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톨릭 신앙생활 Q&A 코너

1607년판 천주실의 는, 1783년에 이승훈이 이벽 성조에 의하여 북경에 파견되기 전에, 이벽 성조께서 이미 학습한 한문본 천주교 문헌들에 포함된다 [모방 신부][상주]1242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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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9-17 ㅣ No.2005

게시자 주: 본글의 인터넷 주소, http://ch.catholic.or.kr/pundang/4/soh/2005.htm 에 접속하면, 본글 중에서 제시되고 있는 출처 문헌들을 쉽게 확인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다음의 인터넷 주소, http://ch.catholic.or.kr/pundang/4/q&a.htm 에 접속하면, 본글의 제목이 포함된, "가톨릭 신앙생활 Q&A 코너" 제공의 모든 게시글들의 제목들의 목록을 가질 수 있습니다. 또한 (i) 2006년 12월 16일에 개시(開始)하여 제공 중인 미국 천주교 주교회의/중앙협의회 홈페이지 제공의 날마다 영어 매일미사 중의 독서들 듣고 보기, 그리고 (ii) 신뢰할 수 있는 가톨릭 라틴어/프랑스어/영어 문서들 등은, 다음의 주소들에 접속하면, 손쉽게 접근할 수 있습니다: http://ch.catholic.or.kr/pundang/4/  (PC용, 날마다 자동으로 듣고 봄) [주: 즐겨찾기에 추가하십시오]; http://ch.catholic.or.kr/pundang/4/m (스마트폰용) [주: 네이버 혹은 구글 검색창 위에 있는 인터넷 주소창에 이 주소 입력 후 꼭 북마크 하십시오] 

 

1. 들어가면서

 

1-1. 최근(2019년 8월 31일)에 들어와, 언제부터인지 모르지만 우리나라 천주교회 안에서만 오로지 사용되고 있는 대단히 부적절한 용어들인 "성사", "성직제", "성직제도" 등의 용어들의 최초 출처 및 최초 사용자가 누구인지에 대하여 실증적으로(positively) 입증/고증하는 작업을 하고 있는데,(*1) 연대순에 있어 거슬러 올라가면서 유관 문헌들을 들여다보는 과정에서,1874년에 초판 발행된 달레 신부님(1829-1878년)의 우리나라 조선의 "천주교회사" 책 프랑스어 원문을 들여다 보게 되었고, 그리고, 더 거슬러 올라가, 바로 이 책의 근거 문헌들에 포함되는, 모방 신부님(1804-1839년[기해년])의 프랑스어본 서한/서신들을 읽게 되었습니다.

 

대단히 다행스럽게도, 수원교구 수원교회사연구소에서, 모방 신부님의 프랑스어본 서한들과 이들의 우리말 번역문들을 "상교우서" 2016년 가을호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 조금씩 게재하고 있는데, 필자에게 많은 도움이 되었습니다.(*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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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게시자 주: 다음의 주소에 접속하면, 이에 대한 졸글을 읽을 수 있다:

http://ch.catholic.or.kr/pundang/4/soh/2004.htm

 

(*2) 게시자 주: 수원교구 수원교회사연구소 발행의 "상교우서" 제공의 모방 신부님의 서한들 중에 이벽 성조에 대한 언급들이 있음을 많이 부족한 죄인인 필자에게 알려주신, 교회사학을 전공하신, 김학렬 신부님께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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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 다른 한편으로, 다들 잘 알고 계시겠지만, 특히 모방 신부님께서는, 우리나라에 선교사로 파견된 프랑스 파리 외방전교회 소속의 외국인 신부님들 중에서, 우리나라 조선의 천주교회의 초기의 역사에 대하여 처음으로 들여다본 신부님으로 알려져 있다고 알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우리날 조선에 선교사로 파견된 프랑스 파리 외방선교회 소속의 외국인 신부님들이 남긴 우리나라 조선의 천주교회 초기의 역사적 사실들에 대한 기록/서한들 중에서, 이분의 서한들에 있는 이벽 성조(1754-1785년)에 대한 언급들이 최초/처음의 언급들이라고 알려져 있기 때문입니다.

 

1-3. 다음은, 1836년 12월 9일모방 신부님(1804-1839년)의 서한 중에서 유관 부분을 발췌한 것입니다:

 

출처: http://ch.catholic.or.kr/pundang/4/soh/2004.htm <----- 필독 권고

원출처: http://ch.catholic.or.kr/pundang/4/cb/1804-1839_모방/1836-12-09_모방_신부의_서한_in_2018_여름_상교우서_vol59_30.pdf 

(발췌 시작)

(ii) (이 서한의 두 번째 단락의 첫 번째 문장 발췌 시작)

Il y a une cinquantaine d’années un lettré Coréen, parcourant quelques ouvrages composés en langue chinoise par le R.P. Mathieu Ricci, observa dans les remarques de l’éditeur que la doctrine de Ly Mato (nom chinois du R.P. Ricci) leur auteur était vraie et établie sur des fondements inébranlables.

