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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의 눈물 - 요한 11,35 #<가사순5주일복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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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03-04 ㅣ No.1527

 

(십자성호를 그으며)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질문:

예비 신자 교리공부중 요한 복음 11장 35절에 '예수님이 눈물을 흘리셨다'고 

되어있습니다. 

요한복음 11장4절에 따르면 예수님은 라자로의 죽음으로 예수님이 영광스럽게

될 것임을 미리 아셨고, 라자로를 죽음으로 부터 소생시키시는 것을 미리 아셨는데

눈물을 흘리셨다고 하니 이부분은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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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부의 말씀:


많이 부족한 죄인인 필자의 글들은 어떤 특정인의 감정을 자극하기 위하여 마련된 글들이 결코 아니기에, 다음의 당부의 말씀을 드립니다:

(1) 지금까지 필자의 글들을 읽고서 필자에 대한 "분노(anger)" 혹은 "질투(envy)"를 가지게 된 분들은, 혹시라도 그분들께 "걸림돌(stumbling block)"일 수도 있는, 많이 부족한 죄인의 글들을 더 이상 읽지 마시기 바랍니다. 꼭 부탁드립니다.

(2) 그리고 위의 제(1)항의 당부의 말씀을 읽고도 굳이 이 화면의 아래로 스스로 이동하여, 많이 부족한 죄인의 아래의 본글을 읽는 분들은, 필자에 대한 "분노(anger)"와 "질투(envy)" 둘 다를 가지지 않을 것임에 동의함을 필자와 다른 분들께 이미 밝힌 것으로 이해하겠습니다.

(3) 그리 길지 않은 인생 여정에 있어, 누구에게나, 결국에, "유유상종[類類相從, 같은 무리끼리 서로 사귐 (출처: 표준국어대사전)]"이 유의미할 것이라는 생각에 드리는 당부의 말씀입니다.

 

답변:

+ 찬미 예수님!

 

1. 들어가면서

주신 질문에서 언급되고 있는 배경은, 가톨릭 교회의 전례력에 있어, 가해 사순 제5주일 복음 말씀(요한 11,1-45)에 포함됩니다. 그러므로, 주신 질문에 대한 이해를 위한 최소한도의 문맥은 요한 복음서 11,1-45이니, 이 부분을 차분히 여러 번 읽도록 하십시오:

 

출처: http://bible.cbck.or.kr/bible_read.asp?p_code=&GS=S&Bible=50&Jang=11&x=16&y=11

(발췌 시작)

