응암동성당 게시판

권위있는 연중제4주일 강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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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훈 [michaelhun] 쪽지 캡슐

2000-01-29 ㅣ No.426

연중 제4주일(나해, 2000. 1. 30)

제1독서 : 신명 18, 15 ∼ 20

제2독서 : 1고린 7, 32 ∼ 35

복   음 : 마르 1, 21b ∼ 28

 

  사랑하는 형제, 자매 여러분!  한 주간 동안 안녕하셨습니까?  여러분은 지난 한 주간을 어떻게 보내셨습니까?  아무런 생각 없이 무의미하게 시간만 보내신 것은 아니겠지요?  저는 생활하면서 가끔은 저 자신이 아무 생각 없이 그저 습관처럼 하루하루의 시간을 보낸다는 생각을 합니다.  많은 이들을 만나 이야기를 하면서 기쁨도 찾고 배신감도 느끼고 제 자신이 하고 있는 일을 돌아보게 됩니다.  가끔은 결론이 잘 내려 지지 않을 때는 정말 답답하게 한 주간을 보내게 됩니다.  여러분도 가끔은 이런 경우가 있지 않을까 생각됩니다.

  "어떤 수도자가 사막 한 가운데에 가부좌를 틀고 앉아 있는데 왕이 수행원들과 함께 그 곁을 지나게 되었습니다.  수도자는 마침 깊은 명상에 빠져 있었던 터라 왕의 행렬에도 눈길 한번 돌리지 않았습니다.  왕은 그런 수도자의 태도에 압도되는 한편 속으로는 적잖이 화가 났습니다.  '수행을 한다고는 하나, 저자는 참으로 거만스럽구나!'  왕의 그 말 한마디에 수행원 중 하나가 수도자에게 달려갔습니다.  '이보시오!  지금 이곳으로 대왕께서 지나고 계시지 않소.  얼른 일어나 예의를 갖추시오!'  그러나 수도자는 끄떡도 않은 채 '예의?  그런 건 그에게 덕을 보는 사람한테나 가서 말하시오!'라고 말을 하는 것이었습니다.  수행원이 '아니, 그게 무슨 소리요?'라고 물으니, 수도자가 '왕이라는 게 대체 뭐요?  나라 안 백성을 보호하라고 있는 것이지 고작 백성의 봉사나 받으라고 만들어 놓은 줄 아시오?  그렇다면 그런 건 지나가는 개를 잡아다가 시키는 게 낫지!'라고 말했다고 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율법학자들과는 달리 권위 있게 가르쳤고, 그 가르침은 사람들에게 놀라운 것이었습니다.  율법학자들은 성서에 대해서 많은 지식과 훌륭한 견해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백성들은 율법학자들의 말이라면 무조건 믿고 따랐습니다.  그러나 율법학자들에게는 율법 자체가 절대적이었기에 사람보다 율법을 더 높은 위치에 두었고, 때로는 율법이 사람들을 억압하는 도구가 되기도 하였습니다.  그래서 율법학자들의 권위가 약하게 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율법을 머리로만 이해하고 말만 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을 실천하는 행동이 따라야 함을 가르치십니다.  이러한 예수님의 가르침은 정신적 지도자들로 자처하던 율법학자들을 능가하는 대단히 권위 있는 가르침이었고, 더욱이 악령들마저도 그 권위 앞에 굴복하고 하느님의 메시아로 고백할 만큼 힘있는 가르침이었습니다.  또 악령을 몰아냄으로써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의 전권을 부여받은 분임을 입증해 보이십니다.

  우리는 누구나 다른 이들로부터 권위를 인정받고 싶어합니다.  진정으로 우리에게 있어서 권위라는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권위라는 단어를 사전에서 보면 "일정한 부문에서 사회적으로 인정받고 일정한 영향을 끼칠 수 있는 능력이나 위신"이라고 합니다.  권위는 손가락 하나 까닥하지 않고 어깨에 힘을 주면서 말로만 명령을 내리는데서 나오는 것은 아닙니다.  그렇다고 많이 배우고 알고 있다고 해서 나오는 것도 아니며, 명예가 있고 나이가 많은 데서 나오는 것도 아니며, 더욱이 돈이 많은 것에서 나오는 것도 아닙니다.  권위는 억지로 다른 이들에게 나의 권위를 인정해달라고 요구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다른 이들이 자신들의 삶에 영향을 받았다고 느낄 때 나의 권위를 인정해 주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권위가 강요하여 얻을 수 있는 것이라면 강론 앞에서 이야기 한 내용처럼 지나가는 개를 잡아다가 시켜도 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솔선 수범하는 모습에서 권위는 나옵니다.  사제는 사제로써, 스승은 스승으로써, 상사는 상사로써, 위정자들은 위정자로써, 그리고 부모님들은 부모로써 존경하는 모습을 가지고 말이 먼저가 아니라 실천하는 삶을 살아갈 때 다른 이들이 권위 있게 받아줄 것입니다.

  아무리 좋은 일이라도 하지 않고, 아무리 소리를 쳐도 행동이 함께 하지 않는 다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다.  우리는 너무도 습관적으로 성당 일이든 좋은 일이든 하려고 합니다.  왜냐하면 그것이 우리에게 편하게 생각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습관적인 그 행동 속에서 하느님의 진정한 사랑이 없어지고 그 일을 하는 우리 자신만이 있을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해 하느님께 신뢰하기보다는 우리 자신을 더 신뢰하게 됩니다.

  새롭게 주워지는 한 주간의 시간 속에서 우리는 우리 자신보다는 하느님의 사랑을 나누는 삶이 되도록 노력해 보지 않으시겠습니까?  단순히 외치는 메아리가 아니라 삶이 함께 하는 행동이 함께 하는 시간이 되어야겠습니다.  함께 기도하며 말보다는 행동으로 살아가는 시간이 되도록 노력하는 한 주간이 되어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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