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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거집에 수록된 한시의 제목의 각주에 등장하는 문경현감 이복우李福愚(1811-?)는 이벽 성조(1754-1865)의 방계 외증손(3대외손) 혹은 외현손(4대외손)뻘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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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8-05 ㅣ No.2001

게시자 주: 본글의 인터넷 주소, http://ch.catholic.or.kr/pundang/4/soh/2001.htm 에 접속하면, 본글 중에서 제시되고 있는 출처 문헌들을 쉽게 확인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다음의 인터넷 주소, http://ch.catholic.or.kr/pundang/4/q&a.htm 에 접속하면, 본글의 제목이 포함된, "가톨릭 신앙생활 Q&A 코너" 제공의 모든 게시글들의 제목들의 목록을 가질 수 있습니다. 또한 (i) 2006년 12월 16일에 개시(開始)하여 제공 중인 미국 천주교 주교회의/중앙협의회 홈페이지 제공의 날마다 영어 매일미사 중의 독서들 듣고 보기, 그리고 (ii) 신뢰할 수 있는 가톨릭 라틴어/프랑스어/영어 문서들 등은, 다음의 주소들에 접속하면, 손쉽게 접근할 수 있습니다: http://ch.catholic.or.kr/pundang/4/  (PC용, 날마다 자동으로 듣고 봄) [주: 즐겨찾기에 추가하십시오]; http://ch.catholic.or.kr/pundang/4/m (스마트폰용) [주: 네이버 혹은 구글 검색창 위에 있는 인터넷 주소창에 이 주소 입력 후 꼭 북마크 하십시오] 

 

1. 들어가면서

 

1-1. 이벽 성조(1754-1785년)께서는 생전에 혼인을 두 번 하셨으나, 그러나 직계 후손이 없었던 것은 널리 잘 알려진 사실입니다.

 

하거집에 수록된 한 개의 한시(漢詩)(A)의 제목의 각주에 등장하는 문경현감 이복우(李福愚, 1811-?)는(*1) 본관이, 경주[즉, 월성]이 아니고, 연안(延安)으로 밝혀졌으며,(*2)

 

그리고, 또한 하거집에 수록된 한 개의 한시(漢詩)(B)의 제목의 각주에 등장하는 이준수(李駿秀, 1778-?)가 이복우의 부친으로 파악되었습니다.(*3) 그리고 이분께서는, 하거집의 각주의 기록에 의하면, 이 한시(漢詩)(B)가 작문될 당시에 한성[즉, 지금의 서울] 강서(江西) 지역에 거주하셨다는 생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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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게시자 주: (1) 이것은 많이 부족한 죄인인 필자가, 본글을 작성하기 전에, 다음의 주소에 접속하면 사용할 수 있는, 한국역대인물종합정보시스템 제공의 검색을 통하여 처음으로/최초로 밝힌 것이다:

http://people.aks.ac.kr/index.aks 

 

(2) 다른 한편으로, 충장공 양헌수대장 기념사업회에서 2005년에 발행한 "국역 하거집", 제406쪽에 있는 유관 본문의 주석에서 "이문경(聞慶) 복우(福愚)"로 명기하였는데, 이것은 바로 위의 제(1)항에서 필자가 처음으로/최초로 밝혔다는 역사적 사실, 즉, 이복우가 문경현감이었다는 사실을, 2005년에 이르기까지, 양헌수대장의 집안 사람들조차 전혀 모르고 있었음을 의미하기에, 또한 여기에 한 개의 기록으로 남긴다.

[이상, 2022년 4월 14일자 내용 추가 끝]

 

(*2) 게시자 주: 바로 위에 있는 한국역대인물종합정보시스템 제공의 이복우(李福愚)에 대한 정보에서는 이분의 본관이 경주라고 하였으나, 그러나 방대한 분량의 남인 계열 유학자들의 여러 족보들을 묶은, 소위 말하는, "남보"를 소장 중인, 김학렬 신부님께 이벽 성조의 친족인 방계 증손(3대손) 혹은 현손(4대손)뻘인 분들 중에 이복우(李福愚)라는 이름이 있는지 확인해 주실 것을 요청하였는데, 그러나 결과는 그러한 이름을 가진 분이 없다는 것이었다.