라자로가 죽다
1 어떤 이가 병을 앓고 있었는데, 그는 마리아와 그 언니 마르타가 사는 베타니아 마을의 라자로였다.
2 마리아는 주님께 향유를 붓고 자기 머리카락으로 그분의 발을 닦아 드린 여자인데, 그의 오빠 라자로가 병을 앓고 있었던 것이다.
3 그리하여 그 자매가 예수님께 사람을 보내어, “주님, 주님께서 사랑하시는 이가 병을 앓고 있습니다.” 하고 말하였다.
4 예수님께서 그 말을 듣고 이르셨다. “그 병은 죽을 병이 아니라 오히려 하느님의 영광을 위한 것이다. 그 병으로 말미암아 하느님의 아들이 영광스럽게 될 것이다.”
5 예수님께서는 마르타와 그 여동생과 라자로를 사랑하셨다.
6 그러나 라자로가 병을 앓고 있다는 말을 들으시고도, 계시던 곳에 이틀을 더 머무르셨다.
7 예수님께서는 그런 뒤에야 제자들에게, “다시 유다로 가자.” 하고 말씀하셨다.
8 제자들이 예수님께, “스승님, 바로 얼마 전에 유다인들이 스승님께 돌을 던지려고 하였는데, 다시 그리로 가시렵니까?” 하자,
9 예수님께서 대답하셨다. “낮은 열두 시간이나 되지 않느냐? 사람이 낮에 걸어 다니면 이 세상의 빛을 보므로 어디에 걸려 넘어지지 않는다.
10 그러나 밤에 걸어 다니면 그 사람 안에 빛이 없으므로 걸려 넘어진다.”
11 이렇게 말씀하신 다음에 이어서, “우리의 친구 라자로가 잠들었다. 내가 가서 그를 깨우겠다.” 하고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12 그러자 제자들이 예수님께, “주님, 그가 잠들었다면 곧 일어나겠지요.” 하였다.
13 예수님께서는 라자로가 죽었다고 하셨는데, 제자들은 그냥 잠을 잔다고 말씀하시는 것으로 생각하였다.
14 그제야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분명히 이르셨다. “라자로는 죽었다.
15 내가 거기에 없었으므로 너희가 믿게 될 터이니, 나는 너희 때문에 기쁘다. 이제 라자로에게 가자.”
16 그러자 ‘쌍둥이’라고 불리는 토마스가 동료 제자들에게, “우리도 스승님과 함께 죽으러 갑시다.” 하고 말하였다.
부활이며 생명이신 예수님
17 예수님께서 가서 보시니, 라자로가 무덤에 묻힌 지 벌써 나흘이나 지나 있었다.
18 베타니아는 예루살렘에서 열다섯 스타디온쯤 되는 가까운 곳이어서,
19 많은 유다인이 마르타와 마리아를 그 오빠 일 때문에 위로하러 와 있었다.
20 마르타는 예수님께서 오신다는 말을 듣고 그분을 맞으러 나가고, 마리아는 그냥 집에 앉아 있었다.
21 마르타가 예수님께 말하였다. “주님, 주님께서 여기에 계셨더라면 제 오빠가 죽지 않았을 것입니다.
22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주님께서 청하시는 것은 무엇이나 들어주신다는 것을 저는 지금도 알고 있습니다.”
23 예수님께서 마르타에게, “네 오빠는 다시 살아날 것이다.” 하시니,
24 마르타가 “마지막 날 부활 때에 오빠도 다시 살아나리라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하였다.
25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에게 이르셨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다. 나를 믿는 사람은 죽더라도 살고,
26 또 살아서 나를 믿는 모든 사람은 영원히 죽지 않을 것이다. 너는 이것을 믿느냐?”
27 마르타가 대답하였다. “예, 주님! 저는 주님께서 이 세상에 오시기로 되어 있는 메시아시며 하느님의 아드님이심을 믿습니다.”
눈물을 흘리시다
28 이렇게 말하고 나서 마르타는 돌아가 자기 동생 마리아를 불러, “스승님께서 오셨는데 너를 부르신다.” 하고 가만히 말하였다.
29 마리아는 이 말을 듣고 얼른 일어나 예수님께 갔다.
30 예수님께서는 마을로 들어가지 않으시고, 마르타가 당신을 맞으러 나왔던 곳에 그냥 계셨다.
31 마리아와 함께 집에 있으면서 그를 위로하던 유다인들은, 마리아가 급히 일어나 나가는 것을 보고 그를 따라갔다. 무덤에 가서 울려는 줄 알았던 것이다.
32 마리아는 예수님께서 계신 곳으로 가서 그분을 뵙고 그 발 앞에 엎드려, “주님, 주님께서 여기에 계셨더라면 제 오빠가 죽지 않았을 것입니다.” 하고 말하였다.
33 마리아도 울고 또 그와 함께 온 유다인들도 우는 것을 보신 예수님께서는 마음이 북받치고 산란해지셨다.
34 예수님께서 “그를 어디에 묻었느냐?” 하고 물으시니, 그들이 “주님, 와서 보십시오.” 하고 대답하였다.
35 예수님께서는 눈물을 흘리셨다.
36 그러자 유다인들이 “보시오, 저분이 라자로를 얼마나 사랑하셨는지!” 하고 말하였다.
37 그러나 그들 가운데 몇몇은, “눈먼 사람의 눈을 뜨게 해 주신 저분이 이 사람을 죽지 않게 해 주실 수는 없었는가?” 하였다.
라자로를 다시 살리시다
38 예수님께서는 다시 속이 북받치시어 무덤으로 가셨다. 무덤은 동굴인데 그 입구에 돌이 놓여 있었다.
39 예수님께서 “돌을 치워라.” 하시니, 죽은 사람의 누이 마르타가 “주님, 죽은 지 나흘이나 되어 벌써 냄새가 납니다.” 하였다.
40 예수님께서 마르타에게 말씀하셨다. “네가 믿으면 하느님의 영광을 보리라고 내가 말하지 않았느냐?”
41 그러자 사람들이 돌을 치웠다. 예수님께서는 하늘을 우러러보시며 말씀하셨다. “아버지, 제 말씀을 들어 주셨으니 아버지께 감사드립니다.
42 아버지께서 언제나 제 말씀을 들어 주신다는 것을 저는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렇게 말씀드린 것은, 여기 둘러선 군중이 아버지께서 저를 보내셨다는 것을 믿게 하려는 것입니다.”
43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시고 나서 큰 소리로 외치셨다. “라자로야, 이리 나와라.”
44

그러자 죽었던 이가 손과 발은 천으로 감기고 얼굴은 수건으로 감싸인 채 나왔다. 예수님께서 사람들에게, “그를 풀어 주어 걸어가게 하여라.” 하고 말씀하셨다.

