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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꼭필독][영광] 예수님의 영광 = 성령, 니케아-콘스탄티노플 신경 중의 성령께서 성부와 성자로부터 발함의 성경 근거 [divine glory] 1988_glory 1242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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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12-12 ㅣ No.2017

게시자 주: (1) 본글의 인터넷 주소, http://ch.catholic.or.kr/pundang/4/soh/2017.htm 에 접속하면, 본글 중에서 제시되고 있는 출처 문헌들을 쉽게 확인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다음의 인터넷 주소, http://ch.catholic.or.kr/pundang/4/q&a.htm 에 접속하면, 본글의 제목이 포함된, "가톨릭 신앙생활 Q&A 코너" 제공의 모든 게시글들의 제목들의 목록을 가질 수 있습니다. 또한 (i) 2006년 12월 16일에 개시(開始)하여 제공 중인 미국 천주교 주교회의/중앙협의회 홈페이지 제공의 날마다 영어 매일미사 중의 독서들 듣고 보기, 그리고 (ii) 신뢰할 수 있는 가톨릭 라틴어/프랑스어/영어 문서들 등은, 다음의 주소들에 접속하면, 손쉽게 접근할 수 있습니다: http://ch.catholic.or.kr/pundang/4/  (PC용, 날마다 자동으로 듣고 봄) [주: 즐겨찾기에 추가하십시오]; http://ch.catholic.or.kr/pundang/4/m (스마트폰용) [주: 네이버 혹은 구글 검색창 위에 있는 인터넷 주소창에 이 주소 입력 후 꼭 북마크 하십시오] 

 

(2) 이번 글에 서술된 바는, 많이 부족한 죄인인 필자가, 2017년 3월 중순부터 4월 말 기간 동안에 독자적으로 개발한, 따라서 그 저작권(著作權, Copyright)이 필자에게 있는, Data Mining 기법을 적용한, "AI 기반, 한시(漢詩) 표준 해석법 [A Standard Method of Interpretation of Chinese Poems(漢詩), Based on AI(Artificial Intelligence)]"에서 사용하고 있는 방법을, 또한 사용하여 분석하고, 이 분석의 결과에 따라 도출된 바들/결론들입니다. 

(이상, 게사자 주 끝)

 

1. 들어가면서

 

질문 1: 다음의 주소에 접속하면 그 전문을 읽을 수 있는

http://maria.catholic.or.kr/mi_pr/prayer/prayer.asp?menu=prayer&pgubun=3&ingId=126&sgubun=w 

 

미사 중에 고백하는 "니케아-콘스탄티노플 신경" 본문 중에, "성령께서는 성부와 성자에게서 발하시고"(who proceeds from the Father and the Son) 라는 문구가 있는데, 이 문구의 근거가 무엇인지요? 혹시 성경이라면, 그 출처를 정확하게 알고 싶습니다.

 

2. 질문 1에 대한 답변

 

2-1. 예, 요한 복음서에 그 성경 근거가 명기되어 있습니다. 다만, 한 개의 문장(statement)이 아닌직접적으로 관련된 여러 문장들을 한꺼번에 들여다 보아야 함에 유의하여야 할 것입니다.

 

요한 복음서에서 발췌된 다음의 절들을, 차분히 그리고 여러 번, 반복하여 읽으면서, 묵상하시기 바랍니다.

 

[내용 추가 일자: 2024-05-12] 

(장면 설정 설명 시작)

다음은, 많이 부족한 죄인인 필자가, 요한 복음서에서 발췌한 다음의 절들을, 차분히 그리고 여러 번, 반복하여 읽으면서, 묵상할 때에 가졌던 설정은 다음과 같았습니다:

 

(i)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공생활 당시에, 구약 성경에 제시된 바와 조상들의 전통에 따른, 유다교/유다주의의 전통과 관습 아래에서 유다인들인 당신의 제자들을, 즉, 당신 쪽으로 믿는 유다인들을, 청중으로 삼아 가르치셨다.

 

(ii) 요한 복음서에서 발췌된 다음의 절들은 요한 복음서 제6장에 기록된 오병이어 기적이라는 예수님의 행적 이후에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들이기에, 이 말씀들을 듣고 있는 당신의 제자들 모두는 예수님이 하느님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신 "그 예언자"이심을 받아들이고 있었다.

 

(iii) 예를 들어, 다음의 주소에 접속하면, 특정 유다인에게 거룩한 하느님으로부터 진리인 그 무엇이 전달될 경우에, 이 전달된 그 무엇을 받아들인 자의 입장에서 "하느님의 영이 나에게 내렸다"라는 표현을 사용함을 확인할 수 있다:

https://maria.catholic.or.kr/bible/search/bible_search.asp?ctxtPlace=search&ctindex=old2&prindex=0&Keyword=%ED%95%98%EB%8A%90%EB%8B%98%EC%9D%98+%EC%98%81 

 

(iv) 한편으로, 바로 이 이유 때문에,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제자들이 장차 받게 될 바로 이 "하느님의 영", 즉, "진리들로 구성된 그 무엇"(something consisting of truths)을 두고서, "성령을 받게 될 것이다" 라는 표현 혹은 이와 매우 유사한 표현을 사용하셨는데(요한 복음서 20,22), 이 표현을 들었던 당시의 예수님의 제자들은, 왜냐하면 그들이 유다인들이었기 때문에, 구약 성경의 언어/어법에 따라, "하느님의 영이 자신들에게 내린다"로 이해하였을 것임은 매우 명백하다.  

 

(v) 다른 한편으로, 구약 성경 본문에서, 성별되어 저 멀리에 계시는 거룩하신 하느님으로부터 유다인들 쪽으로 "진리들로 구성된 그 무엇"(something consisting of truths)이 다가옴을 두고서, "하느님의 영광이 나타났다/덮다/내리다/가득 차다" 등으로 표현하였는데, 예수님께서는 바로 이 유다인들의 언어/어법에 따라, 성부 하느님께서 당신께 주신 "진리들로 구성된 그 무엇"을 당신께서 당신의 제자들에게 장차 제공해 주실 것임을 두고서, 당신의 제자들이 "[당신의] 영광을 장차 보게 될 것이다" 등으로 표현하셨으며, 이 말을 들은 제자들은  "진리들로 구성된 그 무엇을 예수님으로부터 장차 받게 될 것이다"로 이해하였을 것임은 매우 명백하다는 생각이다.

 

(vi) 그러니까, 예수님으로부터 당신의 제자들에게 장차 전달될 동일한 바인 "진리들로 구성된 그 무엇"을 두고서, (a) 제공하는 예수님의 입장에서는 "[당신의] 영광"이라는 구약 성경의 언어/어법이, 즉, 그 제공자가 하느님이심을 암시하는 언어/어법이, 유일한 중보(中保)이신 예수님에 의하여 사용되었고, 그리고 (b) 수용하는 제자들의 입장에서는 "하느님의 영"이라는 구약 성경의 언어/어법이, 즉, 그 수용자가 피조물인 유다인들임을 암시하는 언어/어법이, 유일한 중보이신 예수님에 의하여 사용되었던 것이다. [(b)의 예: 바로 위에 발췌된 요한 복음서의 절들에 예언된 바가 불과 50일 뒤인 오순절에 구현됨을 두고서 사도 베드로가 증거하는 '베드로의 오순절 설교'(사도행전 2,14-36)에 포함되는, 사도행전 2,33 전문을 필히 정독하도록 하라.]

(이상, 장면 설정 설명 끝)

[이상, 2024-05-12일자 내용 추가 끝]

 

다음에 발췌된 이들 절들의 문맥 안에서, "예수님께 주어진 영광", 즉, "예수님의 영광", 즉, "보호자"가, 곧 "성령"을 말함을, 질문을 주신 분께서 한 개의 진리(a Truth)로서 인지하고 또한 받아들이게 되면, "성령께서 성부와 성자로부터 발하신다"는 결론은 그리 어렵지 않게, 한 개의 따름 정리(a corollary)로서, 매우 자연스럽게, 도출될 것입니다:

 

(*****) (강생하신 성자 하느님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예언의 말씀들이 또한 기록된 요한 복음서로부터 유관 절들의 발췌 시작) 

 

요한 복음서 7,38-39ㄱ: "나 쪽으로 믿는 사람은 성경 말씀대로 '그 속에서부터 생수의 강들이 흘러나올 것이다.'" 이는 당신 쪽으로 믿는 이들이 받게 될 성령 하느님의 영(τοῦ Πνεύματος, the Spirit)[주: 대단히 심각한 번역 오류]을 가리켜 하신 말씀이었다.

 

요한 복음서 10,30: "아버지와 나는 하나이다."

 

요한 복음서 14,31: "그러나 내가 아버지를 사랑한다는 것과 아버지께서 명령하신 대로 내가 한다는 것을 세상이 알아야 한다. 일어나 가자.”

 

요한 복음서 15,10ㄱ: "내가 내 아버지의 계명[들]을 지켜 그분 사랑[의 행위] 안에 마무러는 것처럼..." [주: 추가 일자: 2021년 6월 4일]

 

요한 복음서 16,7ㄴ: "내가 떠나지 않으면 보호자께서 너희에게 오지 않으신다. 그러나 내가 가면 그분을 너희에게 보내겠다."

 

요한 복음서 17,22ㄱ: "아버지께서 저에게 주신 영광을 저도 그들에게 주었습니다."

 

요한 복음서 17,24ㄴ: "세상 창조 이전부터 아버지께서 저를 사랑하시어 저에게 주신 영광을 그들도 보게 되기 바랍니다."

 

요한 복음서 20,22: 이렇게 이르시고 나서 그들에게 숨을 불어넣으며 말씀하셨다. "성령(Πνεῦμα Ἅγιον, the Holy Spirit)받아라."