 

(*3) 게시자 주: 이 사실 또한, 바로 위의 (*2) 게시자 주에서 말씀드린, 김학렬 신부님께 드린 필자의 요청에 따라, 김학렬 신부님에 의하여한국역대인물종합정보시스템 제공의 검색 기능을 통하여 확인하는 과정에서, 최초로/처음으로 밝혀진 사실이다.

 

그래서, 한국역대인물종합정보시스템 측에 필자가 유선으로 전화를 하여, "이복우(李福愚)와 관련된 제공된 정보 중에 본관에 오류가 있는 것같으니, 확인 후에 바로잡아 주십사" 하는 요청을 하였는데, 그 결과 "이복우(李福愚)의 본관은 경주가 아니고  연안(延安)임을 유관 문헌에 근거하여 확인하였다"고 하면서, "기존의 제공 정보 중의 오류를 즉시 바로잡았다"고 하였다.

 

아래의 주소들에 접속하면 읽을 수 있는 정보들은 이러한 과정을 거쳐 바로잡은 결과들임을 한 개의 기록으로서 여기에 남겨둔다:

 

이복우(李福愚)

http://people.aks.ac.kr/front/dirSer/exm/exmView.aks?exmId=EXM_UB_6JOc_9999_000264&curSetPos=0&curSPos=0&category=dirSer&isEQ=true&kristalSearchArea=P

 

[지방관] 조선후기 지방관 경상도(慶尙道) 문경현감(聞慶縣監) 1866[병인(丙寅)] 10월(十月) 

http://people.aks.ac.kr/front/dirSer/gov/govView.aks?govId=GOV_JBK_6JOc_MN_4KS_69MNKG_003514&curSetPos=1&curSPos=1&category=dirSer&isEQ=true&kristalSearchArea=P 

 

http://people.aks.ac.kr/front/dirSer/exm/exmView.aks?exmId=EXM_UW_6JOc_9999_006415&curSetPos=0&curSPos=1&category=dirSer&isEQ=true&kristalSearchArea=P 

 

이준수(李駿秀)

http://people.aks.ac.kr/front/dirSer/exm/exmView.aks?exmId=EXM_SA_6JOc_1810_028680&curSetPos=0&curSPos=0&category=dirSer&isEQ=true&kristalSearchArea=P

 

[연안이씨(延安李氏)의 과거 및 취재 합격자]

http://people.aks.ac.kr/front/dirSer/lst/lstView.aks?originnameId=383&familynameId=179&category=dirSer&isEQ=true&kristalSearchArea=P#tabs-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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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 또한, 이복우가 이벽 성조의 방계 3대 혹은 4대 외손인지 혹은 아닌지에 대하여, 김학렬 신부님께 이것을 "남보"에서 확인해 주실 것을 요청하였으며, 확인 결과, "남보"로부터는 확인할 수 없었다고 합니다.

 

승정원 일기 검색 엔진인 다음의 주소에 접속한 후에, 검색창에 "李福愚"를 입력하여 검색하면, 철종 10년 6월 25일  계해 1859년부터 고종 7년 10월 7일  기해 1870년 사이에 이 이름을 가진 유일한 분 "李福愚"이 검색됨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http://sjw.history.go.kr/search/searchResultList.do 

 

그리고 바로 위의 승정원 일기에 의하면, 이복우李福愚(1811-?)는, 병인양요(1866년 9월 18일 - 1866년 11월 21일)가 발생하였던 해인, 1866년 10월 17일부터 1867년 7월 21일까지 문경현감(聞慶縣監)이었습니다.