 

[영어 졸번역문]

About fifty years ago a Korean scholar, reading some works composed in Chinese language by the R.P. Mathieu Ricci, observed in the editor's remarks that the doctrine of Ly Mato (Chinese name of R.P. Ricci) their author was true and established on unshakable foundations.

 

[우리말 졸번역문] 

약 50년 전에 한 명의 조선의 학자가,(*2) 마태오 리치(Mattieu Ricci)에 의하여 한문으로 저술된 어떠한 책들을 읽다가, 편집자들의 소견에서 이들 책들의 저자인 "리마두(利瑪竇, 1552-1610년)(마태오 리치 신부님의 중국 이름) 교리(doctrine)"[學術(학술)]참되며(true) 그리고 부동의 토대(unshakable foundations)[眞元(진원, true 天)] 위에 확립되어 있다고 말함을 목격하였습니다.(*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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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번역자 주: 여기서 말하는 학자는, 동일한 내용을 기술하고 있는 다음의 주소에 접속하면 읽을 수 있는 모방 신부님1836년 4월 4일자 서한에서 더 분명하게 지칭되고 있는, 이벽 성조(1754-1785년)를 말한다:

http://ch.catholic.or.kr/pundang/4/cb/1804-1839_모방/1836-04-04_모방_신부의_서한_in_2017_여름_상교우서_vol55_41.pdf <----- 필독 권고

 

(*3) 번역자 주: (1) 이벽 성조(1754-1785년)께서, 1583년과 그 이후에 중국 본토에 선교사로 파견된 예수회 소속의 신부님들에 의하여 저술된 여러 한문본 천주교 문헌들을 입수하여 학습한 시기는, 아무리 늦게 잡더라도 1779년 겨울 천진암 강학 모임 이전인, 이 서한이 쓰여진 해인 1836년으로부터 약 60년 전부터일 것이다.

 

(2) 더 나아가, 이 부분을 읽고나서 필자가 확인한 바에 의하면, 리마두(利瑪竇), 즉, 마태오 리치 신부님(1552-1610년)의 한문본 저술들, "교우론"(1595년), "서국기법"(1595년), "이십오언"(1599년), "천주실의"(1607년, 萬曆 疆圉叶洽 之歲, 중각판)(#)"천주실의"(1629년, "천학초함"에 포함된 판), "기인십편"(1608년), "변학유독"(1609년) 의 앞부분에 있는 다른 이들의 서문들 중에서, "리마두(利瑪竇, 1552-1610년)의 교리(la doctrine de Ly Mato)"[學術(학술)]참되며(true) 그리고 부동의 토대(unshakable foundations)[眞元(진원, true 天)] 위에 확립되어 있다에 대응하는 한문 표현이 언급된 책은 "천주실의"(1607년, 萬曆 疆圉叶洽 之歲, 중각판) , 이지조의 서문 중의 "利先生學術一本眞元"하나뿐이었다.

 

[내용 추가 일자: 2019년 10월 5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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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게시자 주: 이지조의 서문의 말미에 있는 萬曆 疆圉(강어)協洽(협흡) 之歲만력35년, 즉, 1607년임은, 다음의 주소들에 접속하면 확인할 수 있다:

http://ch.catholic.or.kr/pundang/4/cb/1552-1610_마태오_리치/만력강어협흡지세_in_이지조의 서문은_1607년이다.htm  

http://npmhost.npm.gov.tw/ttscgi/ttsqueryxml?0:0:npmrbxml:000018681 

https://books.google.co.kr/books?id=yP0vCgAAQBAJ&pg=PT552&lpg=PT552&dq=%22%E7%96%86%E5%9C%89%E5%8F%B6%22

 

[내용 추가 일자: 2019년 12월 5일]

여기서, 疆圉 = 丁, 叶洽 = 未 , 따라서 疆圉(강어)協洽(협흡)은 육십갑자에서 이다.

출처 1: 1884, Lobscheid, p.1347

[주: 바로 위의 출처 1에 있는 정보를 필자가 읽은 후에, 원 문헌의 출처인 아래의 출처들 모두를 추가적으로 찾아냄].

