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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체와 음식 (퍼온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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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보나 [sanghoo] 쪽지 캡슐

2002-07-02 ㅣ No.3325

 

 

김영택 신부 (영성연구소 부소장)

 

들어가는 글

 

음식을 먹는 것은 생명유지와 성자, 활동이라는 단순화 생물학적인

행위만이 아니라 함께 나누는 사람들의 공동체 활동이다.

 

또한 음식에는 준비되는 과정 뿐만 아니라 나누는 과정에서 공동체를

통하여 형성되고 드러나게 되는 형이상학적인 의미, 초월적인 가치가

담겨있다.

 

미사 전례 안에서 우리는 그리스도의 몸인 성체와 성혈을 나누어

먹는다.

 

성체와 성혈도 우리가 먹는 음식인 동시에 빵과 포도주가 그리스도의 몸

과 피로 변모된 것으로 초월적인 가치인 하느님의 사랑이 담겨있다.

 

그렇다면 음식에 담겨진 여러 가지 의미와 공동체와의 관계를 살펴보면서 이걱이 성체 성사와 어떻게 연결되고 그리스도인의 삶에 어떤 영향을

주는지 고찰해 보고자 한다.

 

 

1.희생제물인 성체와 음식

 

음식은 생명을 유지하고 성장하고 활동하는데 필수적인 것이기에 우리

삶에 가장 중요한 요소 중 하나이다.

 

음식의 재료가 되는 것들은 원래 살아있었던 생명체였다.

 

우리는 무생물 즉 물과 미네랄 같은 광물질도 먹고 공기도 들어마신다.

 

하지만 그것들은 생명체가 아니기에 음식이라고 부르지 않는다.

 

영성적으로 본다면 음식은 원래 살아 있었던 생명체들이 다른 생명체를

위해 바쳐진 희생물이다.

 

모든 생명체들은 하느님이 생명을 부여하고 보살피시기에 다 고귀하며

각자의 입장에서 본다면 모두 살아 있어야 하는 그 나름대로 충분한

이유가 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그들은 다른 생명체인 인간을 위해서 희생된 것이다.

 

물론 여기서 말하고 있는 생명체들의 죽음은 자의적이 아니라 타의적인 것이지만 희생된 것은 분명하다.

 

음식에 담겨있는 희생적인 면은 미사 때 예물을 드리며 바치는 사제의 기도문에도 표현되어 있다.

 

사제는 예물을 드리며, ’주님의 너그러우신 은혜로 저희가 땅을 일구어

얻은 이 빵을 주님게 바치오니, 생명의 양식이 되게 하소서’와 ’주님의 너그러우신 은혜로 저희가 포도를 가꾸어 얻은 이 술을 주님께 바치오니, 구원의 음료가 되게 하소서.’라고 기도한다.

 

빵과 포도주에는 주님의 은총과 땅을 일구고 포도를 가꾼 인간의 희생과

노력도 포함된다.

 

농부가 일구고 가꾸어 얻은 생명인 밀과 포도가 희생되어 빵과 술인

음식이 된 것을 사제가 바치는 것이다.

 

빵과 술은 생명을 위해서 바쳐지는 모든 음식들을 대표할 뿐만 아니라

우리의 삶도 역시 포함된다.

 

우리가 다른 생명이나 사람들을 위하여 희생을 하였고 더군다나 하느님을 위하여 자신의 삶을 희생하였다면 빵과 술이 하느님께 바쳐질 때

그 봉헌은 더욱 값지고 빛나게 된다.

 

초대 교회에서는 자신들이 만든 포도주와 빵을 직접 제단에 바쳤다.

 

오늘날은 신자들이 직접 만든 포도주와 빵을 봉헌하지 않고 미리 마련된

빵과 포도주를 봉헌하고 가난한 이들을 돕고 교회를 운영하는 데 필요한

예물을 바친다.

 

이 예물들은 신자들의 희생이 담겨있는 거룩한 봉헌임에 틀림이 없다.

 

따라서 사제가 예물을 봉헌할 때 신자들도 자신들의 삶을 봉헌하면서 상징적이면서도 현실적인 예물을 제단에 바치게 된다.

 

삶을 봉헌한다는 것은 그때까지 살아온 모습 그대로를 주님 앞에 펼쳐 드러낸다는 것이다.

 

어떤 사제가 자신의 어머니가 직접 집에서 구워 만든 빵을 가지고

집에서 미사를 드리게 되었다.

 

이때 그 어머니는 아들인 사제의 손에 의해 자신이 구운 빵이 제물

로 봉헌되는 순간 감격하여 눈물을 흘리었다.

