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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투하는 바오로 혹은 시기하는 바오로??? - 2코린토 11,2 1035_시기vs질투 [교차번역오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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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기vs질투 -11 [218.55.90.*]

2014-01-26 ㅣ No.1511

(십자성호를 그으며)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1. 들어가면서

1-1. 다음은, 가톨릭 교회의 전례력에 있어, 홀수 해 연중 제11주간 목요일 제1독서(2코린토 11,1-11)에 포함되는 "새 번역 성경" 2코린토 11,2 전문 입니다:

 

(발췌 시작)
나는 하느님의 열정을 가지고 여러분을 위하여 열정을 다하고 있습니다. 사실 나는 여러분을 순결한 처녀로 한 남자에게, 곧 그리스도께 바치려고 그분과 약혼시켰습니다.

(이상, 발췌 끝)

 

질문 5: 위의 2코린토 11,2에의 문맥 안에서, 성 바오로는 질투하고 있는지요, 아니면 시기하고 있는지요? 즉, 코린토 지역의 그리스도인들에 대한 성 바오로의 사랑은 질투하는 사랑인지요, 아니면 시기하는 사랑인지요?

 

게시자 주 1-1: 위의 질문 5에 대한 답변은 아래의 제5항에 마련되어 있습니다.

 

1-2. 이방인들의 사도로 불리는 성 바오로(St. Paul)는, 신약 성경의 경전들의 목록이 확정되기 훨씬 이전인 시기인 자신의 선교/전교 여행 중에, 자신의 서간들을 통하여 이미, 자신이 받았던 하느님의 계시 진리들에 근거한, 그리스도교 교리에 대하여 가르쳤던 것입니다. 즉 성 바오로를 포함하는 예수 그리스도의 사도들에 의하여 먼저 가르쳐졌던 것은 그리스도교 교였지, [신약 성경의 경전들이 아직 확정되지 않았기에] 신약 성경 본문에 기록된 특정 문장에 대한 가르침이 아니었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교리 교육에 있어 당시의 유다인들까지도 신뢰할 수 있었던 관련/근거 자료들은, 다들 잘 알고 계시겠지만, 구약 성경의 특정 본문들에서 직접적으로 혹은 간접적으로 인용되었던 것입니다.

 

게시자 주 1-2그리고 사도들의 시대뿐만이 아니라 초기 교회 시절에 교부들에 의하여 제시되었던 바로 이러한 방식의 그리스도교 교리 교육은, 소위 말하는 "예형론적 교리교육"이라고 불리는 바로 발전하였다고 알고 있는데, 다음의 주소에 접속하면, 이에 대한 가톨릭 교회 교리서 제128-130항 및 제1049항에 주어진 바를 학습할 수 있습니다. 클릭한 후에 제3-3항제3-4항을 읽도록 하십시오:

http://ch.catholic.or.kr/pundang/4/soh/1369.htm <----- 필독 권고

 

질문 1: 사실 성 바오로는 위에 발췌한 2코린토 11,2의 전후 문맥 안에서 대단히 중요한 그리스도교 교리를 가르치고 있는데, 당시의 유다인들이, 위에 우리말로 번역이 된 바와 동일한 표현/문장2코린토 11,2의 첫 번째 문장을 직접 읽거나 혹은 듣게 되었을 때에 즉시 연상하였을 것으로 생각되는 대응하는 구약 성경의 율법 관련/근거 구절이 혹시라도 있다면, 어느 구절 혹은 단락일까요?

 

2.

2-1. (질문 1에 대한 답변을 마련하기 위한 첫 번째 시도) 2코린토 11,2의 첫 번째 문장에 있어 핵심 단어가 "열정"이기에, 상식의 선에서 생각하더라도 많이 부족한 죄인인 필자를 포함하여 성서 신학을 전공하지 않은 대다수의 분들의 경우에, 이 단어가 사용되고 있는  "새 번역 성경"의 모세 오경의 본문을 찾아보는 것이 질문 1에 대한 분명한 해답을 제시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렇지 않는지요?

 

2-1-1. 다음의 주소를 클릭하면, 굿뉴스 서버 제공의 성경 검색 엔진을 사용하여, "새 번역 성경" 구약 성경 본문에 대하여 "열정"이라는 차용된 번역 용어로 검색한 결과를 확인할 수 있는데, 대단히 유감스럽게도 그리고 대산히 실망스럽게도, "새 번역 성경"의 모세 오경의 어떤 본문도 "열정"이라는 단어를 사용하고 있지 않음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https://maria.catholic.or.kr/bible/search/bible_search.asp?n=&p=&bb_no=&code=&JangNo=&JeolNo=&submit_root=&ctxtPlace=search&page=&ctindex=old2&prindex=0&Keyword=%EC%97%B4%EC%A0%95 <-----클릭하여 꼭 확인하십시오.

 

이 검색 결과에 의하면, "새 번역 성경"의 구약 성경 본문에서 총25개의 절들에서 "열정"이라는 차용된 번역 용어가 사용되었음을 확인할 수 있는데, 그러나 대단히 유감스럽게도 그리고 대단히 실망스럽게도, 모세 오경의 어느 구절에서도 바로 이 차용된 번역 용어가 사용되지 않았음도 또한 확인할 수 있습니다.

 

2-1-2. 그리고 다음의 주소를 클릭하면, 굿뉴스 서버 제공의 성경 검색 엔진을 사용하여, "공동번역성서" 구약 성경 본문에 대하여 "열정"이라는 차용된 번역 용어로 검색한 결과를 확인할 수 있는데, "공동번역성서"의 모세 오경의 어떤 본문도 "열정"이라는 이 차용된 번역 용어를 사용하고 있지 않음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https://maria.catholic.or.kr/bible/search/bible_search.asp?n=&p=&bb_no=&code=&JangNo=&JeolNo=&submit_root=&ctxtPlace=search&page=&ctindex=old&prindex=0&Keyword=%EC%97%B4%EC%A0%95 <-----클릭하여 꼭 확인하십시오.

 

이 검색 결과에 의하면, "공동번역성서" 시편 69,9 와 집회서 48,2 단 두 곳에서만 "열정"이라는 차용된 번역 용어가 사용되고 있음을 확인하였습니다.

 

게시자 주 2-1-2:

(1) 의역 번역이 되었다고 알려진 "공동번역성서"의 경우에는 위의 검색 결과를 어느 정도 이해할 수 있습니다만, 그러나 직역 번역이 되었다고 알려져 있는 "새 번역 성경"의 구약 성경 본문에 대한 검색의 결과, "열정"이라는 차용된 번역 용어가, 대단히 유감스럽게도 그리고 대산히 실망스럽게도, "새 번역 성경"의 모세 오경의 본문 어디에서도 사용되지 않았음에 대하여, 더 구체적으로 이 글에서 자세하게 말씀드리겠지만, 상당히 납득할 수 없습니다. 그리고 이것으로, 질문 1에 대한 답변을 마련하기 위한 첫 번째 시도실패하였습니다.

 

(2) 물론 이 실패를 두고서 괜찮다고 생각하고 또 이 실패를, 사사로운 이유 때문에, 의도적으로 애써 감추거나 혹은 무시하는 분들도 계시겠지만, 그러나 영어 등의 외국어본 성경 본문에 익숙하지 않은 국내의 대다수의 교우님들의 경우에, "새 번역 성경" 본문 자체가 질문 1에 대한 답변을 제공하는 데에 직접적인 도움을 주지 못하는 것은, 예를 들어, 많이 부족한 죄인인 필자의 양심에 비추어 볼 때에, 상당히 아니라는 생각입니다. 여러분들 생각에, "많이 부족한 죄인"이어야만 이런 "서글픈", 더 나아가, "슬픈" 생각을 하게 될 것이라는 것인지요???

 

왜냐하면, 예를 들어,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직후인 1969년에 가톨릭 보편 교회 교도권에서는 전례력을 대폭 개정하여, 특히 주일들과 대주일들의 경우에는, 예형론적 성경공부를 할 수 있도록 제시를 하고 있지만 [주: 이에 대한 더 자세한 안내는, 여기를 클릭한 후에(<--- 필독 권유), [내용 추가 일자: 2012년 12월 18일]로 이동하면 읽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 본글의 예(example)인 "새 번역 성경"의 2코린토 11,2에서 보듯이, "새 번역 성경"으로는 "예형론적 성경공부"제대로 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이에 대하여서는 다음의 주소에 있는 글을 꼭 읽도록 하십시오:

http://ch.catholic.or.kr/pundang/4/soh/1370.htm <----- 필독 권고

 

(이상, 게시자 주 2-1-2 끝).

 

질문 1-1: 그런데, 예를 들어, NAB(New American Bible)의 본문에 대하여, 위의 제2-1항에서 하였던 대로 동일한 접근을 하면, 어떠한 검색 결과를 얻을 수 있을까요? 또 실패할까요?

 

질문 1-1에 대한 답변: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이어지는 제2-2항을 읽도록 하십시오. 그리고 이어지는 글에서는, 왜 이러한 커다란 차이점이 있는지에 대하여 또한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2-2. (질문 1에 대한 답변을 마련하기 위한 두 번째 시도)   

다음은 NAB(New American Bible) 2코린토 11,2 전문입니다:

 

출처: http://www.vatican.va/archive/ENG0839/__PZX.HTM

(발췌 시작)

For I am jealous of you with the jealousy of God, since I betrothed you to one husband to present you as a chaste virgin to Christ.

(이상, 발췌 끝).

 

우선적으로, NAB 2코린토 11,2에서는, "새 번역 성경"과는 달리, 한 개의 문장으로 번역하였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새 번역 성경"의 해당 절에서 "열정"으로 번역된 표현이, NAB 에서 "jealousy" 혹은 "jealous"로 번역되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따라서, NAB 2코린토 11,2의 첫 번째 문장에 있어 핵심 단어가 "jealousy" 혹은 "jealous"이기에, 상식의 선에서 생각하더라도 많이 부족한 죄인인 필자를 포함하여 성서 신학을 전공하지 않은 대다수의 분들의 경우에, 예를 들어, "jealous"라는 단어가 사용되고 있는  NAB 의 모세 오경의 본문을 찾아보는 것이 질문 1에 대한 분명한 해답을 제시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렇지 않는지요? [그리고 "jealous"라는 단어로 모세 오경의 특정 구절들을 찾아내는 데에 실패하였을 경우에는, 당연히, "jealousy"로 다시 시도하여야 할 것입니다.]

