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톨릭 신앙생활 Q&A 코너

나는 세상에 불을 지르러 왔다 외 - 루카 12,49-53 #<다해연중20주일복음> [교리용어_상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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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08-19 ㅣ No.1433


질문:

루카복음 12장 49절~ 53절의 말씀에 대하여 알고 싶습니다.
 
49 "나는 세상에 을 지르러 왔다.
       그 불이 이미 타올랐으면 얼마나 좋으랴? 
 
51 "내가 세상에 평화를 주러 왔다고 생각하느냐?
       아니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오히려 분열을 일으키려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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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부의 말씀:

많이 부족한 죄인인 필자의 글들은 어떤 특정인의 감정을 자극하기 위하여 마련된 글들이 결코 아니기에, 다음의 당부의 말씀을 드립니다:

(1) 지금까지 필자의 글들을 읽고서 필자에 대한 "분노(anger)" 혹은 "질투(envy)"를 가지게 된 분들은, 혹시라도 그분들께 "걸림돌(stumbling block)"일 수도 있는, 많이 부족한 죄인의 글들을 더 이상 읽지 마시기 바랍니다. 꼭 부탁드립니다.

(2) 그리고 위의 제(1)항의 당부의 말씀을 읽고도 굳이 이 화면의 아래로 스스로 이동하여, 많이 부족한 죄인의 아래의 본글을 읽는 분들은, 필자에 대한 "분노(anger)"와 "질투(envy)" 둘 다를 가지지 않을 것임에 동의함을 필자와 다른 분들께 이미 밝힌 것으로 이해하겠습니다.

(3) 그리 길지 않은 인생 여정에 있어, 누구에게나, 결국에, "유유상종[類類相從, 같은 무리끼리 서로 사귐 (출처: 표준국어대사전)]"이 유의미할 것이라는 생각에 드리는 당부의 말씀입니다.
 































































답변:

+ 찬미 예수님!

1. 들어가면서
궁금해 하시는 구절들은, 가톨릭 교회의 전례력에 있어, 다해 연중 제20주일 복음 말씀(루카 12,49-53)에 포함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다음은 다해 연중 제20주일 복음 말씀(루카 12,49-53) 전문입니다:

(발췌 시작)
49 “나는 세상에 을 지르러 왔다. 그 불이 이미 타올랐으면 얼마나 좋으랴? 50 내가 받아야 하는 세례가 있다. 이 일이 다 이루어질 때까지 내가 얼마나 짓눌릴 것인가?

51 내가 세상에 평화를 주러 왔다고 생각하느냐? 아니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오히려 분열을 일으키러 왔다.

52 이제부터는 한 집안의 다섯 식구가 서로 갈라져, 세 사람이 두 사람에게 맞서고 두 사람이 세 사람에게 맞설 것이다. 53 아버지가 아들에게, 아들이 아버지에게, 어머니가 딸에게, 딸이 어머니에게, 시어머니가 며느리에게, 며느리가 시어머니에게 맞서 갈라지게 될 것이다.”
(이상, 발췌 끝)

2.
2-1. 다음의 주소에 접속하면, 이 복음 말씀에 대한 나바르 성경 주석서의 해설을 읽을 수 있습니다:

http://ch.catholic.or.kr/pundang/4/navarre/c_ot_20.htm <----- 필독 권고

2-2. 또한, 위의 제2-1항의 나바르 성경 주석서의 해설의 우리말 번역문을 인터넷 각주로서 제공하고 있는, "가톨릭 교회의 말씀 전례에 따른 성경공부 해설서(<----- 클릭하십시오), 다해-II" (출판사: 가톨릭출판사, 엮은이: 소순태), 다해 연중 제20주일 복음 말씀(루카 12,49-53) 해설을 읽도록 하십시오,

2-3. 특히 2013년 다해인 올해는 "가톨릭 교회 교리서"를 학습하여야 하는 "신앙의 해"인데, 다음은, 가톨릭 교회 교리서 제696항에 주어진, 불(fire)성령의 상징(symbol)이라는 가르침 전문입니다.