 

그 사제의 어머니는 자신의 수고와 정성이 아들의 손에 의해서 거룩한

하느님의 제단에 드리는 예물이 된 것으로 인해 감격하였던 것이다.

 

 

2.희생에 대한 감사

 

음식에는 비록 자의적은 아닐지라도 우리들을 살리기 위한 생명들의

고귀한 희생이 담겨있다는 사실을 인식하면 할수록 우리는 그 희생에

대해서 감사를 드리지 않을 수 없다.

 

따라서 우리가 음식을 먹을 때 단순히 배고픔을 채우거나 맛을 즐기기

위해서 먹기보다는 그런 희생에 대한 감사도 드려야 마땅하다.

 

고대인들은 자신들이 사냥을 해서 잡은 짐승들을 벽화로 남겼다.

 

그 벽화를 그린 고대인들의 의도 중의 한가지는 자기들에게 식량이

되어준 짐승들의 거룩한 희생에 감사와 존경을 그림으로 표현하고

있다는 해석이다.

 

좬무탄트좭라는 소설에 의하면 호주 원주민들은 식사 때가 되어 그들

앞에 나타난 먹거리인 동물이나 식물에 대해 깊은 경의를 표하고 먹을

수있을 만큼의 양만 채취하거나 죽여서 먹는다.

 

또한 자신들에게 귀한 음식으로 바쳐지는 생명체들을 잡기 전에 먼저

존경과 감사를 표한다.

 

아메리카 원주민들도 매년 처음으로 잡은 연어를 가지고 겨울을 나게

해주는 연어에 대해 감사의 축제를 벌린다.

 

우리 조상들도 추석에 햇곡식으로 조상들에게 감사의 제사를 드렸다.

 

각종 종교의 전례에서 공통적으로 드러나는 것은 음식을 앞에 두고

신께 감사드리는 행위이다.

 

굳이 종교인이 아니더라도 우리는 음식을 먹을 때 그것을 마련해준

사람들에게 잘 먹겠다는 감사를 표시하고 나서 음식을 먹는다.

 

그런데 음식이 너무 흔하면 감사를 드리기 어렵게 되고 그 음식이

마련되기까지 어떤 수고가 담겨있느냐 보다도 자신의 입맛에 맞추는

데에 마음을 쓰게 된다.

어떤 수도자가 무전 여행으로 하는 순례 중, 배가 몹시 고팠을 때 빵

한 개를 겨우 얻게 되었다.

 

그는 그 음식을 먹으면서 이루 말할 수 없는 감사의 마음을 체험했다.

 

그러나 그 수도자가 수도원에 돌아와서 식탁에 차려진 흔하고 풍성해

 

보이는 음식에 대해 감사의 정을 체험하기가 어려웠다.

 

상점의 진열대에 있는 쌓여있는 음식들을 너무 쉽게 살 수 있는 현대

인은 이 수도승처럼 그 음식의 귀중함을 체험하기 어렵기에 감사를

드리기 쉽지 않다.

 

또한 대부분 도시에 살고 있는 현대인은 음식이 마련되는 자연적인

과정에 대한 체험이 없거나 빈약하다.

 

현대인의 영혼은 실재의 세계, 즉 자연에 대한 직접적인 접촉을

잃어버리고 있기에 음식을 대하면서 그것이 마련되는 과정에 대한

감사의 마음을 갖기가 어렵다.

 

또한 식탁의 분위기를 결정하는 것은 음식과 대화인데 그로 인해서

감사를 드리지 못하게 되기도 한다.

 

독선적이고 교훈적이며 비난적이고 일방적이어서 갈등과 극단적인

대립을 일으키게 하는 대화는 음식에 담긴 희생에 감사를 드리기

힘들게 만든다.

 

따라서 식탁의 분위기를 위해서는 무엇을 먹는가도 중요하지만

어떻게 어떤 마음으로 먹느냐가 더 중요하다.

 

빵과 술을 제단에 봉헌한 사제는 이어서 하느님께 감사를 드린다.

 

이 감사는 물론 구세주 그리스도를 통하여 베풀어 주신 하느님의

은총, 즉 구원의 업적에 대한 인간의 응답이다.

 

그러므로 인간의 손에 의해 바쳐진 빵과 술인 음식을 앞에 두고

하느님 아버지께 드리는 사제의 감사송에는 인간의 구원을 위한

예수님의 희생에 대한 감사의 내용이 주제로 되어있다.

