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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성직제도(假聖職制度) 라는 대단히 부적합한 신조어[주: 20세기 후반에 우리나라 천주교회 안에서 갑자기 처음 등장함]의 출처와 기원에 대하여 [조상제사금령] [성교절요]1242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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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8-31 ㅣ No.2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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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들어가면서

 

1-1. 질문 1: 1980년대 이후에 마련된 우리나라 조선의 천주교회사 관련 자료들을 읽다보면, 1785년 이후의 시점에 이르러, 차용 번역 용어인지 알 수 없는, 따라서, 출처불명의 "가성직제도(假聖職制度)"라는 표현이 여기 저기서 마구 사용되고 있는데, 그러나 "가성직제도(假聖職制度)"라는 표현은 그 자구 자체에 논리적 모순(logical contradiction)이 내재된, 따라서, 대단히 부적절한(improper) 표현이 아닌지요??? 그리고 이 표현의 정확한 출처, 즉, 정확한 최초 출처와 기원을 알고 싶습니다.

 

1-2. 질문 1에 대한 간단한 답변: 예, 그렇습니다. 왜냐하면 "성직제도(聖職制度)""교회(敎會)" 안에만 오로지 있을 수 있는 제도이기 때문입니다.

 

아니, 어떻게 "교회(敎會)", 즉, "교회(敎會, true Church)", 즉, "그리스도의 참 교회(truch Church of Christ)" 안에 "성직제도(聖職制度)"가 존재할 수 있는지요??? 그렇지 않는지요?

 

따라서, 그 자구적 의미 그대로의 "가성직제도(假聖職制度)"는, 여기서 "가(假)" 낱글자의 의미가 거짓의(false), 가짜의(pseudo-), 혹은 임시변통의(improvised) 등의 자의적/작위적 해석들에 무관하게(regardless), 1785년에 이르면 그 이전의 시점에 우리나라 조선에 이미 도래하여 존재해 온 우리나라 조선의 지역 교회/개별 교회(particular church) 안에는, 있을 수 없는 제도입니다.

 

게시자 주 1-2: 다른 한편으로, 다음의 파란색칠을 한 글들을 클릭하면, "성직제도(聖職制度)"라는 표현이, 영어 표현 "clerical system"이라는 개신교회의 용어에 대응하는, 따라서 개신교회에서 사용하는 번역 용어임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clerical system" "聖職制度" <----- 여기를 클릭하십시오

(이상, 게시자 주 1-2 끝)

 

1-3.

1-3-1. 다음의 파란색칠을 한 단어들을 클릭하면, 구글 검색 결과를 확인할 수 있듯이, "가성직제도(假聖職制度)"라는 표현이 여기 저기서 마구 사용되고 있는데, 이들 모두가 우리나라 안이거나, 혹은 매우 드물게 우리나라 조선의 천주교회사를 안내하는 중국의 사이트 한 두 군데임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假聖職制度" <----- 여기를 클릭하십시오 

 

1-3-2. 다음은, 굿뉴스 서버 제공의 초판 "가톨릭대사전"에 표제어로 수록된 "가성직제도(假聖職制度)"에 대한 설명 전문인데, 그런데, 많이 부족한 죄인인 필자가 생각할 때에, 아무리 길었더라도 2년 이하의 대단히 짧은 기간 동안에 지속된 그 무엇을 두고서, 과도하게(inordinately)"...제도(制度, system)"라고 부르는 것은, 정도가 지나친 강조이기 때문에, 문제가 아닐 수 없다고 지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리고 "가톨릭대사전"에서 "가성직제도(假聖職制度)"에 대응하는 라린어 용어 혹은 영어 용어를 구체적으로 밝히지 못하고 있음에도 또한 반드시 주목하십시오:

 

출처: http://maria.catholic.or.kr/dictionary/term/term_view.asp?ctxtIdNum=19 

(발췌 시작)

가성직제도(假聖職制度)

 

      초기 한국 천주교회에서 평신도들이 성직자의 고유한 성무(聖務)를 집행했던 제도. 한국 천주교회 창설기인 1786년부터 1787년경까지 이승훈(李承勳, 베드로), 권일신(權日身,프란치스코 사베리오), 유항검(柳恒儉, 아우구스티노), 홍낙민(洪樂敏, 루가) 등 10여명의 지도급인물들이 약 2년간 신품(神品)을 안받은 채 사제(신부)로서 미사성제(聖祭)를 드리고 고해(告解) 등 각종 성사(聖事)를 집전하였다. 1784년 이승훈이 북경(北京)에서 베드로라는 본명으로 세례를 받고 돌아온 이래 그를 북경으로 가게 했던 남인(南人) 학자 이벽(李檗, 세자 요한)을 중심으로 권일신, 정약전(丁若銓) · 정약종(丁若鍾, 아우구스티노) · 정약용(丁若鏞, 요한) 3형제, 이존창(李存昌, 별명 단원, 곤자가의 루도비코), 홍낙민, 유항검, 김범우(金範禹, 토마스) 등 양반 및 중인신분 사람들이 차례로 입교함으로써 창설된 한국 교회는 처음 서울 명례방(明禮坊)[지금의 乙支路 2가]에 있던 김범우의 집을 집회장소로 삼아 주일과 축일을 지내왔으나 그 때까지는 아직 이런 제도는 실시되지 않았다.

 

       이 제도는 1785년 일어난 박해 즉 추조적발사건(秋曹摘發事件)으로 김범우가 유배되어 순교하고, 주도 인물이었던 이벽이 타의로나마 은거케 된 뒤, 북경에가서 직접 성직자들의 성사 집행광경을 보고 온 이승훈에 의해 교회발전책으로 제의되어 채택되었다. 그러나 유항검이 교리서(敎理書)를 자세히 연구하여 본 결과 신부의 자격과 신부를 임명한 것이 효력이 있느냐 없느냐에 대하여 큰 의심을 품게 되어 성사를 중단하고 북경주교에게 이 문제에 대해 문의하는 편지를 쓰기로 결정하였다. 이 편지는 이승훈과 권일신의 이름으로 씌어져 1789년 10월(음), 권일신의 제자 윤유일(尹有一, 바오로)을 통해 북경의 북당(北堂) 선교사들에게 전달되었으며 이승훈 등은 1790년 윤유일로부터 북당 선교사들의 회답을 받을 수 있었다. 이회답에서 선교사들은 성사를 마구 집전한 것을 무지로 돌리고 아무런 책망도 하지 않았다. 그러나 진정한 통회로써 구원을 얻도록 노력할 것이고, 구원의 가장 확실한 길은 성직자를 영입하는 것이므로 그 조속한 실현을 권고하였다. 이로써 한국의 평신도들은 신품성사를 받은 성직자가 교회에 필요함을 비로소 인식하고 북경교회에 선교사파견을 요청하기 위해 윤유일을 다시 밀사(密使)로 북경에 파견하게 되었다.

 

   [참고문헌] 샤를르 달레 原著, 安應烈 · 崔奭祐 譯註, 韓國天主敎會社, 上·中·下, 분도출판사, 1979∼1980.

(이상, 발췌 끝)

 

1-4. 다음은 개정판 "가톨릭대사전"에 표제어로 수록된 "가성직제도(假聖職制度)"에 대한 설명 전문입니다:

 

출처: http://ch.catholic.or.kr/pundang/4/cb/가톨릭대사전/가성직제도.htm

(발췌 시작)

 

<가성직제도 (假聖職制度)>

 


한국 교회 초창기 지도급 평신도들이 신부를 자청하면서 임의로 설립하였다가 폐지한 성직 제도.

 

이 제도 안에서 고백성사와 성체성사 등을 함부로 거행하였다. 그러므로 평신도들이 임의로 성직 제도를 수립한 일은 독성죄(瀆聖罪)에 해당하는 것이지만, 결과적으로는 초기 교회 안에서 신자들의 열심을 북돋우고 복음을 전파하는 일에 크게 기여했다고 평가된다.

 

 [수립과 실행] 한국 교회는 중국 북경(北京)에서 영세 입교한 이승훈(李承薰. 베드로)이 1784년 봄에 귀국하여 이벽(李壁. 요한)과 함께 동료들에게 복음을 전하면서 많은 사람이 믿음을 일으켜 영세를 청해 옴에 따라 그들에게 영세를 주고, 그들과 함께 종교 집회를 가짐으로써 시작되었다.

 

이후 영세한 신자수는 곧 1천 명을 넘어서게 되었으며, 새로 영세한 사람들도 곧 전교에 참여하게 되었다. 이때 이벽, 권일신(權日身,프란치스코 사베리오), 김범우(金範禹, 토마스) 등이 특히 이승훈의

 

전교 활동을 적극적으로 도왔다.

 

그런데 1785년 봄 이벽이 김범우의 집에서 비빌리에 종교 집회를 주도하던 중 발각되어 교회는 정부의 탄압을 받게 되었다. ‘을사추조적발사건’(乙巳秋曹摘發事件)으로 불리는 이 첫 박해의 문초에서 김범우와 최인길(崔仁吉, 마티아) 등은 그들의 신앙을 조금도 굽히지 않았다.

 

뿐만 아니라 권일신 부자를 위시한 일부 신도들도 자신들이 천주교를 믿고 있으니 함께 처벌해 줄 것을 요구하였다. 그러나 김범우만이 유죄 판결을 받고 유배되었을 뿐 나머지 사람들은 모두 석방되었다.

 

이 박해는 천주교도들의 기를 꺽기는커녕 용기를 더해 주어 전교 활동에 더 열을 올리게 하였다. 더 나아가 그들은 자신들의 신앙을 심화시키는 동시에 외교인들의 개종을 촉진시키려는 의도에서 이른바 ‘가성직제도’를 세워 모든 성사를 집전하게 할 계획을 세우게 되었다.

 

이를 위해 이승훈을 위시한 한국 교회의 지도자들은 1786년 봄에 모임을 갖고 우선 고해성사를 집전하기로 결정하고, 이어 가을 모임에서는 이승훈에게 미사와 견진성사를 접전할 권한을 부여하였다.

