장시켰다. 연로하여 스스로 주교직을 사임한 후, 카말돌리회에 들어가 우니오브에 있는 한 은둔소에서 여생을 보냈다.

 

 

6월 11일: 성 바르나바 사도(1세기)

그는 비록 12사도에 들지는 않았지만, 사도로서 인정을 받았다. 원래 키프러스에서 태어난 그는 유대교에서 개종한 뒤에 자기 재산을 팔아 사도들에게 봉헌하였다. 이때 사도들이 그를 바르나바라고 이름지어 주었다. 그는 그곳에서 바울로로 제자로 받아들였으며 그와 함께 기근에 허덕이던 예루살렘 공동체에 안티오키아의 기부금을 전달하기도 했다. 바울로와 사촌 요한 마르코와 함께 안티오키아로 선교 여행을 떠난 그는 유대인으로부터 맹렬한 비난을 받기도 했다. 그들은 리카보니아, 이쾌움, 리스트라 등 여러 지역에서 유대인과 분쟁을 벌렸다. 그 후 바르나바는 알렉산드리아와 로마에서 전교하엿고, 키프로스 교회의 창설자로 인정받았다. 61년에 살라네스에서 돌을 맞아 운명하였다.

 

 

6월 12일: 성 레오 3세 교황(+816)

교황 아드리아노 1세 서거 직후에 교황이 된 그는 선출되기 전에 불만을 품은 무리들로부터 수많은 도전에 시달렸다. 성 마르코 축일 행진 도중에 도적들에 의해 피납된 그는 혀가 짤리는 등 거의 산송장이 되었다. 그러나 기적적으로 회복되어 모든 이들이 기적으로 간주하였다. 재임기간 프랑스의 왕 샤를르마뉴을 대관하여 교회재건과 교황청과 국가들간의 관계 회복을 성공적으로 성취하였다. 그는 교황으로서 20년간 재위했으며 로마 순교록에 올라 있다.

 

 

6월 13일: 성녀 아퀼리나 동정 순교자(+3세기말)

페니치아의 비블루스에서 태어난 그녀는 태중 교우로서 에우탈리우스 주교로부터 세례를 받았다. 그녀는 디오클레시아노의 크리스천 박해 때에 체포되어 총독 볼루시안 앞에 끌려갔다. 이때 그녀의 나이는 12세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용감하게 신앙을 고백하였다. 온갖 감언이설과 위협도 그녀를 설득시키지 못했다. 그래서 모진 매를 맞고 순교하였다. 희랍 전설에 의하면 빨갛게 다룬 쇠꼬챙이로 그녀의 귀를 찔렀는데, 너무나 고통스러워서 죽음에 이르렀다고 한다. 그리고 그녀가 참수당할 때 피대신에 우유같은 흰 액체가 흘러내렸다고 한다.

 

 

6월 14일: 성 발레리오와 루피노 순교자(+287)

이 두 성인은 로마에서 파견되어 골 지방을 선교하기 위한 선교사들이었다. 디오클레시아노 박해 때 소와송 지방에서 선교하던 중에 체포된 두 성인은 주요 지도자들로 취급되어 참수치명되었다.

 

 

6월 15일: 성 비토와 모데스토 순교자(연대미상)

시실리의 어느 원로원의 외아들로서 12세 때 크리스천으로 개종한 비토는 개종과 기적들이 시실리의 총독 발레리안에게 알려졌다. 총독은 그를 불러 신앙을 포기토록 종용하였지만 헛수고였다. 이리하여 비토와 그의 가정교사이던 모데스토 그리고 종이던 크레센시아가 루카니아로, 그 다음에는 로마로 끌려갔다. 비토는 황제 디오클레시아노의 아들을 악령에서 구해주기도 했지만 우상에게 희생바치기를 거절한 그에게 고문을 하였다. 그러던 중 어떤 힘에 의하여 신전이 무너졌을 때 한 천사에 이끌려 루카니아로 왔다. 그들은 여기서 운명하였다. 비토에 대한 공경은 특히 독일에서 활발하고, 그의 유해는 삭소니아로 이장되었다. 또한 그는 간질병자의 수호성인인데, 비토의 춤으로 치유할 수 있다고 한다.

 

 

6월 16일: 성 아우렐리아노 주교(+551)

546년에 아를로의 주교가 된 그는 교황 바질리오로부터 빨리움을 받고, 골 지방의 교황 대리가 되었다. 그는 수도원들을 여러 곳에 세우고 귀중한 유물들을 보관하게 되었다. 또한 확고한 교리를 공고히 하기 위해 교황께 서신을 보내곤 하였다. 그는 리용에서 서거했는데, 그의 무덤이 1308년에 발굴되었다.

 

 

6월 17일: 성녀 데레사 여왕(+1250)

포르투갈 왕 산초 1세의 장녀인 그녀는 레옹의 왕 알퐁소 9세와 결혼하였다. 이들 부부는 여럿 자녀를 두었으나, 사촌간의 결혼이었으므로 혼인 자체가 무효혼인으로 선언됨에 따라, 그녀는 포르투갈로 돌아왔다. 그 후 그녀는 자신의 영지인 로르바요에 베네딕도 수도원을 세웠고, 시토회 규칙을 따르며 지냈다. 한 때 그곳의 수녀 수효가 300명을 헤아렸다.

 

 

6월 18일: 성녀 엘리사벳 원장(1129-1164)

비천한 가정에서 태어난 그녀는 12세 때에 쇼나우의 베네딕도 수도원에 입회하여 극히 엄격한 수덕생활을 하였다. 1152년경에 첫 번째 환시를 본 그녀는 그후 일생동안 수많은 초자연적 현상인 환시, 탈혼, 예언 등을 하였으며 가끔 그녀의 몸에 타박상을 내고 때리는 악마적인 환시도 있었다. 특히 주님의 수난과 부활 그리고 승천에 대한 환시를 묘사하였는데, 이를 처음으로 기록한 사람은 남동생인 에그베르트였다. 1157년에 원장이 되고 7년 후에 운명한 그녀는 공식적으로 시복, 시성된 기록은 없지만 로마 순교록에 성녀 엘리사벳으로 언급되고 있다.

 

 

6월 19일: 성 로무알도 원장(950-1027)

이탈리아 라벤나에서 태어난 그는 부친이 살이 사건 때문에 클라세의 산 아폴리나레 수도원으로 피신하였다가, 20세 때 수도자가 되었다. 그후 더욱 엄격한 생활을 하며 베니수 교외에 살던 마리노라는 은수자의 제자가 된 그는 978년경 베니스 공화국 총독 베드로 오르세올로에 의해 수도원 근처에 은둔소를 짓고, 은수자로 살았다. 그후 부친이 회개하여 수도자가 되었음을 안 그는 만나기 위해 이탈리아로 갔는데, 오토 3세 황제는 그를 아폴리나레의 원장으로 임명했다. 원장직을 원하지 않았던 그는 2년뒤에 사임하고 헝가리의 마니아르족에게 복음을 전하려 떠났다. 그러나 강제로 쫓겨나 고행으로 돌아왔으나 고령에 따른 질병으로 운명하고 말았다. 그가 세운 다섯 개의 은둔소 가운데 카마돌리에 세운 은둔소는 후에 카말돌리회의 모원으로 발전하였다.

 

 

6월 20일: 성 고반 순교자(+670)

영국에서 태어난 성 푸르서의 제자였던 그는 스승을 수행하여 이스트 앙글리아로 갔으며, 그 후 성 울탄과 더불어 골 지방으로 파견되어 선교하였다. 그러나 그는 독일에서 건너온 야만인들의 희생물이 되고 말았다. 쌩 고반 마을은 그가 생활하고 죽었던 몽 에르미타쥬에 있다.

 

 

6월 21일: 성 알로이시오 수도자(1568-1591)

스페인의 롬바르디의 가족성에서 태어난 그는 아버지의 대를 이어 군인이 될 처지였지만 어릴적부터 수도생활을 하기로 결심하였다. 1577년 플로렌스 만투아 공작의 궁중에서 공부하던 그는 귀족사회의 폭력과 방종에 실망하고 예수회에 입회하기로 마음먹었다. 부친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1585년 로마 에수회 수련원에 들어간 그는 모범적인 생활을 하였다. 흑사병이 사방에 퍼지기 시작하자 예수회는 환자들을 돌보기 위해 병원을 열었는데, 알로이시오는 여기서 열심히 환자들을 돌보다 만성 열병에 걸려 사망하였다. 그의 자서전과 편지 및 영적인 저술들은 자주 독특하고 다른 시대와 사회 사람들에게도 매우 매력적이다. 1726년에 시성된 그는 교황 베네딕도 13세에 의하여 학생들의 수호 성인으로 선포되었으며, 비오 11세에 의하여 가톨릭 청소년들의 수호성인으로 선포되었다.

 

 

6월 22일: 성 토마스 모어 주교 순교자(1478-1535)

법률학자이자 판사이던 요한 모어의 아들로 런던에서 태어난 그는 12세 때에 켄터베리 대주교인 요한 머턴의 조수생활을 하다가, 옥스포드로 가서 린킨 인에서 법률을 공부했으며, 1501년에 법조계에 진출했다. 그의 해박한 지식과 기지는 만인의 감탄을 불러 일으켰다. 영국 인본주의자들의 지도자였던 그는 당대 최고의 석학이었다. 대표작 ’유토피아’는 이성을 지배하는 이상 사회를 묘사한 것으로 세게의 고전이 되었다. 헨리 8세가 왕으로 오로면서 프랑스와 플란테르의 외교사절로 활약한 그는 1517년에 추밀원에 진출했으며, 1521년에는 기사직위를 받았다. 또한 1523년에 하원의장이 된 그는 1529년에는 월시 추기경 후임으로 재상이 되었다. 헨리왕이 카타리나 왕비와의 이혼허가를 교황청에 제출하는 서류에 서명하기를 거부하자, 국왕의 태도가 변하기 시작했다. 1534년 런던 탑에 갇힌 그는 15개월동안 옥중 생활을 하고 난 후 단두대의 이슬로 사라졌다. 그는 자신이 국왕의 충실한 종이 될 수 있으나 먼저 하느님의 종이 되어야 한다고 선언했던 위대한 신앙인이었다. 1935년에 시성된 그는 법률가의 수호자로 공경을 받는다.

 

 

6월 23일: 성 리베르토 주교(+1076)

브라반트 귀족 가문에서 태어난 그는 캄브라이의 주교인 제라르도의 조카이다. 어려서부터 좋은 교육을 받은 그는 삼촌이 서거한 후 1501년 주교가 되었다. 1054년 예루살렘 순례를 떠난 그는 라오디체아에서 사라센인들이 성지를 점령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그러므로 많은 순례자들이 귀향하였으나 그는 계속하여 팔레스티나를 여행하였다. 그러나 그가 탄 배가 성지를 눈앞에 두고 사고가 나는 바람에 하는 수 없이 귀향하였다. 그는 이때부터 ’거룩한 무덤’에 봉헌하는 성당과 수도원들을 짓기 시작했다.

 

 

6월 24일: 성 요한 세자

네 복음서에 기록된 요한은 사제 즈가리아와 마리아의 친척인 엘리사벳 사이에서 태어났으며 젊은 나이에 광야에 나가 홀로 고난과 극기의 수덕생활을 하였다. 그후 예리고 근처의 요르단 강변에 나타나 설교하기 시작한 그는 속죄의 표시로 세례를 베풀고 예수님도 물로 세례를 주었다. 요한은 그리스도를 증거한 증인으로 윤리적인 태도에 그 위대성을 찾아서는 안되고 구원자이신 메시아에 대한 봉사적인 자세로 이해해야 한다.

예수성탄대축일 6개월 전인 이 날에 지내는 이유는 복음의 ’그 늙은 나이에도 아기을 가진 지가 벌써 여섯 달이나 되었다’(루가 1, 36)의 말씀에 따라서 이다.

 

 

6월 25일: 성 막시모 주교(380-467)

교회사가 젠나디우스가 ’교회 저술가의 책’ 속에 언급된 그는 토리노의 주교이며, 많은 책들의 저자이고, 뛰어난 설교가였다. 특히 성서에 해박한 지식을 가졌던 그는 밀라노 시노드에 참석하여 ’교의 편지’에 서명도 하였다. 465년 로마 공의회에 참석한 그는 116개의 설교문, 6개의 논문 그리고 118개의 주일 강론이 남아 있다. 교우들의 신앙생활에 관심이 많았던 그는 신자들의 일상 임무 중에 가장 우선하는 것은 하느님을 찬미하는 것으로서, 이를 위하여 적당한 방법으로 시편을 외우라고 권하고, 또한 아침, 저녁 기도를 빠트리지 말고, 식사 전후에 감사기도와 모든 일을 하기 전후에 십자성호를 그으라고 명했던 최초의 주교이다.

 

 

6월 26일: 성 펠라지오 소년 순교자(+925)

오마이야드의 대제인 아브도-아르-라만 3세가 코르도바를 통치하던 시대에 살았던 그는 무어인들의 손에 죽었다. 이때에 나이는 불과 10세였다. 관리들은 이 소년이 신앙을 포기시키기 위하여 좋은 옷과 돈을 주며 감언이설로 타일렀으나, ’모든 것이 다 싫다. 나는 크리스천이었고, 크리스천이며, 크리스천으로 남을 것입니다’ 하며 끝까지 버티었다고 한다.

 

 

6월 27일: 성 치릴로 주교 학자(376-444)

에집트의 알렉산드리아에서 태어난 그는 고전과 신학 교육을 받고 412년 알렉산드리아의 총주교가 되었다. 그는 디모테오 지지자 사이의 격렬한 싸움을 멀였고, 콘스탄티노블의 총주교인 네스토리우스와의 분쟁에도 휘말렸다. ’그리스도가 하느님이기에 마리아는 천주의 모친일 수 없다’는 네스토리우스의 주장을 공의회를 통해 격파하였다. 이후 성삼위와 강생에 관한 교리 확립과 신학 논문 저술에 여생을 바친 그는 크리스천 사회에 깊이 뿌리박고 있던 펠라지아니즘과 네스토리아니즘을 배격하는 일을 하여 교회에 큰 성과를 남겼다. 알렉산드리아의 가장 유명한 신학자인 그가 남긴 저서는 정확한 사고와 명확한 전개 및 그 합당한 근거 제시로 후세에도 큰 영향을 미치고 있다. 성서에 관한 그의 주석서 가운데에도 요한, 루가, 그리고 모세 오경이 있으며 수많은 교의신학 논문을 비롯하여 배교자 율리안에 대한 반박문, 편지 그리고 강론들이 전해온다.

 

 

6월 28일: 성 이레네오 주교(130-203)

소아시아의 스미르나에서 태어난 그는 사도들을 잘 알던 어떤 이로부터 교육을 받았는데, 성 요한의 제자이던 성 폴리카르포의 영향이 가장 컸다고 한다. 177년 그는 동료 크리스천의 편지를 갖고 교황 성 엘레우테리오를 뵙기 위해 로마로 갔는데, 그 사이에 혹독한 박해가 일어나 리용의 사제이던 포티노가 운명하게 되었다. 178년 리용의 주교가 되어 돌아온 그는 지역 복음 선포에 열성적으로 일하였는데, 골 지방의 영지주의자와 치열한 싸움을 전개하였다. 이때 쓴 저서가 저 유명한 ’모든 이단을 반대하며’이다. 첫 번째 가톨릭 신학자였던 그가 영지주의를 배격하여 쓴 논문을 사도들의 전승에 그대로 남아 있으며 교황 수위권의 중요한 근거가 된다.

 

 

6월 29일: 성 베드로와 성 바울로 사도(1세기)

’너는 베드로이다. 내가 이 반석위에 내 교회를 세울 터인즉 죽음의 힘도 감히 그것을 누르지 못할 것이다’(마태 16, 18) 예수님의 명에 따라 교회의 기초를 세우신 이 두분은 네로 황제 시절 64-67년 사이에 로마에서 순교하였다. 258년 신자들이 두 사도의 시체를 옮겨 기념미사를 올렸는데 이 날이 6월 29일로 추측되어, 1969년 새 로마 교회력은 이 두 사도의 축일을 이 날로 정하게 되었다. 또한 이날은 사도 베드로의 후계자인 교황을 위해 기도하는 교황주일이기도 하다. 예수 그리스도의 지상 대리자이며 교회 일치의 중심인 교황께 존경과 사랑을 드리는 이 날엔 모든 본당에서 특별헌금을 하여 교황께 바친다. 교황은 이 헌금을 전세계를 대상으로 펼치는 사목 및 구호활동에 사용한다.

 

 

6월 30일: 성 테오발도 은수자(1017-1066)

샹파뉴의 프로방에서 태어난 그는 커서 군인이 되었으나, 수도생활에 늘 미련을 품고 있었다. 마침내 부친의 허락을 받고 라임스의 성 러미 수도원에 들어간 그는 여기서 월터라는 귀족과 만나 아르덴느의 쉭스에서 은수생활을 시작했다. 이들은 낮에는 석수일과 들일을 하며 생계를 꾸렸고 밤에는 기도의 날로 불을 밝혔다. 그후 그들은 로마를 순례하고 이탈리아의 비첸자 근교에서 은수생활을 하였는데, 2년 뒤에 월터는 운명하였다. 뛰어난 성덕으로 인하여 많은 제자를 얻은 그는 제자들의 권유에 따라 사제가 되었다. 또한 그의 부모가 그에게 감화를 받고 은수자가 되었으며 1073년 교황 알렉산델 2세에 의하여 시성 되었다.

 

 

 

 

  7 월의 성인

 1일: 도미시아노 원장, 루몰도 주교 순교자, 올리브 주교 순교자, 세르바노 주교, 유트바라 동정녀

 2일: 프로체소 순교자, 마르티아노 순교자, 오토 주교, 심포로사 순교자, 모네군다 수절

 3일: 토마스 사도, 베르나르디노 증거자, 아나돌 주교, 무스티올라 순교자

 4일: 울릭 주교, 오도 주교, 베르타 수절, 엘리사벳 여왕, 세바스티아 순교자

 5일: 안드레아 김대건 사제 순교자, 아타나시오 원장, 안토니오 사제, 트리피나 순교자, 에다나 동정녀, 치릴라 순교자

 6일: 로물로 주교, 트란귈리노 사제 순교자, 고들레바 순교자, 마리아 고레티 동정 순교자,도미니카 동정 순교자, 섹스부르가 수절

 7일: 베네딕토 11세, 판테노 증거자, 팔라디오 주교, 에딜부르가 동정녀

 8일: 아드리아노 3세 교황, 아놀드 증거자, 아퀼라, 프리실라, 엘리사벳 왕후

 9일: 니콜라오 순교자, 아그리피노 주교, 에베릴다 동정녀, 베로니카 동정녀

10일: 골비노 주교, 엠마누엘 순교자, 루피나 동정 순교자, 세쿤다 동정 순교자

11일: 베네딕도 원장, 사비노 순교자, 히둘포 주교, 비오 1세 교황 순교자, 올가 수절, 아마빌리스 동정녀

12일: 요한 괄베르토 증거자, 나볼 순교자, 펠릭스 순교자, 안스발도 원장, 헤르마고로 순교자, 마르치아나 동정 순교자

13일: 에우제니오 주교, 헨리코 2세 황제, 세라피온 순교자, 밀드레다 동정녀, 실라 동정녀

14일: 가밀로 사제, 니고데모 은수자, 데우스데딧 주교

15일: 보나벤투라 주교 학자, 에지노 원장, 도날드 증거자, 다비드 주교, 베닐다 순교자

16일: 풀라도 원장, 시세난도 순교자, 비탈리아노 주교, 레넬다 동정 순교자

17일: 글레멘스 순교자, 레오 4세 교황, 알렉시오 증거자, 마리아 막달레나 동정녀, 말셀리나 동정녀

18일: 프레드릭 주교 순교자, 아눌프 주교, 심포로사 순교자, 마리나 동정 순교자

19일: 아르세니오 은수자, 암브로시오 원장, 루피나 동정 순교자, 유스다 동정 순교자, 마크리나 동정녀

20일: 예로니모 증거자, 안세지소 원장, 빌제포르타 동정 순교자, 마리나 동정 순교자, 마르가리타 동정 순교자

21일: 라우렌시오 사제 학자, 빅돌 순교자, 바스트라다 부인, 프락세다 동정녀

22일: 판카리오 순교자, 다비오 증거자, 메넬레오 원장, 필립보 순교자, 마리아 막달레나

23일: 아폴리나리스 주교 순교자, 리보리오 주교 증거자, 로물라 동정 순교자, 안나 동정녀, 브리지타 수절

24일: 데글라노 주교, 크리스티나 동정 순교자, 니체타 순교자, 킹가 동정녀

25일: 야고보 사도, 크리스토포르 순교자, 발렌티나 동정 순교자, 테아 동정 순교자

26일: 요아킴, 에라스토 주교 순교자, 안나, 바르톨로메아 동정녀

27일: 판달레오 순교자, 에클레시오 주교, 루돌프 순교자, 나탈리아 순교자, 릴리오사 순교자

28일: 삼손 주교, 나자리오 순교자, 첼소 순교자, 인노첸스 1세 교황, 빅돌 1세 교황 순교자

29일: 올라프 순교자, 파우스티노 증거자, 베아트릭스 순교자, 마르타 동정녀, 플로라 동정 순교자, 세라피나 부인

30일: 베드로 크리솔로고 주교 학자, 압돈 순교자, 센넨 순교자, 율리타 순교자, 막시마 동정 순교자

31일: 이냐시오 사제 증거자, 칼리메리오 주교 순교자, 젤마노 주교, 요한 증거자, 헬레나 수절 순교자

 

 

 

 

 

 7월 1일: 성 올리브 주교 순교자(1629-1681)

영국의 귀족 가문에서 태어난 그는 더블린의 성 메리 베네딕도 수도원에서 공부한 뒤 1654년 사제가 되었다. 15년간 로마의 프로파간다 대학에서 교수로 있다가 1669년 영국의 총주교가 되어 돌아왔다. 1673년 박해때 티투스 오아트스 플롯에 따라 가톨릭 사제와 주교들이 추방당하게 되었는데, 이떼 더블린성에 잡힌 그는 런던으로 옮겨와 9개월간 독방에 갇혀있었다. 그 후 1681년 7월 1일 교수형으로 순교한 그는 1995년에 바오로 6세 교황에 의해 성인품에 올랐다.

 

 

7월 2일: 성 프로체소와 마르티니아노 순교자(연대미상)

4세기 이전부터 성인으로 공경받고 있는 이 두분은 성 베드로와 바오로가 마메르던 감옥에 갇혀 있을 때 개종한 사람들이다. 이 때 성 베드로는 기적적인 방법으로 바위에서 물을 흐르게하여 그에게 세례를 주었다 한다. 당시 바울리노라는 관리는 신앙을 거부하도록 설득했지만 끝까지 거부해서 칼로 베었다고 한다. 이 때 그들은 ’주님의 이름은 찬미받으소서’라는 말을 남겼다. 이들의 유해는 비아 아우렐리아에 안장되었고 성 그레고리오는 자주 그들의 순교 사실을 강론을 통해 언급하고 있다.

 

 

7월 3일: 성 토마스 사도(1세기경)

아마 갈릴래아에서 태어난듯한 그는 12사도중의 한분이다. 라자로가 죽음에서 일어날 때 예수와 함께 있었고(요한 11,16), 최후의 만찬 때에 예수께 ’주님의 가시는 길’을 물어서 ’나는 길이며 진리이며 생명’이란 해답을 들었다. 또한 부활하신 예수임을 믿지 못할 때, 그리스도는 그에게 ’당신의 손가락으로 내 손을 만져 보고… 내 옆구리에 넣어 보시오 그리고 의심을 버리고 믿으시오’(요한 20, 24-28)라는 말을 들었다. 이 때 그는 ’나의 주님, 나의 하느님’이라고 고백하므로써 그리스도의 신성을 최초로 인정하는 발언을 한 사람이 되었다. 또한 옛 전승에 의하면 그가 인도에 가서 복음을 선포하던 중에 순교하여 마드라스교외 밀라포르에 묻혔다고 한다. 성 토마스는 건축가의 수호성인이고 1972년에 교황 바오로 6세에 의하여 인도의 사도로 선언되었다.

 

 

7월 4일: 성 울릭 주교(890-973)

독일의 아우구스부르그에서 태어난 그는 스위스의 성 갈 수도원에서 교육을 받았고 삼촌인 아우구스부르그의 주교 성 아달베오의 지도를 받았다. 그는 923년 삼촌을 계승하여 주교가 되었는데, 마지아르족의 침략으로 폐허가 되었을 때, 온 주민들과 더불어 도시의 재건을 이끌어 큰 명성을 얻었다. 993년 교황 요한 15세에 의해 시성되었는데, 이것은 교황이 시성식을 거행한 첫 번째 기록이 되었다.