 

최고 의회가 예수님을 죽이기로 결의하다(마태 26,1-5; 마르 14,1-2; 루카 22,1-2)
45 마리아에게 갔다가 예수님께서 하신 일을 본 유다인들 가운데에서 많은 사람이 예수님을 믿게 되었다.

 

 (이상, 발췌 끝)

 

2.

2-1. 라자로를 죽음으로 부터 소생시키시는 것을 미리 아셨는데, 왜 눈물을 흘리셨는가? 라고 질문하셨는데, 라자로의 죽음과 관련하여, 예수님께서 눈믈을 흘리셨다는 요한 복음서 11,35에 바로 이어지는 절인 요한 복음서 11,36에서, 예수님께서 라자로를 많이 사랑하셨다는 대단히 구체적인 언급이 주어지고 있습니다. 

 

2-2. 그런데 요한 복음서 11,1-45에 기록된 예수님의 기적은 공관 복음서들에 기록되어 있지 않으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어지는 요한 복음서 11,46-57에 기록되어 있듯이, 라자로를 소생시킨 예수님의 기적은, 결국에 유다인들의 최고 의회가 예수님을 죽이기로 결의하게 되는 원인을 제공하였던 것입니다.

 

2-3. 그러므로, 주신 질문은 결국에

(i) 평소에 예수님과 라자로와의 관계가 어떠하였는지로 귀착될 것입니다. 그리고, 더 나아가, 

(ii) 예수님께서 단지 라자로를 많이 사랑하셨기 때문에 눈물을 흘리셨던 것인지, 아니면 이것뿐만이 아니라, 당신의 사명과 관련된 신학적으로 더 심오한 이유 때문에 눈물을 흘리셨는지를 고찰하여야 할 것입니다.

 

2-4. 다음은 요한 복음서 11,4와 이 절에 대한 "주석 성경" 의 주석 전문입니다:

(발췌 시작)
"그 병은 죽을 병이 아니라 오히려 하느님의 영광을 위한 것이다. 그 병으로 말미암아 하느님의 아들이 영광스럽게 될 것이다." 5)

 

-----

5) 라자로의 이 위급한 병이 예수님께는 가장 명백한 표징을 일으키시는 계기가 된다. 그리하여 이 질병은, 예수님께서 당신의 것이기도 한 하느님의 영광을 드러내시는 기회도 된다. 라자로의 소생/다시 살아남(*)은 예수님께서 하느님의 아드님이시라는 사실을 나타내는 것이다(12,11 참조). 그리고 이 기적은 더 나아가서, 예수님을 죽음으로 이끄는 과정의 출발점으로서 보다 깊은 뜻을 지닌다(11,45-54). 이 죽음이야말로 예수님께서 십자가 위에서, 그리고 십자가를 통하여 영광스럽게 되시는 것이다. 이렇게 십자가를 통하여 마침내 종말의 영광이 드러나게 되면(12.16.23.28; 13,32-32; 17,1-5 참조), 예수님을 믿는 모든 이에게도 부활에 동참할 수 있는 가능성이 주어진다.

 

(*) 게시자 주: "주석 성경" 의 주석에는, "소생/다시 살아남" 대신에, "부활"이라는 표현이 사용되었으나, 그러나 "부활(resurrection)" 은, 정의(definition)에 의하여, "소생" + "부활하신 예수님처럼 지상으로 소생한 몸이 다시 죽지 않는 변화된 몸" 을 지닌 사람인 한 인격(a person)을 말하나, 그러나 소생한 라자로의 몸은, 부활하신 예수님처럼(요한 복음서 20,7-8) "다시 죽지 않는 변화된 몸"(**)이 결코 아니었므로(요한 복음서 11,44), "소생/다시 살아남"으로 필자가 교체하였다.

 

(**) 게시자 주: 다음의 주소에 있는 글을 필독하라:

http://ch.catholic.or.kr/pundang/4/soh/1042.htm <----- 필독 권고

-----

(이상, 발췌 끝)

 

3.

3-1. "주석 성경"에는 요한 복음서 11,35에 대한 주석은 없습니다.