(이상, 발췌 끝)

 

[내용 추가 일자: 2024-05-12]

사실 위에 발췌된 바 모두는, 예수님께서, 장차 조만간 발생할 소위 말하는 "성령 강림"에 대한 예언을 하신 것인데, 실제로 오순절에 "성령 강림"을 경험하고 그리고 그 결과 갈릴래아 지역 출신 유다인들로 구성된 예수님의 제자들이, 팔레스티나 지역이 아닌 먼 지역에 위치한 "디아스포라"로 불리는 유다인 공동체가 위치한, 이방인 나라들의 지역 언어들로 말들을 하는 것을 당시에 오순절 축제 참석하고자 예루살렘에 와서 머물고 있었던 "디아스포라" 출신 유다인들이 자신의 귀들로 직접 듣고서, 이들 유다인들이 얼마나 놀랐을 것인지 곰곰히 생각해 보십시오.

 

그날 약 삼천 명 가량이 예수님이라는 이름으로 베드로로부터 세례를 받은 것은, 그날 베드로의 설교[즉, 베드로의 오순절 설교: 사도행전 2,14-36] 그 자체가 홀로 탁월하여서가 아니고, 바로 위에 발췌된 바로서 예수님께서 예언하셨던 바가 불과 오십 일이라는 매우 짧은 기간 후인 "오순절"에 실제로 구현되었음을 직접 목격한 당시의 유다인들이 심경 변화를 일으키는 데에, 즉, 회심(conversion)을 하는 데에, 결정적인 작용을 하였다는 생각입니다.

[이상, 2024-05-12일자 내용 추가 끝]

 

이상, 위에서 실증적으로(positively) 고찰한 바로부터, 다음의 결론을 도출할 수 있다는 생각입니다:

 

(이 글의 결론 1) (Sun T. Soh) (i) 바로 위에 발췌된 요한 복음서의 여러 유관 문장들로부터, 특히 요한 복음서 7,38-39ㄱ, 요한 복음서 10,30, 요한 복음서 14,31ㄱ, 요한 복음서 17,22ㄱ, 요한 복음서 17,24ㄴ, 그리고 요한 복음서 20,22로부터, 왜냐하면 예수님에 의하여 제자들에게 주어지는 "진리들로 구성된 동일한 그 무엇"(the same something consisting of truths)이, 주어질 때에는 예수님에 의하여 "영광"으로 불리고 그리고 예수님으로부터 제자들이 받게 되는 "진리들로 구성된 동일한 그 무엇"(the same something consisting of truths)이 예수님에 의하여, 이번에는(in turn), "하느님의 영"[주: 구약 성경의 표현] 혹은 "성령"[주: 신약 성경의 표현]으로 불리기 때문에, "예수님께 주어진 영광, 즉, 강생하신 성자께 주어진 영광"은 곧 "하느님의 영"[주: 구약 성경의 표현] 혹은 "성령"[주: 신약 성경의 표현]을 말함을, 그리하여 그 결과,

 

(ii) [필리오퀘 논쟁의 불필요성] 바로 위에 발췌된 요한 복음서의 여러 유관 문장들로부터, 특히 요한 복음서 7,38-39ㄱ, 요한 복음서 10,30, 요한 복음서 14,31ㄱ, 요한 복음서 17,22ㄱ, 요한 복음서 17,24ㄴ, 그리고 요한 복음서 20,22로부터, 왜냐하면 예수님에 의하여 제자들에게 주어지는 "진리들로 구성된 동일한 그 무엇"(the same something consisting of truths)이, 주실 때에는, "영광"으로 불리고 그리고 예수님으로부터 제자들이 받게 되는 "진리들로 구성된 동일한 그 무엇"(the same something consisting of truths)이, 이번에는(in turn), "하느님의 영"[주: 구약 성경의 표현] 혹은 "성령"[주: 신약 성경의 표현]으로 불리기 때문에, 따라서 "예수님께 주어진 영광이, 즉, 성령께서, 성부와 성자로부터 발함(proceeds)"을, 이 글의 한 개의 결론으로서 도출합니다.(*)

 

왜냐하면,

하느님의 영광이 발(發)하는(proceeds) 바로 그 장소 및 시간

하느님께서 현존(現存)하시고

그리고 역으로(conversely)

하느님께서 현존(現存)하시는 바로 그 장소 및 시간

하느님의 영광이 발(發)하기(proceeds)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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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게시자 주 2-1: (1) 다음의 (i)(ii)는, 필자가 이 결론을 독자적으로 이미 도출한 후에, 추가적으로 확인한 바이다: 즉,

 

(i) 덴칭거 1301(1439년)에서는 다른 근거, 즉, "성부께서 당신 외아들을 낳으시면서 성부임을 제외하고는 당신께 있는 모든 것을 그에게 주셨기 때문에"를 근거로 제시하면서 "성부에게서 영원으로부터 나신 성자께서는 몸소 이것을, 곧 성령께서 성자에게서 발하신다는 것을 영원으로부터 성부에게서 갖고 계신다"고 결론을 내리고 있다. 그러나, 많이 부족한 죄인인 필자가 생각할 때에, 덴칭거 1301(1439년)의 바로 이 기술은, 비록 수사학적으로는 아무런 문제가 없을 것이나, 그러나 여기서 "모든"이라는 형용사가 사용되고 있기 때문에, 설득의 대상자인 동방 정교회 측에서, "논증에 있어, 논리적 비약이 있다"는 지적과 함께 결론에 승복하는 것을 거부할 수도 있다는 생각이다. 그리고,

 

(ii) 다음에 발췌된 신학 대전 Ia, q37,a1,ad3(1265-1274년)에서는 필자가 제시한 바와 논리적으로 등가인, 그러나 "예수님의 영광"[즉, "성부 하느님에 의하여 예수님에게 주어진 영광"]에 대한 명확한 언급이 없는, 근거를, 즉, 밑줄이 그어진 (#)를 근거로 제시하고 있다고 생각되며, 그리고 또한 필자가 위의 제2-1항에 제시한 성경 구절들을, 특히 요한 복음서 7,38-39ㄱ, 요한 복음서 10,30, 요한 복음서 14,31ㄱ, 요한 복음서 17,22ㄱ, 요한 복음서 17,24ㄴ, 그리고 요한 복음서 20,22을, 또한 근거로서 구체적으로 제시하지 않으면서, 곧바로, "성령께서 성부와 성자로부터 발한다"고 결론을 내리기 때문에, 설득의 대상자인 동방 정교회 측에서, "논증에 있어, 또다른 논리적 비약이 있다"는 지적과 함께 결론에 승복하는 것을 거부할 수도 있다는 생각이다. 다음은, 신학 대전 Ia, q37,a1,ad3(1265-1274년)에서 유관 부분을 발췌한 것이다:

 

출처: http://www.logicmuseum.com/authors/aquinas/summa/Summa-I-36-38.htm#q37a1ad3

(신학 대전 Ia, q37,a1,ad3(1265-1274년)에서 발췌 시작)

Iª q. 37 a. 1 ad 3 Ad tertium dicendum quod spiritus sanctus dicitur esse nexus patris et filii, inquantum est amor, quia, cum pater amet unica dilectione se et filium, et e converso, importatur in spiritu sancto, prout est amor, habitudo patris ad filium, et e converso, ut amantis ad amatum. Sed ex hoc ipso quod pater et filius se mutuo amant, oportet quod mutuus amor, qui est spiritus sanctus, ab utroque procedat. Secundum igitur originem, spiritus sanctus non est medius, sed tertia in Trinitate persona. Secundum vero praedictam habitudinem, est medius nexus duorum, ab utroque procedens.

 

Reply to Objection 3. The Holy Ghost is said to be the bond of the Father and Son, inasmuch as He is Love; because, since the Father loves Himself and the Son with one Love, and conversely, there is expressed in the Holy Ghost, as Love, the relation of the Father to the Son, and conversely, as that of the lover to the beloved. But from the fact that the Father and the Son mutually love one another, it necessarily follows that this mutual Love, the Holy Ghost, proceeds from both.(#) As regards origin, therefore, the Holy Ghost is not the medium, but the third person in the Trinity; whereas as regards the aforesaid relation He is the bond between the two persons, as proceeding from both.

(이상, 발췌 끝)

 

그러나(A) 바로 위에 발췌된 성 토마스 아퀴나스의 가르침 중의 첫 번째 문장에 곧바로 뒤이어서, (B) 위의 (이 글의 결론 1)에서 필자가 제시하였듯이, 위의 제2-1항에 발췌된 요한 복음서의 유관 구절들을, 특히 요한 복음서 7,38-39ㄱ, 요한 복음서 10,30, 요한 복음서 14,31ㄱ, 요한 복음서 17,22ㄱ, 요한 복음서 17,24ㄴ, 그리고 요한 복음서 20,22을, 제시하면, "니케아-콘스탄티노플 신경" 본문 중에서 "성령께서는 성부와 성자에게서 발하시고"(who proceeds from the Father and the Son) 라는 기술이 하느님으로부터 오는 참진리임이 성경적이고, 따라서 즉시 그리고 직접적으로, 논리적으로(logically) 증명(prove)/입증(demonstrate)됨에 반드시 주목하라.

 

따라서, "니케아-콘스탄티노플 신경" 본문 중에서 "성령께서는 성부와 성자에게서 발하시고"(who proceeds from the Father and the Son) 라는 기술이 하느님으로부터 오는 참진리임을 논증함에 있어, 위의 제2-1항에 발췌된,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의 권위(Authority)에 전적으로 의존하는, 요한 복음서의 유관 구절들, 특히 요한 복음서 7,38-39ㄱ, 요한 복음서 10,30, 요한 복음서 14,31ㄱ, 요한 복음서 17,22ㄱ, 요한 복음서 17,24ㄴ, 그리고 요한 복음서 20,22의 제시는, 이미 위에서 함께 고찰하였듯이, 그러한 제시가 없을 경우, 논증 중에 부지불식간에 끼어들 수도 있는 논리적 비약들을 확실하게 제거하기 때문에, 가히 필수적임을 알 수 있다는 생각이다.

 

그리고 위의 제2-1항에 발췌된,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의 권위(Authority)에 전적으로 의존하는, 요한 복음서의 유관 구절들, 특히 요한 복음서 10,30, 요한 복음서 14,31ㄱ, 그리고 요한 복음서 17,24ㄴ의 제시는, "영광"(glory)이라는 성경 용어가 나타내는 교의 신학적 의미에 대한 깊은 이해가 필수적임에 또한 반드시 주목하라.