출처 2: https://ctext.org/wiki.pl?if=en&chapter=212352#p13 "三命通會", 권1. 論支幹源流

출처 3: "疆圉" "十干" "三命通會" site:ctext.org 

출처 4: https://ctext.org/library.pl?if=en&file=58437&page=43 "사고전서"에 포함된 "三命通會", 권1. 論支幹源流

[이상, 2019년 12월 5일자 내용 추가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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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 2019년 10월 5일자 내용 추가 끝]

 

(3) 특히, "천주실의"(1607년, 萬曆 疆圉叶洽 之歲, 중각판), 이지조의 서문 중에서 발견되는, 바로 이 프랑스어 표현에 대응하는, 한문 표현의 존재가 실증적으로(positively) 의미하는 바에 대하여서는, 본글에 이어지는 글이기도 한, 다음의 주소에 있는 글을 읽도록 하라:

http://ch.catholic.or.kr/pundang/4/soh/2005.htm [주: 본글의 주소임] <----- 필독 권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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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 발췌 및 우리말 번역 끝)

(이상, 발췌 끝)

 

게시자 주 1-3: (1) 1836년 1월에 처음으로 우리나라 조선에 입국한 모방 신부님(1803-1839년)께서 이벽 성조(1754-1785년)에 대하여 바로 위에 발췌된 바를 알게 된 것은, 모방 신부님을 지척(咫尺)에서 보좌하였던, 예를 들어, 한글로 저술된 교리서인 "주교요지"를 남긴 정약종(1760-1801년)의 친아들로서 1839년 기해년에 발생한 기해박해 시점에 관가에 검거되자 "상재상서"를 제출한, 다산 정약용 선생님의 조카인, 정하상(1795-1839년) 등이 포함되는, 당시의 조선인 천주교 신자들로부터 이벽 성조에 대한 증언들을 모방 신부님께서 직접 들었기 때문이라는 생각입니다. 왜냐하면, 그렇지 않고서아, 모방 신부님께서 이벽 성조에 대한 이러한 내용을 전혀 알 수가 없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2) 많이 부족한 죄인인 필자가 생각할 때에, 이벽 성조에 대한 이러한 내용을 모방 신부님께 증언한 분들에는, 1836년 - 1785년 = 51년이라는 두 세대 미만의 짧은 기간을 또한 십분 고려할 때에모방 신부님의 지척(咫尺)에 있었던, (i) 이벽 성조로부터 천주학을 배운 이벽 성조의 삶의 목격 증인으로서 1836년까지 생존해 있던 분, (ii) 정약종 아우구스티노/아오구스티노(1760-1801년)의 서우(書友)[즉, 동학(同學) (한어대사전)]로서 이벽 성조의 삶의 목격 증인, (iii) 정약종(1760-1801년)"주교요지"를 학습한 분으로서의 정약종 아우구스티노/아오구스티노의 서우(書友)[즉, 동학(同學) (한어대사전)]이면서(*) 또한 이벽 성조의 삶의 목격 증인으로부터 직접 전해 들은 분, 혹은 (iv) 자신의 백모, 즉, 큰아버지의 아내의 친동생인 이벽 성조에 대하여 이벽 성조의 삶의 목격 증인으로부터 직접 전해들은 정하상(1795-1839년) 등이 포함될 것이라는 생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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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게시자 주: 바로 이 표현이 어디에 나오는지는, 이후에 작성할 예정인, 별도의 글에서 구체적으로 말씀드리도록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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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또한 많이 부족한 죄인인 필자가 생각할 때에, 모방 신부님께서 우리나라 천주교회의 초기의 역사에 대하여 자신들에게 질문들을 하고 또 이벽 성조에 대한 증언이 포함된 자신들의 답변들을 서한/서신들로 기록하여 중국 소재 프랑스 파리 외방전교회로 발송하는 것을 직접 목격하였을 것이 분명한 모방 신부님 지척(咫尺)의 당시의 조선의 천주교 신자들은, 1836년 당시의 시점에서 두 세대, 즉, 약 60년 전에 시작된 우리나라 조선의 초기의 천주교회의 역사에 대한 목격 증언자들 혹은 이들에 준하는, 시간적으로 매우 가까운, 증언자들로서, 자신들이 직접 경험하였거나 혹은 목격 증언자들로부터 생생하게 전해들어서 잘 기억하고 있는 바를 기록으로 남기는 것이 대단히 중요하다는 것을 알아차리고서, 모방 신부님처럼, 실제로 우리나라 조선의 초기의 천주교회의 역사를 우리말 기록 혹은 한문 기록으로 남기는 작업을, 처음으로/최초로 그리고 자발적으로, 시작하였을 것임은, 대단히 자명하다는 생각입니다.

(이상, 게시자 주 1-3 끝)

 

2. 유관 사료 분석

 

이번 항에서는, 위의 제1-3항에서 말씀드린 바에 관련된 사료들에 대한 정밀한 본문 분석과 비교/검토 작업을 진행하도록 하겠습니다.  

 

2-1.

