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동성당 게시판

걸어서 하늘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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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명옥 [bs0104] 쪽지 캡슐

2001-07-26 ㅣ No.1347

최양업 신부님의 발자취를 따라서 성지순례를 하는 중.고등 학생들이 영적으로도 신부님을 따르도록 기도해주시길 부탁드립니다.   주일(29) 도착합니다.

 

땀의 순교자 최양업 신부님의 전구를 구하며 ......

 

  고국을 떠난 지 13년 만인 1849년 12월 3일 천신만고 끝에 무사히 입국하신 신부님은 용인과 진천지역(배티)에서 신자들을 찾아다니면서 사목활동을 시작하셨습니다.

 

  최양업 신부님은 12년 동안 유일한 조선인 사제로서, 조선 8도중 경기도, 충청도, 강원도, 전라도, 경상도 5개의 도에 산재해 있는 127곳의 교우촌을 순회하셨습니다.

 

 어떤 교우촌에서는 신부님께서 고해성사를 주고 미사를 집전하려 할 때에, 그 동네 사람들이 몰려 와, 온갖 욕설과 저주와 협박을 퍼붓기도 하고, 늦게까지 고래고래 소리를 질러 대다가 제 풀에 지쳐서 잠을 자러 가기도 했습니다. 신부님께서는 성사를 다 행하지도 못하고 날이 새기도 전에 그런 마을을 도망쳐 나오기도 하셨답니다.

 

  또 어느 여 교우의 집에 갔을 때의 일입니다. 그 교우는 남편도 외인이고 부모도 외인이었답니다. 그 마을 사람들이 신부님을 의심해서 신부님을 죽이려고 하였습니다. 그 상황에서 몰래 도망간다면 남아 있는 교우들이 어떻게 될까 생각하니 어찌해야할 지를 몰랐습니다. 신부님은 신자들과 모여서 하느님의 뜻에 온전히 맡기고 기도하며 밤을 지새면서 외인들의 고함소리에 개의치 않고 저들의 움직임을 살폈습니다. 그러다 마침내 신부님 일행은 신부님을 어떻게 해야 할까 두고 자기들끼리 서로 의견다툼을 하는 사이에 몰래 그 동네를 빠져 나온 일이 있었습니다.

 

  또 다른 교우촌으로 가는 길에 눈이 무척 많이 쌓여서 여러 날이 걸리기에 주막에서 하룻밤을 묵고 있었습니다. 그 주막의 주인이 신부님을 고을 관가에 고발해서 끌려갔으나, 다행히 적개심을 가지지 않은 관장이어서 신부님 일행들에게 당장 그 마을에서 떠나라고 했어요. 그런데 채 얼마를 가기도 전에 포졸들이 따라와서 큰 소리를 지르며 옷을 찢고 신발과 갓을 빼앗고 매질을 하여 상처투성이로 만든 다음 마을 밖으로 추방했습니다.   신부님은 갈 곳도 없고 한밤중의 매서운 추위에 온 몸이 꽁꽁 얼어붙었고, 심한 능욕과 고통으로 몸과 마음이 기진맥진하셨습니다. 그런데도 모자라서 조금 후에 다시 포졸들이 쫓아와서 미사짐에 함부로 손을 대려고도 했습니다. 신부님은 어려움이 따르는 중에서도 항상 하느님과 성모님의 도우심을 청하며 고난을 이겨나가셨습니다.

 

  신부님께서는 여러 교우촌을 두루 순회하는 동안에 지독한 가난과 어려움에 찌든 사람들의 비참하고 궁핍한 처지를 보고 한없이 가슴 아파하셨습니다.

 

  박해를 피해서 적게는 두어명, 많게는 50명 정도씩 이산 저산에 흩어져 사는 6,000여명에게 고해성사를 주시고 미사도 집전하셨습니다.

 

감시의 눈을 피해 날이 새기 전에 다음 장소로 옮기면서,

생명의 위협도 많이 받으셨고,

해마다 7천리가 넘게 걸어 다녔으며,

교통수단도 변변찮은 시대에 험한 산길을 걸어 다니셨습니다.

 

이같이 바쁜 전교활동 중에서도 신학생을 선발하여 신학교로 보냈고,

선교사들의 입국을 주선했으며

순교자들에 관한 증언과 자료까지 수집하는 열성을 보였다.

  

  최 신부님 혼자만도 1,000여명의 예비자를 기록함으로써 개종운동이 그 절정에 달했을 때 뜻밖에 1859년 말에 박해가 일어났다. 최 신부는 경상도의 한 공소에서 여러 달 동안 외부와 완전히 소식이 두절된 채 갇혀 지내야 하였다. 포졸들의 포위망을 빠져나갈 수 없다고 판단한 그는 선생신부들에게 고별편지를 쓰고 순교까지 각오하였다.

 

   하루에 80리 내지 100리를 걸었고 밤에는 고해성사를 주고, 날이 새기 전에 다른 공소로 떠났다. 그러면서 그는 한달 동안 나흘 밤 밖에 수면을 취하지 못하였고 같은 집에서 이틀을 잔적이 없었다고 한다. 이렇게 성사집전을 끝낸 그는 주교에게 보고차 상경하던 중

   1861년 6월 과로로 경상도 문경(聞慶)에서 장티푸스로 보름만에 사망하였다. 처음의 식중독이 겹친 과로로 합병증을 일으켜 장티푸스로 사망한 것 같다. 최 신부는 이렇게 사목활동 12년만에 기진맥진한 끝에 길에서 살다가 길에서 순직하였다.

 

  장례식은 10월 베르뇌 주교의 집전으로 선교사들이 참석한 가운데 배론 신학교에서 장엄하게 거행되었고, 신학교 산기슭에 영광스러운 부활을 기다리며 한 알의 밀알이 되어 매장되었다.

 

  무덤은 그후 박해로 마치 주인 없는 무덤처럼 버려졌던 것을 1942년에 무덤을 단장 묘비까지 마련되었으나 일제의 압박으로 세우지 못했다가 1945년 해방 후 그해 9월 27일에 원주교구 신부님과 신자들 3, 4백 명이 참석한 가운데 묘비가 세워져 오늘에 이르렀습니다.

 

  그 분의 삶에서 드러난 덕행이 바로 그리스도교 신앙의 증언이요, 본보기임을 드러내고자 시복시성 운동을 벌이고 있다. 땀의 순교자인 그가 한국교회 복음화의 길을 닦았던 선구자 적인 인물로 한국교회사에서 높이 평가받는 것은 당연한 것이다.    

 

신부님의 시복시성을 위하여 우리 모두 기도합시다.

 

함께 하시는 신부님과 모든 분들께 주님의 축복이 함께 하시길 기도드리며

                                                        성지순례 떠난 날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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