 

 

7월 5일: 성 안드레아 김대건 사제 순교자(1821-1846)

25세의 꽃다운 나이, 1년 9개월의 짧은 성직생활중에도 한국 교회의 복음전파을 위해 신호탄이 된 첫 한국인 사제인 김대건 신부의 순교를 기념하는 날이다. 1821년 충남 당진의 솔뫼에서 태어난 그는 기해박해(1839) 때 순교한 김제준의 아들로서, 어릴 때부터 총명하고 신앙심이 깊었다. 16세 때 신학생으로 발탁되어 마카오에서 공부를 했으며 44년 부제가 되기까지 박해받아온 한국교회의 교우들을 위해 선교사 입국을 성사시키는데 큰 역할을 하였다. 45년 8월 17일 상해에서 사제서품을 받은 그는 페레올 주교와 다블뤼 신부를 입국하게 했으며 주교의 지시로 선교사 입국을 개척하다 46년 6월 순위도에서 관헌들에 의해 붙잡혔다. 그후 9월 16일 한강가 새남터에서 군문효수형을 받아 순교한 그는 49년부터 모든 성직자의 수호성인으로 불리고 있으며 84년에 시성되었다. 신앙의 모범생, 착실한 신학생, 고국 선교에 대한 열망 등 하느님께 대한 사랑밖에 몰랐던 그는 새남터에서 순교직전 이렇게 울부짖었다

"죽은 다음 영원한 행복을 얻고자 생각하시면 천주 교인이 되십시오"

 

 

7월 6일: 성녀 마리아고레띠 동정 순교자(1890-1902)

이탈리아의 크르날도에서 정직하고 부지런한 농부의 딸로 태어난 그녀는 비록 가난했지만 가족끼리 서로 사랑하며 주님을 섬겼다. 여러번 이사를 하다가 말라리아에 걸려 부친이 사망하자 남은 식구들은 생계를 위하여 투쟁해야 했다. 그녀는 상냥하고 침착했으며 하느님의 크신 사랑과 기도, 순명 및 죄악에 대해 예민한 감정을 가지고 있었다. 12살 때 이웃에 사는 알렉산델이라는 청년에 의해 정결을 강탈당할뻔 했지만 완강히 거부하다 알렉산델로부터 14군데의 심한 상처를 입고 운명하였다. 마지막 운명직전 사제가 성체를 영해주면서 그를 용서하겠냐고 묻자 이렇게 대답하였다.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 때문에 저 역시 그를 용서할 것이며, 그를 위하여 천국에서 기도할 것입니다. 저는 십자가 옆에 있던 강도처럼 그를 천국에서 만날 수 있기를 바랍니다"

한마디로 정결을 지키기 위해 순교한 그녀는 1950년에 시성되었다.

 

 

7월 7일: 성 판테노 증거자(+200년경)

당시 학문의 중심지인 알렉산드리아 신학원의 원장이었던 그는 철학과 강의로써 크게 명성을 떨치신 분이다. 주로 예언자와 사도들의 추종자들로부터 수집한 자료들을 읽어주고 해설함으로써 청중들에게 깊은 감명을 주었다. 역사가 에우세비오는 그가 인도까지 가서 선교한 위대한 선교사라고 기술한다. 또한 위대한 지성인이고 설교력이 뛰어난 선교사로 별명을 ’시실리벌’이라고 했다.

 

 

7월 8일: 성녀 엘리사벳 여왕(1271-1336)

국왕 아라곤 3세의 딸로 태어난 그녀는 12살 때 포르투갈의 왕 데니스와 결혼하였다. 데니스는 능력있는 통치자였지만 남편 자격으로는 부족하였다. 이 때문에 그녀는 병원을 세우거나 고아원 및 양로원을 운영하므로써 이 모든 어려움을 극복하려고 노력하였다. 그녀는 남편의 냉대와 무시함을 인내로 대하였던 것이다. 이런 저런 이유로 아들인 알퐁소가 아버지를 대항하여 반기를 들자 그녀가 중재에 나섰다. 이로 인해 오해를 받은 그녀는 잠시 유배를 가야 했다. 1323년 남편이 죽자 코임브라의 집으로 은거한 그녀는 이곳에 자신이 세운 글라라 수녀원에서 그리스도의 사랑을 펼쳐나갔다. 또한 수녀가 되겠다는 이상을 포기하고 프란치스코 3회원이 된 그녀는 엄격한 보속생활과 봉사를 하였다. 그녀는 포르투갈의 에스트레모스에서 운명하고 1626년에 시성되었는데 흔히 포르투갈의 이사벨라로 알려져 있다.

 

 

7월 9일: 성녀 베르니카 동정녀(1660-1727)

이탈리아 우르비도의 메르카텔에서 태어난 그녀는 우르술라라는 이름으로 세례를 받았는데, 어릴 때부터 수도생활을 꿈꾸었다. 결혼하라는 부친의 권유를 물리치고 1677년 치타 디 카스텔로의 카프친회에 입회한 그녀는 베르니카 라는 수도명을 받았다. 이때부터 그리스도의 수난을 체험하기 시작한 그녀는 1967년에 오상을 받았다. 관상생활과 활동을 적절히 조화시켜나간 그녀는 34년 동안이나 수련장직을 맏았으며 1716년에는 원장으로 선출되어 죽을 때까지 책임을 다 하였다. 그녀는 여러 가지 초자연적 은혜를 받았는데, 18세기의 위대한 신비자로 유명하다.

 

 

7월 10일: 성 엠마누엘 순교자(+1860)

크리미스 전쟁 후 파리의 의회는 터키내의 소수집단인 크리스천에 대한 올바른 대우를 요구하였고, 1856년 술탄이 칙령을 내려 제국내의 모든 신하들은 종교와 인종 차별을 두지 않겠다고 했다. 그러나 1860년에 어느 청년 크리스천과 힌두교인 사이의 논쟁이 화근이 되어 대학살이 시작되었다. 그해 5월 30일과 6월 26일 사이에 레바논 전역에서 6천명 이상의 신자들이 살해되었다. 7월에 접어들어서는 이 불길이 다마스커스로 옮겨 붙었는데, 그 당시 엠마누엘는 프란치스코 원장이었는데, 모압인들의 급습을 받고 성당으로 피신하였으나 곧 체포되었다. 이때 그는 ’나는 크리스천이고 또 크리스천으로 죽는다’고 말하고 제대 앞에서 도끼에 맞아 순교하였다.

 

 

7월 11일: 성 베네딕도 원장(480-566)

베네딕도는 480년 경 이탈리아 중부의 농촌 도시인 누르시아에서 태어났다. 대체로 부유한 환경 속에서 자란 그는 부모님의 권유로 당시 학문의 중심지인 로마로 유학을 가게 되었는데 꿈에 부풀어 새롭게 내디딘 그곳은 베네딕도가 생각한 대로 조화로운 곳이 아니었다. 그는 실망하여 로마를 떠나 어릴적부터 그를 돌보아 오던 유모와 함께 엔피데(지금의 아필레)로 이사하여 성당의 성직자들을 도우며 지냈다. 그러던 어느날. 베네딕도는 유모가 이웃에서 빌려온 체를 떨어뜨려 두동강 내고 울고 있는 것을 보고 기도로써 그것를 붙이는 기적을 행하였다. 이 사건은 급기야 빠른 속도로 소문이 나 하느님에게로 찬미와 겸손을 드리려는 베네딕도에게 큰 부담을 안겨 주었다. 결국 그는 세상을 등지기로 마음먹고 엔피데를 떠나 수비아코로 갔다.

수비아코로 간 베네딕도는 우연히 수도자 로마누스를 알게 되어 그로부터 수도복을 건네받아 감추어진 산 중의 동굴로 들어갔다. 로마누스가 가끔씩 바구니에 담아 내려주는 빵으로 연명하며 고독한 은수생활을 시작하게 된 것이다. 그는 많은 악마의 유혹에도 불구하고 기도와 묵상으로 3년을 지냈다. 그러던 중 비고바로 수도원의 수도자 몇몇이 그를 찾아와 그들의 죽은 원장후임으로 베네딕도가 와 주길 간청하였다. 그는 완강히 거절했지만 그들의 고집을 꺾을 수는 없었다. 결국 베네딕도는 비고바로 수도원의 수도원장으로 초대되었다. 그러나 베네딕도가 본 그들의 수도원 생활은 나태와 문란 자체였다. 그는 곧 엄격한 규율로써 그들을 가르치려 했으나 그들은 그것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지 못하고 새 원장을 싫어하게 되어 어느날 감히 포도주에 독을 넣어 베네딕도를 살해할 음모를 꾸몄다. 베네딕도가 식사시간에 여느때와 마찬가지로 강복을 하자 갑자기 포도주잔이 산산조각나며 깨어져 버리고 베네딕도는 그들의 무모함을 탄식하며 수도원을 떠났다.

다시 수비아코의 동굴로 돌아온 베네딕도는 처음의 은수생활을 계속하며 지내고 이러한 베네딕도의 성덕을 전해들은 사람들은 그를 따르고자 여러곳에서 모여들었다. 이렇게하여 자연스럽게 또 다른 수도원이 형성되고 베네딕도는 그들을 지도하며 함께 두번째의 공동 수도생활을 해나갔다. 그러나 또 한 번의 시련이 왔다. 사람들이 베네딕도의 명성에 눈을 돌리자 지역관할의 신부가 시기하며 여러가지 유혹을 했다. 그리하여 베네딕도는 몇몇 수도자들을 데리고 또 다시 수비아꼬를 떠나게 되었다.

몬테카시노에서 베네딕도는 그의 일행과 함께 로마를 거쳐 남쪽으로 가 경치 좋은 몬테까시노에 도착하였다. 몬테카시노는 카시노(cassino)도시에 인접한 산(Monte)이란 뜻인데 그곳에는 이미 이곳 주민들이 쌓아 놓은 신전과 우상들이 자리잡고 있었다. 그는 이것을 부수어 버리고 성 마르티노 성당을 지어 후 인근 주민들에게 복음을 전하며 수도원을 건축했다. 몬테카시노 수도원에도 수사의 수는 증가하여 그는 수도원의 근본이 될 만한 규칙을 작성하였다. 여기서 그는 공동생활의 질서, 순명의 덕, 사유재산 금지, 한 평생 한 수도원에 머물 것과 성교회의 가르침에 따를 것을 명하고 있다. 몬테카시노는 베네딕도의 ’기도하고 일하라’ 즉 일하되 하느님과 함께 일을 하고 그럼으로써 어떤 일보다도 하느님 찬미를 중히 여긴다는 것을 강조함에서 건설되었다해도 과언이 아니다. 베네딕도는 남자를 위해 수도원을 세워 규율을 작성하였을 뿐 아니라 그의 여동생 스콜라스티카를 도와 여자 수도자들을 위한 수도원에 많은 보탬을 주었다. 누이 동생 스콜라스티카와의 에피소드는 유명하다. 베네딕도와 스콜라스티카는 수도생활을 하며 바깥에서 가끔씩 만나 정담을 나누었다. 어느날 저녁 스콜라스티카는 오빠와 좀 더 있고 싶은 마음에 사정하였지만 오빠는 규칙을 어길 수 없다는 이유로 돌아가려 했다. 이에 스콜라스티카는 하느님께 기도하여 억수같이 비를 내리게 함으로써 오빠를 꼼짝 못하게 했다는 이야기이다.이 만큼 베네딕도와 그의 여동생 스콜라스티카의 사랑은 각별한 것이었다.

베네딕도는 566년경 3월 2l일 천상으로 올랐다. 그는 제자들의 부축을 받으며 선채로 제대앞에 서서 기도하며 선종하였다 한다. 그러나 교회는 7월1l일에 베네딕도의 축일을 지내는데 이것은 몬테까시노 수도원에 누이동생 스콜라스티카와 같이 안장되었다가 야만족에 의해 황폐화된 그곳에서 11-l2세기경 다시 프랑스로 이전된 날을 기념하기 때문이다. 전세계에 걸쳐 베네딕도 수도원은 남자 수도원 l70여 군데, 여자 수도원300여 군데이고, 한국에서만도 대구, 부산, 왜관 등지에 남녀 수도회의 본원이 있다.

 

 

7월 12일: 성 펠릭스와 나보로 순교자(+303)

성 암브로시오가 극찬하고 밀라노 교회가 공경하라고 명할만큼 유명하나, 전기는 별로 알려진게 없다. 그들은 밀라노에 주둔하던 막시미안 헤르쿨레우스 부대의 무어인 군인이었다. 그런데 크리스천 신앙 때문에 로디에서 참수치명하였다. 밀라노의 미사 경본에 이 성인들의 이름이 나오며 북부 이탈리아 전역에서 공경받고 있다.

 

 

7월 13일: 성녀 밀드레다 원장(+700년경)

영국의 앙글라칸 족장 미르왈드와 그리고 켄트의 공주인 성녀 에르멘부르가의 딸이며, 성녀 밀부르가의 밀드지타의 동생인 그녀는 파리 교외 셀레 수도원에서 교육을 받았다. 열렬한 구호자의 청을 거절한 그녀는 고향으로 돌아와서 타넷 이즐에 있는 민스터 수도원에 들어갔다. 그 후 그녀는 그곳의 원장이 되었다. 켄트에서 열린 교회 회의에도 참석한 그녀는 가난한 사람들에게 놀라운 자애심을 크게 돋보였다.

 

 

7월 14일: 성 가밀로 사제(1550-1614)

이탈리아 복치아니코에서 태어난 그는 도박을 좋아하여 무일푼으로 나폴리 거리를 방황했던 적이 있었다. 그러다 1575년 우연히 설교를 듣고 심경의 변화가 일어났다. 두 번씩이나 프란치스코회에 입회하려고 노력했지만 일생동안 그를 괴롭힌 다리병 때문에 뜻을 이루지 못했다. 로마의 산 쟈코노 병원에 자원으로 봉사하다, 회계를 맡았는데 병원의 문제점 등에 눈을 뜨게 되었다. 1584년 사제가 된 그는 사제와 평수사들을 중심으로 병자들의 봉사자회를 세웠다. 이들은 로마의 주요 병원에서 사목하다가, 1585년에는 자신들의 병원을 세웠으며 특히 로마 항의 배들로 인해 전염되는 흑사병을 앓는 이들에게 관심을 쏟았다. 하지만 자신의 건강을 돌보지 않아 도저히 임무를 수행할 수 없게 되자 1607년에 장상직을 사임하였다. 그러나 개인적으로는 늘 자신의 환자들을 방문하면서 자신이 죽는 날까지 그렇게 하다가 운명하였다. 1746년에 시성된 그는 레오 13세에 의해 천주의 성 요한과 함께 병자들의 수호성인으로 선언되었다. 또한 비오 11세는 간호원과 간호 단체의 수호성인으로 선포하였다.

 

 

7월 15일: 성 보나벤투라 주교 학자(1221-1274)

바뇨레아에서 태어난 그는 1238년 프란치스코 회원이 되어 영국의 알렉산더 헬리스 문하에서 공부하여 총애받는 제자가 되었다. 1248년부터 파리에서 신학과 성서를 가르쳤으며 탁발 수도회 옹호에 나서 ’마지막 시대의 환난’과 ’그리스도의 가난에 대하여’ 라는 저서를 남겼다. 마침내 1256년 교황 알렉산델 4세가 생-아무르를 단죄하고 탁발수도회에 대한 공경을 중단하게 되었다. 이때 신학박사가 된 그는 ’보나벤투라’라는 작은 형제회의 총장이 되었다. 요크의 총대주교좌를 거절한 그는 교황 그레고리오 10세의 선출에 적극 지지하였으며 로마와 동방교회의 일치를 토의하려는 리용 공의회의 의사일정을 짜도록 위촉받기도 했다.

그러나 불행히도 공의회가 열리고 있는 회의 중에 리용에서 운명하고 말았다. 그는 중세시대의 가장 뛰어난 철학자이며 신학자이며 사상가 중의 한 분이었다. 1588년 교황 식스토 5세로부터 교회박사로 선언된 그의 문장은 성체와 성합 그리고 추기경 모자이다.

 

 

7월 16일: 성 풀라도 원장(+784)

알사스 지방 출신인 그는 베네딕도회원이 된 뒤에 리에브르 등지에 수도원들을 세웠다. 750년에 파리 교외에 있던 쌩 데니 수도원의 원장이 된 그는 페핀, 카를로만, 챨스 대제 등의 고위관리로 봉사하기도 했다. 또한 성 부르카드와 함께 페핀을 프랑크족의 왕으로 인정받는 일에 착수하여 성공하였으므로 일생동안 왕을 위하여 그리고 교황을 위한 중재자로서 활약하였다. 이런 일을 수행하면서도 그는 수도원의 원장직을 뛰어난 성덕과 학덕으로 다스렸다. 그가 원장으로 있던 생 데니 수도원은 유럽에서 가장 유병한 수도원 중의 하나였음이 그의 성덕을 증명하고 있다.

 

 

7월 17일: 성 알렉시오 증거자(5세기)

어느 부유한 로마 원로원의 아들인 그는 애덕이 깊었으며 어느 부유한 로마 여인과 결혼하기로하여 부모를 기쁘게 했다. 그런데 결혼식 날에 서로 동의하여 갈라섰으며 시리아로 가서 17년을 살았다. 에데사의 어느 성당에서 놀라운 청빈덕을 실천하면서 성덕을 쌓은 그는 기거하는 성당의 마리아상이 그를 ’하느님의 사람’이라고 에데싸의 주민들에게 알렸을 때 로마로 돌아왔다. 할 일이 마땅이 없어 구걸을 하였는데 일자리를 준 부모도 17년동안 자식을 알아보지 못했다 한다. 그의 신원이 밝혀진 때는 그가 죽고 난 뒤 그의 자서전이 발견되면서이다. 이 이야기는 서방으로 급속도로 퍼져나갔으며 학자들은 그가 확실히 생존했으며 에데사에 묻혔다고 믿었다.

 

 

7월 18일: 성녀 심포로사 순교자(연대미상)

하드리안 황제의 크리스천 박해당시 로나 티볼리에서 살던 순교자 성 제툴리오의 아내이다. 황제가 세운 궁전은 신상 앞에 바치는 가족의 희생에 따라 운명이 좌우된다는 왕의 신탁 이야기를 듣고 크게 놀랐다. 남편과 함께 이를 용감하게 거절하자 황제는 그녀를 고문하여 나니오강으로 던져 버렸던 것이다. 다음날 황제는 그녀의 아들 일곱을 불러 들였는데 그 아들들 역시 부모를 따라 끝까지 신앙을 지킴으로써 모두 다 사형에 처해졌다. 그후 심포로사는 비아 티부르티나에 안장되어 위대한 순교자로서 공경을 받고 있다.

 

 

7월 19일: 성 암브로시오 원장(+778)

페핀 왕의 궁중 관리였던 그는 이탈리아 특사로 파견되었다가 그곳의 성 빈센트 수도원에서 수도자들의 정신과 엄격한 보속생활에 깊은 감명을 받고 거기서 서원을 하고 사제가 되었다. 설교가로 명성을 얻은 그는 거룩한 생활을 하면서 저술활동에 능력을 발휘하였다. 그의 재능은 당대에서 가장 탁월하다는 평판을 듣게 되었으며 챨스 대제가 그의 자문을 구했고, 교황 스테파노 4세는 그의 절친한 친구였다.

 

 

7월 20일: 성녀 마르가리다 동정 순교자(연대미상)

원래 피시디아의 안티오키아에 어느 이교 사제의 딸이었던 그녀는 크리스천 유모에 의해 개종하였다. 하지만 자유롭게 신앙생활을 할 수 없어, 유모와 함께 집을 나와 양을 치며 살았다. 그 지방의 장관인 올리브리우스가 우연히 그녀의 아름다운 용모와 높은 지식을 보고 자기 아내와 이혼하고 결혼하고자 했다. 그녀는 이에 반항하자 크리스천이란 죄목으로 투옥되어 심한 고문을 당하였다. 감옥에서 보여준 그녀의 신앙심은 박에서 지켜보는 많은 관중들에게 새로운 각오를 하는데 큰 도움이 되었다. 그녀가 참수치명하였는데, 실제로 그녀의 죽음은 그 지방에 많은 개종자를 낳았다.

 

 

7월 21일: 성 라우렌시오 사제 학자(1559-1619)

나폴리 왕국의 브린디시에서 태어난 그는 16세 때에 카프친회에 입회하였다. 신학, 철학, 성서, 희랍어, 히브리어 등 수개 국어를 파투아 대학에서 연구한 그는 사제가 된 이후에는 북 이탈리아를 돌며 복음을 선포하였다. 수도회의 여러 고위직을 맡았던 그는 주로 유다인 개종에 힘썼다. 또한 독일에 파견되었을 때 프라하와 비엔나 그리고 고리지아에 수도원을 세웠다. 1602년 카프친회의 총장이 된 그는 필립 3세를 설득하여 가톨릭 연맹을 만들려는 황제의 의향에 따라 스페인으로 파견되었을 때 마드리드에도 수도원을 세웠다.외교적, 정치적 문제가 있을 때 황제 혹은 교황의 특사로 공을 세운 그는 그러는 중에도 수많은 저서를 남겼는데, 특히 유명한 것은 창세기와 에제키엘서의 주석서이다. 1881년에 시성되고 1959년에 교회박사로 선포되었다.

 

 

7월 22일: 성녀 마리아 막달레나 거룩한 부인(+1세기경)

복음서에는 ’일곱 마귀가 들렸던 막달라 여자라고 하는 마리아’(루가 8, 2)로 묘사되어 있고 예수께서 부활하셨음을 제자들에게 맨먼저 알린 사람도 그녀이다(요한 20, 11-18). 서방교회에서는 마리아 막달레나를 ’용서받은 죄많은 여자’로 보고, 통회와 관상의 이상적인 모델로 믿어왔다. 중세 시대에 있었던 세명의 마리아에 대한 이야기 속에는 그녀가 사도 성 요한과 약혼한 사이였다고 한다. 성령강림 후 그녀는 성모님과 성 요한과 함께 에페소로 가서 전교하다가 그곳에 묻혔다고 한다.

 

 

7월 23일: 성녀 브리지타 수절(1303-1373)

스웨덴에서 태어난 그녀는 12살 되던 해 어머니가 죽자, 아스펜나스에서 성장하였다. 불과 14살의 어린 나이로 결혼하여 8명의 자녀를 두었는데, 이들 중의 하나가 성녀 가타리나이다. 1344년 남편이 죽자 알바스트라의 시토 수도원에서 극도로 엄격한 생활을 하면서 4년을 지냈다. 이때 그녀는 수많은 환시와 계시를 받았고 고해신부는 그녀의 모든 환시가 올바르다고 보증해 주었다. 이런한 계시에 따라 1344년에 바드스테나에 수도원을 세웠는데 이것이 성삼회(비르지타회)의 시작이다. 십자군 지원이 있을 때 아비뇽에 유배중인 교황에게 환시의 내용을 보내기도 했다. 많은 시간을 로마에서 지내면서 매우 엄격한 생활과 빈민구제에 온 정열을 쏟았으며 당시의 심각한 교회와 정치 사이의 문제에 대하여 기탄없는 충고를 하였다. 로마 주변의 수도원들을 개혁한 그녀는 예언과 고위직책에 대한 탄핵으로 유명하다. 그가 구술로 적은 ’계시’라는 책은 당 시대의 강한 반향을 불러 일으켰지만 트렌트 공의회는 신자들이 읽어도 좋다는 판정을 내렸다.

 

 

7월 24일: 성녀 크리스티나 동정 순교자(연대미상)

라시움의 볼세나에서 그녀를 공경하는 전설은 너무 단순하여 그 내용을 알 수 없다. 그러나 역사성은 희박하지만 유명한 재판과 기적에 관한 전설에 산재해 있다. 볼세나에는 초기에 크리스천 무덤들이 남아 있으마, 여기가 그녀가 묻힌 곳인지는 분명치 않다.

 

 

7월 25일: 성 야고보(대) 사도(+44)

그는 제베대오의 아들이며 요한이 그의 동생이다. 그들은 갈릴래아 출신으로서 예수님의 부르심을 받을 때에 배에서 그물을 손질하던 어부였다. 그들은 또 어머니와 함께 예수게 와서 ’주님의 나라가 서면 이 두 아들을 하나는 주님의 오른편에 하나는 왼편에 앉게 해주십시오’하고 청했던 사람들이다.(마태 20, 20-28)

그는 헤로데 아그리파 1세에 의하여 예루살렘에서 참수당하므로써 사도로서는 첫 번째로 순교하였다(사도행전 12, 1-2) 전승에 의하면, 그는 순교하기 전에 스페인에서 설교하였는데, 그의 유해는 스페인의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로 옮겨져 모셔졌고, 후일 이곳은 중요한 순례지가 되었다. 그는 스페인의 수호성인이다.

 

 

7월 26일: 성녀 안나 성모의 모친(기원전 1세기)

야고보의 위경인 원복음서에 의하면 그녀는 요아킴의 아내인데, 아이가 없었기 때문에 매우 슬쓸하게 생활하였다. 어느날 기도하고 있을 때 천사가 나타나 곧 아이를 가질 것이라 하자, 안나는 그 아이를 하느님께 바치겠다고 약속했다. 이 아이가 예수의 모친 마리아였다. 다른 전설에 의하면 그녀는 나자렛 출신으로 유목민인 아카르의 딸이었다. 20세때 요아킴과 결혼하여 40세에 마리아를 낳았다.