 

1-4. 따라서, 이복우가 양헌수(1816-1888년)의 매우 가까운 학동(學童)인 벗으로 생각됩니다. 그러지 않고서야, 이복우의 부친에게 양헌수가, 하거집에 수록된, 한시(漢詩)(B) 한 수를 작문하여 바쳤을 까닭이 없었을 것이라는 생각 때문입니다.

 

이제 남은 일들에는, 이들의 학동인 벗의 관계가, 예를 들어

 

(I) 불알동무이기 때문인지, 혹은 

 

(ii) 양헌수의 스승인, 양근[즉, 지금의 양평(양근 + 지평)]이 고향인, 이항로(李恒老, 1792-1868년)를 중심으로 형성되었는지의 여부, 그리고 더 나아가,

 

(iii) 문경현감 이복우(李福愚, 1811-?)가 이벽 성조(1754-1865년)의 방계 외증손(3대외손) 혹은 외현손(4대외손)뻘인지 아닌지 

 

등을, 구체적으로 확인하는 작업이 마땅히 포함되어야 할 것입니다.

 

2.

 

[내용 추가 일자: 2021년 4월 8일]

2-1.

2-1-1. 지금까지 전해오는 총 4권의 책과 부록으로 구성된 "하거집"의 출처는, 1997년에 이르기까지1883년 혹은 1884년양진화가 필사본으로 편집한 것 단 한 권뿐이라고 알려져 있습니다.

 

그러나, 여기에는 다음과 같은 문제가 한 개 있습니다: 즉, (i) 양진화의 글씨체로 필사된 것이 분명한 "하거집", 제1권제2권의 글씨체와 (ii) "하거집", 제3권제4권의 글씨체가, 다르다고 잘 알려져 있으며, 따라서, "하거집"제3권제4권이 언제 그리고 누구에 의하여 필사되었는지 모르고 있는 문제가 있습니다. 왜 이 문제를 지적하는가 하면, 한시(漢詩)들로 구성된 책은 "하거집"제4권이기 떄문입니다.

 

게시자 주 2-1-1: (1) 많이 부족한 죄인인 필자가 들여다본 바에 의하면, "하거집", 제4권의 글씨체는, 바로 위의 제(ii)항과 달리, "하거집", 제3권의 글씨체와 다름이 분명하다는 생각입니다.

 

[내용 추가 일자: 2022년 4월 14일]

그러니까, 필자가 들여다본 바에 의하면, "하거집", 제1권, 제2권, 제3권, 그리고 제4권의 경우에, (a) "하거집", 제1권제2권의 글씨체, (b) "하거집", 제3권의 글씨체, (c) "하거집", 제4권의 글씨체, 이렇게 세 개의 서로 다른 글씨체들로 필사되어 있다는 판단입니다. 특히, "하거집", 제4권의 글씨체는, 앞의 권들의 2개의 글씨체들과 확실하게 다를뿐만이 아니라, 또한 훨씬 더 반듯한, 상당히 아름다운, 글씨체임이 매우 분명하다는 생각입니다.

 

(2) 바로 위의 제(1)항에서 지적한 바와 관련하여, 다음의 주소에 접속한 후에, 유일본인 하거집 필사본의 영인본 본문들을 정밀하게 비교/검토하기 바랍니다:

http://ch.catholic.or.kr/pundang/4/군사연구자료집/제5집_하거집&병인일기_국방군사연구소_1997.pdf

[이상, 2022년 4월 14일자 내용 추가 끝]

 

2-1-2. 따라서, 단 한 부의 필사본 형태로 1884년에 처음 존재하게 된, 당시의 대표적인 척사론자인 양헌수 장군의 "하거집"을, 1884년 혹은 그 이후의 어느 시점에, 당시에 척사의 대상으로서 도피 중인 우리나라 조선의 천주교 신자가 입수하여, 특히 "하거집", 권4에 수록된 한시(漢詩)들을 필사하여 "만천유고"에 처음으로/최초로 포함시키는 것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하였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양헌수가 타도의 대상으로 삼고 있는 자들이 천주교 신자들이기 때문에, 또한 이들은 양헌수의 직계 집안의 타도의 대상이었을 것이 분명하기 때문입니다. 그렇지 않는지요?

