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위동성당 게시판

신유박해200주년9...주문모신부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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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범석 [simon] 쪽지 캡슐

2000-11-17 ㅣ No.1326

배반자 김여삼이 그토록 혈안이 되어 찾으려고 하였던 주문모(야고보)신부님은 이미

다른 곳으로 피신을 한 상태였습니다. 당시에 주문모신부님은 이 박해의 원인이

신부님 자신에게 있는 것으로 잘 못 알고 자기가 없어지면 박해가 끝날 것이라는 생각

으로 조선을 빠져나가려고 하셨습니다.만주지방까지 나가신 신부님은 생각을 달리합니다.

아마도 신부님께서는 선교사로서의 영광인 순교를 하시고자 발걸음을 돌리셨을 것입니다.

 

다시 조선으로 들어온 신부님께서는 신유년 음력 3월 12일 자수(당시에는’자현’)

를 하기위해 당당히 의금부로 들어갑니다. 신부님은 금부에서 "내가 당신들이 찾고 있는

신부요. 이제 내 목숨은 부질 없으니 나를 죽여달라고 청하러 왔소. 지금까지 나를 찾은 사람이 없엇던 것을 보면 당신네 나라사람들은 재간이 없나보오."라고 말씀하시면서 금부로

들어가셨습니다.

 

주문모신부님의 이러한 자수로 인하여 당시 당쟁싸움의 복수전으로 일단락이 될 뻔한

신유박해는 또 다른 국면을 맞게됩니다. 신부님께서는 중국인이기 때문에 당시 군신관계를

맺고 잇던 나라의 사람을 함부로 다룰 수가 없었습니다. 다른 죄인들은 목에 칼을 쓰고

족쇄를 역고 감옥안에서 지냇지만 신부님께서는 아무런 고문을 하지 않고 그저 발에 고랑을

찬 채로 고문도 필담으로 진행하였다고 합니다. 신부님께서는 조선말을 아주 잘 하셨지만

괜한 말을 하기가 싫어서 말을 모른다고 하시고 글로 서로 말을 나누었던 것입니다.

 

신부님을 추국하던 금부는 새로운 사실을 발견하게 되는데 그것은 바로 신부님께서

강완숙의 주선으로 강화도로 유배를 간 왕족의 일가들과 왕래를 했다는 것입니다.

박해가 나자 신부님께서는 폐궁으로 숨기도 하셨습니다.

 

이런 사실이 밝혀지자 조정은 추국과 재판도 없이 폐궁에 잇는 송마리아와 그의 며느리

에게 사약을 내립니다. 궁에 잇던 여러사람들은 신부님을 숨겨주엇다는 이유로 같이

죽기도 햇습니다. 또한 선왕의 동생이며 천주교를 믿지 않았던 이인에게도 역적의 우두머리

라는 판결로 사약을 내립니다.

 

끝없는 죽음으로 치닫던 이 추국에도 신부님은 굳건히 신앙을 잃지 않았습니다.

전에 말씀드렸다시피 조선은 중국과 군신관계를 맺고 있어서 주문모 신부님에 대한

처벌에 고민을 했습니다. 원칙대로 하자면 신부님을 다시 중국으로 돌려보내오

중국황제에게 재판을 받아야 했지만 이러한 주장을 하는 대신들의 의견은 짓눌리고

대왕대비는 신부님께 사형을 선고합니다. 후에 중국에는 신부님을 제주도 사람인지 알았

다며 중국인이지는 몰랐다고 보고하면서 많은 재물을 바쳤습니다.

 

형장으로 끌려가선 신부님께서는 장터에서 주변사람들에게 목이 마르니 술을 달라고

청하고 그것을 다 마셨습니다. 신부님이 형장에 도착하자 망나니들은 신부님의

귀를 포개어 양쪽에 화살을 꽂고 재판문과 다른 문서들을 신부님께 읽도록 하였습니다.

이 기록들을 모두 큰 소리로 읽고나서 신부님은 "나는 천주를 위하여 죽습니다. 10년 후

당신네 나라에는 커다란 불행이 닥칠 것인데 그때에 나를 기억하게 될 것이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음력 4월 19일. 신부님은 무릎을 꿇고 합장을 한 채로 칼에 목을

떨구었고 당시 신부님의 나이는 32세 였습니다.

 

당시 청명하고 맑았던 하늘이 갑자기 먹구름이 몰리고 천둥소리와 억수같이 흙이 섞인

비가 내리고 번개가 치며 세상이 암흑천지가 되었습니다. 그리고는 신부님의 영혼이 하

늘로 올라가자 다시 맑은 날씨로 바뀌었다고 합니다. 또하나의 기적은 신부님의

목을 매달았던 며칠동안 신부님의 무지개와 빛이 계속 나타났다고 기록으로 남아 있으니

조선사람들은 이러한 신비한 광경에 놀랐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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