 

 

7월 27일: 성 루돌프 순교자(+1583)

예수회의 5대 총장인 클라우드의 조카인 그는 1568년 18세 때 사제가 되어 인도의 고아로 파견되었다. 매우 단순하고 부드러운 성격을 지닌 그는 1579년 모굴 아크바르의 초청으로 그 지역 사람들을 개종하는데 성공하였다. 그를 비롯한 5명의 예수회원들은 힌두교도들의 정면 도전을 받던 쿤콜림에 대하여 정면 공격을 결정하고 진출했는데, 이때 무장한 주민들과 정면 대치하였다. 이때 포르투갈 평신도인 로드리게스가 발포함으로써 로돌프는 그 자리에서 살해되고 다른 이들도 비슷한 방법으로 살해되었다.

 

 

7월 28일: 성 삼손 주교(485-565)

웰스의 글래모르간에서 태어난 그는 아기때에 하느님께 봉헌된 사람으로 성 일투드 수도원에 맡겨졌다. 그후 사제가 되어 펨브로크셔 연안의 캘디섬에서 한동안 은수자 생활을 하였다. 페로 원장이 죽고 원장이 된 그는 곧 사임했으나 다시 성 두브리코 수도원장으로 선출되었다. 다시 그 지방의 주교가 된 그는 콘웰 지방을 다니는 순회 선교사로서 활동하면서 사우스힐과 골란트 지방의 여러 교회와 수도원을 세웠다. 그의 선교활동은 브리타니까지 계속되었는데, 그는 돌에서 수도원들을 세웠고, 노르망디의 펜탈 지방에도 수도원을 세웠다. 뒤엔 칠드베르트 왕에 의해 돌의 주교로 생활하였다.

 

 

7월 29일: 성녀 마리아 동정녀(+1세기경)

마리아와 라자로의 누이였던 그녀는 베타니아에서 살았으며 집안 일을 맡았다. 이들은 예수의 친구였으며, 주님은 그들의 집에 자주 머무신 듯 하다. 활동적인 성격을 가진 마르타는 루가 10장 38절-40절에서 볼 수 있다. "마르타, 마르타, 당신은 너무나 많은 일을 걱정하며 마음을 쓰고 있는데, 실상 필요한 것은 한가지 뿐이오, 마리아는 참 좋은 몫을 택했소" 성서의 이 말 때문에 활동적인 크리스천의 상징으로 또 관상생활의 모델로 공경받아 왔다. 라자로가 죽었을 때 예수게 연락했던 이가 마르타이고 마리아는 집에 그대로 남아 있었다(요한 11, 20) 마르타는 요리사의 수호성인이다.

 

 

7월 30일: 성 베드로 크리솔로고 주교 학자(406-450)

이탈리아 에밀리아의 이올라 출신인 그는 이올라의 주교 고르넬리오의 문하에서 공부하였다. 갑자기 교황 성 식토스 3세에 의하여 라벤나의 주교가 되었는데 이같은 일은 교황이 환시를 보았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 결과 베드로는 규율이 극도로 이완된 교구를 크게 일신하여 교황의 환시를 증명하였다. 자선활동에 유명했던 그는 뛰어난 설교 덕분에 ’크리솔로고’라는 별명을 얻었다. 그의 설교에 감명받은 황녀 갈라 플라시디아는 그를 여러 방법으로 도와주었다. 교황 베네딕도 13세에 의해 1729년에 교회박사로 선언되어 공경받고 있다.

 

 

7월 31일: 성 이냐시오 데 로욜라 사제 증거자(1491-1556)

귀족 출신으로 1491년 스페인의 ’로욜라’ 라는 지방의 작은 가족성에서 막내 아들로 태어난 이냐시오 성인은 어릴때부터 신앙심이 두터운 부모 아래 기사도 정신을 배우며 자라왔지만, 소년이 되었을 때는 주위의 크고 작은 결투에 휘말리거나 소란을 피우는가 하면 무사수업이 시들할 때에는 도박으로 시간을 소일하기 일쑤였다. 이냐시오가 생활한 시대는 바야흐로 발견과 발명의 시대요, 인문주의와 문예부흥이 도래되었으며, 사회 전반적인 개혁과 종교의 변혁이 시작되는 시기였다. 청년이 된 이냐시오는 스페인과 프랑스가 전쟁을 시작한 시기에 군대에 입대하게 되었는데, 1521년에 프랑스의 공격에 대응하여 싸우다 오른쪽 다리에 포탄을 맞아 심한 부상을 당하고. 다른쪽 다리 또한 심하게 다치게 되는 불운을 맞게 되었다. 움직일 수 없는 10여 개월의 병상생활 동안, 20대의 방탕한 시절을 보냈던 때와는 달리 신앙서적을 접하게 되었는데, `그리스도의 생애’며 `성인들의 꽃’ 등의 서적을 조금씩 탐독하게 된 이냐시오는 인생의 의미를 되새겨 보고 현세의 허무함을 깨닫는 중대한 발견을 하기에 이르렀다. 그리하여 귀족 출신으로 과거 젊은 시절 영예롭고 영웅적이었던 성격이 말끔히 사라지고, 성인들의 삶을 상상 속에서 꿈꾸는 그런 즐거움을 느끼게 되었다. 이러한 변화는 앞으로 자신이 걸어야 할 이냐시오 영성의 시발점인 `영성식별’(靈性識別)의 시작을 예고하고 있으며, 그가 자신 안에서 발견한 `황량’과 `위로’는 앞으로 그가 하느님의 뜻을 발견하는 기준이 되었다.

결국 자신을 그리스도 앞에 봉헌하기로 결심한 이냐시오는 31세 되던 l922년에 충분할 정도로 회복되자, 방탕했던 시절에 대한 속죄를 하기 위해 순례를 선택하고 곧 예루살렘 순례를 시작했으며, 바르셀로나에서 학문적 수양을 쌓으며 순례를 계속했다. 그리하여 43세 되던 l534년에 파리에서 라틴어 박사 학위를 받았고, 1537년에 6명의 동료와 함께 축복된 사제서품을 받게 되었다. 여러 해에 걸친 순례를 통해 여러지역에 교육 및 선교의 필요성을 느낀 이냐시오는 이미 유학시절 동고동락을 나누었던 동료들과 예수회라는 수도회를 창설했으나, 교황의 인가를 받지 못했다. 이에 교황 바오로 3세를 뵙기 위해 로마로 가게 되었는데, 로마로 가는 도중 `라 스돌타’ 라는 소성당에서 기도를 바치는데 탈혼상태에서 갑자기 성부께서 나타나시고 그 옆에 십자가를 지닌 예수가 "로마에서 너에게 은혜를 주겠노라"는 환시를 보게 되었다. 로마에 도착한 이냐시오는 교황을 뵙게 되었고, 마침내는 l540년 예수회의 대한 수도원 인가를 받게 되었다.

예수회는 즉시 선교 지역으로 퍼져 나갔고, 수도원과 각종 학교를 유럽 각 지역에 세울 계획을 했으며, 교육과 지적인 분야에서 그들의 탁월한 능력을 드러내기 시작하였다. 그 당시 예수회가 세운 세가지 목표는 교육과 자주 성사를 받음으로써 교회를 개혁하고 선교지에서 폭넓은 활동을 전개하여 이단과 싸운다는 것이었으며, 이것이 예수회 활동의 근간이 되었다. 예수회 총장직을 여러번 사양하였지만 교황의 직접 명령으로 15년 간이나 총장을 지낸 이냐시오는 고령의 나이에도 정정하였으며, 그의 보잘것 없는 책상 위에는 성경과 준주성범 등 몇 개의 책 뿐이었고, 매일의 수면은 3, 4 시간을 초과하지 않았으며 깨어있는 시간동안 항상 기도하였다. 시대면에서나 사회면에서나 ’마르틴 루터’의 극단적 개인주의로 교회가 갈리게 될 혼란스러울 때에도 분연히 일어나 성교회의 기둥으로 우뚝 선 이냐시오 성인은 63세 되던 l556년 7월 로마에서 무수한 덕행과 공덕을 남긴 채 자신의 영혼을 하느님께 바쳤다.

 

주여 거두어 받아 주소서

나의 모든 자유와 나의 기억과

나의 지성과 나의 모든 의지를

내게 있는 것과 소유한 모든 것을.

당신이 그것을 내게 주셨으니,

주여, 당신께 그것을 되돌려드리나이다.

(영성수련 234)

`타는 불’이라는 뜻인 이냐시오는 어느날 말하기를 "나는 30년 동안 하느님의 영광을 위하여 한번 먹은 결심을 결코 미룬 일이 없다"고 할 정도로 주의 영광을 위하여는 무엇이든 사양치 않는 열렬한 사랑을 가지고 있었다. 1609년 교황 바오로 5세에 의해 복자가 된 로욜라의 이냐시오 성인은 1622년에 시성되었고, 영성수련의 수호성인으로 선언되었다. 성 이냐시오의 축일은 7월 31일에 지내고 있다. 이냐시오 성인과 6명의 그의 동료가 만든 예수회는 회원 각자의 인격 완성과 종교, 교육, 문화 사업을 통해 다른 사람들로 하여금 높은 도덕심과 인내 그리고 천명에 따르는 생활을 하도록 하느님께 봉사함을 그 목표로 하고 있으며, 그가 저술한 영신수련(靈身修練)은 이 목표를 위한 수행의 지침이 되고 있다. 또한 교육과 학문을 통한 봉사와 전교가 그 특징이라 할 수 있다. 오늘날 예수회는 로마에 본부를 두고 전세계 l00개 국가에 진출하여 2만 7천여 명의 회원이 활동하고 있으며, 226개교의 종합대학과 단과대학을 설립 운영하고 있다.

예수회의 한국 진출은 l954년에 발단이 되어 l960년의 서강대학의 설립과 62년 광주 대건신학대학(현 광주가톨릭대학)의 설립으로 본 궤도에 올랐으며, 전국에 분포되어 수련원을 비롯한 여러 사업들을 진행중에 있다. 학교 설립, 신학적인 박식함, 도서의 보급 및 교회 안에서의 최고 수준의 경영체제를 활동 수완으로 하는 예수회는 400년이 넘는 역사를 통하여 초기 이냐시오 성인의 영성과 더불어 가난하고 겸손한 예수의 모습을 찾아나가고 있다.

 

 

 

 

  8 월의 성인

  1일: 알퐁소 주교 학자, 레온시오 순교자, 니코데모 부인 순교자, 소피아, 피데스 동정 순교자, 스페스 동정 순교자, 카리타스 동정 순교자

  2일: 에우세비오 주교 순교자, 스테파노 1세 교황 순교자, 테오도라 순교자, 알메다 동정 순교자

  3일: 가마리엘, 베드로 율리아노 증거자, 아비바 증거자, 리디아 부인, 트레아 동정녀

  4일: 요한 비안네 사제, 라이네리오 주교 순교자, 이아 순교자

  5일: 아벨 주교, 베난시오 주교, 토마스 순교자, 논나 부인, 아프라 동정 순교자

  6일: 호르미스다 교황, 야고보 증거자

  7일: 식스토 2세 교황 순교자, 가예타노 사제 증거자, 알벨토 증거자, 도미시오 순교자, 도나토 주교, 빅트리치오 주교, 글라우디아 부인

  8일: 도미니코 사제, 치리아코 순교자, 시그라다 수절, 아질베르타 동정녀

  9일: 오스왈드 순교자, 로마노 순교자, 세레노 주교

10일: 라우렌시오 순교자, 아스테리아 동정 순교자, 바사 동정 순교자

11일: 티부르시오 순교자, 타우리노 순교자, 베드로 파브레, 수산나 동정 순교자, 렐리아 동정녀, 글라라 동정녀

12일: 인노첸스 11세 교황, 글라우디오 순교자, 힐라리아 순교자, 디냐 순교자

13일: 히폴리토 사제 순교자, 가시아노 주교 순교자, 막시모 원장, 폰시아노 교황 순교자, 라데군다 황후, 첸톨라 순교자, 콘코르디아 순교자

14일: 갈리스도 교황 순교자, 에우세비오 증거자, 막시밀리아노 콜베 사제, 우르시치오 순교자, 아타나시아 수절

15일: 달치시오 순교자, 루페르토 원장, 림바니아 동정녀

16일: 로코 증거자, 티토 순교자, 아르사치오 증거자, 스테파노 왕, 세레나

17일: 히야친트 증거자, 리베라토 순교자, 에우세비오 교황, 베네딕타 동정녀

18일: 아가피토 소년 순교자, 다제오 주교, 라우로 순교자, 헬레나 황후

19일: 요한 에우데스 사제, 루이 주교, 베르둘프 원장, 나마디아 동정녀

20일: 베르나르도 원장 학자, 아마톨 증거자, 루치오 순교자

21일: 비오 10세 교황, 시도니오 주교, 그라시아 동정 순교자

22일: 안투사 순교자, 에텔지타 동정녀

23일: 필립보 증거자, 에우제니오 주교, 로사 동정녀

24일: 바르톨로메오 사도, 아우레아 동정 순교자, 에밀리아 수절

25일: 제네시오 증거자, 루도비코 증거자, 요셉 갈라상시오 사제, 파트리치아 동정녀, 마리아 미카엘라 동정녀, 엡바 동정녀, 후네군다 동정녀

26일: 엘리아 주교, 이레네오 순교자, 제피리노 교황 순교자, 엘리사벳 동정녀

27일: 루포 순교자, 후고 증거자, 만네아 순교자, 모니카 수절

28일: 아우구스티노 주교 학자, 모세 증거자, 헤르메스 순교자, 요아귀나 동정녀

29일: 메데리고 원장, 히파시오 순교자, 사비나 순교자

30일: 펠릭스 사제 순교자, 아다욱토 순교자, 팜마치오 증거자, 말가리다

31일: 라이문도 증거자, 로부스티아노 순교자, 파울리노 주교, 아이다노 주교, 암니아 순교자

 

 

 

 

8월 1일: 카리타스 순교자들

하느님의 지혜인 피데스, 스페스 그리고 카리타스 공경을 설명하는 동방의 한 은유에 따르면, 이들은 로마의 어느 과부(소피아<지혜>)의 세 딸의 실제 이름이라고 한다. 이 딸들이 하드리안의 크리스천 박해 때 순교하였다는 것이다(로마의 순교록). 순교 당시 피데스(신덕)는 12세로서 매를 심하게 맞았으나 큰 상처를 입지 않자, 끊는 물을 부었고 그래도 별 효과가 없자 참수하였던 것이다. 그리고 스페스(망덕)는 10세였고, 카리타스(애덕)는 9세였는데, 용광로에 집어 넣어도 죽지를 않아서 목을 베었다. 또 그들의 어머니 소피아는 그들의 무덤에서 기도하다가 3일 후에 운명하였다.

 

 

8월 1일: 성 알퐁소 주교 학자(1696-1787)

이탈리아 나폴리 근교 마리아넬리에서 태어난 그는 16세의 어린 나이로 나폴리 대학교에서 교회법과 민법의 박사 학위를 받았으며, 8년 동안 성공적으로 법을 잘 다스렸다. 그후 오라토리오회에 입회, 1726년에 사제가 된 그는 선교사 생활을 하다가 1731년 마리아 첼레스테 수녀의 환시에서 받은 규칙에 따라 속죄 수녀회를 창설하였다. 그런데 초창기에 중대한 알력이 일어나서, 마리아 수녀가 떠나가고 알퐁소는 포치아에 따로 수도원을 창립하였다. 1743년 탈코이아 주교가 죽자 총회는 알퐁소를 총장으로 선출하였다. 성직자, 수도원 그리고 전 교구의 혁신을 위해 노력한 그는 특히 가난하고 배우지 못한 사람들을 구제하는 활동을 폈다. 이후 병을 얻은 그는 주교직을 사임하고 노체라로 갔다. 여기에서 그는 18개월 동안 많은 영적 위기와 유혹을 극복하고 1839년 운명하였다. 윤리, 신학, 수학에 관한 놀라운 저서들을 남긴 그는 특히 얀세니즘과 반성직주의을 극복하면서 올바른 윤리관을 정립한 윤리 신학이 높이 평가받고 있다.

 

 

8월 2일: 성 스테파노 1세 교황(+257)

로마에서 태어난 그는 로마의 사제가 된 후 교황 성 루치오를 계승하여 254년에 교황이 되었다. 이단자들이 베푸는 세례까지 유효하다고 선언하여 큰 파문을 불러 일으킨 그는 순교했다고 전하여 내려오지만, 실제로는 순교하지 않은 것으로 판명되었다.

 

 

8월 3일: 성 벤노 주교 은수자

스바비아의 귀족 가문 태생인 벤노는 스트라스부르그의 시의원이 되었으나 906년에 스위스의 슈비츠현 소재 에첼 산의 은수자가 되었다. 그가 성 마인라드가 살던 은둔소를 소유하게 되자, 이곳을 성모 마리아께 봉헌한 경당으로 꾸몄다. 그 후 많은 제자들이 몰려들었다. 927년, 그는 지방 출신이 주교가 되는 것을 반대해온 독일의 헨리 1세에 의하여 메츠의 주교로 임명되었으나, 2년 후에 그의 임명 방법과 개혁을 반대하던 자들에 의하여 물러났다. 그는 즉시 주교직을 사임하고 에첼 산으로 돌아 왔다. 934년에는 스트라스부르그 주교좌 성당의 주임이던 에버하르트까지 그에게 가세하였고, 벤노의 은둔소를 수도원으로 발전하였으며, 오늘날에는 저 유명한 아인지델른 수도원으로 변모한 것이다.

 

 

8월 3일: 성녀 리디아 부인(1세기경)

소아시아의 아크-히사르(티아디)에서 태어난 그녀는 자색 옷감 장수였는데, 필립비에서 행한 성 바울로의 설교에 감복하여 첫 번째 개종자로서 세례를 받았다. 또한 집안 식구들을 영세케 한 그녀는 바울로가 그녀에 집에 기거하며 선교활동을 할 수 있도록 도왔다.

 

 

8월 4일: 성 몰루아 혹은 루가이드 원장

성 몰루아는 가르타크 출신인데, 어릴 때부터 목동생활을 하였다. 그후 그는 뱅고르로 가서 성 콤갈의 지도를 받고 사제가 되었는데, 그의 덕과 능력이 탁월하여 킬러 대수도원장으로 임명되었던 것이다. 임종하는 자리에서 성 몰루아가 제자들에게 남긴 말은 다음과 같습니다. : "사랑하는 형제 여러분, 그대의 땅을 열심히 개간하시오. 그러면 먹고 마시고 입는 것을 푸성하게 딸것이오. 영혼이 풍성하면 안정이 있고, 안정이 있는 사람에겐 참 신심이 따를 것이며, 참 신심의 목표는 영원한 생명입니다." 몰루아는 살아있는 생명이면 무엇이든 죽이지 않았다. 그가 운명할 때 새들이 우짖었다고 한다.

 

 

8월 4일: 성 요한 비안네 사제(1786-1859)

시골 농부의 아들인 그는 사제직을 수여 못받을 정도로 성적이 부진하였다. 그러나 어떤 자격보다도 열렬한 신심과 좋은 뜻을 참작한 교회는 사제직을 주고 1818년 아르스-앙-동베스의 본당 사제로 발령을 냈다. 그는 여기서 죽을 때까지 40년 동안이나 일하며 주민들에게 열렬한 신심을 불어넣었다. 그리하여 설교자와 고해신부로 이름이 알려진 그의 한적한 시골 마을은 순례자들로 북적대기 시작하였다. 하루 18시간 동안이나 고해소에서 보낸 그는 지극히 단순한 성품이지만 충고에 있어서는 간단 명료하였고, 신심이 흘러넘치는 직설적인 설교를 하였다. 순례자들의 소란, 끊임없는 고해성사 요구에도 아랑곳 하지 않고 최선을 다한 그는 과로로 운명하였다. 1929년 교황 비오 11세는 성 요한 비안네를 본당 사제의 수호성인으로 선언하였다.

 

 

8월 5일: 성 아다이와 마리 주교

메소포타미아의 전설적인 복음 전도자들이다. 전설에 따르면, 아다이는 그리스도의 제자 중의 한 사람으로서, 도마 사도에 의하여 에데사(이락의 우르화)로 파견되었다. 이 지역의 복음 전도는 성 아다이의 공로였다. 이러한 전설은 에데사에 있는 압갈왕에게 보냈다는 그리스도의 편지 문제와 관련되어 있다. 아다이가 2세기 메소포타미아 지역의 선교사였다는 사실은 어느 정도 신빙성이 있다고 한다. 아다이가 압갈왕을 치유시켰고, 개종시켰으며, 왕은 그의 백성이 개종토록 하였다. 개종자 가운데 아다이가 있었는데, 아다이가 그를 주교로 승품시키고, 후계자로 임명하였다. 아다이는 후일 박해가 일어났을 때 순교하였다. 아다이는 또한 그의 제자 마리를 니시비스, 니느베 그리고 티그리스 지방의 선교사로 파견하였다. 마리는 교회와 수도원을 건설하였고, 셀레우시아-크테시폰 근교에서 사망할 때까지 수많은 개종자를 얻었다. 이 두 성인들은 시리아와 페르시아의 사도로서 2세기부터 공경받아 왔다.

 

 

8월 5일: 성 토마스 도버의 순교자(+1295)

1295년 프랑스 해적이 바다를 통하여 도버에 상륙, 성 마르틴 수도원을 공격하였다. 이때 대부분의 수도자들은 몸을 숨겼으나 당당히 수도원을 지키던 그는 붙잡히고 말았다. 그들은 그에게서 수도원의 보물이 숨겨진 곳을 밝혀내기 위해 심한 고문을 하였다. 끝까지 말하지 않고 버티던 그는 모진 매로 죽고 말았다. 이후 국왕 리차드 2세는 교황 우르바노 6세에게 토마스 순교자의 시성을 촉구했던 일은 유명한 이야기로 전해 내려온다.

 

 

8월 6일: 성 유스토와 파스토르 순교자

이 두 성인은 디오클레시안과 막시미안의 크리스천 박해 때 학생이었다. 박해자들이 지금의 스페인 알칼라 데 에나레스에 도착하여 크리스천들을 색출하고 다닐 때, 유스토와 파스토르는 그곳의 초급학교에서 기초과목을 배우는 어린이였다. 이 두 소년은 그리스도를 위하여 죽는게 두렵지도 않은지, 아니면 아무것도 모르는 것인지, 하여튼, 그 지방 관리에게 가서 신앙을 고백하였다. 그러나 판관은 그들을 겁주려고 무서운 형구들을 보여 주었지만, 그들은 확고한 의지로 하느님을 찬미하여 그리스도를 끝까지 증거하자, 모진 채찍질을 당하여 순교하였다.

 

 

8월 6일: 성 호르미스다 교황(+523)

이탈리아의 프로시노네에서 태어난 그는 514년에 성 심마쿠스를 이어 교황이 되었다. 재임기간에 가장 돋보이는 일은 아카치아 이단을 소멸시킨 것이다. 콘스탄티노불 교회가 로마와 재결합하였는데, 이것은 아카치오를 공식으로 단죄하고 로마 주교좌의 수위권과 무류성을 선언하는 ’호르미스다 고백문’의 결과 때문이다. 여기에는 콘스탄티노불의 총주교인 요한을 비롯하여 동방 주교 약 250여 명이 서명하였다. 그래서 이 문서는 교황의 권위와 수위권에 대한 획기적인 선언임과 동시에 세기를 통하여 이 요구를 구체화시킬 때마다 인용되어 왔다.

 

 

8월 7일: 성 가예타노 창설자

가스팔 디 티에네 백작과 마리아디 포르토의 아들로 태어난 그는 비첸사에서 세례를 받고, 두 살 때 그의 부친이 전사하는 불운을 안았다. 그는 어머니 슬하에서 자라나, 파두아 대학교에서 공부하여 민법과 교회법의 박사 학위를 받았다. 그는 곧 비첸사의 시의원이 되었고, 1506년에는 로마로 가서 교황 율리오 2세로부터 최초의 공증인으로 임명되었다. 또한 그는 신심 깊은 사제들로 구성된 신애회를 재생시켰다. 1513년, 율리오 교황이 서거하자 자신의 직책을 사임하고, 1516년에 사제로 서품된 후, 비첸사로 돌아왔다. 그는 거기서 성 예로니모의 오라토리오회에 입회하여 가난하고 병든 사람들을 위하여 일하다가, 베로나에서 이와 비슷한 회를 창설하였다. 1523년, 그는 로마로 가서, 후일 교황 바오로 4세가 된 요한 피에트로 카라파, 바울로 콘시글리에리 그리고 보니파시오 다콜레 등과 함께 교회를 개혁하고, 백성들에게 설교하며, 병자를 돕고, 최악의 경우에서 허덕이던 성직자의 신분을 개선하려는 목적으로 성직 수도회를 창설하여, 1524년에 교황 클레멘스 7세의 승인을 받았다. 테아턴회라 부르는 이 수도회는 공동체 생활을 하는 정규 성직자들로 구성하고, 서원을 발하며, 사목직에 종사하였다. 처음에는 그리 성공적이 못되었다.