 

(2) 다른 한편으로, 그런데, 설득의 대상자인 동방 정교회 측의 신학자들이 이런 저런 이유를 제시하면서 거부하는 문제들을 근본적으로 극복하기 위하여서는, 많이 부족한 죄인인 필자가 생각할 때에, 11세기 중반 이후에 도출된 논증의 결과들을 가지고 설득의 대상자인 동방 정교회 측 신학자들을 설득하고자 할 경우에, 가장 조심하여야 하는 바, 즉, 혹시라도, 소위 말하는 논리적 악순환(logical vicious circle/cycle)에 빠져들 수도 있는 점을 또한 십분 고려히여, 이 논리적 악순환의 문제에 빠져들지 않기 위하여, 될 수 있는 한, (a) 삼위일체 교의가 처음으로 정식화되기 이전의 시점 혹은 삼위일체 교의가 처음으로 정식화되는 시기에, (b) 성경에 기록된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들 혹은 사도들의 말씀들에 전적으로 근거하는 논증의 과정을 통하여, 이미 도출된 결과이어야 할 것이다. 더 나아가, (c) 만약에, 심지어 이 결과가, 라틴 교부(들)가 아닌, 그리스 교부(들)에 의하여 미미 논리적으로 입증된 것이라면, 설득의 대상자인 동방 정교회 측에서 이 결론을 거부할 명분 자체가 사라질 것이라는 생각이다. 바로 이 이유들 때문에, 바로 야래에 발췌된 내용은 대단히 중요하다는 생각이다:

 

다음의 주소에 접속하면, 요한 복음서 14,31ㄱ  17,24ㄴ의 문맥 안에서, "예수님의 영광"[즉, "성부 하느님에 의하여 예수님에게 주어진 영광"]이란 곧 "성령"을 말함의 근거로서 많이 부족한 죄인인 필자가 제시한 바와 동일한 혹은 논리적으로 등가인(logically equivalent) 근거를 니사의 그레고리오(Gregory of Nyssa, 335-395년)도 또한 제시하였음을 알 수 있다. 특히, 많이 부족한 죄인인 필자가 생각할 때에, 이 제시가 대단히 중요한 이유는, 11세기 중반 경에 구체적으로 발생한 필리오퀘 논쟁의 표면화 시점보다 무려 700여년 이전인 4세기 중반 이후의 어느 시점에, 심지어 삼위일체 교의가 정식화되는(formulated) 바로 그 시점에, 이미 "예수님의 영광"이 곧 "성령"을 말함이 그리스 교부 니사의 그레고리오에 의하여 명확하게 입증되었기 때문에, 특히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교회 일치 정신" 아래에서, 약 1,000년 전에 필리오퀘 논쟁을 처음으로 야기한 동방 정교회 측을 논리적으로 설득함에 있어 매우 중요한 그리고 확실한 근거가 되기 때문이다:

 

출처 1: https://books.google.co.kr/books?id=w5KkCgAAQBAJ&pg=PT193&lpg=PT193&dq=%22glory+is+the+Holy+Spirit%22 [구글 검색시 key word: "glory is the Holy Spirit"]

출처 2: https://books.google.co.kr/books?id=LQhrDwAAQBAJ&pg=PT257&lpg=PT257&dq=%22this+glory+is+the+holy+spirit%22 [구글 검색시 key word: "this glory is the Holy Spirit"]

출처 3: https://books.google.co.kr/books?id=gPK7CgAAQBAJ&pg=PA58&lpg=PA58&dq=%22this+glory+is+the+holy+spirit%22+%22Song+of+Songs%22 [구글 검색시 key word: "this glory is the Holy Spirit" "Song of Songs"]

출처 4: https://tcrb.alexanderstreet.com/philologic/TCRB/navigate/132/4/4/ [구글 검색시 key word: "this glory is the holy spirit" "20th Century Religious Thought"]

출처 5: https://www.google.co.kr/search?hl=ko&biw=917&bih=793&tbs=li%3A1&ei=GiYNXsjfIIeQr7wP0beJmAo&q=%22this+glory+is+the+holy+spirit%22+%22Hans+Urs+Von+Balthasar%22 [주: 이 논문의 제346쪽에 발췌된 바를 보라; 구글 검색시 key word: "this glory is the holy spirit" "Hans Urs Von Balthasar"]

출처 6: https://www.google.co.kr/search?hl=ko&biw=917&bih=793&ei=_C0NXoyQI7KFr7wPseu1mAU&q=%22this+glory+is+the+holy+spirit%22+%2220th+Century+Religious+Thought%22&oq=%22this+glory+is+the+holy+spirit%22+%2220th+Century+Religious+Thought%22 [구글 검색시 key word: "this glory is the holy spirit" "20th Century Religious Thought"]

 

그리고 다음은, 성 요한 바오로 2세 교황님베네딕토 16세 교황님의 스승으로 알려진, 추기경 라칭거(신앙 교리성 장관, 교황 베네딕토 16)과 함께 가톨릭 그리스도교 신학 전문 학술지로서 1972년에 첫 발행된 "Communio" 의 창립자 및 편집자이셨던, 그러나 국내에는 잘 알려지지 않은, 한스 우르스 폰 발타사르 추기경님(Hans Urs Von Balthasar, 1905-1988년)의 저서로서 1995년에 출판된 영어본, "Presence and Thought: An Essay on the Religious Philosophy of Gregory of Nyssa", 제168쪽에서 발췌한 바이다:

 

출처 1: https://tcr1.alexanderstreet.com/philologic/TCRT/navigate/132/4/4/ [주: 옛 출처]

출처 2: https://books.google.co.kr/books?id=A4xHDwAAQBAJ&pg=PA167&lpg=PA167&dq=%22Gregory+forms+a+conception+of+supreme+unity,+not+in+the+sign+of+the+Father%22&source=bl [(2024-05-24) 주: 새 출처;

구글 검색 key: "Gregory forms a conception of supreme unity, not in the sign of the Father"]

(유관 부분 발췌 시작)

Gregory forms a conception of supreme unity, not in the sign of the Father, but in that of the Spirit. And this is quite expressly the case—the idea will be found surprising, perhaps, in the case of a Greek Father—insofar as he is the mutual love of the Father and the Son. In fact, when the Son asks the Father for the unity of his Mystical Body, he asks for that unity that holds sway between them: sicut nos unum sumus (just as we are one). We cannot therefore be perfectly unified without possessing that unity which is the unity of the Father and the Son and which is the identity of the Spirit.


니사의 그레고리오(Gregory of Nyssa, 335-395년)가, 성부의 표지(sign) 안에서가 아니라, 성령의 바로 그것 안에서 지고의 결합(supreme unity)이라는 한 개의 개념 이해 과정(conception)을 형성합니다.(*1) 그리고 바로 이 형성은, 성령께서 성부와 성자의 상호 사랑(mutual love)인 한, 정말로(quite) 명백하게(expressly) 그 경우이며, 이 개념(the idea)은, 아마도, 한 명의 그리스 교부[즉, 니사의 그레고리오]의 경우에, 놀랄만한 것이 되어있을 것임(surprising)을 장차 발견할 것입니다. 사실, 성자께서 당신의 신비로운 몸의 결합(the unity of his Mystical Body)을 성부께 요청하실 때에, 그분께서는, 다음과 같이당신들 사이에서 흔들림을 지배하고 있는(holds sway) 바로 그 결합을 요청하셨습니다: sicut nos unum sumus (우리가 하나인 것과 꼭 마찬가지로). 그러므로 우리는, 성부와 성자의 결합(unity)인 그리고 성령의 정체/신원(identity)인 바로 그 결합을 소유함 없이, 완미하게(perfectly) 결합될 수 없습니다.


     When perfect charity will have cast out fear. and when fear shall have been 
     changed into love, then all that is saved will be one unity, a unity that increases in
     consonance with the unique good, and all will be, mutually, one in the perfect Dove.
     So that, encircled by the unity of the Holy Spirit as by a "bond of peace". , all will
     be one body and one spirit. But it is more worthwhile to repeat here the exact words
     of the Gospel: "So that all may be one, like you, Father, and I in you". The bond of
     this unity is glory and that this glory is the Holy Spirit anyone who is familiar with
     Scripture will agree, if he reflects on the word of the Lord: "The glory you have given
     me I have handed on to them." For in all truth he gave them this very same glory
     when he says: "Receive the Holy Spirit."


     완미한(perfect) 애덕(charity, 사랑)이 두려움을 장차 몰아낼 때에,(*2) 그리고 두려움
     이 사랑(love)으로 장차 마땅히 변화될 때에, 비로소 구함을 받은 모든 이들이 장차, 이
     유일한 선(the unique good)과 공명(共鳴)/협화(協和)
   (consonance)
를 이룸 안에서 증가하는 한 결합인, 하나의 결합(one unity)이
     될 것이며, 그리하여 모든 이들은, 서로, 이 완미한 비둘기(the perfect Dove, 주: 성령)
     안에서 장차 하나가 될 것입니다. 그리하여 그 결과, 어떤 "평화의 결속."에 의한 것으로
     서 성령이라는 결합에 의하여 에워 싸여지게 되어(encircled), 모든 이들은 하나의 몸
     (one body) 그리고 하나의 영(one spirit)이 장차 될 것입니다. 그러나 여기서, 다
    음과 같은, 복음서의 말씀들을 반복하는 것은 더 가치가 있을 것
    입니다:
"아버지께서 제 안에 계시고 제가 아버지 안에 있듯이, 그들도 아버지 안에
     있게 해 주십시오."(요한 복음서 17,21ㄴ) 
바로 이 결합(unity)이라는 결속
   
(bond)
영광(glory)이며 그리고 바로 이 영광이 성령(the Holy
    Spirit)성경 본문과 친숙한 누구이든지, 그가 다음과 같은 주님
    의 말씀에 대하여
묵상한다면, 동의할 것입니다: "아버지께서 저에게
     주신 영광을 저도 그들에게 주었습니다."(요한 복음서 17,22ㄱ) 이는 모든 진리
     안에서 그분께서 그들에게, 그분께서 "성령받아라."(요한 복음서 20,22ㄴ)하고
     말씀하실 때에, 바로 이 동일한 영광을 주셨기 때문입니다.

