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교동성당 게시판

[푼글]백수 원단....

인쇄

정용승 [forcedeux] 쪽지 캡슐

1999-09-16 ㅣ No.372

성장할 가능성이 있는 사람을 보라

 

 

 

 어느 날 비좁은 한 작은 식당에 갔다. 옆자리에 젊은 여자둘이 커다란 목소리로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아마 대학생인 듯했다. 그들의 철없는(?) 대화는 듣지 않으려고 해도 사방으로 다 울려퍼지고 있었다.

 

 "얘, 너 누구누구 소식들었니?"

 

 한 여학생이 말했다.

 

 "글세, 걔가 요즘 사귀는 애가 백수 원단이라지 뭐니?"

 

 나는 문득 <백수 원단>이라니, 대체 무슨 뜻일까 의아했다. 그러다가 혼자 피식 웃고 말았다. 아마도 백수치고는 가공 안된 옷감 원단처럼 아예 철저한 백수라는 뜻인 모양이었다. 나같은 구세대가 따라가기에는 벅찬 어휘(?)인 셈이었다.

 

 "어머머, 미쳤구나. 어쩔 셈이래?"

 

 다른 여학생이 호들갑을 떨며 그 말을 받았다.

 

 "잘 모르지만 결혼 말까지 꺼냈다가 즈이 엄마한테 엄청 깨졌다나봐."

 

 "어쩜! 졸업도 안했는데 벌써 결혼 얘길 한다구? 게다가 백수면 지가 먹여살린대?"

 

 "한번 백수라고 계속 백수란 법은 없다는 거겠지."

 

 "아이구, 오죽하겠다. 그리고 요즘 한번 말뚝 박으면 그걸로 끝인거 몰라. 한번 백수면 영원한 백수가 되기 십상이야. 혹시 인물만 본거 아니래니?"

 

 "뭐, 꽤 잘 빠지긴 했다더라. 정우성 닮았대."

 

 그 말에 갑자기 앞자리 여학생이 자지러졌다.

 

 "말도 안돼. 대체 어디다 갖다붙이는 거야. 정우성 좋아하네."

 

 말투나 표정으로 보아 정우성의 열렬한 팬인 듯 여학생은 계속 광분했다.

 

 "너무 그러지 마라. 정우성도 뭐 처음부터 성공했냐? 누구나 무명시절이라는 게 있는 거 아니니? 그 남자애한테도 싹이 보이나 보지 뭐. 그건 그렇고 걔가 거창한 말 했더라."

 

 "무슨 말?"

 

 "응, 즈이 엄마가 난리치니까 뭐 성장한 사람보다 성장할 가능성이 있는 사람을 봐야 한댔다나 어쨌다나. 그말은 멋있지 않니?"

 

 "으이구, 웃겨!"

 

 하지만 나는 하나도 우습지 않았다. 누구인지는 몰라도 <백수 원단>을 남자친구로 둔 여학생이 기특하게 여겨졌다.

 

 두 여학생은 계속해서 자기는 절대 배경이고 인물이고 돈이고 빠지는 남자는 딱 질색이라는 둥, 성장할 가능성만 보고 훗날을 도모하는 짓 따위는 하지 않을 거라는 둥 하며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들의 이야기를 들으며 나는 씁슬한 느낌을 떨쳐버리기 어려웠다. 요즘 사상 초유의 취업난으로 올해 졸업하는 학생들 태반이 곧바로 실업자로 등록될 형편이라지 않는가. 그런데 저 여학생들을 보면 그 친구들 장가가기도 골치 아프게 생겼지 않은가 말이다.

 

 안락함을 추구하는 것은 인간의 본성이다. 남녀관계나 인간관계에서도 마찬가지이다. 기왕이면 모든 것을 다 갖추고 있어서 불편함을 주지 않는 상대가 좋다. 그것이 인격이든 배경이든 경제적 능력이든 사회적 지위든 이미 어느 정도 자기 위치를 확보하고 있는 상대를 원하는 것을 나무랄 수만은 없다. 그러나 과연 우리 주변에 그런 사람이 얼마나 될까? 우선 나부터 그 범주에 들어가지 못하는데 너무 지나친 과욕이 아닌가.

 

 그래서 차선책이 필요하다. 고민하고 갈등하며 한쪽은 설익었지만 다른 한쪽은 그런대로 잘 익은 것처럼 보이는 상대를 선택하는 것이다. 설익은 쪽은 아예 질끈 눈감고 안 본 것으로치고. 그러다가 시간이 흘러 감은 눈이 떠지면 마치 전혀 모르고 있었다는 듯이 속았느니 뭐니 하며 법석을 떤다. 교묘한 자기 기만인 셈이다.

 

 그들도 성장할 가능성이 있는 사람에게 도박을 거는 것도 뭐 나쁘지는 않다고 생각한다. 적어도 성공하기까지 거쳐야 할 힘든 과정을 잘 견뎌낼 수 있다면 말이다. 그렇긴 하지만 자기들은 굳이 그런 괜한 고생을 사서 할 생각은 없는 것이다. 편한 포장도로 놔두고 애써 비포장도로로 가는 건 바보들이나 하는 짓이다.

 

 하지만 과연 그게 전부일까? 성장해가면서 조금씩 얻게 되는 것에는 무엇에나 성취의 기쁨과 자랑이 있다. 그것이 인생에서 얼마나 값지고 감격스러운지 다 차려진 밥상 앞에 앉은 사람은 결코 알수 없다. 그런데 고생하고 노력해서 얻는 것이 싫다고 모든 것을 다 갖춘 상대를 바란다면 너무 무미건조하지 않은가. 일종의 자기도피이고 정신적 게으름이라고도 할 수 있다.

 

 모르긴 해도 앞서 대화에 등장한, 문제의 백수 원단을 남자친구로 둔 여학생은 앞으로 당당하고 멋지게 고난을 헤쳐나가리라 믿는다. 그리고 최소한 그러한 노력을 통해 친구들이 맛보지 못하는 성취와 자랑을 자기것으로 만들어나갈 것이다. 그것만으로도 <파이팅!>을 외쳐주고 싶다.

 

 

 

 

우리에게는 미래가 있겠지요~~~ ^^*   



27 0

추천 반대(0)

 

페이스북 트위터 핀터레스트 구글플러스

Comments
Total0
※ 500자 이내로 작성 가능합니다. (0/500)

  • ※ 로그인 후 등록 가능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