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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혼이 불타고 있는 연옥??? - 대단히 잘못된 주장 [교리학습] 617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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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5.115.219.*]

2011-11-04 ㅣ No.1128

 
 
+ 찬미 예수님!
 
이 글은 아래에 부록으로 첨부한 글에 대한 반박의 글로 마련하였습니다.
 
1. 가톨릭 교회는 이미 연옥을 "장소"의 개념이 아니라 "상태(state)"의 개념으로 가르치고 있습니다.
 
다음은 저의 졸저서 시리즈인 "가톨릭 교회의 말씀 전례에 따른 성경공부 해설서" (출판사: 가톨릭출판사) 위령의 날(11월2일) 3분 복음/교리 묵상으로 제공되고 있는, 가톨릭 교회 교리서 요약편(CCCC) 제210항 전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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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췌 시작)
 
CCCC 210. 연옥이 무엇인지요?
 
CCC 1030-1031, 1054
 
하느님과 친교(friendship)의 상태에서 죽어, 영원한 구원을 얻을 것이라는 보장은 받았으나, 그러나 천국의 행복에 들어가기 위하여 마지막 정화(purification)의 필요성이 있는 자들의 상태(state)가 바로 연옥(purgatory)입니다. [엮은이 번역].
 
주: 교황청 홈페이지가 제공하는 영어 등의 외국어로 된 위의 CCCC 문항들 및 한국 천주교 중앙협의회 제공 우리말 '가톨릭 교회 교리서(CCC)'의 해당 항목들은 다음의 인터넷 주소에 있다: 
가톨릭 교회 교리서: http://ch.catholic.or.kr/pundang/4/allsouls_c1030.htm  
 
(이상, 발췌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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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의 "가톨릭 교회 교리서 요약편(CCC) 제210항 및 가톨릭 교회 교리서 제1030-1031, 1054항들 (이 항들에 붙은 각주들 포함)에서 가르치고 있는 내용이, 앞으로 작성될 "연옥"에 대한 글 중에서 인용될 수 있도록, 좀 수고스럽더라도, 김인보 신부님께 전달해 주시면 좋겠습니다.
 
가톨릭 보편 교회의 핵심 문헌들에서 이미 가르치고 있는 내용을 글 중에서 인용하지 않는 것은 좀 아니라는 생각에서 드리는, 부탁의 말씀입니다.
 
그리고 김인보 신부님의 소속 교구를 알고 싶습니다.
 
2. [아래의 부록 중에서: 중세 연옥의 그림자 속에 있는 교회]
 
<----- 아래의 부록이 언제 작성된 글인지 모르지만, 특히 이러한 주장은, 적어도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이후부터는, 아니라고 알고 있습니다.
 
혹시 다음의 주소에 있는 글이 "연옥"에 대한 이해에 도움이 될 것입니다. 되도록 많은 분들께서 읽으실 것을 권고드립니다:
 
 
3. [아래의 부록 중에서: 이제 신자들의 뇌리에 유전인자처럼 새겨져 있는 연옥교리는 중세의 허물을 벗고, 다시 태어 나야 한다.]
 
<----- 그리고, 만약에 이 주장을 정당화 하기 위하여 아래의 글이 작성되었다면, 이미 아닌 것을 제시하면서 바로 잡자고 주장하는 글이기에, 상당히 아니라는 생각입니다.
 
이미 말씀드렸지만, 가톨릭 보편 교회는 적어도 1960년대 중반에 개최되었던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이후로 "연옥"을 장소가 아닌 "상태"의 개념으로 가르치고 있기 때문입니다. 또한 "하늘(heaven, 천국, 천당)" 도 "장소"가 아니라 "상태"의 개념으로 이미 가르치고 있습니다. 또한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4. [아래의 부록 중에서: 여전히 중세 연옥의 그림자 속에 있는 교회]
 
<----- 혹시라도 있을 수 있는 일부 교회의 구성원들의 잘못을 두고서, 이러한 표현으로, 거룩한 교회의 잘못으로 매도하는 것은, 어불성설이며 또한 극히 비논리적인 억지/음해/왜곡이라 아니할 수 없습니다.
 
5. 그리고 인터넷 검색 결과 조금 전에 인지하게 되었는데, 신부인 것은 밝히면서도 실명 대신에 필명을 사용하는 것은, 만약에 이것이 사실이라면, 또한 대단히 잘못이라는 생각입니다.
 
만약에 필명으로 글을 써 왔다면, 신부인 것도 밝히지 말았어야 한다는 생각입니다. 자기모순적, 이율배반적이기 때문입니다.
 