(이상, 발췌 및 우리말 번역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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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번역자 주: 다음의 주소에 접속하면 읽을 수 있는, 영어본 니사의 그레고리오"아가에 대한 강론들(Homilies on Song of Songs), 강론 15(Homily 15)에서, 제495쪽 마지막 단락부터 읽도록 하라:


출처: http://ch.catholic.or.kr/pundang/4/Homilie_on_the_Song_of_Songs-Gregory_of_Nyssa_St_&_Norris_5413.pdf <----- 필독 권고  

(발췌 시작)
But it would be better to set out the divine statements of the Gospel themselves, word for word: “That they may all be one, even as you, Father, are in me and I in you, that they also may be one in us.” Now that which holds
this unity together is glory, and no one who looks into the matter will deny that “glory” means the Holy Spirit, if account is taken of the Lord’s words; he says, after all, “The glory that you have given me, I have given to them.” For the one who truly gave the disciples glory of this order was the one who said to them, “Receive the Holy Spirit.”


그러나 복음서의 신성적 문장들 자체들을, 다음과 같이, 정확한 단어들로(word for word) 순서있게 설명하는 것(set out)이 더 나을 것입니다: "심지어 당신, 성부께서 제 안에 계시고 그리고 제가 당신 안에 있듯이 [우리가 하나인 것처럼], 그들도 하나가 될 수도 있게 하려는 것입니다."(요한 복음서 17,22ㄴ-23ㄱ) 이제 바로 이 결합(this unity)을 단결(團結)시키는(holds together) 바로 그것이 영광(glory)이며, 그리고 이 사안을 들여다보는 자 누구든지, 만약에, 다음과 같은, 주님의 말씀들로부터 자세한 이야기가 발췌된다면, [여기서의 문맥 안에서] "영광""성령"을 의미함을 부정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분께서, 결국에, "아버지께서 저에게 주신 영광을 저도 그들에게 주었습니다."(요한 복음서 17,22ㄱ) 라고 말씀하십니다. 왜냐하면 제자들에게 바로 이 질서/등급(this order)의 영광을 참으로 주셨던 바로 그분은 그들에게 "성령을 받아라"(요한 복음서 20,22ㄴ)라고 말씀하셨던 바로 그분이시기 때문입니다.

(이상, 발췌 및 우리말 번역 끝)


(*2) 번역자 주: 다음에 발췌된 바를 읽고 묵상하도록 하라:

 

출처: http://ch.catholic.or.kr/pundang/4/soh/1704.htm <----- 필독 권고 

(발췌 시작)

(#3) 게시자 주:

(1) 전통적 그리스도교 윤리 신학에 있어, 우리들의 성화(sanctification, 즉, 거룩하게 됨)와 관련하여 대단히 중요한 개념들을 나타내는 용어들인 "완전한(complete)""완미한(perfect)"의 차이점을 모를 경우에, 예를 들어, 다음은 영어본 가톨릭 교회 교리서 제1831항에서 발췌한 다음의 문장을 읽고 그 내용을 올바르게 이해하는 것은 불가능 할 것이다:

 

출처: http://www.vatican.va/archive/ENG0015/__P67.HTM
(발췌 시작)
They complete and perfect the virtues of those who receive them.

(성령의 일곱 선물)은 이 선물을 받아들인 자들의 [자연적 윤리] 덕(the virtues)(*)완전하게 하며(complete) 그리고 완미하게 한다(perfec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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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번역자 주: 여기에는, 예를 들어, 모든 자연적 윤리덕들의 주된 덕들인 정의(justicce, 의덕), 현명(prudence, 지덕), 절제(temperance, 절덕), 굳셈(fortitude, 용덕)으로 구성된, 사추덕(the four cardinal virtues)들이 포함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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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 발췌 및 우리말 번역 끝).

 

다음은, 우리말본 가톨릭 교회 교리서 제1831항의 대응하는 우리말 번역문인데, 위의 우리말 졸번역문과 얼마나, 어떻게 차이가 나는지 정밀하게 비교/검토하라. 추가적으로, 반드시 복수로 번역되어야 하는 "virtues"가 단수 "덕"으로만 번역되었는데, 이것도 또한 명백한 번역 오류이다:

 

츨처: http://www.albummania.co.kr/gallery/view.asp?seq=157803&path=
110610121307&page=684

(발췌 시작)

성령의 선물은 그것을 받은 사람들의 덕을 보충하고 완전하게 한다.

(이상, 발췌 끝)

 

(2) "완전(completeness)" 안에서만 오로지 "완미(perfection, 즉, 완전하고 또한 흠/결함/결여가 없음)"가 가능할 수 있는데, 이에 대한 더 자세한 글들은 다음에 있으니 꼭 읽도록 하라:

http://ch.catholic.or.kr/pundang/4/soh/1094.htm <----- 필독 권고

http://ch.catholic.or.kr/pundang/4/soh/1108.htm <----- 필독 권고

 

(3) (번역 오류) 따라서, 예를 들어, 여기를 클릭하면 읽을 수 있는, "새 번역 성경"의 요한 1서 제4장에서, 다음과 같이 교체되어야 할 것입니다:

1요한 4,12에서, 그분 사랑이 완성됩니다 -----> 그분 애덕이 완미(完美)하게 됩니다

1요한 4,17에서, 사랑이 우리에게서 완성되었다는 -----> 애덕이 우리에게서 완미(完美)하게 된다는

1요한 4,18에서, 완전한 사랑은 -----> 완미(完美)한 애덕

1요한 4,18에서, 자기의 사랑을 완성하지 못한 -----> 애덕에 있어 완미(完美)하지 못한

 

바로 위의 교체들에서, 사랑이 애덕(caritas)으로 교체되어야 함은, 다음의 주소에 있는 대중 라틴말 성경(Vulgate)의 해당 본문들로부터 쉽게 확인할 수 있습니다:

http://www.newadvent.org/bible/1jo004.ht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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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 발췌 및 우리말 번역 끝)
(이상, 발췌 끝)

 

(4) "완미(完美)하다"(perfect)/"완미(完美)"(perfection)라는 대단히 중요한 용어의 전통적 그리스도교 교의 신학적 의미/정의(definition)에 대한 글들은 다음의 주소들에 접속하면 읽을 수 있다:

http://ch.catholic.or.kr/pundang/4/soh/969.htm <----- 필독 권고

http://ch.catholic.or.kr/pundang/4/soh/1094.htm <----- 특히 필독 권고 

http://ch.catholic.or.kr/pundang/4/soh/1108.htm <----- 특히 필독 권고 

http://ch.catholic.or.kr/pundang/4/soh/1333.htm <----- 특히 필독 권고  

http://ch.catholic.or.kr/pundang/4/soh/1480.htm <----- 필독 권고 

http://ch.catholic.or.kr/pundang/4/soh/1574.htm <----- 특히 필독 권고 

http://ch.catholic.or.kr/pundang/4/soh/1575.htm <----- 특히 필독 권고 

http://ch.catholic.or.kr/pundang/4/soh/1704.htm <----- 특히 필독 권고 

http://ch.catholic.or.kr/pundang/4/soh/1972.htm <----- 특히 필독 권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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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 게시자 주 2-1: (1)과 (2) 끝)

 

바로 (이 글의 결론 1)한 개의 따름 정리(a corollary)로서, 다음의 결론을 도출할 수 있다는 생각입니다:

 

(이 글의 결론 2) [필리오퀘 논쟁의 불필요성] 바로 위에 발췌된 요한 복음서의 여러 유관 문장들이, 특히 요한 복음서 7,38-39ㄱ, 요한 복음서 10,30, 요한 복음서 14,31ㄱ, 요한 복음서 17,22ㄱ, 요한 복음서 17,24ㄴ, 그리고 요한 복음서 20,22이, "니케아-콘스탄티노플 신경" 본문 중에, "성령께서는 성부와 성자에게서 발하시고"(who proceeds from the Father and the Son) 라는 문구의 성경 근거임을, 이 글의 한 개의 결론으로서 도출합니다.

 

그리고 또한 다음의 결론을 도출할 수 있다는 생각입니다:

 

(이 글의 결론 3) 위의 제2-1항에 발췌된 요한 복음서의 몇 개의 절들의 문맥 안에서, 그리스어 요한 복음서 7,38-39ㄱ 그리고 그리스어 요한 복음서 20,22 본문들로부터, 예수님 당신 자신께서 구약 성경의 "하느님의 영"(τοῦ Πνεύματος, the Spirit)이 곧 신약 성경의 "성령"(Πνεῦμα Ἅγιον, the Holy Spirit)이라고 가르쳐 주셨음을, 이 글의 한 개의 결론으로서 도출합니다.

 

게시자 주 2-1: (3) 바로 위에 있는 (이 글의 결론 1) 중에서 도출된 "예수님의 영광"[즉, "성부 하느님에 의하여 예수님에게 주어진 영광"]은 곧 "성령"을 말함은 또한, 다음의 제2-2항에 발췌된, 가톨릭 보편교회의 가르침이기도 합니다:

 

2-2. 다음의 가톨릭 보편교회 교도권의 가르침은 "가톨릭 교회 교리서", 제690항의 두 번째 문장(statement)을 발췌한 것입니다. 그리고 필자에 의하여 마련된 영어본 가톨릭 교회 교리서 제690항의 우리말 번역문은 아래의 게시자 주 2-2에 있으니, 이들 둘을 정밀하게 비교/검토하시기 바랍니다::

 

출처 1: http://www.vatican.va/archive/ccc_css/archive/catechism/p1s2c3a8.htm  

(영어본 가톨릭 교회 교리서 제690항에서 발췌 시작)

CCC 690 [...] When Christ is finally glorified,12 he can in turn send the Spirit from his place with the Father to those who believe in him: he communicates to them his glory,13 that is, the Holy Spirit who glorifies him.1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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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 Jn 7:39.
13) Cf. Jn 17:22.
14) Cf. Jn 16: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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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 발췌 끝)

 

출처 2: http://www.albummania.co.kr/gallery/view.asp?seq=157803&path=110610121307&page=299 

(우리말본 가톨릭 교회 교리서 제690항에서 발췌 시작)

[...] 마침내 그리스도께서 영광을 받으셨을 때 9),(*1) 이번에는 그리스도께서 성부 곁에서, 당신을 믿는 사람들에게 성령을 보내실 수 있게 되었다. 그리스도께서는 당신의 영광을, 10) 곧 당신에게 영광을 더하시는(glorifies)(*2) 성령11) 그들에게 주신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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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9. 요한 7,39 참조.
10. 요한 17,22 참조.