 

사제는 단순한 음식인 빵과 술 안에 담겨진 생명의 희생에 대한

감사만이 아니라 그를 통하여 기념하게 되는 인류 구원에 대한

예수님의 희생에 대한 감사를 하느님의 백성과 함께 하느님께

드리는 것이다.

 

미사 전례에서 강론은 마치 식탁에서 나누는 대화와 같다.

 

식탁에서 나누는 대화가 식탁의 분위기를 결정하듯 강론의 내용과

길이는 미사 분위기에 결정적인 영향을 준다.

 

따라서 미사에 참예하는 신자들이 봉헌되는 예물에 대해 진정으로

감사를 드릴 수 있게 하기 위해서 사제는 그 날 전례와 독서에 바탕을

두고 선포된 말씀의 내용과 말씀을 들은 사람의 개별적인 처지를

염두에 두어서 기도한 것을 강론해야 한다.

 

가톨릭 전례는 하느님과 친교를 나누는 친교제(출애급 24,1-11)와

이집트의 노예살이에서 구원해 주신 하느님께 감사를 드리는 출애급을

기념하는 파스카 기념제(출애급 24,1-14)라는 구약의 이스라엘 전례에

뿌리를 두고 있다.

 

이러한 감사를 드리는 전례행위는 신약에서도 계속된다.

 

요한 복음사가에 의하면 예수님은 사람들이 가져온 보리빵 다섯 개와

작은 물고기 두 마리를 손에 들고 감사의 기도를 드린다(요한 6,9-11)

 

마지막 만찬때 예수님은 빵과 포도주를 축복하시고 감사를 드리신

다음에 제자들에게 나누어 주셨다(마태오 26,26-28; 루가 22,17-20).

예수님은 빵과 포도주를 제자들에게 주기 전에 과월절 음식의 본뜻이

하느님 나라에서 성취되기까지는 이 과월절 음식을 다시는 먹지

않겠다고 말씀하셨다.

 

여기서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과월절 음식의 본 뜻은 당신 자신이

스스로 희생 제물이 되어 하느님께 바쳐짐과 동시에 우리에게도

구원의 양식으로 바쳐진다는 것이다.

 

그러기에 사제는 예수님의 그 뜻에 따라서 바쳐진 희생 제물이 거룩한

예수 그리스도의 몸과 피가 되게 해 달라고 하느님의 능력을 청하는

기원을 드린다.

 

 

3.성체와 음식에 담긴 가치

 

우리들이 먹는 대부분의 음식들은 그냥 저절로 식탁 위에 나타난

것이 아니다.

 

수많은 수고와 정성을 통해서 만들어진다.

 

음식에 담겨진 수고와 정성은 눈에 보이지 않는 형이상학적인 가치이다.

 

우선 하느님이 자연을 통해서 땅과 햇빛과 비를 내려주시고 농부는

씨를 뿌려서 가꾸고 다듬어서 가을에 우리가 먹을 수 있는 곡식을

추구하였다.

 

하찮아 보이는 고추 하나를 얻기 위해서 농부는 뙤약볕 아래서 온몸을

땀으로 적셔가면서 김을 매었어야 했다.

 

밥상에 오른 생선에도 역시 하느님이 바다 속에서 키우신 물고기를

폭풍우와 거센 파도의 위험을 무릎쓰고 그물질을 한 어부의 수고가

담겨있다.

 

그러기에 밥상에 오른 생선이나 한 공기의 밥은 그냥 바다 속의 수많은

물고기와 같지 않고 들판에 흐드러지게 펼쳐있는 들풀과 같지 않다.

 

더군다나 한가정의 식탁에 올려진 음식에는 노동의 현장에서 땀흘려

일을 한 가장의 수고와 하찮아 보이지만 음식을 조리하는 주부의

고귀한 사랑과 정성이 담겨있다.

 

살아있었던 식물이나 동물의 몸이 수고와 정성으로 조리가 되면

음식이 되어 새로운 이름으로 불리어진다.

 

그래서 우리는 소의 살을 먹었다거나 배춧잎을 먹었다고 하지않고

불고기와 김치를 먹었다고 한다.

 

불고기와 김치는 고유한 이름이다.

 

물론 어떤 음식은 고유한 이름을 갖지 못하고 그냥 생명체의 일부나

전체를 칭하는 이름으로 불리어 지기도 한다.

 

하지만 그것들마저도 통칭으로서 음식이라고 불리어진다.

 

조리 과정에서 수고와 정성이 담기면서 생명체인 소의 살과 배춧잎은

불고기와 김치라는 고유한 이름으로 불리어지는 것이다.