자유롭게 글을 쓰기 위하여 필명을 사용하여 왔다면, 계속 자유롭게 글을 쓰기 위하여서라도, 또한 본인이 사제임을 밝히지 않았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사제에게 우리가 인정하는 권위가 있다면, 그 권위는 어느 특정 사제 개인의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자신의 글로써 세속의 대중들의 평가를 받고 싶으면, 자신이 사제임을 밝히면서 실명이 아닌 필명을 사용하는 것은 말이 되지 않습니다. 자기모순적, 이율배반적이라 아니할 수 없습니다. 그리고 이 지적은 어느 특정인에게만 해당하는 지적이 아닙니다.
 
6. [아래의 부록 중에서: 영혼이 불타는 '연옥'은 없다]
 
<----- 연옥에서 불멸인 영혼이 "불탄다"는 주장도 대단히 잘못된 주장입니다.
 
만약에 "정화의 불로서 단련을 받음"을 표현하는 원문의 단어를 단순히 "불탄다" 라고 우리말로 번역하였다면, 우리말로의 번역에 상당한 문제가 있다는 생각입니다.
 
이는 연옥은 영혼의 정화를 위한 것이지, 영혼을 소멸시키고자 불태우기 위한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가톨릭 교회가 전통적으로 가르치고 있는 "연옥 교리"에 위배되는 주장이라는 생각입니다.

[내용 추가 일자: 2011년 11월 18일]
이 주장이 하도 이상하여, 그러한 주장을 하였다는 당시의 독일이라는 변방의 문제의 설교가였던 Johann Jetzel(1465-1519년경)의 대중적 슬로건의 영어본 번역문을 찾아 보았더니 다음과 같습니다:

출처: 여기를 클릭하여 반드시 확인하십시오 

"As soon as the coin in the coffer rings, the soul from purgatory springs."

(졸번역)
"동전이 모금함 안에서 울리자마자, 영혼은 연옥으로부터 튀어오릅니다."

질문: 위의 표현이, 아래의 부록 중에 주어진 번역문인, 다음의 문장과 동일한지요??? 모두들 정밀하게 비교/검토하시기 바랍니다:

(대단히 잘못 번역된 문장)
"돈이 모금함에 떨어지는 소리가 들리는 순간, 그들의 영혼이 불타는 연옥에서 나올 것입니다."

질문: 위의 영문본 문장의 어느 구석에, "불타는" 이라는 표현에 대응하는 표현이 있는지요???

결코 없습니다.

그리고 더 나아가, 이 문장을 더욱 더 왜곡하여, "영혼이 불타는 '연옥'은 없다"
라는 주장까지 합니까???

심지어 당시의 독일이라는 변방의 문제의 설교가였던 Johann Jetzel(1465-1519년경)는 자신이 살았던 당시의 시기의 연옥에 대한 가톨릭 교회의 공식적인 교리가 아니었던 주장을 하였던 것이 널리 잘 알려져 있는데,

이러한 당시의 독일이라는 변방의 문제의 설교가의 주장에다, 교리적으로 도저히 용납될 수 없는 왜곡을 더 추가하여서는, "영혼이 불타는 '연옥'은 없다" 라니요???

말장난을 하더라도 정도가 있는 법인데, 도가 지나쳐도 한참 지나쳐, 가톨릭 보편 교회의 연옥 교리에 대한 악의에 찬 왜곡과 음해라고 보지 않을 수 없는 수준까지, 한참 지나쳤다는 생각입니다. 

그러므로, 김인보 신부라는 필명을 사용하는 대단히 어설픈 자는,

지중해 지역 언어로 저술된 원어 저술들을 읽고 또 (자신 혹은 타인이 한) 우리말 번역문과의 비교/검토를 통하여, 제대로 올바르게 그 내용을 이해할 능력도 없는 주제에,

독자들의 무지를 마음껏 활용할 수 있다는 매우 주관적이고 비정상적인 교만한 그리고 무식한 마음의 자세와 함께,

가톨릭 보편 교회의 교의(dogma)인 전통적 연옥 교리에 대하여,

자신이 뒷감당할 수도 없는 정도로 자의적인/악의적인/임의적인 왜곡/음해를 하고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이상, 내용 추가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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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래의 글의 작성자가 사실은 누구인지 알 수 없으나, 그러나 안타까운 마음에서 한 두 개의 지적들을 더 드렸습니다만, 대단히 유감스럽게도, 아래의 글의 작성자가 가톨릭 교회 교리서 및 가톨릭 교회 교리서 요약편에서 무엇에 대하여 어떻게 가르치고 있는지 전혀 모르고 있는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7. 그리고 심지어 성 토마스 아퀴나스(St. Thomas Aquinas, 1225-1274년)의 저술인 신학 대전(Summa Theologica) 부록에서도 "연옥"을 우리 피조물들이 생각하는 "장소"로 설명하고 있지 않습니다. 다음의 주소에 접속한 후에, Article 1을 잘 읽어 보시기 바랍니다. 자신이 신부라는 (그러나 사실은 신부가 아닐 수도 있는) 아래의 글의 필명 사용자는 이러한 문헌적 사실도 모르고 있는듯 합니다:
 