1530년, 가예타노가 총장으로 선출되었다. 그는 주교들의 개혁에 반대하는 무리들을 대시민들을 위한 가예타노의 주요 업적 중의 하나는 전당포의 설립이었다. 후일, 그는 복자 요한 마리노니와 함께 몬테스 피에타티스를 설립하여 가난한 사람들에게 돈을 빌려주는 일로써 시민들의 복리를 위해 일하였다. 그는 8월7일, 나폴리에서 운명하였으며, 1671년에 시성되었다. 그는 트렌트 공의회 전에 있었던 가톨릭 개혁가들 중에서도 가장 뛰어난 성인이다.

 

 

8월 7일: 성 알베르토 증거자(+1307)

시실리 섬의 트라파니에서 태어난 그는 시실리의 알베르토라고 알려져 있다. 그의 부모는 아들이 없었는데, 만일 아들을 낳는다면 몬테 가르멜의 성모님께 봉헌하겠다고 약속한 뒤에 그를 얻었다. 그래서 그는 어릴 때부터 가르멜 회원이 되었으며 사제로 서품된 뒤에는 메시나로 가서 유대인들에게 복음을 전하여 큰 성공을 거두었다. 규칙 외에도 자발적인 고행을 많이 한 그는 매일 밤 십자가 앞에 무릎을 꿇고서 시편 전부를 바치는 습관을 가지고 있었다. 만년에 그는 메시나와 가까운 곳에서 은수생활을 하였다. 300년 후에 성녀 마리아 막달레나 파치가 가르멜을 떠나려는 유혹에 힘들어할 때, 천상에 있는 성 알베르토에게 기도하여 유혹을 이겼다는 이야기가 있을 정도로 그의 성덕은 탁월하였다고 한다.

 

 

8월 8일: 성 도미니코 사제

펠릭스 구즈만과 복녀 요안나 아자의 아들인 도미니코는 스페인의 칼라루에가에서 태어났고, 1184-1194년 사이에는 팔렌시아의 대학교에서 수학하였으며, 아마도 학업을 계속하는 중에 그곳에서 서품된듯 하다. 그는 1199년에 오스마에서 카논으로 임명되었다. 또 그는 1203년에 오스마의 주교 디에고데 아베제도를 수행하여 랑퀘독으로 가서 알비 이단을 상대로 설교하였고, 시토회의 개혁을 도왔다.

1206년에 그는 알비파 지역인 푸루일레에서 여자 수도회를 창설하였고, 수많은 수도자들에게 강론하였다. 1208년에 교황 대사 베드로 카스텔난이 알비파에 의하여 피살되었을 때, 교황 인노첸시오 3세는 그들을 상대할 십자군을 조직하고, 그 대장으로 몽포르의 시몬 4세 백작을 임명하였다. 이때의 전투는 7년간이나 계속되었다. 도미니코는 이 군대를 따라다니며 이단자들에게 설교하였으나 큰 성공을 거두지는 못하였다. 1214년, 시몬 4세가 그에게 카세네일의 성을 주었는데, 이때 그는 여섯 명의 동료들과 함께 알비파의 회개를 위하여 활동할 수도회를 세웠다. 그리고 이 수도회는 그 다음 해에 툴루즈의 주교로부터 교회법적으로 승인받았다. 그러나 1215년의 라테란 제 4차 공의회에서 자신의 설교회가 승인받았는데는 실패했지만, 다음 해에 호노리오 3세로부터 승인을 받고, 설교회 즉 도미니코회가 창설된 것이다. 그 후 도미니코는 수도회의 조직을 위하여 여생을 보내면서, 이탈리아, 스페인 그리고 프랑스 등지를 다니며 순회 설교를 하여 좋은 성과를 거두는 한편, 많은 회원이 입회하였고 또 수도원도 정착 단계에 들어서게 하였다. 이 새로운 수도회는 지성적인 생활과 대중들의 요구를 잘 조화시켰던만큼 회개운동을 꾸준히 전개하는 면에서 크게 성공하였던 것이다. 그는 1220년에 볼로냐에서 수도회의 첫번째 총회를 소집하였고, 그 이듬해 8월6일에 그곳에서 운명하였다. 그가 헝가리 순회 선교에서 얻은 병으로 일생을 마감하였던 것이다. 그는 1234년에 시성되었으며, 천문학자의 수호성인이다.

 

 

8월 9일: 성 로마노 순교자

로마의 군인이었던 로마노는 감옥에서 성 라우렌시오에 의하여 교리를 배우고 세례를 받았다. 로마노는 자신이 크리스천으로 개종했다고 선포했기 때문에 라우렌시오가 순교하기 바로 전날에 참수치명하였다.

 

 

8월 9일: 성 오스왈드 왕(605-642)

부친 에텔프리트가 617년 레스월드에서 피살되었을 때 노스움브리아에서 스코틀랜드로 끌려갔었다. 이때 스코틀랜드의 이오나에서 개종한 그는 군대를 일으켜 카드왈론을 헥삼 교외의 전투에서 물리치고 노스움브리아의 왕이 되었다. 그는 전투에서 이길 경우 승리를 성 골룸바에게 바칠 것이라고 약속하고 성 에단에게 전국에 복음선포를 하도록 도와주면서 린디스파른 섬을 기증하고 주교좌로 삼도록 허락하였다. 성당과 수도원을 많이 세운 그는 스코틀랜드에서 수도자를 이주시켜 자기 백성들의 신앙생활을 돌보게 하였다. 또한 그는 웨섹스의 첫 번째 크리스천 왕 치네질스의 딸인 치네부르가와 결혼하였는데, 불과 몇 년 후에 펜다와의 전투에서 죽었다.

 

 

8월 10일: 성 라우렌시오 순교자

로마의 일곱 부제 중의 한 분인 그는 스페인의 우에스카 출신이며, 발레리안의 크리스천 박해 때에 로마에서 순교하였다. 그는 교황 식스토 2세의 부제였고, 식스토 교황이 사형을 받게 되자, 슬픔을 억누르지 못했다고 하는데, 이때 교황은 그 역시 3일 안으로 자신을 따라 오리라고 예언하자, 라우렌시오는 기쁨을 감추지 못하면서 교회의 소유물들을 팔아서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었다고 한다. 로마의 집정관이 그의 이런 행위를 알고는, 교회의 보물들을 모두 황제에게 바치라고 엄명을 내렸다. 이때 그는 모든 보물을 모으려면 3일 정도가 소요된다는 말을 하고 돌아와서는, 모든 보물들을 맹인과 절름발이, 고아와 가난한 이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이에 분개한 집정관은 그를 체포하여 온갖 고문으로 괴롭히다가 석쇠 위에 눕히고는 구워 죽였다. 시인 프루덴시우스에 의하면, 그의 죽음과 표양이 로마의 회개를 가져왔고, 로마에서 이교의 종말을 고하는 직접적인 동기가 되었다는 것이다. 그의 문장은 석쇠이다.

 

 

8월 11일: 성녀 아트락타 수녀

아락트라고도 알려진 그녀는 아일랜드 귀족 가문의 딸로서 그의 부친으로부터 수녀원에 들어갈 허가를 받지 못하자, 쿨리빈에 있던 성 바트리시오에게 달려가서 수녀가 되었다는 전설이 있다. 그녀는 루그가라에 요양원을 세우고 봉사 활동을 주로 하였다. 이곳이 지금의 킬라락트이다. 수많은 기적이 그녀를 통하여 일어났다고 한다. 그러나 그녀의 전설은 확실한 근거가 희박한 실정이다.

 

 

8월 11일: 성녀 수산나 동정 순교자(+295)

교황 카이오의 조카이고 가비니오라는 사제의 딸인 수산나는 매우 아름다운 처녀였다. 그녀는 황제 디오클레시아노가 자기 조카인 막시미안과 결혼하라는 요구를 뿌리쳤을 뿐만 아니라, 그녀에게 결혼을 종용하도록 파견했던 궁중 관리인 클라우디우스와 막시무스까지 개종시켰다. 분을 참지 못한 황제는 클라우디우스와 그의 아내 그리고 아들들을 쿠메에서 죽이고, 수산나와 그의 아버지는 참수시켰다.

 

 

8월 12일: 성 포르카리오 순교자

8세기경의 레렝 대수도원에는 5백명 이상의 수도자들이 살고 있었는데, 이곳의 원장이 곧 포르카리오였다. 그는 한 천사로부터 야만인들이 바다로부터 밀려 올 것이라는 말씀을 들었는데, 이들은 무어인들을 뜻하는 것이었다. 그는 여러가지 준비를 시켜 수도원의 안전을 도모하였지만, 수많은 해적들이 상륙하여 네 사람을 남기고는 모든 수도자들을 살해하였다. 그러므로 포르카리오와 그의 수도자들은 로마 순교록에 올라 있다.

 

 

8월 13일: 성 노벨로네 은수자

성 노벨로네는 파엔그라 출신으로서 신기료 장수로 지내던 사람이다. 그가 어릴 때에는 하느님을 두렵게 생각지 않고 성장하였으나, 혼인성사를 받을 때부터 중병을 앓았다. 그는 이 병에서 하느님의 사랑을 깊이 체험하였고, 회복되자마자 재속 프란치스칸이 되어 스스로 고행을 시작한 것이다. 그는 로마 순례 후 콤포스 텔라로 순례할 때에는 맨발로 여행하면서 자신의 과거를 책망하였다. 그러나 이때부터는 또 그의 아내가 문제였다. 가사는 돌보지 않고 병자와 가난한 사람들만 돌보는 남편을 야속하게 생각했던 것이다. 그러던 중, 아내가 죽자, 노벨로네는 은수생활을 꿈꾸고 의논한 결과, 카말돌리회에 들어가라는 충고를 받았다. 그러나 그는 카말돌리 은수자들의 움막 곁에 자신의 거처를 마련하고 철저한 기도생활을 하여 높은 경지에까지 도달하였다. 그는 46세의 일기로 운명하고, 파엔그라 대성당에 안장되어 공경을 받고 있다.

 

 

8월 13일: 성녀 라데군다 왕후(518-587)

프랑크족의 침략으로 인하여 고향을 등지고 투린지아로 이주한 그녀는 20세 때에 클로타르 1세 왕과 정략적인 결혼을 하였다. 사나운 성격을 지닌 남편과 10여 년을 참고 산 그녀는 오빠가 살해되는 기회를 이용하여 왕의 곁을 떠났다. 노와이옹에서 주교의 도움을 받아 은신하던 그녀는 포와티에르에 수녀원을 세우고 원장이 되었다. 이 수녀원은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인정되는 유물로 유명한데, 베난시오 성인은 이 수녀원의 십자가를 보고, 저 유명한 찬미가 ’왕의 깃발이 앞장 서니’, ’내 혀는 영광스런 승리를 노래하리…’ 등을 만들었다. 또한 그는 성녀 라데군다의 전기도 썼다.

 

 

8월 14일: 성 마르첼로, 아파메아의 주교 순교자

테오도시우스 황제는 로마제국의 크리스천화를 시도하고, 380년에 그의 모든 신하들이 로마와 알렉산드리아의 주교들에게 신앙을 고백토록 하는 칙서를 발표하였다. 또 8년 후에는 관리들을 각 지방으로 파견하여 이방인 신전들을 파괴케 하니, 한편으로는 원성도 많았다. 황제의 관리가 시리아의 아파메아에 도착하여 그곳의 제우스 신전을 파괴했는데, 이곳의 주교는 마르첼로였다. 관리들은 주교의 도움을 받아 이 신전을 파괴하였는데, 마르첼로는 또 다른 신전을 파괴하려고 조사하던 길에 이방인들에 의하여 돌에 맞아 순교하였다.

 

 

8월 14일: 성 막시밀리아노 콜베(1894-1941)

폴란드의 즈둔스카볼라에서 태어난 그는 콘벤투알 프란치스코회에 입회하여 막시밀리안이란 이름을 얻었다. 1917년 로마에서 성모의 기사회를 만들었고 그 다음해에 로마에서 서품받고 폴란드로 귀향한 그는 월간 ’성모의 기사’를 창간하였다. 1927년 와르소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무염성모의 마을을 세운 그는 이와 비슷한 마을을 일본과 인도에도 세웠다. 폴란드의 무염성모 마을 원장으로 있던 그는 독일의 폴란드 침공시에 게슈타포에 의해 체포되어 악명높은 아우슈비츠 노동 수용소에 감금되었다. 여기에서 그는 죄수의 탈출로 인한 대가로 아사 감방으로 끌려가는 한 기혼자를 대신하여 감방에 들어 갔다. 기적적으로 목숨을 연명한 그는 결국 석탄산 주사를 맞고 순교하였다.

 

 

8월 15일: 성 달치시오 순교자

로마의 부제였던 성 타르시치오는 감옥에 있는 어느 신자에게 성체를 모시고 가던 중, 폭도들에 의하여 비아 아피아니에 끌려가서 매맞아 죽었다. 이 사건은 카르디날 와이즈만의 소설 ’파비올라’ 속에도 묘사되어 있고, 교황 다마소는 시를 남겼다. 타르시치오는 첫 영성체하는 어린이들의 수호성인으로 공경을 받고 있다.

 

 

 

 

  9 월의 성인

 1일: 루포 주교, 피아크라 은수자, 베레나 동정녀, 롤라노 증거자

 2일: 스테파노 왕 증거자, 아지아 수절

 3일: 시메온 은수자, 그레고리오 학자 대교황, 나탈리스 증거자, 세라피아 동정 순교자, 산딜라 순교자, 에라스마 동정 순교자, 힐데리타 동정녀

 4일: 마르첼로 순교자, 울탄 주교, 로사 동정녀, 로살리아 동정녀, 모네사 동정녀, 헤르미오나 동정녀, 이다 수절

 5일: 라우렌시오 주교, 베르티노 원장, 알비토 주교, 쿠스부르가 황후

 6일: 엘레우테리오 원장, 마뇨 원장, 베가 동정녀

 7일: 그라토 주교, 메모리오 순교자, 레지나 동정 순교자

 8일: 코르비니안 주교, 아드리안 순교자, 나탈리아 순교자

 9일: 고르고니오 순교자, 베드로 클라베르 증거자, 아우도마로 주교, 세르지오 1세 교황, 이사악 주교, 오스만나 동정녀

10일: 니콜라오 증거자, 아우트베르트 주교, 살비오 주교, 피니아노 주교, 풀케리아 동정녀, 메노도라 동정 순교자

11일: 프로도 순교자, 히야친토 순교자, 파프누시오 주교, 테오도라, 스페란데아 동정녀

12일: 퀴도 증거자, 아일베 주교

13일: 요한 크리소스토모 주교 학자, 베네리오 원장, 에울로지오 주교, 아마토 주교

14일: 마테르노 주교, 노트부르가 동정녀

15일: 니코메데스 사제 순교자, 아이카르도 원장, 가타리나 과부, 멜리티나 순교자

16일: 고르넬리오 교황 순교자, 치프리아노 주교 순교자, 에우페미아 동정 순교자, 에디타 동정녀

17일: 로베르토 주교 학자, 아리아드네 순교자, 람베르토 주교 순교자, 힐데가르다 동정녀, 골룸바 동정 순교자

18일: 요셉 증거자, 페레올로 순교자, 리카르다 황후, 소피아 순교자

19일: 야누아리오 주교 순교자, 테오도로 주교, 에밀리 동정녀, 콘스탄시아 순교자, 폼포사 동정 순교자

20일: 에우스타치오 순교자, 글리체리오 주교, 필립바 순교자, 디냐 동정 순교자, 에메리타 동정 순교자, 파우스타 순교자

21일: 마태오 사도, 제룰포 순교자, 이사악 주교 순교자, 이피제니아 동정녀, 마우라 동정녀

22일: 상티노 주교, 토마스 주교, 펠릭스 3세 교황, 이라이스 동정 순교자

23일: 리노 교황 순교자, 테클라 동정 순교자, 폴리세나 동정녀, 산티파 동정녀

24일: 파치피코 증거자, 제레마로 원장, 티르소 순교자

25일: 솔렘니오 주교, 피르미노 주교 순교자, 핌베르토 주교, 클레오파스 순교자, 타타 순교자

26일: 고스마 순교자, 다미아노 순교자, 치프리아노 순교자, 닐로 원장, 가브리엘 라어망 순교자, 마칸 주교, 유스티나 동정 순교자

27일: 빈첸시오 사제, 엘지알, 힐트루다 증거자

28일: 벤첸슬라오 왕 순교자, 엑수페리오 주교, 리오바 동정녀, 테타 동정녀

29일: 미카엘 대천사, 가브리엘 대천사, 라파엘 대천사, 프라테르노 주교 순교자, 가이아나 동정 순교자

30일: 예로니모 사제 학자, 그레고리오 주교, 호노리오 주교, 소피아 수절

 

 

 

 

[9월 1일] 루포 상스의 주교(+623)

성 아르테미오를 이어 상스의 주교가 된 그는 사목자의 임무를 소중히 하고, 어떠한 자만심도 용납하지 않는 비범한 성격을 가졌다. 또한 지역의 안전을 위해 노력하며 기꺼이 국왕을 도왔다. 그러나 국왕 클로테르는 어떤 음모에 말려들어 루포 주교를 추방한 일이 있었다. 이때 오센느에 온 루포는 이곳 주민들이 대부분 우상을 섬기고 있음을 알고 한 맹인의 치유로 선교활동의 큰 성공을 거두었다. 그 후 국왕은 잘못을 깨닫고 용서를 청해왔지만 루포 주교는 상스로의 귀향을 거절하고 오센느에서 죽을 때까지 하느님을 알리기 위해 힘썼다. 그의 유해는 상스 대성당에 안장되어 있다.

 

 

[9월1일]가브라 미카엘 순교자(1791-1855)

에티오피아 교회의 수도자로 성덕과 학덕으로 유명한 가브라 미카엘은 60세에 유스티노 신부에게 사제 서품을 받았다. 이 두 분은 함께 활동함으로 큰 성공을 거두었고, 자신들을 쫓아냈던 에티오피아 교회 사람들까지 개종시켰다. 이것을 본 국왕은 가브라 미카엘과 4명의 동료들을 체포하여 고문하고 사형 언도를 내렸으며 영국 영사의 중재로 풀려났지만 옥중의 고문으로 인하여 결국 운명하고 말았다.

 

 

[9월2일]마르가리다 루벵의 동정 순교자

자선사업에 적극적이었던 마르가리다는 친척부부를 살해한 강도들에게 납치되어 혀가 잘리고 옆구리가 찔려 강물에 버려졌다. 후일 그녀의 유해가 발견되어 루벵의 성당에 모셔졌는데, 수많은 기적들이 끊임없이 일어나, 그녀의 높은 덕을 증거하였다. 그녀는 한마디로 지극히 단순하고 무죄한 영혼으로 한생을 살았다고 역사가들은 기록한다.

 

 

[9월3일]그레고리오 1세 교황 박사(540-604)

부유한 귀족의 아들로 태어난 그는 로마의 장관이었으나, 수도생활을 오랫동안 꿈꾸어 왔기 때문에 그는 574년경에 로마와 시실리에 수도원을 세우고, 35세경에 수도자가 되었다. 590년 수도자로서 처음 교황으로 선출 된 그는 교회 법령을 정비하고, 무능한 성직자들을 해임시켰으며, 막대한 경비를 들여 자선활동을 전개하였다. 그는 지혜롭게 교황청 재산을 관리했고, 롬바르드인들로부터 포로들을 석방시켰으며, 부당한 박해를 받던 유다인들을 보호하고, 기근의 희생자들을 구호하였다. 593년 그는 롬바르드 침략군을 설득하여 로마를 평정시켰으므로 롬바르드왕과 함께 평화의 수호자로 존경을 받았다. 그는 위대한 주교이자 정치인이었다. 또한 그의 학덕은 어느 누구도 넘볼 수 없을 정도로 높았다. 레굴라 파스토랄리스(주교의 직책과 의무), 모랄리아(욥서 주해), 대화집을 비롯하여 800여 통의 서한들 속에 담긴 그의 사상은 서방교회의 공식 예식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으며, 유럽의 역사에도 큰 발자국을 남겼다. 그는 잉글랜드의 개종에도 크게 영향을 미쳤고, 교황권이 교회의 최고 권위임을 재확립하였으며, 교황을 일컫는 칭호인 ’하느님의 종들의 종’이란 표현을 처음으로 사용하였다. 뿐만 아니라 그는 위대한 설교가였고, 로마 전례에 결정적인 영향을 끼친 결과, 그는 ’그레고리안’ 성가의 편집자로 추앙받는다. 또한 베네딕토 수도회를 면속시켜 교황의 권하에 두었다. 그는 라틴교부의 일원으로 공경받으며, 중세 교황직의 아버지로 추앙받는다. 서거 즉시 시성되었다.

 

 

[9월3일]괄라 브레쉬아의 주교(+1244)

성 도미니코가 베르가모에서 첫 입회자를 맞아들인 사람들 가운데 괄라 로마노니가 있었다. 그는 이때 이미 40세였고, 인품이 비범하므로 성 도미니코는 그를 볼로냐로 데려가 교육을 시키고, 나중에 원장으로 임명하였다. 그는 교황과 황제 간의 알력이 있었을 때에 브레쉬아의 주교가 되어 2년 동안 활동한 결과, 성공적으로 두 세력을 화해시키기도 하였다.

 

 

[9월3일]시메온 은수자(517-592)

안티오키아에서 태어난 그는 다섯 살 때에 부모를 여의고, 일곱 살 때부터 성 요한 주행자로 널리 알려진 분의 지도아래 68년 동안 기둥 안에서 살았다. 20세 때부터 성덕이 알려지기 시작했으며 군중이 몰려들어 안티오키아와 가까운 산 위로 숨기도 했다. 30세 때에는 어떤 환시를 보고, 수도원을 세웠으며, 33세 때에 기둥 위에서 사제로 서품되었다. 이렇게 군중이 연일 몰려드는 이유는 그의 성덕과 영적 지혜 그리고 예언과 기적 때문이었다. 특히 그는 오랜 기간동안 전혀 먹지도 않고 잠자지도 않고 지낸 것으로 유명하다.

 

 

[9월4일]가타리나 라코니지의 동정녀(1486-1547)

라코니지는 1486년에 가난한 노동자의 딸로 태어나, 이미 5살 때부터 아기 예수와 성모께 대하여 남다른 신심을 갖기 시작하였다. 1500년의 성 스테파노가 발현하여 성령께서 특별히 보살펴주실 것이라고 약속하셨다. 이때 세 줄기의 빛이 그녀를 비추며, "나는 네 안에 내 거처를 정하고, 너의 영혼을 깨끗하고 밝게할 것이며 생기를 주리라" 고 했다. 그 후 가타리나는 신비적인 신랑과의 동정 서원을 하였는데, 이상하게도 그녀의 손가락에는 신비스런 반지가 끼워 있었고, 이때부터 그녀는 가시관과 주님의 오상의 아픔을 느끼게 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을 육안으로는 볼 수 없었다. 그 후 가타리나에게는 수많은 기적이 일어났고 또 영적 도움을 청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자신을 짓누르는 악마로 인하여 고통을 당하는 등, 오랜 병고에 시달리기도 하였다. 그녀는 62세 때 카르마뇰라에서 운명하였다.

 

 

[9월4일]로사 비테르보의 동정녀(+1252)

비테르보에서 태어난 그녀는 여덟살 때 병을 앓으면서 성모 마리아의 환시를 보았던 인물이다. 성 프란치스코의 수도복을 입으라는 환시의 말씀에도 불구하고 그냥 평범한 여성으로 자랐다. 완전히 병에서 회복된 그녀는 평신도의 회개 복장을 하고 주님의 고난을 절실히 체험하였으며 죄인들의 무례함과 배은망덕을 대신 속죄하기 위해 노력하였다. 그 후 열두살 때부터 거리에서 설교하기 시작했는데, 주로 정치 지도자들에게 무수한 경고를 하였다. 이로인해 집에 감금되고 다시 정치 지도자를 비방하면 사형에 처한다는 경고까지 받았다. 이리하여 로사와 그 부모는 추방되어 소리아노로 갔는데, 그녀는 여기서 당시의 독재자 프레데릭 황제의 죽음을 예고하였고, 그것은 꼭 13개월 후에 일어났다. 이때부터 그녀의 이름이 널리 퍼졌고, 다시 고향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하지만 다시 병마에 시달리다 운명하였다. 이때의 나이는 17세의 어린 나이였다.

 

 

[9월5일]라우렌시오 쥬스티니아니 주교(1381-1455)

베니스의 귀족 가문에서 태어난 그는 세속의 지위를 마다하고, 알가섬의 성제오르지오 성당에서 일하였다. 그는 자주 어깨에 자루를 매고 다니며 자기 공동체를 위하여 음식을 구걸하러 다녔다고 한다. 1433년, 그는 카스텔로의 주교로 임명되었으나, 교구의 재정 관리에 환멸을 느껴 그 일은 다른 사람에게 맡기고, 자신은 양떼를 돌보는 일에만 전념하였다. 그는 공적인 일에서는 매우 정열적인 성직자였으나, 개인적인 생활은 매우 엄격하고 겸손하였다고 한다. 그는 성직자들의 모범으로 인정받고 있다.