 

2-2-1. 다음의 주소에 접속하면, NAB 본문 중에서 "jealous" 라는 번역 용어가 사용된 구절들 모두를 파악할 수 있습니다.특히 모세 오경의 본문들을 들여다 보도록 하십시오:

출처: http://www.vatican.va/archive/ENG0839/1/Y9.HTM

 

(발췌 시작)

   Pent,  Exo   20:    5   |         the LORD, your God, am a jealous God, inflicting punishment
   Pent,  Exo   34:   14   |        god, for the LORD is 'the jealous One'; a jealous God is he. ~
   Pent,  Exo   34:   14   |          is 'the Jealous One'; a jealous God is he. ~

   Pent,  Num   11:   29   |     Moses answered him, "Are you jealous for my sake? Would that
10 
   Pent,  Deu    4:   24   |           is a consuming fire, a jealous God. ~
11 
   Pent,  Deu    5:    9   |         the LORD, your God, am a jealous God, inflicting punishments
12    Pent,  Deu    6:   15   |       who is in your midst, is a jealous God. ~
(이상, 발췌 끝).

 

따라서, 모세 오경 본문에서 총 일곱 번에 걸쳐 "jealous" 라는 번역 용어가 사용되고 있음과, 한 번을 제외하고, 모두가 "a jealous God" 라는 번역 표현에서 사용되고 있음을 확인하였습니다.

 

2-2-2. 다른 한편으로, 다음은 바로 위의 제2-2-1항에 나열한 성경 구절들과 2코린토 12,2에서의 "jealous"라는 단어에 대하여, 그리스어본 칠십인역 구약 성경 모세 오경의 본문에서 대응하는 그리스어 단어들입니다:

 

탈출기 20,5: zelotes

탈출기 34,14: zelotes

민수기 11,29: zelois

신명기 4,24: zelotes

신명기 5,9: zelotes

신명기 6,15: zelotes

 

2코린토 11,2: zelo 

 

[내용 추가 일자: 2021년 3월 6일]

게시자 주 2-2-2: (1) 다음의 주소에 접속하면, 바로 위에 있는 2코린토 11,2에서 사용된 그리스어 성경 용어 zelo가 사용된 신약 성경 중의 해당 절들을 확인할 수 있다:

https://biblehub.com/greek/2205.htm <----- 필히 확인하라

 

(2) 그런데, 특히 가톨릭 교회의 전례력에 있어, 나해 사순 제3주일에 복음 말씀으로서 봉독되는 요한 복음서 2,13-25 중의 제17절에서 또한 동일한 그리스어 성경 용어 zelo가 사용되었음을 알 수 있다:

https://biblehub.com/interlinear/john/2-17.htm <----- 필히 확인하라

 

(3) 따라서 바로 이 절에서 발췌 인용되고 있는 시편 69,9에서 사용된 대응하는 히브리어 성경 용어의 의미가 zelo의 의미와 논리적으로 등가임(logically equivalent)을 확인할 수 있다는 생각이다.

https://biblehub.com/hebrew/7068.htm <----- 필히 확인하라

 

(4) 다른 한편으로, 다음의 주소에 접속하면, 탈출기 20,5에서 사용된, 영어로 "jealous"로 번역되는 히브리어 성경 용어 형용사가 바로 위의 제(3)항에 안내된 히브리어 명사의 한 개의 파생어임을 확인할 수 있다:
https://biblehub.com/hebrew/7067.htm <----- 필히 확인하라

 

(5) 따라서 바로 이러한 이유 때문에, 다음의 주소에 접속하면 읽을 수 있는, 가톨릭 교회의 전례력에 있어, 나해 사순 제3주일에 제1독서로 발췌되는 탈출기 20,1-17 중의 제5-6절에 대한 "나바르 성경 주석서"의 해설에서, 또한 시편 69,9를 또한 지적하면서, "zeal"(열정)이라는 성경 용어에 대한 설명을 제공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http://ch.catholic.or.kr/pundang/4/navarre/b_lent_3.htm  <----- 필독 권고 

[이상, 2021년 3월 6일자 내용 추가 끝]

 

(중간 결론 1) 바로 이 나열로부터 우리는 이들 단어들의 어근(root)이 동일함을 확인하며, 그러므로, 바로 이 검색 결과로부터 우리는, 2코린토 11,2 첫 문장에서 바오로가 말하는 "jealous" "jealousy"의 의미는, 탈출기 20;5탈출기 34,14에서 사용되고 있는 번역 용어인 "jealous"동일한 의미를 가짐을 알게 되었습니다.

 

지금까지 들여다 본 바가 무슨 말씀인고 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i) 성 바오로가 살았던 시기에 지중해 지역 전역에서 사용되고 있던 공용 언어는 그리스어였습니다.

 

(ii) 그 당시에 지중해 지역에서 "야만인(babarian)"이란, 그리스어를 모르는 자를 말하였습니다.

 

(iii) 그 당시에 팔레스티나 지역를 떠나 지중해 여러 지역들[즉, 디아스포라(diaspora)]에 살고 있었던 유다인들과 그리스도인들이 공통으로 사용한 [구약] 성경은, 모음이 없는 그래서 제대로 소리내어 읽는 것이 대단히 힘들었던 히브리어 글자로 기록된 히브리어 [구약] 성경이 아니라, 모음과 자음을 다 갖추고 있었던, 예를 들어, 그리스 철학의 여러 개념들도 이미 정교하게 표현할 수 있었던 정교한 언어였던 그리스어로 기원전 3-2세기경에 번역이 된, 그리스어본 칠십인역 [구약] 성경이었습니다.

 

(iv) (중간 결론 2) 따라서, 그리스어로 쓰인 편지인 2코린토 11,2의 문장을 그 당시의 유다인들 혹은 그리스도인들이 읽거나 들었을 때에, 모세 오경의 탈출기 20,5; 탈출기 34,14 등을 즉시 연상하도록(associate) 하고자, 성 바오로2코린토 11,2에서, 영어로 "jealous" 에 대응하는, 그리스어 단어 zelos 를 어근(root)으로 가지는 단어를 사용하였음을 결론으로 도출합니다.

 

[내용  추가 일자: 2014년 1월 28일]

그리고, 예를 들어,  2코린토 11,2에 대한 바로 아래의 "주석 성경"의 주석(iv-1) "나바르 성경 주석서"의 해설(iv-2)에서도, 많이 부족한 죄인인 필자가 자구적 어의/의미(literal sense)에 근거하여 바로 위에서 도출한 결론과 동일한 결론을 또한 내리고 있습니다:

 

(iv-1) "주석 성경"2코린토 11,2에 대한 주석 전문:
(발췌 시작)
"열정"은 "질투"로 옮기기도 한다. 탈출 20,5; 나훔 1,2 각주 참조.
(이상, 발췌 끝).

 

(iv-2) "나바르 성경 주석서"2코린토 11,2에 대한 해설은 다음에 있습니다:
http://ch.catholic.or.kr/pundang/4/navarre/ot_11_thu.htm <----- 필독 권고

[이상, 내용 추가 끝].

 

(v) (중간 결론 3) 그리고 우리는, 히브리어로 기록된 구약 성경 본문과 그리스어로 기록된 신약 성경의 본문 사이에서 "예형론적 성경공부"를 효과적으로 하고자 할 때에, 자구적 연결 고리의 역할을 하는 것이 바로 그리스어본 칠십인역(LXX) 구약 성경임을 알게 되었습니다.

 

(vi) 그리고 특히 NAB 를 포함하여 대부분의 영어본 성경들의 경우에, 신약 성경의 특정 본문에서 사용되는 영어 단어(예를 들어, NAB 2코린토 11,2에서 "jealous")에 대응하는 그리스어 단어와 동일한 그리스어 어근을 가지는 단어로 그리스어본 칠십인역(LXX) 구약 성경 본문 중에서 번역이 된 히브리어 성경 본문의 단어는, 위에서처럼, 동일한 영어 단어(예를 들어, NAB 탈출기 20,5에서 "jealous")로 번역이 되어 있기 때문에, 위의 제2-1항에서 이미 고찰하였듯이 "새 번역 성경" 본문만으로는 실패한, "예형론적 성경공부"를 누구나 쉽게 할 수 있도록, 이미 잘 마련되어 있다는 생각입니다.

 

지금 말씀드린 바에 대하여서는, 예를 들어, 다음의 주소를 클릭하여, "jealous" 라는 단어에 대한 교황청 홈페이지 제공의 NAB 용어 색인을 정밀하게 들여다 보도록 하십시오:

 

http://www.vatican.va/archive/ENG0839/1/Y9.HTM <----- 꼭 클릭하여 들여다 보십시오

 

3.

이번 항에서는 바로 위의 (vi)에서 말씀드린 바를 좀 더 자세히 들여다보도록 하겠습니다. 다음은 NAB 본문 중에서 "jealous/jealousy" 라는 동일한 번역 용어가 사용되고 있는 절들의 나열이며, 각 경우에 있어, "새 번역 성경"의 대응하는 절에서 사용 중인 차용된 우리말 번역 용어를 또한 병기하였습니다:

 

게시자 주 3: (1) 아래의 표를 들여다 볼 때에, 또한, 여기를 클릭하면 직접 확인할 수 있듯이, 새 번역 성경"의 구약 본문 중에서는 총 36개의 절들에서 "질투" "질투하는" 등의 차용된 번역 용어들이 사용되었음을 또한 참고하면서 살펴보시기 바랍니다.