 
8. 그리고 아래의 글의 저자는, 연옥교리가 유다주의의 전통에 근거하고 있음도 모르는 것 같습니다. 다음은 아래의 출처에서 발췌한 것입니다: 
 
출처: http://ch.catholic.or.kr/pundang/4/soh/617.htm <----- 필독 권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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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췌 시작)
 
연옥교리 혹은 최후의 정화교리는 그리스도께서 활동하셨던 시절 이전부터 참 신앙의 한 부분이었습니다. 구약 성경의 마카베오서 하권 12장 41-46절과 “마지막 날에 벌을 용서해 줄 그날까지 아담은 슬퍼할 것이며, 그러한 연후에 내가 그대의 슬픔을 기쁨으로 바꿀 것이다.” (The Life of Adam and Eve 46-7)라는 기록에서와 같이, 메시아가 오시기 전부터 유대인들은 이미 이것을 믿고 있었습니다.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정통 유대인(Orthodox Jews)들은 최후의 정화를 믿으며, 사랑하는 친지가 죽으면 장례를 치른 후 11달 동안 이들은 사랑하는 자의 정화를 위하여 매일 Mourner's Kaddish라고 불리는 기도를 바칩니다.
 
역사적으로 유대 교회, 가톨릭 교회, 그리고 동방 정교회는 최후의 정화가 있음을 항상 선언해 왔으며, 1500년대에 들어와 개신교 성향의 종교 분리자들이 나타날 때까지는 아무도 이것을 부인하지 않았습니다. 교부들(Church Fathers)의 가르침 중에서 인용한 아래의 구절들에서와 같이, 연옥은 처음부터 기독교 (가톨릭 및 개신교 포함) 신앙의 한 부분이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이해하기 힘든 연옥교리를 가톨릭 교회가 만들었지 않았나.. 하는 억측을 합니다만, 이 교리의 핵심 내용은 단지 세 가지뿐입니다. 즉,
 
(i) 죽은 다음에 정화과정이 있다.
 
(ii) 이 과정은 어떤 종류의 고통을 수반한다.
 
(iii) 살아 있는 자들이 하느님께 바치는 기도와 예물로써 정화과정을 도와줄 수 있다.
 
다른 생각들, 예를 들어, 연옥은 우리들이 죽은 다음에 머무르는 특별한 “장소”이라거나 혹은 연옥 단련은 일정한 “시간”을 요한다는 등의 생각들은, 가톨릭 교회의 교리라기보다는 통상적으로 연옥을 쉽게 이해하기 위한 우리 인간들의 견해입니다.
 
(이상, 발췌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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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아래의 부록 중에서: 그렇다면 이런 연옥교리는 언제부터 시작된 것일까? 초기 그리스도교 공동체의 죽음관은 ‘천국’과 ‘지옥’이라는 이원론적 세계관이었다. 다시 말해서, 당시에는 오늘날과 같은 연옥 개념이 없었다는 뜻이다. ... 이 ‘안식’이라는 개념을 교회 안에 최초로 보급한 인물이 바로 2세기 후반에 활동했던 카르타고 출신 호교 교부 테르툴리아누스(Tertulianus)다.]
 
<----- 따라서 아래의 부록 중에서 이 부분은 대단히 잘못 주장하고 있는 부분입니다. 다들 위에서 제가 말씀드린 바와 비교/검토해 보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다음의 주소에 있는 글도 또한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http://ch.catholic.or.kr/pundang/4/soh/634.htm  <----- 또한 필독 권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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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글쓴이의 성향 혹는 편향의 정도는 글 중에서 인용하고 있는 인물들을 살펴 봄으로써 알 수 있는데, 다음은 아래의 글 중에서 인용하고 있는 일부 20세기 가톨릭측의 신학자들에 대한 간략한 글입니다.
 
이들 모두는, 자신 고유의 지나친 주장들을 하다가, 이미 교황청 신앙 교리성으로부터 거부 혹은 퇴출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아래의 글과 관련하여, 인용하면 도움이 되는 교황청 홈페이지 제공의 가톨릭 보편 교회의 문헌들도 많은데, 왜 하필 이런 자들의 말들만을 골라서 인용하면서 글을 작성하였는지, 전혀 납득할 수가 없습니다:
 
10-1. 한스 큉: 
특히 1960년대 중반에 개최된 제 2차 바티칸 공의회 이후에, 한스 큉 등의 (게르만족 계통의) 신학자들은,
 
(i) 양성평등주의,
 
(ii) 교황님의 무오류성 불인정,
 
(iii) 사제 독신주의 폐지,
 
(iv) 여성 사제 찬성,
 
(v) 해방신학 (주: 해방신학의 이론적 뿌리도 독일 쪽인 줄로 알고 있습니다.)
 