 

 

[9월5일]베르티노 원장(+700)

성 몸몰리노와 성 베르트란드와 함께 프랑스 쿠탕스에서 태어난 그는 뤽세이유에서 은수자로 살았다. 그는 테루안느의 주교 성 오메트를 도와서 파스-트-칼레스 지방의 모리니인들에게 복음을 전하도록 파견되었다. 이곳에서 수도원을 지은 그는 661년경에 원장이 되었다. 이 수도원은 프랑스 수도원 중심지의 하나로 육성되었다. 후일 이 수도원은 쌩 베르텡으로 고쳤다. 성 골룸바노의 규칙을 따른 그의 문장은 배이다.

 

 

[9월6일]도나시아노, 래토와 동료 순교자들(+484)

484년, 반달의 아리안계 국왕 후네릭은 아프리카의 모든 가톨릭 성당을 폐쇄하고, 성직자들을 추방하는 명을 내리고, 그들 대신에 아리안 성직자들을 배치하였다. 이때 수많은 주교와 성직자들이 쫓겨났는데, 성문 밖에서 후네릭이 그들의 일부와 우연히 마주쳤다. 이때 주교들은 그에게 격렬히 항의하고 불의에 대하여 고발하였다고 한다. 이때 성 도나시아노와 네 명의 주교가 그 자리에서 잔인한 매를 맞고 사막으로 유배 당하였다가, 굶주림과 목마름으로 인하여 모두 죽었다. 소 랩티스의 주교이던 성 래토는 열심하고 배움이 많은 사람인데, 그도 역시 후네릭에게 정면으로 도전하였다. 따라서 그는 더러운 지하 감방에서 지내다가 결국은 화형을 당하여 순교하였다.

 

 

[9월6일]베가 동정녀(1세기)

아일랜드 왕의 딸로 태어난 그녀는 노르웨이 국왕 아들과 결혼하기로 약속한 날에 갑자기 사라졌다. 기적적으로 컴버랜드 연안의 어느 마을에 도착한 그녀는 한동안 은수자로 생활하였다. 그 후 성 에이단으로부터 수도복을 입은 그녀는 세인트 베아 수도원을 세웠다. 원장이 된 그녀는 가난하고 억압받던 사람들을 구하여 많은 이들로부터 큰 공경을 받았다.

 

 

[9월7일]그리모니아 동정 순교자

그녀는 아일랜드 어느 족장의 딸로서, 12세 때에 그리스도교로 개종하고, 평생 동정을 서원하였다. 이같은 서원을 이해하지 못하는 그의 부친은 결혼하기를 강요하므로, 그녀는 프랑스로 도망하였고, 피카르디의 티에라슈 숲에서 은수자 생활을 시작하였다. 그녀가 아름다운 자연 속에서 관상할 때이면 자주 탈혼상태에 빠져 들곤 하였다. 그러나 그의 부친이 보낸 사람들은 그녀를 찾으면 죽이든지 아니면 데려오라는 명을 받았다. 그녀는 끝끝내 돌아가기를 거절하므로 그들의 손에 살해당하였다. 이 이야기는 삽시간에 퍼져 사람들이 모여들고, 그녀가 살던 곳에 성당을 지었는데, 이것이 저 유명한 라 샤펠이다. 그녀는 동정을 지키기 위하여 순교한 것이다.

 

 

[9월7일]레지나 동정 순교자(+2세기경)

라이네라고 알려진 그녀는 부르군디의 알리스 지방의 이교도 클레멘스라는 사람의 딸이었다. 어머니를 일찍 여읜 그녀는 어느 크리스천 부인의 영향을 받고 성장하였다. 그녀의 부친은 그녀가 크리스천임을 알고 집에서 쫓아냈는데, 이때 레지나는 자신을 길러준 신자와 함께 양치는 일을 하면서 신앙생활을 계속하였다. 그 지방의 최고 관리인 올리브리우스와의 결혼을 거부한 그녀는 이로 인해 골 지방의 오텅에서 참수치명하였다.

 

 

[9월8일]디시보드 주교(+674년경)

성 디시보드는 아일랜드 사람으로, 자기 고향의 주교로 봉직하였다. 그는 매우 호소력을 지닌 설교가이자 사도였으며, 신도들의 신심을 뜨겁게 하기 위하여 많은 노력을 하였으나 큰 성과는 없었다고 한다. 이리하여 그는 7세기 중엽에 아일랜드를 떠나 독일 선교에 나섰다는 것이다. 그는 빈겐 근교 나헤 계곡에 수도원을 세웠는데, 이 수도원이 나중에 유명한 디센베르그 수도원으로 널리 알려졌다. 그는 여기서부터 인근 주민들을 사목하면서 수많은 개종자를 얻었다.

 

 

[9월8일]코르비니안 주교 선교사(670-725)

프랑스 샤트르에서 태어난 그는 14년 동안이나 샤트르에서 독수자 생활을 하였는데, 많은 제자들이 구름처럼 모여 그는 수도 공동체를 세웠다. 그 후 로마로 간 그는 교황 그레고리오 2세에 의해 독일의 선교사로 파견되었다. 그는 프레씽, 바바리아 등지에서 열렬한 선교사로 활약하던 중, 자신의 후원자이던 그리모알드 공작의 결혼을 공적으로 반대하게 된 사건이 일어났다. 그 공작은 자기 동생의 미망인 빌트루다와 결혼하려고 노력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코르비니안은 미망인의 원한을 사게 되었는데, 그녀가 자신을 살해하려는 음모를 발견하자마자, 미란으로 피신하였다. 그는 여기서 그리모알드가 전투에서 죽을 때까지 머물렀다. 그 후 코르비니안은 바바리아의 선교사 활동에 여생을 보내다가 오베르마이스에 수도원을 세우기도 하였다. 그의 상징은 곰인데, 자신을 죽이려던 사람이 쓴 가면이 곰이었다는 전설에 기인한 것이다.

 

 

[9월9일]루이사 사보이의 과부(1461-1503)

상류사회의 우아한 귀부인이던 마담 루이사는 글라라회원이 될 은혜를 미리 하느님으로부터 받았던 것 같다. 그녀는 사보이의 공작인 성 아마데우스 9세의 딸로 태어났다. 아홉살 때에 부친을 여의었지만, 어머니에 의하여 훌륭히 자랐으니, 특히 뛰어난 영적 지위에 있었다. 18세 때에 그녀는 후고드 샬롱과 결혼하였는데 남편은 열렬한 크리스천이었으므로, 그들의 집은 마치 수도원처럼 거룩하였고, 부부생활은 사랑으로 가득하였다. 그녀는 최초로 자선함을 설치한 인물로 기록된다. 자선함에 모인 기금으로 그녀는 고아와 과부 특히 나환자들을 돌보았다. 그러나 뜻하지 않게 남편과 사별한 그녀는 이제 완전히 세속과 결별하였다. 그녀는 재속 프란치스코회의 수도복을 입고 성무일도를 바쳤으며, 밤중에 일어나 새벽기도를 바치기 시작하였다. 이윽고 그녀는 오르브의 글라라 수녀회에서 살게 되었다. 비록 귀족 출신이었지만 그녀는 수녀원 내의 부엌일을 비롯하여 온갖 집안 일을 도맡아 하였다. 이처럼 그녀는 철저히 겸손하고 거룩하게 살다가, "우리 사부 성프란치스코여, 하느님의 자비를 빌어주소서" 하며 운명하였다.

 

 

[9월9일]베드로 클라베르 증거자(1580-1654)

스페인 바르셀로나 근교 베르두에서 태어난 그는 바르셀로나 대학교에서 공부한 다음 예수회에 입회하였다. 1610년에 뉴 그라나다 선교사로 파견되었고, 1615년에는 카르타제나에서 사제가 되었다. 이 곳은 노예 매매의 중심지였으므로, 서 아프리카에서 끌려온 노예들이 집단 수용되는 지역에서 주로 활동하면서 음식물과 의약을 공급하였고, 신앙을 가르치고 세례를 베풀어, 4년 동안 30여 만명을 개종시켰다. 또한 성 라자로 병원에서 나환자들을 위하여도 봉사한 그는 투옥된 죄수들의 고해신부로서도 큰 활약을 하였다. 그는 도시의 큰 광장에서 설교하였고, 엄격한 생활 속에서 초자연적 은혜를 받았다. 1650년 크르타제나를 휩쓴 흑사병에 걸려 하느님의 품으로 간 그는 병중에서도 일을 계속 할 것을 지휘하였고, 조그마한 방에서 외롭게 운명하였다. 1888년 시성된 그는 1896년에 레오 13세에 의해 흑인 선교의 수호성인으로 선언되었다.

 

 

[9월10일]네메시안 순교자(+257)

257년 발레리안 황제의 크리스천 박해 때에 카르타고의 주교 성 치프리아노는 아프리카 총독에 의하여 쿠루비스로 추방되었다. 이때 그에게 위로의 편지를 내고 또 자기 교회의 박해 상황을 알려준 이가 곧 네메시안이다. 그는 편지를 끝맺으면서 기도를 간청했고, 이어서 다음과 같은 말로 끝을 맺었다 : "저희들은 기도로써 서로를 돕고 있을 뿐이며, 하느님과 그리스도께서 저희들이 바라는 바를 이룰 수 있도록 기도할 뿐입니다. "로마 순교록에 의하면 주교 아홉 외에 각급 성직자와 평신도들이 고난을 받고 순교했는데, 그 대표자가 네메시안 주교라고 한다.

 

 

[9월10일]살비오 알비의 주교(+584)

프랑스 알비가의 후손인 그는 처음에는 고향에서 법률가로 활약하였다. 그러나 현세에서 이탈하여 살고픈 마음을 억제하지 못하여 수도자가 되었다. 주로 모르는 이들과 거리를 두고 움막을 지은 그는 심열을 다해 기도하는 데만 전념하였다. 한번은 고열로 인해 거의 죽을 상황까지 다다른 적이 있는데, 사경 속에서 하느님의 나라를 체험하고 다시 살아난 적도 있다. 574년 알비의 주교가 된 그는 더더욱 개인생활을 엄격하게 하였으며 특히 가난한 이들에게 깊은 애정을 주었다. 소와송의 칠페릭왕은 그를 위대한 신학자로 모셨고 정통교리의 수호자로 선언하였다. 투르의 성 그레고리오와 함께 그는 수도원의 정통성은 물론 교구의 정통성 확립에 결정적인 영향을 준 인물이다.

 

 

[9월11일]데이니올 원장 주교(6세기)

그는 뱅골의 데이니올이라고 부르는 이유는 디 강 윗쪽의 므나이에 있는 뱅골 파르 수도원을 세웠다는 것 때문이다. 그리고 이곳에 살던 모든 수도자들은 615년경에 노스움브리아의 에텔프리트로부터 학살되어 더욱 유명한 수도원이 되었다. 데이니올의 가문은 스트라트클리드족이라고 하며, 발드시에 묻혔다. 뱅골의 중앙 성당은 이 성인에게 봉헌되었다.

 

 

[9월11일]파프누시오 주교(+350)

에집트 태생인 그는 사막의 은수자 성 안토니오 문하생으로 지내던 중에 상부 테베의 주교가 되었다. 그러나 막시미누스의 크리스챤 박해 동안에 고문을 받다가 오른쪽 눈을 실명당한 후, 광산의 강제 노동형을 선고받았다. 325년의 니체아 제1차 공의회에서 특별한 존경을 받았는데, 그 이유는 대부분의 교부들이 기혼자인 주교와 사제 그리고 부제에게 아내와 별거하는 의무를 부과시키고자 할 때, 파프누시오는 단지 성직자는 서품 후에 결혼할 수 없다는 점을 역설하여 성사시켰기 때문이다. 또한 그는 성 아타나시오의 든든한 지지자였다.

 

 

[9월12일]에안스위다 동정녀(+640년경)

영국의 첫번째 크리스천 국왕 성 에텔베르토의 손녀딸인 그녀는 자신의 높은 성덕 때문에 그녀의 출생이 더욱 돋보인다고 한다. 그녀는 노스움브리아의 외교인 왕자와 결혼해야 한다는 부친의 뜻을 거역하면서 이렇게 말하였다 : "그가 그의 신에게 기도하여 이 통나무로 긴 발을 만들수만 있다면 나는 결혼하겠습니다." 이리하여 그녀는 부친의 동의를 얻어내어서 켄트의 포크스톤 연안에 수녀원을 짓고 거기서 살았다. 그녀는 이곳에서 죽을 때까지 고행과 기도로써 성덕을 쌓았다. 그녀의 수녀원은 덴마크인의 침략으로 없어졌으나, 1095년에 베네딕도 수도원이 이곳에 세워졌다.

 

 

[9월13일]요한 크리소스토모 주교 학자(347-407)

시리아의 안티오키아 태생인 그는 황제군의 장교 아들이다. 외교인 수사학자인 리바니오로부터 수사학을 배운 그는 안티오키아 학파의 거두인 타르소의 디오도루스로부터 신학을 배웠다. 369년 멜레시우스 주교로부터 세례를 받은 그는 374년경 성 바실리오의 지도아래 은수자가 되었으나, 동굴 속의 엄격한 생활로 건강을 해친 나머지 고향으로 돌아와 386년에 사제가 되었다. 그의 설교는 너무나 유명하여 크리소스토모, 즉 금구(金口)라는 별명을 받았으며, 390년부터는 신약 성서에 관한 연속 강론을 실시, 큰 반향을 일으켰다. 398년 본인의 뜻과는 다르게 콘스탄티노블 총주교로 임명된 그는 이 기회를 교회쇄신을 위해 최선을 다했다. 가난한 이들을 위하여 특별 기부금 제도를 마련하였고, 교회의 사치와 남용을 단죄하였으며, 동방으로 선교사를 파견하였다. 또한 우상숭배와 비윤리적인 향락과 기타의 사회 부조리에도 단호히 대처한만큼, 원수들도 많았다. 그는 정직하고 엄격한 삶을 통해 이를 극복해 나갔다.

403년 그를 미워하던 테오필로를 비롯한 36명의 주교들이 오크 시노드에서 29개 조항을 들어 단죄하고 유배시켰다. 그러나 내란과 지진으로 황제는 그의 명을 취소하였다. 다시 404년에 황제 아르카디우스가 재차 그를 귀향보냈다. 이때 그는 238통의 편지를 남기기도 했다. 교회가 인정하는 희랍계 박사 네 분 가운데 한 분인 그는 451년 칼체돈 공의회에서 교회 박사로 선언되었고, 비오 10세에 의하여 설교사의 수호성인으로 선포되었다.

 

 

[9월14일]노르부르가 동정녀(1265-1313)

농부의 딸로 에벤에서 태어난 그녀는 어릴 때부터 그 지방의 백작 집에서 하인으로 살았다. 신앙이 깊었던 그녀는 가끔씩 음식을 불쌍한 이들에게 나누어 주었는데, 이 사실이 주인에게 알려져 쫓겨났다. 그후 에벤의 어느 농장에서 일했는데 여기서도 계속하여 선행을 베풀었고 자신은 거의 굶다시피 했다. 이런 소문이 퍼지자, 백작 부인은 그녀를 다시 불러들였고, 그녀는 여생을 하녀로서 보냈다. 노트부르가는 하녀들의 수호성인이며 에벤 성당에 유해가 안장되어 있다. 문장은 낫이다.

 

 

[9월14일]마테르노 퀼른의 주교

성 마테르노는 퀼른의 초대 주교이며, 도나투스파와 논쟁을 주도했던 인물이다. 전설적인 이야기에 따르면, 그는 복음서에 나오는 나임 과부의 부활한 아들이다. 그 후 그는 열렬한 크리스천이 되어 그리스도를 증거하다가, 성 베드로의 명을 받고 성 에우카리오와 성 발레리오와 함께 골 지방 선교길에 올랐다. 마테르노는 통그레, 퀄른 그리고 트리에르 및 그 인근 지역을 맡았고, 퀼른 교구를 세우고 초대 주교로 봉직하다가 선종하였다. 그러나 그의 유해는 쌩-리귀엘 수도원 성당에 안장되었다.

 

 

[9월15일]가타리나 제노아의 신비가(1447-1510)

야고보 피에쉬와 프란체스카 디 네그로의 딸인 그녀는 제노아에서 태어났는데, 5명의 자녀 가운데 막내 딸이었다. 그녀는 어릴 때부터 수도생활에 남다른 관심을 보였지만, 그녀의 부친이 사망하자, 16세의 나이로 줄리아노 아도르노란 사람과 결혼하게 되었다. 그녀의 남편은 성마르고 방탕하였으며 아내에게 불성실하였다. 반면에 그녀는 민감하고 신중하였으며, 거의 유모어가 없었으나 그렇다고 매몰스런 여인은 아니었다. 불행하였던 이 결혼은 10년이 지나면서부터 남편의 방탕으로 인하여 극도의 가난에 빠지게 되었다. 이때부터 그녀의 남편은 자신의 생활을 개선하게 되어 프란치스코 3회원이 되었으며, 함께 회개 생활을 하기로 약속하였다. 처음에 그들은 팜메토네 병원에서 일하였는데, 특히 가타리나는 아주 뛰어난 영성생활로 다른 이들의 주목을 끌기 시작하였고, 1479년에는 아예 그 병원에서 생활하였으며, 1490년에는 원장이 되었다. 이때 그녀는 흑사병으로 거의 사경을 헤매였으나, 기적적으로 회복하자, 자신의 직분을 사임하였다. 그 후 1년 뒤에 남편이 죽었다. 이때 그녀는 자신의 영적 지도자가 된 카타네오 마라보토를 만났다. 그녀는 수많은 신비 체험을 하였으며, 악화된 병으로 인하여 한없는 고통을 받았다. 그러나 그녀의 신심은 비범하였다. 그녀는 세속에 있으면서 천상적인 사물을 관상하는 뛰어난 명상가였으며, 그녀가 가장 두려워한 것은 "악으로 서서히 물드는 세상의 오염" 이었고, 인간을 하느님에게서 떼어놓은 마귀의 간계였다고 한다. ’영혼과 육신의 대화’, ’영혼론’ 은 신비신학 분야에서 유명한 저서가 되었다. 이 책들이 1934년에 영국에서 간행된 바 있다.

 

 

 

 

 

 

 

  10 월의 성인

 1일: 레미지오 주교 증거자, 니체시오 주교, 데레사 동정녀

 2일: 엘레우테리오 순교자, 레오데가리오 순교자

 3일: 제라르도 원장, 요셉파 로셀로 수도자, 토마스 주교, 에본시오 주교, 멘나 동정녀

 4일: 프란치스코 원장, 암몬(대) 원장, 페트로니오 주교, 가요 증거자, 아우레아 동정녀

 5일: 플라치도 수사 순교자, 아폴리나리스 주교, 갈라 수절

 6일: 브루노 사제 증거자, 니체아, 페데스 동정 순교자, 마리아 프란치스카 동정녀

 7일: 로사리오의 성모, 세르지오 순교자, 바코 순교자, 유스티나 동정 순교자

 8일: 시메온 통회자, 타이스 통회자, 바딜로 수도자, 레파라타 동정 순교자, 비르지타 수절, 키나 동정녀

 9일: 디오니시오 순교자, 요한 레오나르도 사제, 루이스 증거자, 푸블리아 수절

10일: 프란치스코 증거자, 다니엘 순교자, 제레온 순교자, 파울리노 주교, 에울람피아 순교자

11일: 타라코 순교자, 브루노 주교, 알렉산델 주교, 에텔부르가 동정녀, 피엔시아 순교자

12일: 왈프리도 주교, 막시밀리아노 주교 순교자, 판탈로 주교 순교자, 모나스 주교, 헤를린다 동정녀, 렐린다 동정녀

13일: 에두아르드 왕, 제랄드 증거자, 카르보 순교자, 콜만 순교자, 파우스토 순교자, 핀카나 동정녀, 핀도카 동정녀

14일: 갈리스토 1세 교황 순교자, 부르카르도 주교, 포르투나타 동정 순교자, 마네힐다 동정녀

15일: 칸나토 주교, 에우티미오 원장, 데레사 동정녀

16일: 제라르도 마젤라 증거자, 룰로 주교, 마뇨보도 주교, 키아라 동정녀, 헤드비제스 수절, 마르가리타 마리아 동정녀

17일: 이냐시오 주교 순교자, 베라리오 주교, 에텔레드 순교자, 솔리나 동정 순교자, 마멜타 순교자, 안스트루다 동정녀

18일: 루가 복음사가, 유스토 순교자, 모논 순교자

19일: 요한 사제 순교자, 이사악 사제 순교자, 바울로 사제, 베드로 증거자, 바로, 프리데스위다 동정녀, 펠라지아 순교자, 클레오파트라 수절

20일: 요한 칸시오 증거자, 카프라시오 순교자

21일: 말쿠스 은수자, 힐라리온 원장, 우르술라 동정 순교자

22일: 멜라니오 주교, 도나토 주교, 살로메 부인

23일: 세베리노 주교, 베로 주교, 요한 사제, 이냐시오 주교

24일: 안토니오 주교, 펠릭스 주교 순교자, 프로문도 주교, 엘리스반 순교자, 아레타 순교자

25일: 크리산도 순교자, 가우덴시오 주교, 루포 주교, 크리스피아노 순교자, 다리아 순교자

26일: 에바리스토 교황 순교자

27일: 프루멘시오 주교, 오테란 원장

28일: 시몬 사도, 유다 사도

29일: 나르치소 주교, 엘프레다 동정녀

30일: 알퐁소 증거자, 세라피온 주교, 제라르도 주교

31일: 퀸티노 순교자, 월프강 주교, 루실라 동정 순교자

 

 

 

 

[10월1일]성 데레사 리지외의 수녀(1873-1897)

프랑스의 알랑송에서 시계 제조업을 하던 루이 마르땡과 젤리 궤렝의 딸로 태어난 그녀의 원래 이름은 마리 프랑소와 테레즈였다. 1888년, 데레사는 노르망디의 리외지에 있는 가르멜에 입회했는데, 이미 이곳에는 그녀의 두 언니도 수녀로 있었다. 9년간의 가르멜 생활은 수많은 다른 젊은 수녀들의 생활과 견주어 볼 때 독특한 것은 거의 없고, 그저 평범한 생활이었다. 일상적인 기도와 일, 자만심에 따른 과오, 극복해야 할 고집스런 성격, 내외적인 시련에 직면하는 것 등등 한 평범한 가르멜 수녀이던 데레사는 이 모든 일을 하느님의 사랑 안에서, 그 사랑을 위하여 ’작은 길’ 을 용감하게 걸어나갔던 것이다. 그녀는 24세의 일기로 많은 고통을 당한 후 선종하였다. 1895년 초, 데레사 수녀는 자신의 어린시절을 회상한 글을 쓰도던 지시를 받았고, 그후에 또 다른 생활 기록을 첨가하였는데, 이것이 저 유명한 ’한 영혼의 이야기’이다. 사실은 이 책이 리지외의 데레사 공경이 급속도로 퍼져 나가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다. 성녀 데레사는 1925년에 시성되었고, 수많은 순례자들이 리지외로 몰려들었다.

 

 

[10월1일]성 레미지오 주교 순교자

성녀 셀리나의 아들인 그는 설교로 명성을 떨치던 459년에 라임스의 주교가 되었다. 이 때의 나이가 22세였는데, 그때부터 그는 70여 년 동안 재직하면서 프랑크족의 개종에 노력하였다. 496년에는 북부 골의 임금 클로비스가 그에 의하여 개종함으로써 북부 지역에 그리스도 교회가 뿌리내리는데 결정적인 영향을 끼쳤다. 그는 열렬한 정통교회 수호자일 뿐만 아니라 아리아파를 몰아내는 데 공헌한 인물이다. 골 역사상 가장 힘찬 주교였던 그는 프랑크인의 사도로 공경받고 있다.

 

 

[10월2일]성 레제르 주교(616-679)

그는 663년에 오텅의 주교로 임명되었는데, 아주 엄격한 주교로 소문났다. 그러나 그는 뜻하지 않는 정치극에 휘말리게 되어 주교좌에서 쫓겨났을 뿐만 아니라, 그의 적들로부터 살해당하였다. 이 때문에 그는 순교자로도 공경받는다.

 

 

[10월3일]성 도미니코 스파다포라, 선교사(+1521)

그는 메시나에서 출생하고, 팔레르모에서 설교회에 입회하였으며, 사제로 서품된 후에는 파두아의 연구소로 파견되어, 이곳에서 학위를 받으면서 몇 년동안 가르쳤다. 그 후 그는 팔레르모로 파견되어 설교하러 다녔는데 큰 성과를 거두게 되자, 이번에는 로마 총본부의 임원으로 활약하게 되었다. 그는 몬테 체리뇨네 근교에 은총의 모후 경당에서 새 사업을 시작하기 위하여 로마를 떠났다. 그는 이곳에서 28년을 살면서 선교여행을 하는 등 수많은 활동을 통하여 구령사업에 전념하여 대성공을 거두었다. 그는 아무런 병도 없이 갑자기 운명하였다. 1521년 12월 21일 저녁 기도 후에 그는 수도원에서 강론하고 또 수도자들에게 강의한 후에 운명하였다.

