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위동성당 게시판

신유박해200주년10..황사영백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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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범석 [simon] 쪽지 캡슐

2000-11-17 ㅣ No.1327

주문모 신부님이 돌아가신 후 강완숙을 비롯한 많은 교우들이 계속 처형됩니다.

이들은 정치적인 문제와 아무런 관련이 없던 사람들이 었음에도 불구하고 박해의

칼날이 지나치지 않았던 것입니다. 당시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죽었는지 정확한

기록은 알수가 없지만 적어도 희생자의 수가 200여명에 귀양간 사람들의 수가400

여 명...그리고 지방에서 돌아가신 순교자의 수는 그 수를 알 수가 없다고 전해

집니다. 이 신유박해가 마무리 될 시기에 마지막으로 천주교회사에 큰 획을 그은

분이 돌아가시니 이 분께서 바로 황사영(알렉시오)였습니다.

 

황사영(알렉시오)는 박해가 시작될 무렵 그에 대한 영장이 내려오자 이미 배론으로

숨어들어간 후였습니다. 조정은 황사영을 빨리 잡아들이라고 계속 추국을 하였지만

그를 잡기는 너무 어려웠습니다.

 

황사영은 어릴적부터 총명하고 영특한 인물이엇습니다. 당시 황사영은 열여섯의 어린 나

이로 진사시라는 과거에 급제하여 정조가 친히 그를 불러들였습니다.

정조는 황사영의 팔을 잡아주며 "내가 후에 너를 크게쓰리니 스무살까지 공부를

한후에 나를 찾아오너라"하며 극찬을 아끼지 않습니다. 당시에는 임금이 잡은

팔목은 다른 사람이 잡지 못 하도록 비단으로 손목을 감고 다녔다고 합니다.

 

더욱더 공부에 열심히던 황사영은 좋은 스승을 구해주려는 그의 어머니의 힘으로

당대에 유명한 선생을 만나게 되니 바로 마재의 정씨 형제였습니다.

 

스승에게 서학을 배우며 그 진리를 깨우친 황사영은 알렉시오라는 본명으로 세례를

받고  정약현의 딸인 정난주(마리아)와 혼인을 하여 황경헌이라는 아들을 하나 두었

습니다. 그러나 곧 박해가 일어나고 황사영에게도 체포령이 떨어지자 황사영은 급히

배론으로 숨어들게 됩니다.

 

배론으로 들어온 황사영은 그곳에 교우에게 도움을 얻어 토굴을 파고 그 안에서 무명천에

깨알같은 글씨로 당시의 박해상황과 해결방안에 대해 북경주교에게 보낼 글을 적었으니

바로 이것이 그 유명한 ’황사영백서’입니다. 이 황사영백서는 현재의 일반 사학자

들에게도 중요한 자료로 취급되는데 황사영에 대하여 나라의 역적으로 보아야 하는지

에 대한 의견이 분분하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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