답십리성당 게시판

고향에서 길을 잃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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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분호 [qnsghfl] 쪽지 캡슐

2006-06-29 ㅣ No.3803

꼬깃꼬깃 웅크렸던 기억들이 펼쳐질 어스름한 저녁
판잣집이 옹기종기 붙어 있는 답십리 둑길에 접어들면 한눈에 들어오는
천막 동네 가난이 보입니다.

비좁은 골목길 지날때면  숨어있던 낯익은 추억들이
수십 년을 살아온 일상 속으로 달려들어 가뜩이나 허전한

기억의 숨통을 막고 있습니다.

사방을 둘러보면 잊혀지지 못한 얼굴들은 장마철이면 온통 물난리가

나서 학교로 예배당으로 피난을 가기도 했고,

문씨 아저씨네 양조장에서 술지게미 한 그룻 먹고 학교로 가면

배고픔쯤은 새까맣게 잊어 버렸던 이야기와 발가락에 물들은

검정 고무신 땟물과 중랑천 건너 아차산에 진달래 꽃잎 따서 먹다
입술이 붉게 물들었던 파룻한 순간들과

막노동 하루살이 강씨와 청주 식당 과부 아줌마의 사랑하는 틈바구니에

연탄 공장 다니는 오씨가 공연하게 끼어들어 삼각관계가 된 이야기와

19살에 버스 차장이 되었다가 유부남과 사랑에 빠져

임신을 하고 집을 나간뒤,

3년 만에 유부남과 헤어지고 자살을 했다는 23살의 곱디고운

공동 수돗가 집 손씨의 딸

시집올때 가마 한 번 타지 못하고 지지리 고생만 하시다 죽어서 꽃가마 타고

저승가셨다는 양말 공장 귀머거리 할머니의 사연과 함께 한때, 이글거리며

타오르던 아궁이 속 가난에 대하여 히히덕거리며

유령처럼 나타났다 사라지기를 반복하다가 천막 동네에 남아있는

흑백 사진 속 이야기를 하나둘 털어 냅니다.

사람들과 판잣집과 잡다한 추억이 떠나간 텅 빈 마을엔

봉숭아 핏물처럼 영혼을 태우던 사람들의 행복이 남아 있습니다.

재개발이라는 커다란 입 속에서 불도저의 불규칙한 굉음은 사철 꽃망울

터트리던 둑길과 실개천에 송사리 물방개조차 빼앗아 갔지만

가끔은 타지로 떠돌다 돌아온 낯익은 사람들의 추억 속에 살아 있습니다.

답십리 294번지에 안개처럼 어둠이 내립니다.

하늘엔 미리내 밝기만 한데,

내가 살았던 고향에서 번지수가 없어 길을 잃었습니다.

나간 길은 있는데 돌아올 길은 없습니다.

꼬깃꼬깃 웅크렸던 기억들이 펴쳐질 어스름한 저녁

답십리에 가면 시간조차 길을 잃습니다.

 

두산아파트 가두선교하던중에  답십리토박이 작가분을

만났습니다. 더위에 고생한다며 이런 저런 종교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다

이제 막 인쇄되어 서점에도 나가지 않은 시집이라며 한권 주셨습니다.

그 시집에 답십리에 관한 글이 있기에 띄워봅니다.

부적합한 내용이라면 삭제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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