2-1-1. 다음은, 한국교회사연구소 1972년 발행의 "천주실의 부 텬쥬실의" 제14쪽, 1607년판(만력35년, 萬曆 疆圉叶洽 之歲(즉, 萬曆35년), 중각판) "천주실의", 이지조의 서문의 두 번째 면을 발췌한 것입니다: 

 

출처: 한국교회사연구소 1972년 발행의 "천주실의 부 텬쥬실의" 제14쪽

(발췌 시작)

 

게시자 주: (1) 바로 위에 발췌된 바에서, "利先生學術一本眞元"이 있는, 오른쪽에서 첫 번째 열(column)과 두 번째 열을 보라. (2) 또한 특히, 오른쪽에서 세 번째 열 중의 原本師說 이전까지의 부분이, 아래의 제2-2항에 발췌된,1629년에 출판된 "천학초함"에 포함된 "천주실의", 이지조의 서문의 해당 부분과 완전히 다름에 반드시 주목하라.

(이상, 발췌 끝)

 

2-1-2. 그리고 다음은, 한국교회사연구소 1972년 발행의 "천주실의 부 텬쥬실의" 제337쪽, 그 번역대본이 바로 위에 발췌된 바인, 우리말본 "텬쥬실의" 이지조의 서문의 첫 번째 면을 발췌한 것입니다: 

 

출처: 한국교회사연구소 1972년 발행의 "천주실의 부 텬쥬실의" 제337쪽

(발췌 시작)

 

게시자 주: (1) 바로 위에 발췌된 바에서, "利先生學術一本眞元"에 대응하는 우리말 번역문이 있는, 왼쪽에서 첫 번째 열(column)을 보라.

 

(2) 한문 원문의 "천주실의"와는 달리, "천주실의" 본문이 아닌 이지조의 서문의 우리말 번역문에 우리말 각주들이 붙어있음에 또한 반드시 주목하라.

(이상, 발췌 끝)

 

2-2. 다음은, 이지조(1565-1630년)에 의하여 1629년에 발행된 "천학초함"에 포함된 "천주실의"의 이지조 서문의 두 번째 면에서 발췌한 바입니다:

 

출처: "천학초함" 제352쪽

(발췌 시작)

게시자 주: (1) 바로 위에 발췌된 바에서, "利先生學術一本事天"가 있는, 오른쪽에서 다섯 번째 열(column)과 여섯 번째 열을 보라.

 

(2) 또한 특히, 바로 위에 발췌된 바에서, 왼쪽에서 두 번째 열 중의 原本師說 이전까지의 부분이, 위의 제2-1-1항에 발췌된,1607년, 萬曆 疆圉叶洽 之歲(즉, 萬曆35년)에 출판된 중각판 "천주실의", 이지조의 서문의 해당 부분과, 중간 부분의 "乾元統天,為君為父。又言:帝出乎震。紫陽氏解之以為帝者,天之主宰。然則天主之義,不自利先生刱矣,"를 제외하고완전히 다름에 반드시 주목하라.

 

(3) 그리고 1629년에 초간된 "천학초함"에 포함된 "천주실의"에는 한문 각주 혹은 주해가 전혀 없음에 또한 주목하라.

(이상, 발췌 끝)

 

2-3. 다음은, Chinese Text Project 홈페이지 제공의 방대한 분량의 耶穌會文獻匯編에서 "천주실의", 이지조의 서문 전문을 발췌한 것입니다: 

출처: https://ctext.org/wiki.pl?if=en&chapter=763755#p34 

(발췌 시작)

天主實義重刻序

 

(A)

昔吾夫子語修身也,先事親而推及乎知天。至孟氏存養事天之論,而義乃綦備。蓋即知即事,事天事親同一事,而天其事之大原也。

說天莫辯乎《易》,《易》為文字祖,即言乾元統天,為君為父。又言「帝出乎震」而紫陽氏解之,以為帝者,天之主宰。

然則天主之義不自利先生創矣。世俗謂天幽遠不論,竺乾氏者出,不事其親亦已甚矣,而敢於幻天藐帝,以自為尊。儒其服者,習聞夫天命、天理、天道、天德之說,而亦浸淫入之。然則小人之不知不畏也,亦何怪哉?利先生學術一本事天譚天之所以為天甚晰。睹世之褻天侫佛也者,而昌言排之。

 

(B) 

原本師說,演為《天主實義》十篇,用以訓善坊惡。

其言曰:人知事其父母,而不知天主之為大父母也。人知國家有正統,而不知惟帝統天之為大正統也。不事親不可為子,不識正統不可為臣,不事天主不可為人。

而尤勤懇於善惡之辯、詳殃之應。其論萬善未備,不謂純善;纖惡累性,亦謂濟惡。為善若登,登天福堂;作惡若墜,墜地冥獄。大約使人悔過徙義,遏欲全仁。念本始而惕降監,綿顧畏而遄澡雪,以庶幾無獲戾於皇天上帝