(이상, 게시자 주 끝)

 

출처 1: http://www.vatican.va/archive/ENG0839/1/Y9.HTM 및 "새 번역 성경"

출처 2: http://www.vatican.va/archive/ENG0839/1/TG.HTM 및 "새 번역 성경"

jealous - 탈출기 20,5 - 질투하는

jealous - 탈출기 34,14 - 질투하는

jealous - 탈출기 34,14 - 질투하는

jealousy - 민수기 5,14 - 질투
jealousy - 민수기 5,15 - 질투

jealousy - 민수기 5,18 - 질투

jealousy - 민수기 5,25 - 질투

jealousy - 민수기 5,29 - 질투

jealousy - 민수기 5,30 - 질투

jealous - 민수기 11,29 - 시기하는

zeal, offense - 민수기 25,11 - 열성, 질투 (아래에 발췌한 "주석 성경" 의 각주 참조)

jealous - 신명기 4,24 - 질투하는

jealous - 신명기 5,9 - 질투하는

jealous - 신명기 6,15 - 질투하는

jealousy - 신명기 29,19 - 질투

provoked - 신명기 32,21 - 질투하게 하였다

jealous - 여호수아기 24,19 - 질투하는

jealous - 1사무엘 18,9 - 시기하는

envy or jealousy - 1마카베오서 8,16 - 시기질투

jealousy - 잠언서 14,30 - 질투 

jealousy - 잠언서 27,4 - 질투

jealous - 지혜서 1,10 - 열성스러운

jealousy - 지혜서 6,23 - 시기

jealous - 집회서 9,1 - 질투하는

jealous - 집회서 26,6 - 질투하는 (NABRE: a wife jealous of another wife - "새 번역 성경": 다른 여자를 질투하는 아내는)

jealous - 집회서 30,3 - 부러움을 사고

jealous - 집회서 45,18 - 시기하였다

jealous - 이사야서 11,13 - 질투하는

jealousy - 에제키엘서 5,13 - 질투 (아래에 발췌한 "주석 성경" 각주 참조)

jealousy - 에제키엘서 8,3 - 질투

jealousy - 에제키엘서 8,3 - 우상

jealousy - 에제키엘서 8,5 - 질투

jealousy - 에제키엘서 16,38 - 질투
jealous - 에제키엘서 16,42 - 질투

jealousy - 에제키엘서 23,25 - 질투

envy - 에제키엘서 35,11 - 질투 (아래에 발췌한 "주석 성경" 주석 참조)

jealousy - 에제키엘서 36,5 - 질투

jealous - 에제키엘서 36,6 - 질투

jealousy - 에제키엘서 38,19 -질투

jealous - 에제키엘서 39,25 - 열정

jealous - 나훔서 1,2 - 열정을 지닌 (a jealous and avenging God, 아래의 "주석 성경" 주석 참조)

jealousy - 스바니야서 1,18 - 열정 (아래에 발췌한 "주석 성경" 주석 참조)

jealousy - 스바니야서 3,8 - 열정

jealous - 즈카르야서 8,2 - 열정을 지닌

jealous - 즈카르야서 8,2 - 열정을 지닌

 

jealousy - 사도행전 5,17 - 시기

jealous - 사도행전 7,9  - 시기하다

jealousy - 사도행전 13,45 - 시기

jealous - 사도행전 17,5 - 시기하여

jealous - 로마서 10,19 - 시기하다 (신명기 32,21을 인용하고 있다는 아래의 "주석 성경" 주석 참조)

jealous - 로마서 11,11 - 시기하게

jealous - 로마서 11,14 - 시기하게

jealousy - 로마서 13,13 - 시기

jealousy - 1코린토서 3,3 - 시기

jealous anger - 1코린토서 10,22 - 질투하시게 (아래에 발췌한 "주석 성경" 주석 참조)

jealous - 1코린토서 13,4 - 시기하다

jealous - 2코린토서 11,2 - 열정을 다하고

jealousy - 2코린토서 11,2 - 열정 (아래에 발췌한 "주석 성경" 주석 참조)

jealousy - 2코린토서 12,20 - 시기

jealousy - 갈라티아서 5,20 - 시기

envy - 갈라티아서 5,21 - 질투

jealousy - 야고보서 3,14 - 시기

jealousy - 야고보서 3,16 - 시기

jealousy - 야고보서 4,5 - 열렬히 (아래에 발췌한 "주석 성경" 주석 참조)

 

(중간 결론 4) 그리스어본 칠십인역(LXX)에서 동일한 어근(root)을 가지는 단어(주: 영어로 jealous/jealousy), "새 번역 성경" 의 구약 본문 중에서는 "질투" 로 번역되었으나, 그러나, "새 번역 성경"의 신약 본문에서는 대체적으로 "시기"로 번역되었음을 위의 나열에서 우리는 구체적으로 확인하였는데, 이와 같이, 그리스어본 칠십인역(LXX) 구약 성경 본문과 신약 성경의 성 바오로의 서간문들에서 동일한 어근(root)을 가지는 단어(주: 영어로 jealous/jealousy로 번역됨)를 구약 성경 본문과 신약 성경 본문에서 동일하지 않게 두 개의 차용된 번역 용어들로 번역한 것은 명백한 번역 오류입니다.

 

질문 3: 그리스어본 칠십인역(LXX) 구약 성경 성 바오로의 서간문들에서 동일한 그리스어 어근(root)을 가지는 단어(주: 영어로 jealous/jealousy로 번역됨)를, 이미 위에서 구체적으로 확인하였듯이, 구약 본문과 신약 본문에서 동일한 우리말 단어로 번역하지 않은 이유는 무엇인지요???

 

게시자 주 3:

(2) 다음은 위의 나열의 괄호 안에서 참조하라고 말씀드린, "주석 성경"의 주석들입니다. 나중에 말씀드릴 때에 쉽게 참고할 수 있도록 여기에 발췌합니다. 위의 표에 근거하여 이 글에서 다루고 있는 바에 대한 전체 윤곽/모습을 파악하기 위한 부득히한 고육지책으로 제시하는 것이므로, 인내하여 주실 것을 독자들께 특히 요청드립니다:


(2-1) "새 번역 성경" 민수기 25,11"주석 성경"의 주석:

아론 사제의 손자이며 엘아지르의 아들인 피느하스가 이스라엘 자손들 가운데서 나를 위하여 열성을 다해, 나의 분노를 그들에게서 물러가게 하였다. 그래서 내가 질투9)로 이스라엘 자손들을 없애버리지 않았다.(*)

 

-----

9) 앞 문장의 "열성"과 이 "질투"가 히브리 말에서는  같은 말이다.

 

(*) 번역자 주: 다음은 NAB 민수기 25,11 NABRE 민수기 25,11 전문이다:

출처: http://old.usccb.org/nab/bible/numbers/numbers25.htm

(발췌 시작)
"Phinehas, son of Eleazar, son of Aaron the priest, has turned my anger from the Israelites by his zeal for my honor among them; that is why I did not put an end to the Israelites for the offense to my honor.

(이상, 발췌 끝)

 

게시자 주: 위의 본문은 아래의 본문으로 수정되었다. 즉 NAB에서 his zeal은 NABRE에서 his being as jealous로 바뀌었고 그리고 NAB에서 offenseNABRE에서 jealousy로 바뀌었음에 반드시 주목하라:

 

출처: http://origin.usccb.org/bible/numbers/25/

(발췌 시작)
Phinehas, son of Eleazar, son of Aaron the priest, has turned my anger from the Israelites by his being as jealous among them as I am; that is why I did not put an end to the Israelites in my jealous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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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5:11] My jealousy: God’s desire to maintain an exclusive hold on the allegiance of the Israelites.

 

* [25:11] 나의 jealousy: 이스라엘의 자손들의 충성에 대한 어떤 배타적인 장악(掌握, hold)을 유지하고자 하는 하느님의 욕망(desire)을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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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번역자 주: 이 주석의 구체적인 의미는 NAB의 오경 입문에 다음과 같이 주어져 있다:

출처: http://www.vatican.va/archive/ENG0839/__P2.HTM

(발췌 시작)

The laws in Exodus and Leviticus (P tradition) are both early and late. They spell out the proper relationship of the federation of the twelve tribes with the Lord. He is a jealous God, demanding exclusive allegiance;

 

탈출기와 레위기(P 전승)에 있는 율법들은 둘 다 초기의 및 후기의 것들입니다. 그들은 주님과 열두 지파들로 이루어진 연합(federation)의 고유한 관계(proper relation)를 상세히 설명합니다. 그분께서는, 배타(排他)적인 충성을 요구하시는, 한 분의 시기하는 하느님이시며(a jealous God), 그리고 ...

(이상, 발췌 및 우리말 번역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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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 발췌 및 우리말 번역 끝)

 

게시자 주 3-(2-1): 여기서 말하는, 동일하다는 히브리 말에 대응하는 NABRE(New American Bible Revised Edition) 의 번역 단어가 jealous/jealousy임을 많이 부족한 죄인인 필자가 위의 나열에서 전달해 드리고 있으며, "새 번역 성경"에서, NABRE 에서처럼 동일한 단어로 번역을 한 것이 아니고, 대신에, 두 개의 차용된 번역 용어들로 번역을 하고서, 무슨 이유로 이러한 주석을 "주석 성경"에 주석으로서 남겼는지 이해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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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 "새 번역 성경" 에제키엘서 5,13"주석 성경"의 주석:

나는 이렇게 내 분노를 다 쏟아 내어 그들에 대한 화를 가라앉히고 내 속을 후련하게 하겠다. 이렇듯 내가 그들에 대한 화를 다 쏟을 때, 그들은 비로소 나 주님이 질투(jealousy)14) 속에서 말하였음을 알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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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 8,3; 16,38.42; 23,25에서처럼 여기에서도 "질투(jealousy)"라는 용어는 선택된 백성의 불충으로 야기된 하느님의 '상처받은' 사랑을 표현한다. 이는 흔히 부부간의 질투를 의미하는 것과는 달리, 자기가 당한 멸시를 복수하는 사랑의 격정을 가리킨다.

 

게시자 주 3-(2-2): "jealousy"라는 용어의 신학적 의미를 제대로 알고 있다면, 예를 들어, NAB 에제키엘 5,13에 아무런 각주가 주어져 있지 않듯이, "이러한" 내용의 각주는 전혀 불필요하다는 생각이다. 여기서도 "질투(jealously)" "시기(jealously)" 로 교체하여야 한다. 이에 대하여서는 게시자 주 3-(2-6)를 꼭 읽도록 하라. 그리고 많이 부족한 죄인인 필자의 생각에, 이 각주가 프랑스어본 공동번역 성경(TOB)에 주어져 있는 각주를 우리말로 충실하게 직역 번역한 경우인지 혹은 그러한 경우가 아닌지를 확인할 필요가 있다는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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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 "새 번역 성경" 집회서 26,6"주석 성경"의 주석:

다른 여자를 질투하는(jealous) 아내는 마음의 고통과 슬픔이 되고 험악한 혀로 그것을 모두에게 전한다.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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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직역: "다른 여자를 질투하는 여자는 마음의 아픔과 슬픔이요. / 모두에게 전달하는 혀의 채찍이다." 이 구절은 여러 가지 해석을 낳게 하지만, 일반적으로 여인의 질투가 스스로에게 마음의 상처와 슬픔을 가져오고 상처받은 여인의 입에서 나오는 독설이 주변의 모든 사람들을 괴롭힌다는 뜻으로 이해될 수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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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ABRE 집회서 26,6 발췌 시작)

출처: http://www.usccb.org/bible/sirach/26
A wife jealous of another wife is heartache and mourning; everyone feels the lash of her tongue.