 

형이상학적인 가치는 그 자체만으로는 존재하지 아니하고 구체적인

행위나 사물을 통해서 존재한다.

 

음식에 고유한 이름이 붙여지는 것도 바로 그 안에 인간의 정성과 사랑

이라는 형이상학적인 의미와 가치가 들어있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다.

 

우리는 사랑이라는 추상적인 것을 그것만으로 표현하고 체험할 수 없고 구체적인 사물을 통하여 표현하고 체험할 수 있다.

 

이냐시오는 사랑이란 추상적인 말보다 행동에 있어야 할 것이라고

하면서 서로 무엇을 주고 받는데에 있다고 설명하고 있다.

 

즉 이냐시오는 구체적인 행위를 통해서 추상적인 개념인 사랑이 표현

됨을 주장한 것이다.

 

부모의 사랑이라는 것은 추상적인 개념이지만 아버지의 수고와

어머니의 정성으로 조리가 되어서 밥상에 올려지는 구체적인 현실

안에 담겨서 자녀들과 함께 나누어 먹게된다.

 

거기에는 자연을 통한 하느님의 은총과 동·식물의 희생과 농부, 어부,

상인들의 수고와 부모의 사랑이라는 형이상학적인 가치가 내포된다.

 

늘 대하는 음식이지만 그 안에 담겨진 가치를 생각한다면 앞에 놓여진

음식에 대해서 감사를 드리지 않을 수 가 없다.

 

한편 눈치를 보면서 얻어먹는 밥은 아무리 먹어도 배부르지 않다는

말에서 드러나듯이 인간은 그냥 빵만으로 살 수가 없고 그 빵 안에

함께 담겨진 형이상학적인 가치인 의미나 사랑을 추구하거나 취하지

않으면 살아갈 수가 없다.

 

희생제물로서 바쳐진 빵과 술인 음식은 사제가 ‘거룩하신 아버지, 아버지께서는 모든 거룩함의 샘이시옵니다.

 

간구하오니, 성령의 힘으로 이 예물을 거룩하게 하시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몸과 피가 되게 하소서.’라고 하느님의 능력을 청하며

십자가를 그으며 기도할 때 그리스도의 몸과 피가 된다.

 

생명체인 밀과 포도가 희생되어 음식으로 바쳐진 것을 하느님

아버지께 바치고, 하느님 아버지께서는 그것을 사제들을 통하여

그리스도의 거룩한 몸과 피로 변모시키신다.

 

그리스도의 거룩한 몸과 피는 다시 우리에게 구원의 음식으로서

하느님의 능력으로 예물은 거룩한 그리스도의 몸과 피가 되는 과정

에서 형이상학적인 가치인 새로운 의미가 첨가된다.

 

그러므로 빵과 포도주에는 앞에서 언급한 형이상학적인 여러 가치에

또 하나의 가치가 첨가된 것이다.

 

그 가치는 인류 구원을 위해서 자신의 몸을 바친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과 사랑이다.

 

이런 과정을 통해서 불완전한 구약의 희생 제물인 음식이 우리의

죄를 없애주는 완전한 제물이 된다.

 

"사제가 날마다 성전에서 예배의식을 거행하며 같은 희생제물을 자주 드리더라도 그 제물들이 결코 죄를 없애버릴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는 당신 자신을 오직 한번 희생제물로 바치심

으로써 죄를 없애주셨습니다.

 

이것은 영원한 효력을 나타내는 것입니다(히브 10,11-12).” 빵과 술이 그리스도의 몸과 피가 되는 것은 결코 물리 화학적인 변화가 아니고

실체의 변화이기에 결코 되돌릴 수가 없다.

 

이 변화는 마치 세례를 받아 하느님의 아들과 딸이 됨과 동시에

그리스도인이 되는 존재론적 의미의 변화이기에 결코 되돌릴 수가

없는 것과 같다.

 

세례를 받는 순간에 우리 몸은 결코 어떤 물리·화학적인 변화가

일어나지 않는다.

 

다만 우리는 그리스도인이라는 새로운 이름을 얻고 새로운 존재

양식으로 살아가게 된다.

 

결혼 성사에서도 이런 변화가 일어난다.

 

결혼 성사로 축성된 몸인 남편과 아내도 본질적 변화를 체험하여

얻게 된 새로운 신원이고 새로운 이름이다.

 

물론 물리적으로는 같은 사람이지만 하느님의 은총과 인간의 응답으로

이 남자와 이 여자는 상징적 의미를 갖는 남편과 아내라고 불리어진다.

 

이 새로운 존재론적 의미는 그것을 믿고 고백하는 사람들의 마음의

눈으로만 확인될 수 있다.