등의 주장을 하였습니다. 그러다가, 한스 큉은 1979년에 라칭거 추기경(현 베네딕토 16세 교황)에 의하여 가톨릭 교회의 신학에 대한 저술권과 교수권을 박탈당하였습니다. 그러므로 교회의 전통적 핵심 교의들을 부정하는 한스 큉의 책들의 번역판들은 아예 구입하지도 또 읽지도 마실 것을 부탁드립니다.
 
 
위의 주소에 접속하면, 한스 큉의 주장들과 교황청 유관 부서의 조치들에 대한 Time 지 보도 내용을 읽을 수 있습니다.
 
10-2. 칼 라너:
1980년대에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에 의하여 단죄를 받은 해방 신학의 창시자인 레오나르도 보프(Boff)의 스승이기도 한 칼 라너는, 세례없이 죽은 유아들의 환생을 주장하였다고 합니다.
 
 
10-3. 레오나르드 보프(Leonard Boff):
다음의 자료 1을 클릭하시면, 교황청 신앙교리성에 의하여 퇴출된 남미의 해방신학자인 Leonard Boff이 독일 개신교 신학자인 Rudolf Bultmann하느님 나라에 대한 잘못된 주장을 수용하였음을 알 수 있습니다. 자료 2는 Time지에 실린 Leonard Boff에 대한 제재 과정 전반에 대한 기사 모음입니다:

 

자료 1: http://ch.catholic.or.kr/pundang/4/cc/Boff_LT.htm

보프의 저술의 특성은 그가 전통적인 신학적 용어를 자주 사용함에 있으나 그러나 그 내용으로부터 교리적 내용을 없어지게 하는 데에 있다. 그는 Freire의 교육학적 방법을 자신 고유의 해방주의자 이념들의 확산을 위한 가장 적절한 교육적 도구로서 추천한다. 또한 그는 교회의 모델을 발전시키는데, 그는 이 모델이 "공산사회주의적 그리스도교"에 근거하고 있다고 말하며 그리고 이것을 그리스도께서 설립하신 교계 제도적인 구조를 가지게 된 교회에 반대하는 위치에 자리를 잡아 준다고 말한다. 그는 가톨릭 교회의 교회 조직의 구조는 3세기보다 이전으로 더 거슬러 올라가질 수 없다고 주장한다. 마지막으로, 계급투쟁 이론이라는 용어로, 보프로마 가톨릭 교회를 억압자의 역할로 내던져버린다.  

보프의 신학마르크주의 이론의 뒤범벅이며 그리고 루돌프 불트만(Rudolf Bultmann)칼 라너(Karl Rahner)의 이념들에 의하여 영향을 받았던 결함이 있는 그리스도론인데, 그는 (독일의) 뮤니히(Munich)에서 이 두 사람 아래에서 학습하였다. 보프의 그리스도론을 설명하면서, 한스 우르 폰 발타살(Hans Urs von Balthasar)은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보프불트만에 의하여 강하게 영향을 받은 어떤 그리스도론을 발전시킨

     것 같은데, 불트만과 함께 그는 우리가 역사적 예수에 대하여 거의 알지 못한

     다고 넌지시 비칩니다. 그러나 그는 우리가 예수님의 주요 의도를, 자기 자신

     을 가난한 자들과 억압받는 자들의 해방주의자로서 자신의 역할로 이해하였

     던, 다음과 같은 어떤 사람의 의도로 해석할 수 있다고 믿었습니다: ... 해방

     은 - 예수님께서 거기로부터 유래할 것이라고 예상하셨던 '하느님 나라'는 -

     십자가 위에서의 진정한 외침에 의하여 '어찌하여 저를 버리셨습니까?'라고

     표현되었듯이, 발생하는 데에 이미 실패하였다. 대속 교리(the 

    doctrine of substitution)(*)는 라너뿐만이 아니라 보프에 의하여 거부됩

     니다. 예수님께서 원하셨으며 그리고 시작하셨던 바를 적용하고 실행하는 것

     은 오늘날의 그리스도인들인 우리에게 달려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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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번역자 주: 위에서 "the doctrine of substitution""대속 교리"로 직역 번역하였는데, 이 용어는 프로테스탄트 측에서 통상적으로 사용하는 표현이다. "칼 라너" 와 그의 제자인 "레오나르드 보프" 는 가톨릭 사제들이었으므로, 위의 본문 중에서 "대속 교리(the doctrine of substitution)"이라는 표현을 가톨릭 측의 용어인 "구속 교리(the doctrine of redemption)" 혹은 "속량 교리" 로 이해하여야 할 것이다. "구속/속량 교리"에 대한 글은 다음에 있으니 참고하라:

 

http://ch.catholic.or.kr/pundang/4/soh/1129.ht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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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의 책인 From Death To Life 에서, Christoph Schonborn, O.P 추기경께서는 보프Reimarus, Reuss, Schweitzer and Loisy 등과 같은 학자들의 일행에 배치하는데, 이들 모두는 예수님의 제자들이, 그리고 심지어 예수님 스스로도, 하느님 나라의 즉각적인 발생 및 이 세상의 전복을 예상하면서, 종말론적 "높은 긴장 상태"에서 살았다는 오류를 퍼뜨렸다. 이러한 오류는 루돌프 불트만의 저술들에서 그 최고점에 도달하였는데, 그는 하느님 나라가 이 세상의 종말과 동등하다고 생각하였다. Schonborn 추기경께서는 보프불트만의 이론의 정확함을 가정하였다고 지적한다.

 

자료 2: http://ch.catholic.or.kr/pundang/4/fiatlux2000/search4Boff_LT.htm

(Time지에 실린 Leonard Boff에 대한 제재 과정 전반에 대한 기사 모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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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 록
 
- 아 래 -
 
게시자 주: 대단히 잘못된 내용을 담고 있는 글. 아래의 글에서, 연옥에 대한 가톨릭 교회의 전통적 가르침과 다른 주장을 하고 있는 (전부가 아닌) 일부 부분들은, 독자들의 이해를 도와드리고자, 게시자가 빨간 색칠을 하였습니다.
 
영혼이 불타는 '연옥'은 없다 (담아온 글)
 
작성자    번  호  
 
작성일   2011-11-03 오후 9:56:50 조회수   63 추천수   
 
 
영혼이 불타는 '연옥'은 없다
고통과 형벌의 ‘연옥’에서 벗어나 기쁨과 희망의 ‘연옥’으로
 
2011년 11월 03일 (목) 14:40:24 김인보 .
 

불교와 유교문화를 기반으로 하는 한국사회에서 돌아가신 조상님들에 대한 공경은 ‘미덕’의 차원을 넘어 실생활 깊은 곳에 자리하고 있는 하나의 전통이다. 보편적으로 각종 제사와 설날과 추석에 지내는 ‘차례’와 ‘성묘’를 꼽을 수 있다. 세계 어느 나라에서도 찾아보기 힘든 ‘죽은 이들’에 대한 ‘추모미덕’(追慕美德)이라 할 만하다.

‘죽은 이들의 영혼’에 대한 이러한 전통적 정서는 한국 가톨릭교회 안에서도 쉽게 찾아볼 수 있다. 각 본당마다 소속 신자의 장례를 돕는 ‘위령회’ 또는 ‘연령회’가 조직되어 있으며, 미사지향 가운데 보통 절반가량은 ‘위령미사’(연미사)가 차지한다. 그리고 초상이 나면 ‘연도 났다’ 그리고 문상을 갈 때도 ‘연도 간다’라고 표현할 정도로 위령기도의 대표성을 띄는 ‘연도’(煉禱)는 교회 전통적인 기도를 우리나라 정서에 맞게 토착화한 대표적인 예다. 또한 단순한 ‘위령기도’의 지위였던 ‘연도’는 2002년 10월 18일 추계 주교회의 정기총회에서 ‘상장예식’으로 인준되면서 전례예식으로까지 격상됐다.

‘죽은 이들의 영혼’을 위한 이런 교회적 전통을 19세기 프랑스의 고고학자 살로몽 레나크(Salomon Reinach)는 자신의 저서 <죽은 이들을 위한 기도의 기원>에서 “이교도들은 죽은 이들에게 기도하는 반면 그리스도교인들은 죽은 이들을 위해 기도 한다”고 표현했다. 가톨릭교회는 이미 초대교회 때부터 박해 등으로 신자가 죽게 되면, 그 날을 ‘천상탄일’(天上誕日, Dies Natalis)이라 여겼던 전통을 지닌다. 예를 들면 각 성인을 기념하는 ‘축일’은 그 성인의 천상탄일인 것이다. 이런 전통은 살아서는 물론 죽어서도 그 영혼이 영원한 생명에 참여한다는 ‘부활신앙’에 기초한 것이다.

그렇다면 ‘영원한 생명에 참여’하기 위해 기도가 필요한 영혼은 어떤 영혼일까? 바로 ‘모든 영혼’이 아니라 바로 ‘연옥영혼’이다. 우리가 바치는 ‘위령기도’는 바로 ‘연옥영혼을 위한 기도’이며, 연옥교리 역시 ‘위령기도’ 즉 ‘죽은 이들의 영혼’을 위한 기도에서 출발했다.