彼其梯航琛贄,自古不與中國相通,初不聞有所謂羲、文、周、孔之教,故其為說亦初不襲吾濂洛關閩之解,而特於知天事天大旨,乃與經傳所紀如券斯合。獨是天堂地獄,拘者未信。要於福善禍淫,儒者恆言察乎天地,亦自實理。舍善逐惡比於厭康莊而陟崇山、浮漲海亦何以異。苟非赴君父之急,關忠孝之大,或告之以虎狼蛟鱷之患,而弗信也;而必欲投身試之,是不亦冥頑弗靈甚哉?臨女無貳,原自心性實學,不必疑及禍福。若以懲愚儆惰,則命討遏揚,合存是義;訓俗立教,故自苦心。嘗讀其書,往往不類近儒,而與上古《素問》、《周髀》、《考工》、《漆園》諸編默相勘印,顧粹然不詭於正,至其檢身事心,嚴翼匪懈,則世所謂皋比,而儒者未之或先信哉!東海西海,心同理同。所不同者,特言語文字之際。而是編者出則同文,雅化又已為之前茅,用以鼓吹休明、贊教厲俗,不為偶然,亦豈徒然?固不當與諸子百家同類而視矣。 

余友汪孟僕氏重刻於杭,而餘為僭弁數語,非敢炫域外之書,以為聞所未聞,誠謂共戴皇天。而欽崇要義,或亦有習聞而未之用力者,於是省焉,而存心養性之學當不無裨益云爾。

 

(C)

萬歷疆砸肚⒅歲,日躔在心

浙西後學李之藻盥手謹序

(이상, 발췌 끝)

 

바로 위에 발췌된 바에서, 파란 색으로 표시된 부분인 이 서문 본문의 첫 시작부터 而昌言排之까지, 즉 (A) 부분, (i) 1629년에 출판된 "천학초함"에 포함된 "천주실의", 이지조의 서문의 해당 부분과 정확하게 동일하나, 그러나, 위의 제2-1-1항에 그 일부가 발췌된, 1607년, 萬曆 疆圉叶洽 之歲(즉, 萬曆35년)에 출판된 중각판 "천주실의", 이지조의 서문의 본문의 첫 시작부터 (B) 직전 부분까지와, 중간 부분의 "乾元統天,為君為父。又言:帝出乎震。紫陽氏解之以為帝者,天之主宰。然則天主之義,不自利先生刱矣,"를 제외하고, 전혀 동일하지 않습니다.

 

2-4.

2-4-1. 다음의 주소에 접속하면, 중국 상해 토산만 소재 자모당에서 1868년에 출판한 "천주실의", 이지조의 서문을 읽을 수 있는데, 이 서문의 앞부분은 위의 제2-3항에 발췌된 "천학초함"에 포함된 "천주실의"의 이지조의 서문과 완전히 다른데, 많이 부족한 죄인인 필자가 생각할 때에, 바로 이 이유 때문에, 이 서문의 글자체가 이 책의 다른 부분의 글자체와 완전히 다르다는 생각입니다:

http://ch.catholic.or.kr/pundang/4/cb/1552-1610_마태오_리치/1603_천주실의_상권_중각_1868_토산만본.htm <----- 여기를 클릭하여 필히 확인하라

 

2-4-2. 다른 한편으로, 다음의 주소들에 접속하면, 1775년에 해산된 중국 예수회가 1814년에 재설립/복권된 후에, 1850년대에 예수회 소속의 신부님에 의하여 설립된 상해 토산만 인쇄소, 즉, 토산만 자모당 인쇄소에 대한 글들을 읽을 수 있습니다:

http://ch.catholic.or.kr/pundang/4/cb/2002_천주교동전_여_상해서가회지구_문화잡지_RC43C101.pdf

https://books.google.co.kr/books?id=_KydPAM0GmsC&pg=PA42&lpg=PA42&dq=%22%E5%9C%9F%E5%B1%B1%E7%81%A3%E6%85%88%E6%AF%8D%E5%A0%82%22&source=bl&ots=as7ILbDR8L&sig=ACfU3U0jotk4PL3jmlp6Z3_4KJHkDnX64Q&hl=ko&sa=X&ved=2ahUKEwigr-bavN_kAhXFy4sBHT1xD7IQ6AEwDHoECAgQAQ#v=onepage&q=%22%E5%9C%9F%E5%B1%B1%E7%81%A3%E6%85%88%E6%AF%8D%E5%A0%82%22&f=false

 