 

 

[10월3일]성 요세파 로셀로 수도자(1811-1880)

알비솔라 마리나 태생인 그녀는 어려서는 사업과 지도자적인 기질을 보였다. 1837년 그녀는 리구리아의 사보나 주교에게 소녀와 처녀들을 위해 일하려는 소망을 거듭 간구하였다. 결국 허락을 얻고 작게 시작한 단체는 점점 커져 병원과 학교 등을 거느린 ’자비의 모후 수녀회’로 발전하게 되었다. 1875년 첫 수도원이 부에노스 아이레스의 아메리카스에 세워졌다.

 

 

[10월4일]성 베드로니오 볼로냐의, 주교(+445년경)

리용의 성 에우체리오에 의하면, 청년 베드로니오는 리용시의 중요 직책을 맡고 있던 중, 수덕생활을 위하여 세속의 고귀한 신분을 포기하였다. 그후 그는 팔레스티나로 여행했는데, 거기는 크리스천 유물을 수집하기 위하여 많은 세월을 지냈다고 한다. 432년, 그는 볼로냐의 주교로 임명되었는데, 교회 수리 업무를 제1차 목표로 선정하여 성공을 거두었다. 그리고 그는 예루살렘의 여러 성소를 그대로 재현하는 교회 건축에 관심이 많았다.

 

 

[10월4일]성 프란치스코 아씨시의, 원장(1181-1226)

꿈많은 소년

프란치스코는 1l81년 이탈리아의 아씨시에서 부유한 포목상 베드로 벨라도네와 요한나 사이의 맏아들로 태어났다. 처음에는 요한이란 이름으로 세례를 받았으나 그의 부친이 프랑스를 남달리 좋아했기 때문에 그의 이름을 프란치스코(프랑스인)라고 개명한 것이 지금의 이름이다. 프란치스코는 젊은 날을 신명나게 즐기면서 출세를 하고 싶어했고 상인신분에서 기사신분으로의 꿈을 안고 있었다. 그때 아씨시와 페루지아 사이에 전쟁이 터졌고 적에게 잡혀 포로가 된 프란치스코는 늘 영화를 꿈꾸어 오던 과거를 뒤바꾸는 환시를 보았다.

미치광이 프란치스코

그 이후 프란치스코는 마음에 일대 변화가 일어나 훗날 자기의 배필이 될 `가난의 귀부인’과 가까와지고 싶다는 소원을 구체적으로 나타내었다. 어느날 황폐한 성다미아노 성당에서 기도하고 있을 때 제대 위의 그리스도 고상으로부터 `쓰러져 가는 나의 교회를 다시 일으키라’는 말이 들려왔다. 프란치스코는 즉시 그 말씀에 순종하여 아버지의 집으로 부터 값진 포목을 훔쳐내어 그것을 팔아 성당 신부에게 수리비로 써 줄 것을 부탁하였다. 아버지는 그 당시 여행으로 부재중이었으나 돌아와 아들의 미치광이 짓을 보자 화가 머리 끝까지 치밀어 그를 구석방에 가두어 버렸다. 그래도 프란치스코는 뜻을 굽히지 않았으므로 아버지는 유산상속권을 포기시키기 위해 주교 앞으로 끌고갔다. 그러자 프란치스코는 그의 소지품 일체와 의복까지 아버지에게 돌려주며 `지금이 참으로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를 아버지라 하겠습니다’라고 말하는 것이었다. 사람들은 넝마를 걸치고 구걸하는 그를 빙 둘러싸서는 욕설을 퍼붓고 돌멩이를 집어 던졌고, 아이들은 놀려대며 소리 소리 질렀다. "미치광이 프란치스코가 왔다."

모두의 형제 프란치스코

그 후 그의 행적에 감화를 받아 찾아오는 이들이 열 두명에 이르렀으므로 프란치스코는 로마에 가 교황의 수도회설립인가를 청원하였다.교황 인노첸시오 3세는 그들의 너무나 엄격한 생활방식 때문에 인가할 것을 주저하였다. 그러던 어느날 밤 꿈에 프란치스코가 쓰러져 가는 교회를 받치고 있는 모양을 본 교황은 그 회칙을 인준하며 강복하고 일반신자에게 강론할 사명을 그들에게 맡기었다. l2l2년 사순절, 그는 아씨시 대성당에서 설교를 하였다. 대단한 열광을 불러 일으켰고 회심자도 많았다. 그 중에는 글라라라는 아름다운 처녀가 그의 설교에 감동되어 제단 앞에서 값진 옷을 벗고 탐스러운 금발을 잘랐다. 프란치스코는 글라라와 함께 `가난한 부인회’를 창설하였고 모슬렘인들에게 복음을 전하려고 그들을 찾아갈 정도로 선교에 대한 열망에 불타고 있었다. l219년 8월, 프란치스코는 포위되어 있는 도시 이집트의 다미에타에 나타났다. 그는 그 전투를 물리는 것이 불가능함을 깨닫고 전투가 끝나자 사라센 진영에 들어가 술탄인 셀세크 엘카멜의 포로가 되었다. 그는 술탄과 우정어린 이야기를 하였고 서로가 한 형제임을 강조하는 한편 그 또한 모슬렘의 기도에 매우 깊은 인상을 받았다. 마침내 프란치스코는 종파를 넘어 한 형제로서의 우의를 다짐한 채 많은 선물을 안고 십자군의 부대로 돌아왔다.

태양의 찬가

l224년 어느날의 일이었다. 그가 알벨나 산에 들어가 그리스도의 고난을 묵상하고 있을 때, 예수 친히 양손, 양발, 옆구리에다 오상을 박아 주었다. 그것은 큰 은혜임이 틀림없으나 한편 어려운 시련이기도 하였다. 창끝에 찔린 것처럼 생긴 옆구리 상처에서는 쉴새없이 피가 스며나와 속옷과 수도복을 적셨던 것이다. 그런 상혼의 아픔이 더할 나위없이 날카로운데다 심한 안질 때문에 그 고통이 더욱 심했다. 그 후 그는 우골리노 추기경의 권유에 따라 산파비아노 성당 옆의 `숲의 성마리아’라는 곳에 머물렀는데 프란치스코는 죽기 꼭 l년 전인 그곳에서 ’피조물의 찬가’ 또는 `태양의 찬가’라는 노래를 지었다. 프란치스코는 자신이 인간들에게만이 아니라 모든 피조물에게, 짐승들에게도 보내졌음을 알고 있었다. 어느날 참새들이 시끄럽게 지저귀며 주변을 날아 다니자 "나의 형제들이여, 너희 창조주를 많이도 찬미해야 한다. 너희들은 씨도 뿌리지 않고 거두어 들이지만 그 어른은 너희들을 보호하시고 다스리신다" 그때 참새들은 머리를 조아리고 성인의 말을 듣고 있었으며 축복을 받은 후에야 날아갔다. 이 노래에서도 그는 공기와 물, 흙과 불, 바람과 구름, 그 모두에게 자기의 우정을 알리고 있다. 이탈리아 종교시의 첫 기록인 이 노래는 오늘날까지 거듭 번역, 작곡되어 낭송되고 있다.

오 감미로워라 가난한 내 맘에

한 없이 샘솟는 정결한 사랑

오 감미로워라 나 외롭지 않고

온 세상 만물 향기와 빛으로

피조물의 기쁨 찬미하는 여기~

프란치스코는 눈수술이 실패로 돌아가고 여러가지 합병증이 발생하였으나 계속 설교를 하며 다녔다. 그러나 l226년 9월에 이르러서는 최후의 날이 다가 왔음을 깨닫고 형제들에게 시외인 뽈치운꾸라로 옮겨달라고 부탁했다. 죽음이 임박하자 그는 유언장을 남겼다. "서로 사랑하시오. 내가 여러분을 늘 사랑했고 지금도 사랑하는 것과 같이 우리의 거룩한 귀부인 가난을 받드시오.모든 사람들에게 굽히며 가난하고 고통받는 이들을 사랑하시오" l226년 l0월 3일 저녁 하늘의 천사들이 내려와 프란치스코를 마중하여 갔다. 그때에 그의 나이 44세였다. 우리 눈에 보이는 프란치스코는 완전한 해방의 길을 연 인간으로 보인다. 세간을 깜짝 놀라게 한 그의 기행들-돈에 대한 멸시. 나환자와의 입맞춤, 부친과의 결별. 재산의 포기-하나 하나가 지상의 우상과 손을 끊는 계기가 되어 주었다. 온갖 이기주의와 정신적, 신체적 초조감에서 자유로웠기에 프란시스코는 만인의 형제가 될 수 있었고 그러기에 그와 우리는 몇 세기의 세월을 뛰어 넘는 교류를 가질 수 있을 것이다. 아씨시의 프란치스코는 역사상의 모든 시대의 모든 인간의 그리고 우리 각자의 사람인 것이다. 교회는 그의 축일을 l0월 4일로 정하여 지내고 있다.

 

 

[10월5일]성 라이문도 카푸아의, 총장(1330-1399)

라이문도 델레 비네는 이탈리아의 카푸아 출신으로, 볼로냐에서 공부하던 중에 도미니칸이 되었고, 로마의 미네르바 수도원장을 역임하였다. 또한 그는 플로렌스와 시에나의 교수를 역임하던 중, 시에나의 성녀 가타리나를 만났다. 1376년, 그는 그녀의 영적 지도자겸 가까운 친구가 되었고, 그 당시 시에나를 강타한 페스트의 희생자 구호에 헌신하면서, 성녀의 기도를 간청하였다. 가타리나와 더불어 그는 십자군 출정에도 큰 공을 세웠고, 아비뇽에 있던 교황 그레고리오 11세를 설득하여 로마로 귀향케 하였다. 1378년, 교황이 서거하였을 때, 반교황 끌레멘스 7세를 반대하여 우르바노 6세 교황을 지원했는데, 이것이 대이교의 시작이다. 1380년, 가타리나가 귀천한 후에도 그는 이단을 종식시키기 위해 계속 노력했으며, 같은 해에 도미니칸의 총장으로 선출되었다. 그는 성녀 가타리나의 전기와 몬테풀치아노의 성 아녜스 전기 등을 남겼으며, 독일 누렘베르그에서 서거하였다.

 

 

[10월6일]성 니체타스 콘스탄티노블의, 수도자(+838)

그는 황녀 이레네의 집안인 관계로 궁중 관리로 재직하던 중, 787년의 제2차 니체아 공의회 궁중 대표자의 한 사람으로 참석하였다. 이 즈음에 그는 시실리의 지방 장관으로 임명되었으나, 주민들이 폭동을 일으키므로 철수한 뒤, 콘스탄티노블에 있는 크리소니케 수도원에서 수도자로 생활하였다. 그는 그리스도 성상을 가지고 몇몇 수도자와 더불어 수도원을 떠났는데, 그 이유는 레오 5세 황제가 성상 파괴를 재개하였기 때문이었다. 그들은 성상파괴주의자들을 피하여 늘 이곳 저곳으로 피해다니다가, 마침내 파플라고니아의 카티시아에 피난처를 마련하여 여생을 지냈다.

 

 

[10월6일]성 브루노 사제 증거자(1030-1101)

쾰른에서 태어난 그는 1055년 서품받고, 라임스로 가서 신학교수가 되었다. 이때 성직매매로 라임스의 주교가 됐던 마나세스를 탄핵하는 일에 앞장선 그는 사임을 요청하여 이를 이루어냈다. 대주교가 되어달라는 라임스 교구민의 바람을 뒤로한 채 은수자가 되어, 적막한 알프스 산 속에 은수처를 마련하였다. 여기서 기도소와 개인 방을 만들고, 성 베네딕도의 규칙을 엄격히 준수하였다. 이 회가 곧 카르투시오회의 시작이다. 이 회의 회원들은 극도의 가난한 생활을 하기 위하여 노동하고, 기도하며 성서를 쓰는 작업을 하였다. 1090년 브루노의 의사와는 상관없이 교황 우르바노 2세는 성직자들의 개혁을 담당하는 교황 고문관이 되었다. 하지만 얼마 후 교황을 설득하여 다시 은수생활을 할 수 있었다. 이 때 칼라브리아의 라토레에 성 마리아 수도원을 세우고, 운명할 때까지 엄격한 은수생활을 하였다.

 

 

[10월7일]성 마르코 교황(+336)

로마 출신인 그는 로마교회의 성직자로서 봉사하던 중에 교황으로 선출되었는데, 콘스탄티노 대제의 신교 자유 이후 처음으로 뽑힌 교황이다. 그는 새로운 방향으로 교회를 지도하기 보다는 교회의 평화를 위해 진력하였다. 왜냐하면, 박해가 막 종식되었으므로, 또다른 사탄이 침입할 기회를 엿보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재임 8개월 20일만에 서거하였다. 교황 성 다마소가 기술한 성 마르코에 대한 시의 단편이 남아 있는데, 여기서 그의 기도 정신이 언급되어 있다.

 

 

[10월8일]성 데메트리오 순교자

시르미움에서 순교할 당시에 그는 부제였고, 살로니카 지방에서는 그를 위대한 성인으로 공경한다. 그는 막시미안 황제 치하에서 그리스도교를 전하다가 아무런 재판 절차도 없이 처형되었다고 한다. 그런데 그에 대한 전설은 데메트리오가 유명한 전사였다는 쪽으로 변질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이말은 과히 틀리지 않는다고 한다. 왜냐하면, 대부분의 순교자들을 그리스도교의 군사로 묘사되는게 관례였기 때문이다. 서방보다는 동방교회에서 더욱 유명하다.

 

 

[10월8일]성 시메온 통회자(1세기경)

예루살렘에 살던 신앙심이 깊었던 그는 올바르고 경건하게 살았던 인물이다. 또한 이스라엘의 구원을 간절히 기다리던 사람이다. 그는 모세법이 정한대로 아기 예수를 성전에 바치는 광경을 목격하고, 달려와서는 아기를 두 팔에 받아 안고 ’눈크 디미티스’로 알려진 감사의 기도를 바쳤다.(루가2, 25-35)

 

 

[10월9일]성 군터 은수자(+1045)

그는 헝가리의 성 스테파노의 사촌이고, 성 헨리꼬 황제와도 집안간이다. 따라서 그는 덕스러운 친척들의 영향을 많이 받고 자랐지만, 15세 때까지는 야심만만한 귀족이었을 뿐이다. 그러나 성 고타르드의 큰 영향을 받고 자신의 모든 재산을 희사하고는 로마를 순례하였다. 그는 돌아오는 길에 니데랄타크에서 수도자가 되었다. 그러나 그의 회개는 불완전했기 때문인지, 자신의 낮은 신분에 만족하지 못하고 괼딘겐의 원장이 되려고 하였으나 실패하였다. 그 후 그는 온전히 하느님께 신뢰하고 높은 덕을 쌓게 되면서부터 스스로 낮은 신분과 은수 생활을 갈망하게 되었다. 100년, 그는 라링 숲속의 은둔소로 갔으나 그의 명성을 듣고 제자들이 몰려들므로 다시 바바리아의 린크나크로 가서 살았다. 그는 은수생활을 하면서도 문전걸식을 하였고, 남는 것은 가난한 이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그는 90세의 일기로 편한히 숨을 거두었다.

 

 

[10월9일]성 요한 레오나르도 사제(+1609)

이탈리아의 루가 태생인 그는 처음에는 요한 콜롬비니가 세운 수도회에 들어가 사제가 되었다. 병원과 감옥의 사목활동에 힘을 기울였던 그는 많은 후원자와 협력자를 얻게 되었다. 이때 열리고 있던 트렌트 공의회에선 프로테스탄트가 당당하게 활동하였는데, 요한과 그 후원자들은 새로운 교구 사제회 구성을 계획하여 이에 대항하였다. 그리하여 교황 그레고리오 13세로부터 승인을 받은 ’천주의 모친 성직수도회’는 이탈리아에서 프로테스탄트가 발붙이지 못하게 하는데 결정적인 영향을 주었다.

 

 

[10월10일]성 다니엘과 그의 동료 순교자들(+1227)

1220년, 다섯 명의 프란치스코회 선교사들이 모르코에서 순교하므로 하느님께 영광을 드렸다. 그리고 그로부터 6년 후에는 같은 수도회의 수도자 6명이 아프리카로 들어갈 허락을 받고 모하멜 교도들에게 선교하다가 순교하였는데, 그들의 이름은 다음과 같다 : 사무엘, 안젤로, 레오, 돔누스, 니콜라스 그리고 우골리노, 또 스페인으로 가는 선교단에는 다니엘이 있었는데, 그는 이 선교단의 원장이었다. 그런데 다니엘이 이끄는 선교단은 1227년 9월 20일에 모로코에 도착하여, 유럽 상인들이 거주하던 체우타 근교 마을에서 선교활동을 위한 준비를 하고 있었다. 10월 2일 토요일에, 그들은 서로 고백성사를 받고, 서로의 발을 씻기면서, 기도로써 밤을 지내고, 일요일 아침에 체우타로 들어가서, 길거리에 서서 설교하기 시작하였다. 그들의 출현이 소란을 불러일으켰고, 따라서 "카디" 앞에 끌려갔다. 그는 수도자들의 남루한 옷과 헝크러진 머리를 보고는 미쳤다고 판단하였다. 그래서 감옥에 갇혔는데, 무어인들은 그들을 마음대로 놀리고 학대하였다. 다음 일요일, 그들은 자신들이 미친사람이 아니라 선교사라고 항변하자, 그들은 그리스도를 부인하고 모하멜을 믿으라고 강요하면서 갖은 고문을 자행하다가, 체투아의 성벽 밖에서 그들 모두를 참수하였다. 그들의 유해는 후일 스페인으로 모셔졌고, 1516년에 레오 10세께서 이 순교자들의 축일을 거행토록 허락하셨다.

 

 

[10월11일]성 가니스 혹은 켄네스 원장(519-599)

우리들이 알고 있는 것은 모두 불확실한 전설에 기반을 둔 것인데, 그는 아일랜드의 글랜기븐에서 태어났고, 웨일스의 란카판에서 성 카독의 지도아래 수도자가 되었다. 그 후 사제로 서품되어, 로마를 여행한 뒤, 아일랜드의 클로나드에서 성 핀니안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또한 그는 성 키란, 골룸바, 그리고 콤갈과 동행하여 아일랜드 전역을 돌며 설교하였고, 그 후 스코틀랜드로 갔다. 성 골룸바의 절친한 친구이던 그는 이 지역의 성공적인 선교사가 되었다. 아일랜드의 아가보에는 수도원을 지었고, 아마도 킬켄니의 수도원도 그가 지은 것으로 보인다.

 

 

[10월11일]성 타라코 순교자(239-304)

이사우리아의 클라우디오 폴리스에서 태어난 그는 젊어서 로마 군대의 군인이 되었으나 크리스천이 되면서 군복을 벗었다. 62세 때 그는 디오클레시아노와 막시미안의 크리스천 박해 때 체포되었다. 집정관 막시무스 앞에 끌려가 잔인한 고문을 받았지만 신앙을 꺽을 수 없었다. 이에 막시무스는 아나자르부스 교외의 원형 극장에서 야수들의 밥이 되게 하였다. 그러나 야수들이 그를 전혀 헤치지 않자, 검투사들이 칼로써 살해하였다.

 

 

[10월12일]성 에텔브르가 바킹의, 원장(+676)

성 에르콘왈드의 여동생인 그는 웨섹스 바킹의 원장이었다. 성 베다의 기록에 따르면, "그녀는 거룩한 생활 그리고 자기 수하에 있는 사람들에 대한 항구한 사랑 및 수많은 기적으로 뛰어났다" 고 한다. 그녀는 잉글랜드 린드시의 스텔링톤에서 태어나 수녀가 되었으며, 그의 오빠 에르콘왈드 왕이 바킹에 세운 수도원의 원장으로 일생동안 봉헌생활을 하였다.

 

 

[10월13일]성 막달레나 파나씨에리, 동정녀(+1503)

그녀는 트리노-베르첼로세의 조그마한 마을에서 태어났고 또 그곳에서 일생을 살았다. 그녀가 도미니코회 3회원이 된 것은 20세 때였다. 그녀는 위대한 삶을 살았다기 보다, 가난한 사람들과 젊은 이들을 위한 관심 그리고 죄인들의 회개를 위한 기도만 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그녀의 행동은 그 어느 힘찬 설교보다 힘이 있었다. 그녀의 노력에 힘입어, 그곳의 도미니칸들은 더욱 엄격한 규칙을 지키게 되었고, 활기찬 생활로 봉사할 수 있었다. 그녀는 또 예언의 은혜를 받았다. "여러분이 천국에 없다면 나도 천국에서 행복할 수 없습니다." 이 말 한마디가 완덕을 증명하고도 남는다. 그녀가 임종하는 자리에는 시편 30편을 노래하고 있었고, 밖에서는 온주민들이 모여 그녀를 성녀로 공경하며 기도하였다고 한다.

 

 

[10월13일]성 제랄드 오릴락의, 증거자(855-909)

쌩-시르규 출신인 그는 부친을 이어 오베르뉴 오릴락의 백작이 되었고, 넓은 토지의 소유자가 되었다. 하지만 멋대로 처신하는 부유한 귀족 자제가 아니라 정의감과 능력이 탁월했으며 바른 신심도 있었다. 890년 이전까지는 알려지지 않았으나, 오릴락에 수도원을 세우면서 그의 인품이 세상에 펴져나갔다.

 

 

[10월14일]성 갈리스토 1세 교황(+222)

로마의 트라스테베레 태생인 로마인이나, 그는 카르포포루스의 노예로서, 회계일을 맡고 있었는데, 그가 돈을 잃어버리자 도망하였다가, 포르토에서 체포되었다. 이때 그는 중노동형을 선고받았다. 여기서 석방된 후에 그는 또 시나고가에서 싸우다가 다시 체포되어, 이번에는 사르디니아의 광산에서 일하는 중노동형을 받았다. 그는 황제 콤모두스의 아내,마르시아의 요청으로 다른 죄수들과 함께 또 석방되었고, 노예에서도 해방되었다. 199년경에 그는 부제가 되었고, 비아 압피아의 신자 묘지들을 관리하는 책임을 맡았고, 이때 그는 교황 제피리누스의 친구이자 고문관이 되었다. 그는 217년에 제피리누스를 승계하여 교황이 되었으나, 교황직에 가장 유력시되던 히폴리투스의 심한 반발을 받았다. 그들은 교리적으로 또 규율적인 입장에서 교황을 공격하여 쉽사리 분쟁이 사그라질 기미는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불가 몇 년 후 그가 운명하므로써 이 싸움이 끝났다. 4세기경부터 그는 순교자로 공경받았는데, 그 당시에는 박해가 없었지만, 아마도 폭도들에 의하여 살해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10월15일]성 데레사 아빌라의, 창설자 신비가(1515-1582)

스페인 카스틸레의 아빌라에서 성녀 데레사는 알론소 산체스 데 세페다와 그의 두번째 부인 베아트리체 다빌라 이 아우마다의 딸이다. 데레사는 아우구스티노 수녀들로부터 교육을 받았으나 건강이 나쁘다는 이유로 1532년에 아빌라에 있던 수녀원을 떠나야 했다. 오랫동안 수도생활을 갈망해오던 그녀는 1536년에 아빌라에서 가르멜 수녀가 되어, 다음 해에 서약하였으나, 건강상의 이유로 1538년에 수녀원을 떠났다가 1540년에 다시 들어갔다. 그녀는 1555년과 1556년 사이에 환시를 보았고신비스런 음성을 들었는데, 성 베드로 알칸타라의 영적 지도를 받을 때까지는 불안에 떨어야 했다. 성 베드로는 그 모든 환시가 진실한 것임을 그녀에게 확신시켰다. 격렬한 반대를 무릅쓰고, 그녀는 그 당시의 다소 느슨한 수도생활보다 더욱 엄격한 봉쇄 생활을 원하는 수녀들을 위하여 아빌라에 성 요셉 수도원을 세웠다(1562). 1567년, 가르멜의 총장인 루베오 신부는 성 요셉 수도원과 같이 엄격한 규칙을 따르는 다른 수도원을 세울 때, 십자가의 성 요한이란 젊은 수도자를 만났으며, 1568년에는 두루엘로에 남자를 위한 최초의 수도원을 세웠다(이것이 최초의 개혁 가르멜 수도원이다). 그녀는 스페인 전역을 다니면서 가르멜의 개혁을 위하여 노력하였으나, 1575년까지 가르멜 내부의 보수파와 개혁파간의 투쟁은 격심하였다. 이윽고, 그레고리오 13세는 맨발의 개혁파를 독립 관구로 인정하기에 이르렀던 것이다. 데레사는 수많은 편지와 책을 지었는데, 이 모두는 영성 문학의 고전이 되어 널리 읽혀지고 있다."자서전"(1565), "완덕의 길"(1573), "영혼의 성"(1577) 등이 특히 유명하다. 크리스천 역사상 가정 돋보이는 신비가 중의 한 분인 성녀 데레사는 지적이고 빈틈없는 사람이었으며, 매력적이나 깊은 영성을 지녔으므로, 차원높은 관상생활과 더불어 수준 높은 활동생활을 성공적으로 조화시켰던 위대한 성녀이다. 그녀는 스페인의 알바 데 토르메스에서 선종하였고, 교황 그레고리오 15세에 의하여 1622년에 시성되었다. 그리고 1970년에는 교황 바오로 6세에 의하여 교회의 여성으로서는 최초로 교회박사로 선언되었다.