 

다른 아내(*)에 대하여 시기하는 아내는 심장의 고통(heartache)과 슬픔이 되고 모두는 그녀의 혀의 채찍질을 느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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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번역자 주:

(1) 여기서 말하는 다른 아내는 "소실"을 말할 것이다. 예를 들어, 다음은 판관기 8,31에서 언급되는 "소실"에 관련된 "주석 성경"의 주석에서 발췌한 것이다:

(발췌 시작)
여기에서는 아내나 소실이 친정에 머무르고 남편이 때때로 방문하는 혼인 형태를 말한다. 14장에 나오는 삼손의 혼인도 참조. 여기에서 소실 또는 을 뜻하는 히브리 말은 사실 합법적 부인이지만 두 번째 부인이다.(**) (이하 생략)

(이상, 발췌 끝)

 

(2) 그리고 "새 번역 성경", 구약 성경 본문에 있어, "소실"에 대하여 언급하고 있는 본문들은 다음의 주소를 클릭하면 직접 확인할 수 있다:

https://maria.catholic.or.kr/bible/search/bible_search.asp?n=&p=&bb_no=&code=&JangNo=&JeolNo=&submit_root=&ctxtPlace=search&page=&ctindex=old2&prindex=0&Keyword=%EC%86%8C%EC%8B%A4
(이상, 발췌 및 우리말 번역 끝).

 

(**) 번역자 주: 다음의 주소에 있는 NAB 창세기 25,1-11에 대한 각주를 또한 찹고하라:
출처: http://old.usccb.org/nab/bible/genesis/genesis25.htm

(발췌 시작)
[1-11] Though mentioned here, Abraham's marriage to a "concubine," or wife of secondary rank, ["소실", 혹은 두 번째 신분의 부인] and his death are not to be understood as happening chronologically after the events narrated in the preceding chapter.

(이상, 발췌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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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 "새 번역 성경" 에제키엘서 5,13 "주석 성경"의 주석:

나는 이렇게 내 분노를 다 쏳아 내어 그들에 대한 화를 가라앉히고 내 속을 후련하게 하겠다. 이렇듯 내가 그들에 대한 화를 다 쏟을 때, 그들은 비로소 나 주님이 질투(jealousy)14) 속에서 말하였음을 알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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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 8,3 16,38.42; 23,25에서처럼 여기에서도 "질투(jealousy)"라는 용어는 선택된 백성의 불충으로 야기된 하느님의 '상처받은' 사랑을 표현한다. 이는 흔히 부부간의 질투를 의미하는 것과는 달리, 자기가 당한 멸시를 복수하는 사랑의 격정을 가리킨다.

 

게시자 주 3-(2-4): 바로 위의 "주석 성경"의 주석이, 예를 들어, 위의, (2-1)게시자 주와 이어지는 NABRE에서의 본문 수정과는 너무도 다름에 주목하라. 이는 무한한 선 그 자체이고 전지전능하신 하느님께서 무슨 상처 혹은 멸시를 받는다는 것인지 도저히 납득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바로 위의 각주의 설명은 아래의 (2-6) 에 주어진 "주석 성경"나훔서 1,2에 대한 바로 잡은 주석에서의 설명과도 명백하게 충돌하고 있다는 생각이다. 따라서 여기서도 "질투(jealously)" "시기(jealously)" 로 교체하여야 한다. 이에 대하여서는 게시자 주 3-(2-6)를 꼭 읽도록 하라.많이 부족한 죄인인 필자의 생각에, 이 각주가 프랑스어본 공동번역 성경(TOB)에 주어져 있는 각주를 우리말로 충실하게 직역 번역한 경우인지 혹은 그러한 경우가 아닌지를 확인할 필요가 있다는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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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 "새 번역 성경" 에제키엘서 35,11"주석 성경" 주석:

주 하느님의 말이다. 그러므로 내가 살아 있는 한, 네가 미워하는 마음에서 분노와 질투(envy)로 그들을 대하였듯이, 나도 같은 분노와 질투(envy)9)로 너를 대하겠다. 내가 이렇게 너를 심판하여 나 자신을 그들에게 드러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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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예루살렘이 함락되기 이전에는, "질투(envy)"가 죄를 지은 이스라엘에 대한 하느님의 적개심을 뜻하였다(5,13 각주 참조). 그러나 이제 이 질투는 이스라엘을 박해하는 자들을 향한 하느님의 적개심을 가리킨다(36,5-7; 38,18-19 참조). 그리고 앞으로는 굴욕을 당한 당신 백성에 대한 그분의 자비로운 연민을 뜻하게 된다.

 

게시자 주 3-(2-5): 이 주석에 있어 당장에 문제가 되는 은, 에제키엘서 5,13에서  "질투(jealousy)" 로 차용 번역된 히브리어 원 단어가, 비록 "새 번역 성경"의 본문에서 차용된 번역 용어는 동일한 단어 "질투" 이나, 그러나 에제키엘서 35,11에서 "질투(envy)" 로 차용 번역된 히브리어  원 단어와 동일하지 않은 데에 있다. 다음의 히브리어 단어들을 정밀하게 비교/검토하라:

http://biblehub.com/hebrew/bekinati_7068.htm (에제키엘 5,13)

http://biblehub.com/hebrew/uchekinatecha_7068.htm (에제키엘 35,11)

 

그리고 만약에, 우리말로의 번역 과정에서, "jealousy" "envy"의 자구적 의미에 있어서의 차이점을 제대로 알고 있었더라면, 예를 들어, NAB 에제키엘 35,11에 "이러한" 내용의 각주가 주어져 있지 않듯이, "주석 성경"에 주어진 "이러한" 내용의 각주는 전혀 불필요하다는 것을 또한 알았을 것이라는 생각이다. 많이 부족한 죄인인 필자의 생각에, 이 각주가 프랑스어본 공동번역 성경(TOB)에 주어져 있는 각주를 우리말로 충실하게 직역 번역한 경우인지 혹은 그러한 경우가 아닌지를 확인할 필요가 있다는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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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 "새 번역 성경" 나훔서 1,2"주석 성경" 주석:

(알렙) 주님은 열정을 지니신 분,4) 보복하시는 하느님

주님은 보복하시는 분, 진노하시는 분이시다. (이하 생략)

 

NAB 나훔서 1,2NAB 주석:

출처: http://old.usccb.org/nab/bible/nahum/nahum1.htm
(발췌 시작)

A jealous and avenging God is the LORD, an avenger is the LORD, and angry; The LORD brings vengeance on his adversaries, and lays up wrath for his enemi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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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A jealous . . .God: see note on Exodus 20:5.

 

[2] 시기하는 ... 하느님: 탈출기 20,5에 대한 각주를 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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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 발췌 및 각주의 우리말 번역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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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열정을 지니다' 에 해당하는 히브리 말은 흔히 '질투하다'로도 번역된다. 그런데 이는 어떤 비열한 감정이나(창세 30,1; 이샤야 11,13) 맹목적 정열을 낳는 옹색한 이기주의가 아니다(창세 37,11.18. 그리고 1사무 18,8-11; 1요한 11,13 참조). 하느님의 경우, 이 열정 또는 질투는 사랑의 힘에서 비롯된다(아가 8,6 참조). 그분의 사랑에 따른 무상적(無償的) 선택에, 인간은 하느님만을 향한 배타적 사랑으로 응답해야 한다(탈출 20,5; 34,14와 각주; 신명 4,24; 5,9; 6,15; 32,16; 여호 24,19-20.23; 시편 78,58; 에제 8,3.5 참조). 그렇지 않을 경우, 하느님의 열정 또는 질투는 모든 불순물을 정화시키려고 분노의 불로 무장한다(시편 79,5; 에제 5,13과 각주; 16,38; 23,35). 그리고 정화가 이루어지면, 이제 박해자들을 상대하게 된다(이사 26,11; 42,13과 각주; 59,17; 에제 35,11과 각주; 36,5-7; 38,19; 스바 1,18 참조). 하느님께서 당신의 거룩한 이름에 대하여 지니시는 열정은(에제 39,25) '민족들 사이에서 더럽혀진 그 큰 이름' 의 거룩함을 드러내는 것으로(에제 36,23), 당신 백성의 구원을 드러내는 것으로 표현된다(이사 9,6과 각주; 37,32 참조). 이로써 하느님의 질투 또는 열정이, 비록 나훔서의 이 구절과 같은 곳에서는 보복이나(이사 59,17) 분노와(6절) 더 밀접히 연관된 것으로 보이지만, 결국은 사랑과 자비와 애정과 관련된다는 사실이 더욱 분명해진다(이사 37,32; 63,15; 에제 29,35; 요엘 2,18과 각주; 즈카 1,14; 8,2 참조).

 

게시자 주 3-(2-6):

(1) 바로 위의 "주석 성경"의 주석에서, 한자 단어 "질투" 를 모두 jealousy로 교체한 다음의 바로 잡은 주석과는 달리, 그러나 바로 위의 주석은 독자들에게 커다란 혼란을 야기시킨다는 생각이다. 왜냐하면, 질투(嫉妬)"라는 한자 단어는 여기1을 클릭하고 여기2를 클릭하면 직접 확인할 수 있듯이, "jealousy"와는 그 자구적 어근(root)이 완전히 다른 "envy(라틴어: invidia)" 에 대응하는 차용된 번역 용어로서, 이미 명나라 말기에 중국으로 선교사로 파견된 예수회 소속의 신부님들에 의하여, 오래 전부터 중국과 우리나라를 포함하는 한문 문화권에서, 사용해 왔기 때문이다:

 

(많이 부족한 죄인인 필자가 바로 잡은 주석)

4) '열정을 지니다' 에 해당하는 히브리 말은 흔히 '시기하다(jealous)'로도 번역된다. 그런데 이는 어떤 비열한 감정이나(창세 30,1; 이샤야 11,13) 맹목적 정열을 낳는 옹색한 이기주의가 아니다(창세 37,11.18. 그리고 1사무 18,8-11; 1요한 11,13 참조). 하느님의 경우, 이 열정 또는 시기(jealousy)는 사랑의 힘에서 비롯된다(아가 8,6 참조). 그분의 사랑에 따른 무상적(無償的) 선택에, 인간은 하느님만을 향한 배타적 사랑으로 응답해야 한다(탈출 20,5; 34,14와 각주; 신명 4,24; 5,9; 6,15; 32,16; 여호 24,19-20.23; 시편 78,58; 에제 8,3.5 참조). 그렇지 않을 경우, 하느님의 열정 또는 시기(jealousy)는 모든 불순물을 정화시키려고 분노의 불로 무장한다(시편 79,5; 에제 5,13과 각주; 16,38; 23,35). 그리고 정화가 이루어지면, 이제 박해자들을 상대하게 된다(이사 26,11; 42,13과 각주; 59,17; 에제 35,11과 각주; 36,5-7; 38,19; 스바 1,18 참조). 하느님께서 당신의 거룩한 이름에 대하여 지니시는 열정은(에제 39,25) '민족들 사이에서 더럽혀진 그 큰 이름' 의 거룩함을 드러내는 것으로(에제 36,23), 당신 백성의 구원을 드러내는 것으로 표현된다(이사 9,6과 각주; 37,32 참조). 이로써 하느님의 시기(jealousy) 또는 열정이, 비록 나훔서의 이 구절과 같은 곳에서는 보복이나(이사 59,17) 분노와(6절) 더 밀접히 연관된 것으로 보이지만, 결국은 사랑과 자비와 애정과 관련된다는 사실이 더욱 분명해진다(이사 37,32; 63,15; 에제 29,35; 요엘 2,18과 각주; 즈카 1,14; 8,2 참조).
(이상, 바로 잡은 주석 끝).