 

모르는 사람들 눈에는 남편과 아내가 이 남자와 저 여자이듯 비신자의

눈에는 성체와 성혈은 그저 단순한 빵이고 포도주일 뿐이다.

 

그러나 믿는 이의 눈과 마음에는 그것은 결코 이 빵과 저 포도주가

될 수가 없고 영원한 그리스도의 몸과 피가 된다.

 

성체 성사를 통해서 이루어지는 이런 봉헌과 축성 그리고 나눔은 단지 상징적으로 이루어지고 있는 것이 아니라 인류를 구하고자 자신의 희생

제물로 바친 예수의 십자가 사건이라는 구체적인 역사가 내포되어 있다.

 

초대교회의 신자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하심에 대해

이야기하면서 음식을 나누어 먹었다.

 

Justin이 전하는 글에 의하면 초대교회의 신자들이 모여서 씻고 봉헌

기도를 한 후 입맞춤으로 서로 인사를 하고 음식을 봉헌하고 나서

예수를 기억하며 음식을 나누어 먹었다고 전하고 있다.

 

이 역사적인 사건은 신앙으로 이어지며 다시 미사 안에서 재현되고

있는 것이 성체 성사이다.

 

음식의 재료가 되는 식물과 동물의 재료가 우리 육신의 생명을 위해서

바쳐지고 이것은 다시 그리스도의 몸과 피가 되어 그리스도의 생명을

갖게 되고 우리가 그리스도인으로서 생명을 유지하고 성장하고 번성할

수 있도록 우리에게 바쳐진다.

 

식물과 동물을 먹음으로써 그들의 생명이 우리 안에 있듯이 그리스도의

생명을 먹음으로써 우리 안에 그리스도가 살아있게 된다.

 

식물과 동물이 음식이 되어 인간 속으로 사라지어 인간이 되듯이

그리스도의 몸과 피가 우리 몸 안으로 들어가 사라진다.

 

예수 그리스도의 몸이 우리의 몸이 되면서 우리와 똑같은 분이 된다.

 

인간의 온전한 구원을 위해 영원한 하느님의 생명이 비워진 것이다.

 

작은 생명에서 시작된 생명의 연속적인 바쳐짐을 통해서 드러나게

되는 것은 하느님의 영원한 생명이다.

 

따라서 성체 성사는 계속되는 낮추심과 내어줌을 통해서 하느님의

사랑이 드러나는 천주강생과 같다.

 

사도 바오로는 하느님의 이러한 내어줌과 낮추심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찬미하고 있다.

 

‘그리스도 예수는 하느님과 본질이 같은 분이셨지만 굳이 하느님과

동등한 존재가 되려 하지 않으시고 오히려 당신의 것을 다 내어놓고

종의 신분을 취하셔서 우리와 똑같은 인간이 되셨습니다(필립 2,6-7).’

 

그리스도는 계속해서 성체 성사를 통해서 자신의 살과 피를 음식

으로서 우리에게 내어 주고 있다.

 

형이상학적 가치인 의미나 사랑은 우리를 재창조하는 힘을 가지고 있다.

 

성체 성사 안에서 빵과 술이 그리스도의 몸과 피로 바뀌고 그것을

먹고 마시는 우리는 그 안에 담긴 새로운 의미인 인류 구원을 위한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재창조되어 간다.

 

 

4.성체와 음식 안에 담긴 시간성

 

음식이 나누어지는 곳에서 만남도 이루어진다.

 

바꾸어 말하면 우리는 서로 만나서 대화를 나누면서 음식을 먹게된다.

 

만나서 음식을 함께 먹는 곳에는 과거를 기억하는 것과 현재에 대한

인식, 그리고 미래에 대한 희망이라는 세 가지 차원의 대화가 일어날

수 있다.

 

화를 통해서 과거를 기억함으로써 죽은 과거가 현재화되고 내면화된다.

 

과거가 현재화된다는 뜻은 과거의 체험이 현재 되살아나

심화되는 것이다.

 

기쁘고 보람있던 과거의 기억은 식탁에서 나누어지면서 그 기쁨이

함께 하는 사람들 안에서 다시 살아나고 깊어지게 된다.

 

또한 아프고 힘든 이야기는 나눔으로써 가벼워지고 치유도

일어날 수 있다.

 

그러나 대화가 잘못된 방향으로 갈 경우에는 그 반대의 경우가 일어

날 수가 있다.

 

이런 현상은 가족이 모두 모여 함께 나누는 저녁 식탁에서 흔히 체험

될 수 있다.