 

 

[10월15일]성 에우티미오(젊은) 원장(824-898)

갈라시오 안크리나에서 태어난 그는 세례후 어린 나이에 결혼하여 딸 아이 하나를 두었다. 842년 가족곁을 떠나 비티니아에 있는 올림푸스 산에 있던 수도원으로 들어간 그는 개명 후 피시디온의 수도원으로 옮겨갔다. 863년 은수자 요셉과 함께 아토스 산의 은수자가 된 그는 살로니카에서 탑 위에 살면서 군중들에게 설교하여 많은 개종자를 얻었다. 그후 다시 아토스 산으로 돌아왔으나, 그를 만나려는 수많은 군중을 피해 조그마한 섬에 들어가야만 했다. 여기서 얼마간 있다가 다시 아토스 산으로 돌아온 그는 요셉이란 동료와 죽을 때까지 함께 살았다. 꿈에 요셉과 행한 약속을 지키기 위해 살로니카로 가서, 그곳의 성 안드레아 수도원을 재건하기도 했다.

 

 

 

 

 

  11 월의 성인

 1일 : 모든 성인의 날, 성 베르뇨 사제 순교자, 성 비고르 주교

 2일 : 위령의 날, 성 빅토리아 주교 순교자, 성녀 에우스토키움 순교자, 성 테오도토 주교

 3일 : 성 마르티노 디 포레스 수도자, 성 후베르토 주교, 성 말라키아 주교, 성 콰르토 증거자, 성녀 실비아

 4일 : 성 가롤로 보로메오 주교, 성 비탈리스와 성녀 아그리콜라 순교자, 성 에메리코 왕자, 성녀 모데스타 동정녀

 5일 : 복녀 김 루치아 순교자, 성 즈카르야와 성녀 엘리사벳 부부, 성 레토 사제, 성 피비시오 주교

 6일 : 성 레오나르도 은수자, 성 펠릭스 순교자, 성 세베로 주교 순교자

 7일 : 성녀 마리아 도미니카 동정녀, 성 엔젤베르토 주교, 성 월리브르토 주교, 성 헤르클라노 주교 순교자, 성 플로렌시오 주교

 8일 : 성 고데프리도 주교, 성 월레하도 주교, 성 클라도 사제

 9일 : 라테라노 대성전 축성, 성 테오도로 순교자, 성 오레스테스 순교자, 성 우루시노 주교, 성녀 에우스톨리아와 성녀 소파트라 동정녀

10일 : 성 레오 대교황 학자, 성 안드레아 아벨리니 증거자, 성 트리폰, 성녀 레스피치오와 성녀 님파 순교자, 성녀 트리펜나와 성녀 트리포다

11일 : 성 마르티노 주교, 성 멘나스 순교자, 성 베라노 주교, 성 아테노도로 순교자

12일 : 성 요사팟 주교 순교자, 성 구니베르토 주교, 성 닐로 원장

13일 : 성 스타니슬라오 코스카 증거자, 성 디다코 증거자, 성 브리시오, 성 호모보노 증거자, 성 퀸티아노 주교

14일 : 성 세라피온 순교자, 성 히파시오 주교 순교자, 성녀 베네란다 동정 순교자

15일 : 성 알레르토 주교 학자, 성 레오폴도 증거자, 성 루패리오 주교, 성 마쿠토 주교

16일 : 스코틀랜드의 성녀 마르가리타, 성녀 젤투르다 동정녀, 성 에드몬드 대주교, 성 아우케리오 주교

17일 : 헝가리의 성녀 엘리사벳 수절 성녀, 성 그레고리오 영적자, 성 아니아노 주교

18일 : 성 베드로 대성전과 성 바울로 대성전 축성, 성 프릭디시오 주교, 성 로마노와 성 바룰라 순교자

19일 : 성 폰시아노 교황 순교자, 성 압디다 예언자, 성 바를라암 순교자

20일 : 성 펠릭스 순교자, 성 에드문도왕 순교자, 성 베니뇨 주교, 성 아가피오 순교자

21일 : 성모자현 축일, 성 젤라시오 교황, 성 루포 증거자

22일 : 성녀 체칠리아 동정 순교자, 성 프락마시오 주교, 성 필레몬과 성 아피아 순교자

23일 : 성 클레멘스 1세 교황, 성 골롬바노 원장, 성 투루도 사제, 성녀 펠리치타 과부, 성녀 르클레시아 동정 순교자

24일 : 성 크리소고노 순교자, 성녀 피르미나 동정 순교자

25일 : 성녀 가타리나 동정 순교자, 성 메르쿠리오 순교자

26일 : 성 레오나르도 증거자, 성 실베스텔 원장, 성 콘라도 주교, 성 시리치오 교황

27일 : 복녀 유 체칠리아 순교자, 성 야고보 순교자, 성 비르질리오 주교, 성 바를라암과 성 요사팟 순교자

28일 : 성 아고보 증거자, 성 그레고리오 3세 교황

29일 : 성 시투르니오 주교 순교자, 성 필로메노 순교자, 성녀 일루미나타 동정녀

30일 : 성 안드레와 사도, 성 소시모 증거자, 성녀 마우라와 성녀 유스티나 동정 순교자

 

 

 

 

[11/1]성 베니뇨 사제 순교자(2세기경)

이 성인의 공경은 다죵의 옛 무덤을 발견한 6세기 초부터 시작되었다. 그러므로 성 베니뇨의 고난은 이 때부터 밝혀지기 시작했는데, 그는 이탈리아에서 태어나  리용에서 선교사로 활동하다가, 디죵 근교인 에파리에서 순교하였다고 전해 온다.

 

 

[11/1]성 비고르 주교(+537)

 아르토와에서 태어난 비고르는 아라스에서 성 베다스트로부터  교육을 받았다. 그러나 비고르는 사제가 될 결심이었지만 아버지의 분노가 무서워 바이외의 라비에르 계곡으로 도망을 갔다. 여기서 주민들에게 설교와 교육을 실시하던 중에 사제가 되었다. 513년 바이외의 주교가 된 그는 주민들이 언덕위에 거대한 신상 앞에서 예배드린다는 사실을 알고, 그것을 무너뜨리고 그 자리에 성당을 세웠다. 그후 그 도시는 그를 기념하여 생-비괴르-르그랑이라 부른다.

 

 

[11/2]성 빅토리아 주교 순교자(+303)

 성 예로니모에 의하면, 빅토리아는 그레시아  사람으로 수사학자였다. 그후 그는  판노니아 상류 지방의 펫토우 주교가 되었으며 신구약 몇권에 대한  주석서를 썼는데, 예로니모 성인은 이 책을 많이 인용했다고 한다. 그는 디오클레시아의 크리스천 박해 때에 순교했고 또 포와티에르의 초대 주교가 되었다.

 

 

[11/3]성 마르티노와 포레스 수도자(1579-1639)

 그는 페루의 리마에서 태어난 스페인계  기사인 요한 디 포레스의  아들이다. 15세 때 도미니코 재속 3회원으로 수도복을 입고 다시 리마의 도미니칸닌 로사리아 수도원에 정식 입회하여 평수사가 되었다. 주로 이발사, 외과의사, 의류수선, 진료소 등에서 직책을 담당했으며 많은 초자연적 은혜를 받았다. 1962년 시성되었고 사회 정의의 수호성인이 되었다.

 

 

[11/3]성 후베르토 주교(+727)

 헤리스탈의 페핀 왕을 섬기던 신하였고 아내까지 있었는데 사별후 수도생활을 시작하였다. 그는 마아스트릭트 주교인 성 람베르토의 지도를 받아 사제가 되었고, 람베르토가 705년경에 라에쥬에서 살해당하였을 때 그 분을 이어 주교가 되었다.

 그는 주교좌를 리에쥬로 옮겼는데, 그  주요 이유는 성 람베르토를  위한 성당을 짓고 기념하기 위해서 였다. 그는 교구 내에 우상숭배를 퇴치하고 수많은 회개자를 얻은 것으로 유명하다.

 

 

[11/3]성 말라키아 주교(+1145)

 말라키아는 어느 교사의 아들로서 아일랜드 아르마그에서  태어나 성장하였는데, 부모가 돌아가신 뒤 그는 은수자이던 에마르의 제자가 되었다. 그리고 22세 때 성 첼소로부터 사제로 서품되었다. 1125년에 콘노르의 주교가 되어 즉시 교구민들에게 신앙심을 일깨우는 운동을 펼쳤다. 아일랜드 최초의 시토 수도원을 세운 그는 클레르보에서 병을 얻어 성 베르나르도의 품에 안겨 운명하였다.

 

 

[11/4]성 가롤로 보르메오 주교(1538-1584)

 질베르로 보로메오 백작와 교황 비오 4세의 동생 마르가리타 메디치 사이에 태어난 가로로 보르메오는 1538년 이탈리아의 마죠레 호수 근처의 아로나 가족성에서 자랐다. 59년 박사학위를 취득한 그는 비오 교황의 외교 사적로서 특별한 임무를 수행하였다. 주교가 된 후 개혁운동의 일환으로 성직자와 평신도의 윤리와 생활태도 개선을 위하여 유익한 기준을  마련하였으며 성직자 교육을 위한 신학교 설립, 어린이들의 종교 교육을 위한 크리스천 교리회 설립 등 많은 일을 하였다.

 그는 가톨릭 개혁운동의 기수글 가운데 한 사람이며 학문과 예술의 수호자였다. 큰 권력을 휘두르는 위치에 잇었지만 항상 겸손하게  처신하였고 개혁의 반대자들로부터도 칭송을  받을 정도였다.

 

 

[11/4]성 비탈리스와 아그리콜라 순교자(연대미상)

 두 순교자는 볼로냐의 유대인 묘지에 안장되어 있다가 이양할 때 밀라노의  성 암브로시오가 참석하여 성 비탈리스와 성녀 아그리콜라의 순교 행적을 설명하고 있다. 성녀 아그리콜라는 원래 볼로냐 사람으로 덕행이 뛰어난 명문가의 자녀였고 비탈리스는 그의 종이었다. 비탈리스는 아그리콜라의 표양을 본받고자  개종했으며 십자가형으로 순교하였다고 볼로냐의 주교 에우세비오는 전하고 있다.

 

 

[11/4]성 에메리코 왕자(+1007)

 헝가리의 국왕인 성 스테파노가 자신의 후계자 자리를 외아들인 에메리코에게 물려주려 하였다. 부친은 그의 열렬한 신심과 더불어 다음의 왕으로서  지녀야 할 인격을 가르쳤다. 그러나 사냥하던 도중 피살되어 스제케스페르발이라는 곳에 묻혔는데 이곳에서 수많은 기적이 일어났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는 1083년 그의 부친과 함께 시성되었다.

 

 

[11/6]성 레오나르드 은수자(+6세기)

 서유럽에서 널리 알려진 성인이지만 그의 생애가 기록되어 남은 것은 거의 없는 실정이다. 그는 프랑크 귀족으로서 성 레미지오에 의해 개종하였으며 국왕 클로비스 1세의 대부였다고 한다. 리모쥬에서 조그마한 움막을 짓고 은수생활을  한 그는 어느날 클로비스 국왕이  사냥을 왔다가 여왕이 죽을 곤경에 빠졌을 때 그의 기도로 인하여 여왕이 목숨을 건지자 왕은 감사의 표시로 많은 땅을 주었다. 그는 이곳에 노블락 수도원을 세웠으며 이때부터 인극 마을을 두루 다니며 복음을 선포하였다.

 

 

[11/7]성 헤르클라노 주교 순교자(+547)

 고트족들이 페루시아를 7년 동안 점령하고 있을 때 이곳의 주교인  헤르클라노를 가장 야만적인 방법 즉 살가죽을 벗기고 참수하는 형벌로 무참하게  죽였다. 신자들이 재빨리 그의 머리만을 수습하여 장사를 지낸 뒤 40여 일 후에 성 베드로 성당으로 이장하여 순교자로 공경했다.

 

 

[11/7]성 플로렌시오 주교(+7세기)

 아일랜드 출신인 그는 알사스 지방의 사도로 공경받고 있다. 린겔 베르그 계곡에서 은수자로 인근 부락에 복음을 전하였고 농아였던 다고베르트의 딸을 기적적으로 치유함으로써 그의 선교 활동은 크게 성공했다. 국왕은 하스락 교외에 수도원을 지어 주었고 678년경에 주교로 서품되었다. 많은 사람들이 그에게 몰려와 매우 효과적인 하느님의 말씀을 선포할 수 있었다고 한다.

 

 

[11/9]성 테오도로 순교자(연대미상)

 성 테오도로 티로는 ’신병’이란 별명이  있었던 것으로 보아 로마 군인이었음이  확실하다. 그는 아나세아에서 이교신을 공경하는 예식에 참석을 거부함으로써  고문을 받고 투옥되었다. 그는 옥중에서 천상의 환시를 보고 즐겨 날뛰던 중 용광로에 던져지는 형벌을 받고 순교하였다.

 

 

[11/10]성 레오 대교황 학자(+461)

 440년에 교황에 오른 그는 황제나 교회간의 알력을 비롯하여  마니교도, 라리마니즘, 프리쉴리아니즘 그리고 네스토리마니즘에 강력히 대처하는 등 수많은 난관을 무난히 극복하였다. 451년에는 칼체돈 공의회를 소집하여 천주 강생의  교리를 분명히 하는 서한을  보냈다. 또한 마프리카에도 선교사를 파견하는 등 교황으로서 놀라운 업적을 남겼다. 그는 교황권을 확립하는데 크게 기여하였고 성좌의 권위를 하느님과 성서적인 명령이기 때문에 속권보다 우월하다는  신념을 굳게 확립한 위대한 교황이다. 한마디로 그의  재임 기간은 교황권 확립의 시기였다.  1754년에 교회박사로 선언되기도 했다.

 

 

[11/10]성 안드레아 아벨리니 증거자(1521-1608)

 이탈리아 가스트로누오브 태생인 아벨리노는 로렌조에서 세례를  받고, 나폴리에서 민법과 교회법을 수학하였으며 박사 학위를 받고 사제로  서품되었다. 또한 나폴리의 테아친회에 입회하면서 이름을 안드레아로 개명하였다. 그는 나폴리 수도원의  장상이 되었고 사제들의 품위향상에 노력하였다. 그에게는 많은 기적이 일어났는데 특히 그의  시신에서 흐른 피는 성 야누아리오와 같이 치솟았다고 기록되어 있다. 1570년에는 성 카를로 보로메오의 요청에 따라 롬바르디로 갔으며 밀라노와  피아첸자에 수도원을 세웠고 이 지역의 수도원 개혁에 앞장섰다.

 

 

[11/11]성 마르티노 주교(316-397)

 판노니아(헝가리)의 사바리아 태생인 그는 외교인 장교의 아들로 태어났다. 아미앙에서 지내던 337년 어느 추운  겨울 날, 어느 걸인에게 마또를  반으로 잘라 덮어준 잊을 수 없는 사건이 생겼다. 이때 그는 크리스천으로 개종하였다. 그는 포와타에르의  주교인 성 힐라리오로부터 도움을 받아 리커레에서 은수자가 되었다.  이후 다른 은수자들이 그에게 몰려옴으로 공동체가 커져 이 지방의 첫 수도 공동체가 되기도 했다. 자신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투르의 주교로 임명되었으나 개인생활을 은수자 생활을 유지했다. 이교 신전의 파괴와 개종을 불러 일으켰고 계시와  환시로 유명하여 예언자의 은혜까지 받았다. 그는 곧 지방의 최고 성인이며 성 베네딕토 이전에 서방 수도원 제도를  개척한 탁월한 지도자였다. 지금의 그의 경당은 유럽의 주요 순례지가 되었으며 프랑스의 수호성인 중에 한 분으로 공경받고 있다.

 

 

[11/12]성 요사팟 주교 순교자(1580-1623)

 폴란드 볼리비아의 블라드미르에서 태어난 요사팟은 1604년 성 바실리오의 우크라이니아회에 들어가 수도자가 되었고 1609년에 사제로 서품되었다. 그  즉시 설교를 잘 하는 신부로 유명해졌으며 우크라이나 교회와 로마간의 일치를 위한 지도력을 발휘하여 큰 성공을 거두었다. 1617년에는 러시아의 비텝스크의 주교로 임명되었다가 다시 폴롯스크의 대주교가 된 요사팟은 혼란하던 교구를 바로잡기 시작하였으며 로마와의 반목, 기혼사제, 느슨한  규칙, 폐허화된 성당 등을 고치는데 박차를 가하였다.

 이즈음에 뜻을 달리하던 주교들이 요사팟은 실제로 라틴 사제이며 로마 가톨릭  사제인 그가 러시아 민중에게 맞지 않는다고 대립  주교를 내세웠다. 이리하여 극도의 혼란상에  빠졌는데, 그는 온갖 위험을 무릅쓰고 비텝스크로 사목방문을 하던  중에 살해되어 다비니강에 수장되었다. 그는 첫 번째 동방교회 성인으로서 1867년에 시성되었다.

 

 

[11/12]성 닐로 원장(+430)

 콘스탄티노블에서 지방장관직을 맡고 있던 닐로는  성 요한 크리소스의 제자가 되어  큰 파문을 일으켰다. 그는 두 자녀를 둔 기혼자였으나 그의  아들 테둘루스와 함께 시나이산의 수도자가 되었는데, 아내도 이 세속을 떠나기로 결심하였다고 한다.  아랍인들이 수도원을 공경했을 때, 테오둘루스가 납치되어 직접 아들을 구하러  간 것은 그 당시에 유명한  일화가 되었다. 그후 부자는 둘다 사제로 서품되었다. 닐로는 특히 신학적인 저술과 수덕신비신학 등의 저자로 명성을 날렸고 수많은 편지를 남겼다.

 

 

[11/13]성 디다코 증거자(1400-1463)

 스페인 세빌레 근교에서 태어난  디다코는 한때 은수자로 고적한  삶을 살다가, 프란치스코회의 평수사로 입회하였다. 그는 칸나리 섬으로 파견되어, 수도원  문지기 수사로 일했는데, 가난한 사람들에 대한 뛰어난 사랑으로 큰 일을 이룩하여  성덕이 탁월하다는 소문이 자자하였다. 그는 여생동안 스페인의 각 수도원을 다니며 하찮은 일을 하면서 지냈다. 하지만 그는 높은 성덕을 프란치스코회뿐만 아니라 온 교회를 비추었던 것이다.

 

 

[11/13]성 호모보노 증거자(+1197)

 롬바르디의 크레모나에서 어느 상인의 아들로  태어난 그는 부친의 사업을 도와  더욱 번창하게 하였다. 사업에서 버는 이익금을 대부분 빈민구제에  사용하였고 가족들에게는 꼭 필요한 것만을 제공하였다. 그러나 이런 그를 가족들부터 적극적인 호응을 받기가 쉽지 않았다.  매일 아침 저녁으로 성당에 나갔으며 정직하고 올바른 생활을 잊지  않았다. 그의 사업은 날러 번창하였고 따라서 자선사업도 빛을 발하게 되어 유명해졌다. 그는  크레모나의 성 질스 성당에서 미사 참례하던 중에 운명하였고 1199년에 시성되었다. 그는 양복공과  천 짜는 사람들의 수호성인으로 공경받고 있다.

 

 

[11/13]성 브리시오 주교(+444)

 브리시오는 투르의 성 마르티노 성직회의 일원으로서  397년에 투르의 주교직을 승계한 분이다. 자만심이 강하고 야심이 가득한 그는 주교로 있으면서 자신의 임무을 소홀이하여, 수차례에 걸쳐 그의 부도덕성과 방종으로 고발되다가 결국 자신의 주교직에서 물려나냐만 했다. 그는 로마로 가서 7년에 걸쳐 회개생활을 하였으며  완전히 자신의 생활양식을 바꾸어  새 사람이 되었다. 다시 뚜르의 주교가 되어 아주 겸손하고 거룩하게 교구를 다스렸으며 임종시에는  위대한 성인으로 교구민들의 숭배가 끊이지 않았다.

 

 

  

 

12 월의 성인

 1일 : 에리지오 주교, 나탈리아 과부, 올림피아도 순교, 우르시치오 주교

 2일 : 비비아나 동정 순교, 논노 주교

 3일 : 프란치스코 사베리오 사제, 클라우디오와 힐라리아 부부 순교, 카시아노 순교

 4일 : 요한 다마스체노 사제 학자, 오스문도 주교, 안노 주교, 바르바라 동정녀

 5일 : 크리스피나 순교, 사바 원장, 리노 순교

 6일 : 니콜라오 주교, 아셀라 동정녀, 디오니시아 순교, 떼르시오 순교, 에밀리아노 순교

 7일 : 암브로시오 주교 학자, 아가토 순교, 세르보 순교, 파라 동정녀

 8일 : 성모의 원죄 없으신 잉태, 에우티키아노 교황, 에우카리오 주교, 소프로니오 주교

 9일 : 베드로 푸리에 증거자, 레오카디아 동정녀, 레스티투토 순교, 발레리아 동정녀

10일 : 고르고니아 과부, 에울랄리아 동정녀, 율리아 동정녀, 제멜로 순교

11일 : 다마소 1세 교황, 트라손 순교, 사비노 주교, 바르사바 순교

12일 : 요안나 샹탈 수절수녀, 시네시오 순교, 에파마코와 알렉산델 순교

13일 : 루시아 동정녀, 아우트베르토 주교, 오틸리아 동정녀

14일 : 십자가의 요한 사제 학자, 니카시오 주교, 에우트로피아 순교, 스피리디온 주교

15일 : 성 발레리아노 주교 순교자, 성 막시미노 증거자, 성녀 크리스티아나 동정녀

16일 : 성 에우세비오 주교 학자, 성녀 알비나 동정 순교자, 성 아나니아, 아자리아, 미사엘 소년들

17일 : 성 라자로 주교, 성 스투르미오 원장, 성녀 위비나 동정녀, 성녀 올림피아 과부

18일 : 성 그라시아노 주교, 성 루포와 성 소시모 순교자, 성 아욱센시오 주교

19일 : 성 디모테오 부제, 성녀 메우리스와 성녀 테아 순교자, 성녀 파우스타, 성 아듀토 원장

20일 : 성 율리오 순교자, 성 필로고니오 주교

21일 : 성 베드로 가니시오 사제 학자, 성 테미스로클레스 순교자, 성 글리세리오 사제 순교자

22일 : 설 플라비아노, 성 이스키리온 순교자

23일 : 성녀 빅토리아 동정 순교자, 성 세르불로 걸인, 성 미그도니오와 성 마르도니오

24일 : 성녀 아나스타시아 과부 순교자, 성 에우티미오 순교자, 성녀 타르실라 동정녀, 성녀 이르미나 동정녀, 성 델피노 주교

25일 : 예수 성탄, 성녀 아나스타시아와 에우제니아 동정 순교자

26일 : 성 스테파노 첫 순교자, 성 마리노 순교자, 성 디오니시오 교황

27일 : 성 요한 사도 복음사가, 성녀 니카레타 동정녀, 성 테오도로 순교자, 성 테오파네스 주교

28일 : 무죄한 어린이들의 순교, 성녀 돔나, 성녀 아가페, 성녀 테오필라 동정 순교자

29일 : 토마스 주교 순교자, 다윗왕 예언자, 트로피모 주교, 크레센시오

30일 : 사비노 주교 순교자, 아니시아 순교자, 라이네리오 주교

31일 : 실베스트로 1세 교황, 멜라니아 과부, 골룸바 동정 순교자, 바르바시아노 사제

 

 

 

 

[12/1]성 엘리지오 주교(588-660)

 엘로이로 더 잘 알려진 그는  금속 세공인의 아들로 골의  샵텔에서 태어났다. 리모쥬의 조폐국 책임자인 압보에게 도제 수업을 받은 그는 국왕 클로테르 1세의 조폐국 책임자가 되었다.

 엘리지오는 그 분야의 최고 전문가로서 이름을 떨쳤으며 국왕의 절친한 친구가 되기도 했다. 그의 신심과 끊임없는 설득에 의하여 국왕은 가난한 이에게 선정을  베풀었으며 노예들의 보석금을 대신 납부하였고, 또 여러 교회를 세웠다.