2-4-3. 그리고 다음의 주소에 접속하면, 2004년 대만 소재 동양대학 도서관 관신(News Letter)인, "천주실의"의 여러 판본들에 대한 비교/검토의 논문을 읽을 수 있는데, 특히 (i) 1629년에 출판된 "천학초함"에 포함된 "천주실의"의 이지조의 서문과 (ii) 바로 위의 제2-4-2항에 안내된 1868년 자모당 출판의 "천주실의"의 이지조의 서문 사이에, 어떠한 차이점이 있는지 잘 설명하고 있다는 생각입니다:

http://ch.catholic.or.kr/pundang/4/cb/1552-1610_마태오_리치/2004_관장_천주실의판본술략_by_대만_동해대학도서관관신.htm

 

2-4-3-(i). 다음에 발췌된 바는, 바로 위의 주소에 있는 논문으로부터 발췌한 것인데, 특히, 1868년 자모당 출판의 "천주실의"의 이지조의 서문 중에 利先生學術,一本真元라는 표현이 있음에 주목하십시오:

 

(발췌 시작)

以李之藻<天主實義重刻序>為例,「土山灣本」前半為:

 

嘗讀《易》而至仰觀於天,俯察於地,遠取諸物,近取諸身之言,不覺喟然興歎曰:天地萬物, 俱有真理,觀物察理,乃見本原。夫水有源木有根,天地人物之有一大主,可弗識而尊親之乎。《易》亦云:乾元統天,為君為父。又言:帝出乎震。紫陽氏解之以為帝者,天之主宰。然則天主之義,不自利先生刱矣,則此《天主實義》之理,亦并非新奇,迥異於二氏之誕妄。蓋二氏不知認主,而以人為神,敬之如主,尊之勝於君父,忘其大本大原,背其聖經賢傳,良可哀也。利先生學術,一本真元, 譚天之所以為天甚晰,睹世之佞佛忘本者,不勝惻然。遂昌言論斷,

 

《續修四庫全書》、《四庫全書存目叢書》與「天學初函本」則為:

 

昔吾夫子語修身也,先事親而推及乎知天,至孟氏存養事天之論,而義乃綦備,蓋即知即事,事天事親同一事,而天其事之大原也。說天莫辯乎《易》,《易》為文字祖,即言乾元統天,為君為父,又言帝出乎震。此陽氏解之以為帝者,天之主宰。然則天主之義,不自利先生刱矣,世俗謂天幽遠不□,論竺乾氏者出不事其親亦已甚矣,而敢于幻天藐帝,以自為尊。儒其服者,聞夫天命天理天道天德之說,而亦浸淫入之然,則小人之不知不畏也,亦何怪哉。利先生學術一本事天譚天之所以為天甚晰,睹世之褻天佞佛也者,而昌言排之,原本師說,演為《天主實義》十篇,用以訓善坊惡。

(이상, 발췌 끝)

 

2-4-3-(ii). 다음은 다음에 발췌된 바는, 바로 위의 주소에 있는 논문으로부터 발췌한 것인데, 1629년에 출판된 "천학초함"에 포함된 "천주실의"의 이지조의 서문 중의 어떤 용어가 1868년 자모당 출판의 "천주실의"의 이지조의 서문에어 어떠한 용어로 교체되었는지 또한 정밀하게 비교/검토하시기 바랍니다:

 

(발췌 시작)

「土山灣本」改(change)「惟帝統天之為大正統也」為(into)「天主統天之為大正統也」,改「皇天上帝」為「皇天大主」,改「知天事天大旨」為「小心昭事大旨」,改「共戴皇天」為「共戴皇皇」等 [18]

(이상, 발췌 끝)

 

3. 사료 분석의 결과들

 

3-1. 위의 제2항에서 우리는 (i) "천주실의"(1607년, 萬曆 疆圉叶洽 之歲(즉, 萬曆35년), 중각판), 이지조의 서문의 앞부분의 거의 150개의 낱글자들로 구성된 부분과, (ii) 1629년에 출판된 "천학초함"에 포함된 "천주실의", 이지조의 서문의 앞부분의 거의 140개의 낱글자들로 구성된 부분이, 완전히 다름을 실증적으로(positively) 확인하였습니다.

 

3-2. 그런데 이지조(1565-1630년)가 특히 1630년에 세상을 떠난 점을 고려할 때에, 다음의 두 가지 상호 배타적인 경우들을 생각할 수 있을 것입니다:

 

(경우 1) 이지조가 세상을 떠난 다음에, 이지조 이외의 다른 사람이 "천주실의" 본문 맨 앞부분에 있는 이지조의 서문의 앞부분을, 그러한 행위에 대한 아무런 설명을 담은 각주 혹은 주해의 제공도 전혀 없이, 따라서, 임의적/작위적으로 교체한 경우.