 

한편, 이승훈은 같은 권한을 권일신, 홍낙민(洪樂敏, 루가), 유항검(柳恒檢, 아우구스티노) 등 10명에게 부여하고 그들을 신부로 임명하여 함께 성사를 거행하였다. 신자들은 열광적으로 성사를 받았다.

 

물론 영세를 제외하면 이른바 신부들이 집전한 성사는 모두 무효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집전한 성사는 기대했던 대로 신자들의 열성을 촉진시키고 신앙 전파에 새로운 충동을 불러일으켰다.

 

그러던 중 이승훈이 임명한 신부 중의 하나인 유항검이 그들이 집전하는 성사의 유효성에 관해 중대한 의혹을 제기하기에 이르렀다.

 

 

[폐지와 의의] 유항검은 신부로 임명된 후 성사에 관한 교리서  (《성교절요》인 듯)를 숙독한 결과 그들의 성사 집전이 부당할  뿐만 아니라 독성죄가 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는 즉시 이승훈 등 교회 지도자들에게 편지를 보내, 성사를 중단하고 북경의 선교사들에게 밀사(密使)를 보내 필요한 지시를 구하도록 강력히 요구하였다.

 

유항검의 주장은 ‘사제직은 인호(印號)를 박아 주는데 이승훈은 그와 같은 인호를 북경의 선교사들로부터 받지 않았으므로 다른 사람을 사제직에 올릴 수 없으며, 따라서 사제품을 받지 않고 인호가 없는 성서를 집전하고 있으니 독성죄일 수 밖에 없다는’ 것이었다.

 

이러한 유항검의 편지를 받은 이승훈의 처지는 매우 난처하였다. 이승훈 자신은 유항검의 편지를 받고 즉시 성사를 중단시켰다고 말하고 있으나, 유항검의 편지를 보면 절대로 그렇지가 않았다.

 

그는 이후에도 이승훈에게 거듭 편지를 보내 성사의 중단을 요구하였다. 그러므로 성사 집전은 유항검의 이의가 있은 후에도 상당 기간 지속되었을 것이 분명하다.

 

이승훈으로 하여금 성사의 중단을 주저하게 만든 것은 아마도 그로 인해 신부들이 당하게 될 망신, 무엇보다도 중단에서 야기될지도 모를 혼란에 대한 불안과 두려움 때문이었을 것이다. 과연 이승훈도 성사가 중단 된 후 신자들의 열심이 식어지고 그간의 많은 성과가 지속되지 못하고 있음을 한탄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한국 교회에서는 북경 교회에 밀사를 파견하여 필요한 지시를 얻으려는 문제 또한 계속되는 정부의 감시와 신자들의 가난 때문에 여의치가 않았다. 실제로 1789년 말에 가서야 북경에 밀사를 파견하는 문제가 겨우 실현될 수 있었다.

 

 

이해 말 한국 교회는 동지사 편에 신문 교우인 윤유일(尹有一)을 밀사로 선발하여 북경 교회에 파견하였는데, 그는 북경의 북당(北堂) 선교사들에게 보내는 이승훈의 편지를 가지고 갔다.

 

이승훈은 이 편지에서 자신이 영세하고 귀국한 이래 한국 교회에 새로운 신자 집단이 형성되어 발전하고 있는 사실을 말하고, 무엇보다도 그간 마구 성사를 거행한 엄청난 죄를 낱낱이 고백하는 한편 성사가 중단됨으로써 실의에 빠져있는 한국 교회에 하루 속히 구원의 소실을 펴 줄 것을 간절히 호소하였다.

 

북경에 무사히 도착한 윤유일은 북당을 찾아가 이승훈의 편지를 전하였고, 북당 선교사들은 윤유일에게 회답을 써 주었다.

 

여기서 선교사들은 한국 신자들에게 상등통회(上等痛悔)를 통해 구원을 받도록 노력할 것, 그리고 사제를 영입하여 성사를 받는다는 보다 확실한 구원의 방법을 강구하도록 권고하였다. 윤유일은 이 회신을 가지고 다음해(1790) 봄에 무사히 귀국하였다.

 

한국 교회 지도자들은 선교사들의 권고에 따라 사제를 영입하기로 결의하고 그 사실을 알리기 위해  그 해 또다시 윤유일을 북경에 파견하였다. 윤유일은 이번에도 이승훈의 편지를 가지고 때마침 북경으로 떠나는 특별사행(特別使行)을 이용하여 9월에 북경에 도착, 북당을 찾아가 이승훈의 편지를 전하였다.

 

한편 선교사들은 한국에 선교사를 파견하는 문제를 북경 주교에게 건의하였고, 북경 주교는 윤유일에게 다음해 한국에 선교사를 보낼 것을 약속하였다.

 

이로써 다음해 한국에 파견된 선교사는 입국에 실패하였으나 그 뒤를 이어 파견된 선교사는 1794년 말 입국하는 데 성공하였으며 그 결과 한국 교회에서는 비로소 참된 성사가 거행되기 시작하였다.

 

이와 같이 가성직제도는 한국 교회로 하여금 사제의 필요성을 인식시켜 사제를 영입하도록 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다. 그러므로 비록 그 제도 자체가 불법이고 또 성사도 영세를 제외하면

 

모두가 무효였다 할지라도 신자들의 열심을 북돋우고 복음을 전파하는 일에 크게 기여했음은 분명하다.

 

 [연구 과제] 한국 교회가 창설된 벽두에 평신도들이 가짜 성직 제도(*1)를 만들어 가짜 성사들을 집전하였다는 역사적 사실은 1874년에 간행된 달레(Ch. Dallet)의 역사서에서 비로소 밝혀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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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게시자 주: 바로 이 지적으로부터 우리는, "성직제도(聖職制度)"에 있어 "()"라는 낱글자의 의미가, 달레 신부님의 기술처럼 임시변통(improvised)아니고, 대신에, 가짜(pseudo-)/거짓(false)의 의미로 개정판 "가톨릭대사전"의 담당 집필자(들)에 의하여, 대단히 잘못 이해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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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그 근거로 ‘그 시대의 기록’이라는 말 외에 구체적인 자료의 제시가 없었다. 한편 한국측 자료에는 ‘함부로 성사를 거행했다’, ‘동정을 지키지 못해 미사를 드리지 못하게 되었다’는 등 단편적인 기록은 있지만, 달레의 이야기를 뒷받침할 만한 자세한 기록은 발견되지 않고 있었다.

 

그러던 중 1960년대에 로마의 포교성성 고문서고에서 성사 거행에 관한 이승훈과 유항검의 서한들이 발견되었다. 이 서한들은 비록 번역문이기는 하지만 동 시대의 기록이라는 점에서 더없이 중요하다.

 

이들 기록에 비추어 볼 때 달래의 기록은 대체로 고증될 수 있지만 시정되어야 할 곳도 적지 않았다. 그 두드러진 예로 주교는 없었다는 사실이다.

 

권일신도 신부의 한 사람이었지 주교는 아니었으며, 신부단의 우두머리도 권일신이 아니고 이승훈이었다. 또 성사도 1787년이 아니라 이미 전해, 즉 1786년에 시작되었다.

 

그밖에도 유항검에 의해 처음으로 성사의 유효성에 대한 의혹이 제기된 사실, 또 그가 이러한 의혹을 발견한 교리서의 이름도 밝혀지는 등 일련의 새로운 문제들이 밝혀지게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자료의 발굴만으로 가성직제도에 관한 모든 문제가 해결된 것은 아니고, 더욱이 달래의 기록에 나오는 사실을 모두 고증하려면, 또 다른 사료의 발굴이 절실히 요구되는 실정이다.

 

예를 들면, 달레의 기록에는 신부들이 미사 때 사용한 성작과 제의, 뒤늦게 여교우들이 고해성사에 참여하게 된 이야기들이 자세히 나오지만, 이승훈이나 유항검의 서한에는 그러한 언급이 전혀 없다.

 

그리고 이승훈은 10명을 같은 신부로 임명하였다고 하였는데, 실제로 밝혀진 신부수는 달레의 서술에서 나오는 이존창(李存昌, 곤자가의 루도비코), 최창현(崔昌顯, 요한)을 포함해도 6명 밖에 안된다.

 

또 유항검의 서한에는 미사 예절에 관한 내용이 나오지만 달레의 기록에는 그런 이야기가 없다. 또 성사 집전이 언제 시작되고 얼마동안 계속 되었느냐 하는 사실도 결론짓기 어려운 문제다.

 

이승훈의 편지에 의하면 1786년 봄에 시작되고 그 다음해 유항검의 편지를 받자 중단한 것으로 보아야 하지만, 유항검의 편지를 보면 이승훈의 말을 그대로 믿기 어렵다. 한편 달레는 1787년에 시작되어 2년간 지속된 것으로 보았다.

 

끝으로 과연 ‘가성직제도’란 용어가 적절한 표현인가 하는 것도 문제이다. 이것은 달레가 만들어낸 용어이다.(*2) 그의 주장대로 신부 외에 주교가 있었다면 또 모른다.

 

그러나 주교가 없었던 사실이 밝혀진 오늘에까지 그 표현을 계속 사용할 수 있는가는 한 번 생각해 볼 문제이다.(*3)

 

동시대인들도 그러한 용어를 사용하지 않았고 다만 ‘망행성사’(妄行聖事)로 표현하고 있었다는 사실에 비추어 볼 때 더욱 그렇다.(*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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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게사자 주: 바로 이 주장이 대단히 심각한 오류(error)임을, 아래의 제2-1항제3항에서 실증적으로(positively) 고찰하도록 하겠다.