 

(2) 다른 한편으로, 2000년 4월 1일에 초판 발행된, 성요셉출판사의 "주석성서" 구약(하), 나훔서 1,2의 주석은 다음과 같다. 바로 위의 제(1)항에서 지적하였듯이, 바로 아래의 발췌문에서 한자 단어 질투는 모두 "jealousy"로 바귀어야 한다:
(발췌 시작)
보복하시는 분(주: "열정을 지니시는 분"으로 바로 잡아져야 하는 단순 오류임): (탈출 20,5 본문 참조) 이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말은 보통 '질투하다' 로도 번역된다. 하느님의 경우, 이 열정 또는 질투는 사랑의 힘에서 비롯된다(아가 8,6 참조). 따라서 하느님의 질투와 열정은 보복이나(이사 59,17) 분노보다는 결국 사랑과 자비와 애정과 관련된다(이사 37,32; 63,15; 즈가 1,14; 8,2; 참조).

(이상, 발췌 끝).

 

(3) 위의 제(1)항의 "주석 성경"의 나훔서 1,2에 대한 주석과 바로 위의 제(2)항성요셉출판사의 "주석성서" 나훔서 1,2의 주석을 정밀하게 비교/검토하면, 위의 제(1)항의 "주석 성경"의 나훔서 1,2에 대한 주석보다는 바로 위의 제(2)항의 성요셉출판사의 "주석성서" 나훔서 1,2의 주석이 프랑스어본 공동번역성경(TOB)의 주석을 우리말로 번역한 것일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따라서, 많이 부족한 죄인인 필자의 생각에, "주석 성경"의 나훔서 1,2에 주어진 주석이 프랑스어본 공동번역 성경(TOB)에 주어져 있는 주석을 우리말로 충실하게 직역 번역한 경우인지 혹은 그러한 경우가 아닌지를 확인할 필요가 있다는 생각이다.

(이상, 게시자 주 3-(2-6) 끝).

 

(2-7) "새 번역 성경" 스바니야서 1,18"주석 성경" 주석:

주님의 분노의 날에 그들의 은도그들의 금도 그들을 구하지 못하리라. 온 땅은 주님의 열정18) 불에 타 버리리라. 주님은 세상의 모든 주민에게 전녕 무서운 파멸을 내리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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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 "질투의' 로도 옮길 수 있다. 하느님의 "질투/열정" 에 관해서는 탈출 34,14 각주; 나훔 1,2 각주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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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AB 스바니야서 1,18:

출처:

(발췌 시작)
Neither their silver nor their gold shall be able to save them on the day of the Lord's wrath, Whtn in the fire of his jealousy all the earth shall be consumed. For he shall make an end, yes, a sudden end, of all who live on the earth.

(이상, 발췌 끝).

 

게시자 주 3-(2-7): NAB 스바니아서 1,18에는 아무런 주석이 달려있지 않다. 그런데 영어로 "jealousy"로 번역되는 표현을, "새 번역 성경"의 해당 본문에서 "시기(jealousy) 대신에 "열정"으로 번역을 해 놓고, "주석 성경"의 해당 본문에서 위의 주석 18)을 제시하는 이유를 납득할 수 없다. 게시자 주 3-(2-6)를 꼭 읽도록 하라.

 

(2-8) 로마서 10,19"주석 성경" 주석:

나는 또 묻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그것을 모르고 있었다는 것입니까? 우선 모세가 말합니다. "나는 민족도 아닌 무리를 너희가 시기하게 하고 어리석은 민족에게 너희가 분노하게 하리라"19)

 

NAB 로마서 10,19:

출처:

(발췌 시작)
But I ask, did not Israel understand? First Moses says: "I will make your jealous of those who are not a nation; with a senseless nation I will make you ang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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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 신명 32,21(*) 자유롭게 인용한 것이다.

 

(*) 발췌자 주:
(1) NAB 10,19에는 아무런 주석도 주어지지 않았다. 그리고 다음은 "새 번역 성경"의 신명기 32,21 전문인데, 위의 로마서 10,19에서 인용부호 " " 안의 문장과 어떻게 다른지 정밀하게 비교/검토하라. 도대체 무슨 이유로, "새 번역 성경"의 신명기 32,21에서 "질투하게" 라는 차용된 번역 표현이 "새 번역 성경"의 로마서 10,19에서 발췌 인용되는 과정에서 "시기하게" 둔갑(遁甲)을 하였는지 도저히 납득할 수 없다:


("새 번역 성경" 신명기 32,21 발췌 시작)
그들은 신도 아닌 것들로 나를 질투하게 하고 헛것들로 나를 분노하게 하였다. 나 또한 내 백성이 아닌 자들로 그들을 질투하게 하고 어리석은 민족으로 그들을 분노하게 하리라.

(이상, 발췌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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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9) "새 번역 성경" 1코린토서 10,22"주석 성경" 주석:

우리가 주님을 질투하시게23) 하려는 것입니까? 우리가 주님보다 강하다는 말입니까?

 

NAB 1코린토서 10,22 :

출처:

(발췌 시작)

Or are we provoking the Lord to jealous anger? Are we stronger than he?

(이상, 발췌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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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 구약 성경에서 "질투" 는 우상 숭배에 빠진 당신 백성에 대한 하느님의 진노를 가리킨다(신명 32,16.21 참조).

 

게시자 주 3-(2-9): NAB 해당 본문에서 "jealous anger(시기하시는 분노/진노"로 번역된 표현을 "새 번역 성경"의 해당 본문에서 단순히 "질투하시게"로 번역하였음을 알 수 있다. 여기서도 "질투(jealously)" "시기(jealously)" 로 교체하여야 한다. 이에 대하여서는 게시자 주 3-(2-6)를 꼭 읽도록 하라.

 

(2-10) "새 번역 성경" 2코린토 11,2"주석 성경" 주석:

나는 하느님의 열정을 가지고 여러분을 위하여 열정을 다하고 있습니다.1) 사실 나는 여러분을 순결한 처녀로 한 남자에게, 곧 그리스도께 바치려고 그분과 약혼시켰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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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열정" 은 "질투" 로도 옮기기도 한다. 탈출 20,5; 나훔 1,2 각주 참조.

 

게시자 주 3-(2-10): 여기서 "새 번역 성경"의 해당 본문은 직역 번역이 아니고 의역 번역에 가깝다는 생각이다. 그리고 "새 번역 성경"의 해당 본문에서 "열정" 으로 번역을 한 후에, "주석 성경" 의 해당 본문에서 위의 1)과 같은 주석을 제시하는지 그 이유를 정말로 납득할 수 없다. 특히 "새 번역 성경" 2코린토 11,2의 우리말 번역문의 문제점에 대하여서는 위의 제2-2항을 필히 읽도록 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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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1) "새 번역 성경" 야고보서 4,5와 "주석 성경" 주석:

아니면, "하느님께서는 우리 안에 살게 하신 영을 열렬히7) 갈망하신다." 는 성경 말씀이 빈말이라고 생각합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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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열렬히" 에 해당하는 그리스 말은 "질투가 일 만큼" 으로 직역할 수 있다.

 

게시자 주 3-(2-11): 많이 부족한 죄인인 필자가 이미 확인한 바에 의하면, 프랑스어본 공동번역성경(TOB)에는 바로 위의 주석이 주어져 있지 않다. 도대체 무슨 까닭으로, "새 번역 성경"의 해당 본문에서, 위의 주석 7)에서처럼 "질투(jealously)가 일 만큼"으로 번역하는 대신에, "열렬히(jealously)" 로 번역을 한 후에, "주석 성경"의 해당 본문에서 위와 같은 주석 7)을 제시하는지 그 이유를 납득할 수 없다. "새 번역 성경"의 야고보서 4,5의 인용문의 주어가 하느님이시기에, "열렬히(jealously)" "시기(jealously) 가 일 만큼" 로 교체하여야 한다는 생각이다. 

 

[내용 추가 일자: 2014년 2월 25일]

이에 대하여서는 다음에 있는, 야고보서 4,5에 대한 나바르 성경 주석서의 해설을 필히 읽도록 하라:

http://ch.catholic.or.kr/pundang/4/navarre/ot_7_tue.htm

[이상, 내용 추가 끝]
(이상, 게시자 주 3-(2-*) 끝).

 

게시자 주 3:

(3) NAB 성경의 구약 및 신약 본문 전체에서 "jealous/jealousy" 라는 단어의 의미는 그리스어본 칠십인역(LXX)에 제시된 그 어근(root)에 근거하여 동일하게 정의되나(is defined), 그러나, 이와는 달리, "새 번역 성경"의 구약 및 신약 본문에서 바로 이 "jealous/jealousy"에 대응하는, 한 개의 동일한 차용 번역 용어로 번역되고 있지 않는동일하지 않은 차용된 우리말 번역 용어들 각각의 의미를, 만약에
(i)
우리말 번역자가 자신 고유의 국어 실력에 근거한 고유한 판단으로 올바르게 정의할(define) 수 있다고 생각하거나, 혹은
(ii) 
독자들이 표준국어대사전 혹은 한자자전에 주어진 단어들에 대한 설명에 근거하여 각각의 차용된 번역 용어의 의미를 올바르게 이해할(understand) 수 있다고 생각한다면,
그러한 생각 자체가,
마디로 말하여, 어불성설입니다. 왜냐하면, 번역서인 우리말 성경 본문 중의 각각의 차용된 번역 용어의 의미는 대응하는 우리말로 번역되기 이전의 각각의 원 단어의 의미를 그대로 지녀야 하기 때문입니다.
지금 말씀드린 이 중대한 지적을 다들 제발 좀 곰곰히 생각해 보도록 하십시오. 꼭 부탁드립니다.