   
 

 


연옥교리, 죽은 이들의 ‘안식’을 기원함으로부터 시작

그렇다면 이런 연옥교리는 언제부터 시작된 것일까? 초기 그리스도교 공동체의 죽음관은 ‘천국’과 ‘지옥’이라는 이원론적 세계관이었다. 다시 말해서, 당시에는 오늘날과 같은 연옥 개념이 없었다는 뜻이다. (<----- 가톨릭 교회의 가르침과 다른 주장이며, 위의 제7항 참조) 티끌만한 잘못이라도 저지르지 않고서 살 수 없는 인간 본성에 비춰 볼 때 이런 이원론적 죽음관은 여러 의문을 낳을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등장한 것이 바로 ‘안식’(Refrigerium)이라는 개념이었다. 본시 이 ‘Refrigerium’은 ‘시원하고 평안한 상태’를 의미하는 용어로 초기 그리스도교 공동체뿐만 아니라 로마를 중심으로 한 여러 지역에서 ‘죽은 이의 안식’을 기원하기 위해 로마를 중심으로 하여 묘비에 새겨 넣는 일반적인 용어였다.

이 ‘안식’이라는 개념을 교회 안에 최초로 보급한 인물이 바로 2세기 후반에 활동했던 카르타고 출신 호교 교부 테르툴리아누스(Tertulianus)다. 그의 작품이라고 알려진 <페르페투아와 펠리치타스의 수난기>를 통해서 그는 ‘안식’이라는 개념을 그리스도교 문헌에 처음으로 사용 한 후, <마르키온 논박>을 통해 ‘부자와 나자로의 비유’(루카 16,18-31)를 들어 의인들이 부활을 기다리는 “잠정적 거처”의 의미를 부여했다. 즉 천국은 ‘마지막 날’에 도래하는 것이며, 의인들은 천국이 아닌 이 “잠정적 거처”에서 그리고 악인들은 ‘지옥’에서 심판 날을 기다린다고 주장했다.

12세기 이후 ‘잠정적 거처’, ‘상태적 정화’에서 ‘정화되는 장소’로서 ‘연옥’의 탄생

이 ‘안식’의 개념을 ‘정화’(Purgatorium) 이론으로 발전시킨 인물이 바로 3세기에 활동했던 오리게네스(Origenes)다. 그는 사도 바오로의 ‘정화하는 불’(Ignis Purgatorius, 1코린 3, 10-15)을 자신의 신학에 받아들임으로써 ‘죽은 영혼’은 이 ‘정화하는 불’로 ‘정화’가 된 이후에 천국에 받아들여진다고 주장했다. 이때까지의 ‘정화’는 ‘상태’적 의미의 ‘정화’였다.

‘상태’적 의미의 ‘정화’인 ‘Purgatorium’이 ‘장소’적 의미의 ‘정화’로 탈바꿈하게 된 것은 12세기 이후다. 다시 말해서 ‘정화’가 시행되는 ‘장소’가 ‘천국’과 ‘지옥’ 사이에 ‘장소’로써 존재한다는 것이다. (<----- 가톨릭 교회의 가르침과 다른 주장이며, 위의 제7항 참조)  또한 이 ‘정화’는 절대 꺼지지 않는 ‘불’의 형벌을 통해 이루어진다고 보았다. 그리고 교회는 공식적으로 1274년 리용 공의회를 통해서 이런 ‘불의 형벌’로 ‘정화’가 이루어지는 ‘장소’를 ‘연옥’이라고 선포했다. 그리고 1439년 피렌체 공의회를 통해서 이 ‘연옥’교리는 다시 한 번 확인되었다.

중세에 이르러 ‘장소’로써의 ‘연옥’개념은 ‘대사’(Indulgentia)교리와 만나 종교개혁을 촉발시키는 도화선이 되었다. 1517년 교황 레오 10세는 로마에 새로운 성 베드로 대성전 건립에 자금이 부족하자 모금을 위해 전대사를 선포하였다. 이 전대사는 이미 전임 교황 율리우스 2세가 대성전 건립을 위해 1507년에 반포한 전대사를 반복한 것이었다. 이 모금을 효과적으로 달성하기 위해 교회는 조직적으로 대사설교자들을 지방교회에 파견하기 시작하였고 결국 도미니코수도회 소속이었던 요한 테젤(Johann Tetzel)의 대사설교에 반발한 마르틴 루터 (Martin Luther)가 결국 종교개혁의 불씨를 당기고 말았다.

