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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환자분의 가르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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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철균 [zoster] 쪽지 캡슐

2008-02-16 ㅣ No.6363

아침에 출근하면 하루 일과를 시작하기전 진료실 책상에 앉아 
시작기도를 합니다.
"주님의 기도"로 시작할 때도 있고, 자유기도로 할 때도 있고, 그날그날 특별한
청원의 기도로 할 때도 있습니다. 
본디 남에게 너그럽지 못한 성격에다가 배려심이 부족하고 
불쑥불쑥 잘 흥분하는 성격이라서 
늘 기도중에 "저의 화가 드러나지 않도록 하여주시고, 온유한 사람이 되게 ...."
이런 대목이 자주 들어갑니다.
 
토요일은 근무시간이 짧은 관계로 늘 바쁘게 오전진료를 합니다. 
밤새 아픔을 참고 오신 분도 있고,
남자들 같은 경우엔 큰병이 아닐까 우려되어 참다참다 병원을 찾아오신 분도 있고,
때론 심각한 질병을 가지고 오신 분들도 가끔 계시기 때문에, 
늘 바쁘고 긴장된 시간의 연속입니다.
아픈 사람을 상대하는 직업이다 보니 아픈 환자도 환자려니와 같이 오신 보호자분들도
신경이 곤두서 있는 경우를 많이 봅니다. 
 
오늘은 이런 경우가 있었습니다.
폐렴과 만성비염이 있는 아이를 데리고 몇차례 온 젊은 엄마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 젊은 엄마는 이상하게도 그동안 진료실만 들어오면 잔뜩 의심의 눈초리로 팔짱을 끼고 내려다 보거나
주머니에 손을 넣고 다소 불손한 태도로 툭툭 한마디씩 던집니다.
"왜 자꾸 기침을 계속하는 거죠?"  " 왜 이렇게 안낫죠?"  " 이렇게 오래 약을 먹어도 되는 거예요?"
진찰을 해보면 며칠전보다 많이 호전이 된 상태인데도 이런 얘기를 들으면 신경이 쓰여서
몇번씩 다시 청진을 해봅니다.
"많이 좋아졌네요. 곧 좋아질 것 같습니다. 너무 걱정하시지 마세요." 이렇게 안심을 해드려도
젊은 엄마는 불만족스런 얼굴로 쌩하니 진료실을 빠져나가고
접수대에서도 직원들한테 퉁명스럽게 말하곤 사라집니다.
저도 황당하기도 하고 화가 치밀기도 하지만 곧바로 다른 환자들이 많이 밀려있어서
기분을 풀 시간이 없이 다른 환자들을 봅니다.
한참 지나고 나서도 불편한 얼굴을 하고 있는 저를 보면서 직원들이 얘기합니다.
"원장님. 기분 안 좋으시죠? 아까 접수할 때 부터 그랬어요. 원래 그런사람인가봐요."
어느새 그 환자의 챠트에는 별표가 몇개 그려져 있습니다. 직원들이 접수하면서 성격이 안좋았던 
분들의 챠트에는 표시를 해 놓습니다. 직원들도 나름대로 다음에 조심하기 위해서라고 합니다. 
 
진료가 다 끝나고 직원들 먼저 퇴근 시키고 나서
진료실 책상에 앉아 "어느 주교의 행복수첩" 이라는 최기산 주교님의 책을 보다가 
"아차..."하는 생각이 듭니다.
"혹시 주님 앞에 그동안 내가 그 젊은 엄마와 같은 모습은 아니었는지..." 하는 생각이 퍼뜩
스치고 지나갑니다.
그동안 제가 성당과 주님을 찾으면서도 잔뜩 의심의 눈초리를 하고 있었던 것은 아니었는지,..
"주님 주님..."  부르면서도 응답이 없다고 불만족스런 표정은 아니었는지...
이미 그 아이가 병이 많이 낫고 있는 것 처럼 주님께서도 이미 저에게 맞는 응답을 주셨는데도...
 
언젠가 신부님으로 부터
누군가 나에게 상처를 주거나
나의 마음을 불편하게 할 때는
그 사람을 원망하거나 불쾌하게 생각하기 보다는
주님께서 그 사람을 통하여 무언가 깨달음을 주시려는 것이 아니었는지
살펴보아야 한다는 말씀을 들은 기억이 납니다.
    
이렇게 생각을 하고 나니까 그 젊은 엄마가 고마워집니다.
오늘도, 평범해 보이는 이 순간에도
주님께서 저의 신앙생활을 되돌아 보게끔 가르침을 주심에 감사드리게 됩니다.
그 젊은엄마에 대한 저의 불편했던 마음이 치유가 되어
다음 주에는 좀 더 따뜻한 마음으로
주님의 가르침을 대하는 마음으로
그 젊은 엄마를 웃는 얼굴로 맞이해 볼 작정입니다.
 
(2008-02-16 토요일 오후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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