 

4.

4-1. 다른 한편으로, 성경 본문의 무오성(inerrancy)에 관하여 지적한 성 아우구스티노(St. Augustine, 354-430년)의 가르침으로서, 가톨릭 보편 교회 교도권에서 이미 수용하였기에 가톨릭 교회의 가르힘인 바에 대한 전달의 글은 다음에 있습니다. 성경 본문 자체는 무오하나, 그러나 성경 본문의 지역 언어로의 번역 과정에서 번역자에 의하여 오류(error)가 발생할 수도 있음에 대한 성 아우구스티노의 지적은 지금까지도 유의미하고 그리고 또한 앞으로도 유의미할 것이기에, 안내해 드립니다:

http://ch.catholic.or.kr/pundang/4/soh/1279.htm <----- 필독 권고

 

게시자 주 4-1: 다들 잘 알고 계시겠지만, 특히 가톨릭 보편 교회의 핵심 문헌들의 지역 언어로의 번역은, 어느 특정 지역의 언어에 결코 종속되지 않는 가톨릭 보편 교회가 유규한 역사 속에서 가르쳐온 교의(dogmas)들과 교리(doctrines)들의 범주 내에 머물러 있어야 하므로, 따라서 어떠한 경우에도 세속의 문학 작품의 번역의 범주에 속하지 않으므로, 소위 말하는 "번역은 반역(反逆)이다" 라는 세속의 수사학적 주장에 동의하면서 안주하고자 하는 분들의 필독과 각성을 정중하게 요청드립니다.

 

4-2. 또 다른 한편으로, 성경 본문의 해석에 관한 성 토마스 아퀴나스(St. Thomas Aquinas, 1225-1274년)의 가르침으로서, 가톨릭 보편 교회 교도권에 의하여 1992년에 초판 발행된 가톨릭 교회 교리서에 구체적으로 수용된 바는 다음에 있습니다. 성경 본문의 모든 영성적 어의/의미(spiritual senses)들이 자구적 어의/의미(literal senses)들에 의존하고 있음에 대한 지적이며, 이 가르침은 성경 본문의 지역 언어로의 번역 과정에서, 문화 장벽과 언어 장벽에 기인하는 개념 전달 오류들을 극복함으로써, 원 단어들의 자구적 의미/어의들이 충실하게 전달되어야 함을 당연하게 요구하고 있습니다. 다음의 주소를 클릭한 후에 제5항제6항을 꼭 읽도록 하십시오:

http://ch.catholic.or.kr/pundang/4/soh/964.htm <----- 필독 권고

 

게시자 주 4-2: 다들 잘 알고 계시겠지만, 특히 가톨릭 보편 교회의 핵심 문헌들의 지역 언어로의 번역은, 어느 특정 지역의 언어에 결코 종속되지 않는 가톨릭 보편 교회가 유규한 역사 속에서 가르쳐온 교의(dogmas)들과 교리(doctrines)들의 범주 내에 머물러 있어야 하므로, 따라서 어떠한 경우에도 세속의 문학 작품의 번역의 범주에 속하지 않으므로, 소위 말하는 "번역은 반역(反逆)이다" 라는 세속의 수사학적 주장에 동의하면서 안주하고자 하는 분들의 필독과 각성을 정중하게 요청드립니다.

 

4-3. 이 글은, 다음과 같은, 교황청 홈페이지 제공의, 전례문, 성경 등의 가톨릭 보편 교회의 문헌들의 지역 언어로의 번역 지침서인, 교황청 경신성사성 문헌 [제목: Liturgiam authenticam, 2001년 5월 7일], 제41항 b)에 의거하여 마련된 글입니다. 아래의 출처를 클릭한 후에, 제일 마지막으로 이동하십시오:

 

출처: http://ch.catholic.or.kr/pundang/4/soh/1290.htm

(발췌 시작)

b) for the same purpose, other ancient versions of the Sacred Scriptures should also be consulted, such as the Greek version of the Old Testament commonly known as the “Septuagint”, which has been used by the Christian faithful from the earliest days of the Church;[35]


 

b) 동일한 목적을 위하여, 교회의 가장 초기의 시기들부터 그리스도교의 열심 신자들에 의하여 사용되어 오고 있는, 통상적으로 "칠십인 역"으로서 알려져 있는 구약 성경의 그리스어 번역본 등과 같은, 성경 본문들에 대한 고대 본들은 또한 참고되어져야만 한다;[35] 

(이상, 발췌 끝).

 

5.

다음은, 가톨릭 교회의 전례력에 있어, 홀수 해 연중 제11주간 목요일 제1독서(2코린토 11,1-11)에 포함되는 "새 번역 성경" 2코린토 11,2 전문 입니다:

 

(발췌 시작)
나는 하느님의 열정을 가지고 여러분을 위하여 열정을 다하고 있습니다. 사실 나는 여러분을 순결한 처녀로 한 남자에게, 곧 그리스도께 바치려고 그분과 약혼시켰습니다.

(이상, 발췌 끝)

 

질문 5: 위의 2코린토 11,2에의 문맥 안에서, 성 바오로는 질투하고 있는지요, 아니면 시기하고 있는지요? 즉, 코린토 지역의 그리스도인들에 대한 성 바오로의 사랑은 질투하는 사랑인지요, 아니면 시기하는 사랑인지요?

 

질문 5에 대한 답변 시작

다음은, NAB 2코린토 11,2 전문입니다:

 

출처: http://www.vatican.va/archive/ENG0839/__PZX.HTM

(발췌 시작)

For I am jealous of you with the jealousy of God, since I betrothed you to one husband to present you as a chaste virgin to Christ.

 

이는, 그리스도에게 한 명의 순결한 처녀로서 여러분을 바치고자 제가 여러분을 이 한 분의 남편에게 약혼시켰기에, 제가 하느님의 시기(the jealousy of God)로써 여러분에 대하여 시기하기(jealous) 때문입니다.

(이상, 발췌 및 우리말 번역 끝).

 

5-1. 그 당시에 바오로의 서간문을 받아본 코린토 지역의 그리스도교 신자들과 유다인들이, "새 번역 성경"의 2코린토 11,2의 우리말 번역문과는 달리탈출기 20,5 혹은 탈출기 34,14를의 시기하는 하느님(a jealous God)을 즉시 연상하기에 충분한 직역 번역문인 바로 위의 NAB 2코린토 11,2 본문 자체가 코린토 지역의 그리스도인들에 대한 성 바오로의 사랑이, 결코 질투하는(envious) 사랑이 아니고, 시기하는(jealous) 사랑이라는, 질문 5에 대한 답변을 바로 제시함에 주목하십시오.

 

왜냐하면, 자신의 사랑이 "시기하는 사랑"임을 성 바오로는 그 당시의 코린토 지역 그리스도인들과 유다인들이 잘 이해하고 있었을 내용을, 다음에 발췌된, 이어지는 2코린토 11,3에서 또한 자신이 말하고 있는 바에 대한 한 개의 예(an example)를 구약 성경 본문으로부터 구체적으로 제시함으로써, 명확하게 밝히고 있기 때문입니다:

 

(2코린토 11,3 발췌 시작)
그러나 하와가 뱀의 간계에 속아 넘어간 것처럼, 여러분도 생각이 미혹되어 그리스도를 향한 성실하고 순수한 마음을 저버리지 않을까 두렵습니다.

(이상, 발췌 끝)

(이상, 질문 5에 대한 답변 끝)

 

5-2. 그러나 혹시라도 바로 위의 제5-1항에서 드린 답변에 대하여 이해가 잘 되지 않는 분들께서는 우선적으로, 예를 들어, 다음에 발췌해 드린 2코린토 11,2에 대한 "주석 성경"의 주석을 참고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발췌 시작)

구약 성경에서는 하느님께 선택된 백성 이스라엘이 가끔 그분의 약혼녀로 서술된다(이사 54,5-6; 에제 16,8; 호세 2,21-22 등. 그리고 에페 5,27 참조). 바오로는 자신을 코린토 신자들에게 아버지와 같은 사람이라고 여긴다(1코린 4,15). 그래서 그는 여기에서 자신을 아버지, 코린토 신자들을 그리스도와 약혼한 자기의 딸에 빗대어 이야기한다. 옛날에 이스라엘에서는 아버지가 딸을 약혼시키고 또 자기 책임 아래 잘 보호하다가 신랑에게 내주었다. 그렇기 때문에 아버지는 줄곧 딸을 지켜보면서 돌보고 보호해야 했다.
(이상, 발췌 끝).

 

5-3. 그런데 여기서 여기까지 인내하면서 읽으신 독자들께서 꼭 인식하셔야 할 것이 한 가지 있는데, 바로 위의 제5-2항에 발췌된 설명은, 소위 말하는 부수적인(accidental) 설명이지, 결코 본질적인(essential) 내용에 대한 설명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왜냐하면, "시기(jealousy)" "질투(envy)"의 커다란 차이점에 대한 설명이 전혀 제시되지 않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들 용어들의 가톨릭 그리스도교의 전통적 정의(definition)는 다음에 있습니다:

http://ch.catholic.or.kr/pundang/4/soh/1035.htm <----- 필독 권고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다음의 주소에 접속하면, 국내의 개신교측 "대한성서공회" 홈페이지 제공의 용어사전 [즉, 독일성서공회판 해설성경전서 굿뉴스 스터디 바이블]들에 "질투""시기" 에 대한 용어 정의(definition)가 주어지지 않음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참고 자료 1 (클릭하십시오)

참고 자료 2 (클릭하십시오)

 

6.

질문 6: 그렇다면, 2코린토11,2에서의 코린토 지역의 그리스도교 신자들에 대한 "성 바로오의 시기하는(jealous) 사랑"의 대상(object)은 누구입니까?