 

하루의 일과를 마친 가족이 식탁에 둘러앉아 함께 저녁을 먹으면서

하루중에 일어났던 일이나 지난 일을 이야기하게 된다.

 

대화의 주제는 가족과 관련여부에 관계없이 식탁에 나누어지는 순간

부터 가족에 의해 다시 살아나게 된다.

 

식탁 대화에서 일어나는 과거, 현재, 미래라는 세 가지 차원은 음식의 시간성과도 연결된다.

 

음식은 과거에 살아있는 생명체였는데 죽어서 음식으로 바쳐졌다.

 

죽은 과거의 동식물은 현재 음식이 되어 우리 앞에 놓여있고 우리는

그것을 먹는다.

 

우리가 음식을 먹는 것은 단순히 허기를 채우기 위한 현재의 행위로만

보여질 수 있으나 몸 안에 들어온 이 음식이 앞으로 소화 흡수되어

나와 하나가 된다는 희망도 잠재적으로 담겨있다.

 

음식을 먹음으로써 성장하고 생명이 더욱 풍성해질 것이라는 희망을

갖는 것처럼 대화를 통해서 현재 안에 살아난 과거의 이야기는 우리

안에서 더욱 풍요로워지고 깊어지어 우리의 관계를 통해서 온전한

인간으로 성장하고 성숙도리 것이라는 희망이 담긴 미래로 우리가

나아가게 만든다.

 

이러한 음식이 지닌 시간성은 그리스도의 몸과 피인 성체와 성혈을

영함으로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그리스도인의 만남이 이루어지고 그리스도인으로서 성장해 나가는 성체성사에서도 발견된다.

 

이스라엘의 젊은이였고 십자가에서 죽은 예수님은 과거의 인물이다.

 

그러나 그 과거의 인물이 지금 사제가 축성한 그리스도의 몸과 피를

먹고 마시며 함께 그를 기억함으로써 우리 안에 부활하여 생명을

갖게 된다.

 

바꾸어 말하면 음식을 나누는 가운데 부활한 예수 그리스도를 체험한 그리스도인들의 믿음이 사람들에게 전해지면서 성체와 성혈이 나누어

지는 어느 곳이든 믿는 이들 가운데는 예수 그리그도에 대한 것이고 특

히 그분의 수난과 죽음에 점철되는 거룩한 희생과 부활에 대한 것이다.

 

우리가 지금 성체를 영하는 것은 2000년 전에 우리를 위해서 수난

당하시고 죽으셨으며 부활하셨다는 과거의 예수님의 삶을 지금 다시

기억하면서 현재 그 삶에 동참하는 것이다.

 

동시에 앞으로 우리가 그분을 닮아가며 다시 오실 그분과 하나가

된다는 희망으로 이끌어 준다.

 

이 희망을 가지고 세상 속으로 파견되는 것이 그리스도인 미션이다.

 

루가 복음사가가 전해주는 엠마오 길에서 부활한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게 된 두 제자의 이야기가 이를 뒷받침 해주고 있다.

 

그들이 길에서 함게 이야기 할 때에는 알아보지 못하였으나 같이

음식을 먹을 때 비로소 부활한 예수 그리스도를 알아보게 된다.

 

그리고 그들의 마음은 절망에서 희망으로 바뀌어 다른 제자들이 있는

예루살렘으로 돌아간다(루가 24,13-35).

 

이들이 체험했던 희망은 부활한 예수 그리스도께서 세상 끝날까지 함께 하신다는 것으로 미래에 대한 새로운 태도를 갖게 한다.

 

 

5.성체와 음식 안에 담긴 믿음

 

음식에 대해서 전적인 믿음을 갖지 못하면 결코 그음식을 먹을 수 없다.

 

만약 생명에 지장을 주는 것이 조금이라도 들어 있다면 어느 누구도

그 음식을 먹지 않을 것이다.

 

그러므로 전쟁터에서 결코 믿어서는 안되는 적군이 머물렀던 곳에

있던 음식은 함부로 먹지 말아야 한다.

 

적으로부터 엄중한 경호를 받아야 되는 왕이나 황제같은 사람들은 주위

에 믿을 수 있는 사람들이 음식을 만들도록 했고 또 만들어진 음식을

먼저 다른 사람들이 먹어서 안전한지 확인하고 난 뒤에 음식을 먹었다.

 

따라서 우리가 음식을 먹는다는 것은 첫째 그 음식 자체가 안전하다는

믿음을 이미 갖고 있는 것이고 그 음식을 만들어준 사람을 믿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이런 믿음을 어린이에게서 발견한다.