11. 요한 16,14 참조. 

 

(*1) 게시자 주: (번역 오류 한 개) 기존의 "마침내 그리스도께서 영광을 받으셨을 때"라는 번역문은 "그리스도께서 영광을 전혀 받지 못하셨는데, 드디어 처음으로, 영광을 받으셨을 때"를 의미하는데, 그러나, 이것은 요한 복음서에 기록된 바들에 전혀 부합하지 않기 때문에, 명백한 번역 오류라 아니 지적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강생하신 성자이신 예수님께서는 한처음 이전부터 "성령", 즉, "성자의 영광"을 성부로부터 받으셨기 때문에(요한 복음서 17,24ㄴ), 따라서, 강생 이후에도, 강생하신 성자 하느님이신 예수님의 영혼(soul)"성자 하느님의 영광"을 항상 받고 있으셨으며[상태 A], 따라서 여기서 말하는 "when Christ is finally glorified"란, 전후 문맥 안에서, "지상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 과정에, 당신의 몸(body)이 또한 추가적으로 영광을 받아 거룩하게 변모되시고[상태 B][가톨릭 교회 교리서 제659항ㄴ](#1), 또한 그러고 나서, 하늘로 예수 그리스도의 승천 과정에, 최종적으로(finally)당신의 영혼(soul)과 몸(body), 즉, 당신의 인성(humanity)이 또한 추가적으로 영광을 받아 승천을 완료하셨을 때[신성적 영광(divine glory)을 예수님의 인성이 완미하게(perfectly) 받고 있는 상태 C][사도행전 2,33; 가톨릭 교회 교리서 제659항ㄹ; 가톨릭 교회 교리서 제660항ㄴ 참조](#1)"를 정확하게(precisely) 지칭하여 말하는 것이므로[가툴릭 교회 교리서 제244항 참조](#2), 따라서, "when Christ is finally glorified"는 "그리스도께서 최종적으로 영광을 받게 될 때"로 직역 번역(literal translation)이 되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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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게시자 주: 다음의 주소들에 접속하면 "가톨릭 교회 교리서(CCC)", 제659항, 제660항을 읽을 수 있다:

http://www.vatican.va/archive/ccc_css/archive/catechism/p1s2c2a6.htm#659 [영어본]

http://www.albummania.co.kr/gallery/view.asp?seq=157803&path=110610121307&page=285 [우리말본]

 

(#2) 게시자 주: 다음의 주소들에 접속하면 "가톨릭 교회 교리서(CCC)", 제244항을 읽을 수 있다:

http://www.vatican.va/archive/ccc_css/archive/catechism/p1s2c1p2.htm#244 [영어본]

http://www.albummania.co.kr/gallery/view.asp?seq=157803&path=110610121307&page=124 [우리말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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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게시자 주: 영어로 "glorify"로 번역되는 용어를 "영광스럽게 하다"로 번역하는 것이 심각한 번역 오류이므로, 필자가 "영광을 더하다"로 교체하였다. 이 지적에 대한 필자의 졸글들은 다음의 주소들에 접속하면 읽을 수 있다:

http://ch.catholic.or.kr/pundang/4/soh/1988.htm <----- 필독 권고

http://ch.catholic.or.kr/pundang/4/soh/1989.htm <----- 필독 권고

http://ch.catholic.or.kr/pundang/4/soh/2018.htm <----- 필독 권고

-----

(이상, 발췌 끝)

 

[내용 추가 일자: 2024-05-25(나해 삼위일체 대축일 직전날)] 

게시자 주 2-2: (0) 다음은 필자가 마련한 위의 영어본 가톨릭 교회 교리서 제690항의 우리말 번역문입니다:

 

(우리말 졸번역 시작)

CCC 690 [...] 그리스도께서 최종적으로(finally) 영광을 받으셨을 때에,12 당신께서는 그 결과로(in turn) 성부와 함께 계시는 당신의 자리로부터 다음과 같이 하느님의 영(the Spirit)을 당신 쪽으로 믿는 자들에게 파견하실/보내실(send) 수 있으십니다(can): 당신께서 그들에게 당신의 영광(his glory)을,13 즉, 당신에게 영광을 더하신 분이신 성령(the Holy Spirit)을, 나누어주십니다(communicates).14 [...]

(이상, 우리말 졸번역 끝)

[이상, 2024-05-25일자 내용 추가 끝] 

 

[내용 추가 일자: 2024-05-26]

(1) (Sun T. Soh) 다음의 주소에 접속하면, 

http://ch.catholic.or.kr/pundang/4/soh/2192.htm <----- 꼭 필독 권고

[제목: 필리피 2,11에서 하느님 아버지께 영광을 드리게 하셨습니다??? [번역오류]; 게시일자: 2021-03-28]

 

(i) 본글에서 고찰하는 바인 (이 글의 결론 4), 그리고 하느님의 지고한 따라서 유일한 신성적 통치권(divine Sovereign)으로부터, 삼위일체 교의의 정식화의 필요성이, 그리스도교로 개종한 유다인들의 경우에, 매우 자연스럽게 인지되었을 것임

 

그리고 독립적으로,

 

(ii) 예수님의 공생활의 마지막 부분인 예수님의 부활 및 승천 그리고 하느님의 지고한 따라서 유일한 신성적 통치권(divine Sovereign)으로부터 삼위일체 교의의 정식화의 필요성(necessity)이, 그리스도교로 개종한 이방인들의 경우에, 또한 매우 자연스럽게 인지되었을 것임에 대하여,

 

학습할 수 있습니다.

 

2-3. 따라서, 다음의 결론을 도출할 수 있다는 생각입니다 [(2024-06-21일자 내용 설명 추가 시작) 주: 바로 아래에서, '한 개의 칭호(a title)로서 "하느님의 영"(창세 1,2)이 나타내는 그 무엇(something)'이 '한 개의 칭호(a title)로서 "성령"이 나타내는 그 무엇(something)'동일함(identical)은 위의 제2-1항에 발뤠된 예수님의 예언들에 의하여 성립함(2024-06-21일자 내용 설명 추가 끝)]
[링크 주소: http://ch.catholic.or.kr/pundang/4/soh/하느님의_영(창세1_2)이_하느님이심을_다수의_유다인들이_수용하게_된_것은_예수님의_구속_위업의_한_결과이다_2017.htm (클릭하지 마십시오)]:

 

(결론 B) (이 글의 결론 4) (Sun T. Soh) 위의 제2-1항에 제시된 (이 글의 결론 3)에 의하여, 구약 시대의, 창세기 1,2에서 이미 말해지고 있는, "하느님의 영"(the Spirit)이 예수님에 의하여 "당신이 받으신 영광" , "보호자", 그리고 "성령"(the Holy Spirit)로 불리게 되었음을 알게 되었는데, 예수님의 부활 및 승천에 의하여, 예수님과 항상 함께 있는 바로 이 예수님의 영광, 즉, "하느님의 영"(the Spirit), 즉, "성령"(the Holy Spirit)이 또한, 성부 하느님에 의하여, 예수님의 승천 과정에 성부 하느님의 오른편에 이르기까지 높이 들어올림 받게 되어, 그리하여 그 결과, 성부 하느님께서 예수님과 항상 함께 있는 바로 이 "성령"(the Holy Spirit)이 또한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즉, "주님"(the Lord)이라는 하느님에 대한 피휘(避諱)의 이름]을 가짐에 아무런 오류가 없음을 인간들이 처음으로/최초로 알아차릴 수 있게 해 주셨으며(필리피서 2,9 참조),(*) 다른 한편으로, 왜냐하면 "신성적 통치권/주권"(divine sovereignty)을 가지신 분은 "한분이신 하느님" 단 한 분 뿐이기 때문에, 바로 이 과정에 의하여, 즉, 파스카 신비의 전개 과정에 의하여, 구약 시대의, 창세기 1,2에서 이미 말해지고 있는, "하느님의 영"(the Spirit)이 구약의 시대에는 하느님이심을 모르고 있었는데, 그러나 신약 시대에 들어와 예수님의 구속(救贖)/속량(Redemption) 위업의 한 결과로서비로소 처음으로 "하느님의 영"(the Spirit)이 하느님이심이 인간들에게 구체적으로 드러내어졌음을, 달리 말하여, 비로소 처음으로 "하느님의 영"(the Spirit)이 하느님이심을 인간들이 인지할 수 있게 되었음을, 이 글의 한 개의 결론으로서 도출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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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게시자 주: (i) 다음의 주소에 있는, "필리피 2,11에서 하느님 아버지께 영광을 드리게 하셨습니다??? [번역오류]" 제목의 졸고[게시일자: 2021-03-28]를 필독하도록 하라:

http://ch.catholic.or.kr/pundang/4/soh/2192.htm <----- 꼭 필독 권고

 

(ii) 다음의 주소에 접속하면, 바로 위의 (이 글의 결론 4)가 다음의 주소에 접속하면 읽을 수 있는 결론에 이어지는 한 개의 따름 정리(a corollary)임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출처: http://ch.catholic.or.kr/pundang/4/soh/예수님이_하느님이심을_다수의_유다인들이_수용하게_된_것은_예수님의_구속_위업의_한_결과이다_3310.htm 

(발췌 시작)

(이 글의 결론 2) (Sun T. Soh) 우리가  "주님을 찬양하여야 하는" 혹은 "주님이라는 이름을 찬양하여야 하는" 충분 조건(sufficient condition)이 포함된 구약 성경 및 신약 성경의 절들에, 시편 148,5과 시편 148,13 이 포함됨을, 이 글의 한 개의 결론으로서 도출합니다.  