 

왜냐하면, 당시의 천주교 신자들은 자신들을 박해하는 흥선대원군 편에 있는 양헌수 장군을 틀림없이, 소위 말하는, "3구"들 중의 하나인, "세속"이라는 원수/적(enemy)로 생각하였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렇지 않았을까요?

 

2-1-3. 그러니까, 1866년에 발생한 병인양요에서 강화도 소재 정족산성에서 프랑스 함대를 물리치는 혁혁한 공을 세운 양헌수 장군의 문집인, "하거집"은, 왜냐하면 이 문집 안에 담긴 다른 내용들 때문에 후세에 잘 보존될 것이 틀림없기 때문에, 바로 이 필사본 "하거집"이 처음으로/최초로 존재하기 시작한 1884년과 그 이후의 어느 시점에, 우리나라 조선의 천주교 신자 한 사람이, 처음으로/최초로, 바로 이 "하거집", 권4에 수록된 한시(漢詩)들을 필사하여 "만천유고"에 추가적으로 포함시켜 제시하면서, 심지어, 이어지는 제2-2항에서 구체적으로 말씀드리는 한시(漢詩) 한 개의 제목을, 양헌수가 원수로 삼는 천주교 신자들의 성조인 李德操(이덕조)라는 이름이, 작은 글씨로 쓰인 주해도 아니고, 그 제목 자체에 포함된 제목으로 교체하기까지 하면서, "만천유고"에 포함시켜 제시하는 행위는, 특히 병인양요 이후 양헌수 장군의 명성 등을 고려할 때에, 감히 시도할 엄두도 내지 못하였을 것입니다.

 

도대체 무슨 이유로, 우리나라 천주교 신자들의 원수인 양헌수의 한시(漢詩) 한 개를 우리나라 천주교 신자들의 성조인 李德操(이덕조)의 한시(漢詩)이라고 주장하여야 하는지요??? 그렇지 않는지요?

 

그러니까, 양헌수의 "하거집", 권4에 수록된 한시(漢詩)들을 필사하여 "만천유고"에 포함시켰다고 누군가가 주장하고자 한다면, 자신의 주장을 뒷받침하는 실증적으로(positively) 입증/고증하는 증거 자료를 다른 이들이 또한 실증적으로(positively) 확인할 수 있는 방식으로, 반드시 제시하여야 할 것입니다. 

 

이와는 달리, 자신의 주장을 뒷받침하는 실증적으로(positively) 입증/고증하는 증거 자료를 제시하지 않으면서 혹은 못하면서도, 그러한 주장을 지속하는 행위는, "수사학적 강조 그 자체로부터 어떤 새로운 진리가 창출될 수 있다"는 커다란 착각에 빠져있는, 매우 비 이성적인 아집의 소유자들의 행위일 것입니다.

 

2-2. 바로 위의 제2-1항에서 지적한 바를 읽은 후에, 이번 항을 읽도록 하십시오. 

 

"하거집", 권4에 포함되어 있는, "李聞慶福愚"라는 표현이 작은 글씨의 주해로 붙어 있는 제목을 가진, 한시(漢詩) 한 개의 경우에, 바로 이 제목은, 많이 부족한 죄인인 필자가 생각하더라도, 양헌수이복우가, 이 한시(漢詩)를 필사한 후에, 붙였을 것임은 매우 분명하다는 생각입니다.