 

(경우 2) 이지조가 세상을 떠나기 전에, 1607년, 萬曆 疆圉叶洽 之歲(즉, 萬曆35년)에 출판된 중각판 "천주실의" 본문 맨 앞에 있는 자신의 서문의 앞부분을, 1607년 이후의 어느 시점에, 위의 제2-3항에 발췌된 바에 있는 (A)와 동일하게 교체한 후에, [1629년에 초간된 "천학초함"에 포함된 "천주실의"와 본문이 동일하다고 알려진] 항주본 "천주실의" 부터 1629년에 초간된 "천학초함"에 포함된 천학초함본 "천주실의"에 이르기까지, "천주실의"의 자신의 서문의 앞부분으로 사용한 경우.

 

많이 부족한 죄인인 필자가 생각할 때에, (경우 1)에서 말씀드린 그러한 행위는, 왜냐하면 저작권에 크게 위배되기 때문에, 거의 어불성설이라는 생각이며, 대신에, (경우 2)가 실제로 발생하였을 것이라는 생각입니다.

 

3-3. 다른 한편으로, 중국 상해 소재 "토산만인쇄소"가 예수회 소속의 신부님에 의하여 최초로 설립된 것이, 아무리 빠르더라도, 1850년 대이고, 그리고 모방 신부님께서 이벽 성조에 대하여 조선의 천주교 신자들로부터 전해들은 것은 1836년이기 때문에, 최소한도로 20여년 뒤인1860년 대 혹은 그 이후에 토산만에서 출판된 "천주실의"에 포함된 이지조의 서문 그 자체에 언급된 바를 모방 신부님께서 읽고서 자신의 1836년 12월 9일 서한에서 말하고 있는 것이 결코 아님에 반드시 주목하십시오,

 

3-4. 따라서, 지금까지 본글에서 고찰한 바로부터 다음의 결론들을 도출할 수 있다는 생각입니다:

 

(이 글의 결론 1) 모방 신부님께서 자신의 1836년 12월 9일 서한에서 말하고 있는 "리마두(利瑪竇, 1552-1610년)의 교리(la doctrine de Ly Mato)"는, 이벽 성조(1754-1785년)께서 생존해 있을 당시에 입수하여 학습한, 이지조의 서문에 利先生學術,一本真元이 명기된, "천주실의", 따라서, 1629년에 초간된 "천학초함"에 포함된 "천주실의"결코 아니고, 1607년에 출판된 중각판 "천주실의" 중의 이지조 서문에 명기된 利先生學術,一本真元을 말함을, 이 글의 한 개의 결론으로서 도출합니다. 

 

3-5. 다른 한편으로, 다음의 주소에 접속하면 읽을 수 있는 모방 신부님1836년 12월 9일자 서한은, 이벽 성조께서 "리마두(利瑪竇, 1552-1610년)의 교리(la doctrine de Ly Mato)"를 학습하고 난 이후의 어느 시점에 이승훈을 북경에 파견하였다고 증언하고 있습니다:

http://ch.catholic.or.kr/pundang/4/cb/1804-1839_모방/1836-12-09_모방_신부의_서한_in_2018_여름_상교우서_vol59_30.pdf 

 

따라서, 위의 제3-3항의 (이 글의 결론 1) 및 바로 위의 주소에 있는 모방 신부님의 서한의 증언, 이들 둘 다의 한 개의 따름정리(a corollary)로서, 본글의 제목에서 이미 말씀드린 바인 다음의 결론을 도출할 수 있다는 생각입니다:

 

(이 글의 결론 2) [이지조의 서문 중에 利先生學術,一本真元이 명기된] 1607년, 萬曆 疆圉叶洽 之歲(즉, 萬曆35년)에 출판된 중각판 "천주실의"(天主實義)는, 1783년에 이승훈이 이벽 성조에 의하여 북경에 파견되기 전에, 이벽 성조(1754-1785년)께서 이미 학습한 한문본 천주교 문헌들에 포함됨을. 이 글의 한 개의 결론으로서 도출합니다.

 

게시자 주 3-5: 혹시하여 말씀드립니다만, 본글은 "성교요지"의 저자로 알려진 이벽 성조께서 "천학초함"만을 오로지 학습하지 않으셨음을 모방 신부님의 1836년 12월 9일자 서한의 증언에 근거하여 입증/고증하는 논문이지, 어떠한 경우에도, (이 글의 결론 1)(이 글의 결론 2)이벽 성조께서 1629년에 초판 출판된 "천학초함"에 포함된 "천주실의", "칠극" 등의 한문본 천주교 문헌들을 읽지 않았음을 입증/고증하는 것이 결코 아님을 분명하게 밝혀둡니다.