 

(결론 A) (이 글의 결론 3) (Sun T. Soh) (i) 필리피서 2,6-11의 교의 신학적, 성서 신학적, 그리고 영성 신학적 근거가, 주되게, 시편 148,13임을, 즉, 필리피서 2,6-11에 제시된, 십자가 위에서 수난받고 돌아가신 다음 부활 후에 승천하게 되신 예수님이 주님(Lord)이시라는 결론의 충분 조건 한 개가 바로, 예수님께서 승천하게 되심으로써 충족시킨(근거: 사도행전 2,4-36에 기록된 피조물인 그리스도교 첫 순교자 스테파노의 증언), 칠십인역 그리스어본 시편 148,5 및 시편 148,13 둘 다에 'ὅτι'(because, 왜냐하면)가 사용되고 있는, 번역 오류들이 없는시편 148,13의 (ㄴ) 임을, [내용 추가 일자: 2024-05-25] (ii) 다른 한편으로, 왜냐하면 "신성적 통치권/주권"(divine sovereignty)을 가지신 분은 "한분이신 하느님" 단 한 분 뿐이기 때문에, 그러므로, 예수님이 주님이심을 증명하는 필리피서 2,6-11에 의하여, 예수님이 하느님이심이 증명됨, [이상, 2024-05-25일자 내용 추가 끝] 이 글의 한 개의 결론으로서 도출합니다.

(이상, 발췌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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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 따라서 바로 위에 발췌된 (결론 A), 그리고 (결론 B)한 개의 따름 정리(a corollary)로서, 다음의 결론을 도출할 수 있다는 생각입니다:

[링크 주소: http://ch.catholic.or.kr/pundang/4/soh/왜_2위_4위_혹은_5위도_아니고_다만_성부_성자_성령_3위의_하느님일까_2017.htm (클릭하지 마십시오)]

 

(이 글의 결론 5) (Sun T. Soh) 바로 위에 발췌된 (결론 A)(결론 B)에 의하여, 예를 들어, 2위일체 교의의 정식화, 4위일체 교의의 정식화, 혹은 5위일체 교의의 정식화, 혹은 더 나아가 n위일체 교의의 정식화가 결코 가능하지 않고, 다만 3위일체 교의의 정식화만이 오로지 가능하였음을, 이 글의 한 개의 결론으로서 도출합니다.

 

왜냐하면, 위에 제시된 (결론 A)(결론 B) 둘 다를 한꺼번에 들여다보면, 예수님이 주님이심이 증명되는 과정(결론 A)에, (결론 B), 즉, 예수님과 결합되어 있는 "예수님의 영광"[즉, "성부 하느님에 의하여 예수님에게 주어진 영광"], 즉, 구약 성경의 "하느님의 영", 즉, 위의 제2-1항(*****)에서 예수님이 말씀하신 "보호자", 즉, "성령"이 또한 주님이심이 자동적으로(automatically) 증명되기 때문입니다.

 

질문 2: 예수님예수님과 결합되어 있는 "예수님의 영광"[즉, 구약 성경의 "하느님의 영", 즉, 위의 제2-1항(*****)에서 예수님이 말씀하신 "보호자", 즉, "성령"] 이외의 어떠한 그 무엇이 또한 "주님"이 될 수 있는지요???

 

질문 2에 대한 답변: 전혀 없다는 생각입니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 당신의 구속/속량(Redemption) 위업, 즉 파스카 신비의 전개 과정 전반을 예상하시면서, 요한 복음서에 기록된, 예언하신 바가 위의 제2-1항(*****)에 발췌되어 있는데,  지금 다루고 있는 주제와 관련하여, 예수님과 함께 있는 예수님의 영광[즉, 구약 성경의 "하느님의 영", 즉, 위의 제2-1항 (*****)에서 예수님이 말씀하신 "보호자", 즉, 성령] 이외의 어떠한 그 무엇도 당신의 부활 및 승천과 관련하여 예수님께서 추가적으로 거명하면서 당신과 함께 있음을 독자들이 인지할 수 있도록 말씀하시지 않으셨기 때문입니다.

 

게시자 주 2-4: 많이 부족한 죄인인 필자가 생각할 때에, (이 글의 결론 5)는, 지금 다루고 있는 주제와 관련하여, 필자가 적용한 논증 방식의 탁월함을 독자들이 알아차릴 수 있게 한다는 생각입니다. 그리고 필자가 적용한 논증 방식의 탁월함은 이어지는 추가적인 몇 개의 결론들에서도 또한 알 수 있다는 생각입니다.

 

2-5. 왜냐하면 예수님과 함께 있는 구약 성경의 "하느님의 영" [즉, 예수님의 영광, 즉, 위의 제2-1항 (*****)에서 예수님이 말씀하신 "보호자", 즉, 성령]이 하느님이심이 위의 (이 글의 결론 5)에 의하여 증명되었기 때문에, 따라서 바로 아래의 이어지는 결론들, 즉, (이 글의 결론 6), (이 글의 결론 7), 그리고 (이 글의 결론 8)에서 말해지고 있는 "예수님"과 "성령"각각 하느님이십니다. 이제, (이 글의 결론 4)의 따름 정리(corollaries)들로서, 다음의 결론들을 도출할 수 있다는 생각입니다:

 

(이 글의 결론 6) (Sun T. Soh) 구약의 시대에, 예를 들어, "하느님의 영이 나에게 내렸다" 라고 말하면서, 어떤 예언자가 예언을 시작함을 구약 성경에서 찾아볼 수 있는데[예: 민수 24,2; 이사야 61,1], "하느님의 영이 특정인에게 내렸다"란, 곧 "구약 성경의 하느님이신 성부 하느님과 해당 특정인 사이에서 하느님의 영으로 불리는 하느님, 즉, 성령께서 그에게 의도하시다(the Spirits wills him)"를 말하며, 다른 한편으로, 왜냐하면 하느님의 뜻/의지의 행위(God's willing), 즉, "하느님께서 의도하다"에서 사용되고 있는 "의도하다"가 곧 "하느님께서 우리들을 사랑하신다"라고 말할 때에 사용되고 있는, 신성적 사랑(divine love, 프랑스어: amour divin, 라틴어 amor divinus; 출처: Ia q20 a1 ad3 신학 대전)의 동사형"사랑하다"(to love; amare)라는 동사이기 때문에, 따라서 "성령께서 특정인에게 의도하시다""성령께서 특정인을 사랑하신다"일치하는/동일한(identical) 명제이며, 따라서 "성부 하느님과 해당 특정인 사이에서 성령께서 특정인에게 내렸다"란, 곧 "성부 하느님과 해당 특정인 사이에서 성령께서 그를 사랑하신다(the Holy Spirit loves him)"를 말함을, 이 글의 한 개의 결론으로서 도출합니다.

 

더 나아가, 또한, 다음의 결론들을 도출할 수 있다는 생각입니다
[링크 주소: http://ch.catholic.or.kr/pundang/4/soh/성부와_성자_사이에_계시는_분은_신성적_사랑(divine_love)_즉_성령이시다_2017.htm (클릭하지 마십시오)]:

 

(이 글의 결론 7) (Sun T. Soh) (이 글의 결론 6)에 의하여 "성부 하느님[즉, 구약 성경의 하느님]과 해당 특정인 사이에서 하느님의 영이, 즉, 성령이, 특정인에게 내렸다"란, 곧 "성부 하느님과 해당 특정인 사이에서 성령깨서 특정인을 사랑하신다"를 말하는데, 만약에(If) 여기서 언급된 특정인이 예언자이신 예수님이면, 성부 하느님과 하느님이신 예수님(결론 A 참조) 사이의 사랑의 행위(act)에 있어서의 "신성적 사랑(divine love)의 행위(act)",(*1) 예를 들어, 예수님의 새 계명의 실천 과정과는 달리, 피조물인 인간의 사랑의 행위가 전혀 포함되지 아니한"하느님의 신성적 사랑의 행위"(act of God's divine love) "성령께서 사랑하심", 즉, "성령의 의지의 행위(willing, act of will)", 즉, "성령의 행위"(act of the Holy Spirit)이며, 따라서, 하느님인 성령[즉, 구약 성경의 하느님의 영] 안에 바로 이 신성적 사랑이 있으며, 따라서 하느님의 단체성(單體性, simplicity)에 의하여,  여기서 말하는 "바로 이 신성적 사랑"(God's divine love) "성령"(the Holy Spirit)이 아닐 수 없음, 이 글의 한 개의 결론으로서 도출합니다.

 

왜냐하면, 그리고 더 자세하게, 그 이유는 다음과 같기 때문입니다: 즉, 여기서의 관계의 상태(relationship)의 두 말단(terminals)들인 성부 하느님과 하느님인 예수님은 말단들이기 때문에 베제시켜야 하며(are excluded), 그리고 이들 두 말단들 사이에서 피조물인 인간의 사랑의 행위가 전혀 포함되지 아니한"하느님의 신성적 사랑의 행위"(act of God's divine love)를 수행할 수 있는 존재는 피조물들 중에는 있을 수 없고, 그러나 "바로 그러한 신성적 사랑의 행위"현실태적으로(actually) 항상 실천해 온 분이 구약 성경의 "하느님의 영"[즉, 예수님의 영광, 즉, 위의 제2-1항 (*****)에서 예수님이 말씀하신 "보호자", 즉, 성령]임이, 구약 성경 본문에 의하여 명확하게 입증되며, 그리하여 성령[즉, 구약 성경의 하느님의 영] 안에 바로 이 신성적 사랑이 있으며, 그러나 왜냐하면 하느님의 단체성(單體性, simplicity)에 의하여 바로 이 신성적 사랑이 하느님이신 성령의 부수적인 그 무엇(something accidental)이 될 수 없기 때문에, 따라서 "여기서 말하는 신성적 사랑(divine love)"성령이 아닐 수 없습니다.(*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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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필자가 말하는 '행위'(act)의 정의(definition)는 다음과 같다:

 

"한 행위자/동인(動因)/작인(作因)/동력인(動力因)(an agent)의 행동(actions)들 중에서, [그 끝(its end)을 향하는 수단(a means)의 선택(choice)이] 해당 행위자의 자유 의지(the free will)에 의하여 통제되는(controlled by) 임의의 행동(any action)은 한 개의 행위(an act)라고 불린다."