 

(*3) 게시자 주: 바로 이 지적이, "성직제도(聖職制度)"에 있어 "제도(制度)"라는 번역 용어가, (i) 그 정점에 당신의 교회의 교주이신, 성자 하느님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계시고 그리고 바로 그 아래에 주교(Bishops)들이 있는, 따라서, 신성적 수직적 구조(divine vertical structure)를 그 골격으로서 빈드시 가지고 있음을 의미하는, 전통적 가톨릭 교회의 "hierarchy"(교계/교계제도)에 대응하는 번역 용어인지, 혹은, (ii) 그러한 수직적 구조를 그 내재적 특징으로서 가지고 있지 않은, 따라서 더 포괄적이기는 하나 그러나, 은총(grace)에 의하여 연결되어 유지되는 통공(communion)이라는 하느님과 믿는 이들 사이의 관계에 있어 어떠한 상태가 유지되고 있는지가 애매모호한, "system"(제도)이라는 용어에 대응하는 번역 용어인지에 대하여, 개정판 "가톨릭대사전"의 담당 집필자(들)이 (i) 전통적 가톨릭 교회의 "hierarchy"(교계/교계제도)를 말한다고 이해하고 있음을 독자들에게 밝히고 있음에 또한 주목하여야 할 것이다.

 

(*4) 게시자 주:  ‘망행성사’(妄行聖事)라는 표현은, 다음의 주소에 접속하면 읽을 수 있는, 배론성지 홈페이지 제공의 황사영"백서"에서 불리고 있는(called) 표현이다:

 

출처 1: https://www.baeron.or.kr/sub2/sub22-1.php?h=2&m=2&z=2 

출처 2: https://www.baeron.or.kr/sub2/sub22-1-28.php 

(발췌 시작)

時李承薰等 妄行聖事 家煥勸人領洗 自己不肯 其意欲奉使入燕 受洗於西士*也 未幾見時勢艱難 遂廢工課 而奉敎得謗者 多係家煥之姻親族屬 故惡黨常指斥爲敎主 辛亥窘難時 爲廣州府尹 頗害敎中 爲自明計 用治盜律於敎友 自家煥始 辛亥後 先王頗用南人 家煥乘勢 屢歷名宦 升拜工曹判書 乙卯三人致命後 惡黨不知司鐸之事 歸罪於李承*薰及家煥 交章迭攻 先王不得已 謫承薰于禮山 左遷家煥爲忠州牧使

(이상, 발췌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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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 발췌 끝)

 

1-5. "가성직제도(假聖職制度)"라는 표현이, 비록

 

(i) 위의 제1-3항에 발췌된 초판 "가톨릭대사전"의 참고 문헌에서는 달레 신부님의 프랑스어본 원본의 우리말 번역본인 "韓國天主敎會社"(한국천주교회사)가 이 표현의 출처인 것처럼 언급되고 있고, 그리고

 

(ii) 바로 위의 제1-4항에 발췌된 개정판 "가톨릭대사전" 본문에서는, 우리말 번역본인 "韓國天主敎會社"(한국천주교회사)의 번역대본인 달레 신부님의 프랑스어본 원본이라고 주장하고 있으나,

 

그러나 이들 둘 다는, 많이 부족한 죄인인 필자가 아래의 제2-1항제3항에서 실증적으로(positively) 확인한 바에 의하면, 모두 사실이 아닙니다.

 

심지어, 1803년에 개최된 중국 사천성(四川省) 시노드의 문헌에도 포함된, 얀센주의적 선교 방식을 채택하였던, 중국 청나라와 우리나라 조선에서 활동한, 프랑스 파리 외방 선교회 소속의 신부님들에 의하여도 우리나라 조선에 도입되어 사용되지 않았음을, 이어지는 제2-1항에서 실증적으로(positively) 고찰하도록 하겠습니다.

 

게시자 주 1-5: 따라서, 그리스도교 전교/전교(mission)/복음화(evangelization)에 있어, 그리고 더 나아가, 토착화(inculturation)에 있어, 대단히 부적절한 표현들에 "가성직제도(假聖職制度)"라는 표현이 포함된다는 생각입니다.

 

2. 유관 사료 분석 I

 

2-1. 다음에 발췌 된 바는, 프랑스 파리 외방선교회 소속의 달레 신부님(1829-1873년)에 의하여 편집 저술되어 1874년에 출판된, 우리나라 "조선의 천주교회사", 즉, "韓國天主敎會社"(한국천주교회사)의 프랑스어 원본 중의 유관 부분인, 이 책의 pp. 30 - 33 을 발췌 한 것인데, 그러나 여기에는 "가성직제도(假聖職制度)"에, 자구적 어의/의미(literal sense)에 있어 정확하게 대응하는(exactly corresponds), 단일한(single) 프랑스어 표현이 없음에 빈드시 주목하십시오:

 

출처 1: http://ch.catholic.or.kr/pundang/4/cb/1829-1878_달레/1874_권1_histoiredelgli01dall.htm [주: 권1] 

출처 2: http://ch.catholic.or.kr/pundang/4/cb/1829-1878_달레/1874_권2_histoiredelgli02dall.htm  [주: 권2]

(출처 1로부터 유관 부분 발췌 시작)

[...] L'année suivante, tieng-mi (1787), les clameurs contre la religion se calmèrent peu à peu, les contradictions furent moins vives, et plusieurs de ceux qui avaient cédé à l'orage, manifestèrent leur repentir. Pierre Ni Seng-houn-i, entre autres, qui avait succombé par faiblesse, revint de nouveau trouver François-Xavier Kouen et les frères Tieng, Iak-iong et Iak-tsien. Ceux-ci le reçurent à bras ouverts.

 

     C'est vers cette époque que, pour favoriser la propagation de l'Évangile, et confirmer dans la foi les néophytes, François-Xavier Kouen, Pierre Ni, les frères Tieng et autres chrétiens influents formèrent le dessein d'établir entre eux la hiérarchie sacrée [졸번역: 거룩한 복음의 전파를 촉진하기 위하여, 그리고 새 교우/신문교우/세례 준비자들을 믿음 안에서 확고하게 하기 위하여, 권일신(사비에르), 이승훈(베드로), 정 형제[즉, 정약용과 정약전]들 그리고 다른 영향력있는 그리스도인들이 그들 사이에 성별된/성스러운 교계(敎階)/교계제도(敎階制度)(the sacred hierarchy)를 제정할 의항을 형성한 것은 바로 이 시기 쯤이었습니다].(*1) Cette pensée, quelque étrange qu'elle semble, était néanmoins bien naturelle. N'ayant pas le bonheur, comme les chrétiens de Chine leurs modèles, de posséder des pasteurs venus de l'Occident, les chrétiens de Corée comprenaient cependant trèsbien qu'une église ne peut pas subsister sans chef. Dans leur ignorance sur la nature du sacerdoce, sur sa transmission par unechaîne non interrompue qui remonte jusqu'au souverain Prêtre Jésus-Christ, ils crurent ne pouvoir rien faire de mieux que de se créer à eux-mêmes, des évêques et des prêtr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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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번역자 주: 경향잡지 1907년 제1권(보감 1906년 제8호)에 실린 바로 이 부분의 우리말 번역문은 다음의 주소에 접속하면 읽을 수 있다:

http://www.albummania.co.kr/gallery/view.asp?seq=55210&path=070413110139&page=8 

(발췌 및 우리말의 현대 어법에 맞게 옮김)

이 때에 성교를 널리 전하고 신문교우를 신덕에 굳게 하고자 하여, 권방지거[즉, 권철신]과 정약전과 정약용 형제와 이베드로[즉, 이승훈]와 다른 유명한 교우들이 서로 모여 공론하여 성교회 다스리는 권병(權柄)을 세우기로 작정하니 [...]

(이상, 발췌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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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ierre Seng-houn-i avait vu à Péking la hiérarchie catholique en action : l'évèque, les prêtres et les autres clercs inférieurs. Il avait assisté aux saints mystères dans l'église de cette ville. Les sacrements avaient été administrés en sa présence. Il rappela tous ses souvenirs, et à l'aide des diverses explications qui se trouvent dans les livres liturgiques ou dogmatiques à l'usage des chrétiens, on arrêta un système complet d'organisation, et on procéda de suite à l'élection des pasteurs. 

 

     François-Xavier Kouen, que sa position, sa science et sa vertu mettaient au premier rang, fut nommé évoque. Pierre Ni Senghoun-i, Louis de Gonzague Ni Tan-ouen-i, Augustin Niou, Jean T'soi Tsiang-hien-i et plusieurs autres, furent élus prêtres. On ignore s'il y eut quelque cérémonie, ressemblant h une consécration ou ordination. Chacun se rendit immédiatement à son poste, et ils commencèrent une sorte d'administration des chrétiens, prêchant, baptisant, confessant, donnant la confirmation, célébrant les saints mvstères, et distribuant la communion aux fidèles. Ces sacrements sont les seuls que nous trouvioiis mentionnés dans les mémoires du temps. Le baptême donné par ces pasteurs était évidemment valide, et conférait la grâce de la régénération. Les autres sacrements qu'ils administraient étaient évidemment nuls. Néanmoins, il est certain que leur ministère réchauffa partout la ferveur, et donna un nouvel élan à la propagation de la foi dans tout le royaume. On parle encore de Tenthousiasme des chrétiens, de leur sainte ardeur pour assister aux cérémonies et pour recevoir les sacrements. La grand'mère du célèbre martyr André Kim, le premier prêtre indigène de la Corée, a raconté que Louis de Gonzague Ni, son oncle, par qui elle avait été baptisée, se servait d'un calice d'or pour célébrer le sacrifice. Les ornements sacrés étaient confectionnés avec de riches soieries de Chine. Ils n'avaient pas la forme de nos chasubles, mais ils étaient semblables à ceux dont les Coréens font usage dans leurs sacrifices. Les prêtres portaient le bonnet usité en Chine, dans les cérémonies du culte catholique. Pour entendre les confessions des fidèles, ils se plaçaient sur un siège élevé sur une estrade, et les pénitents se tenaient debout devant eux. Les pénitences ordinaires étaient des aumônes, et pour les fautes les plus graves, le prêtre frappait lui-même le coupable sur les jambes avec une verge. Accoutumés, selon les lois de l'étiquette coréenne, à fuir la vue des femmes de condition, les prêtres refusèrent d'abord de les confesser; mais les instances furent si vives qu'il fallut y consentir. Ils ne faisaient pas la visite des chrétientés, mais on venait auprès d'eux leur demander les sacrements. Ils voyageaient à pied, et s'excitaient toujours à éviter le faste et l'orgueil.