(이상, 게시자 주 3-5 끝)

 

3-6. 또한 (i) 위의 제3-4항에 있는 (이 글의 결론 1)(ii) 위의 제2-2항, 제2-3항 및 제2-4항에서 실증적으로 고찰한 바로부터, 다음의 결론을 도출할 수 있다는 생각입니다:

 

(이 글의 결론 3) 중국 상해 토산만 소재 자모당에서 1868년에 출판된 "천주실의", 이지조의 서문1607년, 萬曆 疆圉叶洽 之歲(즉, 萬曆35년)에 출판된 중각판 "천주실의" 중의 이지조의 서문임을, 이 글의 한 개의 결론으로서 도출합니다.

 

게시자 주 3-6: (1) 많이 부족한 죄인인 필자가 생각할 때에, 다음의 주소에 접속하면 읽을 수 있는, 2004년 대만 소재 동양대학 도서관 관신(News Letter)인, "천주실의"의 여러 판본들에 대한 비교/검토의 논문에서는 바로 위의 (이 글의 결론 3), 혹은 이 (이 글의 결론 3)과 등가인(equivalent) 혹은 대동소이한 결론을 명확하게 내리지 못하고 있다는 생각입니다:

http://ch.catholic.or.kr/pundang/4/cb/1552-1610_마태오_리치/2004_관장_천주실의판본술략_by_대만_동해대학도서관관신.htm

 

따라서, 바로 위의 (이 글의 결론 3)을 도출할 수 있는 결정적인 근거가, 이벽 성조 사후 불과 51년밖에 되지 않은, 따라서 당시의 우리나라 조선의 천주교 신자들에 의한 신뢰할 수 있는, 이벽 성조의 생애에 대한 생생한 증언이 담긴 것이 분명한, 모방 신부님1836년 12월 9일자 서한에 근거하여 본글에서 필자가 실증적인(positive) 입증/고증을 수행하여 도출한, 위의 제3-4항에 있는 (이 글의 결론 1)임에 주목하십시오.

 

(2) 다른 한편으로, 많이 부족한 죄인인 필자가 확인한 바에 의하면, 위의 제2-1-1항에 안내된, 한국교회사연구소 1972년 발행의 "천주실의 부 텬쥬실의"에 수록된 한문본 "천주실의"는 위의 제2-4-2항에 안내된 1868년 자모당 출판의 "천주실의"와 동일합니다.

 

(3) (개정판 가톨릭대사전 오류) 그리고 다음의 주소에 접속하면 읽을 수 있는, 개정판 "가톨릭대사전"에 제시된 "천주실의"에 대한 안내의 글에서는, 위의 제2-1-1항에 안내된, 한국교회사연구소 1972년 발행의 "천주실의 부 텬쥬실의"에 수록된 한문본 "천주실의"가 1603년에 출판된 "천주실의" 원문와 동일하다고 말하고 있는데, 그러나 여기서, (i) 출판 년도는 1607년, 萬曆 疆圉叶洽 之歲로 바로잡아져야 하고 그리고, (ii) 이 책의 상,하 권 목록과 본문 바깥의 상단 여백들에 있는 작은 글씨체의 한문 주해들은, 이후에 추가된 것이므로, 제외될 것입니다:

 

출처: http://ch.catholic.or.kr/pundang/4/cb/가톨릭대사전/1603_천주실의.htm

(발췌 시작)

《천주실의》는 조선 교회 창설 후에는 한문을 가까이 할 수 없는 서민층을 위해 한글로 번역되어 사본으로 유포되었다. 한국천주교회사연구소는 1603년(*) 간행본의 원문과 조선 후기 사회에 유포되었던 한글 필사본 《쳔쥬실의》를 하나로 묶고 해제를 붙인 후, 1972년 한국교회사 연구자료 4·5호 합집으로 간행한 바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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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게시자 주: 이 출판 년도 1603년은, 중각판이 출판된, 1607년으로 바로잡아져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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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 발췌 끝)

 

(4) 참고로, 위의 제2-1-1항에 안내된, 한국교회사연구소 1972년 발행의 "천주실의 부 텬쥬실의"에 수록된 1607년, 萬曆 疆圉叶洽 之歲(즉, 萬曆35년) "천주실의" 본문 중에 "上主"(상주)라는 한자 단어가 사용되고 있음과 관련된 문제점에 대하여서는, 다음의 주소에 접속하면 읽을 수 있는 졸글 [제목: 上主(상주, heavenly Lord, 높은 하늘에 계신 주님), 上帝(heavenly King, 높은 하늘에 계신 임금님)라는 천주교회 용어들의 출처와 기원]제2-7항에서 실증적으로 확인할 수 있습니다:

http://ch.catholic.or.kr/pundang/4/soh/1942.htm <----- 바쁘지 않은 분들의 필독 권고

(이상, 게시자 주 3-6 끝)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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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교수 소순태 마태오 (Ph.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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