 

엄마가 하는 모든 것을 믿고 있는 어린아이들은 엄마가 숟가락에

음식을 담아서 ’아’하면서 주면 아무런 의심없이 입을 벌려서 음식을 받아먹는다.

 

우리는 함부로 아무나 가족의 식탁에 앉혀서 음식을 함께 먹지 않는다.

 

믿을 수 있는 친척이나 친구, 손님만이 가족의 식탁에 앉을 수 있다.

 

그러기에 음식을 함께 먹는다는 것은 서로 믿는 행위이다.

 

비록 한가족이라 할지라도 서로 믿을 수가 없게 되면 한 밥상에서

음식을 같이 먹지 않으려고 한다.

 

그래서 부부가 싸움을 하고 난 뒤에는 대개 함께 앉아서 같이 식사

하기를 원하지 않는다.

 

음식을 먹는 식탁에서는 긴장이나 경쟁이 없이 서로 믿고 받아들이는

분위기가 필수적이기에 화해를 하지 않은 상태에서 함게 식사한다는

것은 참으로 끔찍한 일이기 때문이다.

 

여러 사람들이 함께 사는 수도원 안에서도 이런 일은 간혹 일어난다.

 

그래서 서로 사이가 안 좋은 수도자가 같은 집에 살 경우에는 되도록

같은 식탁에 앉지 않거나 식사시간을 달리 하고자 애를 쓴다.

 

그것은 서로 상대방을 형제 자매로서 믿고 받아들일 수가 없기 때문이다.

 

우리는 성체를 영하기 전에 주님의 기도를 통해서 우리의 죄를 용서하게

해 달라고 청하고 평화의 인사를 나눈다.

 

평화의 인사는 파스카로서 우리들 사이의 장벽이 되는 오해와 불신,

불화 등을 없애주는 힘을 가지고 있다.

 

이 평화의 인사를 통해서 서로 믿고 받아들임으로써 우리는 그리스도의

몸과 피인 성체와 성혈을 나누어 먹을 수 있게 된다.

 

평화의 인사가 형식적이 아니라 내면에서부터 우러나오는 진정한

행위가 될 때에만 성령의 도움으로 우리 사이를 가로막는 장벽을

없앨 수 있다.

 

피정을 마칠 무렵에 이런 평화의 인사를 사람들이 서로 나누는 것을

자주 목격하는 것은 피정을 지도하는 즐거운 중의 하나다.

 

특히 40일 영신수련 과정을 마칠 무렵에 나누는 평화의 인사는 서로를 받아들이며 진정으로 평화가 함게 하기를 바라는 순간이 되기에 가슴이

뭉클하고 눈시울이 젖어오기도 한다.

 

이렇게 같은 음식인 성체를 나누어 먹는 행위를 통해서 우리는 그 안에

담겨진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으로 우리가 서로 하느님의 자녀로 성장할

뿐만 아니라 하느님의 영원한 생명에 함께 할 것이라는 공통의 믿음도

표현한다.

 

한편 그리스도인이 먹고 마시는 성혈과 성체는 단순한 음식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몸과 피다.

 

마치 우리 몸에 영양분이 될 것이라는 믿음이 있기에 음식을 먹을 수가

있듯이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의 성체와 성혈을 통해서 그리스도와 닮아

가고 성숙해질 것이라는 믿음이 있기에 성체와 성혈을 나누어 먹는다.

 

음식이 몸에 전혀 도움이 안 된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그 음식을

먹지 않는다.

 

그러기에 성체와 성혈이 우리를 구원하는 그리스도의 몸과 피라는

것을 믿지 못하는 사람은 여기에 결코 동참할 수가 없고 동참시키는

것도 무의미하다.

 

 

6.성체와 음식 안에 담긴 용서

 

음식을 함께 먹는다는 것은 상대방을 믿고 받아들인다는 것을 앞에서 발견하였다.

 

믿고 받아들이는 행위는 용서하는 것이다.

 

음식은 사람의 사랑과 정성 그리고 바쳐진 것들의 희생이 담겨 있기에

음식을 같이 나누는 것은 받아들이고 용서하는 행위다.

 

그러기에 사람들 사이에 긴장관계나 적대관계가 사라지면 음식을

나누는 축제를 벌이는 것은 당연한 것이다.

 

공동체 안에서 함께 같은 음식을 먹는다는 것은 그 공동체에

소속된 것이다.

 

달리 말하면 음식을 함께 나누는 것은 소속감의 체험이다.

 

용서란 공동체안의 일원으로서 받아들여 주는 것이다.

