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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 Fantas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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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성민 [imee] 쪽지 캡슐

2004-09-07 ㅣ No.5152

 

 


MRI 촬영.

내 머리를 단층 촬영한 필름.

무 한 개를 종이 장처럼 썰어 놓은 것 같은 수십 개의 단면도.

필름을 살피던 판독 의사의 첫마디.

“몇 세십니까?”

“예순 여덟입니다.”

“뇌가 너무 많이 줄어들었어요. 뇌세포가 너무 많이 죽었다는 뜻입니다.”

순두부 같은 뇌가 두골 안에 꽉 차 있어야하는데 너무 쪼그라 붙었다는 말이다.

마치 묵은 호두알을 깨 보면 내용물이 먹을 수 없을 정도로 말라붙어 오그라든 모양새 그대로다.

작아진 뇌와 두골 사이엔 맹물로 차 있다.



아내가 고추를 사야겠으니 안동교구 목성동 주교좌성당 고추사업부 전화번호를 찾아 달란다.

컴을 뒤져서 메모를 해 주었는데 전화를 계속 안받는단다.

혹시나 해서 다시 한번 컴을 열어 봤더니 이게 웬일일 가.

지역번호와 국번호는 맞는데 나머지 번호가 영판 틀리다.

어떻게 해서 그 엉뚱한 번호를 메모했는지 아무리 생각을 해도 오리무중이다.

이런 일들이 비일비재다.



식구의 핸드폰 번호를 하나도 제대로 외우지 못한다.

어제는 A/S센터에 갔다가 연락 가능한 전화전호를 대라는데 내 핸드폰 번호가 떠오르질 않아서 한참을 머뭇거렸다.

도무지 입력이 안 된다.

자식들이 병원에 가서 치매 진찰을 받아 보자고도 한다.

기가 찰 일이다.



물론 독서도 포기한지가 벌써 수년이다. 신문이나 책을 한 5분만 들여다  보아도 그 날은 종일 눈이 침침해져서 시력이 가물가물해 지기 때문이다.

돋보기안경이 맞지 않아서가 아니다.

안과엘 가봤지만 별 수 없다고 그냥 지내라고 한다.

아 얼마나 다행스러운 일인가!

설령 지금 내가 아리스토텔레스를 읽으면 뭘 하고 토머스 아퀴너스의 신학대전을 읽으면 뭘 하나.

골통 가분수가 되는 일뿐이다.

지금 내게 필요한 것은 성체 앞에 단 몇 분간이라도 머무는 일이다.



내게도 청춘이 있었다.

풋풋한 시절, 눈부시게 아름다운 추억들.

이제 늙어 동안이었던 얼굴은 고주박 그루터기 같이 되었고

정신과 육신은 갯벌에 누워있는 폐선 같다.

죽음으로 닥아 선 것이다.

조물주로부터 받은 생명을 하나씩 서서히 되돌려드리는 것이다.

빚을 갚듯이 기쁘고 홀가분한 마음으로 돌려드리는 것이다.

머리털도 치아도 하나씩 되돌려 드리는 것이다.

그리고 기억까지도............



늙는다는 것이 영육 간에 완숙의 길이 아니고 쇠잔의 끝일 때 그 일생은 허무한 것이 되고 말 것이다.

인생은 길목에 차례로 서 있는 이정표를 지나는 일이다.

하루를 마감하는 황혼이 그지없이 아름답듯이

나의 여생도 곱게 노을 졌다가 어둠 속으로 사라지리라.

그러나 그 조차도 욕심을 갖는 것은 아니다.



生老病死가 모두 神秘다.

苦海 滄波도 神秘다.

이를 깨치는 것은 恩寵이다.

혜능(慧能)의 敎外別傳 不立文字 直指人心 見性成佛도 至福直觀과 상통한다.

이 모두가 恩寵地位의 攝理다.

故로 우리는 日久月深 주님께 달아드는 일뿐이다.



나는 생각했다.

이 가을에는 그림을 다시 그리자고.

30년간 쳐 박아 두었던 그림 도구를 꺼내 손질을 했다.

물감 튜브는 모두 굳어 붙었고 나이프는 녹이 쓸었지만 손때 묻은 살구나무 팔레트는 옛날 그대로다. 쓰지 않은 새 붓도 여남은 자루나 있다.

그래. 이 가을에는 캔버스를 둘러메고 강으로 가야겠다.

강 언덕에 앉아 헬만헷세의 강을 그려야겠다.

그리고 무명 순교자의 성지를 찾아야겠다.

그 곳에 가면 사연이 있는 낙엽이 있을 것이다.

예감이 좋다.

낙엽과의 대화가 전에 없이 친숙해 질것만 같은 기분이 든다.

산자수명(山紫水明)의 빛이 더 맑고 더 아련해 질것만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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