 

그러나, 양헌수가 바로 이 한시(漢詩)의 제목에서 구체적으로 밝히고 있는 바를 가만히 읽어보면, 바로 위의 제2-1항에서 말씀드린 바를 또한 고려할 때에, 다음과 같은 일이 발생하였을 것이라는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즉, 이 한시(漢詩)의 본문은 양헌수가 스스로 그리고 혼자 지은 것이 아니고, 이복우와 양헌수와 함께 달을 구경하면서, 당절운을 차운하여 한시(漢詩) 한 수를 지을 때에, 이복우가 당절운에 맞게 이 한시(漢詩) 본문의 첫 시작 부분을 먼저 읊기 시작하였으며, 그리고 비록 양헌수가 들으면서 참여하는 과정으로서, 시어(詩語)들을 선택하고 또 문맥을 다듬는 과정을 거치기는 하였으나, 그러나 사실은, 이복우가 자신이 이미 암기하고 있었던 잘 작문된 이 한시(漢詩)의 본문 전체를 읊어, 양헌수에게 전달하였고, 그리고, 결국에, 양헌수도 받아들였고, 그리하여 그 결과로, 바로 이러한 이복우표절 행위로 인하여, 양헌수"하거집", 권4에 바로 이 시가 포함되어 있을 것이라는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더 나아가, 이복우 자신도 바로 이 한시(漢詩)의 원 저자가 구체적으로 누구인지 몰랐을 가능성이 매우 크다는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만약에 이복우가 바로 이 한시(漢詩)의 저자가 누구인지를 밝히고 있는 바로 이 한시(漢詩)의 제목에 있는 李德操(이덕조)가 어떠한 인물인지를 구체적으로 또한 알았더라면, 당시에 위정척사론에 앞장선 화서 이항노의 제자인 양헌수 앞에서 이 한시(漢詩)의 본문을 감히 읊조리지 못하였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2-3. (표절 행위가 실제로 발생한 시점에 대하여)

경우 1: 이 한시(漢詩)의 첫 10개의 낱글자들이 전달하는 시상(詩想)들에 비추어 볼 때에,

 

경우 1-1: 만약에 이들 시삳(詩想)들이 이들 두 사람의 눈 앞에 펼쳐진 밤 풍경을 담았다고 한다면이들 두 사람이 한성[즉, 지금의 서울]에 머물었던 시기에, 그러니까, 양헌수가 무관으로서 한성에 거주한 기간인 1848-1854년 혹은 1858-1859년의 기간 중에, 이복우에 의한 이러한 표절 행위가 발생하였을 것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어쩌면, 이복우가 음관으로 임명되어 관직을 처음으로 맡게된 해인 1859년일 수도 있다는 생각입니다.

 

경우 1-2: 만약에 이들 시삳(詩想)들이 이들 두 사람의 눈 앞에 펼쳐진 밤 풍경을 담았다고 한다면이들 두 사람이 한성[즉, 지금의 서울]에 머물었던 시기였던 점 그리고 이복우에 의한 이러한 표절 행위가 발생하였을 시점을 추가적으로 더 고려하면, 바로 위의 경우 1에서처럼 이복우의 나이가 40을 바라보는 시점에 표절 행위가 있었다기보다는, 이들 두 사람이 과거 시험을 보기 위하여 한성에 올라가 머물었던 시기, 즉, 아직 철이 들지 않았던 시기인, 1830년대 말경에 이복우에 의한 이러한 표절 행위가 발생하였을 것으로 생각합니다.

 

경우 2: 이 한시(漢詩)의 첫 10개의 낱글자들이 전달하는 시상(詩想)들을 고려하거나 혹은 고려하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이들 두 사람이 과거 시험을 보기 위하여 함께 공부하던 시기에, 즉, 아직 철이 들지 않았던 시기인, 1830년대 말경에 이복우에 의한 이러한 표절 행위가 발생하였을 것으로 생각합니다. 그리고 이 시기에 "만천유고"에 포함되어 있는 한시(漢詩)들에 대한 표절 행위가 또한 발생하였을 것으로 생각합니다.