 

질문 6에 대한 답변: 코린토 지역의 그리스도교 신자들에 대한 "그의 시기하는(jealous) 사랑"의 대상(object)은, 시기(jealousy)정의(definition)에 의하여 이미 자신의 소유물이라고 생각하고 있는 (즉, 자신이 사랑하는) 것을 또한 자신의 소유물이라고 생각하는 (즉, 사랑하는) 제3자를 말하므로, 2코린토 11,2의 전후 문맥 안에서, 이어지는 2코린토 11,132코린토 11,15 에서 각각 구체적으로 언급되고 있는 "거짓 사도들(the false apostles)" 그리고 "사탄의 일꾼들(the ministers of Satan)" 입니다.

 

게시자 주 6: 위의 질문 6에 대한 답변을 다음의 주소에 있는 글의 질문 4에 대한 답변 및 질문 5에 대한 답변과 정밀하게 비교/검토하돌고 하십시오. 아마도 그리 어렵지 않게,.

 

"C에 대한 A의 시기하는 사랑의 대상은 B이다."

 

라는 한 개의 정식화(a formulation)가 존재함을 발견할 수 있을 것입니다:

http://ch.catholic.or.kr/pundang/4/soh/1509.htm <----- 그리 바쁘지 않은 분들의 필독 권고

 

7.

이 글의 끝으로, 이번 항에서는 2코린토 11,2에 대한 가톨릭 그리스도교의 유익한 주석/해설들을 연대순으로 거슬러 올라가면서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특히 강론 준비 등에 상당히 유익할 것이라는 생각입니다.

 

7-1. 가톨릭 교회의 전례력에 있어, 홀수 해 연중 제11주간 목요일 제1독서(2코린토 11,1-11)에 대한 나바르 성경 주석서의 해설은 다음에 있습니다:

http://ch.catholic.or.kr/pundang/4/navarre/ot_11_thu.htm

 

[내용 추가 일자: 2014년 2월 6일]

게시자 주 7-1:

(1) 특히 2코린토 11,2에 대하여 해설하면서, 곧바로, 모세 오경의 본문에서 2코린토 11,2와 동일한 어근(root)이 사용된 탈출기 20,5 의 첫 문장을 발췌 인용한 후에, 이어서 신명기 6,5를 발췌 인용하고 있음을 확인하십시오.

 

(2) 다음의 주소에 있는, 개신교의 Holman Bible Dictionary 에 주어진 "jealousy"에 대한 설명에서도 또한 탈출기 20,5 와 함께 2코린토 11,2를 언급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설명을 하는 이유도 동일한 어근(root)이 이들 절들에서 사용되었기 때문입니다 :

http://ch.catholic.or.kr/pundang/4/soh/1516.htm <----- 필독 권고

[이상, 내용 추가 끝].

 

7-2. Haydock's Catholic Bible Commentary 1859 에 주어진 2코린토 11,2에 대한 주석은 다음에 있습니다:

http://haydock1859.tripod.com/id189.html

 

7-3. The Great Biblical Commentary of Cornelius a Lapide(1567-1637년)에 주어진 2코린토 11,2에 대한 주석은 다음에 있습니다:

http://www.corneliusbiblecommentary.faithweb.com/2ndCor91011.htm

 

게시자 주 7-3: 특히 바로 위의 주석에 주어진 방대한 양의 해설은, 예를 들어, 성 요한 크리소스토모(St. John Chrysostom) 등의 가톨릭 교회의 교부들과 주석자들의 강론들의 요약을 정확한 출처 제시와 함께 제공하고 있기에, 대단히 유익하다는 생각입니다:

 

(발췌 시작)

          Ver. 2.—For I am jealous over you with a godly jealousy. I cannot endure any rivals, such as these false apostles, who seek to seduce you. Paul calls his great and unbounded love “jealousy,” implying that he seeks to be first in the affections of the Corinthians.  S. Chrysostom remarks on this jealousy being a jealousy of God, which implies that Paul does not seek the bride for himself but for Christ and God—not for his own glory, pleasure, or gain. Christ is the Bridegroom, he is but the paranymph.

 

          For I have espoused you to one husband. “I have fitted you” (Augustine, contra Manich. lib. ii.); “I have prepared you” (Ambrose); “I have united you ” (Theophylact). The Greek verb may well bear the three meanings of, “I have invited you,” “I have betrothed you,” I have united you in wedlock.” The three duties of the paranymph are: (1.) to gain the maiden’s affections for the bridegroom, and to do all he can to get her to be the wife of his friend; (2.) to see that she is espoused to him; and, (3.) when betrothed, to unite them in marriage. S. Paul says in effect: I, as the paranymph of a spiritual marriage, have by my preaching betrothed you to one husband, Christ, and by betrothing you I have persuaded you to present yourselves to Christ as His espoused bride. Or better still, with Anselm and Theophylact: I have now espoused you to Christ through baptizing you into the Christian faith, that I may show you, or present you in the day of judgment, as virgins, i.e., pure in faith, hope, and charity, fitted for the nuptial couch of the glory of Christ.

 

          Chrysostom remarks that the betrothal takes place in this life, the union in the next, when the espoused Church, i.e., all the elect, shall be brought to the marriage of the Lamb and the eternal kingdom (Rev. xxi. 2).

 

          The Church of Corinth is described by S. Paul as the virgin spouse of Christ, whose paranymph he is. Then he transfers to himself the jealous love of the Bridegroom, and protests against Christ’s bride being stolen by false apostles, and handed over to the tender mercies of heretics. Just as true Apostles and preachers are paranymphs of Christ and His Church (S. John. iii. 29), so, on the other hand, false preachers are Satan’s panders.

 

          This passage of the espousal of the Church and each faithful soul is famous and full of consolation. It has been commented on beautifully by most of the Fathers, and still is frequently treated in pulpits and elsewhere. That it may be clearly and fully understood, let us then dwell on it a little more at length.

 

          Observe, then, firstly, that this espousal takes place by faith and hope and other virtues. For, as S. Augustine says (Tract. xiii. in Johan.), “the mind’s virginity consists in perfect faith, well-grounded hope, and unfeigned love.” On the other hand, the soul becomes an adulteress or prostitute when she consents to unbelief, to sin, to the suggestions and wiles of the devil. “If, therefore,” says Origen (Hom. 12 in Lev. ii.), “you have admitted an adulterous devil into the chamber of your soul, then your soul has committed fornication with the devil. If there has entered there the spirit of anger, envy, pride, uncleanness, and you have welcomed in and listened to its words, and taken pleasure in its suggestions, then you have committed fornication with him.”

 

          Secondly, this betrothal makes the goods of each common to both, and therefore endows the Church and each faithful soul with the abundant riches of Christ. Hence, since the Bridegroom is a King, He makes His bride, even if she be a slave, however lowly and poor she be, a queen. S. Basil (de Vita Virgin.) says, quoting Ps. xlv. “Upon thy right hand did stand the queen, in a vesture of gold wrought about with divers colours. Wherefore, she who now is counted vile for her sordid dress and servile habit, is ennobled by her station at the King’s hand, and found in the kingdom of heaven to be a queen. Let her, then, despise all visible things, and with open face beholding her Spouse, let her be filled with His love, and make all her faculties His handmaidens. In no respect should a virgin be an adulteress, not in tongue, in ears, eyes, or any other sense, no, nor yet in thought; but let her keep her body as a temple, or bride-chamber ready for her Spouse. No unfaithfulness can escape the eye of Him of whom it is said, ‘He that planted the ear, shall He not hear; or He that made the eye, shall He not see.”

 

          S. Bernard (Serm. 2, Domin. 1, post Epiph.) thus describes the election, dignity, and glory of this bride: “For the sake of that Ethiopian woman, the Son of God came from afar to espouse her to Himself. Moses, indeed, married an Ethiopian wife, but her colour he could not change; but Christ, loving the Church, who till then was contemptible and foul, presented her to Himself, not having spot or wrinkle, or any such thing. Whence, 0 human soul, whence comes this to thee? Whence is the inestimable glory of meriting to be His spouse on whom the angels desire to gaze? Whence is it to thee that thou art the spouse of Him, whose beauty sun and moon wonder at, at whose will all things are changed? . . . What reward, then, will you give unto the Lord for all the benefits that He hath done unto you, in making you a sharer of His table, of His Kingdom, of His chamber? See with what arms of love should He be in turn lovingly embraced, who has thought so much of you, and made you so great. Leave all carnal affections, forget all worldly ways, undo all evil habits. For what thinkest thou? Does not the angel of the Lord stand ready to cut thee asunder, if perchance, which may He prevent, thou admittest any other lover?” Then he goes on to describe the nuptial feast: “Now thou art espoused to Him, now the wedding feast is being celebrated, for the banquet is prepared in heaven. There the wine will not fail for we shall be inebriated with the fulness of the house of Gad, and shall drink of the torrent of His pleasure. For that marriage, truly, there is got ready a river of wine, which maketh glad the heart, an impetuous stream, which maketh glad the city of God.”

 

          Thirdly, be it observed that from this betrothal and union of the soul to God, the fairest offspring are born. Origen (Hom. 20 in Num. xxv.) thus Describes them. “When the soul, therefore, clings to her Spouse, and listens to His voice, and embraces Him, she doubtless receives from Him seed, even as He said: ‘Of Thy fear, 0 Lord, have I conceived in the womb, and brought forth, and caused on the earth the spirits of Thy salvation.’ Thence will proceed a noble offspring—thence will be born chastity, righteousness, patience, meekness, and charity, and a fair family of all the virtues. . . . But if the unhappy soul forsakes the chaste embraces of the Divine Word, and surrenders herself to the devil’s adulterous endearments, without a doubt she will bring forth children, but they will be such as those of whom it is written: ‘The adulterous children shall be imperfect, and the seed of the wicked bed shall be destroyed.’ All sins, therefore, are children of adultery and fornication.”