게시자 주: 그리고 아래에서 "변화시키는 힘"이란 곧 "하느님의 사랑"을 말할 것입니다:

출처: 여기를 클릭하십시오.

(발췌 시작)
696 . 물이 성령 안에서 주어지는‘생명’의 탄생과 풍요를 가리킨다면, 은 성령의 활동이 지닌 변화시키는 힘을 상징한다. 엘리야 예언자는“불처럼 일어섰는데 그의 말은 횃불처럼 타올랐다” (집회 48,1) . 엘리야는 자신의 기도로 카르멜 산 위 제물에 하늘에서 불이 내려오게 하였다. 30) 이 불은 닿는 것을 변화시키시는 성령을 상징한다. “엘리야의 영과 힘을 지니고 그분보다 먼저 온” (루카 1,17) 세례자 요한은 그리스도께서“성령과 불로 세례를 주실” (루카 3,16) 분 이심을 선포한다. 예수님께서는 성령에 대해 이렇게 말씀하신다. “나는 세상에 불을 지르러 왔다. 그 불이 이미 타올랐으면 얼마나 좋으랴?” (루카 12,49) 성령께서는 오순절 아침“불꽃”모양의 혀들이 갈라져 제자들 위에 내려오셔서 그들의 마음을 채우신다. 31) 영성적 전통은 이 불이 성령의 활동을 가장 잘 표현하는 상징의 하나로 간직해 왔다. 32)“성령의 불을 끄지 마십시오” (1테살 5,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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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 1열왕 18,38-39 참조.
31. 사도 2,3-4 참조.
32. 십자가의 성 요한, “사랑의 산 불꽃”, 「소품집」,  햇빛 출판사(1995), 133-134면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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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 발췌 끝)

그리고 다음은 교황청 홈페이지 제공의 영문본 가톨릭 교회 교리서 제696항 전문입니다:

출처: http://www.vatican.va/archive/ENG0015/__P21.HTM

(발췌 시작)
696 Fire. While water signifies birth and the fruitfulness of life given in the Holy Spirit, fire symbolizes the transforming energy of the Holy Spirit's actions. the prayer of the prophet Elijah, who "arose like fire" and whose "word burned like a torch," brought down fire from heaven on the sacrifice on Mount Carmel.37 This event was a "figure" of the fire of the Holy Spirit, who transforms what he touches. John the Baptist, who goes "before [the Lord] in the spirit and power of Elijah," proclaims Christ as the one who "will baptize you with the Holy Spirit and with fire."38 Jesus will say of the Spirit: "I came to cast fire upon the earth; and would that it were already kindled!"39 In the form of tongues "as of fire," the Holy Spirit rests on the disciples on the morning of Pentecost and fills them with himself40 The spiritual tradition has retained this symbolism of fire as one of the most expressive images of the Holy Spirit's actions.41 "Do not quench the Spirit."42
(이상, 발췌 끝)

게시자 주: 가톨릭 그리스도교의 신학적 용어인 상징(symbol)정의(definition)는 다음의 글에 있습니다:
http://ch.catholic.or.kr/pundang/4/soh/1426.htm

3.
3-1. "하느님 나라의 구성원들이 누리는 평화"인, "그리스도께서 주시는 평화"에 대한 글인 "복음서에서 말하는 그리스도의 평화란?" 제목의 글은 다음에 있습니다:

http://ch.catholic.or.kr/pundang/4/soh/1402.htm <----- 또한 필독 권고

예를 들어, 가톨릭 교회 교도권이 말하는, 가톨릭 그리스도교 신학 용어인 평화(peace, pax)정의(definition)히포의 성 아우구스티노(St. Augustine of Hippo, 354-430년)정의(definition)를 따르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3-2. 다른 한편으로, 루카 복음서 12,51에서 말하는 "평화"는, 위의 제3-1항에서 말하는 평화와는 그 질과 차원이 다른, 우리들이 평소에 인간적으로 바라고 있는 세속적 평화, 즉, "세상의 평화"를 말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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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교수 소순태 마태오 (Ph.D.)
작업에 소요된 시간: 약4시간 (우리말 번역 포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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