 

3-2. 다음은 "가톨릭 교회의 말씀 전례에 따른 성경공부 해설서 가해-I" (출판사: 가톨릭출판사, 엮은이: 소순태) 사순 제5주일 복음 말씀(요한 11,1-45) 의 제35절 및 이 절에 대한 해설. 그리고 장차 제공될 주석 전문입니다:

 

(발췌 시작)

35 예수님께서는 눈물을 흘리셨다.


제35절은 성경 전체에 있어 가장 짧은 절이다. 많은 번역본들에 있어 이 절은 다음과 같이 단지 두 단어이다: "예수님께서 우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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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번역자 주: 신약 성경의 네 복음서들에는 예수님께서 눈물을 흘리셨다는 기록이 오로지 두 번 있는데, 한 번은 이 절에서이고 다른 한 번은 예루살렘의 멸망을 예고하시면서 눈물을 흘리신 때이다(루카 복음서 19,41). 그리고 히브리서 5,7에도 예수님께서 눈물을 흘리셨다는 언급이 있다.

-----
(이상, 발췌 끝)

 

3-3. 다음은 Haydock's Catholic Bible Commentary 1859에 주어진 요한 복음서 11,35에 대한 주석 전문입니다:

 

출처: http://haydock1859.tripod.com/id104.html

(발췌 시작)

Ver. 35. Jesus wept. A mark of his human nature, when he was going to give them a proof of his divinity, in raising the dead to life. (Witham) --- The tears of the disconsolate sisters called forth tears from the tender commiseration of Jesus. Nor was it unworthy the Son of God to shed tears. See Luke xix. 41. About to give proofs of his divinity in raising the dead, he is pleased to give, first, undoubted proofs of his humanity, that he might shew himself both God and man.

 

제35절. 예수님께서 눈물을 흘리셨다. 죽은 이를 생명으로 소생시킴으로써, 당신께서 그들에게 당신의 신성에 대한 한 개의 증거를 제시하셨을 때에, 당신의 인성에 대한 한 개의 표지(a mark)입니다. (Witham). --- 몹시 슬퍼하는 자매들의 눈물들이 예수님의 부드러운 연민으로부터 눈물들을 야기시켰습니다. 그리고 하느님의 아드님(성자, the Son of God)께서 눈물을 흘리시는 것은 가치롭지 못한 것이 아닙니다. 루카 복음서 19,41을 보십시오. 죽은 이를 소생시킴으로써 당신의 신성에 대한 증거들을 제시하고자 하실 때에, 당신께서는, 당신 자신이 하느님이시고 사람 둘 다이심을 보이기 위하여, 우선적으로, 당신의 인성에 대한 의심할 여지없는 증거들을 기꺼이 제공하고자 하십니다.

(이상, 발췌 및 우리말 번역 끝)

 

3-4. 그리고, 가톨릭 교회의 전례력에 있어, 가해 사순 제5주일 복음 말씀(요한 11,1-45)에 대한 나바르 성경 주석서의 해설은 다음에 있습니다. 원 질문자의 질문에 대한 답변포함하는, 대단히 잘 요약된 해설입니다:

 

http://ch.catholic.or.kr/pundang/4/navarre/a_lent_5.htm <----- 필독 권고

 

3-5. 더 나아가, 다음은 The Great Biblical Commentary of Cornelius a Lapide에 주어진 요한 복음서 11,35에 대한 주석 전문입니다. 영어가 가능한 분들께서는 또한 참고하십시오:

 

출처: http://www.corneliusbiblecommentary.faithweb.com/11john.htm

(발췌 시작)

Ver. 35. Jesus wept. At seeing the sepulchre of Lazarus (although Chrysostom supposes that He wept when He groaned and was troubled, which is equally probable), to signify His love for him, and the grief He felt at his death.

 

Secondly, that He might weep with the sisters and the Jews who were weeping, and teach us to do the same. So S. Augustine. Hear S. Ambrose: “Christ became all things to all men; poor to the poor, rich to the rich, weeping with the weeping, hungering with the hungry, thirsting with the thirsty, full with the abounding; He is in prison with the poor man, with Mary He weeps, with the Apostles He eats, with the Samaritan woman he thirsts.