세계적인 교회사가 베인튼(Roland H. Bainton)은 그의 저서 <루터의 생애>에서 요한 테젤의 설교 내용을 다음과 같이 밝히고 있다. “여러분이 연옥영혼들을 구원할 수 있다는 것을 잊지 마십시오. 돈이 모금함에 떨어지는 소리가 들리는 순간, 그들의 영혼이 불타는 연옥에서 나올 것입니다.” (<----- 가톨릭 교회의 연옥 교리에 반하는 명백한 고의적 악의에 찬 의도적 번역 오류이며, 위의 제6항 참조) 안타깝게도 ‘장소’로서, 그리고 ‘타는 불구덩이’로서 ‘연옥’교리가 교회를 신/구 교회로 갈라놓는 결정적 원인을 제공한 셈이다.

   
▲ Angel helping souls in purgatory.

여전히 중세 연옥의 그림자 속에 있는 교회

그렇다면 현재를 살아가고 있는 그리스도교인들에게 ‘연옥’은 어떤 표상일까? 독일 신학자 기스벨트 그레사케 (Gisbert Greshake)가 <종말신앙 - 죽음보다 강한 희망>에서 주장한 것처럼 지금까지 연옥은 ‘반 지옥’(半地獄)과 같은 표상으로 표현되어왔다. 다시 말해서 중세교회의 영향으로 인해 아직까지도 우리에게 있어서 ‘연옥’은 ‘불에 타는 고통을 받는 형벌’의 ‘장소’로서 ‘반 지옥’이라는 표상이 강하게 남아있다.  (<----- 가톨릭 교회의 가르침과 다른 주장이며, 위의 제7항 참조)  

이런 표상의 ‘연옥’이 과연 옳은 것일까? 오늘날 대부분의 신학자들은 이런 표상의 ‘연옥’에 반대하는 입장을 취한다. 심지어 대표적인 보수 신학자들인 미카엘 슈마우스 (M. Schmaus)나 요셉 라칭거 (J. Ratzinger, 현 교황 베네딕도 16세) 마저도 연옥을 불의 고통이 있는 특정한 공간으로 여기는 것에 반대한다. 슈마우스는 자신의 저서 <가톨릭 교의 제5권>에서 “정화는 인식과 사랑이 최고로 승화된 정신적 삶”이라고 말하면서 “연옥은 불의 고통이 있는 장소가 아니라, 인간의 영혼을 정화시키는 하느님의 사랑으로 여겨야 한다”고 주장한다.

또한 라칭거 역시 저서 <종말론>에서 “연옥은 인간이 그 속에서 자신의 죄 때문에 불에 타는 형벌을 받아야 할 일종의 감옥”이 아니며, 오히려 “정화는 하느님의 사랑으로 인해 인간의 내면으로부터 필연적으로 일어나는 변화의 과정”으로 이해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보수 신학자들마저 ‘연옥의 정화’는 불이라는 물질을 통해서 특정한 장소에서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무엇일까? 대부분의 현대 신학자들은 중세적 ‘형벌’의 표상이 담겨있는 연옥에 대한 공간적 표상을 (<----- 가톨릭 교회의 가르침과 다른 주장이며, 위의 제7항 참조)  거부하고, 대신 ‘정화’라는 용어를 더 선호한다. ‘타는 불에 의한 정화’가 아닌 ‘참회와 기쁨’으로 나타나는 ‘정화’ ‘천국에 대한 희망’으로 드러나는 ‘정화’가 그것이다. 그리고 이 ‘정화’는 하느님과의 ‘만남’에서부터 시작된다.

한스 큉 (H. Küng)은 저서 <영원한 삶>에서 “정화는 사람을 심판하고, 깨끗이 정화하고, 해방하며, 가르치고, 치유하고, 완성케 한다는 뜻에서 하느님과의 만남”이라고 정의하고 있다. 또한 앞서 언급한 그레사케도 “우리는 연옥이라는 표현을 피하고 그 대신 하느님과의 만남의 요소로서 정화와 정결에 대하여 말해야 할 것”이라고 주장하면서 “연옥은 반 지옥(半地獄)이 아니라 하느님과의 만남의 한 요소”라고 말한다.

더 나아가 라칭거는 이러한 ‘정화’는 “그리스도인들의 전 생애를 통하여” 일어나며 “죽음 속에서 그리스도와 만나 정화되고 변화되는 ‘순간’”으로 정의한다. 칼 라너(K. Rahner)의 제자 라디슬라우스 보로스(L. Boros)는 자신의 저서 <죽음의 신비>에서 “죽음의 순간 우리는 하느님과 만나며, 하느님과의 만남 안에서 그리스도와 만난다. 그렇기 때문에 하느님과의 만남은 곧 그리스도와의 만남”이라고 말한다. 또한 “이 만남의 순간은 죄와 죄책감으로 인한 말할 수 없는 고통의 순간인 동시에, 하느님의 사랑을 통해 모든 죄와 죄책감에서 정화되는 ‘참회와 기쁨’의 순간”이라고 단언한다.