 

     A la capitale, Jean T'soi Koan-t'sien-i loua une maison pour l'administration des sacrements. Plein d'activité et doué d'une grande pénétration d'esprit,  il réglait toutes les affaires, recevant les prêtres et préparant les chrétiens. Jour et nuit, il était occupé à ce ministère, sans redouter ni les embarras ni les fatigues; il était comme le catéchiste général de la chrétienté. Son père, quoique ne pratiquant pas la religion, était loin de s'opposer aux nombreuses réunions qui se faisaient chez lui ; il les protégeait, au contraire, de tout son pouvoir. 

 

     Ce clergé coréen improvisé continua ainsi ses fonctions pendant près de deux ans, avec de grands succès et dans une parfaite bonne foi [졸번역: 바로 이 임시변통(臨時變通)된(improvisé)(*2) 조선(朝鮮)의 신직자단(神職者團)/성직자단(聖職者團)(clergé)[즉, 바로 이 조선의 자봉성직자단(自封聖職者團)/자봉성직인원(自封聖職人員)](*3)은 바로 이러한 방식으로(ainsi), 커다란 성공과 함께 그리고 완미(完美)한(parfaite, perfect) 선한 믿음(bonne foi, good faith) 안에서, 거의 2년 동안 그 역할(fonctions)들을 계속하였습니다].(*4)  Mais en l'année kei-iou (1789), certains passages des livres de religion, examinés plus minutieusement, firent naître dans l'esprit des prêtres et de l'évêque des doutes sérieux sur la validité de leur élection et de leur ministère. Ils conclurent qu'il fallait de suite renoncer à toute administration comme à une entreprise téméraire, et prirent la résolution d'écrire à révêque de Pékin pour le consulter à ce sujet. Après s'être ainsi avancés devant toute la chrétienté, il dut leur en coiiter beaucoup, pour abandonner immédiatement leur position, au risque de s'exposer à la risée publique. Mais leurs intentions étaient droites, leur foi sincère, et ils ne voulurent, sous aucun prétexte, s'exposer à profaner les choses saintes. Ils reprirent donc immédiatement leur place parmi les simples fidèles, et ne s'occupèrent plus qu'à instruire les nouveaux chrétiens, et à prêcher la foi aux Gentil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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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번역자 주: 여기서의  전후 문맥 안에서 프랑스어 'improvisé'를 많이 부족한 죄인인 필자가, '즉흥적인" 대신에'임시변통(臨時變通)된'으로 번역한 것은 '달레 신부님의 선의(good will)의 개인적 견해'를 십분 반영한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개인적 견해와는 달리, 당시의 우리나라 조선의 천주교회의 신앙의 선조 제1세대의 입장에서는, 그러한 자봉성직자단(自封聖職者團)/자봉성직인원(自封聖職人員)의 도입이, 천주교회의 전통적 신품성사에 대한 무지(ignorance) 때문에, 그럼에도 불구하고, 진솔한 '그리스도인들의 경의 혹은 존중과 함께 당연한 의무들에 대한 충실(Christian piety)'(#1) 안에서, 대단한 심사숙고(deliberation) 끝에, 결코 우연적(accidental)이 아니라, 따라서, 필연적으로(necessarily) 취하게 된 참으로 거룩한 조치였지, 결코 'improvised', 즉, '임시변통된' 혹은 '즉흥적인' 조치 아니었음에 반드시 주목하라.

 

(*3) 번역자 주: 바로 이 번역문에서 말해지고 있는 단체를, 과도하게(inordinately) 굳이 ""(거짓/가짜 가, false/pseudo-) 낱글자를 사용하여, 위의 제1-2항. 질문 1에 대한 간단한 답변에서 이미 지적한 바와 같은 동일한 이유로, 매우 부적절하게, "聖職者團"(성직자단)으로 번역한 것이, 결국에, 출처불명의 "성직제도(聖職制度)"라는 매우 부적절한 신조어의 창출에 기여하였을 것이라는 것이, 필자의 생각이다.

 

(*4) 번역자 주: 경향잡지 1907년 제1권(보감 1906년 제9호)에 실린 바로 이 부분의 우리말 번역문은 다음의 주소에 접속하면 읽을 수 있다:

http://www.albummania.co.kr//gallery/view.asp?seq=55212&path=070413110801&page=6&flip=0 

(발췌 및 우리말 현대 어법에 맞게 옯김)

스스로 탁덕(鐸德) 위(位)[즉, 신부(神父)의 지위]에 오른 이들이 교중(敎中)에[즉, 가르침 중에] 열심으로 도와 두 해 동안 소임을 채우되, 순직한 마음으로 하야, 조금도 의심치 아니터니 [...]

(이상, 발췌 끝)

 

(#1) 번역자 주: 토착화(inculturation) 과정에 있어 중요한 개념인 이 용어의 정의(definition) 등은, 다음의 주소에 접속하면 읽을 수 있는 졸글/논문에 자세하게 기술되어 있다:

http://ch.catholic.or.kr/pundang/4/soh/1628.htm <----- 필독 권고

[제목: 민간의(popular) 경의/존중과 함께 당연한 의무들에 대한 충실(piety)의 성경 근거 외; 게시일자: 2015-04-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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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La lettre consultative à l'évêque de Péking ayant été rédigée par Pierre Seng-houn-i et François-Xavier Rouen, on rechercha les moyens de la faire parvenir sûrement. L'ambassade annuelle offrait une occasion naturelle. Mais il fallait trouver un homme capable et dévoué qui voulût accepter la périlleuse mission d'établir des relations nécessairement secrètes, avec l'Église de Chine. Il n'y avait pas de chrétien dans l'ambassade : il fallait y en faire entrer un à l'insu des païens. On jeta les yeux sur le catéchumène Paul loun lou-ir-i, pour ce rôle important. Paul loun descendait d'une famille noble du district de Nie-liiou. 11 avait été disciple des Rouen, et François-Xavier l'avait instruit des vérités de la religion. Son caractère doux et affable et sa grande discrétion le rendaient propre à l'entreprise projetée. Il accepta la mission qu'on lui confiait, se chargea de la lettre à l'évêque, et déguisé en marchand, partit pour Péking à la dixième lune de cette même année 1789.  

 

La route de Séoul à Péking est de trois mille lys, plus de trois cents lieues. Ce long voyage, fait pendant l'hiver, dans un pays étranger, est très-pénible et offre des dangers véritables. Il n'est pas rare de voir plusieurs personnes de l'ambassade succomber à la suite de maladies contractées en route. Les fatigues ordinaires étaient bien plus grandes encore pour Paul qui, appliqué dès l'enfance à l'étude, et habitué à une vie sédentaire, n'avait aucune expérience des voyages, et se trouvait isolé au milieu de compagnons inconnus, sans aucun appui humain. Il dut cependant faire la route à pied, comme tous ceux dont il simulait la profession, et enfin, malgré mille difficultés, soutenu qu'il était par la grâce toute-puissante de Dieu, il arriva heureusement à Péking. Il se rendit aussitôt auprès de l'évêque, lui remit la lettre dont il était porteur, et lui raconta dans le plus grand détail tout ce qui s'était passé en Corée, les joies el les tribulations de la clirétienté naissante. L'arrivée inattendue de  Paul causa une joie bien vive dans l'église de Péking. La préseuce de ce chrétien, venu d'un royaume où jamais aucun prêtre n'avait prêché le nom de Jésus-Clirist, et expliquant de (pielle manière admirable la foi s'y était propagée, fut le plus doux des spectacles pour les missionnaires et surtout pour ï'évêque, Mgr Govea, qui se hâta d'écrire une lettre pastorale à ces nouvelles ouailles que Dieu lui donnait.

 

     Au printemps de l'année kieng-sioul (^1790), Paul reprit à la suite de l'ambassade la roule de sa patrie. Il avait reçu à Péking les sacrements de Baptême, d'Eucharistie et de Confirmation (1). Fortifié par ces secours célestes, il sut se tirer adroitement de tous les mauvais pas, passa la frontière sans exciter de soupçon et revint à la capitale, sans s'être attiré aucune fâcheuse affaire.

 

     La réponse de Ï'évêque était écrite sur une pièce de soie, afin que Paul put la cacher plus aisément dans ses habits, et l'introduire en Corée d'une manière plus sûre et plus facile. Elle était adressée à Pierre Ni et <à Xavier Kouen. Le prélat commençait par exhorter les néophytes à rendre d'immortelles actions de grâces au Dieu très-bon et très-grand, pour l'inestimable bienfait de la vocation à la foi. Il les excitait à la persévérance et à l'emploi des moyens nécessaires pour conserver la grâce de l'Évangile. Venait ensuite une exposition abrégée des dogmes et de la morale chrétienne. Pierre et François-Xavier étaient repris pour s'être ingérés témérairement dans le ministère sacerdotal. L'évêque leur expliquait qu'ils ne pouvaient nullement célébrer les saints mystères et administrer les sacrements ,à l'exception du baptême, parce qu'ils n'avaient pas reçu le sacrement de l'Ordre ; mais qu'ils élisaient une action très-agréable à Dieu en instruisant et encourageant les chrétiens, et en convertissant les infidèles. Il les exhortait à persévérer dans cette conduite.

 

     Cette réponse, attendue si longtemps, ne laissait plus aucun doute. Elle fut reçue avec une entière soumission, et chacun se félicita de la prudence qu'on avait eue d'interrompre les fonctions du saint ministère.

 

[...]