 

Thirdly, that adding tears to His speech, He might make it stronger and more efficacious; for tears are a sign of vehement grief and affliction, and also of desire and longing: wherefore God is accustomed to hear and answer prayers seasoned, and as it were armed, with tears. So Christ on the [eve of the] Cross offering up prayers and supplications with strong crying and tears, was heard in that He feared. [E. & Heb. V. 7, pro suâ reverentiâ, Vulg.] So Tobit (xii. 12) heard from S. Raphael, “When thou didst pray with tears [the words “with tears,” cum lacrymis, are not in the LXX Greek], and didst bring the dead, . . . I brought thy prayer before the Lord.” So Jacob, wrestling with the angel, obtained a blessing (Gen. xxxii. 29). Wherefore? because he wept and besought him (Hosea xii. 4). “The tears of penitents,” says S. Bernard, “are the wine of angels.” For it is the anguish of the mind in prayer which influences, and as it were compels God to pity, according as it is said, “a contrite and humble heart God shall not despise” (Ps. li. 17); just as the tears of an infant influence the mother, and obtain from her what it asks; for God shows toward us the heart of a mother.

 

Other writers give different causes for the tears of Christ. First, Cyril says that Christ wept for the miseries of the human race brought in by sin. Secondly, Andrew Cretensis says that He wept for the unbelief of the Jews, and because they would not believe in Christ, even after they had seen the miracle of the raising of Lazarus. Thirdly, Isidore of Pelusium and Rupertus think that Christ wept for the very reason that he was about to recall Lazarus out of Limbo, that is, from the haven and state of peace, to the storms, dangers, and sufferings of this life.

 

Further, we read that Christ wept thrice: here at the death of Lazarus; at the Cross (Heb. v. 7); at the sight of Jerusalem, and its impending ruin (Luke xix. 41). S. Bernard (Sermon 3, in Die Nativ.) says, “The tears of Christ cause me shame and grief. . . . Can I still trifle, and deride His tears?” And soon after: The Son of God sympathises (compatitur), and He weeps; man suffers (patitur), and shall we laugh?” And S. Augustine says: “Christ wept—let man weep for himself: wherefore did Christ weep, unless to teach man to weep? Wherefore did He groan and trouble Himself, except that the faith of man, rightly displeased with himself, should in a manner groan in accusation of his evil works, so that the habit of sinning should yield to the violence of repenting.”

(이상, 발췌 끝) 

 

3-6. 다음은, 성 토마스 아퀴나스(St. Thomas Aquinas)에 의하여 편집된,  Catena Aurea에 주어진 요한 복음서 11,35에 대한 가툘릭 교회의 교부들 및 주석자들의 주석들입니다:

 

출처: http://dhspriory.org/thomas/english/CAJohn.htm#11

(발췌 시작)

Jesus wept. ALCUIN. Because He was the fountain of pity. He wept in His human nature for him whom He was able to raise again by His divine. AUG. Wherefore did Christ weep, but to teach men to weep? BEDE. It is customary to mourn over the death of friends; and thus the Jews explained our Lord’s weeping: Then said the Jews, Behold how He loved him. AUG. Loved him. Our Lord came not to call the righteous but sinners to repentance. And some of them said, Could not this Man which opened the eyes of the blind, have caused that even this man should not have died? He was about to do more than this, to raise him from death. CHRYS. It was His enemies who said this. The very works, which should have evidenced His power, they turn against Him, as if He had not really done them. This is the way that they speak of the miracle of opening the eyes of the man that was born blind. They even prejudge Christ before He has come to the grave, and have not the patience to wait for the issue of the matter. Jesus therefore again groaning in Himself, comes to the grave. That He wept, and He groaned, are mentioned to show us the reality of His human nature. John who enters into higher statements as to His nature than any of the other Evangelists, also descends lower than any in describing His bodily affections. AUG. And do you too groan in yourself, if you would rise to new life. To every man is this said, who is weighed down by any vicious habit. It was a cave, and a stone lay upon it. The dead under the stone is the guilty under the Law. For the Law, which was as given to the Jews, was as graven on stone. And all the guilty are under the Law, for the Law was not made for a righteous man. BEDE. A cave is a hollow in a rock. It is called a monument, because it reminds us of the dead.

(이상, 발췌 끝)

 

4.

4-1. 끝으로, 다음의 주소에 접속하면, 요한 복음서 제11장의 절들을 인용하고 있는, 가톨릭 교회 교리서(CCC)의 항들을 파악할 수 있습니다. 예비 신자이신 원 질문자의 교리 학습에 도움이 되었으면 하여, 또한 추가로 안내해 드립니다:

http://www.albummania.co.kr/gallery/view.asp?seq=157803&path=110610121307&page=10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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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교수 소순태 마태오 (Ph.D.)

작업에 소요된 시간: 약4시간 (우리말 번역 포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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