고통과 형벌의 ‘연옥’에서 벗어나 기쁨과 희망의 ‘연옥’으로

   
 
우리는 불이 타는 형벌의 장소인 연옥, 반 지옥인 연옥  (<----- 가톨릭 교회의 가르침과 다른 주장이며, 위의 제7항 참조)  을 포기해야 한다. 레오나르도 보프 (L. Boff)가 <죽음으로 향하는 삶>에서 밝힌 대로 ‘기쁨’을 강조하기보다 ‘고통’을 강조한 ‘연옥’은 포기해야 한다. 중세 이후, 고통과 벌로 표상된 연옥교리는 하느님을 철저하게 ‘인과응보의 원리’에 따라, 우리의 죄과가 남김없이 사라질 때 까지 벌하시는 분으로 만들어 버렸다.

전례적으로도 장례미사 때 부르던 부속가 <분노의 날>(Dies irae)이 제2차 바티칸공의회 결정에 따른 전례개혁(1970년) 이후 삭제되었다. 왜냐하면 이는 ‘죽은 이의 영혼’이 하느님의 ‘분노의 벌’을 받을 것이라는 표상으로 ‘죽음’이 ‘하늘에서 다시 태어남’이 아니라 ‘죽음에 대한 공포’와 ‘하느님의 심판’만을 강조하기 때문이었다. 이런 하느님의 모습은 ‘되찾은 아들의 비유’(루카 15,11-32)에서 나타나는 자비로운 아버지의 모습과 어긋난다. 예수께서 보여주신 하느님은 인간에 대한 무한한 사랑 때문에 외아들까지도 십자가에 달리게 하신 그런 하느님이다.

네덜란드 개혁주의 조직신학자 헤리트 베르카워(G. C. Berkouwer) 마저도 자신의 저서 <그리스도의 재림>을 통해 연옥교리의 일차적 관심은 “죽음조차도 신자들을 그리스도와의 친교로부터 분리할 수 없다는 약속의 현실성”에 두어야 한다고 말한다. 그리고 헬무트 틸리케(H. Thielicke) 역시 <죽음과 삶>에서 “죽음 이후에 계속 내가 살아있는 것은 내 자신의 공과 때문이 아니라 어떤 경우에도 나를 버리시지 않는 하느님의 사랑에 있다”고 했다.

이제 신자들의 뇌리에 유전인자처럼 새겨져 있는 연옥교리는 중세의 허물을 벗고, 다시 태어 나야 한다.  (<----- 가톨릭 교회의 가르침과 다른 주장이며, 위의 제7항 참조)   연옥에 대한 우리의 인식은 하느님 사랑으로 정화되는 ‘기쁨’으로, 천국을 향하는 여정의 ‘희망’으로 채워져야 한다.

11월은 위령성월이다. 세상을 떠난 모든 영혼들을 위해 특별히 기도하는 달이다. 죽은 이들을 위한 우리의 기도는 죽은 이들이 그리스도와 만나기까지 함께 걷는 ‘길’이다. 이는 죽은 이들이 그리스도와 만나서 정화되고 ‘되찾은 아들’로 하느님 앞에 설 수 있도록, 우리가 죽음을 넘어 그들과 함께 한다는 표현이다. 이것이 바로 고유한 의미에서 ‘성인들의 통공’이며, 이런 의미에서 본다면 칼 라너 (K. Rahner)가 자신의 저서 <전례력>에서 한 말은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다. “죽은 이들을 위한 우리의 기도는 살아있는 성인들이 그 영원의 고요에서 우리에게 나지막이 속삭이는 하느님 사랑에 대한 메아리다.”

죽은 이들을 위한 기도에서 우리는 그들과 만나 하나 됨을 느낀다. 우리가 매일 거행하는 미사를 통해 우리는 죽은 이들과 일치를 이루고, 결국 이 일치는 하늘과 땅, 살아있는 이와 죽은 이들 사이의 구분을 없앤다. 결국 우리는 같은 식탁, 예수 그리스도의 같은 식탁에 모여 있음을 체험하게 된다. 그래서 연옥은 결국 ‘기쁨’이요 ‘희망’인 것이다.

“부활의 희망 속에 고이 잠든 교우들과 세상을 떠난 다른 이들도 모두 기억하소서.”

* 기스벨트 그리사케의 <종말신앙 - 죽음보다 강한 희망>을 제외한 모든 저작은 영문서 적으로, 제목을 우리말로 바꿨습니다.

 

김인보 (신부, 자유기고가)

<가톨릭뉴스 지금여기 http://www.catholic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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