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계동성당 게시판

홍신부님 강론(8월 16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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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현경

2002-08-16 ㅣ No.4752

오늘은 마태복음에서 세례자 요한에 대한 대목을 가지고 묵상을 해 보겠습니다.

세례자 요한은 예수님의 사촌형뻘 되는 사람이지요.

카톨릭에서는 세례자 요한을 수도자의 원조라고 보는데,

전해져내려오는 이야기에 따르면 요한은 에쎄느파 사람이었을 가능성이 있다고 합니다.

그당시 이스라엘을 이끌던 지도자들은

사두가이파와 바리사이파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들과는 달리 사막으로 들어가서 수도 생활을 하던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숨어서 기도생활하던 사람들이 만든 공동체가 에쎄느공동체입니다.

이 에쎄느공동체는 정결례를 중요시했습니다.

자기몸을 늘 깨끗이 해야한다, 그래야지 메시아가 자기들을 찾아올것이다...

라고 믿고 수도생활을 하며 살아갔습니다.

요한이 에쎄느파 출신이었을 가능성이 있다고 얘기를 하는데,

그것은 왜 그런가 하니

성경에 보면 요한이 메뚜기와 들꿀을 먹고 살았다는 기록이 있지요.

그것은 에쎄느파 사람들이 수도 생활할때 살던 방식이었습니다.

 

요한으로부터 비롯해서 수도자들을 생각하면 제일 먼저 신자분들이 머리속에 떠올리는 단어가 ’가난’입니다.

수도자들은 가난해야돼. 특히 외적인 가난을 수도자들은 꼭 지켜야돼--

라고 생각들을 하시지요.

그런데 사실 그리스도의 제자가 되기 위해서는 가난의 영성이 필수적입니다.

수도자들뿐 아니라 신자분들도 가난해야 한다고 얘기를 합니다.

 

교회에서 얘기하는 가난에는 두가지가 있습니다.

하나는 외적가난이고, 또 하나는 내적가난입니다.

’외적가난’이란 무엇인가.

이것은 ’아무것도 갖지 말라’는게 아니라

’지나치게 많이 갖지 말라’는 것입니다.

필요한것 이상을 갖지 말라는 것이지요.

그럼 왜 지나치게 갖지 말라, 필요이상으로 갖지 말라고 하는가.

설명을 해볼까요.

자매님들이 보통 그런 말씀을 많이 하십니다.

결혼해서 처음에는 살림늘려가는 재미로 산다고.

집 늘려가고,살림 늘리고, 통장의 돈 늘어가는 재미로 산다고요.

그런데 그렇게 해서 집 늘리고 살림 늘리고 하면 기쁘지요.

하지만 힘도 듭니다. 뭐가 힘이 듭니까?

그걸 간수하는데 힘이 듭니다.

집이 좁을땐 금방 끝나던 청소가 집이 넓어지면 한참을 해도 더 해야 합니다.

짐이 많아도 마찬가지입니다.

짐이 많고 그 짐이 좋은 물건들일수록 아이들 장난도 못 치게 하고

친구들도 놀러오지 못하게 합니다.

물건 망가질까봐.

하지만 짐이 싸구려들일때는 애들이 망가뜨려도 신경안쓰죠.

외적가난이란 이런 것입니다.

내가 가진것이 많고

내가 신경을 써야될것이 많으면 기도하는 시간이 줄어듭니다.

내가 가진것이 많으면 그걸 지키는데 힘을 다써서 기도를 못합니다.

그런데 교회에서는 수도자, 성직자에게는 가난을 강조하지만

신자들에게는 꼭 그러셔야 된다고 얘기하지는 않습니다.

왜냐하면 지금 우리나라 상황에서는 내가 가진게 없으면 무시를 당합니다.

우리나라 같은 사회에서는 무시 안 당하고 살려면 어느정도는 갖추고 있어야 합니다.

그건 어쩔수가 없는 일이지요.

 

그러나 신자들이건 수도자이건 성직자건 꼭 지켜야하는 가난이 있습니다.

그것이 내적가난입니다.

내적가난이라고 하면 많은 사람들이

’마음을 비우는것’이라고 생각을 합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사람의 마음은 비워지지 않습니다. 비울수도 없습니다.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모든 욕심을 다 내려놓고 아무 생각없이

그냥 정말 무심한 상태에 있었던 적이 몇번이나 있으셨나요?

늘 내 머리속에, 마음속에는 뭔가가 차있습니다.

뭔가가 움직이고 있습니다.

"나는 마음을 다 비운것 같아요. 나는 마음이 그렇게 편할수가 없어요"

그때는 하느님이 내안에 들어와 계실때입니다.

하느님이 나를 채우고 계실때입니다.