 

(*2) 바로 이 부분은, 다음의 주소에 접속하면 읽을 수 있는, 게시자 주 6-2-5를 꼭 학습하도록 하라. 성 토마스 아퀴나스1요한 4,8.16에서 사도 요한이, 전후 문맥 안에서 별다른 설명 혹은 근거의 구체적 제시 없이, 불쑥, "하느님은 사랑이십니다"라는 기술/단언(斷言)을 하였고, 그리고 성 토마스 아퀴나스는 바로 이 주장이 한 개의 참(true)인 명제(proposition)임을 "신학 대전", ia q20, a1에서, "하느님 안에 사랑(caritas)이 있음"을 증명한 다음에, 그리스의 철학자 아리스토텔레스의 저술인 "윤리학"(Nicomachean Ethics), vii, ch.14의 유관 문장을 본문 중에 발췌 인용하면서, 하느님의 단체성(單體性, simplicity)에 의하여 결론을 도출하는 논증 방식을 그대로 따른 것이다:

http://ch.catholic.or.kr/pundang/4/soh/1562.htm <----- 꼭 필독 권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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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시자 주 2-5: (1) 하느님의 신성적 사랑(God's divine love)이 아닌 신성적 사랑(divine love)의 한 예(an example)로서, 성 토마스 아퀴나스에 의하여 "신성적 사랑이라는 법"(the law of divine love)으로 불리는 예수님의 새 계명에서 실천할 것이 요구되는 "신성적 사랑"(divine love)"그리스도인들의 윤리 규범(Christian moral precepts)들을 준수하는 자연적/인성적 애덕 및 초자연적 애덕 이들 둘 다"를 말하는 것이지, "성령"을 말하는 것이 아님을 잊지 말라.


(2) 그리고 바로 위의 (이 글의 결론 7)의 증명 과정에 하느님의 단체성(單體性, simplicity)이라는 고급 개념 사용되었는데, 그러나 (이 글의 결론 5)는 이 개념을 사용하지 않고서도 (이 글의 결론 7)의 결론과 동일한 결론을 도출할 수 있게 한다는 생각이다. (이 글의 결론 7)의 증명과 이어지는 (이 글의 결론 8)의 증명을 정밀하게 비교/검토하도록 하라. 

(이상, 게시자 주 2-5 끝)

 

2-6. 그리고 위의 (이 글의 결론 7)의 한 개의 논리적 등가(a logical equivalence)로서, 다음의 결과를 도출할 수 있다는 생각입니다. 다음의 (이 글의 결론 8)은 많이 부족한 죄인인 필자가, 하느님의 단체성(單體性, simplicity)의존하지 않으면서, 증명을 하였다는 생각입니다:

 

(이 글의 결론 8) (Sun T. Soh) (이 글의 결론 5) 아래에서, 성부 하느님과 하느님이신 예수님 사이의 관계의 상태(relationship)는요한 복음서 10,30: "아버지와 나는 하나이다."에 의하여, "하느님의 신성적 사랑"(God's divine love)이라는 매우 친밀한 관계의 상태(relationship)에 있으며, 따라서, 바로 이 두 말단(terminals)들 사이에 있는, 따라서 이들 두 말단[즉, 성부 하느님 혹은 하느님이신 예수님]들일 수 없는, 그리고 또한, 왜냐하면 어떠한 피조물도 "하느님의 신성적 사랑"(God's divine love)의 행위현실태적으로(actually) 항상 실천할 수 없기 때문에, 결코 어떤 피조물일 수도 없는"성부 하느님과 하느님인 예수님이 서로 주고 받고 하는" 따라서 당연히 "진리들로 구성된 그 무엇"(something consisting of truths), 두 말단(terminals)들인 성부 하느님과 하느님이신 예수님, 그리고 성령 하느님, 이들 셋 중에서 두 말단들 및 모든 피조물들은 자동적으로(automatically) 배제되고(are excluded), 다만 바로 이 유일한, 서로 주고 받고 하는, 매우 친밀한, 그리고 완미한(perfect) 관계의 상태(relationship)인 "하느님의 신성적 사랑"(God's divine love)을 당신 안에 품고 계신(cherish) 하느님이신 구약 성경의 "하느님의 영", 즉, "성령"/"성신"(the Holy Spirit, the Holy Ghost) 하느님[(이 글의 결론 5) 참조]이 아닐 수 없음을, 이 글의 한 개의 결론으로서 도출합니다.


게시자 주 2-6: (1) 바로 위에 제시된 또다른 논증이 가능한 것은, 위의 제2-1항에 발췌된 (*****) 와 (이 글의 결론 5) 때문임에, 반드시 주목하십시오.

 

[내용 추가 일자: 2024-05-28]

(2) 바로 위에 제시된 필자의 논증은, 위의 제2-1항에 발췌된 (*****)에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영광(glory)의 자구적 의미(literal sense)/정의(definition)가 무엇인지 말하고 있는 니사의 성 그레고리오의 강론 중의 가르침에 전혀 의존하지 않고 증명을 완료하였음에 반드시 주목하십시오.

 

(3) 다음은 니사의 성 그레고리오가 전해주는 "영광"(glory)이라는 구약 성경 용어의 성경 자구적 의미(biblical literal sense)입니다:

 

출처: 본글의 제2-1항에의 (*1) 번역자 주에 발췌된 영어본 니사의 그레고리오"아가에 대한 강론들(Homilies on Song of Songs), 강론 15(Homily 15)에서, 제495쪽 마지막 단락부터 읽도록 하라.

 

(발췌 시작)

영광(glory)

 

"심지어 당신, 성부께서 제 안에 계시고 그리고 제가 당신 안에 있듯이 [우리가 하나인 것처럼], 그들도 하나가 될 수도 있게 하려는 것입니다." (요한 복음서 17,22ㄴ-23ㄱ) 이제 바로 이 결합(this unity)을 단결(團結)시키는(holds together) 바로 그것이 영광(glory)이다.

(이상, 발췌 끝) 

 

(4) [(이 글의 결론 7)과 (이 글의 결론 8)의  또다른 증명] 

그러므로, 위의 (이 글의 결론 7)과 (이 글의 결론 8)은, 바로 이 니사의 성 그레고리오"영광"(glory)이라는 구약 성경의 성경 자구적(biblical literal) 의미(sense)/정의(definition)에 의하여 즉시 도출되는, 동일한 결론들임에, 반드시 주목하라.

[이사, 2024-05-28일자 내용 추가 끝]

(이상 게사자 주 2-6 끝)

 

2-7. 그리고 바로 위의 (이 글의 결론 7) 혹은 (이 글의 결론 8)의 한 개의 따름 정리(a corollary)로서, 다음의 결과를 도출할 수 있다는 생각입니다: 

 

(이 글의 결론 9) (Sun T. Soh) 다음의 주소에 접속하면 읽을 수 있는,

http://ch.catholic.or.kr/pundang/4/soh/1876.htm


이벽 성조"성교요지" 3,5-6에서 "等間于三"(등간우삼)은, 위의 (이 글의 결론 8)에 의하여, 삼위일체 관련된 그 무엇을 말하는 것이 결코 아니고, (i) '[하느님, 예수님, 그리고 인류] 셋 사이에서 [중개자(mediator)로서] 한가운데 계시면서', 혹은 (ii) '[하느님, 중재자(mediator), 인류] 셋에서(于三) 한가운데 계시면서(等間)'를 의미함을, 이 글의 한 개의 결론으로서 도출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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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게시자 주: 다음의 주소에 접속하면, 이 결론을 뒷받침하는 비오 12세 교황님1947년 11월 20일자 회칙[제목: MEDIATOR DEI ET HOMINUM]을 학습할 수 있다:

https://www.vatican.va/content/pius-xii/la/encyclicals/documents/hf_p-xii_enc_20111947_mediator-dei.html [주: 라틴어 정본]

https://www.vatican.va/content/pius-xii/en/encyclicals/documents/hf_p-xii_enc_20111947_mediator-dei.html [주: 영어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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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 2024-05-26일자 내용 추가 끝]

 

3.

3-1. 최근에 들어와 많이 부족한 죄인인 필자가, 영어로 "glorious"로 번역되는 용어에 대응하는, 그러나 1956년에 이르러 처음으로/최초로 대단히 잘못 번역된 번역 용어, "영광스럽다"에 대하여 들여다보는 과정에서 독자적으로 알아차리게 된, 위의 (이 글의 결론 1)(이 글의 결론 2), [내용 추가 일자: 2024-05-25] (이 글의 결론 3) ,그리고 (이 글의 결론 4)[이상, 2024-05-25일자 내용 추가 끝]가 그리스도교 교의 신학적으로 상당히 유의미한 이유는, "니케아-콘스탄티노플 신경" 본문 중에, "성령께서는 성부와 성자에게서 발하시고"(who proceeds from the Father and the Son) 라는 기술이 하느님으로부터 오는 참진리임을, 다음의 주소에 접속하면 읽을 수 있는, "가톨릭 교회 교리서", 제245-248항에 기술되어 있듯이, 여러 번의 공의회들의 결과들에 의존하여, 따라서, 간접적으로, 진리임을 확인하는 것보다, 훨씬 더 성경적으로, 따라서 즉시 그리고 직접적으로, 논리적으로(logically) 증명(prove)/입증(demonstrate)함에 있다는 생각입니다:

 

출처 1: http://www.vatican.va/archive/ENG0015/__P17.HTM 

(발췌 시작)

245 The apostolic faith concerning the Spirit was confessed by the second ecumenical council at Constantinople (381): "We believe in the Holy Spirit, the Lord and giver of life, who proceeds from the Father."71 By this confession, the Church recognizes the Father as "the source and origin of the whole divinity".72 But the eternal origin of the Spirit is not unconnected with the Son's origin: "The Holy Spirit, the third person of the Trinity, is God, one and equal with the Father and the Son, of the same substance and also of the same nature. . . Yet he is not called the Spirit of the Father alone,. . . but the Spirit of both the Father and the Son."73 The Creed of the Church from the Council of Constantinople confesses: "With the Father and the Son, he is worshipped and glorified."74

 

246 The Latin tradition of the Creed confesses that the Spirit "proceeds from the Father and the Son (filioque)". the Council of Florence in 1438 explains: "The Holy Spirit is eternally from Father and Son; He has his nature and subsistence at once (simul) from the Father and the Son. He proceeds eternally from both as from one principle and through one spiration... And, since the Father has through generation given to the only-begotten Son everything that belongs to the Father, except being Father, the Son has also eternally from the Father, from whom he is eternally born, that the Holy Spirit proceeds from the Son."75

 

247 The affirmation of the filioque does not appear in the Creed confessed in 381 at Constantinople. But Pope St. Leo I, following an ancient Latin and Alexandrian tradition, had already confessed it dogmatically in 447,76 even before Rome, in 451 at the Council of Chalcedon, came to recognize and receive the Symbol of 381. the use of this formula in the Creed was gradually admitted into the Latin liturgy (between the eighth and eleventh centuries). the introduction of the filioque into the Niceno-Constantinopolitan Creed by the Latin liturgy constitutes moreover, even today, a point of disagreement with the Orthodox Churches.

