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회성당 자유게시판

부부의 비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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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윤 [novita] 쪽지 캡슐

2001-03-23 ㅣ No.1826

   부부의 비밀

 

 비밀이 전혀 없어야 할 부부관계라 할지라도

 가정의 평화를 위해서는 때로

 고해성사를 지켜주는 신부처럼 엄격한 비밀을

 간직해야 할 경우가 있을 것이다.

 

 흔히 논란이 되고 있는 대로

 결혼 전의 이야기를 남편에게 고백하는 것이

 과연 윤리적이냐,

 아니면 비밀을 간직해야 하는 것이

 애꿎은 남편을 위해서도 좋은 일이냐 하는

 문제에서부터 아주 하찮은 것까지도

 어쩌면 아내는 남편에게 남편은 아내에게

 숨겨야 할 비밀이 우리도 많이 있을지도 모른다.

 

 일테면 고등학교 시절의 성적표,

 감쪽같이 성형수술하여 웬만한 남자들은

 주의 깊게 보아도 모르는 쌍꺼풀 수술,

 남편의 비상금 은신처,

 어쩌다 들르는 회사 근처의 술집 마담의 전화번호

 등등,

 평생을 함께 살 부부라 할지라도

 꼭꼭 숨어라 머리카락 보일라 식의

 지켜야 할 비밀은 우리도 많이 있다.

 

 그래서 이런 말이 있잖은가.

 여인은 무서운 동물이어서

 백년해로할 때까지 마음만 먹으면

 자신의 이빨이 틀니라는 사실을

 영원히 숨길 수 있다는 말이 있잖은가.

 

 아무래도 입이 가벼운 쪽이 남자보다

 여자 쪽이라지만

 비밀을 지키는 데에는 남자보다 여자가

 더 신용이 있다.

 

 나 역시 예외는 아니어서

 삼 년 전 아내가 나 몰래 산 값비싼 코트의 존재를

 지난 겨울에야 겨우 발견했는데

 나는 아내가 값비싼 물건을 산다고 투정하는 버릇이

 없는데도 삼 년을 숨겼으니

 그 인내에 경탄하기 앞서

 저런 하찮은 코트를 내게 숨기고 있는 그 천연덕스런

 음흉성을 본다면

 어쩌면 아내는 더 무시무시한 비밀을 숨기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의처증의 발작이 시작되는 것이다.

 

 아내는 새로 산 코트를 숨기기 위해서

 처제네 집에 맡겨두고  살짝 외출할 때만 입고

 나갔다가 돌아올 때는 또다시 전당포에 옷 맡기듯

 처제네 옷장에 걸어두고 오고 갔다는데

 

 그렇다면 아내는 어쩌면 시장이라도 가는 척

 장바구니를 들고 나갔다가 인근 영동 카바레에서

 꽃집 주인과 부루스 한번 추고

 꽁치 한 마리 달랑 사들고 돌아올지도 모른다.

 

 결혼 초기에 나는 간혹 이런 짓들을 하곤 했었다.

 "당신 나하고 사귀기 전에 연애 건 얘기 좀 해봐."

 

 나는 마치 이해심 많은 신부처럼 무엇이든 다

 용서해 주겠다는 미소를 띄우며 은근히 유혹해 보건

 했었지만 막상 내 마음은 아내가 진짜 내 유혹에

 넘어가 술술 매력 있는 유부남과의 연애를 털어놓을까

 불안초초 했었다.

 

"미쳤어요. 당신, 이제 보니 의처증 환잔가 봐."

 

 글 때마다 아내는 눈을 하얗게 흘기며

 일언지하에 이 질문을 묵살해버리곤 했는데

 우선 기분은 유쾌하였지만

 요즘 세상에 여자가 병신 아닌 바에야

 외간 남자에게 손목 한번 안 잡히고

 나한테 직구(直球)로 달려왔다는 것은

 도저히 이가 맞지 않는 얘기라 나는 은근히 묻곤 했다.

 

 "그야 물론 당신이야 숫처녀인 줄 내가 알고 있지만

 그래도 어디 요새 세상에 갑옷 입구 나선 여인이

 어디 있겠어.

 괜찮아. 용서하겠다니까 그러네.

 당신 내 성격 알지 않아. 자 불라구. 불어보라구."

 

 나는 마치 노련한 수사관이 소매치기 구슬리듯

 슬슬 유도해 보았지만

 아내는 아니꼽고 더럽고 메스껍고 치사하고 유치하게

 시치미(?) 떼는 것이었다.