 

루가 복음 15장에 나오는 동아온 탕자의 이야기에서 보면 철저하게

망가진 아들을 받아준 아버지는 그를 위해서 잔치를 베푼다.

 

잔치를 통해서 함께 먹고 마시며 즐기는 행위가 곧 아들을 가족의

일원으로 받아들일 뿐만 아니라 모든 죄를 용서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렇게 돌아온 동생을 용서할 수 없었던 형은 그 잔치에 참여

하기를 거부한다.

 

표면적으로는 드러나 있지는 않지만 잔치에 참여하여 함께 음식을

나누기를 거부하는 형은 동생뿐만 아니라 아버지도 용서할 수 없고

더 나아가서 그 잔치를 거부하는 자기 자신을 용서하지 못하고 있다.

 

스스로 가족 공동체에서 자신을 소외시키고 있다.

 

용서하는 행위로써 함께 음식을 나누는 예는 예수님의 여러 행적에서도 보여진다.

 

예수님이 세리와 창녀들과 함께 어울리면서 음식을 나누시는 것을

바리사이파 사람들이 비난하자 예수님은 죄인들을 용서하고 구하시기

위해서 당신이 왔다는 것을 강조하시면서 음식을 함께 나누는 것이 곧

그들을 용서하고 받아들이는 행위임을 보여주신다.

 

티베리아 호숫가에서 예수님은 빵과 물고기를 미리 마련해 놓으시고

제자들에게 와서 아침을 먹으라고 말씀하셨다(요한 21,12).

 

제자들에게 손수 음식을 집어주는 스승에게서 도망간 제자들을 진정

으로 용서하는 모습을 발견할 수 있다.

 

그러기에 그들 중 아무도 예수님을 의심하지 않았고 또한 그분이 주님

이시라는 것이 분명하였다고 요한은 증언하고 있다.

 

죄인을 용서하는 데 있어서 파격적인 방법을 사용하는 예수님은 최후의 만찬에서 용서하심을 더욱 파격적으로 표현하신다.

 

늘 먹는 빵과 포도주를 자신의 살과 피로 비유시키면서 제자들도

자신처럼 행하라고 초대하신다.

 

더 나아가서 식탁에서 스승인 예수님이 제자의 발을 씻어주시는 행위는 제자들을 당황하게 만드는 용서의 행위였다.

 

이런 예수님의 가르침은 십자가 위에서 자신을 내어주면서 죄인들이

하는 짓을 모르고 있으니 용서해달라고 하느님 아버지께 간청하시는

데서 더 극적으로 드러난다.

 

식탁에서 음식을 나누면서 서로 받아들이라고 가르치신 것을 스스로

십자가 위에서 실천하신다.

 

우리를 위한 음식으로 자신을 내어 주시면서까지 우리를 용서하는 예수

님의 사랑이 십자가 위에서 온전하게 드러나고 완성되고 있는 것이다.

 

 

*나오는 글

 

성체와 음식은 모두 그리스도인이 먹는 것이다.

 

다만 음식은 육체적인 면을 위해서 있고 성체는 육체적인 면 뿐만

아니라 영적인 면을 위해서 우리에게 먹혀지고 있다.

 

성체와 음식의 공통점은 희생제물이고 과거, 현재, 미래라는 시간성을

갖고 우리와 깊은 관계를 가지고 있으며 우리의 성숙과 완성, 즉

구원을 위해서 우리에게 주어진다.

 

성체와 음식이 우리의 구원이 되는 것은 성체와 음식 안에는 담겨진

눈에 보이지 않는 형이상학적인 가치와 의미 때문이다.

 

성체에는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과 용서, 그리고 사랑이 담겨져 있다면

음식은 그것을 만드는 사람들의 정성과 수고와 사랑이 담겨져 있다.

 

이런 형이상학적인 가치와 의미는 음식을 나누는 사람들 간에 믿음을

갖게 하고 서로 용서하게 해주며 그리스도 안에서 그리스도를 통하여 그리스도와 함께 온전한 그리스도인으로 성숙하게 해준다.

 

따라서 사람들과 함게 음식을 나누면서 만들어가는 관계를 공동체

안에서 서로 믿고 받아들이는 중요한 것인 것처럼 성체를 서로 나누어

먹는 미사는 그리스도인을 서로 사랑하고 용서하는 중요한 신심행위다.

 

음식이면서도 그리스도의 몸인 성체는 먹으면 육신의 건강뿐만 아니라

영혼의 건강도 지켜주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느님과의 관계를

더 깊게 해주며 나아가 하느님과 일치하도록 이끌어준다.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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