 632년에 솔리냑에 수도원을 세운 그는 클로테르의 아들 도고베르트 1세의 도움으로 파리에 수도원까지 세우는 등 참으로 놀라운 일을 성취하였다. 국왕의 고문으로 브리톤으로 가는 외교사절이 되어 브리톤 국왕을 설득하여 프랑크 왕의 권위를 인정하게끔 하는 큰 공을 세웠다. 640년에 서품되어 노이용의 주교가 되었다가 투르내의 주교로도 활약한  그는 플란데르인들에게 복음을 전하던 중에 안터워프 지역에서 수많은 개종자를 얻었다. 그는 금속 세공인, 금 세공인의 수호성인이다.

 

 

[12/1]성녀 나탈리아 주교(+304년경)

 나탈리아의 남편인 아드리아노는 니코메디아의 궁중 관리였는데 신자들의 인내심과 열렬한 믿음에 감동하여 비록 자신은 세례를 받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그리스도교인이라고 공적으로 선언하였다.

 그로인해 아드리아노는 즉시 체포되어 감옥에  갇혔는데 나탈리아는 옥중의 남편을  찾아다니며 계속해서 신앙심을 일깨워주었다. 남편은 사형 언도를 받고 방문이 금지되어도 나탈리아는  소년 복장으로 위장하고, 관리를 매수하여 남편의 온갖 고통을 위로하고 신심을 굳게해 주었다. 남편이 죽고 난 이후 나탈리아는 강제결혼을 강요한 니코메디아의 어느 궁중 관리의 손아귀에서 벗어나 콘스탄티노블로 피신하여 여생을 지냈다.

 

 

[12/2]성녀 비비아나 동정 순교자(4세기)

 5세기 때로마의 성녀 비비아나 성당이  세워졌고, 그녀에 대한 공경이 보편화  되었으나, 생애는 별로 알려진 바 없다.

 전설에 의하면 그녀는 배교자 율리아의 박해 때 신앙 때문에 고문을 받고 추방당한  전 지사 플라비안의 딸이었는데, 플라비안과 아내 다프로사가 참수당하고 비비아나는 모든 재산을 빼앗겼다가 이후 비비아나도 체포되어 매를 맞아 죽었다고 전한다.

 

 

[12/3]성 프란치스코 사베리오 사제(1506-1552)

 스페인의 바스크 지방의 사비엘 가족 성에서 태어난 그는 파리 대학을 나와 1528년 학위를 받았다. 그 대학에서 예수회의 창설자인 이냐시오 로욜라를 만나 창설회원이 되었고, 1534년에 몽마르트르에서 첫서원을 받았다. 1537년 베니스에서 서품을 받은 그는 그 다음해에 로마에 파견되었고  1540년에는 예수회원으로서 첫 번째 선교사가 되어 동인도로 파견되었다.

 교황으로부터 인도의 교황 대사 자격을 받은 그는 병자와 죄수들을 찾아보는  일과 어린이의 신앙 교육 및 그곳 포르투칼인들의 비도덕성을 바로잡는 일부터 착수하였다. 그후 케이프 코모린, 말리카, 몰루카스, 모로타이 들을 비롯하여 일본까지 왕래하며 수천명의 개종자를 얻었다. 그는 인도의 관구장이 된 후 중국을 들어갈 계획을 세우고 가던중 상치안 섬에서 운명하고 말았다.

 흔히 그를 사도 바오로에 버금가는  위대한 선교사로 부른다. 그는  수많은 위험과 역경을 딛고 상상할 수 없는 거리와 지역을 여행하였으며  그 자신이 개종시킨 교우수만 하더라도  10만 명에 이를 것으로 추정된다. ’인도의 사도’, ’일본의 사도’라고 불리는  그는 1622년에 시성되었고 비오  10세에 의하여 외국 선교의 수호성인으로 선포되었다.

 

 

[12/3]성 클라우디아와 성녀 힐라리아 부부 순교자(연대미상)

 로마 순교록에는 호민관 클라우디아와 그의 아내 힐라리아 그리고 아들의  순교사실이 기록되어 있다. 자세한 기록은 아니지만, 황제 수메리안은 클라우디아에게 큰 돌을 목에 걸게 하고 강에 집어 넣었고 그의 아들들은 사형  언도를 내렸다. 그러나 아내 아들들의  장례를 치른 뒤에 그들의 무덤에서 기도하며 지내던 중에 체포되어 주님 품에 안겼다.

 

 

[12/4]성 요한 다마스체스 사제 학자(+749년경)

 다마스커스의 성 요한은 희랍 교부로서 크리스천-아리스토텔레스 학풍을 개척한 분이다. 690년경에 태어난 다마스체스는 고스마란 훌륭한 스승아래 신학을 공부하였다. 궁중에서 일하는 부친의 국고관리자를 계승받았디만 몇 년동안 수행하다 사임하고 고스마와 함께 예루살렘 근교의 마르사바의 라우라로 가서 수도자가 되고자 하였다.

 그러나 라우라의 분위기는 그들을 좋게 보지 않았다. 어려운 상황을 극복한 요한과 고스마는 책을 저술하거나 찬미가를 짓는 등의 일을 하면서  이곳에 청착하였다. 장상과 다른 수도자들의 냉대와 질시 속에서도 그는 참으로 겸손하고 지혜롭게 처신한 결과 성모님의 환시를 보기도 했다. 이 때 예루살렘의 총주교 요한  5세는 그들의 명성을 익히 알고  있는 터이므로, 먼저 고스마를 마후마의 주교로 축성하고 요한은 사제로 서품되었다.

 이후 수도원으로 돌아와 여러 책들을 지었는데 이 책들은 여러 지방에까지 퍼져 읽혀졌다. 1890년 교회박사로 선언된 그는 성 사바 수도원에서 위대한 신학자요 시인으로서의 삶을 살기를 바랬다.

 

 

[12/4]성 오스문도 주교(+1199)

 세에르의 백작 헨리와 정복자 월리암의 동생 이사벨라의 아들로 태어난 그는 잉글랜드로 건너가 수사을 역임하였으며 1078년에는 살리스버리의 주교가 되었다. 그는 이 곳에 대성당을 비롯 성직자 회의와 각종 학교를 설립하였다. 또한 그는 미사, 성무일도, 성사집행과 관련되는 새로운 전례서를  만들었는데, 이것은 다음  세기에서 잉글랜드와 아일랜드

그리고 웰스 지방에 보편적으로 사용되었다. 1457년에 시성된 오스문도 성인은 대성당 도서관을 위해 원고 수집을 실시하기도  했으며 성 안델모의 전기도 적은 분이다.

 

 

[12/4]성 안노(+1075)

 스바비아 귀족의 아들로 태어난 안노는 밤베르크의 주교좌  학교에서 수학하여, 결국에는 그 학교의 교장이 되었다. 아노는 학문과  웅변에 뛰어났으며 좋은 안목을 지녔으며  예모도 올바랐다. 그리하여 헨리 3세의 주목을 끌어 1056년 황제의 고해 신부가 되었으며 그후 쾰른의 대주교가 이어 제국의 수상직에까지 올랐다. 만년에  그는 자신이 세운 시그부르크  수도원에서 엄격한 회개 생활을 하다가 1075년 12월 4일 운명하였다.

 도덕적으로 차락이 극심하던 시대에 안노는 조금도 흐트러지지 않고 오히려 모범적이며 다른 사람들의 척도로서 자신의 잘 지켰다. 그리하여 수많은  성인 중에서 자신의 사생활을 가장 성스럽게 살은 사람으로 꼽힌다.

 

 

[12/4]성녀 바르바라 순교자

 그녀는 디오스쿠루스의 딸로서 뒤어난 미모를 지녔으며 그이 부친은 수많은 청혼자들의 기를 꺽기 위하여 그녀를 탑 속에 가두었다. 어느날 부친은 그녀가 크리스천이 된 것을 발견하자, 그녀를 죽이려고 덤벼들었으나 아버지의 분노를 피하여 가적적으로 도망치는데 성공하였다.

 그러나 곧 다시 붙잡혀 붙잡혀 재판관 앞에 끌려가서 고문을 당하였다. 이러한 벌로도 만족하지 못한 그녀의 부친은 그녀를 산으로 끌고가서 죽이라고 하였기 때문에 그녀는 끝내 죽음을 당하였다.

 중세 시대에 가장 인기있던 성인들 중의 한 분인 동정 바르바라는 안티오키아, 헬리오폴리스, 니코메디아 등 그 순교지가 서로 엇갈리고 있다. 바르바라 성녀는 건축가와 건축업자의 수호성인이다.

 

 

[12/5]성 사바 원장(439-532)

 체사레아의 카파도치아 교외 무탈라스카에서 어느 장교의 아들로 태어난 사바는  고향에서 가까운 어느 수도원에 생활하였다. 456년 그는 예루살렘으로 가서 성 테옥티스토의 지도를 받으며 수도생활을 하다가 30세 때에 성 에우티비오의 제자가 되어 은수생활을 시작하였다. 스승인 에우티비아가 죽자 그는 예리고와 가까운 사막에서 혼자서 4년 동안 지냈는데, 이때부터 제자들이 모여들기 시작하여 483년에 일종의 수도공동체인 ’라우라’를 형성하였다. 150명이나 되는 제자들의 요구 때문에 그는 하는 수 없이 사제가 되었는데  몰려드는 제자들을 위해 팔레스티나 지방의 은수자와 독수자의 지도자로 임명되었다.

 그는 병에 걸리지 않을 정도로만 음식물을 섭취했을 뿐아니라 사막의 정통교리수호를 위해 헌신하였다. 531년에는 91세의  고령인데도 콘스탄티노블로 가서  사마리아인들의 봉기에서 주민들을 보호하려는 운동을 전개할 만큼 현실적인 문제에도 관심을 가진 은수자였다.

 

 

[12/6]성 니콜라오 주교

 소아시아 리치아의 파타라에서 태어난 그는 매우 유복하게  살았다. 돈많은 양친이 사망하자 죄인들의 회개를 위하여 헌신함과 동시에 자신의 막대한 유산을 가난한  사람들과 자선활동을 위하여 사용하기 시작했다. 미라의 주교 때부터 그의 성덕과 신심, 그리고 기적이 유명하게 되었으며 전 서방에까지 골고루 퍼져나갔다.

 1087년에는 그의 유해를 바리로 이전하여 경당을 세우니, 유럽 최대의  순례지가 되기도 하였다. 그는 리치아 연안의 뱃사람들을 있으며 죄수들과 어린이들의 선물을 주는  관습이 있는데 니콜라노라 말은 네덜란드어로 ’산타클로스’란 말이다.

 

 

[12/6]성녀 디오니시아 순교자(+484)

 484년 아리안 왕 후데릭은 아프리카에서  가톨릭 주교들을 추방시키며 정통  크리스천들에 대한 박해를 시작하였다. 이 당시에 수많은 신자들이 순교하였다. 디오니시아는  아름답고 열심한 부인으로 소문나 있던 신자인데, 그녀의 몸에  유혈이 낭자할 정도로 심한 매를 맞았다.  이것을 보고 있던 아들이 겁을 먹자 용기를 불어넣어 당당하게 신앙을 고백하게도 하였다.

 성녀 디오니시아의 동생 디티바, 의사  레온시아 등 이때 순교한  수많은 분들이 로나 순교록에 기록되어 있고, 모두 순교자로 공경받고 있다.

 

 

[12/7]성 암브로시오 주교 학자(340-397)

 골의 근위대장 암브로시오의 아들로서, 독일 트리엘에서 태어  그는 그의 부친이 사망하자 어린 나이로 로마로 돌아왔다. 그는 연설과 학력을 겸비한 법률가가 되었다. 374년 밀라노의 주교가 된 그는  정치에 개입하여 여러가지 일을 해냈다.  주교가 된 이후 그는 자신의 모든 재산을 포기하고 신학, 성서 등을 연구하였으며 엄격한 신앙 생활을 실천하였다. 오래지 않아 당대의 유명한 설교자가 되었고 아리우스를 반대하는 서방 교회의 가장 영량력있는 지도자가 되었다.

 암브로시오는 초기 교회의 가장 위대한 인물 중에 한 분이며 로마 제국이 쇠퇴하가던 서방 세계에서 그리스도교회의 부흥을 새로운 단계로 돌입시킨 분이시다. 또한 세속의 권위에 대항하여 교회의 독립과  자주성을 옹호했던 그는 성서, 신학,  신비철학 등 설교를 중심으로 설파한 그의 지식 또한 괄목할만 하다 그가 아우구스티노를 이끌어 가톨릭 신앙을 고백토록 하여 387년에 세례를 주기도 했다. 암브로시오 성인은 교회의 라틴 박사 네 분 중에 한 분으로 불리우고 있다.

 

 

[12/9]성 베드로 푸리에 증거자(1565-1640)

 로렌의 미르쿠르에서 태어난 그는 15세 때 퐁 타 무송에 있는 예수회 대학에서 공부하였고 20세에 쇼무지에 있는 성 아우구스티노회에 입회하였다. 1589년에 사제가 된 그는 박사학위를 취득하고 수도회 본당 일을 맡았다. 1597년 거의 폐허화된 본당의 주임신부로 파견되어 교우들과 동고동락하며 30년을  살았다. 이때 그는 칼빈파와 수없이 싸워야 했다.

 그는 단순하고 엄격한 생활을 하여 존경을 받았고,  여러 개의 신심단체를 성공적으로 이끌었으며 어린이 교육을 지원하여 그 지역의 목자로서 추앙을 받았다. 그는 네 명의 여성 봉사자와 함께 무료학교를 개설하였는데, 이것이 발전되어 1616년 성모의 성 아우구스티노 수녀회로 인가을 받았다. 1622년 투르의 주교로부터 수도회 통합 지시를 받고 구세주회와 통합하고 총장이 되었다. 그 후 그는 루이 13세에게 충성 서약을 거부하고 프랑슈-콩테의 그래이로 피신하여 만년을 보냈다.

 

 

[12/9]성녀 레오카디아 동정 순교자(+304년)

 톨레도의 귀족 집안 딸로 태어난 그녀는 디오클레시안의 크리스천 박해때에  체포되어 투옥되었다. 감옥에서 그녀는 성녀 에우랄리아가 메리다에게 순교했다는 소식을 듣고, 자신도 그녀를 본받아 그리스도를 위해 죽기를 소원하였다. 곧 그녀는 온갖 회유를 물리치고  순교하였다. 지금도 톨레도의 주요 수호성인으로 공경받고 있다.

 

 

[12/10]성녀 고르고니아 증거자(+372년경)

 성 그레고리오 나지안제노(대)와 성녀 논나의 딸인 그녀는 비록  결혼은 했지만 하루 하루의 삶을 성화시켜 큰 덕을 쌓았다. 또한 성 그레고리오 나지안젠과 성 체사리오의 동생이다.

 

 

[12/10]성녀 에우랄리아 동정녀(+304)

 그녀는 스페인의 메리다에서 태어나 12살 때 디오클레시안 황제의 크리스천 박해때 순교하였다. 메디아 지방의 집정관은 어린 에우랄리아를 살려 주려고 여러 번  신앙포기를 종용하였지만 끝내 이방인의 신에게 제사지내기를 거부하므로써 많은 고문을 받고 운명하였다.

 스페인에서 큰 축일로 지내는 동정 순교자인 성녀 에우랄리아에 대한 더 이상의 기록은 없다. 그녀에 대한 공경은 스페인에서 시작하여 아프리카, 골, 그리고 이탈리아  등지로 빨리 전파되었고 시인 푸르덴시우스는 그녀의 아름다운 시신 위에 흰 눈이 내려 덮혔고 흰 비둘기가 그녀의 입술에서 나와 하늘을 날았다고 노래하기도 했다.

 

 

[12/11]성 다마소 1세 교황

 스페인 혈통을 가진 그는 아마도 로마에서 태어난 듯하고 366년의 치열한 선거에서 교황으로 선출되었다. 이때 교황 선출에서 패배한 반대자는 그의 재임기간 동안에 늘  도전하여 괴롭혔다. 마마소는 아리아니즘의 강력한 반대자였고 381년의 콘스탄티노블 공의회에 대리자로 파견하여 아리아니즘을 단죄하는 교황청 교서를 수락케 하였으며 성령은 신성이 없다는 마체도리우스의 교리를 단죄하였다.

 성서학자이던 다마소는 성서의 정경을 발표하였고, 374년 로마 회의를 통하여 올바른 성서를 명시하는 업적을 쌓았다. 유명한 성서학자 성 예로니모는 그의 비서였다. 그래서 다마소는 예로니모에게 성서 주석을 비롯하여, 불가타 성서 번역을 부탁하였다.

 또한 그는 교회 중에 최고 교회로서 로마를 선언하였고 가타콤바와 성소, 순교자들의 무덤 등을 복원하였으며, 이곳을 순례하여 순교자들의 신앙을 본받도록 격려하였다.

 

 

[12/11]성 바르사바 순교자(4세기)

 정확한 자료는 아니지만 그의 생애를 전해주는 기록에 의하면, 그는  페르샤의 원장이었다가, 국왕 사포르 2세의 박해때 수도자 12명과  함께 체포되어, 심한 고문을 받고  참수당했다고 전한다. 그의 용감성과 인내에 탐복한 어느 배화교 신자 한 사람도 그의 편을 들다가 함께 처형당하였다.

 

 

[12/12]성녀 요안나 샹탈 수절수녀

 프랑스 디죵에서 태어나 20세때 결혼하여 7명의 자녀를 둔 그녀는 1601년 사냥사고로 남편을 잃자 가르멜회 입회를 하여 했다 하지만 그녀의 영적 지도자인 프란치스코 드살은 자신이 세우려는 새 수도회에 대한 계획을 설명하고 기다리기를 종용하였다.

 그녀는 자녀들의 대책을 강구하고 가사를 정리한 후  1610년 샹탈과 마리파브르, 샤를론 브레샤르, 안느 코스트 등과 함께 수도복을 입음으로써 ’방문회’가 창설되었다.

 많은 난관을 극복하고 수도회는 프랑스 전역으로 확대되었으며 이후 3년간  60여 개의 수도원이 세워졌다. 샹탈은 영적인 무미건조함을 겪고 또 영혼의 어둔 밤은 수차례나 경험하면서 영신적으로 더욱 성장하였다. 그녀는 안느 여왕을 방문하고자  파리로 가는 도중에 물렝이란 곳에서 운명하였다.

 

 

[12/12]성 에피마코와 알렉산델 순교자(+250)

 안렉산드리아에 데치우스의 박해가 떨치던 250년 행정당국은 크리스천 수색에 혈안이 되어 있었다. 주요 인물로 꼽혔던 에피마코와 알렉산델은 곧 체포되어 처참한 고문을 받았다.

 먼저 그들은 체인으로 묶인 채 이리저이 끌려다녔으나 끝까지 신앙을 부인하지 않았다. 양 옆구리에 고랑쇠를 채우고 압박 당하는 모진 고통 후에 화형에 처해었다. 이 처형을 목격한 알렉산드리아의 주교 성 디오니시오는 이들  외에도 암모나리아, 메르쿠리아, 디오니시아 등  수많은 동료 교우들이 죽어갔다고 증언했다.

 

 

[12/13]성녀 루시아 동정 순교자(+304)

 시실리의 시라쿠제에서 태어난 그녀는 귀족 가문의 매우  유복한 가정에서 자라났다. 어릴 때부터 신앙 교육을 배워 익혔으며 스스로 하느님께 동정을 서원하였다. 이 사실은 비밀로 간직한 그녀는 어머니의 결혼 강요를 늘 받았다.

 그녀의 설득에 감복한 어머니 에우티치아는 성녀 아가다의 무덤에서 기도중에 늘 고생되던 병을 완쾌하고 딸에게 자유를 주었다. 하지만 그녀의 청혼자는 이를 매우 문개하여 그녀를 집정관에게 고발하였다. 그 당시는 디오클레시아노의 박해가 절정을  이루던 시기였기에 즉시 갇히는 신세가 되었다.

 재판관은 매음굴에 보내는 판결을 내렸지만 하느님의 권능에  힘입어 아무런 해도 입지 않았다. 그래서 태워죽이려 했지만 성공하지 못하자 입 속에 칼을 넣어 죽였다고 한다. 그녀는 동정 순교자로 높이 공경받고 있으며 중세시대부터 눈병을 앓는 사람들의 기도를 들어준다는 전설이 있다.

 

 

[12/14]십자가의 성 요한 사제 학자(1542-1592)

 스페인의 폰티베로스에서 태어난 그는 비단짜는 사람의 막내등이였다.  그는 17세 때 예수회 대학교에서 공부를 하며 메디아 병원장을 위하여 일을 했다.

 1563년 그는 메디아의 가르멜회에 입회하여 살라망카에서 학업을 계속하다 1567년에  사제가 되었다. 그후 그는 고향으로 가다 성녀 데레사를 만나, 가르멜 생활보다 더욱 고적하고 깊은 기도생활을 하고 싶다고 얘기하자 그녀는 가르멜에 남아 개혁운동을 함께 하자고 하였다.

 1568년 요한과 네 명의 동료들이 두루엘로에 개혁 수도원을 세웠는데 이것이 맨발의 가르멜회의 시작이다. 그는 개혁 가르멜의 보급을 위하여 진력을  다하던 중 1577년 가르멜회의 총장에 의해 똘레도에서 투옥되었다. 9개월 후에 탈출에 성공한 그는  개혁 가르멜회의 여러 직책을 수행하며 저술활동을 하였다. 드디어 1179년 맨발의 가르멜회는 수도원으로 인정되었다.  그는 바에사에 개혁 가르멜 대학을 세우고 학장이 되었고, 1582년에는 그라나다의 원장, 1585년에는 안달 루시아의 관구장이 되었다.

 그러나 1590년 가르멜회의 분쟁이  재현되어 그의 반대자들이 수도회에서  쫓아 내려고 애셨다. 그는 곧 라 페뉴엘라에서 열병이 걸려 우베라 수도원에서 치료도중 운명하였다. 그는 가장 위대한 신비가중의 한 분이고 ’영혼의 암야’ 등의 영성분야의 책도  유명하다. 1726년 시성된 그는 1926년 비오 11세에 의해 교회박사로 선언되었다.

 

 

[12/15]성 발레리아노 주교 순교자(+457)

 반달족의 크리스천 박해 때에 희생된 분들은 수없이 많이 있다. 발레니아노도 이 박해때 순교하였는데 80세가 넘은 고령의 주교였다. 아벤자의 국왕  젠세릭은 그에게 교회의 모든 성물들을 바치라고 강요하였으나, 그는 쳐다보지도 대답도 하지 않았다. 에에 왕은 그를  거리에 끌어내 어느 집이나 가정에서도 그에게 대접하지 말라고 명을  내렸다. 그는 아사직전까지 길거리를 헤메면서도 끝까지 크리스천 전통 교리를 소리높여 외치면서 죽어갔다.

 

 

 

 

 

 

 

 

 

 

 

 

 

 

[11/14]성 세라피온 순교자(+1240)

 영국 태생인 성 세라피온은 가스띨의 안폰스 9세 휘하의 군인이 되었다가 포로 석방을 목적으로 하는 메르체다리오회에 입회하였다.

 무르시아의 무어이들에게 가서 노예 몇  명을 석방시켰고 알지에르에 가서는 더욱  많은 성과를 거두웠다. 여기서 그는 포로 몸값 때문에  인질로 잡혀있는 동안에 모하메르교인들에게 설교했으며 몇 사람의 개종자를 얻기도 하였다. 이것이 무어인들에게 분노를 일으켜 세라피온은 십자가에 못받히고 사지가 절단되어 순교하였다.

 

 

[11/15]성 알베르토 주교 학자(1208-1280)

 독일 스바비아의 라우인겐 가족 성에서 태어난 그는 파두아의 대학교에서  수학하였으며 1223년 쾰른에 세워진 ’스투리아 제네랄리아’의 신임 이사장이 되었다. 그의 문하생 중  토마스 아퀴나스가 있었는데 좋은 동료이자 친구였다. 1259년에는  토마스와 더불어 도미니코회의 새로운 교과과정을 만들었다.

그의 소망에 반하여 1260년에 로젠부르그의 주교로 2년간 있었으며 1274년에는  리용 공의회에서 크게 활 약하여 로마와 희랍 교회의 일치에 공헌하였다. 성서와 신학 일반은 물론 설교, 논리학, 형이상학, 윤리학, 물리학까지  두루 섭렵한 논문들이 만

히 있으며 천문학, 화학, 생물학, 지리학, 지질학에 까지 관심이 확대되었다. 성 알베르토는 1931년 교회박사 칭호와 더불어 시성되었고,  자연 과학도의 수호 성인으로 공경받고 있다.

 

 

[11/15]성 레오폴도 증거자(1073-1136)

 멜크에서 태어나 다소의 주교의 영향을 받은 그는  23세의 나이로 부왕을 승계하였다. 1106년에 헨리 4세의 딸인 아녜스와 결혼하여 18명의  자녀를 두었는데 그중 한 명은 저  유명한 역사가인 프라이신의 오토이다. 그는 비엔나 교외인 비엔나왈드, 클로스터부르그 등지에 수도원을 세웠으며 40년 동안의 통치기간동안 온전히 크리스천적인 자세로 권력을 행사하였으므로  국민들로부터 ’선한 사람’이란 칭호를 얻었고, 1486년에 시성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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