 

248 At the outset the Eastern tradition expresses the Father's character as first origin of the Spirit. By confessing the Spirit as he "who proceeds from the Father", it affirms that he comes from the Father through the Son.77 The Western tradition expresses first the consubstantial communion between Father and Son, by saying that the Spirit proceeds from the Father and the Son (filioque). It says this, "legitimately and with good reason",78 for the eternal order of the divine persons in their consubstantial communion implies that the Father, as "the principle without principle",79 is the first origin of the Spirit, but also that as Father of the only Son, he is, with the Son, the single principle from which the Holy Spirit proceeds.80 This legitimate complementarity, provided it does not become rigid, does not affect the identity of faith in the reality of the same mystery confessed.

(이상, 발췌 끝)

 

출처 2: http://www.albummania.co.kr/gallery/view.asp?seq=157803&path=110610121307&page=115 

(발췌 시작)

245 성령에 대한 사도적 신앙은 381년에 열린 제2차 콘스탄티노폴리스 공의회에서 다음과 같이 선포된다. “주님이시며 생명을 주시는 성령을 믿나이다. 성령께서는 성부에게서 발하시나이다.” 52) 이로써 교회는 성부께서 “모든 신성의 원천이며 근원” 53)이심을 고백한다. 한편 성령의 영원한 근원은 성자의 영원한 근원과 무관하지 않다. “삼위일체의 제3위격이신 성령께서는 성부와 성자와 하나이시며 동일하시고, 같은 실체와 같은 본성을 지니고 계신다.……`그러나 성부만의 성령 또는 성자만의 성령이시라고 할 수 없고, 성부와 성자의 성령이시라고 해야 한다.” 54) 교회의 콘스탄티노폴리스 공의회(381년) 신경은 성령께서“성부와 성자와 더불어 영광과 흠숭을 받으신다.” 고 고백한다. 55)

 

246 신경의 라틴 전승은 성령께서 “성부와 성자에게서(Filioque) 발하신다.” 고 고백한다. 1438년의 피렌체 공의회는 다음과 같이 천명한다. “성령께서는 그 본질과 존재를 성부와 성자에게서 동시에 받으시며, 유일한 근원이신 한 위와 또 다른 위에게서, 유일한 발출(spiratio)을 통하여 영원히 나오신다.……`그리고 성부께서는 아버지로서 외아들을 낳으시고, 당신의 존재만을 제외하고는 당신께 있는 모든 것을 외아들에게 주셨기 때문에, 성자에게서 나오신 성령의 이 발출도 영원으로부터 성자를 낳으신 성부에게서 영원히 이루어지는 것이다.” 56)

 

247 필리오퀘(Filioque)에 대한 이러한 언명은 381년의 콘스탄티노폴리스 공의회의 신경에는 들어 있지 않았다. 그러나 오랜 라틴 전통과 알렉산드리아 전통에 따라 성 레오 교황은, 로마가 451년의 칼케돈 공의회에서 381년의 신경을 인정하고 받아들이기 전인 447년57) 이미 이를 교의로 고백하였다. 신경 안에 이러한 표현을 사용하는 관습은 점차 라틴 전례 안에 받아들여졌다(8-11세기). 한편 이러한 라틴 전례에서 필리오퀘를 니케아`-`콘스탄티노폴리스 신경에 포함시킨 문제는 오늘날까지 정교회와 일치를 이루지 못하고 있다. 

 

248 동방 전통은 우선 성부께서 성령의 첫 기원이심을 표현하고 있다. “아버지에게서 나오시는” (요한 15,26) 성령이라고 고백함으로써 성령께서는 성자를 통하여 성부에게서 나오신다는 것을 확언한다. 58) 그러나 서방 전승은 성령께서 성부와 성자에게서(필리오퀘) 발하신다고 말함으로써 우선 성부와 성자께서 한 본체로서 이루시는 일치를 표현한다. 서방교회는 이를 “정당하고 합리적” 59)이라고 말한다. 왜냐하면 한 본체로서 일치를 이루는 하느님 위격의 영원한 질서는, 성부께서 “근원이 없는 근원” 60)으로서 성령의 일차적 근원이심을 내포하고 있지만, 한편 독생 성자의 성부로서 성자와 함께 “성령께서 나오신 유일한 근원” 61)이시라는 사실 역시 내포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정당한 보완은, 그것을 지나치게 고착시키지 않는다면, 동일하게 고백하는 신비의 실재를 믿는 신앙의 단일성에 영향을 미치지는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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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2. 니케아`-`콘스탄티노폴리스 신경: DS 150.
53. 제6차 톨레도 공의회(638), 「삼위일체와 강생하신 구세주 성자에 대하여」 : DS 490.
54. 제11차 톨레도 공의회(675), 신경: DS 527.
55. 니케아`-`콘스탄티노폴리스 신경: DS 150.
56. 피렌체 공의회, 「그리스 교회에 대한 교령」 : DS 1300`-1301.

57. 성 대 레오, 교서 Quam Laudabiliter: DS 284 참조.
58. 선교 교령, 2항 참조.
59. 피렌체 공의회, 「그리스 교회에 대한 교령」 (1439): DS 1302.
60. 피렌체 공의회, 「야고보파에 대한 교령」 (1442): DS 1331.
61. 제2차 리옹 공의회, 「삼위일체와 가톨릭 신앙에 대한 헌장」 (1274): DS 8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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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 발췌 끝)

 

3-2. 위의 제2-1항에 필자에 의하여 제시된 논증 방법은, (i) 1992년에 그 초판이 발행된 "가톨릭 교회 교리서", (ii) "덴칭거"(DS, Denzinger) 등의 보편 교회의 핵심 문헌들에 포함되어 있지 않은 것으로 파악되고 있습니다.

 

3-3. 따라서, 많이 부족한 죄인인 필자가 생각할 때에, 위의 제2-1항에 제시된, "니케아-콘스탄티노플 신경" 본문 중에, "성령께서는 성부와 성자에게서 발하시고"(who proceeds from the Father and the Son) 라는 기술이 하느님으로부터 오는 참진리임을 성경적이고, 따라서 즉시 그리고 직접적으로, 논리적으로(logically) 증명(prove)/입증(demonstrate)하는,

 

(가) 많이 부족한 죄인인 필자가 독자적으로 발견하여, 위의 제2-1항에서, 본글의 (이 글의 결론 1)에서 제시한, 그리고 그런 다음에 추가적으로,

 

(나) 많이 부족한 죄인인 필자가, 2017년 3월 중순부터 4월 말 기간 동안에 독자적으로 개발한, 따라서 그 저작권(著作權, Copyright)이 필자에게 있는, Data Mining 기법을 적용한, "AI 기반, 한시(漢詩) 표준 해석법 [A Standard Method of Interpretation of Chinese Poems(漢詩), Based on AI(Artificial Intelligence)]"에서 사용하고 있는 방법을, 또한 사용하여 분석한 결과, 위의 게시자 주 2-1: (1)(2)에서 이 분석의 결과를 이미 구체적으로 말씀드렸듯이, 대단히 놀랍게도, 그리스 교부 니사의 그레고리오(335-395년)가 또한 제시하였던 것으로 비교적 최근에 들어와 밝혀진 [즉, 1992년"가톨릭 교회 교리서" 초본이 마련될 때까지 교황 교도권에 의하여 인지되지 아니한] 것으로 파악되는,

 

요한 복음서 중의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들에 전적으로 근거하는 이 논증 방법은, 특히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교회 일치 정신" 아래에서, 약 1,000년 전에 필리오퀘 논쟁을 처음으로 야기한 동방 정교회 측을 효과적으로 설득할 수도 있을 것이므로, 교황 교도권에 보고되어야 하지 않나... 하는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게시자 주 3-3: 많이 부족한 죄인인 필자가 독자적으로 (이 글의 결론 1)을 도출할 수 있었던 이유는, "영광"(glory)이라는 성경 용어가 나타내는 교의 신학적 의미에 대하여 필자가 최근에 들어와 들여다보았기 때문이라는 생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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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느님의 영광이 발(發)하는(proceeds) 바로 그 장소 및 시간

하느님께서 현존(現存)하시고

그리고 역으로(conversely)

하느님께서 현존(現存)하시는 바로 그 장소 및 시간

하느님의 영광이 발(發)한다(proceed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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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느님의 은총(grace)자신들의 심장들 안에 받는 자들 중에서만 오로지

하느님의 영광을 자신들의 심장(hearts)들 안에 받는 자들이 있을 수 있고,

그러한 자들 중에서만 오로지

그 영혼(soul) 육신(body)이 거룩하게 되는 자들이 있을 수 있으며,

그리고

그러한 자들 중에서만 오로지

그 육신이 장차 부활하면서 하느님의 영광을 받을 자들이 있을 수 있다.

즉, 그 육신이 장차 부활하면서 거룩하게 변모될 자들이 있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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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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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교수 소순태 마태오 (Ph.D.) 

작업에 소요된 시간: 약 80시간 (자료 조사 및 분석 포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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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un_T_SOH,예수님의_최종_영광=성령,필리오퀘논쟁,삼위일체_교의의_정식화_필요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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