(이상, 발췌 및 일부 문장들의 우리말 번역 끝) 

 

2-2. 바로 위의 제2-1항에 발췌된 바로부터 다음의 결론을 도출할 수 있다는 생각입니다:

 

(이 글의 결론 1) "가성직제도(假聖職制度)"라는, 중국인들이 전혀 사용하지 않는, 따라서 우리나라식 한자 표기인, 교의신학적으로 대단히 부적절한 한 개의 신조어는, 우리나라 조선인이 아닌, 프랑스 파리 외방선교회 소속의 프랑스인인 달레 신부님(1829-1873년)에 의하여 창안된 표현이 결코 아님을, 이 글의 한 개의 결론으로서 도출합니다.

 

2-3. 위의 제2-1항에 발췌된 바에서 clergé coréen improvisé 라는 표현을 많이 부족한 죄인인 필자가 임시변통(臨時變通)된(improvisé) 조선(朝鮮)의 신직자단(神職者團)/성직자단(聖職者團)(clergé)[즉, 조선의 자봉성직자단(自封聖職者團)/자봉성직인원(自封聖職人員)]이라고 번역하였는데, 이 번역은 얀센주의적 선교 방식을 따르고 있었던 당시의 프랑스 파리 외방선교회 소속의 달레 신부님의, 얀센주의적 선교 방식이라는 사고의 틀 안에서는 대단히 우호적인, 개인적 견해를 그대로 반영하여 우리말로 번역한 것입니다.

 

그리고 clergé coréen improvisé 라는 표현을 좀 더 중립적인, 그리고 당시의 우리나라 조선의 천주교 신앙의 제1세대의 상황을 있는 그대로, 발생한 그대로를 더 정확하게 반영하는, 따라서, 이들 대다수를 두고서 배교자들이라고 단죄하는 그 시대 이후의 시기에 우리나라 조선에 처음으로 우리나라 조선에 전달되고 널리 퍼져 적어도 20세기 후반까지 유지되어 온 얀센주의적 선교 방식의 영향을 배제한직역 번역(literal translation)을 한다면, 많이 부족한 죄인인 필자가 생각할 때에, 조선의 자봉성직자단(自封聖職者團, 즉, 성직을 스스로에게 선언한 자들의 단체)/자봉성직인원(自封聖職人員, 즉, 성직을 스스로에게 선언한 인원)이 혹은 이와 등가의 표현이 될 것입니다.(*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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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게시자 주: (1) 이러한 중립적인 번역은, 예를 들어, 다음의 주소에 접속하면 읽을 수 있는, 우리나라 조선의 천주교회 초기의 박해사를 전달하고 있는 중국 천주교회 측의 자료에서 접할 수 있다:

https://www.newton.com.tw/wiki/%E8%BE%9B%E9%85%89%E9%82%AA%E7%8D%84/8455833 

(발췌 시작)

[...] 朝鮮教會最開始是假聖職制度”(自封聖職, 즉, 성직을 스스로에게 선언함北京教區得知後加以制止,[...]

(이상, 발췌 끝)

 

(2) 1705년에 초판된 "성교절요"라는 책자에 의하여 한문 문화권 안쪽으로 구체적으로 전달된, "얀센주의적 선교 방식"의 페해에 대한 필자의 졸글들은 다음의 주소에 접속하면 읽을 수 있다:

http://ch.catholic.or.kr/pundang/4/soh/1936.ht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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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와는 달리, 만약에 clergé improvisé 라는 표현이, 적어도 20세기 후반까지 유지되어 온 얀센주의적 선교 방식의 영향 아래에 있었던 국내의 천주교회 안에서, 아직까지 필자가 파악하지 못한, 어떤 이에 의하여 대단히 부적절한 표현인  "성직자단(聖職者團)"으로 번역되었다면, "성직자단(聖職者團)"이라는 번역 용어의 정의(definition)가톨릭대사전"에, "성직자단(聖職者團)"이라는 표제어 아래에, 마땅히 제시되어 있어야 할 것인데 그러나, 다음의 주소에 접속하면 확인할 수 있듯이, 그렇지 않은 것도 또한 한 개의 문제라 지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http://maria.catholic.or.kr/dictionary/term/term_search.asp?smethod=keyword&group=all&keyword=%EA%B0%80%EC%84%B1%EC%A7%81%EC%9E%90%EB%8B%A8 

 

3. 유관 사료 분석 II

 

3-1. 다음은, 서지학자(書誌學者) 배현숙 교수의 1984년 논문 [제목: 조선에 전래된 천주교 서적, 한국교회사논문집 I, 1984년, 한국교회사연구소 발행]의 각주에서 발췌한 바인데, "가성직제도(假聖職制度)"라는 부적절한 신조어의 출처와 관련하여, 위의 제1-4항에 발췌된 개정판 "가톨릭대사전"에서 발췌한 바 중에서 언급되고 있는, 최석우 신부(1922-2009년)1963년 논문[제목: 이승훈의 편지가 말하는  집행]의 우리말 번역문을 언급하고 있는데, 특히 事(성사)라는 신조어를 이 논문의 제목에서 사용하고 있음에 주목합니다:

 

출처: http://ch.catholic.or.kr/pundang/4/cb/1984_배현숙_조선에_전래된_천주교_서적.htm

(발췌 시작)

 

게시자 주: 바로 위에 발췌된 바에서, 이 논문의 각주 18)를 보라.

(이상, 발췌 끝)


3-2.

3-2-1. 다음의 주소에 접속하면, 바로 위의 제3-1항에서 언급된, "가톨릭 청년", 1963년 4월호, 제17권, 제4호에 게재된, 최석우 신부(1922-2009년)1963년 논문[제목: 이승훈의 편지가 말하는  집행]의 우리말 번역문을 읽을 수 있습니다:

 

출처: http://ch.catholic.or.kr/pundang/4/cb/1756-1801_이승훈/1789_이승훈의_편지_to_구베아_주교_in_1963_가톨릭_청년_4월호_최석우_신부_번역.pdf <----- 필독 권고

 

3-2-2. 그런데, 참으로 기이한 것은, (i) "가톨릭 청년", 1963년 4월호, 제17권, 제4호의 목차에 제시된 바로 이 최석우 신부의 논문의 제목과 (ii) 이 책의 4월호에 실린 동일한 이 논문의 본문 중의 시작 부분의 제목이 동일하지 않음 입니다. 다음에 발췌된 바들을 정밀하게 비교/검토하도록 하십시오:

 

(발췌 시작)

아래에서 "가톨릭 청년" 1963년 4월호 목차에 제시된 최석우 신부의 논문의 제목을 보라:

 

게시자 주: 바로 위에 발췌된 바와 바로 아래에 발췌된 바를 정밀하게 비교/검토하도록 하라.

 

아래에서, 최석우 신부의 논문의 본문 앞에 제시된 제목을 보라: 

(이상, 발췌 끝)

 

3-2-3. 바로 위의 제3-2-2항에 발췌된 두 개의 지면들 중의 대응하는 유관 제목들을 정밀하게 상호 비교/검토하면서 들여다보면, 이 논문의 본문 중의 제목의 "" 앞에, 띄어쓰기에 있어, 한 칸이 빈 것이 아니라, 두 칸이 비어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따라서, 많이 부족한 죄인인 필자가 생각할 때에, 이러한 분명한 차이점은, 이 논문의 본문이 인쇄되기 직전에, 그러나 이미 "가톨릭 청년" 1963년 4월호 목차가 인쇄된 이후의 시점에, 저자인 최석우 신부에 의하여, 지금 현재의 시점에서 필자로서는 더 이상 추정(presumption)을 할 수 없는 어떤 이유 때문에, 자신의 논문의 제목: 이승훈의 편지가 말하는  집행에서, 낱글자 ""이 최종적으로 삭제/제거되었음(delete)을 입증한다는 생각입니다. 

 

[내용 추가 일자: 2021년 9월 10일]

바로 위에서 필자가 지적한 바는, 다음의 검색 결과들로부터 실증적으로(positively) 입증/고증됩니다:

 

"假聖事" <----- google 검색 key  word

 

https://www.google.com/search?q=%22%E5%81%87%E8%81%96%E4%BA%8B%22 <----- 여기서 Ⅱ. 天主敎勢力의 擴大 제목의 글(pdf)로부터, 최석우 신부의 "天主敎 迫害" 제목의 논문의 출처가 "한국사데이터베이스"임을 구체적으로 찾아냄:

 

http://db.history.go.kr/search/searchResult.do?sort=levelId&dir=ASC&start=-1&limit=20&page=1&pre_page=1&itemIds=&codeIds=&synonym=off&chinessChar=on&searchTermImages=%E5%A4%A9%E4%B8%BB%E6%95%8E+%E8%BF%AB%E5%AE%B3&searchKeywordType=BI&searchKeywordMethod=EQ&searchKeyword=%E5%A4%A9%E4%B8%BB%E6%95%8E+%E8%BF%AB%E5%AE%B3&searchKeywordConjunction=AND > 한국사

 

http://db.history.go.kr/search/searchResultList.do?sort=&dir=&limit=20&page=1&pre_page=1&setId=19&totalCount=19&kristalProtocol=&itemId=oh&synonym=off&chinessChar=on&searchTermImages=%E5%A4%A9%E4%B8%BB%E6%95%8E+%E8%BF%AB%E5%AE%B3&brokerPagingInfo=SnUpYrZZuHIxMzHLMdPQRSiQUTBZoWAZHFuCCxKLaPcKOPgSTUVl0n0p&selectedTypes=&selectedSujectClass=&searchKeywordType=BI&searchKeywordMethod=EQ&searchKeyword=%E5%A4%A9%E4%B8%BB%E6%95%8E+%E8%BF%AB%E5%AE%B3&searchKeywordConjunction=AND > 조선 - 민중의 항거 >  天主敎 迫害

 

http://db.history.go.kr/item/level.do?setId=19&totalCount=19&itemId=oh&synonym=off&chinessChar=on&page=1&pre_page=1&brokerPagingInfo=&position=9&levelId=oh_015_0020_0020&searchKeywordType=BI&searchKeywordMethod=EQ&searchKeyword=%E5%A4%A9%E4%B8%BB%E6%95%8E+%E8%BF%AB%E5%AE%B3&searchKeywordConjunction=AND

 

http://db.history.go.kr/download.do?levelId=oh_015_0020_0020&fileName=oh_015_0020.pdf#page=074 <----- "天主敎 迫害" 제목의 최석우 신부의 논고(論告) pdf의, 제227쪽에 있는, 다음에 발췌된, 각주 1)을 보라:

 

(발췌 시작)
1) 崔奭祐 李承薰의 편지가 말하는 聖事 執行, 가를릭靑年(1963. 4) pp. 54-59.
李晚禾 闢衛篇(1931) 卷2 1b 乙巳秋曹摘發
(이상, 발췌 끝)

 

최석우 신부는 자신의 논고(論告)[제목: 天主敎 迫害]의 각주 1)에서, 가를릭靑年(1963. 4) pp. 54-59.에 실린 자신의 또다른 논문의 제목이 "李承薰의 편지가 말하는 聖事 執行"임을 스스로 밝히고 있음에 반드시 주목하라.