 

2-4. (표절된 한시(漢詩)들이 "하거집", 권3에 처음으로 포함된 시점에 대하여) 다른 한편으로, 위의 제2-1-1항에서 지적하였던 문제점을 또한 고려하면, 다음과 같은 추정들 중의 하나가 실제로 발생하였을 가능성이 또한 상당하다는 생각입니다:

 

경우 3-1: 애초에 양헌수가 생존해 있을 시기에 "하거집"양진화에 의하여 편집되어 처음으로 마련된 때에, "만천유고"에 또한 포함되어 있는 한시(漢詩)들은, 위의 제2-3항에서 말씀드린 표절 문제 때문에, 양헌수의 본인의 지시에 의하여 "하거집", 권4에 포함되지 않았으나, 그러나, 1888년 양헌수의 사후의 어느 시점에, 집안에 여전히 남아있는, 따라서 버릴 수도 없는, 그러나 "하거집", 권4에 첫 필사본에 포함되지 않았던 [그러나, 예를 들어, "만천유고"에 또한 포함되어 있는지를 양헌수의 자손들이 전혀 알지 못하였던, 바로 ] 한시(漢詩)들이, "하거집", 권4의 첫 필사본을 다시 필사하는 과정에, 양헌수의 자손에 의하여 혹은 그의 자손의 지시에 의하여, 추가적으로 포함되었을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특히, 위의 게시자 주 2-1-1을 꼭 읽도록 하십시오.

 

경우 3-2: 애초에 양헌수가 생존해 있을 시기에 "하거집"양진화에 의하여 편집되어 처음으로 마련된 때에, "만천유고"에 또한 포함되어 있는 한시(漢詩)들은 "하거집", 권4의 첫 필사본에 포함되지 않았으나, 그러나, 1888년 양헌수의 사망 후의 어느 시점에, "하거집", 권4의 첫 필사본을 다시 필사하였던 필사자가, 자신의 수중에 있던 "만천유고"에 포함되어 있는 한시(漢詩)들이 향후 잘 보존될 수 있도록 할 목적으로,(*) 필요시 제목(들)의 일부를 변경함과 함께, "하거집", 권4에 임의적으로 추가하였을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특히, 위의 게시자 주 2-1-1을 꼭 읽도록 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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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게시자 주: 우리나라 조선의 천주교회는, 우리나라 조선을 관할하였던 프랑스 파리 외방 선교회 소속의 사제 및 주교들이 처음으로 입국한 1836년부터, 그 이전의 시기와는 달리, 한글 전용을 사목적 방침으로 삼아 유지해 왔기 때문에, (i) 우리나라에 입국하는 프랑스 파리 외방 선교회 소속의 사제 및 주교들에 의한 지속적인 얀센주의적 선교 방식 때문에, 조상 제사를 지내지 않으면 신분 유지가 아니되는, 신분이 양반인, 자들이 세례를 받는 것이 매우 힘들어짐과 함께, (ii) 1839년에 발생한 기해박해(己亥迫害)의 영향 등으로 인하여, (iii) 그 당시까지 전해오던 한문으로 저술된 천주교 문헌들/자료들을 읽고서 그 내용을 이해하는 유식한 천주교 신자들의 숫자가 급감하게 되어, 그 결과로서, (iv) 19세기 중반 쯤에 이르면, 1836년 이전의 시기에 우리나라 조선의 천주교회의 신자들에 의하여 중요하다고 인정되어 왔던, 그 당시까지 전해 내려오던, 예를 들어, "만천유고" 등, 한문본 천주교 문헌/자료들을 한문으로 필사하여 보존하는 것 자체가 이미 매우 힘들어지기 시작하였음에, 또한 반드시 주목하여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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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 위에 나열된 여러 경우들 중에서, 많이 부족한 죄인인 필자가 생각할 때에, (i) 경우 2 경우 3-1 혹은 (ii) 경우 2 경우 3-2, 이들 둘 중의 하나가, 실제로 발생하였을 것이라는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이상, 2021년 4월 8일자 내용 추가 끝]

 

작성 중입니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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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교수 소순태 마태오 (Ph.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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