 

          Fourthly, although this espousal is brought about by any virtues, yet the chief agent among them is charity. Charity carries with it towards God all the powers and affections of the soul, so much so that the more charity increases in a soul, the more closely is that soul united to God. Hence those whose souls are on fire with charity, and who are ever exercising themselves in it, enjoy the bliss of betrothal to God and the possession of His nuptial gifts of Divine joys. For charity is a marriage-union, the welding of two wills, the Divine and human, into one, whereby God and man mutually agree in all things. Hence springs familiar intercourse between the soul and God, hence spring peace and a wondrous delight of the soul. So great becomes the thirst for the Divine love that all other affections of the soul are absorbed in it and lost in God. S. Bernard (Serm. 38 Cantic.) says: “Such conformity weds the soul to the Word, that, though naturally like Him, she none the less exhibits that likeness in the will, by loving as she has been loved. If, then, she loves perfectly, she is wedded to Him. What is more pleasant than this conformity? what more to be longed for than this charity? By it it comes to pass that you are not content, 0 my soul, to rest on human teaching, but you boldly approach the Word, and cling closely to Him, hang lovingly on His lips, and consult Him on everything. You are as bold in your longings will allow. Surely this is a holy and spiritual wedding contract. Contract, do I say?—nay, it is an embrace; for where the same will to have or not have is, where one spirit is made out of two, there there must have been an embrace. Nor need we fear that the disparity of the persons can make this union of wills imperfect, for love knows no fear. Love is self-sufficient: wherever he comes he draws to himself and makes prisoners all the other affections. Therefore she loves what he loves, and knows nought else. There is a bride and there is a bridegroom. What other relation or connection do you seek between them that are wedded than that of loving and being loved?”

 

          If you say that the soul is so far inferior to God in its nature and love as to make it impossible for friendship to exist between them, and much less betrothal and marriage union, all of which can only be between equals, then S. Bernard replies: “It is true that there is not the same copious flow in the soul that Loves as in Love Himself, in the soul as in the Word, and in the bride as in the Bridegroom, in the creature as in the Creator, ably more than there is the same in him that is athirst and the spring that quenches his thirst. But what of that? Are we therefore to lose and see destroyed utterly the devotion of her that is about to wed, the desire of the longing soul—the eagerness of the lover, the confidence of one that boldly draws near—just because a dwarf cannot run on equal terms with a giant, because sweetness cannot rival honey, gentleness cannot compare with a lamb, whiteness with the lily, brightness with the sun, charity with Him who is charity? No, for though the creature’s love is less because it is itself less, yet if it loves with all its might, it withholds nothing, and its love is entire. Therefore have I said, ‘So to love is to be wedded already,’ unless any one doubt that the soul is first loved and more loved by the Word. But truly He prevents and surpasses the soul in love. Happy the soul that has merited to be prevented with the blessings of goodness.”

 

          Fifthly, it follows that this espousal is most perfectly brought about by virginity and vows of chastity and religion.  S. Augustine (Tract. 9 in Johan.) says: “They who vow to God virginity, although they may hold a higher position of honour and dignity in the Church, yet are they not without nuptials; for they belong to those nuptials in which the whole Church is united to Christ as her Bridegroom.” And the reason is, that as a bride gives her heart and all her goods to her husband, so does a virgin, or a religious, consecrate herself and all that she has to Christ. Hence religion is called and is a state of perfection, or of perfect charity. Moreover, as a bride in contracting matrimony says. “I take thee for mine,” so does a religious say: “I vow to God poverty, chastity, obedience,” and by these she is bound to Christ as a wife to her husband. Hence Tertullian (de Veland. Virgin. c. 16) says: “Thou hast been wedded to Christ, thou hast committed to Him thy body; thou hast betrothed to Him the bloom of thy life; walk, therefore, according to the will ,of thy Spouse.” For this reason S. Jerome (Ep. 27) dared to call the mother of a virgin consecrated to God, “God’s mother-in-law,” and for this he was found fault with hypercritically by Ruffinus. A ring used to be given to virgins, in token that by it they were betrothed to Christ. “He gave me a ring,” says S. Agnes (Ambrose, Serm. 90), “as an earnest of my betrothal to His faith.” For this virgins were given veils, even as those who are married to husbands, and that solemnly, by priests, on appointed days alone, as Gelasius says (ad Episc. Lucaniæ, c. 14), and Optatus Milevit. (lib. 6). He says: “Spiritual wedlock is of this kind. In will and profession they had already come to be betrothed to their spouse; and to show that they had abjured all secular nuptials, they had cut off their hair for their spiritual Bridegroom, and had already celebrated their heavenly nuptials.” Ambrose (ad Virg. Lapsam) says: “She who has betrothed herself to Christ, and received the sacred veil, is already wedded, is already united to an immortal husband; and if she now wishes to marry under the common law, she commits adultery, and is made the handmaiden of death.” S. Cyprian too (Ep. 62) calls such lapsed virgins adulteresses. From all this it is evident, whatever Marloratus may say, that the Church applies this passage of the Apostle to virgins, and reads it as the Epistle in the Mass of Holy Virgins.

 

          Let these virgins ponder this, and recognise their dignity, so as to religiously keep these nuptials pure, and give themselves wholly to their one Bridegroom, Christ.  S. Jerome says to Eustochius: “Hear, 0 daughter, and consider, and incline thine ear; forget also thine own people and thy father’s house, and then shall the King take pleasure in thy beauty. It is not enough for thee to leave thy land, unless thou also forget thy own peop1e and thy father’s house, and, despising the flesh, yield thyself to the embraces of thy spouse. You will say perhaps: ‘I have come from the house of my shame; I have forgotten the house of my father; I am born again in Christ. What reward for this am I to receive?’ It tells you: ‘So shall the King have pleasure in thy beauty.’ This then is a great sacrament: there-fore shall a man leave his father and mother, and shall cling to his wife, and they twain shall be not one flesh but one spirit. Thy Spouse is not haughty; He has married an Ethiopian woman. As soon as you desire to hear the wisdom of the true Solomon and come to Him, He will tell you all that He knows; He will as a King lead you into His chamber, and thy colour being wondrously changed, the words will apply to you, ‘Who is this that cometh up all white?’ . . . The bride of Christ is, like the Ark of the Covenant, covered within and without with gold, the guardian of the law of the Lord. As in it there was nothing save the tables of the law, so in thee let there be no other thought. Over this mercy-seat, as upon the cherubim, the Lord wills to sit. The Lord wishes to set you free from earthly cares, that leaving the bricks and straw of Egypt, you may follow Moses in the wilderness and enter the Promised Land. Whenever in your virgin breast there rages anxiety about earthly business, immediately the veil of the temple is rent in twain, your Bridegroom rises in wrath and says: ‘Your house is left unto you desolate’ . . . Do thou once for all cast aside every burden of the world, sit at the feet of thy Lord, and say: ‘I have found Him in whom my soul delighteth; I have held Him fast; I will not let Him go.’ He will answer: ‘My dove, any undefiled, is but one.’ Let the secret places of thy chamber ever keep thee, let thy Spouse ever play with thee within. When thou prayest thou speakest to thy Spouse. When thou readest He speaks to thee; and when sleep oppresses thee, He will come behind the wall; and when thou art awakened thou wilt say: ‘I am sick with love,’ and in return thou wilt hear Him say: ‘A garden enclosed is My sister, My spouse.’”

 

          That I may present you as a chaste virgin to Christ. There is something strange in such a marriage. “In the world,” says Theophylact after Chrysostom, “brides do not remain virgins after marriage. But Christ’s brides, as before marriage they were not virgins, so after marriage they become virgins most pure in faith, whole, and uncorrupt in life. So is the whole Church a virgin.” “The virginity of the flesh,” says S. Augustine (in Senten. 79), “is an undefiled body; the virginity of the soul is uncorrupted faith.”

 

          S. Paul converted to Christ at Iconium that most illustrious virgin Thecla: he drew her from marriage and espoused her to Christ.  S. Gregory of Nyssa is our authority for this. He says (Hom. 4 in Cantic.): “Such myrrh did Paul once pour from his mouth, mingled with the pure lily of chastity, into the ears of a holy virgin. That virgin was Thecla, who, as the drops fell from the lily into her soul, to her salvation put to death the outward man and quenched the heat of lust within.” S. Epiphanius too (Hæres. 78) says: “Thecla fell in with S. Paul, and was by him set free from wedlock, though she had a husband at once surpassingly handsome, rich, nobly-born, and famous.” S. Augustine (contra Faustum, lib. xxx. c. 4) says: “This Saint in her lifetime despised all earthly things, that she might gain possession of things heavenly, and, though bound in wedlock, she was kindled by the eloquence of S. Paul with love of life-long virginity.” Through this Thecla overcame fire, lions, bulls, and serpents, and when thrown for her virginity into the midst of flames, she, like asbestos, remained unharmed. So did S. Paul arm the harlot Poppæa and virgins against the blandishments of Nero, to despise his embraces and dedicate themselves to Christ. For this he was condemned by Nero to the sword, and obtained the martyr’s and virgin’s crown, and therefore from his neck there flowed, when his head was cut off, a stream of white milk instead of red blood.

(이상, 발췌 끝)

 

7-4. 성 토마스 아퀴나스(St. Thomas Aquinas, 1225-1274년)2코린토 11,2에 대한 해설은 다음에 있습니다. 라틴어 원문과 영어 번역문이 제시되고 있으며, 특히 "jealousy(시기)" 라는 용어의 자구적 어의/의미(literal sense)에 대하여 자세하게 설명하고 있는 제375항을 잘 읽어 보시기 바랍니다:

http://dhspriory.org/thomas/SS2Cor.htm#111

 

게시자 주 7-4:

(1) 바로 위의 주소의 제375항에 주어진 설명에 의하면, "jealousy"는 크게, "[윤리적으로] 선한 시기(good jealousy)" (예를 들어,탈출 20,5; 1코린도 13,4;  2코린토 11,2 등) "[윤리적으로] 악한/나쁜 시기(evil/bad jealousy)" (예를 들어, 로마 1,29; 13,13; 갈라티아 5,20 등), 이렇게 둘로 구분됨을 알 수 있습니다. 

 

(2) 아무튼, 일단 위의 제5-3항에 주어진 "시기(jealousy)" "질투(envy)"의 가톨릭 그리스도교 전통적 정의(definition)를 제대로 이해하고 또 받아들인 분들은, 바로 위의 제7항에서 안내해 드리는 대단히 유익한 주석/해설들을 읽고 이해하는 데에 별 문제가 없을 것임에 대하여, 많이 부족한 죄인인 필자는 확신합니다.

 

질문 7: 2코린토 11,2에서 만약에 바오로가 질투한다면, 그가 도대체 누구를 칠투한다는 것인지요? 하느님??? 아니면 이 서간문의 수신자들인 코린토 지역의 그리스도교 신자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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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 자료들:

http://ch.catholic.or.kr/pundang/4/navarre/ot_11_thu.htm

http://www.vatican.va/archive/ENG0839/1/Y9.HTM

http://biblehub.com/greek/2206.ht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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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교수 소순태 마태오 (Ph.D.)

작성에 소요된 시간: 약36시간 (자료 조사 및 분석 포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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