[이상, 2021년 9월 10일자 내용 추가 끝]

 

          따라서, 이상 실증적으로(positively) 고찰한 바로 부터, 우리는 다음의 결론을 도출할 수 있다는 생각입니다:

 

(이 글의 결론 2) "성사(聖事)", "성직제(聖職制)", "성직제도(聖職制度)", "성직자단(聖職者團)" 등의 신조어들에서 접두사로 사용되고 있는, "()" 낱글자를 이들 신조어들에 최초로 도입한 분은 최석우 신부이고 그리고 그 시점과 출처는 "가톨릭 청년", 1963년 4월호임을, 이 글의 한 개의 결론으로서 도출합니다.

 

왜냐하면, 자신의 논문의 제목 중에 사용된 라는 단어 앞에, 접두사인 낱글자 ""를 붙였다가 다시  떼어낼 수 있는 권한을 가진 자는 해당 논문의 저자뿐이기 때문입니다. 그렇지 않는지요?

 

게시자 주 3-2: 혹시하여 말씀드립니다만, 그리고 당연한 이야기입니다만, 바로 위의 결론 (이 글의 결론 2)는, 1963년 4월 이전의 어느 시점에 저술되어 출판된, "성사(聖事)", "성직제(聖職制)", "성직제도(聖職制度)", "성직자단(聖職者團)" 등의 신조어들에서 사용되고 있는, "()" 낱글자가 사용된 이들 신조어들의 존재들이 입증되는 문헌상의 용례(example)가 구체적으로 발견될 때까지, 유효합니다. 

 

3-3. 다른 한편으로, 다음의 주소에 접속하면, "가톨릭 청년" 1963년 7월호에 게재된, 최석우 신부께서 유럽으로 유학을 떠나기 전에 서울 소신학교 동료 교사였던, 당시 서울 소신학교 고등학교 과정의 국어 교사였던, 이병영 선생님의 "천주성교공과 소고 (二)" 제목의 논문을 읽을 수 있는데, 이 논문의 분문 중에서, 바로 위의 제3-2-3항에 안내된, 최석우 신부의 논문인 "이승훈의 편지 ..."의 우리말 번역문을 발췌 인용하면서, "성직제(聖職制)", "성직제도(聖職制度)" 라는 신조어들이 도입되어 사용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출처: http://ch.catholic.or.kr/pundang/4/cb/1818-1866_다블뤼/1862_천주성교공과_소고_2_in_1963_가톨릭_청년_7월호_이병영_가성직제도.pdf <--- 필독 권고

(제80쪽에서 발췌 시작)

(이상, 발췌 끝) 

 

따라서, 이상 실증적으로(positively) 고찰한 바로 부터, 우리는 다음의 결론을 도출할 수 있다는 생각입니다:

 

(이 글의 결론 3) "성직제(聖職制)", "성직제도(聖職制度)" 등의 신조어들을 최초로 도입한 분은, 당시 서울 소신학교 고등학교 과정 국어 교사였던, 이병영 선생님이고 그리고 그 시점과 출처는 "가톨릭 청년", 1963년 7월호임을, 이 글의 한 개의 결론으로서 도출합니다.

 

게시자 주 3-3: (1) 혹시하여 말씀드립니다만, 그리고 당연한 이야기입니다만, 바로 위의 결론 (이 글의 결론 3)은, 1963년 7월 이전의 어느 시점에 저술되어 출판된, "성사(聖事)", "성직제(聖職制)", "성직제도(聖職制度)", "성직자단(聖職者團)" 등의 신조어들의 존재들이 입증되는 문헌상의 용례(example)가 구체적으로 발견될 때까지, 유효합니다. 

 

(2) 다음의 주소들에 접속하면, "가톨릭 청년", 1963년에 게재된, 당시 서울 소신학교 고등학교 과정 국어 교사였던, 이병영 선생님의 논문들 전부를 읽을 수 있습니다:

 

(i) http://ch.catholic.or.kr/pundang/4/cb/1818-1866_다블뤼/1864_천주성교요리문답_교회용어_in_1963_가톨릭_청년_3월호_이병영.pdf 

 

(ii) http://ch.catholic.or.kr/pundang/4/cb/1818-1866_다블뤼/1864_성찰기략_목판_고_in_1963_가톨릭_청년_4월호_이병영.pdf 

 

(iii) http://ch.catholic.or.kr/pundang/4/cb/1818-1866_다블뤼/1864_신명초행_목판_고_in_1963_가톨릭_청년_5월호_이병영.pdf 

 

(iv)

(iv-1) http://ch.catholic.or.kr/pundang/4/cb/1818-1866_다블뤼/1862_천주성교공과_소고_1_in_1963_가톨릭_청년_6월호_이병영.pdf 

(iv-2) http://ch.catholic.or.kr/pundang/4/cb/1818-1866_다블뤼/1862_천주성교공과_소고_2_in_1963_가톨릭_청년_7월호_이병영_성직제도.pdf <----- 특히, 필독 권고

(iv-3) http://ch.catholic.or.kr/pundang/4/cb/1818-1866_다블뤼/1862_천주성교공과_소고_3_in_1963_가톨릭_청년_8월호_이병영.pdf 

(iv-4) http://ch.catholic.or.kr/pundang/4/cb/1818-1866_다블뤼/1862_천주성교공과_소고_4_in_1963_가톨릭_청년_9월호_이병영.pdf 

 

(3) 불과 56년 전에 출판된 "가톨릭 청년" 1963년에 실린 이들 논문들를 필자가 찾아 보는 데에 상당한 어려움이 있었으나, 다행히 확보되었기에, 특히 우리나라 천주교회사 연구자들과 관심있는 교우님들을 위하여, "가톨릭 청년" 1963년에 실린 이병영 선생님의 논문들을 발췌하여 전달해 드립니다.

 

이러한 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하기 위하여, 예를 들어, 주교회의 중앙협의회 측에서, "경향" 잡지처럼, 1933년부터 1972년 8월까지 발행된"가톨릭 청년" 잡지의 pdf 파일들을 마련하여 인터넷 상에서 연구자들과 관심있는 교우님들이 손쉽게 읽을 수 있도록 제공해 주실 것을, 이 기회에 또한, 요청드립니다.

 

다음의 주소에 접속하면, 굿뉴스 서버 제공의 "가톨릭대사전"에 제시된 "가톨릭 청년" 잡지에 대한 안내의 글을 읽을 수 있습니다. 특히, "가톨릭 청년" 근대 한국문학사 연구와 가톨릭 교회사 연구에 있어서 중요한 자료로 평가되고 있다고 합니다:

http://maria.catholic.or.kr/dictionary/term/term_view.asp?ctxtIdNum=75 

 

(4) 예를 들어, 바로 아래에 발췌된 바는, 다음의 주소에 접속하면 앍을 수 있는, 2011년 11월 20일자 평화신문에 게재된 글의 말미에서 발췌한 것입니다. 이번 글에서 이미 실증적으로(positively) 고증/입증한 바와 얼마나 그리고 어느 정도로 다른지, 정밀하게 비교/검토하면서,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츨처: http://maria.catholic.or.kr/mobile/sa_ho/board/board_view.asp?intLINEPERPAGE=20 

(발췌 시작)

또 달레 신부가 만들어낸 '성직제도'라는 표현이 적절한지에 대해서도 의문이 제기되고 있다. 초대 한국교회사연구소장을 지낸 고 최석우 신부는 생전에 "'성직제도'란 용어가 과연 적절한 표현인가는 문제다"며 "그 이유는 달레의 주장대로 신부 외에 주교가 있었다면 모르되 주교가 없었다는 사실이 밝혀진 오늘에까지 그 표현을 계속 사용할 수 있는가는 한 번 생각해볼 문제이고, 동시대인도 '망행성사(妄行聖事)'로 표현하고 있었다는 사실에 비춰볼 때 그 용어가 적절한지 의문이다"고 밝힌 바 있다.

(이상, 발췌 끝)

 

만약에, 초판개정판 "가톨릭대사전"아니라"가톨릭 청년", 1963년에 게재된 최석우 신부의 논문과 이병영 선생님의 논문을 우리나라 천주교회사 연구자들과 관심있는 교우님들이 손쉽게 읽을 수 있었더라면(가정법), 바로 위에 발췌돤 바에서 앞부분, 즉,

 

-또 달레 신부가 만들어낸 '성직제도'라는 표현이 적절한지에 대해서도 의문이 제기되고 있다. 초대 한국교회사연구소장을 지낸 고 최석우 신부는 생전에 "'성직제도'란 용어가 과연 적절한 표현인가는 문제다"며 -

 

결코 작성될 수 없었을 것임에, 반드시 주목하십시오.