 

 그런데 한 달 전 쯤엔가

 아내는 묻지도 않은 과거(?)를 자기 스스로 털어놓는

 사건이 벌어지고 말았다.

 

 아침에 머리를 빗다 말고 빠진 머리칼을 쓸어모으며

 아내는 이렇게 말했다.

 

 "머리가 자꾸 빠져요. 이러다간 대머리가 될지도 몰라요."

 

 그날 밤 아내는 문득 내게 이렇게 물어왔다.

 

 "여보, 요즈음엔 간혹 지난 학창시절이 생각나요.

 그땐 내가 얼마나 날렸는 줄 아세요.

 집에 갈 때면 으레 남자 하나쯤은 꼭꼭 따라오곤

 했었다니까요."

 

 나는 이 여편네가 나 없는 새 술이라도 퍼먹었는가,

 아니면 저녁밥이 체했는가 유심히 보았는데

 그 얼굴엔 아주 야릇한 비애가 달짝지근하게

 가라앉아 있었다.

 

"십년도 훨씬 넘었잖아요.

 그때 내 나이 스물, 스물 하나 때였잖아요.

 여보, 전 그때 그 나이가 소중한 것도 모르고

 빨리 세월만 가라, 세월만 가라고 빌고 있었다구.

 그때 난 데이트도 많이 했었어요."

 

"데이트?"

 

 나는 이미 공소시효가 지나버린 범인을 만난 수사관처럼

 맥없이 물었다.

 

"그때 데이트야 커피 먹고 영화관 가는 게 고작이었지 뭐.

 참 좋았어. 그땐 왜 그리 만난 사람들마다 말하기 싫던지.

 허지만 지금 생각하면 그땐 참 순수했었어."

 

"순수하다니?"

 

"하루는 그 친구와 다방에서 만났어요.

 어쩌다가 말 한마디 가지고 다투기 시작했어요.

 지금 생각하면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자존심이 상해

 뽀로통해 가지고 내가 이런 말을 했지요.

 

 치사하다, 얘. 다시는 너하고 만나지 않을거야.

 편지도 보내지 마라, 얘.

 아는 체도 하지마. 우린 절교야.

 그리고 다방을 나왔지요.

 다방 밖에는 비가 내리고 있었어. 안개비"

 

 잘 논다 잘 놀아, 작가 부인 10년에 수사법이 늘었구먼.

 

"그날 혼자 영화 구경하고 버스를 타고

 집에 갔지 않았겠수?

 그런데 버스 정류장에 그 사람이 서 있었어요.

 화가 잔뜩 나 있었어요.

 왜 이제 오니 하고 그가 말했어요.

 

 내가 말했지요.

 병신같이 여기서 왜 서있니.

 비도 오는데 이 바보야 하고.

 

 그가 말했어요.

 벌써 다섯 시간도 더 기다렸어.

 이제 널 봤으니 됐다. 난 가겠어.

 

 그는 버스를 타고 사라졌다우.

 당신 날 위해 다섯 시간을 기다릴 수 있겠수?

 그건 다 순수하고 순진했을 때의 이야기라구요.

 다 지난 이야기라구요."

 

 나는 아내의 얘기를 듣고 웬일인지

 아무런 약도 오르지 않았다.

 

 그래, 다시는 오지 못할 그 아름답던 청춘의

 빗장 뒤에서 서성거리고 방황하던 젊은 날의

 그림자가 내 감속에서도 일렁거리고 있었다.

 마치 겨울날 해거름의 바다처럼.

 

 "당신은 전에 사귈 때도 바래다주긴커녕

  늘 내가 당신 집에 가는 것을 지켜보는 신세였어요.

  내가 왜 천하의 사기꾼에 속아넘어갔을까.

  지겨워라.

  당신 소주 마시는 앞자리에서 수모만 받고,

  웬쑤, 당신은 웬쑤에요. 사기꾼."

 

 아내는 정말 터무니없이 내게 악담을 마구마구

 퍼부어댔다.

 

 "어쩌다 거리에서 한번 만날 수도 있을 텐데.

  거리 모퉁이에서 딱 만나면 이런 말들을 나누겠어요.

  아, 안녕하십니까.

  아이들은 잘 크나요.

  그럼요. 댁에는 별고 없으신가요?"

 

 "이 바보야."

 나는 심술궂게 소리질렀다.

 

"만나지 않은 걸 천만다행으로 알라구.

 어쩌다 만났다 해봐.

 그새낀 배가 불룩 튀어나온 비만증 환자일테니까.

 환상을 버려, 이 바보야."

 

(최인호 / 소설가)

- 가족1 "신혼일기"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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