"속상해요---" 하는것은 남편이나 자식이 내 마음에 들어와있을 때입니다.

비운적이 없습니다.

우리가 살아있는 동안에는 무엇인가가 항상 내 마음안에 들어와있습니다.

그러므로 내적인 가난이란

마음을 비우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으로 나를 채우는 것입니다.

늘 하느님에 대한 생각으로 내 머리와 가슴을 채우는 것,

그게 바로 내적가난입니다.

하느님이 아닌 다른 것으로 채웠을때는 집착이 일어나지만

하느님으로 채웠을때는 마음이 자유로와집니다.

 

가끔씩 그런 분들이 계십니다.

내적 가난은

한점의 죄도 짓지 않은 그런 상태다--

분심하나 들지 않는 그런 상태다--    라고 가르치는 분들이 계십니다.  

그건 강박입니다.

내적가난이란

내가 죄를 지은 상태든 죄를 짓지 않은 상태든

늘 하느님과 대화하고 늘 하느님께 관심갖는 상태

그게 내적가난입니다.

내가 완전히 깨끗한 상태에 있는 것이 아니라

더러울때도 하느님께 가있고 깨끗할 때도 하느님께 가 있고 그게 내적가난입니다.

그런데 신자분들이 알고 있는 내적 가난은 ’늘 깨끗해야돼!’ 라고

생각하는 경우가 참 많습니다.

영성체할때 보면 미사에는 왔는데 영성체는 못하는 분들이 계십니다.

내가 죄를 많이 지어서 영성체 못하겠다고.

하지만 만약에 하느님이 정말 개끗한 사람한테만 당신 성체를 주겠다고 생각하셨다면 막달레나 마리아나 마태오같은 세리나 이런 사람들은

아예 가까이 하지도 않으셨을 것입니다.

내가 죄를 지었든 짓지 않았든간에 하느님께 가까이가는것

그게 내적가난함입니다.

 

그렇다면, 가난의 영성을 갖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내가 누군가를 정말 좋아한다면 내가 가진것을 버리게 됩니다.

내가 누군가를 정말 좋아하면 부모를 버리고 그 사람을 따라갑니다.

내가 하느님을 사랑하면

하느님께 기도하는 시간을 갖기 위해서 다른 것들을 버립니다.

그게 가난함입니다.

그런데 중요하게 짚고 넘어가야 할것이 있습니다.

사람의 마음은 차례대로 채워집니다.

처음에는 입고,먹고,자고 이것으로 채워지느 밑바탕이 있습니다.

그 다음에는 사람들로부터 인정받는 욕구가 채워집니다.

거기까지 채워져야지 모든것을 다 버리고 하느님께 갈수가 있습니다.

두가지가 안 채워지면 못 올라갑니다.

계속 그자리에서 맴돕니다.

내가 어려서 가난하게 살아서 못먹고 못 입었다면

어른이 되서는 맛있는 것 실컷 먹고 예쁜 옷 입고 살아야합니다.

그래야 마음이 채워집니다. 상처가 치유됩니다.

그렇게 실컷 채우다보면 어느날인가

아, 이런게 중요한게 아니야--- 하는 생각이 올라옵니다.

이제 이런데 그만 신경써야지-- 하는 때가 옵니다.

부모님께 사랑받지 못하고 늘 야단만 맞고 자란 사람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이런 분들은 인정받고 싶은 욕구와 열등감이 매우 강합니다.

그래서 주위 사람들한테 칭찬을 많이 받아야합니다.

예쁜짓 하고 칭찬받고 이런 삶을 살아가다보면

어느날인가

남들이 나한테 칭찬해주는게 이제 듣기가 느끼해-- 그런 느낌이 들게 되지요.

어느때가 되면 다 거기서 떠납니다.

그런데 이런 분들이 칭찬은 받지 않고

나는 왜 이렇게 기도도 안되고 뭐도 안되고 이럴까-- 하면서 신앙생활을 하면

마음에 병이 생깁니다. 마음이 치유되지를 않습니다.

자신안의 그런 욕구를 감추려고 하면 밖으로 다른 행동을 하게 됩니다.

나는 남들한테 신경안써~ 그러면서도 늘 남들 한마디에 마음이 막 흔들린다든가.. 그런 식으로 말이지요.

자기안의 상처가 치유가 안되서 그런 것입니다.

 

내안의 상처가 얼마나 많은가 하는것은 어린시절을 보면 압니다.

두가지만 보십시오.

하나는, 내가 어렸을때 잘먹고 잘 자랐는가

두번째는, 어렸을때 부모님한테 사랑을 많이 받았는가

두개중에 하나라도 부족하다면 지금이라도 자꾸 채워넣어야합니다.

그 두가지가 다 채워져야지 가난한 삶을 살수가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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