 

(5) 만약에 바로 위의 제(4)항에 발췌된 단락에서 말해지고 있는 바가 정말로 100% 최석우 신부가 표명한 것이라면, (i) 우리말을 전혀 몰랐던 달레가 "성직제도"라는 우리말 표현을 만들어내었다는 주장도 이번 글에 의하여 전적으로 거짓(totally false)임이 밝혀졌고 그리고, 혹시라도, (ii) "성사(聖事)", "성직제(聖職制)", "성직제도(聖職制度)", "성직자단(聖職者團)" 등의 신조어들에서 사용되고 있는, "()" 낱글자를 이들 신조어들에 최초로 도입한 분이 최석우 신부임을 감추기 위하여 지금에 이르기까지, 예를 들어, 주교회의 중앙협의회 등의 단체들에서, "경향" 잡지처럼, 1933년부터 1972년 8월까지 발행된"가톨릭 청년" 잡지의 pdf 파일들로 마련하여 인터넷 상에서 연구자들과 관심있는 교우님들이 손쉽게 읽을 수 있도록 제공하는 과제를 지금까지 의도적으로(intentionally) 계속 미루어 왔다면, 대단히 죄송하지만, 늦으면 늦어질수록, "진리의 영"인 성령 하느님으로부터 오는 진리들이라는 은총(grace)이 널리 퍼지는 것을 방해하는 죄, 즉, 성령을 거스르는 여섯 개의 죄들 중의 하나인, "다른 이들의 영적 선에 대한 질투(envy)"라는 죄,(#) 칠죄종들 중의 하나인 죄를 더욱 더 심하게 범하는 데에 동참하는 행위임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

(#) 게시자 주: 성 토마스 아퀴나스(St. Thomas Aquinas, 1225-1274년)"신학 대전(Summa Theologiae)"에 구체적으로 기술된, 성령을 거스르는 여섯 개의 죄들에 대한 성 아우구스티노(St. Augustine, 354-430년)의 가르침은, 다음의 주소들에 있는 글들을 읽도록 하라:

http://ch.catholic.or.kr/pundang/4/soh/1140.htm <----- 필독 권고

http://ch.catholic.or.kr/pundang/4/soh/1141.htm <----- 필독 권고

http://ch.catholic.or.kr/pundang/4/soh/1278.htm <----- 필독 권고

-----

(이상, 게시자 주 3-3 끝)

 

3-4. 다른 한편으로, 다음에 발췌된 바는, 1976년 1월최석우 신부(1922-2009년)에 의하여 간행된, "한국천주교회사논문선집", 제1집목차 색인의 첫 부분인데, 이 논문집에는 바로 위의 제3-3항에 안내된 이병영 선생님의 논문[제목: 목판본을 중심한 천주성교공과소고]은 수록되어 있으나, 그러나 위의 제3-2항에 안내된 최석우 신부1963년 논문[제목: 이승훈의 편지가 말하는  집행]은 수록되어 있지 않으며, 그리고 이 논문집의 색인에 실린 첫 번째 용어는 "성직제도(聖職制度)"이며 그리고 이 색인은 이 용어의 출처로서 이병영 선생님의 논문 중의 두 페이지들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발췌 시작)

 

(이상, 발췌 끝)

 

게시자 주 3-4: 최근에 들어와, 우리나라 천주교회의 교회사를 평생에 걸쳐 연구하신 원로 사학자 몇 분들께 "'성직제도(聖職制度)'라는 용어를 처음으로/최초로 창안하여 사용한 분이 누구인지?"를 문의하였더니 알고 계신 분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이 용어가 국내의 천주교회 안에서 널리 사용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 부적합한 용어의 출처와 기원을 아무도 모르고 있다는 것은 참으로 곤란하다는 생각에, 부득불 필자가 본글을 작성하게 되었습니다. 

 

심지어, 위의 제1-4항에 발췌된, 개정판 "가톨릭대사전"에서는 이 부적합한 용어를 만든 자가 달레 신부님이라고 명기하고 있는데, 그러나, 그러한 주장이 명백한 오류의 주장임은, 이미 위의 제3-2항제3-3항에서 실증적으로(positively) 입증/고증하였습니다.

 

3-5. 다음은, 1836년 12월 9일자 모방 신부님(1804-1839년)의 서한 중에서 유관 부분을 발췌한 것인데, "organization"이, 한편으로는 다행스럽게 "성직제도"로 번역되지 않았고, 대신에, "교계조직"로 번역되었는데, 그러나, 직역 번역(literal translation) 대신에, 우리말로의 번역 과정에서 바로 이 번역 표기 "교계조직"에 왜 "교계"(hierarchy)라는 단어가 추가되었는지 납득할 수 없습니다. 그리고 또한 " la divine semence"(그 신성적 씨앗)이라는 표현이 우리말로의 번역 과정에서 삭제되었는지 납득할 수 없습니다:

 

출처: http://ch.catholic.or.kr/pundang/4/cb/1804-1839_모방/1836-12-09_모방_신부의_서한_in_2018_여름_상교우서_vol59_30.pdf 

원출처: http://www.casky.or.kr/html/sub4_01.html [수원교구 수원교회사연구소 홈페이지]

 

3-5-1. 

(발췌 시작)

6 ans après ils revinrent à Pekin, racontèrent cette merveilleuse organisation et les progrès de la divine semence en Corée. 

 

[영어 졸번역문] 

Six years later they returned to Pekin, recounting this marvelous organization and the progress of the divine seed in Korea.

 

[우리말 졸번역문] 

6년 후[즉, 1836 - (50 - 4) = 1790년 경]에 그들[즉, 윤유일과 그 일행]은 [중국] 북경(Pekin)에 다시 왔으며, 조선(Corée)에 있는, 바로 이 경이로운 조직(cette merveilleuse organisation)을 그리고 그 신성적 씨앗(la divine semence, 즉, 하느님으로부터 유래하는 씨앗)(*)의 발전(progrès)을, 자세히 이야기하였습니다.

 

-----

(*) 번역자 주: 여기서 말하는 "그 신성적 씨앗(la divine semence)"은, 전후 문맥 안에서,

 

(i) 가장 가까이에 있는 것(proximate things)들 중에서는, 바로 앞단락의 마지막에 있는 "cette divine semence"(바로 이 신성적 씨앗)에 대응하는 그 앞의 문장, 그러나 기존의 우리말 번역 중에 "영벌을 피하고 구원받기 위해 꼭 믿어야 하는 참되고 거룩한 신앙"으로 의역 번역(free translation)이 된 문장, "cette doctrine seule, sainte, salutaire et absolument nécessaire aux hommes pour ne pas périr et souffrir éternellement"(하나뿐인, 거룩하고, 유익한, 그리고 사람들이 소멸하여 영원히 고통받지 않기 위하여 절대적으로 필요한, 바로 이 교리)을 말하고, 그리고

 

(ii) 멀리에 있는 것(remote things)들 중에서는, 이 서한의 두 번째 단락의 첫 번째 문장 중에 있는, "la doctrine de Ly Mato (nom chinois du R.P. Ricci) leur auteur était vraie et établie sur des fondements inébranlables." 에 있어서의 "리마두(利瑪竇, 1552-1610년)의 교리"를 말힐 것이다.

 

다음에 발췌된, (i) 바로 앞단락 전문과, (ii) 이 서한의 두 번째 단락 전문, 둘 다를 정밀하게 비교/검토하면서 들여다보도록 하라:

 

(i) (바로 앞단락의 발췌 시작)

Le R.P. Gueslin le reçut, lui fit l’apologie de la Religion chrétienne, la lui fit goûter et embraser; il le baptiza sous le nom de Pierre, lui donna une collection de livres chrétiens et le renvoya dans sa patrie, lui recommandant d’annoncer cette doctrine seule, sainte, salutaire et absolument nécessaire aux hommes pour ne pas périr et souffrir éternellement; et de revenir ensuite raconter les fruits qu’aurait produit cette divine semence.

 

[영어 졸번역문]

R.P. Gueslin received him, made him an apology for the Christian religion, made him taste and impassion it; he baptized him under the name of Peter, gave him a collection of Christian books and then sent back to his homeland, recommending him to announce this doctrine, alone, holy, salutary, and absolutely necessary to men not to perish and to suffer eternally; and then come back to tell the fruits that this divine seed would have produced.

 

[우리말 졸번역문] 

궬랭(Gueslin) 신부는 그를 받아들였으며, 그를 그리스도교 경신(christian Religion)의 옹호자로 만들었고, 그를 이 경신을 맛보게 하여 그리하여 깊이 감동하게 하였으며, 그리고 베드로(Peter)라는 이름 하에 그에게 세례를 주었고, 그에게 천주교 책들 한 뭉지를 주었으며 그런 다음에, 하나뿐인, 거룩하고, 유익한, 그리고 사람들이 소멸하여 영원히 고통받지 않기 위하여 절대적으로 필요한, 바로 이 교리(this doctrine)를 그가 알릴 것(announce)과 그런 다음에 되돌아 와서 바로 이 신성적 씨앗(this divine seed)이 장차 산출할 수도 있는 열매들을 들려 줄 것을 명하면서(recommanding), 그를 그의 고향으로 돌려보냈습니다.(*1)

 

-----

(*1) 번역자 주: 여기서 말하는 "그"는 이승훈을 말하며, 그리고, 세례를 줌을 포함하여, 그에게 이러한 일련의 조치를 취한 분은, 궬랭(Gueslin) 신부가 아니고, 예수회 소속의 신부이나 1775년에 중국의 예수회가 해산된 이후에 북경의 북당 성당에 머물고 있었던, 그라몽(Grammont) 신부이었다고 알려져 있다.

-----

(이상, 발췌 및 우리말 번역 끝)


(ii) (이 서한의 두 번째 단락의 첫 번째 문장 발췌 시작)

Il y a une cinquantaine d’années un lettré Coréen, parcourant quelques ouvrages composés en langue chinoise par le R.P. Mathieu Ricci, observa dans les remarques de l’éditeur que la doctrine de Ly Mato (nom chinois du R.P. Ricci) leur auteur était vraie et établie sur des fondements inébranlables.

 

[영어 졸번역문]

About fifty years ago a Korean scholar, reading some works composed in Chinese language by the R.P. Mathieu Ricci, observed in the editor's remarks that the doctrine of Ly Mato (Chinese name of R.P. Ricci) their author was true and established on unshakable foundations.

 

[우리말 졸번역문] 

약 50년 전에 한 명의 조선의 학자가,(*2) 마태오 리치(Mattieu Ricci)에 의하여 한문으로 저술된 어떠한 책들을 읽다가, 편집자들의 소견에서 이들 책들의 저자인 "리마두(利瑪竇, 1552-1610년)(마태오 리치 신부님의 중국 이름) 교리(doctrine)"[學術(학술)]참되며(true) 그리고 부동의 토대(unshakable foundations)[眞元(진원, true 天)] 위에 확립되어 있다고 말함을 목격하였습니다.(*3)  

 

-----

(*2) 번역자 주: 여기서 말하는 학자는, 동일한 내용을 기술하고 있는 다음의 주소에 접속하면 읽을 수 있는 모방 신부님의 1836년 4월 4일자 서한에서 더 분명하게 지칭되고 있는, 이벽 성조(1754-1785년)를 말한다:

http://ch.catholic.or.kr/pundang/4/cb/1804-1839_모방/1836-04-04_모방_신부의_서한_in_2017_여름_상교우서_vol55_41.pdf <----- 필독 권고

 

(*3) 번역자 주: (1) 이벽 성조(1754-1785년)께서, 1583년과 그 이후에 중국 본토에 선교사로 파견된 예수회 소속의 신부님들에 의하여 저술된 여러 한문본 천주교 문헌들을 입수하여 학습한 시기는, 아무리 늦게 잡더라도 1779년 겨울 천진암 강학 모임 이전인, 이 서한이 쓰여진 해인 1836년으로부터 약 60년 전부터일 것이다.

 

(2) 더 나아가, 이 부분을 읽고나서 필자가 확인한 바에 의하면, 리마두(利瑪竇), 즉, 마태오 리치 신부님(1552-1610년)의 한문본 저술들, "교우론"(1595년), "서국기법"(1595년), "이십오언"(1599년), "천주실의"(1607년, 萬曆疆圉叶洽之歲, 중각판)(#), "천주실의"(1629년, "천학초함"에 포함된 판), "기인십편"(1608년), "변학유독"(1609년) 의 앞부분에 있는 다른 이들의 서문들 중에서, "리마두(利瑪竇, 1552-1610년)의 교리(la doctrine de Ly Mato)"[學術(학술)]참되며(true) 그리고 부동의 토대(unshakable foundations)[眞元(진원, true 天)] 위에 확립되어 있다에 대응하는 한문 표현이 언급된 책은 "천주실의"(1607년, 萬曆疆圉叶洽之歲, 중각판) , 이지조의 서문 중의 "利先生學術一本眞元"하나뿐이었다.

 

[내용 추가 일자: 2019년 10월 5일] 

-----

(#) 게시자 주: 이지조의 서문의 말미에 있는 萬曆疆圉叶洽之歲만력35년, 즉, 1607년임은, 다음의 주소들에 접속하면 확인할 수 있다:

http://ch.catholic.or.kr/pundang/4/cb/1552-1610_마태오_리치/만력강어협흡지세_in_이지조의 서문은_1607년이다.htm 

http://npmhost.npm.gov.tw/ttscgi/ttsqueryxml?0:0:npmrbxml:000018681 

https://books.google.co.kr/books?id=yP0vCgAAQBAJ&pg=PT552&lpg=PT552&dq=%22%E7%96%86%E5%9C%89%E5%8F%B6%22

-----

[이상, 2019년 10월 5일자 내용 추가 끝]

 

(3) 특히, "천주실의"(1607년, 萬曆疆圉叶洽之歲, 중각판), 이지조의 서문 중에서 발견되는, 바로 이 프랑스어 표현에 대응하는, 한문 표현의 존재가 실증적으로(positively) 의미하는 바에 대하여서는, 본글에 이어지는 글이기도 한, 다음의 주소에 있는 글을 읽도록 하라:

http://ch.catholic.or.kr/pundang/4/soh/2005.htm <----- 필독 권고

-----

(이상, 발췌 및 우리말 번역 끝)

-----

(이상, 발췌 및 우리말 번역 끝)

 

3-5-2. (번역 오류) 다음은, 또한 위의 제3-5항에 있는 동일한 출처 제공의 우리말 번역문인데, 바로 위의 제3-5-1항에 있는 필자의 졸번역문과 어떠한 차이점이 있는지 정밀하게 비교/검토 하십시오:

(발췌 시작)

(이승훈이 세례를 받은 지) 6년이 되었을 때에, 북경으로 간 조선교회의 대표들은 조선교회가 훌륭한 조직을 갖추고 놀랍게 발전하였다고 보고했습니다.“ 

(이상, 발췌 끝)

 

게시자 주 3-5-2: 바로 위에 발췌된 기존의 우리말 번역문이, 바로 아래에 발췌된 필자의 직역 번역문과 얼마나, 어떻게 다른지에 대하여 정밀하게 비교/검토하도록 하라. 부득불한 사정에 의하여 어쩔 수 없이 의역 번역(free translation)을 하더라도 정도가 있는데, 의역 번역을 하여야 할 이유가 전혀 없는 문장을 우리말로 번역하면서, 도대체 무슨 이유로, (i) " la divine semence"(그 신성적 씨앗)라는 표현을 삭제하였고, (ii) "교계"(hierarchy)라는 용어를 추가하였으며, 그리고 심지어 (iii) "조선교회"라는 표현을 위의 기존의 번역문 중의 두 곳에 추가하였는지, 필자는 그 이유를 알 수 없다:

 

(위의 제3-5-1항에 있는 필자의 졸번역문 발췌 시작)

6년 후[즉, 1836 - (50 - 4) = 1790년 경]에 그들[즉, 윤유일과 그 일행]은 [중국] 북경(Pekin)에 다시 왔으며, 조선(Corée)에 있는, 바로 이 경이로운 조직(cette merveilleuse organisation)을 그리고 그 신성적 씨앗(la divine semence, 즉, 하느님으로부터 유래하는 씨앗)의 발전(progrès)을, 자세히 이야기하였습니다.

(이상, 발췌 끝)

 

4. 유관 사료 분석의 결과들

 

이번 항에서는, "성사(聖事)", "성직제(聖職制)", "성직제도(聖職制度)", "성직자단(聖職者團)" 등의 대단히 부적합한/부적절한 신조어들이, 위의 제1항-제3항에서 고찰하였듯이, 1963년과 그 이후의 시점에 우리나라 천주교회 안에 갑자기 등장하게 된 배경과 이유 등에 대하여 고찰하도록 하겠습니다.

 

4-1.

4-1-1. 달레 신부님(1829-1878년)1874년에 프랑스어로 출판된 자신의 저서 "한국 천주교회사"에서, 다음의 주소에 접속하면 확인할 수 있듯이, 우리나라 조선의 천주교회가 1784년에 탄생하였다고 주장하고 있다고 알고 있습니다:

 

출처: http://ch.catholic.or.kr/pundang/4/cb/1829-1878_달레/1874_histoiredelgli01dall.htm  

(발췌 시작)

L'an de Jésus-Christ 1784, le jour du salut se leva enfin pour la Corée. Alors Dieu, dans sa miséricorde, y implanta la foi chrétienne d'une manière définitive ; alors commença cette glorieuse Église, qui, depuis, n'a cessé de grandir et de 'se fortifier à travers les persécutions et les vicissitudes dont nous allons retracer l'émouvante histoire.

 

예수 그리스도의 해 1784년에, 조선(Corée)을 위한 구원의 날이 최종적으로 시작하였습니다(se leva). 바로 그 시점에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자비 안에서, 거기에 결정적인 방식의 그리스도교 믿음을 심으셨고, 그리하여, 바로 이 영광을 발(發)하는 교회(glorieuse Église)를 시작하셨는데(commença), 이 교회는, 그 이후로, 박해들과 부침(浮沈)들을 통하여, 성장하고 그리고 스스로를 굳세게 하기를 계속하고 있으며, 이들[즉, 박해들과 부침들]의 감동적인 역사에 대하여 우리가 장차 회고할 것입니다. 

(이상, 발췌 및 우리말 졸번역 끝)

 

4-1-2. 다음은 바로 위에 발췌된 부분에 대응하는, 다른 이에 의한 우리말 번역문인데, 어떤 차이점이 있는지 살펴보시기 바랍니다. 필자가 생각할 때에, 약간의 내용 요약을 겸한 번역문이라는 생각입니다:

 

출처: http://zine.cbck.or.kr/gallery/view.asp?seq=55170&path=070412140513&page=6 

(발췌 및 현대 어법에 맞게 쓰기 시작)

강생 후 1784년에 바야흐르 조선에 천주성교회 창립하니라. 이 때에 인자하신 천주께서는 우리 동방을 불쌍히 여기시어 조선 교회의 근원을 만가지 고난 중에 정하시매 의연히 창생에 이르니라.

(이상, 발췌 끝)

 

게시자 주 4-1: 바로 위에 발췌된 바에서 보듯이, 달레 신부님께서는, 우리나라 조선의 천주교회의 탄생에 대한 자신의 저술에서의 기술에 있어, 가톨릭 보편 교회의 교황 교도권이 신약 성경의 본문에 근거하여 전통적으로 수용해 온, 교회의 탄생교의 신학적 정의(definition)에 대한 최소한도의 언급 혹은 기술 없이, 우선적으로, 1784년에 우리나라 조선의 천주교회가 탄생하였다는 자신의 주장을 먼저 선언적으로 기술하고 있음에 주목하여야 할 것입니다.

 

4-2.

 

작성 중입니다.

 

自封聖職

神職人員

sacerdotalism

 

http://www.history.re.kr/mn6/sub_1_13.htm 

 

http://www.apostles.tw/dict/m/dict32m/T581.htm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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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교수 소순태 마태오 (Ph.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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